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타클로스가 붉은 옷을 입게 된 사연
컬러 영화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토머스 에디슨의 움직이는 사진 '키네마스코프'가 공개된 것은 1894년이며, 뤼미에르의 '시네마토그래프'가 확대 영사에 성공한 것은 1895년이다. 모두가 새로운 정보 미디어로 구미 각국에 유행하여 민중 오락의 총아가 되었다. 이런 영화 유행의 대세는 미국에 의해 주도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미국 영화계가 질이나 양에 있어 특히 우세를 보이기 시작한 것은 제1차 대전 무렵부터이다. 포터와 그리피스가 영화극 양식을 고안하여 단편 희극과 활극이 대량 생산된 1914년부터 미국 영화는 급속히 발전했다. 그리고 1920년대 후반 새롭게 등장한 유성 영화의 흥행 성공은 미국을 영화의 본거지가 되게끔 만들었다.
촬영소는 미국 서부의 할리우드에 집중되었고 많은 명감독과 미남 미녀 스타가 전세계의 스크린을 장식했다. 상품 가치를 높이기 위한 아이디어도 미국 영화의 흥행 성공에 주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1928년 제정된 '아카데미상'이 영화인들의 잔치를 뛰어넘어 대중들에게 파고든 것이다. 전형적인 대중 영화를 만들면서도 '아카데미'라는 명칭을 쓸 만큼 미국의 상술은 지능적이었다. 대부분의 극영화는 사랑과 웃음에 주제를 두어 상품성을 중시했는데, 1930년 <모로코>, 1933년 <킹콩>, 1939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이 폭발적 인기를 끌었다. 특히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wind)는 화제 도서의 영화화라는 점 외에도 색채 영화의 이정표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미국 작가 마거릿 미첼의 장편 소설 제목이다. 미첼은 1926년 남편의 권유로 시작해 10년간의 조사와 집필 끝에 이 소설을 완성했다. 남북전쟁으로 하룻밤 사이에 남부의 전통도, 질서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부유한 농장주의 딸로 자라던 스칼렛 역시 패전의 고통을 겪게 되나 온갖 수단으로 전력을 다해 살 길을 개척한다는 이야기이다. 남북 전쟁과 전후의 사건을 배경으로 급변하는 사회상을 자상하게 묘사하면서 아름답고 억센 남부 여성 스칼렛 오하라가 황폐한 시대를 살아가는 모습, 연약한 이상주의자 이슐레 윌크스에 대한 사랑, 물질주의적이며 행동가인 레트 버틀러와의 애욕 등을 한데 엮어 가면서 간결한 문체와 정교한 묘사로 구성되어 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작가 자신의 말에 따르면, 처음에 종장을 쓰고, 각 장을 순서 없이 제멋대로 쓴 뒤 최후에 제1장을 써서 전편을 마무리 지었다고 한다. 또한 미첼은 원고를 편집자에게 넘겨 준 후, 곧 마음이 변하여 '원고 반환 바람'이라는 전보를 쳤으나, 맥밀런 출판사는 정중하게 그 제의를 거절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이 원고는 1936년 출판되어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았고, 1937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하는 등 문학적 역량도 인정받았다. 이러한 성공을 바탕으로 이 작품은 영화로 만들어져 1939년 개봉되었고, 영화 또한 대대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의 흥행에 힘입어 심리적으로나 패션 면에서 '스칼렛'을 모방하는 유행이 미국을 휩쓸었으며, 주연 배우 클라크 케이블과 비비언 리의 일거수일투족이 유행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스칼렛의 의상은 특히 주목을 끌었으니, 결혼식에서 입은 크림색 드레스와 커튼으로 만든 녹색 드레스 그리고 닭의 깃털이 장식된 모자도 인상적이었다.
의상 디자이너 월터 플런키트는 회상하기를 "이 영화의 핵심이 될 만한 녹색 드레스는 영화 의상에 있어서 가장 으뜸으로 기록될 것이다. 내가 그것을 만들었음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라며 자긍심을 보이기도 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그로부터 55년이 지난 후 다른 작가에 의해 그 속편이 쓰였다는 사실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산타클로스가 붉은 옷을 입게 된 사연
산타클로스는 3세기 북유럽 지방에서 가난한 이웃에게 선물을 나눠 주던 성 니콜라스가 그 효시이다. 성 니콜라스는 연말이 되면 부엌을 통해 어린이들을 찾아가는데, 지난 한 해 동안 착한 일을 한 어린이에게는 선물을 주고 나쁜 일을 한 어린이에게는 함께 다니는 루프레히트로 하여금 이름을 적게 하였다 한다.
또 다른 일설에는 성 니콜라스가 파산한 한 상인의 가난한 세 딸에게 시집갈 밑천으로 금화 한 뭉치씩을 몰래 선물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금화 뭉치를 한밤중에 창문으로 던져 넣었는데 공교롭게도 굴뚝 옆에 말리기 위해 걸어 놓은 양말 속으로 떨어졌던 것이 양말 풍습의 유래가 됐다는 것이다.
이 산타 할아버지의 전설은, 19세기 초부터 미국 일부 지방에서 크리스마스 때 그 풍습이 재현되면서 관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산타에 대한 관심은 점차 증폭되어 19세기 말에는 시집 표지나 크리스마스 카드에 담배를 피우는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사슴과 썰매는 눈이 많이 내리는 북유럽 지방의 자연 환경 때문에 연상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서는 빨간색 둥근 모자를 쓴 흰 수염 덥수룩한 할아버지가 여기저기 선보였고, 일부 사람들이 흰 수염을 달고 빨간색 둥근 모자를 쓴 채 산타클로스 할아버지 노릇을 했다. 그러다가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모습, 즉 뚱뚱한 몸집에다 맘씨 좋게 생긴 얼굴에 새하얀 수염이 무성하고 특유의 붉은색 외투와 붉은색 삼각형 모자, 굵은 가죽 벨트를 걸치고 있는 산타클로스의 모습은 1931년 미국의 코카콜라사가 처음으로 만들어 냈다.
코카콜라사는 겨울철 콜라의 판매량이 격감하자, 이를 타개하기 위한 홍보 전략의 일환으로 자기 회사의 삽화가 프레드 미젠을 통해 당시 각양각색이던 산타의 모습 대신 따사롭고 풍요로운 이미지를 주는 새로운 모습의 산타클로스를 창조했다. 산타의 옷 색깔을 붉은색으로 선택한 이유는 따뜻함을 느끼게 할뿐만 아니라 붉은색의 강렬함이 눈에 잘 띄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이 산타 할아버지를 잡지 광고 및 포스터 그리고 입간판에 대대적으로 등장시켰는데, 이 산타의 모습이 바로 오늘날의 산타 할아버지 상이다.
이 광고에는 크리스마스 때 가장 바쁜 인물인 산타클로스도 코카콜라 한 잔을 마시면 기분이 상쾌해진다는 뜻의 간결하고 짧은 카피 "Me, too"(나도!)가 곁들여졌다. 광고는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고 코카콜라사는 이 시리즈를 계속해서 발전시켜 나갔다. 아울러 어른들은 크리스마스가 되면 어린이에게 산타클로스 할아버지의 환상을 심어 주는 것을 당연시하게 되었다. 한편 코카콜라사의 삽화가 프레드 미젠이 창조했다는 산타클로스는 기실 당대의 유명한 삽화가 노먼 록웰의 작품을 차용한 것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노먼 록웰은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산타 할아버지를 주제로 한 삽화를 발표했는데, 1931년 이전에 그려진 삽화에서 '현대적' 산타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록웰이 그린 삽화 중 몇 가지를 자세히 살펴보면 확실히 그런 느낌을 받는다. 1916년의 삽화에는 아가씨의 손에 현대적 산타클로스 인형이 들려 있으며, 1922년의 삽화에는 빨간색 고깔을 쓴 요정들과 흰 수염 덥수룩한 산타 할아버지가, 1927년의 삽화에는 빨간색 둥근 모자를 쓰고 활짝 웃는 흰 수염 산타가 그려져 있다.
요컨대 록웰의 삽화에서 힌트를 얻어, 미젠이 현대적 산타클로스를 창조한 것이 아닌가 싶다. 산타클로스는 원래 북유럽의 전설에 등장하는 인물이지만 오늘날 미국적 산타가 세계를 휩쓸고 있는 것은 미국 문화의 파괴력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라 하겠다. 다시 말해, 미국인들은 전통이 없다는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 다른 나라의 문화를 원용하여 새로운 미국적 상징물을 창조해 내곤 했는데, 그것을 주체 의식 없이 그대로 받아들임에 따라 '세계화=미국화'라는 강대국 중심 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각선미'와 나일론 스타킹
1938년 뉴욕에서 스타킹이 첫 선을 보이던 날, 미국 여자들은 한정된 수량의 스타킹을 사려고 상점이 문을 열기 몇 시간 전부터 장사진을 이루었다. 서민들은 물론, 사랑 때문에 영국 국왕 자리를 버린 사건으로 유명한 윈저 공도 심프슨 부인을 위해 이 구매자 대열에 기꺼이 합류하였다. 나일론 스타킹의 인기는 실로 대단했다. 스타킹을 산 부인들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길가에서 다리를 치켜들고 신기한 스타킹을 신는 모습들이 신문에 실려 화제가 될 정도였다.
이런 열기에 힘입어 듀퐁사가 '석탄, 물, 공기가 당신의 몸을 감쌉니다'라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미국 전역에서 판매한 '나일론 스타킹'은 시판 첫날 4백만 켤레가 팔리는 진기록을 수립했다. '나일론'(nylon)이라는 명칭이 붙은 합성 섬유가 최초로 사용된 제품은 1930년대 중엽 듀퐁에서 내놓은 칫솔모였다. 이어 낚싯줄, 외과용 봉합사로도 사용했다. 그러나 나일론이 정작 세상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여성의 다리를 감싸는 스타킹 소재로 사용되면서부터였으며, 이때부터 나일론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나일론 스타킹은 거미줄처럼 가늘면서도 천연 섬유보다 탄력적이고 부드러워 여성들이 아주 좋아했다. 투박스럽고 쉽게 느슨해지는 면 스타킹에 비해 가볍고 윤택이 나며 탄력이 강한 나일론 스타킹은 세계 여성들을 압도하기에 충분했으니, 1940년대는 가히 나일론 스타킹의 시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나일론 스타킹의 공급은 수요를 따라가지 못했다. 전쟁(제2차 대전) 때문에 소비 물자 생산을 제한하자 여성들이 스타킹을 사려고 길게 늘어선 풍경이 심심찮게 보였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윈저 공도 아내를 감동시키기 위해서는 끈질긴 인내심을 발휘해야 했던 것이다. 1945년 샌프란시스코의 한 매장에는 1만여 명의 고객이 한꺼번에 몰려 큰 소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나일론 스타킹은 제2차 대전이 끝난 후 경기 호황과 맞물려 더욱 인기를 끌었으며, 여성들은 늘씬한 각선미를 자랑하는 데 더없이 안성마춤인 나일론 스타킹을 필수품처럼 여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