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글 221202 안 에르보 ＜비가 올 거야＞

[신은경]

모호함 속 질문에서 나의 관점을 찾아가는, 작가 안 에르보

<비가 올 거야>

221202  이편한도서관  / 발제 신은경

[안 에르보 작가 인터뷰]  

발췌 도서 : 유럽의 그림책 작가들에게 묻다 - 최혜진

안 에르보 1975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여섯 살 때부터 동네 화실을 다니기 시작해 성장기 내내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안 에르보는 일상에서는 좀처럼 쓰지 않는 관념적인 단어로 생각을 풀어냈기에 속뜻을 파악하려면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촉수와 레이더망을 바짝 세워야 했다. 보통 두 번 반복해 들으면 글을 쓸 수 있었지만, 그녀의 경우엔 네 번이나 들어야 했다. 의자를 바짝 당겨 허리를 세우고 정신을 차리고 머리를 굴려야 했다. 그녀는 생각이란 것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날 선 상태로 나를 이끌었다. 이것은 안 에르보라는 사람의 특징이자 그녀가 만든 그림책의 특징이기도 하다. 지난 20년간 출간한 40여 권의 작품들 가운데 전통적인 기승전결 구조를 가진 책은 단 한 권도 없다.   219 

“저는 책에 질문을 많이 넣습니다. 하지만 답은 절대 적지 않습니다. 인생의 본질이 그래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하는 상황이 끝없이 이어지지만, 정답은 아무도 모른 채 나아갑니다. 우리를 발전하게 만드는 건 인생의 그 모호함입니다.” 경계를 깨고 관점을 바꾸는 것들은 모호하다, 결코 편하지 않다. 안 에르보에게 창의력이란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의 불편과 막막함을 견디는 자세를 의미했다.  220

전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도시에서 살아본 적이 없어요. 어릴 땐 늘 나무를 타고 놀면서 나무의 감촉을 느꼈습니다. 복잡하게 뻗어나가는 나뭇가지의 흐름, 시냇물 소리같이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티티새, 울타리 사이 빈 공간에서 부서지는 햇빛…. 이런 자연 속 소소한 풍경을 쳐다보면서 걸핏하면 몽상에 빠졌죠. 222

마음이 편하지 않으면 몽상을 할 수 없어요. 아이가 몽상의 세계로 안심하고 떠나도록 허가해주는 것. 전 그게 어른이 해야 할 역할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223

어머니 덕분에 같은 단어라도 시대에 따라 뉘앙스가 달라진다는 것, 단어 하나에도 눈에 보이지 않는 역사가 퇴적되어 있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224

손에 책을 든 아이는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는 문화가 있어요.  226

무엇이 저에게 힘을 주었는가 떠올려보면 ‘있음’ 그 자체였습니다. 부모님이 곁에 함께 있어주는 것 그 자체요. 유년기는 뭘 이루겠다는 목적의식 없이 세상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시기입니다. 부모님이 제게 주신 가장 큰 유산은 기다리는 법을 훈련시켜주신 겁니다. 수익성이나 본전 계산 없이 경험을 내 것으로 소화하는 시간들을 주셨어요. 새소리를 듣기 위해 바위 위에 앉아 있다가 돌아오는 일, 시냇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다 돌아오는 일처럼 사회의 기준으로 봤을 땐 아무 쓸모없는 일에 시간을 써도 불안하지 않은 사람이 되게 키워주신 걸 가장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226

저는 글 혹은 그림을 이용해 책을 짓는 게 아닙니다. 글과 그림 사이, 눈에 보이지 않는 빈 공간에서 책을 짓습니다. 독자 안에 있는 무언가를 톡톡 건드려서 꿈꾸게 만들려고 책을 만듭니다. 229

아이가 모호함과 함께 사는 법도 깨우쳐야 해요.  230

제게 은유는 실체가 있는 단단한 존재, 이를 테면 나무, 커피포트 등을 닻으로 삼아서 추상적인 사유를 묶어두는 작업입니다. 눈에 보이는 물건을 보면서 보이지 않는 이면을 상상하는 거죠. 질문하는 자세를 유지하는 일이에요. 예를 들어 나무는 땅 윗면에서 나뭇가지가 뻗어나간 만큼 땅 속 뿌리도 같은 비율로 퍼져 있습니다. 그 모습을 독서와 연결 지어봅니다. 뿌리는 책에 직접적으로 인쇄되지는 않았지만 작가가 가진 정신적 토양을 은유하고, 나뭇가지와 잎사귀는 독자의 내면에서 완성되는 이야기를 은유한다고 생각해볼 수 있는 거죠. 이렇게 관점을 바꿔보는 건 놀이 같은 것입니다. 아직 놀 줄 아는 능력을 잃지 않은 아이들은 누구나 이런 발상의 전환을 하죠.  233

자신만의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일, 그 관점을 바탕으로 필요한 정보와 불필요한 정보를 골라내는 일, 자신의 관점으로 세상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무엇인지 파악하는 일… 이런 것들이 창의성 아닐까요.  234

훈련한 시간이 10년이 넘다 보니 테크닉적으로 거의 모든 기법을 숙달한 상태로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벽에 부딪혔습니다. 익숙하고 완벽한 그림에선 새로운 통찰이 나오지 않거든요. 그래서 숙련된 오른손을 놔두고 왼손으로 그려봤습니다. 그 과정에서 서투름의 미학을 깨달았어요. 자기 안에 잠자고 있는 창의성을 깨우려면 불편한 일, 해보지 않은 일, 잘 못하는 일,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에 뛰어들어야 해요. 편안함 안에서는 세상을 보는 다른 관점을 얻을 수가 없어요.  234  

어차피 졸업하면 다른 직업을 갖게 될 거니까 학교에 있는 동안은 ‘어떻게 하면 내 머릿속 질문들을 그림책의 형태로 옮겨 놓을 수 있을까’만 생각하면서 최대한 멀리까지 가보고 탐험하자고 결심했죠.  역으로 제 인생에서 가장 창의적인 시기를 보낸 것입니다.  236 

서투름은 살아 있음의 증거입니다. 인간미는 서투름에서 나옵니다.  236

아이는 내 삶의 중심이 아니라 주변이다 라고 생각합니다. 나의 일부도, 아이 아빠의 일부도 아닌 완전체로서 독립된 인격이라고 봅니다. 모든 생활의 중심이 아이 위주로 돌아가면 아이 입장에서는 성인 자리에 놓인 것처럼 책임감을 느낍니다. 그 압박감이 아이의 성장을 막는 거예요.  239

우선 들어주는 게 중요해요. 대신 아이의 질문을 엄마의 숙제로 여기지 않고 모르면 모른다고 합니다. 한데 아이들은 자신 안에 있는 걱정이나 두려움을 꺼내려고 질문을 할 때가 많아요. 자기표현의 한 형태죠. 239

언어가 가진 음악성을 최대한 즐기려면 소리 내서 읽는 것이 좋습니다.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마음껏 상상하며 여행하세요. 그림을 볼 땐 ‘이건 뭘까 어떤 의미일까’ 질문하면서 관찰해보세요. 마지막에 교훈을 찾지 마세요. 모든 것을 다 이해할 필요는 없습니다. 240   

[발제]

2년 전에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땐 ‘비가 올 거란’ 현상을 두고 어른과 아이가 전혀 다른 시간을 보내는 것에 눈이 갔다. 걱정과 불안 속에 있는 어른은 어떤 것도 즐기지 못하고 막연히 있을 뿐이었다. 비가 오기 전과 후 그들은 내면도, 서 있는 자리도 그대로였다. 그저 주어지는 대로 살아가던 내 모습과 닮아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살고 싶은지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을 현실로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새롭게 느끼고 배워가는 아이들의 모습이 더 대비되어 다가왔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걸 인식하지 못할 때와 인식할 때의 삶의 모습의 차이를 어른과 아이의 대비되는 모습으로 은유되어 그려진 게 아닐까. 그런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가의 표현 방식도 마음에 들었다. 설익어 보이는 다양한 표현 기법, 색감, 구도, 감각적인 언어, 여백이 살아있는 표현 다 좋았다. 감각적인 언어는 불어로 읽으면 더 리드미컬하게 들릴 것 같았다.

“비가 올 거래” 누르와 닐은 강을 바라봐. 강에는 구름도 그늘도 없어. 강은 한시도 가만있지 않고 늘 변하지. 

강은 말처럼 달리며 말해. 따닥따닥 빗방울이 떨어질 거야. 시냇물은 속삭이며 말해. 기다려. 들어 봐. 하루가 길어져. 비가 오면. 

누르와 닐은 서로 바라봐. 비가 오면 하루가 길어진다고? 둘은 출렁이며 춤추는 물을 바라봐.누르와 닐은 떠나기로 결심해. “먼저 떠나는 거야. 비가 오기 전에 먼저. 비가 우리를 가두기 전에.”

언덕 아래에선 물이 점점 높아져. 누르와 닐은 상상해. 저기, 물이 시작되는 맨 꼭대기에서 얼음이 녹아 우지끈 소리를 내며 깨지는 것을. “비가 올 거야.”라던 어른들 말이 맞았어. 밤의 어둠이 내려와. 비도 그쳤어. 달님이 미소 지어. 둘은 주워 온 밤을 구워. 불이 타닥타닥 소리를 내면서 불티를 하늘로 날려 보내. 

닐은 바람에 흔들리는 숲속에서 잠이 들어. 밀려오는 파도처럼 바다의 소리가 닐의 꿈속으로 스며들어. 누르는 깨어 있어. 누르는 기분이 좋아. 땅에서는 물 냄새가 나. 마지막 불꽃이 가물가물 떨리고 있어. 하지만 누르는 집을 생각해.

요며칠 생각나는 분이 있다. 2018년 나와 함께 wpi상담 공부를 시작한 분인데, 이틀 전 부고를 전해들었다. 얼마 전 57세 생일을 지난 분이다. 이분은 20대 중반의 나이에 결혼을 하고 아무 연고도 없는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가셨다. 무슨 계획을 가지고 간 건 아니지만, 이제 독립이다~ 하는 마음으로 떠난 이민이었다. 아르헨티나 난전에서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옷장사를 하고, 나중엔 직접 옷을 디자인하고 대박 아이템이 나오기도 했다. 가게를 확장하고 100평짜리 아파트까지 사봤다고 했다. 40대에 가게를 정리하고 전원 생활을 즐기다 이젠 카페를 오픈해 너 샌드위치 먹으러 여기까지 온다는 말도 들었었다고. 

언제나 자신 앞에 주어지는 상황을 자신의 능력으로 헤쳐가며 하나하나 만들어간 분이었는데.. 누가 봐도 대단하고 멋있다 할 분이었는데.. 그런 분이 유튜브 방송의 인터뷰를 통해 자신의 삶을 정리한 것이 3년 전의 일이었다. 지난 날은 나 잘난 맛에 살아왔지만, 이젠 좀 무식하게 돌격 앞으로~ 하지 않고 하나하나 따져가며 통찰력 있게 살고 싶다는 말을 하셨다. 황박사님 같은 상담사가 되고 싶다며 상담공부도 시작하셨다. 공부를 해나가는 과정은 멋진 내가 되어가는 과정이 아니라 찌질한 나를 마주하는 과정이었다고 했다. 그런 마음을 몸으로 드러내기라도 하듯 21년 3학기째를 맞이하며, 선생님은 췌장암 4기라는 진단명을 받아들었다. 처음엔 단지 아랫배에 만져지는 근육이었는데.   

진단 후 여러 번의 공개 상담이 있었지만 선생님은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 힘들어하셨다. “이렇게 다 말을 못하는 것도 내가 찌질하게 느껴져서 그런 거겠죠?” 라는 질문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셨다. 그 후 지금까지 2년의 시간이 있었지만, 끝내 앞으로의 인생은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사는 게 스스로에게 의미가 있을지 마음을 정하지 못한 채 단지 지나온 삶을 막연한 후회와 회한으로 의미짓고 암환자로서만 매일을 살아갈 뿐이었다.

이분의 삶을 바라보며 안 에르보 작가의 메시지에서 다가온 건 ‘질문하며 다르게 보기’ 보다는 ‘자기 긍정’ 이었다. 안 에르보 작가는 막연함 속 질문을 통해 자신만의 답을 구체화해나가는 삶의 과정을 그림책의 형태를 빌어 들려주었다. 질문을 던지든 몽상을 하든 그걸 하는 건 나 자신이었다. 나를 인정하고 사랑하는 사람만이 나만의 답을 만들어갈 힘을 낼 수 있다. 그래서 가장 먼저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내가 살아온 삶의 방식은 어떤지 그걸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박선생님은 너무나 당차고 멋지게 살아온 삶을 스스로 찌질하게 받아들일 때 그 마음이 어떤 삶의 결과로 나타나는지를 나에게 가르쳐주셨다. 이젠 부디 떠나간 곳에서 안녕하시기를 빌어본다.

[신은경]

그림책은 역시 누군가 읽어주고, 누군가는 그걸 듣고 드는 생각을 표현하고, 그런 다른 사람의 생각을 들으며 또 내 생각을 확장해나가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누군가의 생각을 깨운다는 게 그림책이란 장르가 변주해내는 매력이죠. 명희샘이 제 발제글 중 "비가 올 거야"라던 어른들 말이 맞았어. 라는 부분을 보고 그럼 얘들이 비가 안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한 건가? 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 말을 듣고 제가 든 생각은 비가 올지 안 올지 누군가의 말이 아니라 나 스스로 삶을 살아내며 확인해가는 게 내가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거구나 하는 거였어요. 하나하나 새로운 경험을 하며 경쾌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그림책이었습니다. 마지막에 읽어주신 그림책도 다른 의미로 참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