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 돈 이야기
최연식(서울대 강사)
우리나라 최초의 돈, 고려 동전
현물화폐가 아닌 순수화폐로서 우리나라에서 처음 사용된 것은 고려의 동전이다. 삼국시대나 그 이전의 유적에서 명도전이나 오수전과 같은 중국의 동전들이 발견되기도 하지만, 이들은 중국의 영향을 받던 지역 혹은 중국과 교역하던 지역에서 일시적으로 유통된 것일 뿐 우리나라 자체적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고려시대에 처음으로 화폐가 사용된 사실은 물론 당시 경제상황의 커다란 변화를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와 아울러 문화. 사상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변동이 나타났음을 의미한다. 비록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와 같은 비중은 아니지만 ‘돈’이 갖는 사회적 의미와 기능은 전근대사회에서도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려의 동전에는 ‘동국통보’,‘동국중보’,‘삼한통보’,‘삼한중보’, ‘해동통보’,‘해동중보’등이 있었는데, 이들은 이름만 다를뿐 형태와 크기는 거의 동일하였다. 고려의 동전은 명칭과 형태, 크기 등 모든 면에서 중국의 동전을 모델로 하였다. 중국은 이미 천 년 이상 동전을 사용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을 뿐 아니라 당시 고려와 활발한 무역관계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고려가 새롭게 화폐경제를 수립하려 할 때 쉽게 모범이 될 수 있었다. 따라서 고려 동전의 형태와 기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동전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중국 최초의 동전은 춘추전국시대에 나타났다. 이 시기는 각 국이 부국강병을 위해 상업장려 정책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가운데 동전이 출현하였다. 당시 최고의 부국이던 산동지방의 제는 포전을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도전과 포전은 당시에 사용하던, 구리로 만든 칼과 쟁기를 일정한 규격으로 통일시킨 것으로 화폐와 생활용구의 기능을 겸하던 반 순수화폐였다. 더욱이 크기가 커서 소액의 거래에는 적당하지 않았다.
그 후 경제적 발달을 배경으로 서민들의 일상 경제생활에도 사용할 수 있는 소규모의 동전이 나타났다. 둥근 형태의 이 동전은 원래 둥근 구멍을 가지고 있었는데, 진시황에 의해 통일제국의 법정화폐가 되면서 원형방공으로 바뀌었다.
둥근 외형과 네모 구멍은 각기 하늘과 땅을 상징하였다. 이러한 형태의 동전은 이후 중국뿐 아니라 고려와 조선, 나아가 중세 일본 화폐의 모델이 되었다.
진시황 때의 동전은 그 무게가 반량(18.75그램)이었기 때문에 ‘반량전’으로 불렸는데, 한나라 때에는 무게가 반 이하로 줄어 ‘오수(약 7.8그램)전’이 되었다. 이처럼 동전의 크기가 작아진것은 상업경제가 발전함에 따라 시장에서 필요한 화폐의 양이 늘어났기 때문이다.
세계제국으로서 경제적 번성을 구가했던 당나라에서는 동전의 크기가 더욱 줄어 3.75그램이 되었다. 당나라 이후에도 경제적 번영은 계속되었지만, 그 이상 동전의 크기는 줄어들지 않았다. 더 작은 크기의 동전을 만들기도 어려웠으므로, 이제 동전의 크기를 줄이는 것보다 은화나 지폐와 같은 새로운 화폐의 제작 쪽으로 방향을 바꾸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3.75그램짜리 동전은 화폐제도뿐 아니라 도량형 특히 중량의 단위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원래 고대 중국의 중량단위는 량(37.5그램)을 기본으로 하여 작은 단위로는 량의 24분의 1인 수(약 1.6그램)가 있고 큰 단위로는 16량(600그램)에 해당하는 근이 있었다. 그런데 3.75그램 중량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동전이 일상화되면서 이 동전 하나의 무게가 독립된 중량단위로 등장하였다. 이 단위는 돈의 무게에서 비롯한 것이므로 전이라고 불렀다. 한편 고액의 거래에서는 동전 천 개를 하나의 줄에 꿰어 사용하였으므로 천 개 꿰미를 관이라고 불렀는데, 그 결과 동전 천개의 무게 즉 3.75킬로그램을 나타내는 관도 곧 새로운 도량형단위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처럼 동전 하나의 무게를 기초로 하여 전(1개)-량(10개)-관(1000개)의 10진법 도량형 단위가 자리 잡게 되자 량과 관의 중간에 있던 근에도 변화가 생겼다. 즉 기존의 600그램 근과 별도로 10량 즉 동전 100개에 상응하는 375그램도 근이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고려가 모델로 한 송나라의 동전은 당나라의 동전과 같은 형태였다. 따라서 고려의 동전도 하나의 무게가 3.75그램이었고, 그 결과 우미 말에서도 중국과 마찬가지로 3.75그램의 무게를 가리키는 용어와 화폐를 가리키는 말이 같게 되었다. 한 돈의 무게를 갖는 동전이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였으므로 화폐를 돈이라고 하였는지, 돈 하나의 무게와 같기 때문에 3.75그램을 돈이라고 하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원래 동전 하나를 가리키던 말이 그 동전의 무게와 화폐자체 두 가지의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한편 물건의 종류에 따라 한 근의 중량을 600그램 혹은 375그램으로 다르게 계량하는 것도 동전의 사용과 관련된 현상이다.
당나라의 동전은 크기뿐 아니라 형식면에서도 이후 중국 동전의 모델이 되었다. 그 이전의 동전들이 화폐의 앞면에 반량, 오수와 같은 동전의 무게를 새겼던 것과 달리, 중앙정부의 화폐발행권을 더욱 공고히 한 당나라에서는 황제의 연호를 동전의 이름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즉 개원, 건원과 같은 연호에 통보 중보라는 용어를 결합한 개원통보, 건원중보라는 동전의 이름을 구멍의 사방에 새겨 넣었다. 통보와 중보는 나라를 부유하게 하는 보배라는 뜻으로 해당 연호 기간 중 첫 번째로 만든 동전을 통보, 그 후에 추가로 발행한 것을 중보라고 하였다. 고려에서는 연호 대신에 동국이나 해동 삼한 같은 용어를 사용한 중국과 다른 고려 자체적으로 발행한 동전임을 나타내었다.
동전을 사용할 것인가? 말 것인가
고려에서는 국가재정과 유통경제를 발전시키려는 정책 하에 동전을 발행하였다. 하지만 화폐경제의 발전이 일반인들의 경제상황을 더욱 어렵게 한다는 비판도 있었다. 이와 같은 입장의 차이는 자연히 동전의 사용에 대하여 서로 반대되는 견해를 갖게 하였다. 특히 동전이 중국의 것을 모델로 하였다는 점에서 외국제도의 수용에 대한 입장 차이도 나타났다.
돈이라고 하는 것은 몸은 하나이지만 기능이 네 가지입니다. 먼저 그 생김새를 보면 몸은 둥글고 구멍은 네모난데, 둥근 것은 하늘을 본 뜬 것이고 네모난 것은 땅의 모양입니다. 이것은(하늘과 땅처럼)만물을 완전하게 덮고 받쳐주는 것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돈은 샘처럼 끝없이 흘러 한이 없습니다. 셋째로 돈을 민간에 퍼뜨리면 위와 아래에 골고루 돌아다녀 영원히 막힘이 없게 됩니다. 넷째로 돈은 이익을 가난한 사람과 부자에게 나눠주는데 그 날카로움이 칼날과 같아 매일 써도 둔해지지 않습니다.
돈 때문에 일어나는 그 많은 불행을 매일같이 경험하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너무나 순진하게 들일 이 돈 예찬론은 다름 아닌 고려 중기의 고승 의천이 국왕에게 동전의 사용을 건의하기 위하여 지은 글의 일부이다. 재물에 초연해야 할 승려가 돈의 사용을 건의했다는 사실 자체가 의외라고 생각되겠지만, 당시 의천은 국왕인 숙종의 동생으로서 국정에 적지 않게 관여했던 인물이었다. 독실한 승려로서 청정한 생활을 이상으로 삼았던 그가 돈을 예찬하면서 적극적으로 사용하자고 주장한 것은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돈을 사용하자는 주장은 의천 자신의 실제적 경험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2년 동안 송나라에 유학하였을 때 발전된 화폐경제의 편리성을 경험한 후, 화폐의 사용이야말로 중국 정부와 백성들이 부유하게 된 이유라고 생각하였다. 반면 고려는 화폐경제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고려에서는 백성들이 실생활에 사용할 쌀이나 옷감으로 상거래를 하기 때문에 물자가 부족하게 되고, 나아가 이익을 노리는 사람들이 쌀에 흙을 섞고 옷감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농간을 부려 많은 문제가 발생하였다.
가난한 백성들이 시장에서 어렵게 구한 쌀로 제대로 밥을 해먹을 수도 없고 옷감으로 옷을 해 입으면 속이 훤히 드러날 정도여서 추위를 막을 수 없었다. 또한 일부 권세가와 부자들은 곡식이 부족한 시기에 쌀을 빌려준 후 몇 배의 이자를 쳐서 받기 때문에 일반 백성뿐 아니라 청렴한 관료들까지도 어려운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금속화폐는 실생활에 사용되지 않는 그리로 만들기 때문에 쌀과 옷감의 부족과 품질 저하를 막을 수 있고, 부자들의 모리행위도 근절시킬 수 있는 좋은 수단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의천은 이러한 자기주장을 입증하기 위해 중국 역대 화폐정책의 성공과 실패 사례를 들고 그 원인을 설명한 후, 결론적으로 금속화폐의 사용은 국가와 백성들에게 만세의 복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이처럼 의천은 화폐의 역사와 기능을 비교적 정확하게 이해한 후 화폐정책을 통하여 경제발전과 부의 균등한 분배를 이루려 한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의천보다 한 세기 뒤에는 동전의 사용을 반대하는 다른 경제이론이 제기되었다.
공방(돈)은 겉은 원만하지만 속이 모나고 시세에 따라 임기응변을 잘하였다. 한나라에서 벼슬하여 홍로경(재무장관)이 되었다. 성격이 탐욕스럽고 청렴하지 못하였다. 재물을 관장하면서 백성들과 작은 이익을 다투고, 물가를 조작하여 곡식을 싸게 하여 백성들이 농업을 버리고 상업에 몰려 농사를 망치게 하였다. 또 권귀들과 사귀어 그 집에 다니며 벼슬을 사니 관리들의 승진이 모두 그 손에서 결정되었다. 관료들이 지조를 꺽고 다투어 뇌물을 바치니 거둬들인 문서가 산더미 같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사람을 사귈 때에는 인간성을 따지지 않고 시정잡배라도 돈 있는 사람이면 함께 몰려 다녔다.
돈을 공방(네모구멍)이라는 인물로 의인화하여 화폐가 갖는 탐욕과 부패를 예리하게 풍자한 이 글은 무인 집권기의 문인 임춘이 지은 <공방전>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글에서 중국 역대의 화폐정책은 공방 집안 인물들에 의해 주도되는 것으로 설명되는데, 이들은 부국강병을 추진한 임금들에게 총애를 받았지만 끝내는 탐욕과 부패 때문에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다. 사회의 혼란과 부정부패는 늘 이들과 함께 하였다.
이처럼 돈의 부정적 성격을 강조한 임춘은 동전이 사용되면서 인간 사회의 탐욕과 이기심이 증대한다고 보았다. 또 국가재정의 확대만을 목표로 하는 정책은 은율을 내세우는 부패한 관료만 득세하게 하고 정직한 관료와 선량한 백성들은 피해를 보게 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라고 하였다. 비록 화폐의 기능에 대하여 의천과 같이 논리적인 주장은 제시하고 있지 못하지만 단순히 화폐만이 아닌 화폐와 재정정책과의 관계 민생보다 부국강병에만 치중하는 재정정책의 단점을 지적한 점에서 그 의미가 적지 않다.
의천과 임춘이 이처럼 상반된 화폐관을 가진 것은 그들이 처한 상황이 달랐던 데 연유한다. 의천은 고려가 활발하게 발전적인 사회를 만들려 했기 때문에 동전을 사회 구성원 모두의 부를 창조하는 도구라고 생각하였다. 반면에 임춘은 정통성 없는 무인들이 권력을 장악한 시기에 끝내 등용되지 못하고 소외된 채 경제적으로도 불우한 생활을 감내해야 했으므로 화폐경제의 발전이 일부 권세가와 부자들의 재산 축적에 기여할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사실 돈 그 자체는 우리의 경제생활을 편리하게 해주는 도구일 뿐 그것이 우리의 삶을 궁핍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사회적으로 어떠한 기능을 하는가는 오히려 사회제도에 관한 것으로서 실제적으로는 사회에 부가 얼마나 고르게 분배되어 있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고려시대의 화폐; 쌀, 옷감, 은, 동전, 지폐
동전이 사용되기 이전에 고려에서는 주로 살이나 옷감과 같은 현물을 화폐로 사용하였다. 중국에서는 춘추전국시대부터 금속화폐를 사용했고 일본에서도 8세기 초부터 동전이 유통되기 시작한 것에 비하면 우리나라 금속화폐의 사용은 상대적으로 늦었다. 일반적으로 화폐의 발전은 상업의 발전과 비례하는 것이므로 금속화폐의 사용이 늦은 것을 우리나라 상업이 발달하지 못한 때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고려시대의 상업이 그렇게 부진한 것은 아니었다.
고려시대 상업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은 은의 활발한 유통이다. 고려의 시장에서는 은이 가장 중요한 교환수단으로 유통되었고, 대부분의 상품은 은으로 그 가격이 환산되었다. 귀금속인 은을 화폐로 활발하게 사용할 정도로 당시의 상업은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한편 옷감도 단순한 옷의 재료로서의 기능을 벗어나 순수한 교환수단으로서의 기능을 강화시켜가고 있었다. 고려말 이전에는 아직 목화가 전래되지 않아 면포는 없었고, 비단과 마포(삼베), 저포(모시)가 주요한 옷감이었는데 이중 시장에서 교환수단으로 유통된 것은 일상복의 재료가 되는 마포와 저포였다.
마포와 저포가 순수한 교환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던 것은 당시 시장에서 품질이 조악한 옷감이 유통된 사실에서 알 수 있다. 원래는 5승포, 즉 400올이 들어간 것이 마포와 저포의 표준 규격이었지만 시장에서는 날실의 수를 대폭 줄인 2승포 혹은 3승포가 유통되었다. 만일 이러한 옷감으로 옷을 해 입으면 의천이 말한 것처럼 추위를 막을 수 없을 뿐 아니라 속이 훤히 비쳐 옷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없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옷감은 원래부터 옷을 해 입기 위해서가 아니라 시장에서 화폐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옷감의 가치는 들어간 실의 양에 따라 결정되었으므로, 2승포나 3승포는 각기 정포 즉 5승포의 5분의 2 또는 5분의 3의 가치를 갖는 교환수단으로 만들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불량 옷감의 사용이 유통질서에 커다란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은 아니었다. 일반인들의 경우 옷을 해 입기 위해서는 5승포 이상을 구했지만 보통의 상거래에서는 별다른 불편함 없이 2승포나 3승포를 사용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품질이 떨어지는 옷감의 출현은 상거래의 문란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업이 상당히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였다.
하지만 당시에 금속화폐의 필요성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적은 액수의 생활필수품을 구입하는 경우에는 은이나 포로 거래하기에 불편했기 때문에 쌀을 사용하였는데, 주식인 쌀을 식용 이외의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다. 더욱이 쌀에 흙을 섞어 유통시킬 경우 그 피해는 심각하였다. 은에 비하여 훨씬 가치가 적은 동전을 사용할 경우 이러한 문제는 해결할 수 있었다.
국가의 재정운영에서도 동전의 사용은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당시 재정은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는 곡식과 옷감 같은 현물에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흉년이나 세금 운송 사고를 당할 경우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실제로 지방의 세금이 중앙으로 쉽게 들어오지 못해 관료들의 녹봉을 몇 개월씩 지급하지 못하고 미루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따라서 백성들로부터 거둬들이는 현물 이외에 동전을 사용할 경우 국가의 재정을 보다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더욱이 동전과 같은 금속화폐는 원칙적으로 정부만이 만들 수 있었으므로 경제생활에서 정부의 영향력을 강화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고려정부는 여러 차례 금속화폐의 유통을 추진하였다. 이미 의천의 건의가 있기 한 세기 전인 996년(성종15)에 첫 시도가 있었고, 숙종은 의천의 건의를 받아들여 보다 적극적으로 동전사용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 때 정부에서는 동전의 원활한 사용을 위하여 동전만을 사용하는 술집과 음식점을 설치하기도 하였고, 관료들의 봉급을 동전으로 지급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시도는 모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정부의 강력한 의지와 강제력에도 불구하고 일반 백성들은 동전의 사용의 회피했던 것이다.
은이나 옷감, 쌀과 같은 현물화폐에 익숙해 있던 당시에 동전이 매력을 갖기 위해서는 상업의 발전이 한 단계 비약하거나 조세를 돈으로 걷는 것과 같은 변화가 필요했는데, 그러한 변화는 17세기 이후에야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실제로 조선 전기에도 여러 차례 동전을 만들고 상거래에서 사용하도록 강제하였지만, 언제나 고려에서처럼 외면당하고 정부는 화폐정책을 변경해야만했다.
동전과 달이 또 다른 법정화폐인 은병은 별다른 무리 없이 사용되었을 뿐 아니라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은병은 공식적으로는 은 1근 즉 16량의 가치를 가졌는데, 실제로는 은 12.5량과 구리 2.5량을 혼합하여 만들었다.
이때 공식가치와 실제함량 사이의 차이는 정부에서 주조비와 조주이익으로 차지하였다. 은병은 쌀 수십 석의 가치를 갖는 초고액 화폐였지만, 실제 상거래에서 별다른 어려움 없이 활발하게 사용되었다. 12세기에 고려를 방문했던 중국 사신은 개경 시내 시장에서의 주된 유통수단으로 은병을 들고 있다. 동전과 달리 은병이 법정화폐로서 확고하게 자리 잡은 것은 당시 고려 사회에서 은이 이미 중요한 유통수단으로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원 간섭기에는 일시적으로 원나라의 지폐가 고려에서 유통되었다. 송나라 이래 상업 특히 먼 지역 간의 거래가 크게 발전했던 중국에서는 상인들 사이에 약속어음 종류의 문서가 활발하게 이용되었는데, 원나라에서는 이러한 제도를 국가에서 관장하여 정부가 직접 동전의 지급을 보장하는 지폐적 성격의 보초를 발행하여 유통시켰다. 원나라의 간섭을 받고 있던 고려는 간접적으로나마 원나라의 경제권에 편입되었으므로 이 보초가 유통되었는데, 세게 제국인 원나라 정부가 지급을 보증하는 보초는 고려 국내세서도 별다른 저항 없이 활발하게 유통되었다. 하지만 원나라가 몰락하면서 보초의 가치는 땅에 떨어져 종이조각에 불과하게 되었다. 고려말과 조선초에는 이러한 보초를 모법으로 하여 지폐인 저화를 발행하고 정부가 가치를 보증하였지만 동전과 마찬가지로 시장에서 외면받아 곧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