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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불이의 공전보(共戰譜)
소설《신·인간혁명》과 함께 걷는다
제19회 홋카이도(北海道) ①
삼대성(三代城) 홋카이도.
이 북녘의 천지에는 창가(創價)의 원류가 빛난다.
선사(先師) 마키구치 쓰네사부로(牧口常三郞) 선생님과
은사(恩師) 도다 조세(戶田城聖) 선생님을 길러낸 요람의 대지.
젊은 이케다(池田) 선생님이
홍교 확대와 정의로운 인권투쟁의 역사를 새긴 무대.
은사에게 세계광포를 서원한 드넓은 바다.
그렇기에 광선유포는 반드시 홋카이도에서부터!
이러한 기개가 벗의 마음에 불타고 있다.
애제자는 아쓰타에서 서원했다
세계광포의 길을 열겠다고
은사의 고향에서
1954년 8월 10일, 이케다 다이사쿠(池田大作) 선생님은 은사 도다 조세이 선생님과 함께 하계지방지도를 위해 홋카이도를 처음 방문했다.
홋카이도에 머무는 동안 창가의 사제(師弟)는 도다 선생님의 고향인 아쓰타무라(지금의 이시카리시 아쓰타구)로 발걸음을 옮겼다.
소설 《인간혁명》 제12권 ‘양풍’에는 아쓰타의 바닷가에서 도다 선생님이 야마모토 신이치에게 세계광포를 의탁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신이치, 나는 일본 광선유포의 반석 같은 초석을 만들겠다. 자네는 세계광선유포의 길을 열어라. 구상만큼은 내가 만들어두겠다. 자네가 그 구상을 모두 실현하게.’
신이치는 유언을 듣는 심정으로 그 말을 가슴에 깊이 새기며 ‘예’라고 대답했다.
도다는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바다 저편으로 눈길을 돌렸다.
‘이 바다 저편에는 대륙이 펼쳐져 있다. 세계는 넓다. 거기에는 고뇌에 허덕이는 민중이 있다. 아직 전화(戰火)에 떠는 아이들도 있다. 동양에, 그리고 세계에 묘법의 불을 밝혀야 한다. 나를 대신해...’
도다의 말이 신이치의 가슴에 강렬하게 와 닿았다.”
“그날 밤, 야마모토 신이치의 뇌리에는 도다가 바닷가에서 말한 한마디 한마디가 물결처럼 밀려왔다가 밀려갔다. 자신에게 보내는, 너무나도 큰 도다의 기대를 생각하니 중압감마저 느꼈다.
하지만 감동으로 가슴이 크게 뛰고, 머리가 맑아짐을 느꼈다. 이불 위에 누워 어두운 천장을 바라보면서, 아쓰타에 사제가 함께 온 이 여행의 의미를 홀로 음미했다.
신이치는 아침 일찍 눈을 떴다. 시계를 보니 아직 오전 5시가 지났을 뿐이었다. 그는 일어나 옷을 입고 살짝 밖으로 나갔다. 한여름이라고는 해도 아쓰타의 아침은 양풍(凉風)이 상쾌했다. 바다는 아침 안개 속에 잠겨 희미하게 보였다.”
“선생님은, 아니 우리 아버지는 내게 광포의 여로를 ‘가라.’고 말씀하셨다. 좋다, 가자. ‘부자의 노래’를 짓자.
신이치는 바다 저편을 바라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렸다. 바다는 아침 햇살에 빛났지만, 수평선은 안개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바다 저편에 대륙이 펼쳐져 있고 동양, 중동, 유럽으로 이어져 있다. 그리고 그 민중이 묘법을 구하며 애타게 기다리고 있으리라 생각하니 신이치는 마음이 설레었다.
그는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수많은 생각을 세계를 향해 발산하듯 바다를 향해 외쳤다. ‘선생님! 동양광포는 신이치가 하겠습니다. 세계광포의 황금의 다리를 반드시 놓겠습니다!’
그 소리는 파도소리에 섞여 북해의 하늘에 춤추었다. 그 한마디는 그야말로 그가 생애에 걸쳐 세계광포의 여로를 서원한 선언이었다.”
이 준엄한 장면은 소설 《신·인간혁명》에도 자주 등장한다.(제2권 연마, 제15권 ‘소생’, 제18권 ‘사은’ 등)
세계 광선유포에 대한 서원을 확고부동하게 한 천지, 불이(不二)의 제자로서 세계평화를 향해 사자후(師子吼)한 천지가 바로 홋카이도다.
삼대 투쟁
이케다 선생님이 ‘홋카이도의 삼대(三大) 투쟁’이라고 부르는 사제개가(師弟凱歌)와 민중승리의 역사가 있다.
학회야말로 니치렌(日蓮) 대성인의 정통을 계승했다는 점을 만천하에 알린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법론인 ‘오타루문답’ (1955년).
열흘간 388세대라는 일본 제일의 홍교를 달성하고 은사의 원업을 성취하는 ‘기폭제’가 된 ‘삿포로 여름투쟁’ (1955년).
그리고 횡포한 권력에게서 다기진 서민을 끝까지 지킨 인권투쟁 ‘유바리탄노사건’ (1957년).
모두 젊은 이케다 선생님이 진두지휘에 나서 은사를 대신해 홋카이도 동지를 지키고 격려해 승리를 거두었다. 홋카이도뿐 아니라 학회 전체에서도 중요한 분수령이 된 광포사다.
이케다 선생님은 소설 《신·인간혁명》의 곳곳에 이 삼대투쟁에 관해 썼다. 스승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한다. 선두에 서서 동지를 지킨다. 승리하여 스승께 보고한다.
홋카이도 광포사에는 이러한 정신이 응축되어 있다. 그렇기에 홋카이도에서 사제가 펼친 승리의 드라마를 배우는 일은 우리 지역에 승리를 새기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제28권 ‘대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홋카이도는 마키구치 쓰네사부로 초대 회장과 도다 조세이 제2대 회장이 자란 곳이고, 둥지에서 나와 비상(飛上)한 무대이다. 또 제3대 회장인 신이치가 청년시절에 오타루, 삿포로, 유바리에서 승리의 깃발을 우뚝 세운 광포개척의 신천지이다.”
“홋카이도는 영원히 스승의 혼을 이어받는 사제공전(師弟共戰)의 대지가 되어야 한다.”
이 사제공전의 대지에 빛나는 정신을 소설에서 배우고자 한다.
평화여정의 출발을 보고
제2권 연마에서는 1960년 8월 27일, 신이치가 6년 만에 아쓰타무라를 방문한다.
도다 선생님의 친척이 경영하는 도다여관에 가니 신이치의 방문을 미리 알고 동지가 기다리고 있었다. 신이치는 차에서 내려 인사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도다 선생님의 제자로서 제3대 회장이 된 야마모토입니다.
오늘은 선생님의 고향에 회장 취임을 보고 드리기 위해 왔습니다.”
그리고 도다여관에 들어가 점심을 다 함께 먹으면서 환담을 나누었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현지 벗들과 해안을 산책하며 은사를 그리워했다.
신이치는 만감의 심정으로 동지에게 말했다.
“도다 선생님의 고향인 아쓰타는 내게 제2의 고향입니다. 또 내가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그 출발의 무대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 모두 힘을 합쳐 나를 대신하여 이곳에 행복의 화원을 만들어 주시기 바랍니다.”
신이치는 이 방문의 약 한달 뒤에 세계평화의 여정을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은사에게서 세계광포를 의탁 받은 아쓰타의 땅에서 그 보고를 하고 싶었다.
모두의 성장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 리더다
묘법의 잔다르크
소설에는 수많은 ‘서민의 영웅’이 등장한다. 그중에 청춘을 광포에 모두 바치고 떠난 다기진 여성이 있다. 제4권 ‘청엽’, 제5권 ‘사자’, 제6권 ‘가속’, 제18권 ‘사은’ 등에서 언급한 홋카이도 초대 여자부장 아라시야마 하루코다.
아라시야마는 입회한 뒤 활동에 힘쓰면서 여자부 리더로 활약했다. ‘오타루문답’ 당시 처음 신이치를 만난 뒤, 순수한 신심으로 계속 지도를 구했다.
그리고 신이치의 격려를 올바르게 받아들여 거듭 확대와 승리의 실증을 나타냈다.
아라시야마는 후배를 아끼고 인재를 육성하며 동지를 소중히 여겼다. 신이치가 홋카이도를 방문할 때마다 계속 새로운 인재를 소개했다.
“모두의 성장을 위해 자기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아라시야마는 항상 생각하며 행동했다. 그것이 리더의 자세이다.” (제4권 ‘청엽’)
그리고 아라시야마에게는 악을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는 정의로운 투혼이 있었다. 광포에 대한 장대한 로망이 있었다.
가슴에 불타는 결의의 불꽃이 온몸에 넘쳐흘러 광대한 대지를 뛰어다니며 홋카이도 여자부가 크게 발전하는 기틀을 구축했다. 벗의 행복을 위해 몸을 바친 그 모습은 ‘묘법(妙法)의 잔다르크’를 방불케 했다.
그러나 결핵이 아라시야마의 몸을 침범했다. 병세가 악화되어 몸은 여위고 미열도 계속됐다. 신이치는 아라시야마가 걱정되어 만날 때마다 이렇게 말했다.
“회합에 참석하지 않아도 좋으니 쉬도록 하세요. 무리하지 말고 몸을 돌보아야 합니다.”
그래도 아라시야마는 멤버들이 부탁하면 어느 곳이든 달려갔다. 신이치는 그 상황을 들을 때마다 ‘쉬게 하지 않으면 큰일’이라고 생각해, 홋카이도에 갔을 때 엄하게 말했다.
“당신은 당분간 활동을 중지하고 천천히 요양하십시오. 병마와 싸우는 것을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불법은 도리입니다.”
아라시야마는 애원하듯 말했다. “활동하게 해 주십시오. 부탁입니다...”
아라시야마는 불석신명(不惜身命)의 각오를 다졌다. 그러나 신이치는 절대로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안 됩니다. 그것은 당신 멋대로의 생각입니다!”
그리고 나서 신이치는 온화한 목소리로 타이르듯 말했다.
“아라시야마 씨의 마음은 내가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가족에게도, 학회에게도 둘도 없이 소중한 사람이기 때문에 반드시 건강해져야 합니다. 살고 또 살고 끝까지 살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한 휴양이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출발하기 위한 휴식입니다. 그것은 결코 후퇴가 아닙니다...”
그 뒤로도 신이치는 격려편지를 보내고 아라시야마가 건강을 회복하고 복귀하기를 진지하게 기원했다. 아라시야마는 차츰 건강해져 조직의 제일선에 복귀했다. 그리고 1960년 11월, 정식으로 홋카이도 여자부장에 취임했다.
아라시야마는 1961년 6월에 개최한 홋카이도 여자부총회를 최대 목표로 삼아 확대를 위해 땀을 흘렸다. 그리고 여자부원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켜 대승리한 모습으로 신이치를 총회에 맞이했다.
그런 아라시야마에게 병마가 다시 기승을 부리며 습격한 것이다. 총회 당일, 신이치는 아라시야마의 여윈 모습을 보고 단상에 오르지 못하도록 타이르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조금이라도 쉬도록 하십시오. 어쨌든 지금은 건강해져야 합니다. 홋카이도를 위해서도, 후배를 위해서도 건강하게 끝까지 살아가 주기 바랍니다. 그것이 나의 바람입니다.”
스승의 진심에 아라시야마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총회는 무사히 대성공을 거두었다. 회합이 끝난 후 신이치는 아라시야마의 장래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고 도쿄로 돌아왔다.
이때 나눈 대화가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 아라시야마는 그해 11월에 입원해 12월 14일에 자는 듯이 숨을 거두었다. 26년의 존귀한 인생이었다.
당시 홋카이도 부여자부장으로 함께 분투한 사이토 준코 씨(홋카이도 부인부 총주사)는 ‘아라시야마 하루코’와 함께 투쟁한 역사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아라시야마 씨는 생명을 쥐어짜듯 동지를 격려했습니다. 총회 당일도 홋카이도 전역에서 여비를 마련해 모인 벗의 곁으로 직접 발걸음을 옮겨 계속 말을 건넸습니다.”
총회에는 홋카이도 여자부원의 80퍼센트 이상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대결집의 요인을 사이토 씨에게 물었다.
“‘이케다 선생님에게 보답하고 싶다.’는 아라시야마 씨의 집념이라고 생각합니다. 여성의 행복을 가르쳐주신 이케다 선생님이기에 홋카이도의 모든 여자부원이 사제의 원점을 구축했으면 한다는 것이 아라시야마 씨의 진심이었습니다. 그 마음이 한 사람 한사람에게 통해 당일의 대결집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후세에 남긴 모범적인 모습
1962년 1월 13일, 신이치는 홋카이도로 갔다. 그리고 저녁 때 아라시야마의 장례식에 참석했다. 제5권 ‘사자’에 스승의 진심이 밝혀져 있다.
“야마모토 신이치는 아라시야마 하루코의 죽음의 의미에 대해 깊이 사색했다. - 26년이라는 그녀의 인생은 너무도 짧았다. 그렇지만 그것은 자신의 생애의 사명을 완수한 죽음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녀는 순백(純白)한 눈처럼 청아한 신심의 모범을 후세에 남겨 주었다. 불꽃같은 구도의 자세와 벗을 생각하는 그 마음은 영원히 퇴색하지 않으리라. 아니, 그것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더 황금의 빛이 발하고, 그 뜻을 이어받은 몇천, 몇만의 아라시야마 하루코가 틀림없이 탄생할 것이다.”
“지금 아라시야마의 죽음은 회장인 신이치로서는 견딜 수 없이 괴롭고 슬픈 일이었다. 그러나 불법의 눈으로 보면, 아라시야마의 생명은 멸한 것이 아니라 대우주와 함께 영원히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장례식을 마치고 홋카이도 본부로 돌아온 신이치는 여자부 멤버에게 “봄이 되면 이 홋카이도 본부에 아라시야마 씨의 유덕(遺德)을 기려 벚나무를 심읍시다.” 하고 제안했다. 신이치는 슬픔에 잠긴 멤버들에게 희망을 보내고 싶었다.
홋카이의 사자여, 서라
이튿날 14일, 홋카이도총지부간부회가 삿포로에 있는 나카지마스포츠센터에서 열렸다. 신이치는 ‘지용보살로서 일어설 때는 지금’이라고 강조하며 벗의 행복을 위해 활동하자고 말했다.
총지부간부회를 마치고 신이치는 홋카이도 본부로 이동했다. 그리고 홋카이도 지구부장회에 참석해 이렇게 지도했다.
“광선유포의 때라면 어서에 비추어 삼장사마(三障四魔)가 나타나고 난(難)이 다투어 일어난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여러 가지 책략이나 비난 중상도 있을 겁니다. 그러나 난과 싸우기 때문에 성불할 수 있는 것입니다.
홋카이도는 저 유바리 탄노 사건(炭勞事件)을 훌륭하게 극복하여승리한 영광의 역사가있는 천지(天地)입니다.
사악(邪惡)을 용서하지 않는 정의의 마음이야말로 홋카이도에 맥동치는 위대한 대정신입니다. 그 정의의 마음으로 민중 승리의 깃발을 세워 주십시오. 홋카이의 사자여 서라 - 이것이 저의 염원입니다.”
광포에 대한 스승의 남다른 확신과 기대가 엄동의 홋카이도에서 동지의 가슴에 불꽃이 되어 넓혀졌다.
4월 14일, 3개월 만에 홋카이도를 방문한 신이치는 여자부 멤버들과 약속한 벚나무를 식수했다. 저녁에는 홋카이도 지부장회에, 이튿날 15일에는 홋카이도총지부 간부회, 홋카이도 지구부장회에 잇달아 참석했다. 1박 2일 동안의홋카이도 지도였지만, 신이치는 식사 시간에도 협의를 하거나 조금이라도 짬을 내어 책 등에 격려의 말을 적어 선물하는 등 끊임없이 움직였다.
“한 사람이라도 많은 벗과 만나서 격려하고 분발을 촉구하고자 했던 신이치는 1분 1초라도 헛된 시간을 보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제6권 ‘가속’)
아사히카와의 동지 곁으로
제8권 ‘청류’에서는 1963년 8월에 개최한 홋카이도체육대회와 11월에 하코다테에서 개최한 홋카이도 제2본부 결성대회를 소개했다. 이듬해 1964년 12월 27일에는 삿포로시에 새로운 홋카이도 본부를 낙성했다.(제9권 중망)
그리고 제13권 북두에는 1968년 9월의 아사히카와, 왓카나이 방문이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13일, 신이치는 왓카나이를 방문하기 위해 도쿄에서 비행기를 타고 삿포로를 경유해 아사히카와로 갔다. 당시만 해도 왓카나이로 가는 정기운항이 없었다.
신이치는 아사히카와에서 하룻밤을 묵고 이튿날 열차를 타고 왓카나이로 갈 예정이었다. 아사히카와에서 열리는 회합 등에 참석할 예정은 없었다. 현지 멤버들은 ‘잠깐이라도 뵙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지만 격무 중인 신이치에게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아사히카와의 공항에 신이치를 마중 나온 간부는 “아사히카와 동지들을 꼭 만나 주십시오.” 하고 말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그런데 신이치가 먼저 멤버들을 만나겠다고 제안했다. 마중 나온 멤버들은 매우 기뻐했다.
사실 이때 신이치의 몸 상태는 좋지 않았다. 닷새 전인 9월 8일에도 대학부총회에서 역사적인 ‘중일국교정상화제언’을 발표하는 등 격투가 이어지는 나날이었다. 그래서 동행한 간부는 아사히카와에서는 조금이라도 쉬기를 바랐다. 그러나 신이치는 기운 넘치게 동지 곁으로 갔다.
당시 신이치의 각오는 이렇게 씌어 있다.
“신이치는 언제나 ‘지금이 임종’이라고 자신을 타일렀다. 그리고 사람을 만날 때는 언제나 ‘평생에 단 한 번뿐인 만남’이라는 심정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격려했다.
그 진지하고 필사적인 생명의 활시위로 쏜, 불꽃같은 혼의 화살이 상대방의 폐부를 찔러 용기를 불태우게 하는 것이다.”
대서원에 끝까지 살아라!
북두에는 아사히카와 광포의 발자취와 신이치와 새긴 황금의 추억도 씌어있다.
1968년, 네번째로 아사히카와를 방문했다. 멤버들은 다 함께 신이치의 홋카이도 지도의 성공을 기원하고 있었다. 그곳에 신이치가 모습을 나타낸 것이다.
갑작스럽게 일어난 상황에 환희가 폭발하고 환호성과 박수가 터져 나왔다. 신이치의 도사로 근행한 뒤, 간부인사에 이어 신이치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나는 ‘학회의 동지여러분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다. 그리고 여러분의 자녀가 꼭 행복했으면’ 하는 일념으로 지금까지 활동해 왔습니다.
어본존 앞에서, 불·보살 앞에서 맹세합니다. 앞으로도 한평생, 죽는 마지막 그 순간까지 나는 여러분의 행복을 기원하며 몇천만 번이고 계속해서 제목을 보내 드리겠습니다.”
스승의 진심 어린 말이 벗의 가슴에 스며들었다.
“세간의 번영은 상대적인 것이고 제행무상(諸行無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영원한 번영과 행복을 얻을 수 있는가. 그것은 내 생명의 궁전을 열어서 자신의 경애를 높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광선유포라는 대서원에 끝까지 살아가는 것입니다.”
“광선유포라는 성업(聖業)의 의의를 생각하면, 우리가 어본존을 수지하고 홍교에 힘쓸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은 신심의 훌륭함을 사회에서 생활상의 실증으로 모두 보여 주기 바랍니다.”
이어서 신이치는 각 부서에 지침을 보내고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다 함께노래하자고 제안해 각 부서가 합창을 선보였다. 즐거운 시간이 흘렀다.
일본 최북단의 땅으로
1968년 9월 14일, 신이치는 열차를 타고 아사히카와를 떠나 일본의 최북단 왓카나이로 갔다. 이번 방문은 왓카나이의 초대 지부장인 사지 히데조와 한 약속을 지키고자 성사되었다.
그는 신이치를 만날 때마다 왓카나이 방문을 요청했다. 1967년 8월, 아사히카와에서 기념촬영을 할 때도 왓카나이 방문을 간절히 염원했다.
신이치는 사지와 약속하고 바쁜 일정을 쪼개 방문을 실현했다.
오후 5시 44분, 왓카나이역에 도착한 신이치는 왓카나이총지부의 지도회가 열리는 체육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회합장소에 도착하자 신이치는 입구에서 기다리는 사지에게 말을 건넸다.
“사지 씨, 약속대로 왔습니다. 건강해지셔서 정말 기쁩니다.”
신이치의 손을 꽉 잡은 사지는 감동하여 말문이 막혔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신이치가 지금 왓카나이의 땅, 눈앞에 있다. 사지에게도, 왓카나이 동지에게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었다.
회합장소의 무대 위에는 ‘영광’이라는 글자가 크게 씌어 있고, 뒤편에는 ‘선생님 어서 오십시오. 북쪽 끝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붓으로 쓴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단상에 선 신이치는 깊이 머리를 숙여 인사하고 참석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레분 섬, 리시리 섬에서도 배를 전세 내어 동지 180명이 참석했다고 들었습니다. 멀리서 잘 와 주셨습니다. 건강하고 생기발랄한 여러분을 만날 수 있어서 참으로 기쁩니다. 오늘은 즐겁게 회합을 합시다.
저는 왓카나이가 정말 좋습니다. 여러분을 정말 좋아합니다. 우리 동지 한 사람 한사람을 끝까지 지키겠습니다.”
진심 어린 말에 모두 눈시울이 붉어졌다.
“저는 여러분의 노고를 잘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투쟁도 전부 보고받고 있습니다. 정말로 잘 싸웠습니다. 여러분은 승리했습니다. 대승리했습니다.
오늘은 먼저 그것을 선언해 두겠습니다.”
고난에도 지지 않고 광포를 위해 달려온 왓카나이 동지는 스승의 격려에 지금까지의 노고를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간부가 마음을 합하여 단결해야 합니다
정신적인 거리
왓카나이총지부지도회는 오후 6시에 시작됐다.
신이치는 “왓카나이가 일본 최초의 광선유포를 달성하기 바란다.” “이 왓카나이 땅에서 일본 그리고 세계의 위인을 속속 배출하기 바란다.” 등 다섯 항목의 지침을 제시했다. 그리고 <센니치니부인답서>를 배독하고 이렇게 외쳤다.
“사도라는, 산과 바다를 사이에 둔 먼 곳에 있어도 강한 구도심이 있는 센니치니의 일념은 대성인과 함께 있었습니다. 지리적인 거리와 정신적인 거리는 전혀 별개의 것입니다.
비록 멀리 떨어진 곳에 있어도 내가 있는 한, 이곳을 반드시 광선유포하겠다.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겠다고 결의하여 당당히 투쟁하는 사람은 그 마음이 대성인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학회 정신이며 본부에 직결하는 신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도쿄에 살거나 혹은 학회 본부에 있어도 투쟁심을 잊는다면 정신은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것입니다.
나도 진지합니다. 광포에 불타는 왓카나이 여러분과 같은 마음으로 가장 단단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더욱이 대성인은 ‘우리들은 예토(土)에 있지만 마음은 영산(靈山)에 사느니라.’(어서 1316쪽)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사바세계는 예토, 즉 더러워진 국토지만 정법(正法)을 수지한 사람의 마음은 영추산 즉 상적광토에 있다는 대선언입니다.
이곳이 내가 사명을 다할 무대라고 마음을 정하고 광선유포를 위해 매진할 때 어떤 곳도 어떤 역경도 아주 소중한 보처(寶處)가 됩니다.
이 원리를 확신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모든 것은 결정됩니다.”
그리고 더욱 힘주어 말했다.
“나는 여러분께 호소하고 싶습니다!
왓카나이는 도쿄에서도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삿포로에서도 멉니다. 교통도 불편합니다. 인구도 결코 많지 않습니다. 겨울의 추위는 말로는 다할 수 없을 정도로 혹독합니다. 확실히 이런 곳에서 분발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말할 것 같으면 어디든지 힘듭니다. 고생하지 않고 광선유포할 수 있는 그런 곳은 한 군데도 없습니다.
힘든 이유를 열거하여 이래서 무리다, 저래서 안 된다고만 한다면 시간이 지난 후에도 무엇 하나 바뀌어 있지 않습니다. 자기 일념이 환경에 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싸우지 않고 패배를 정당화하기 때문입니다.
이 최북단에 있는 왓카나이가 광선유포의 모범적인 땅이 되면 전국 각지의 동지가 ‘우리도 못할 리가 없다.’며 용기를 갖습니다. 모두 자신감을 갖습니다.
홋카이도는 일본 열도의 왕관 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데, 왓카나이는 그 홋카이도의 왕관입니다. 여러분이야말로 일본 광포의 돌파구를 열 왕자입니다.
이윽고 21세기를 맞이했을 때에는 ‘홋카이도의 시대’ ‘왓카나이의 시대’가 오리라고 나는 굳게 확신합니다.”
결의를 담은 박수가 울려 퍼졌다. 스승의 마음을 느낀 멤버들의 눈이 빛나고 있었다. 이튿날 15일, 신이치는 시내를 둘러본 뒤, 처음으로 왓카나이회관을 방문해 간부들과 간담했다. 간담회에서 신이치는 간부혁명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기대를 담아 이렇게 말했다.
“왓카나이를 광선유포의 모델로 만들어 주세요. 그러기 위해서는 핵이 되는 간부가 마음을 합하여 단결해야 합니다. 나는 이번 방문을 평생 잊지 않겠습니다. 북쪽 수비를 잘 부탁드립니다.”
에치고야 료이치 씨(왓카나이북두현 주사)는 북두에서 현지 동지에게 감동이 넓혀진 모습을 말했다.
“저는 당시 남자부 리더로 14일에 개최한 왓카나이총지부지도회 장소의 책임자이기도 했습니다. 낡은 체육관이었기에 다 함께 철저히 청소하고 지도회를 맞이했습니다.
‘신이치는 기둥과 벽을 보니 정성 들여 손질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신이치는 동지들의 진심 어린 마음에 합장하는 심정으로 회합장소에 들어갔다.’고 소설에 써주신 일에 당시 멤버들은 ‘이렇게 세세한 부분까지 보고 계셨구나.’ 하고 감동했습니다.”
15일, 왓카나이회관에서 대표와 간담할 때, 선생님은 모든 참석자의 근황을 물었다.
“대표라고 해도 참석자는 대강당에 가득 찰 정도로 많았습니다. 선생님은 그 한 사람 한사람을 생명에 새기 가족과 일의 상황 등을 물으셨습니다.”
왓카나이의 벗은 후계의 청년과 함께 스승의 기대에 부응하는 제자로 성장하겠다고 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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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노고많으셨어요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