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는 뽑히지 않는다
이동민
지인이 대구 근교의 밭을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다. 도시 생활이 바쁘니 농사를 지을 형편이 안 된다나. 원하는 만큼 땅을 빌려줄테니 주말농장으로 이용해보란다. 나는 아직은 바쁘게 산다는 핑계를 대고 고개를 저었다. 농사를 짓겠다며 선 듯 나서는 사람이 없다고 하였다.
은퇴하고 시골에 300평의 땅을 마련하여 고추 농사를 지어보았다는 분이 말했다.
“농사요. 멋 모르고 시작하였다가는 수익은커녕 몸만 상해요. 그거 함부로 하는 거 아닙니다.”
그 사람의 말에 따르면 ‘잡초’ 때문이었다. 밭을 메고 돌아서면 또 수북히 자라 있고, 잡초 뽑는 일은 끝도 없는 반복이라며, 시지프의 신이 벌 받는 기분이 이렇구나 싶다. 했다. ‘뭐, 주말농장요. 일부러 벌 받는 짓을 선택할 일이 무어 있어요.’한다. 농작물보다 잡초가 생명력이 훨씬 더 강하니 빨리 자란다고 했다.
잡초라면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이다. 아무리 험한 조건에서도 결코 쓰러지지 않는 끈질김이 바로 잡초의 대명사이다. 그래서 인간사가 힘들다고 할 때 충고하는 말에 ‘잡초’가 자주 등장한다. 그러나 농사를 지어본 사람의 반응은 싸늘하다.
“잡초처럼 ------”
잡초는 아무리 불리한 조건이라도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도 잡초처럼 절대로 포기하지 말고 끈질게 살아라. 잡초의 강인함을 배우자. 우리는 잡초를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래서 잡초처럼 살아라고 한다. 흔히들 사회의 밑바닥에서 사는 사람을 잡초로 비유한다.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을 좋은 점으로 말한다. 민초라는 말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도 하층민을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노인 복지 회관에서 상담을 맡아 봉사활동을 하는 친구가 있다. 긴 삶을 살았고, 이제는 복지회관에 나와서 생의 마지막을 보내는 사람에게 여유를 가지도록 도와주는 일을 한다고 했다. 노인이라면 삶의 굴레에서 벗어나서 여유롭게 사는 사람이 아닌가. 마음을 비우고, 마음이 비워지면 감정이 잔잔해져 마음에는 작은 물결도 일어나지 않고------, 내 말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끼어든다. 감정이 잔잔한 사람이 전혀 아니라는 거다.
“영감탱이들이 더 잘 싸운데이-. 어린애보다 더 어린애 같데이.”
노인복지 회관에서 노인들에게 사교춤을 가르치나 보다. 하루는 영감탱이 둘이 싸움을 하느라 시끄러웠다. 자기의 파트너였던 할머니가 오늘은 다른 영감탱이의 파트너가 된 것이 싸움의 불쏘시게 였다. 자기의 파트너를 가로 챈 것은 자기를 무시하였다는 것이다.
“노인이 되면 마음이 많이 여유로워지는 것이 아닌가.”
그건 잠언집에나 나오는 말이란다. 잠언집의 좋은 말은 온실 속에서 핀 꽃이나 같다. 그런 꽃은 복지회관 같은 야지(野地)에서는 피지 않는다. 복지회관에는 잡초만 자라서 야생화만 핀단다.
친구가 ‘잡초’라고 한 말이 재미있다. 친구 말을 더 들어보자.
“할아버지, 화가 왜 났어요.”
“학교도 못 다닌 촌놈이라고 날 무시하잖아요.”
무시하는 말을 하는 사람이 없는데도 듣는 것을 보면 신기하다. 가슴 속에 자라 있는 잡초 때문에 들린다며, 잡초가 말소리를 골라준다는 잡초론을 펼친다. 하는 말이 그들 앞에서 촌떼기라거니, 대학나왔다고 자랑하는 것은 금기어라고 하였다. 덧붙여서 너나 나나 우리 모두의 맘 속에는 잡초가 자라고 있다면서 잡초론을 강조했다.
그 말이 재미있다. 내 맘 속에는 어떤 잡초가 자리고 있을까. 나를 헤집어 보았다.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끙끙거렸다면 그것이 나에게 자라는 잡초이다.
예전에 내가 쓴 글의 한 줄을 붙잡고 시비를 걸면서 나를 비난하는 사람이 있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그가 앞장 서서 나를 비난하다니------, 그때 너무 분해서 며칠 밤을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내가 쓴 글이 잘못이다는 생각도 물론 하지 않았지만, 나는 사람에게 더 분노했다. 내가 베푼 게 있는데, 그런 그가 나를 이렇게 대하면 안 되지. 이 생각이 나에게 잠을 뻬앗아 갔다.
그리고 오랜 세월이 흘렀다. 지금도 그 사람은 용서되지 않는다. 겉으로는 아닌 척 해도 내 맘 속에서 끈질긴 생명력으로 자라는 잡초임이 분명하다. 금언집대로라면 잡초는 뽑아버려야 하는건데 뽑지 못하다니. 잡초는 뿌리가 깊어서 강한 생명력을 지닌다는 것쯤은 잘 알면서도 아직까지 내 안에서 자라고 있는 것은 내가 수양이 안 된 저질 인간인양 자책한다.
교장 선생님을 은퇴하고, 고향 마을을 들락거리면서 농사를 짓는 친구가 있다. 잡초 때문에 농사짓기가 힘들지 않느냐는 내 말에, ‘친환경 농법으로 짓는다.고 했다.
“그게 뭔데.”
잡초를 뽑지 않고, 농작물과 잡초가 함께 자라도록 하는 농법이란다. 그런 게 있느냐는 나의 의심스런 질문에 그런 게 있단다. 노인네가 하기 좋은 농법이란다.
친 환경 농법이라. 아하, 맞다. 내 맘 속에도 농작물과 잡초를 함께 자라게 하자, 어차피 뽑히지 않는 잡초인데. 마음 속에 그냥 안고 가자. 성인군자인척 하지 말고 인간으로 살자. 화가 나면 화도 내고, 싸워야 한다면 싸우기도 하고.
나는 뽑히지 않는 잡초를 억지로 뽑으려 하지 말고, 곡식을 맺어 주는 농작물과 함께 지니기로 했다. 그렇게 마음을 정해도 편해지는 것도 아니었다. 어쩌니, 뽑을 수 없다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