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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01월31일(수요일) 서울 [덕수궁&중명전&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서울유관순기념관&배재학당 역사박물관&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 탐방기
08:39~09:06 연신내역에서 지하철 3호선을 타고 종로3가역으로 가서 1호선으로 환승하여 시청역으로 이동한 후 시청역 1번 출구로 나옴 [27분 소요]
탐방지 : 서울 [덕수궁&중명전]
[덕수궁(德壽宮)
이칭별칭 : 경운궁(慶運宮), 정릉동행궁(貞陵洞行宮)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정동)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조선시대 고종의 거처로 이용된 궁궐. 사적.
덕수궁은 처음 월산대군의 집터였던 것을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거처로 사용되어 정릉동 행궁으로 불리다가 광해군 때에 경운궁으로 개칭되었다. 이후 1907년 순종에게 양위한 고종이 이곳에 머무르게 되면서 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의미에서 덕수궁(德壽宮)이라 다시 바꾸었다.
1897년(광무 1)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부터 중화전을 비롯하여 정관헌, 돈덕전, 즉조당, 석어당, 경효전, 준명전, 흠문각, 함녕전, 석조전 등 많은 건물들을 지속적으로 세워졌다. 이곳은 고종의 재위 말년의 약 10년간 정치적 혼란의 주무대가 되었던 장소로,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여럿 지어진 것이 주목된다. 1963년 1월 18일에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역사적 변천
덕수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초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서 이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정릉동 행궁’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죽고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그해 창덕궁이 완성되었으므로 광해군은 이곳을 떠났으며, 경운궁이라는 궁호를 붙여주었다.
조선 후기에 덕수궁은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고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를 이곳에 유폐시킨 일이 있고,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고종 말년 조선 왕조가 열강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기자,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897년(광무 1)에 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를 전후하여 궁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고, 정관헌(靜觀軒)·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의 건물도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광무 8)에 궁에 큰불이 나서 전각의 대부분이 불타 버렸다. 그러나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05년(광무 9)에 즉조당(卽阼堂)를 비롯하여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준명전(浚明殿), 흠문각(欽文閣),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으며, 중화문(中和門), 조원문(朝元門) 등이 세워졌다. 이후 1906년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되었다. 이후 이 문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되었고 궁의 정문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으며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910년에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다.
한편,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1897년(광무 1)에 영친왕 이은(李垠)이 여기서 태어나서 1907년(융희 1)까지 거처하였고, 1904년(광무 8) 헌종의 계비 명헌태후 홍씨(明憲太后洪氏)가 인수당에서 별세하였으며, 황태자비 민씨(閔氏)도 석어당에서 별세하였다. 1907년(융희 1) 8월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하였고, 고종의 순헌귀비 엄씨(純憲貴妃嚴氏)가 즉조당에서 별세하였다. 고종은 1907년 왕위를 물려주고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이와 같이 덕수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약 10년간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며, 궁내의 각 건물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그 뒤 별다른 사건을 겪지 않다가 1945년 광복 후 덕수궁 석조전에서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려 한반도 문제가 논의되었으며, 1947년 국제연합한국위원회가 이 자리에 들어오게 되어 덕수궁은 새로운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석조전은 6·25전쟁 중에 내부가 불탔다. 이후 덕수궁은 공원으로 바뀌어 일반에게 공개되었고, 석조전은 1986년까지 국립현대미술관으로 활용되었다.
내용
덕수궁은 당초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사가(私家)이던 것을 선조 때 임시로 왕이 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이 된 것인 만큼, 궁이 자리잡은 위치나 건물의 배치에 있어서도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과는 다른 면모를 보인다.
그 위치는 한성부(漢城府)의 서부 황화방(皇華坊)과 정릉동(貞陵洞) 일대로 이곳은 원래 태조의 계비 강씨(康氏)의 무덤인 정릉(貞陵)이 있던 곳이다. 능은 태종 때 옮겨지고 그 자리에 월산대군의 집이 지어졌던 것이다.
이곳은 도성 내의 주요 가로와도 직접 면하여 있지 않은 곳으로 조선 후기에 제작된 고지도에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이곳은 궁이 있는 곳으로는 여겨지지 않던 것으로 보인다. 덕수궁은 결국 고종 말년에 왕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면서 갑자기 궁궐로서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건물의 배치도 이때 들어와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현재의 상태에서 그 위치를 알아보면, 궁의 서쪽은 미국대사관 남쪽 길을 따라 러시아공관이 있던 언덕 일대와 신문로 일대에 해당되고, 북쪽은 영국대사관을 거쳐 성공회(聖公會) 앞길을 따라 덕수초등학교 담 위쪽을 지나 신문로에 이르는 지역에 해당된다. 이 자리에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 이후로 영국, 미국, 러시아의 공관 터를 내주면서 궁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고 서양식 건물이 지어지고 도로가 생기게 되었다.
건물의 배치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정전과 침전(寢殿)이 있는 부분, 선원전(璿源殿)이 있는 부분, 그리고 서양식 건물인 중명전(重眀殿)이 있는 부분이다. 이 가운데 궁의 중심이 되는 곳은 정전과 침전이 있는 곳으로, 정전인 중화전이 남향하여 있고 정남쪽에 중화문, 그 남쪽에 정문인 인화문(仁化門), 동쪽에 대안문, 북쪽에 생양문(生陽門), 서쪽에 평성문(平成門) 등이 있었다.
정전의 뒤편에는 석어당과 즉조당이 있는데, 이 두 건물은 고종이 이곳에 오기 전부터 있던 건물들이다. 정전의 동편에 침전인 함녕전이 있고 함녕전의 서쪽에 덕홍전(德弘殿), 북쪽에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 동북쪽에 수인당(壽仁堂), 동쪽에 영복당(永福堂)이 있었다. 중화전의 서북쪽에도 많은 건물이 있었으며 관명전(觀明殿)·보문각(寶文閣) 등이 중요한 것들이었다.
중화전은 처음 중층지붕의 장대한 규모로 세워져, 2층으로 조성된 월대(月臺) 위에 정면 5칸, 측면 4칸의 건물이었다. 그러나 1904년 화재 뒤 재건되면서 규모를 줄여 단층건물로 만들었다. 중화전 주변에는 사방에 행각이 세워져 있어 중화문에 연결되어 있었으나 이것도 철거되어 없어졌다. 중화문 역시 당초는 중층건물이었으나 재건되면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물로 축소되었다.
함녕전은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형식(翼工形式)의 간결한 건물이다. 1985년 중화전 및 중화문과 함녕전이 보물로 지정되었다.
석어당은 궁내 유일한 2층 전각으로 본래 이 건물은 한때 인목대비가 유폐되었던 곳이며, 역대 국왕들이 임진왜란 때의 어렵던 일을 회상하여 선조를 추모하던 곳이기도 하다. 1906년 재건된 건물이 지금 남아 있으며 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이다.
정관헌은 서양식 건물로 고종이 다과를 들고 음악을 감상하던 곳으로, 한때는 태조·고종·순종의 영정을 봉안하기도 하였다. 조적식 벽체에 석조기둥을 세우고 건물 밖으로 목조의 가는 기둥을 둘러 퇴를 두르듯이 짜여진 건물이다.
평성문 밖 지금 미국대사관 서쪽에는 이층 서양식 건물로 접견실 또는 연회장으로 쓰던 중명전이 있었고, 그 북쪽에 만희당(晩喜堂)·흠문각, 서쪽에 양복당(養福堂)·경효전 등이 있었다.
이 주변 일대의 건물에 대하여는 전체를 수옥헌(漱玉軒)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선원전이 있던 지금 덕수초등학교와 전 경기여자중고등학교 일대에는 선원전 외에 사성당(思成堂)·흥덕전(興德殿)·흥복전(興福殿)·의효전(懿孝殿)이 있었다.
이밖에 궁의 북쪽과 남쪽 담장에는 구름다리가 가설되어 러시아공관 북쪽 언덕에서 큰 길을 건너 경희궁으로 이어졌고 지금의 지방법원이 있는 자리로도 이어졌다. 남쪽의 구름다리는 그 건너에 과거 의정부(議政府)가 옮겨와 있었기 때문에 궁과의 내왕을 편하게 하기 위하여 설치한 것이었다.
궁의 배치는 1904년 큰 화재가 있은 뒤로 변화되었고, 서양식 건물들이 지어지면서 기존의 건물과 조화를 잃게 되었는데, 특히 나중에 지어진 석조전 등 서양식 건물들은 기존의 정전 건물들과 축(軸)도 일치되지 않고 그 위치도 정전과 인접하여 대규모로 지어지면서 종래의 궁궐의 공간적 규범을 깨뜨리고 말았다.
화재 뒤 건물이 중건되면서 나타난 가장 큰 변화는 정문의 변경이었다. 덕수궁의 정문은 정전의 정남쪽에 있던 인화문이었는데, 1906년 중건공사를 하면서 정전의 동쪽에 있던 대안문을 수리하고 그 명칭도 대한문으로 고쳐 이 문을 정문으로 삼았다.
이에 따라 궁으로의 진입은 동쪽 모퉁이에서 시작되어 서쪽을 보고 들어가다가 다시 동쪽으로 꺾여 정전에 이르게 되었다. 대한문은 1968년 도시계획에 의하여 덕수궁 담장이 안쪽으로 옮겨지면서 1970년에 안으로 옮겨졌다.
궁내에 서양식 건물이 들어선 것은 19세기 말부터이며, 이 가운데 돈덕전·석조전이 가장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돈덕전은 평성문 밖 북쪽에 있었으나 철거되었고, 그 남쪽 가까운 위치에 석조전이 세워졌다.
석조전은 정면 54m, 너비 31m의 장대한 3층 석조건물로, 이 건물이 들어서면서부터 이웃한 궁의 정전과 주변의 한식 건물들이 가지고 있던 고유한 건축구성에는 많은 변화가 생겼다. 더욱이, 석조전의 남쪽에 일본인들이 미술관을 세우고 그 앞에 서양식 연못을 만들면서 궁의 본래의 모습이 상당히 파괴되었다.
의의와 평가
덕수궁은 조선 말기에 궁궐로 갖추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구한말의 역사적 현장이었으며 전통목조건축과 서양식의 건축이 함께 남아 있는 곳으로 조선왕조의 궁궐 가운데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탐방코스 : [시청역 1번 출구~석조전대한제국역사관~석조전 심화해설 수강~대한문~광명문~함녕전~덕홍전~정관헌~석어당~즉조당~준명당~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석조전대한제국역사관~중화전~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 관람~돈덕전~덕수궁 후문~중명전]
탐방일 : 2024년01월31일(수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중구 정동 : 최저기온 1도C, 최고기온 8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3시간14분 소요)
09:06~09:08 시청역 1번 출구에서 탐방출발하여 덕수궁 매표소로 이동 [이 날 입장요금은 무료]
09:08~09:14 덕수궁 석조전대한제국역사관으로 이동
09:14~09:30 2024년1월24일 인터넷에서 사전 예약(예약번호 : 202401242451)한 석조전 심화해설(소요시간 65분~70분) 수강을 대기
[예약 확인 및 입장
- 예약자 이름과 전화번호 또는 접수증으로 확인
- 관람시간 3분 전부터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안내데스크에서 확인 후 입장 가능]
[해설 시작시간 경과시 입장할 수 없음]
* 09:30~10:41 석조전대한제국역사관 심화해설 수강 [소요시간 71분]
[주제 : 대한제국 황실 가족 (고종과 순종, 영친왕을 중심으로 한 대한제국 황실 가계와 인물의 생애)]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으로 재탄생
연합뉴스 기사 입력일 : 2014.10.07.
5년간 복원공사 마치고 대한제국 선포일인 13일 개관
(서울=연합뉴스) 김태식 기자 = 덕수궁 석조전이 대한제국 출범일인 오는 13일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난다.
덕수궁 관리를 전담하는 문화재청은 2009년부터 올해까지 지난 5년간의 석조전 복원 공사를 모두 마치고 대한제국역사관으로 다시 태어났음을 알리는 개관식을 이날 개최한다고 7일 밝혔다.
문화재청은 자주적 근대 국가를 지향한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면서 이 시대 최고 근대건축물인 석조전 복원의 건축사적 의의를 알리는 한편 대한제국의 사회 변화와 개혁을 확인하고 황실 생활상을 재현하는 전시를 구현하는 데 주력했다고 덧붙였다.
이를 위해 석조전 역사관은 크게 대한제국 황실의 생활상을 재현한 재현실과 전시실로 구성한다.
재현실은 완공 당시의 가구를 배치함으로써 대한제국의 현장감과 생동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며, 전시실에는 패널과 영상 등의 전시물이 있어 대한제국의 역사와 황실 가족에 대한 이해를 돕도록 한다고 문화재청은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보면 2층에서는 대한제국 황실 가계도와 관련 사진을 보여주며, 1층에서는 석조전의 탄생과 대한제국의 선포, 대한제국 황제 즉위와 퇴위 절차 등을 소개한다.
석조전에 입고한 가구는 총 133점. 석조전 건립 당시 고가구 41점과 영국에서 구입한 골동 가구 79점, 복제 혹은 새로 제작한 가구가 13점이다. 옛 가구는 원래 있던 자리를 찾아 배치했다.
대식당도 재현했다. 식기는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한 이화문 서양 식기를 참조해 재현 제작했으며, 테이블 장식은 20세기 초 영국 빅토리안, 에드워디안 양식을 채택하고 커트러리(cutlery)와 유리잔, 촛대는 20세기 초 영국 제품으로 충당했다.
재현실에는 황제 서재와 황후 거실, 그리고 귀빈대기실을 구현했다.
역사관 개관일인 13일은 1897년 광무황제(고종)가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황제로 즉위한 사실을 선포한 날이다.
문화재청은 "이날을 대한제국역사관 개관일로 택한 것은 대한제국의 의의를 되새기는 취지가 담겨있다"고 밝혔다. 개관일 덕수궁은 야간을 제외하고는 무료 개방한다.
석조전 복원 역사·전시 자문위원인 이태진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덕수궁은 우리 근현대사의 애환이 서린 역사의 현장"이라면서 "이런 대한제국의 아픈 역사를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 매우 뜻깊다"는 소회를 밝혔다.
석조전은 대한제국 광무황제(光武皇帝=고종)를 위한 공간으로 1898년 영국인 하딩(J·R Harding)이 설계하고 1900년 공사를 시작해 1910년 완공됐다. 석조전 옆 덕수궁미술관(국립현대미술관 분관)은 1938년 이왕가미술관(李王家美術館)으로 사용하기 위해 새로 지은 건물이다.
석조전은 영친왕(英親王·1897~1970)의 귀국 때는 숙소로 사용되다가 일제강점기에 이왕가미술관으로 변형되고 해방 이후에는 미소공동위원회 회의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하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국립박물관, 국립현대미술관, 궁중유물전시관 등지로 사용되면서 원형이 많이 훼손됐었다.
이에 문화재청은 2008년 원형 복원을 결정하고, 이듬해부터 올해까지 총예산 약 141억 원을 투입해 석조전을 복원했다.
문화재청은 이를 위해 "대한제국기 건립 당시의 설계도면과 옛 고증사진, 신문자료뿐만 아니라 영국과 일본 등의 석조전 자료들도 조사해 고증·확인했으며, 근대건축과 역사 등 관계 전문가의 조언을 구하는 등 복원에 충실을 기했다"고 덧붙였다.
역사관 관람 신청은 덕수궁 누리집(www.deoksugung.go.kr)을 통해 할 수 있다. 만 65세 이상 노인과 외국인 등은 1회당 총 5인까지 현장접수가 가능하다.
내부공간이 협소해 1회당 관람시간은 45분으로 한정한다. 1일 관람횟수는 평일 12회(총 240명), 주말 16회(총 320명)이며, 1회당 20명(인터넷 예약 15명, 현장접수 어르신과 외국인만 5명)에게 공개한다. 역사관은 당분간 임시로 무료(덕수궁 입장료 1천원 별도) 개방할 방침이다.]
* 10:41~12:01 [석조전대한제국역사관~대한문~광명문~함녕전~덕홍전~정관헌~석어당~즉조당~준명당~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석조전대한제국역사관~중화전~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장욱진 회고전 (가장 진지한 고백) 관람~돈덕전~덕수궁 후문]의 동선으로 덕수궁을 탐방
[덕수궁 대한문(德壽宮 大漢門)
덕수궁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대안문(大安門)이었다. 대안문은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의 동쪽에 위치한 문으로, 처음부터 경운궁의 정문으로 사용되지 않았다. 경운궁의 본래 정문은 인화문(仁化門)이었는데, 1902년 경운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을 건립하면서 인화문을 철거하였고, 그 결과 덕수궁의 동문이었던 대안문이 덕수궁의 정문이 되었다. 건물의 명칭이었던 대안(大安)은 ‘나라가 편안하고 국민을 편안하게 하라’라는 뜻이었다. 1904년 경운궁에 발생한 대화재로 인해 경운궁의 중요 전각이 대부분 피해를 받았는데, 대안문 역시 피해를 입어 수리를 진행하였다. 1906년에 수리를 완료였고, 이 과정에서 건물의 이름을 대한문(大漢門)으로 바꾸었다. 당시 현판의 글씨는 남정철(南廷哲)이 썼다.
대한문의 원래 위치는 지금의 자리에서 33m 가량 동쪽으로 떨어진 곳이었다. 태평로 도로가 확장되고, 덕수궁 궁역이 축소되면서 대한문은 태평로 도로 한가운데에 위치하였고, 1970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건축물이다. 지붕은 우진각지붕으로 용마루와 추녀마루에 회반죽을 발라 양성바름을 하였고, 망새와 용두, 잡상 등을 설치하여 지붕 위를 장식하였다. 건립 당시에는 문 앞에 월대와 계단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대한문의 기단과 계단은 훼손되었고, 2021년부터 대한문 앞 월대를 발굴 및 복원하는 공사를 진행하고 있다.]
[덕수궁 함녕전(德壽宮 咸寧殿)은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의 덕수궁에 있는 고종황제가 거처하던 침전이다. 1897년에 지어졌으며, 1904년 함녕전에서 시작된 덕수궁 대화재로 소실되었고 1906년에 재건되었다. 1985년에 대한민국의 보물 제820호로 지정되었다.
역사
1897년 2월 고종이 아관파천을 마치고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에는 아직 함녕전이 지어지지 않아 즉조당을 침전으로 사용했다. 즉조당이 협소하여 침전으로 사용할 새로운 건물이 필요했고, 같은 해 6월 19일 상량문제술관으로 윤용선을 임명하는 등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때 경복궁에 있던 건물인 만화당(萬和堂)을 이건하여 이를 개수하여 건설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궁궐지》에는 36칸의 만화당 건물을 경운궁으로 이건하였다 설명하는데 만화당과 함녕전의 전각 규모와 문의 배치가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승정원일기》, 《매천야록》 등을 근거로 옮겨진 만화당 건물은 어진봉안처로 삼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지어진 함녕전은 1904년에 아궁이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화재가 발생하여 전소된다. 이 때 발생한 불은 경운궁 중심을 덮쳐 당시 중층으로 지어진 중화전, 선조때부터 전해져오던 건물인 즉조당과 석어당을 모두 파괴한다.
따라서 다시 지은 함녕전은 1904년 음력 3월에 주춧돌을 올렸고 8월에 기둥을 세운 뒤 12월에 마룻대를 올리는 상량을 마쳤다. 이 때 전체적인 구조에도 변화가 있었다.
1919년 고종이 여기서 사망하자 빈전과 혼전을 함녕전에 마련하였고 혼전은 효덕전(孝德殿)이라 하였다. 3·1 운동 당시 탑골공원에 모였던 군중 일부가 대한문을 통해 들어와 효덕전에 참배하고 만세를 이어가기도 하였다.
2009년에 행각을 복원하였고 2019년에 광명문을 원래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원하였다.
구조 및 기능
목조건물이다. 정면 9칸, 측면 4칸에 한쪽 후면 4칸이 더 붙은 'ㄱ' 자형을 하고 있으며, 익공으로 결구된 간결한 건물이다. 만화당을 옮겨 지었는데 만화당은 본래 침전이 아니었기 때문에, 함녕전에도 용마루가 남아있고 쇠서 1개의 몰익공 공포를 가진다.
고종(高宗)이 왕위를 물려준 다음 순종(純宗)이 창덕궁으로 옮기자 고종이 거처하던 침전(寢殿)이다. 행각(行閣)이 있었으며 정문은 광명문(光明門)이다.
행각
남행각은 전면 16칸인데, 왼쪽에서 7번째부터 3칸은 치중문이고 그로부터 3칸 건너뛰어서 한 칸은 평강문으로 추정한다. 서행각에는 향복당과 풍안당이라는 당호가 있었고, 문도 한 칸 있었다. 북행각은 정면 9칸 규모의 만희당이 있었으며 문도 한 칸 있었다. 민도리형식으로 지어졌으며, 홑처마로 구성되었고 지붕은 우진각지붕이었다.
북측행각 바깥에 1913년 구여당(九如堂)을 지으며 규모가 확장되었고, 복도를 조성하였다.
광명문
광명문(光明門)은 황제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다. 1897년에 지었다가 1904년에 화재로 소실되었고, 그 해 12월에 재건되었다. 이후 일제시대에 덕수궁을 공원으로 만들고 이왕가미술관을 지을 때 광명문을 미술관의 남쪽으로 이전했다.신기전, 흥천사명 동종, 자격루가 여기서 전시되었다.
2016년 광명문을 제자리로 이전하기 위해서 문화재청이 실시한 발굴조사 결과, 광명문과 배치형태가 같은 건물지 1동을 확인하였다. 건물지는 12기의 적심시설을 가진 정면 3칸, 옆면 2칸의 건물지로, 경운궁 중건 배치도(1910년) 상의 광명문지와 그 위치와 배치상태 그리고 평면형태가 같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후 '광명문 제자리 찾기' 프로젝트를 통해 2018년 원래의 자리로 이전되었다.]
[덕홍전(德弘殿)
일제시대 덕수궁의 알현실로 조성된 건물.
목차
1 개설
2 위치 및 용도
3 변천 및 현황
4 형태
5 관련사건 및 일화
개설
덕홍전은 원래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혼전인 경효전(景孝殿)으로 건립되었으나, 1912년에 고종황제의 알현실로 개조된 이후 덕홍전이라는 현판을 달았다. 덕홍전으로 교체된 이후 고종은 이곳에서 외빈과 신료들을 접견하였다(『순종실록부록』 5년 12월 2일).
위치 및 용도
덕홍전은 경운궁 내 함녕전(咸寧殿) 서쪽, 중화전(中和殿) 동쪽에 위치하고 있다. 본래는 경효전이라고 하여 혼전의 제례에 이용하였으나, 나중에 덕홍전으로 이름을 바꾸고 알현을 위한 장소로 사용하였다.
변천 및 현황
덕홍전은 원래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의 용도로 건립되었다. 경효전은 명성황후의 전호(殿號)이다. 1895년(고종 32) 을미사변으로 왕비가 돌아가시자 최초로 정해진 시호는 순경(純敬), 전호는 덕성(德成), 능호는 숙릉(肅陵)이었다. 당시 빈전(殯殿)은 경복궁태원전(泰元殿)으로 정했고, 혼전(魂殿)은 경복궁문경전(文慶殿)으로 정했다. 그러나 고종은 왕비의 장례를 바로 진행하지 않았다. 1896년 경복궁에서 경운궁으로 이어하는 아관파천을 단행했으며,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새롭게 경운궁을 정비하도록 지시했다. 이때 왕비를 위한 빈전으로 경복궁의 경소전(景昭殿)을 경운궁에 이건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1896년 9월 4일에 왕비의 시신을 경복궁 태원전에서 경운궁 경소전으로 옮겨 모셨다. 또한 1897년(고종 34) 1월 6일에는 왕비의 시호, 능호, 전호를 모두 새롭게 교체하였다. 시호는 문성(文成), 능호는 홍릉(洪陵), 전호는 경효(景孝)로 개칭하였고, 3월 2일에 시호를 다시 명성(明成)으로 바꾸었다.
고종은 1897년(광무 1) 경운궁으로 환궁한 이후에도 왕비의 장례를 바로 치르지 않고 대신 조선이 황제국에 오르는 의식을 거행했다. 1897년 10월 12일에 고종은 환구단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황제가 되었으며(『고종실록』 34년 10월 12일), 빈전에 나아가 왕후를 황후로 추존하였고, 명성황후의 국장은 11월 21일에 거행되었다. 명성황후의 혼전인 경효전은 이미 경소전으로 정해져 있었고, 우주(虞主)를 봉안한 이후 경효전의 역할을 담당했다.
1904년(광무 8) 경운궁에 화재가 발생했는데 경효전으로 사용하던 경소전 역시 소실되었다. 화재 직후 명성황후의 우주는 준명전(濬明殿) 서행각에 임시 봉안하였고, 후에 수풍당(綏豐堂)으로 옮겨 모셔졌다. 이후 수풍당이 경효전이 되었다. 경운궁 화재 이후 중건 과정에서 경소전이 위치하고 있던 곳에는 원래 모습대로 새로운 건물이 만들어졌다. 당시의 기록인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에는 건물명을 경효전으로 기록하고 있다. 재건된 경효전은 동쪽에 4칸의 이안청(移安廳), 서쪽에 4칸의 중배설청(中排設廳)을 두었고, 정면에 내삼문인 융안문(隆安門)과 좌우 각 4칸의 행각을 두었다. 행각 밖에는 12칸의 어재실(御齋室)과 4칸의 숙목문(肅穆門)을 두었다. 또 숙목문 밖에는 25칸의 ㅁ자형 건물인 장방처소(長房處所)와 3칸의 돈례문(敦禮門)을 두었다.
경운궁 중건을 통해 다시 경효전이 만들어졌지만 정작 명성황후의 우주는 돌아오지 못했다. 당시에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등 정세가 매우 불안해지면서 고종 역시 함녕전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계속 중명전(重明殿)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후에 고종이 함녕전으로 돌아오고 나서도 명성황후의 우주는 계속 수풍당(綏豐堂)에 머물렀고, 고종이 서거한 이후인 1921년 3월 31일에서야 창덕궁 선정전(宣政殿: 효덕전(孝德殿))에 모셔졌던 고종의 우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되었다.
그 와중에 경효전을 덕홍전으로, 즉 제례와 관련된 건물을 알현실로 바꾸는 공사가 진행되었다. 1912년 9월 10일자 『매일신보(每日申報)』에서 ‘덕홍전의 준공’이라는 제목 아래 “창덕궁 이왕 전하의 알현실 되는 인정전(仁政殿)에 의거하여 덕수궁에 건축 중인 덕홍전은 이미 낙성하여 6일 밤부터 점등하였는데 상세히 들은즉 공사비 6만여 원을 들여서 실내 장식과 다른 것들도 극히 화려한데 대벽화는 화백 천초신래자(天草神來子)의 것으로 필치가 용건하여 근래의 걸작이라더라.” 하는 글이 실려 있기도 하다.
공사가 진행되었다고 하지만 건물의 구조에는 큰 변화가 없었으며 다만 내부 마감은 크게 변했다. 바닥은 혼전[경효전]에 적합하게 전(甎)으로 마감되어 있었는데, 이것을 마루로 바꾸었다. 창호에는 커튼을 덧대어 설치했고 내부에 조명기구로 샹들리에를 설치하였다. 기존의 월대를 축소했고 진입 계단에 변화를 주었으며 동쪽의 함녕전, 서쪽의 귀빈실과 통행할 수 있도록 복도각을 설치했다. 현재도 복도각과 연결되었던 부분에는 서양식 판문이 설치되어 있어 당시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덕홍전으로 변경되면서 경효전 건물 자체는 크게 변하지 않았지만, 경효전 주위의 부속 건물들은 크게 변했다. 경효전이 있을 당시에는 주변 건물들이 모두 제례와 관련된 건물들이었기 때문에 이것이 모두 새롭게 바뀐 것이다. 이때에는 기존 관제인 궁내부(宮內府)가 해체되고 이왕직(李王職)이 들어선 시기였다. 덕홍전 공사가 진행되면서 덕수궁 소속 이왕직 청사가 이곳에 자리 잡게 되었고 찬시실, 귀빈실이 새롭게 만들어졌다. 덕홍전 전면의 삼문은 맞배지붕에서 팔작지붕으로 변경되었다. 귀빈실과 덕홍전 전면의 행각은 현재도 경운궁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만들어진 건물들에 대해 『매일신보』 1914년 1월 1일자 기사에서는 “일선제도(日鮮制度)를 절충한 것”이라고 했다. 즉 조선과 일본의 건축 기법을 모두 합한 건축물이라는 내용이다. 건축물 외형은 조선의 전통 양식을 따른 듯하지만 내부 구조체는 일본의 방식을 채택했기 때문이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을 보면 건축 외형이 조선의 전통적인 양식을 따랐다고 하지만 전체적인 입면 비례가 전통적인 조선의 건축과는 확연히 다를 뿐만 아니라 건축적으로도 매우 수준이 떨어지는 건축물임을 알 수 있다.
형태
덕홍전은 정면 3칸, 측면 4칸의 평면을 하고 있고, 기둥은 방형기둥을 사용했다. 지붕은 팔작지붕을 하고 있으며, 이익공의 공포를 갖춘 건물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덕홍전은 고종의 알현 장소였으므로 일제시대 총독과 고위 관료들의 신임 인사 및 외교사절들의 인사를 받던 곳이었다.]
[덕수궁 정관헌(德壽宮 靜觀軒)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세종대로 99 (정동 5-1)
건축시기 : 1897년 ~ 1901년 사이 (창건)
설계자 :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덕수궁에 있는 양관, 덕홍전과 함녕전의 북쪽 언덕에 있다.
덕수궁은 근대에 지은 황궁이니만큼 경내에 서양식 건물, 양관(洋館)이 여러 채 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정관헌이다. 다만, 다른 양관들과 달리 한국 전통 가옥의 일부 요소가 혼합된 형태이다. 러시아 제국 건축가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이 설계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현존하는 덕수궁 내 양관 중 가장 오래되었다.
‘정관(靜觀)’ 뜻은 '조용히(靜) 내다 본다(觀)'이다.
건물의 용도는 확실하지 않으며 여러 의견이 있다. 그 중 고종이 커피를 마시며 음악을 감상했던 카페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공식 기록에는 그런 내용이 없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어진 관련 기사만 나온다. 1901년(광무 5년) 2월에 태조 이성계의 준원전 본 어진을 이곳에 모시라는 기록을 시작으로, 고종과 순종의 초상화를 보관하고 그렸다는 기록이 있다. 마지막으로 나타나는 《순종실록부록》의 기사도 1912년에 여기 있던 어진들을 중화전으로 옮겼다는 내용이다.
실록보다 더 기사량이 많은 《승정원일기》에는, 어진 외에도 신하들을 접견한 것과 봉심(奉審 : 왕명으로 왕실의 사당이나 무덤, 초상화 등 여러 시설과 물건들을 관리하고 점검하던 일)에 대한 내용이 보인다. 그러나 역시 휴식이나 커피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정관헌이 애당초 카페였는지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있다.
1915년 덕수궁 실측 자료인 〈덕수궁 원안〉에 따르면, 내부에 서양식 욕실이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지하층에는 조리시설을 갖춘 주방이 딸려 있었다. 이를 통해 정관헌의 정확한 용도는 알수없으나, 적어도 일상적인 생활이 가능한 전각으로 지어졌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전용카페는 아니더라도 황실의 휴식 공간임은 맞다는 주장도 있다. 1920년 5월에 《매일신보》에 실린 기사 〈자규(子規)야 우지마라 주인(主人) 잃은 덕수궁(德壽宮)을 백량동작생황진이 옛이야기가 아니로구나〉에서는 정관헌을 '고종이 아기였던 영친왕과 함께 여름 더위를 잊던 곳'이라고 언급했다. 그리고 정관헌은 황실 가족들이 살던 내전 권역에 있다. 내전의 일을 공식적으로 잘 기록하지 않는 관습을 고려하면, 기록에 어진 내용만 나온다해서 섣불리 카페나 휴식 공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정확한 창건 연대는 모른다. 다만, 현재 남아있는 덕수궁의 건물들 중 즉조당, 석어당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1897년(건양 2년) 이후에 처음 지은 것이고, 상술한 1901년(광무 5년)에 적힌 태조 어진의 정관헌 봉안 기록을 종합하면, 저 사이에 건립한 듯 하다.
1919년 고종 승하 이후 덕수궁은 비었고 1933년 일제는 덕수궁을 공원화하면서 많은 전각들을 허물었다. 그럼에도 정관헌은 살아남았다. 다만, 관람객들을 위한 찻집, 카페로 쓰이면서 건물 구조도 바뀌었다.
8.15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덕수궁 휴게실'이라는 이름으로 기능했다. 1954년 전국문화단체총연합회에서 주최한 광복절 기념 음악회를 비롯하여 각종 모임 및 행사가 이따금씩 열렸다.
윤정희가 출연한 1977년 영화 〈야행〉에서 카페로 영업 중이던 정관헌의 내부 모습이 잠깐이나마 나온다. 현재와는 다르게 칸마다 쇼윈도가 설치되었고 기타 현대식 시설도 갖춰져 있었다.
문화재청에서 2004년 2월 6일 등록문화재 제82호로 지정했다. 그러나 이미 덕수궁 전체를 사적 제124호로 관리하고 있었기에 영역이 겹친다는 이유로 2008년 6월 23일 자로 지정 해제했다.]
[덕수궁 석어당(德壽宮 昔御堂)
건립기간 : 1904년(광무 8)
건축양식 : 중층 팔작지붕 익공(翼工)집
규모 : 1층 정면 8칸, 측면 3칸, 2층 정면 6칸, 측면 1칸, 중층
덕수궁의 침전(寢殿)으로 덕수궁의 정전인 중화전(中和殿) 뒤편에 있다. 건물의 명칭인 석어당(昔: 옛 석, 御: 어거할 어, 堂: 집 당)은 '옛 임금이 머물던 집'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으로 한양을 떠났던 선조가 1593년(선조 26)에 돌아왔을 때 머물던 건물이라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다.
역사
석어당(昔御堂)이라는 이름은 원래 덕수궁 즉조당에 붙여진 별칭이었다. 즉조당(卽阼堂)은 석어당의 북서쪽에 위치한 건축물로, 조선의 16대 왕 인조가 즉위한 장소인데, 1773년 영조는 ‘옛날에 왕이 머물던 건물’이라는 의미로 '昔御堂(석어당)'이라는 글씨를 어필로 써서 즉조당에 걸도록 하였다.
실제 석어당이 덕수궁에 건립된 것은 1896년(고종 33) 경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면서 경운궁이 궁궐로서의 격을 갖추도록 수리를 지시하였고, 이 과정에서 석어당이 건립되었다. 이후 1897년 고종은 경운궁으로 환궁하여 즉조당을 정전(正殿)으로, 석어당을 침전(寢殿)으로 사용하였다.
1904년 경운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경운궁에 있는 대부분의 전각이 불탔는데, 이때 석어당도 즉조당·중화전 등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의 석어당 건물은 화재 직후에 옛 모습 그대로 중건한 것으로, 당시 복원된 건물이 오늘날까지 전하고 있다.
구조 및 형태
덕수궁에서 유일한 2층 목조 건축물로, 건물의 크기는 1층 정면 8칸, 측면 3칸, 2층 정면 6칸, 측면 1칸이다. 일정한 길이로 가공한 장대석을 쌓아 기단을 만들었으며, 방형의 주춧돌 위에 사각 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초익공 형식의 공포를 올렸다. 석어당의 1층 중앙에는 대청마루를 두었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설치하였다. 서쪽 온돌방에 설치된 계단을 통해서 2층으로 올라갈 수 있으며, 2층은 누마루 형태로 설계되어 주변을 조망할 수 있다.]
[덕수궁 즉조당(德壽宮 卽阼堂)
덕수궁에 있는 전각으로, 광해군과 인조가 즉위한 곳이다. 석어당과 준명당 사이에 위치한다. 광해군과 인조가 이곳에서 즉위하였으며, 전각의 명칭인 즉조(卽阼)는 '임금의 자리에 오른다.'는 뜻으로 인조가 즉조당에서 왕위에 오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훗날 영조가 지었다.
역사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인해 경복궁과 창덕궁이 화재로 소실되었고, 의주로 피난을 갔다가 한양으로 돌아온 선조는 머물 곳이 없자 월산대군(月山大君)이 살았던 집에 거처를 마련하여 임시로 머물렀다. 광해군 때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물렀으며, 광해군과 인조가 경운궁(현 덕수궁) 즉조당에서 즉위식을 가졌다.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러시아 공사관에 머물던 고종은 1897년 환궁하면서 경운궁(현 덕수궁)을 법궁(法宮)으로 삼았고, 즉조당을 ‘태극전(太極殿)’으로 개명하여 정전(政殿)으로 사용하였다. 즉조당은 덕수궁 중화전이 완공될 때까지 덕수궁의 정전으로 사용되다가 1904년 덕수궁에 큰 화재가 일어나 소실되었고, 이듬해인 1905년에 복원되었다.
구조 및 형태
정면 7칸 측면 4칸의 건축물이다. 정면 3칸을 대청마루로 두었고, 나머지는 온돌방으로 설계했다. 장대석으로 쌓은 높은 기단 위에 네모 뿔대 모양의 주춧돌을 놓고 방형 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초익공식이며,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구성하였다. 좌측의 준명당(浚眀堂)과의 사이에는 담장을 놓지 않았고, 복도각으로 건물을 연결하였다.
현판의 글씨는 고종이 직접 쓴 것으로, '즉(卽)'자 옆엔 '어필(御筆)', '당(堂)' 자 옆에 '光武九年乙巳七月 日(광무구년을사칠월 일)'이라고 쓰여져 있다.]
[덕수궁 준명당(德壽宮 浚眀堂)
건립시기·연도 : 조선 말기, 1897년(신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덕수궁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대한제국기에 중건된 전각.
정면 6칸, 측면 4칸의 팔작지붕건물. 고종이 러시아공관으로부터 경운궁(慶雲宮, 현 덕수궁)으로 거처를 옮기기 위하여 많은 건물을 중건하였던 1897년에 새로 지었다. 내전(內殿)의 하나로 외국사신을 접견하던 곳인데, 현재의 건물은 1904년 불이 나 타 버린 뒤에 즉조당(卽阼堂)과 함께 지어진 것이다.
이 건물의 서쪽과 북쪽으로 가퇴(假退)를 덧달아 내놓았으며, 뒤쪽에 온돌방 4칸을 덧붙여 전체적으로 ㄴ자모양 평면을 이루고 있다.
왼쪽으로부터 2·3·4번째 칸은 대청으로 통하는 현관으로 개방하였으며, 대청은 침전에서 흔히 쓰는 3칸대청이 아닌 2칸대청이다. 대청 오른쪽에 온돌방을 두고 다시 그 옆 한 칸은 누마루로 구성하여 즉조당의 누마루와 구성상 대칭을 이루고 있다.
장대석 바른층쌓기한 높은 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다듬은 초석을 놓고 방주(方柱)를 세웠는데, 기둥 위는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고 주두(柱枓 : 대접받침)를 놓아 보머리[樑頭]를 받치고 있다. 또, 끝이 둥글게 된 보머리 밑에는 기둥 윗몸으로부터 초각(草刻)된 부재를 내어 이를 받치고 있는 초익공식을 이루고 있다.
기둥 사이 창방 위에는 소로[小累]들을 놓아 굴도리로 된 주심도리(柱心道里) 밑의 장여를 받치고 있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팔작기와지붕의 용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을 하지 않고, 용두(龍頭)를 놓아 장식하고 있다.
앞과 뒤의 대청 툇간(退間)에는 띠살창호를 달고 위쪽에 빗살로 된 교창(交窓)을 달았으나, 온돌방과 이를 둘러싼 툇간에는 井자살로 된 창호들을 달았다. 또, 온돌방에 딸린 굴뚝[煙堗]은 뒤편에 따로 검은 벽돌로 쌓고 위에 연가(煙家)를 놓아 장식하고 있다.
종래 화재가 난 뒤 경효전(景孝殿)과 흠문각(欽文閣)에 모셔져 있던 고종과 순종의 어진(御眞)을 준명전(濬明殿)과 그 서행각(西行閣)에 옮겼다는 기록으로 보아 준명당은 불타지 않았을 것으로 짐작해왔다.
그러나 이는 준명전과 준명당을 같은 건물로 착각한 데서 온 잘못된 판단이며, 『경운궁중건도감의궤(慶運宮重建都監儀軌)』를 보면 현재의 준명당은 1904년에 중건된 것임이 분명하다.
중건 이전의 준명당은 1897년에 지은 건물이고, 즉조당은 조선 중기의 건물이므로 두 건물은 서로 다른 건축적 특징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나, 중건되면서 새롭게 전체로서 구성되었기 때문에 평면구성을 제외한 구조·색채·형태 등에서 통일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후원에는 나지막한 언덕이 있고 거기에 벽돌로 쌓아 만든 굴뚝이 남아 있어 당시의 후원 조경방법을 일부나마 전해 주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은 한국 근대미술을 품은 고궁 속 미술관이다. 우리나라 근대미술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체계화하여 근대미술에 나타난 미의식과 역사관을 정립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우리 민족의 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미술관이 자리한 덕수궁의 석조전 서관은 1938년에 완공된 우리나라 근대 건축양식을 대표하는 건물로서 4개의 전시실과 휴게공간, 아트숍 등을 갖추고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은 근대미술 전문기관으로서 근대미술의 조사와 연구, 근대미술 관련 기획전 및 소장품을 전시하고 각종 교육프로그램의 개발과 운영, 학술 활동과 출판, 근대미술 관련 정보의 국제적 교류 등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1998년 개관 이래 2005년까지 총 38회의 기획 및 소장품 전시를 개최하였으며, 약 250만 명의 관람객이 미술관을 찾았다. 그뿐만 아니라 작품설명회, 강연회 등의 학술행사를 개최하여 미술 전반에 관한 이해를 돕고 있으며,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운영하여 도심 속에 있는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수도권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1번 출구에서 70m에 있다.]
[덕수궁의 중화전 및 중화문(德壽宮의 中和殿 및 中和門)
대한민국의 보물 제819호(1985년 1월 8일 지정)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 5-1
건립시기 : 구한말
덕수궁의 중화전 및 중화문(德壽宮의中和殿및中和門)은 각각 덕수궁의 정전(正殿)과 정전으로 드나드는 정문이다. 덕수궁의 본래 이름은 경운궁(慶運宮)이다.
중화전 앞뜰에는 공식적인 조정회의나 기타 국가적인 의식이 있을 때 문무백관들의 위치를 표시한 품계석(品階石)이 어도(御道) 좌우로 배열되어 있다. 원래 중화전 영역 주위에는 장방형으로 2칸 폭의 행랑이 둘러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모두 철거되고, 현재는 동남부 모퉁이의 7칸만 남아 있다.
역사
경운궁의 정전은 즉조당(卽祚堂)이었는데, 고종이 대한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1902년 즉조당 앞에 새로 중층 건물을 지어 중화전이라 하였다. 경운궁 중화전은 고종황제가 경운궁에 재위하는 동안 정전으로 사용하였던 건물로, 광무 8년(1904년) 함녕전에서 시작된 화재로 소실된 후 1906년 단층 전각으로 중건되었다. 이때 신축 공사 과정은 "중화전영건도감의궤"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건물
중화전
2중의 넓은 월대 위에 세워진 중화전은 창덕궁 인정전(仁政殿)과 같이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을 하였다. 기단의 둘레는 난간을 두르지 않았으며, 사방에 계단을 설치하였다. 건물은 약간 서쪽으로 방향을 튼 남향을 하였다.
하월대는 지대석 위에 장대석 두 벌대를 쌓고 그 위에 갑석을 얹었으며, 상월대는 장대석 두 벌대로 설치되었다. 상·하월대 상면에는 잘 다듬은 방형 화강석 박석을 깔았으며, 하월대 전면 좌우와 후면에는 각기 계단이 한 벌씩 놓였다. 기단 상부는 전을 깔았고 좌우에는 향로를 놓았다.
내부 중앙 후측 고주 사이에는 어좌가 놓여 있고, 그 뒤에는 일월오봉도(日月五峰圖)를 그린 병풍이 있으며, 그 상부에는 보개(寶蓋) 천장이 마련되었다. 천장은 모두 우물천장인데, 내진(內陣) 천장의 중심부에는 위로 쑥 들어간 감입형 천장을 설치하고, 그 안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여 황제를 상징하였다. 전·후면 어칸에는 사분합 꽃살문, 어칸 좌우 한 칸과 양측면 남쪽 두 번째 칸에는 삼분합 꽃살문, 나머지 칸에는 모두 삼분합 꽃살창을 설치하였으며, 상부 전체에는 빛살 광창을 설치하였다. 내부 바닥은 전돌을 깔았다.
가구(架構)는 기둥 윗몸을 창방으로 짜 맞추고 그 위에 평방을 놓았으며, 기둥머리에는 안초공을 설치하고 내4출목, 외3출목의 포작을 짜 올렸고, 그리고 주심포 사이 어칸에 3개, 나머지 칸에 2개씩 공포를 배열하였다.
중화문
중화전과 함께 재건된 중화문은 경운궁의 중문이자 중화전의 정문이다. 전을 깐 기단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중앙열 세 칸에 모두 판문을 달았다.
중화문은 건물 전면을 덮을 정도로 넓고 완만한 돌계단 위에 세워졌다. 가운데 문은 좌우의 문보다 문둔테 만큼 높으며, 문 위에는 풍형 홍살을 꾸며 놓았다. 비록 단층이기는 하지만 기둥의 높이가 훤칠하게 높아서, 문을 통해 중화전의 위풍이 나타나도록 설계되었다. 구조는 다포계 형식으로 살미첨차들이 서로 붙고, 내부는 운공형식으로 조각되어 있으며 팔작지붕이다. 가구는 5량가이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은 국립현대미술관의 덕수궁 분관으로, 서울특별시 중구의 덕수궁 석조전 서관에 자리해 있다.
덕수궁관은 일제강점기인 1937년 나카무라 요시헤이의 설계로 이왕가미술관으로 지어졌다. 1950년 한국 전쟁 중 전화(戰火)를 입어 석조의 구조만을 남기고 전부 소실된 것을 1953년 수리하였다. 1973년부터 국립현대미술관의 본관으로 사용되었다. 198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과천으로 이전하였고, 1998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분관으로 정식 개관하였다.
개관 당시 이전에도 사용되어 오던 덕수궁미술관이라는 명칭을 사용하다가 2013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이 들어서면서 덕수궁관으로 개명해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한 사람의 인생을 오롯이 담은 전시…‘가장 진지한 고백: 장욱진 회고전’
60년 동안 그린 유화, 판화, 도자기 그림 등 250여 점 전시
동양적 사상과 조형의 형태 일치시키며 ‘한국적 모더니즘’ 구축
60년 만에 일본에서 돌아온 가족도 최초 공개
2월 12일까지 서울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고륜형 기자 krh0830@kgnews.co.kr
경기신문 기사 등록일 : 2024.01.18.
“가장 진지한 고백, 솔직한 자기의 고백이라는 진실을 사람들은 일생을 통해 부단히 쌓아 나가고 있나 보다. 그 참된 것을 위해 뼈를 깎는 듯한 자신의 소모까지 마다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제껏 그림이라는 방법을 통해 내 자신의 고백을 가식 없는 손놀림으로 표현해 오고 있다”(장욱진, ‘강가의 아틀리에’ 서문 中)
이중섭, 김환기, 박수근, 유영국 등 한국 근현대 화단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2세대 서양화가이자 1세대 모더니스트 장욱진(1917~1990)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그림을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며 일평생 그림에 모든 것을 녹여냈다.
이번 전시는 1920년대 학창시절부터 1990년 작고할 때까지 약 60여 년간 그린 유화, 먹그림, 매직펜 그림, 판화, 표지화와 삽화, 도자기 그림 250여점을 선보인다.
‘첫 번째 고백 내 자신의 저항 속에 살며’는 장욱진의 학창시절부터 중장년기까지의 작품이 전시된다. 1938년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2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에서 사장상을 수상한 ‘공기놀이’와 같이 이 시기엔 흑백과 갈색의 토속적 색채를 주로 사용했고 명암을 대비시켰다.
30~40대 장년기엔 명도와 채도의 대비를 통해 시각적 주목도를 높이고, 원, 네모, 선 등의 단순화된 구상을 바탕으로 동심이 깃든 그림을 그렸다. 40~50대 중년기엔 실존의 절대적인 형상으로서 뼈대나 윤곽만으로 대상을 조형화시키며 기호화된 형태를 띠었다. 그가 완성시킨 전형(典型)은 ‘한국적 모더니즘’을 구현하는 것이다.
‘두 번째 고백 발상과 방법: 하나 속에 전체가 있다’에선 장욱진이 화가로서 어떤 발상을 했고 어떠한 방법으로 구성했는지 살펴본다. 그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모티프인 까치와 나무, 해와 달을 소개한다.
7살 때 아버지를 여읜 장욱진은 마당에 날아온 까치를 그리며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달랬다. 까치는 그의 분신같은 존재로, 나무는 온 세상을 품은 우주, 해와 달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영원성의 매개체를 의미한다. ‘마을과 아이’에선 마을 사이에서 쉬고 있는 아이를 그림으로써 편안한 상태의 자아를 그리기도 했다.
‘세 번째 고백 진眞.진眞.묘妙’에선 장욱진의 부인 이순경 여사를 그린 ‘진진묘(眞眞妙)’를 시작으로 그의 불교적 세계관과 철학, 정신세계를 살펴본다. ‘진진묘(眞眞妙)’는 ‘참으로 놀라운 아름다움’이라는 뜻으로, 이순경 여사의 법명이다. 장욱진은 아침마다 금강경을 읽는 아내의 모습에 감화돼 이 작품을 그리고 3달을 앓았다.
장욱진의 불교와의 인연은 1970년대부터 이어지는데, 이 시기엔 먹그림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단순화된 그림들은 ‘깨달음의 과정’을 표현하며 불교 사상의 ‘절제’와 ‘득도’의 결과물이 됐다. 창고에서 발견돼 일본에서 60년 만에 우리나라에 돌아온 가족도도 처음으로 공개된다.
‘네 번째 고백 내 마음으로서 그리는 그림’에선 장욱진의 노년기를 살펴본다. 그가 남긴 유화 730여 점 가운데 80퍼센트에 달하는 580여 점이 이 시기에 그려졌는데, 동양의 정신과 형태를 일체화시킨 작품이 관찰된다.
하늘로 둥둥 떠나니며 공중 부양하는 사람들, 시공간을 초월한 화면 구성을 통해 ‘금강경’의 핵심 사상인 ‘무상(無相)’을 드러내며 한국적 모더니즘을 완성시킨다. 고향의 국도 풍경을 그린 ‘가로수’는 가족과 나무 위의 집, 송아지, 해를 그려 따뜻한 모습을 전달한다.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 장욱진의 그림들과 그의 고백들은 2월 12일까지 서울시 정동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만나볼 수 있다. 화, 목, 금, 일요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6시까지, 수, 토요일은 오전 10시부터 오후 9시까지 관람할 수 있다. 매주 월요일은 휴관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 동시대 현대미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미술관
소재지 : 서울 종로구 삼청로 30
경복궁의 동문인 건춘문 앞에 위치한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은 동시대 현대미술을 중점적으로 다루는 미술관이다. 1986년 개관한 과천관, 1998년에 개관한 덕수궁관에 이어 2013년 개관한 서울관은 조선시대 소격서, 종친부, 규장각, 사간원이 있던 자리에 자리 잡고 있다. [마당] 개념을 도입하여 건축한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은 누구나 즐기고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건물의 내외부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주변 명소와도 조화를 이루도록 설계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은 전시실을 비롯하여 디지털정보실, 멀티미디어홀, 영화관 등 다양한 시설을 갖춘 복합예술문화센터로서 한국 현대 미술품 전시 및 신매체 융복합 전시를 진행한다.]
[덕수궁 돈덕전(德壽宮 惇德殿)
덕수궁 석조전 뒤편에 있는 서양식 2층 건물로, 외국 공사를 접대하는 공간으로 사용하였다. 건물의 명칭인 ‘돈덕(惇德)’은 오경(五經) 중 하나인 《서경(書經)》의 글귀 '惇德允元(돈덕윤원, 덕이 있는 이를 도탑게 하고, 어진 이를 믿는다)’에서 인용한 것이다. 현판의 글씨는 당나라의 서예가 구양순(歐陽詢, 557~641)의 글씨를 집자(集字)하여 쓴 것으로, 현판의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전시 중이다.
역사
1902년(광무 6) 10월에 있을 고종의 즉위 40주년 기념식의 연회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건립하였으나, 공사가 늦어지고 당시 국내외 사정으로 기념식이 연기되다가 결국 취소되면서 고종 즉위 40주년 기념식의 연회장으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1903년(광무 7) 돈덕전이 완공된 이후에는 고종이 외국 공사를 만나는 연회장으로 사용되거나 외국의 귀빈들이 묵는 영빈관 등으로 활용되었으며, 대한제국의 2대 황제 순종은 1907년 7월 돈덕전에서 즉위식을 했다. 1907년 11월 순종이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기고 난 후에는 고종이 외부인을 만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1919년 고종이 승하한 후로는 덕수궁과 함께 방치되었다. 이후 돈덕전이 언제 훼철되었는지 기록으로 남아있지는 않으나 1920년대 일제에 의해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2015년부터 돈덕전 복원·정비사업이 시작되어 2023년 5월 덕수궁 돈덕전 복원이 완료되었고, 2023년 9월 정식으로 일반에 공개되었다.
붉은 벽돌과 회색 벽돌을 쌓아 만든 2층 건축물로, 고딕 건축 양식과 르네상스 건축 양식을 절충하여 디자인하였다. 복원된 돈덕전의 1층은 당시 대한제국의 모습을 보여주는 상설전시실과 국제행사가 가능한 기획전시실로 구성되었으며, 2층에는 한국 근대 외교의 흐름을 이해할 수 있는 상설전시실과 대한제국 외교사 기록을 보관하고 있는 아카이브실이 자리하고 있다.]
* 12:01~12:05 서울 중구 정동길 41-11 번지에 있는 중명전(重眀殿)으로 이동
* 12:05~12:20 중명전(重眀殿) 관람으로 덕수궁 탐방을 완료
[중명전(重眀殿)
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1-11 (정동)
중명전은 대한제국의 중요한 현장이다. 1904년 경운궁(현 덕수궁) 대화재 이후 중명전으로 거처를 옮긴 고종황제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이곳에서 불법적으로 체결되었으며 그 후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자 1907년 4월 20일 헤이그 특사로 이준 등을 파견한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한편 중명전은 1925년 화재로 외벽만 남기고 소실된 뒤 재건하여 외국인을 위한 사교클럽으로 주로 쓰이다가 자유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국유재산으로 편입되었다. 그러나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에게 중명전을 돌려주었다. 1977년 중명전은 다시 민간에 매각되었고, 2003년 정동극장에서 매입한 뒤 2006년 문화재청에 관리 전환하여, 2007년 2월 7일 사적으로 덕수궁에 편입되었다. 2009년 12월 복원을 거쳐 2010년 8월부터 전시관 [대한제국의 운명이 갈린 곳, 덕수궁 중명전]으로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을 돌아 뒤쪽으로 가면 정동극장이 있고, 그 골목으로 들어가면 중명전이 있다. 중명전은 원래 정동지역 서양 선교사들의 거주지에 속해 있다가,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이 확장되면서 궁궐로 편입되었다. 이때 당호를 [수옥헌]이라 짓고, 주로 황실 도서관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1901년 화재로 전소된 후 재건되어 지금과 같은 2층 벽돌 건물의 외형을 갖추게 되었다. 건물의 설계는 독립문, 정관헌 등을 설계한 러시아 건축가 사바찐이 하였다.
이용안내
이용시간 : 09:30~17:30
쉬는날 : 매주 월요일
주차시설 : 있음
문의및안내 : 02-751-0734 ]
[덕수궁 중명전(德壽宮 重眀殿)
대한민국 사적 제124호 덕수궁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41-11 (정동)
수량 / 면적 : 1동 2층, 대지 2,399㎡, 건축면적 877.8㎡
건축시기 : 1899년 (창건), 1901년 (중건), 2010년 (복원)
설계자 :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Афанасий Иванович Середин-Сабатин)
목차
1. 개요
2. 이름과 현판
3. 역사
3.1. 조선 · 대한제국 시기
3.2. 일제강점기
3.3. 광복 이후 ~ 현재
4. 관람
5. 복원 오류 논란
1. 개요
덕수궁의 별전(別殿). 대지 727평, 규모 236평이며 덕수궁 본궁과는 돌담벽 사이로 떨어져 있다.
을사늑약을 체결한 장소이다. 즉, 망국의 출발점인 비극의 장소이다.
2. 이름과 현판
'중명(重眀)' 뜻은 '광명이 계속 이어져 그치지 않는다' 또는 '거듭하여 밝다'이다. 《주역(周易)》의 이괘(離卦)에서 따온 이름이다. 그러나 상술했듯 이곳에서 망국을 알리는 을사조약을 체결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실제 역사와는 매우 어긋난 모순적인 이름이다. 발음이 비슷한 준명당과 헷갈려하여 준명전으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다.
특이하게 '명'자를 흔히 '밝을 명' 자로 쓰는 '明'이 아닌 '眀' 자로 썼다. 얼핏 보면 잘 구분이 안가지만 '明'에서 '날 일(日)'이 아닌 '눈 목(目)'이 들어가있다. '明'과 모양만 다른 같은 글자이며, '밝게 볼 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를 두고 여러 설이 있다. 그 중 일제가 '明'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眀'을 대신 썼다는 주장과, 반대로 일본(日本)을 싫어한 대한제국 정부에서 '日'이 들어간 '明'대신 '眀'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론을 말하면 둘 다 낭설이다. '眀'은 '朙'의 이체자이며 엄연히 대한제국 이전부터 쓰던 한자이다. 진짜로 '明'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은 물론 다른 전각들의 편액에 들어간 '明'을 모조리 갈아치웠을 것이다. 이런 거짓 정보에 속지 말자.
현재 현판은 2010년 8월에 복원한 것이다.
3. 역사
3.1. 조선 · 대한제국 시기
원래 덕수궁 궁역(宮域)이 아니었다. 1884년(고종 21년) 11월에 미국 장로교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이 마련한 곳으로, 이 일대는 알렌의 집 말고도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 등 선교사들이 모여 살았던 곳이었다. 1886년(고종 23년)부터는 독신 여성 선교사들의 거처로 변모했고, 1887년(고종 24년)에 알렌이 미국으로 돌아간 후 미국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인 애니 앨러스(Annie J. Ellers)가 여성 교육기관인 정동여학당(현재의 정신여자고등학교)을 세웠다.
정동여학당은 1895년(고종 32년)에 연지동으로 옮겨갔고 1897년(광무 원년) 대한제국 정부에서 부지를 매입하여 덕수궁 영역에 포함시켰다. 그리고 기존 건물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서양식 도서관인 수옥헌(漱玉軒)을 지었다. 이 때 미국인 건축기사 다이가 설계감리를 했다고 한다. 정확한 완공일자는 모르나 1898년(광무 2년) 1월 말에 준공을 앞두고 있었다는 주한일본공사관의 기록을 보아 그 무렵에 완공한 듯 하다.
수옥헌 건립 이유를 고종의 미국 의존성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고종은 을미사변 이후 일본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러시아의 세력이 강해지면서 친러파와 러시아 외교관들이 도리어 고종을 압박하는 형세가 되었다. 서울역사편찬원의 전임연구원 장경호에 따르면, 러시아에 부담을 느낀 고종은 덕수궁 환궁 전후로 해서 더욱 미국 의존도를 높였고[4] 여러 번 미국공사관으로 망명할 의도를 비공식적으로 내비쳤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는 한국에 대한 정치적 중립을 지킨다는 이유로 이를 거부했고, 그러자 고종이 차선책으로 미국공사관 바로 옆에 임시 피난처 개념으로 왕립도서관을 세웠다는 것이다. 이런 정황은 1897년(광무 원년) 10월 경에 주한 미국 공사였던 호러스 뉴턴 알렌이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다.
(전략) 특히 황제는 우리 공사관으로 오고 싶어합니다. 저는 황제가 다른 열강들을 불신한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러시아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가 보호처를 말해줄 수 없다는 점을 기회가 있을 때 언급했습니다. (중략) 황제는 지금 그가 여기로 영구히 파천해 온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소위 "왕립도서관"이라는 것을 우리 공사관 옆문에 설치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곳은 미국인들로 둘러싸인 곳입니다. 제가 그린 "왕립도서관"을 참조하십시오. 저는 황제가 위험이 닥치면 이 도서관으로 오리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후략)
1897년 10월 13일에 알렌 공사가 미국 국무부 장관에게 보낸 문서
어쨌든 수옥헌은 완공 이후 도서관으로서 수많은 황실의 서책들과 보물들을 보관하는 장소가 되었으며, 그 외에도 독일의 알베르트 빌헬름 하인리히 친왕 접견 등 외국의 주요인사들을 맞이하는 공간으로도 쓰였다.
1901년(광무 5년) 11월 16일에 수옥헌 일곽의 건물 한 채에서 불이 났다. 불은 삽시간에 수옥헌으로 번져 수옥헌은 소실되고 말았다. 호머 헐버트가 발간한 《더 코리아 리뷰》 - 1901년 11월 호에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었다.
이달(11월) 16일 새벽 2시경, 미국공사관 바로 서쪽에 붙어 있는 제실도서관(수옥헌) 후면의 외곽 건물 한 채에서 이유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만약 거기에 어떠한 응급조치가 있었다면, 본 건물로 번지기 전에 불길은 쉽게 꺼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장소는 방치된 듯 했으며, 물동이 서 너개가 없었던 탓에 정부는 매우 귀중한 건물을 잃고 말았다. 도서관에는 숱한 귀한 서책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피아노 한 대를 포함한 가구 일체와 함께 모두 불타 사라졌다."
호머 헐버트, 《더 코리아 리뷰》 - 1901년 11월 호
화재 이후 러시아 제국 건축기사 아파나시 이바노비치 세레딘사바틴의 설계 감리 하에 재건했다. 이 때 지금의 2층 벽돌 건물로 바꾸었다.
1904년(광무 8년) 4월에 덕수궁 본궁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고종이 이곳에 기거하면서 편전 겸 침전으로 활용했다. 이후 1907년(광무 11년)에 고종이 강제퇴위당하고 순종이 즉위할 때까지의 약 3년 동안 사실상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황궁 기능을 담당했다.
1905년(광무 9년) 11월에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오적이 을사조약을 여기에서 강제체결했다.
수옥헌에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꾼 시기가 언제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중명전 이름이 공식 기록에서 처음 등장하는 시기가 1906년(광무 10년) 11월(음력 9월) 이후인 것을 보아 그 무렵에 바꾼 듯 하다.
3.2. 일제강점기
1910년 한일병합 이후에는 덕수궁 궁역 축소화에 따라 덕수궁 궁역에서 분리당했다. 경성구락부가 인수하여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으로 활용했다. 1925년에는 조리실의 화재사고로 외벽을 제외하고 전부 불탔으며 이후 재건했다.
3.3. 광복 이후 ~ 현재
1945년 8.15 광복 이후에는 국가가 소유 및 관리했다. 1950년 6.25 전쟁 당시에는 서울을 함락한 북한군과 공산당이 사용했다가 수복 이후 다시 대한민국 정부에서 소유했다. 1963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이 영구 귀국한 영친왕과 이방자 부부에게 중명전 사용권을 이양하여 영친왕 부부가 소유했다가 영친왕이 사망한 이후 다시 민간에게 위탁, 매각했다. 그러면서 점차 역사성을 상실하며 일반 점포로 전락했다.
1983년에 서울특별시청에서 시장령에 따라 중명전을 인수하여 서울시 유형문화재 53호로 지정했고[9] 2003년에 정동극장이 인수했지만, 앞뜰이 주차장으로 쓰이고 건물 지하는 폐건물마냥 방치된 모습이 2006년 MBC 〈느낌표 - 위대한 유산 74434〉에서 방영하면서 논란이 일었다.
이후 2006년에 문화재청에서 소유했고 2007년 2월에 사적 124호 지정으로 덕수궁 궁역으로 재편입했다. 이후 고증을 통해 대한제국 시기의 모습대로 복원해 2010년 8월에 일반에 개방했다. 2016년 8월부터 오래 된 시설을 보수하고 20세기 초 권역의 평면도를 검토해 당시 지반 높이를 반영시키고 석축과 계단을 복원하여 11개월의 공사 끝에 2017년 7월에 민간에 재공개했다.
4. 관람
현재는 을사조약 및 대한제국 국권회복을 위한 전시관으로 사용한다.
1층에 제1실 ‘'덕수궁과 중명전', 제2실 '을사조약의 현장', 제3실 '을사조약 전후의 대한제국', 제4실 '대한제국의 특사들' 등 총 4개 실로 전시실을 구성했다.
중명전 1전시실에서는 덕수궁과 정동 일대를 축소 모형으로 제작하고 그 위에 영상을 투사하여 개항기에서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명전과 덕수궁 권역의 변화를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중명전 2전시실에서는 당시 의복을 고증해 입힌 극사실 인물모형들을 사용해 을사조약 체결 장면을 재현함으로써 체결 현장을 눈으로 보듯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게 했다. 이근택의 복장에 고증 오류가 있는데, 부장 상복의 카라에는 별이 2개가 아닌 3개가 있어야 한다.
중명전 3전시실에서는 을사조약 체결 전후로 숨가쁘게 돌아가던 국제정세와 국내외 조약 체결 반대의 움직임을 구현했다.
중명전 4전시실에서는 주권 회복을 위해 1907년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 대한제국 헤이그 특사들의 활동을 각종 영상으로 재구성했다.
중명전 2층에는 고종이 외국 사신들을 맞았다는 알현실이 있다. 같은 층에 문화유산 국민신탁 사무실도 같이 위치해있어 개방을 안했지만, 2017년 말부터 알현실에서 특별전을 열어 개방한다.
월요일을 제외한 매일 오전 9시 30분부터 오후 5시 30분까지 관람이 가능하며, 관람과 관련한 더 자세한 내용은 덕수궁관리소로 문의하면 안내받을 수 있다. 안내실 전화는 02-751-0734.
5. 복원 오류 논란
중명전을 복원하면서 고증을 잘못했다는 논란이 있다. 근대사료 연구자인 이순우 민족문제연구소 책임연구원은 2016년 7월 25일 한겨레에 1905년 당시 미국에서 출간한 러일전쟁 사진집에 실린, 당시 미국공사관 마당에 도열한 경비병들의 모습과 그 뒤로 보이는 중명전의 모습이 담긴 사진을 공개했다. 사진을 보면 중명전 건물 정면 가운데 부분에 1층 현관과 2층 베란다까지 함께 튀어나온 포치가 있다. 그러나 현재 복원한 중명전은 1층 현관만 튀어나와 있고, 2층 부분은 다른 면의 테라스와 같이 돌출하지 않은 구조라 복원을 잘못했다는 것이다.
2010년 문화재청이 대한제국 시기 사료들을 토대로 복원했으나 2층과 벽면 부위 등의 고증이 불명확하다는 지적을 계속 받아왔는데 이 사진 자료의 공개로 확실히 밝혀진 셈. 당시 복원공사 자문을 맡았던 김정동 목원대 명예교수는 “구한말 건물 정면을 근접해 찍은 사진은 처음 본다. 복원 당시 건물 정면 원형에 대한 자료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아 벽체의 원형을 추정하면서 복원했던 만큼 이번에 발굴된 사진은 앞으로 건물 지붕과 정면 등을 재복원할 때 중요한 근거가 될 것으로 보인다”고 평가했다.
그러나 문화재청 측은 "당장 재복원 방침을 정하기는 어려우며 앞으로 전문가 자문회의를 통해 원형 사진을 검토해 재복원 여부 등을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현재까지 원형 복원을 하지 않았고 관련 계획도 알려진 게 없다.
중명전은 본래 벽돌 구조에 목조 바닥으로 이루어진 구조였다. 그러나 현대에 철근콘크리트가 추가되었고 문화재청이 복원 공사를 할 때 이것을 그대로 유지했다.]
* 12:20~12:23 서울 중구 정동길 41-11 번지에 있는 중명전에서 서울 중구 정동길 26 번지에 있는 이화여자고등학교 백주년기념관으로 이동 [3분 소요]
탐방지 :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이화박물관&유관순 동상&서울유관순기념관&舊 신아일보사 별관&아펜젤러 동상&배재학당역사박물관&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탐방일 : 2024년01월31일(수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 최저기온 영하 1도C, 최고기온 6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37분 소요)
* 12:23~12:33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이화박물관(심슨 기념관)&유관순 동상&서울유관순기념관]의 동선으로 이화여고 교정 안에 있는 탐방지들을 방문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은 1975년의 화재로 철거된 프라이홀 자리에 건립한 교육관으로 서울 중구 정동길 이화여고 동문 옆에 있다. 화재로 철거되기 전까지 프라이홀은 구 손탁호텔을 대신하여 기숙사와 실험실, 교실 등으로 활용되었다. 프라이홀의 복원을 위한 졸업생들의 오랜 노력 끝에 2004년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지하 1층, 지상 5층의 멀티미디어 교육관으로 갤러리, 카페, 음악실, 개인연습실, 시청각실, 공동작업실, 교사연구실 등의 다양한 시설들을 갖추고 있다. 1층과 2층의 화암홀은 공연에 적합한 최신 시설과 장비를 갖추고 있어 뮤지컬, 콘서트 등 다채로운 공연과 교육 행사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위치는 수도권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6번 출구에서 230m에 있다.]
[이화박물관(서울 梨花女子高等學敎 Simpson紀念館)
소재지 : 서울특별시 중구 정동길 26(정동) 번지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서울 梨花女子高等學敎 Simpson紀念館)은 서울특별시 중구에 있는 1915년에 준공된 옛 이화학당의 교사(校舍)로 현재 이화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2002년 2월 28일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3호 정동 이화여고심슨기념관으로 지정되었으나, 2013년 10월 30일 서울 이화여자고등학교 심슨기념관으로 등록문화재 명칭이 변경되었다.
역사
이화학당은 한옥 교사를 사용하다가 1899년에 양옥 교사인 메인 홀(Main Hall), 프라이 홀(Frey Hall) 등을 신축하였다. 하지만 교실난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여 새 건물을 신축할 부지로 정동 30번지 땅을 구입하였다. 미국 컬럼비아 리버 지회의 홀부룩이 희사한 기금으로 1914년에 기공하여 1915년 3월에 건물을 준공하였다. 홀부룩의 기부금은 그의 동생 새라 심슨(Sarah J. Simpson)이 세상을 떠날 때 위탁한 것이어서 심슨기념관으로 명명하였다. 1922년 건물 서편에 280평의 교사를 증축하였고, 이후 주로 고등보통학교에서 사용하였다. 해방 이후 이화여자중학교의 교사로 사용되었으며 한국 전쟁 때 건물 동편이 일부 불에 탔다. 현재 건물은 1961년에 증축한 것이다. 한편, 메인 홀은 한국 전쟁 때 파괴되고 프라이 홀은 1975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
특징
고딕풍의 3층 벽돌조 건물로 창문 아치 중앙과 모서리를 흰 화강암으로 장식하여 벽면에 붉은 벽돌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서울유관순기념관
소재지 : 서울 중구 통일로4길 30-1 번지
서울유관순기념관은 유관순 열사의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하여 이화여자고등학교 내에 1974년 완공한 전시관이다. 이곳은 유관순 열사가 공부하며 거닐던 곳으로, 1919년 3월 1일 유관순을 비롯한 이화학당의 학생들이 이 교정의 기숙사 뒷담을 넘어 남대문 쪽으로 달려가 만세를 불렀던 역사의 현장이라는 점에서 장소의 역사성이 살아있는 곳이다. 완공 이후 여러 차례 증축을 통해 현재 1,700석 규모의 강당으로 되어 있으며, 이화인의 시작과 끝인 입학식과 졸업식이 이곳에서 거행된다. 또한, [유관순상] 시상식을 비롯한 각종 행사가 이곳에서 열린다.
1층은 교회로 사용되고 3층은 이화여고 총동창회로 사용되고 있으며, 2층 홀에 유관순 열사의 사진자료와 유품들을 볼 수 있는 전시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2층 홀에서 전시하는 사진 자료의 양이나 규모 면에서 충남 천안에 있는 유관순기념관에 비해 매우 소박하지만, 서울 도심에서 유관순 열사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귀중한 장소이다. 또한 학교 내에는 유관순 동상과 유관순 열사가 빨래했던 우물터가 남아 있다. 이 밖에도 이화여자고등학교 교내에는 심슨기념관,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 등의 역사 관광지가 있어 유관순기념관과 함께 둘러볼 수 있다.
안내전화 : 02-752-3353
입장료 : 무료
이용시간 : 10:00 ~ 17:00
휴무일 : 매주 일요일]
[유관순(柳寬順)
출생 – 사망 : 1902. 12. 16. ~ 1920. 9. 28.
유관순(柳寬順)은 1902년 11월 17일(음력) 충남 목천군 이동면 지령리(현재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柳重權)과 어머니 이소제(李少梯) 사이의 5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집안에서 가장 먼저 개신교에 입문한 사람은 작은 할아버지 유빈기로 한글 성경을 파는 매서인이 되어 선교사를 이끌고 귀향했다고 한다. 이후 숙부 유중무가 개신교를 받아들이면서 일가친척들도 개신교인이 되었다.
다만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은 일가친척이 모두 개신교로 개종하는 상황에서도 조상에 대한 의무 때문에 혼자서 제사 지내며 전통의 풍습을 지켜냈다. 그러면서도 유관순이나 장남 유우석이 교회에 다니는 것을 막거나 아이들을 신식학교에 보내는 것을 허락했다. 이러한 아버지 아래서 유관순은 조상과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유교적 문화도 받아들였고, 한편으로 교회에 다니며 자유와 평등의 기독교 사상의 영향도 받았던 것이다. 숙부가 지령리 교회의 교사로 활동하면서 유관순도 5세를 전후해 개신교를 접하였고, 이후 유관순에게 교회가 배움터요, 놀이터가 되었다.
오빠가 기억하는 어린 시절의 동생은 지기 싫어하고 고집스러우며 자기주장이 강한 아이였다. 특히 어린 시절 유관순이 잘 불렀던 노래는 당시 마을 청년들이 부르던 우국창가로 "무쇠골격 돌주먹 청년 남아야…" "샘물이 돌고 돌아…" 란 가사가 인상적이다. 어린 시절부터 남다른 면모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1907년 4월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 전국으로 퍼져가자 1907년 8월 유중권, 유중무 등이 중심이 되어 목천 이동면 교인 82명과 함께 국채보상운동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집안과 향리의 애국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한 유관순의 의식 속에는 민족, 국가, 헌신 등의 가치가 자연스럽게 배어 들고 있었다.
유관순은 공주에 왔던 감리교 순회 선교사의 주선으로 1915년 4월에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2학년으로 편입하게 되었다. 당시 이화학당 교비생으로 추천받아 공부하게 되었으며, 1918년 3월 보통과를 졸업하였다. 1918년 4월 이화학당의 고등과 1학년에 진학하게 되었다. 이화학당에서의 생활은 프라이 교장의 보살핌 속에 근대 선진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고, 또 먼저 입학한 사촌 언니 유예도(柳禮道)의 주선으로 선후배 학생들과 친해질 수 있어 행복한 시기였다.
행복한 학교생활 속에서도 유관순은 조국과 민족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을 잃지 않았다. 그리하여 유관순은 "난 잔 다르크처럼 나라를 구하는 소녀가 될 테다. 누구나 노력하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이팅게일처럼 천사와 같은 마음씨도 가져야지"하고 마음속으로 기도하면서 다짐하였다고 한다. 유관순의 이 같은 조국애와 민족애는 곧이어 전개된 3․1운동으로 꽃피게 된다.
유관순이 이화학당에 입학하여 선진학문을 수용하며 조국과 민족에 대한 사랑을 키워 가던 시기에 우리 민족은 독립운동의 호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막바지에 이른 1918년 1월 8일 연합국 측을 대표한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전후 처리지침으로서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천명하였기 때문이었다. 당초 우리 민족은 이 같은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독일 · 오스트리아 등 패전국 식민지에만 적용되고, 연합국 측의 일원으로 승전국인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한국에는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공식적으로 종전되고, 다음 해 1월부터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고 생각하였다.
한국 민족이 이 기회에 대동단결하여 민족독립을 요구하면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하는 기대감 속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여 갔다. 중국 상해에서는 신한청년당, 일본 동경에서는 조선 유학생 학우회를 중심으로 국내외 동포들이 혼연일체가 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국내에서도 거족적인 독립운동이 종교계와 학생들에 의해 각기 추진되었다. 한국 강점 직후 일제는 한국 민족의 조직적인 독립운동 역량을 제거하기 위하여 정치성을 띤 모든 사회단체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따라서 3․1운동의 초기 단계는 그나마 조직과 단체를 유지할 수 있었던 종교계와 학생들이 주도하게 된 것이다.
경술국치 이래 민족운동을 모색해 왔던 천도교 측은 손병희(孫秉熙) · 권동진(權東鎭) · 오세창(吳世昌) · 최린(崔麟) 등이 수차 회합하여 논의한 결과, 1919년 1월 중순 대중화 · 일원화 · 비 폭력화 등 3대 원칙을 수립하고 거족적인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기독교 측에서도 1919년 1월 말 2월 초순경 상해 신한청년당의 선우혁(鮮于爀)이 국내로 들어와 이승훈(李昇薰) · 양전백(梁甸伯) 등 옛 신민회(新民會) 동지들을 만나 국제정세를 전하고 독립운동 방략을 협의하였다. 이로써 평양과 정주, 선천 일원의 교회와 기독교 계통의 학생들을 중심으로 독립운동 계획이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서울의 학생들 또한 1919년 1월 하순 보성전문의 강기덕(康基德) · 연희전문의 김원벽(金元璧) · 경성의전의 한위건(韓偉健) 등 전문학교 대표들이 회합을 갖고, 각 학교별로 대표를 선임하여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고 있었다.
이처럼 각기 추진되던 독립운동 계획은 2월 초순 천도교 측의 요구에 의해 이승훈이 상경하여 연합 전선 형성 문제를 협의함으로써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비록 이 문제는 논의 과정에서 난관은 있었으나, 2월 24일 민족독립이라는 대명제 아래 두 종교계는 교단과 종파의 이질성을 초월하여 연합 전선을 형성할 것에 동의하고 구체적인 실행 계획도 수립하였다. 이때 거사일, 독립선언서 및 각종 문서의 기초와 인쇄의 담당, 일본 정부와 귀족원 · 중의원에 보낼 통고문, 미국 대통령과 파리 강화회의에 참가한 각국 대표에게 보낼 청원서의 송부 방법, 독립선언서의 서울과 지방 배포의 역할 분담, 민족대표의 선정, 불교계의 동참 등 3․1운동에 대한 중요한 합의가 도출되었다. 이에 따라 3․1운동에 동참할 뜻을 밝힌 한용운(韓龍雲)의 노력으로 불교계와의 연합도 성사되게 되었다.
독자적으로 독립운동 계획을 추진하던 학생들은 조선기독교청년회(YMCA)의 총무인 박희도(朴熙道)로부터 천도교와 기독교가 연합하였으니 동참하라는 통지를 받았다. 이에 학생 대표들은 2월 25일 회의를 열고 연합 전선에 참가하여 3월 1일 탑골공원에 집결하며, 형편에 따라서는 학생 독자적으로 독립선언 대회를 개최할 것 등을 결의하였다. 이로써 천도교 · 기독교 · 불교 학생이 참여한 민족대연합전선이 구축되었던 것이다.
이 같은 국내의 3․1운동 계획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고, 나아가 민족 대연합 전선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 바로 동경 한국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1918년 말 재일 조선 유학생 학우회의 망년회와 웅변대회에서 독립운동을 결의한 유학생들은 최팔용(崔八鏞) 등 10명의 실행위원을 선출하여 2․8독립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들은 조선청년독립단(朝鮮靑年獨立團)을 조직하여 독립선언 계획을 추진하는 한편, 송계백(宋繼白)을 밀사로 파견하여 거사 소식을 알림으로써 국내 독립운동 진영의 3․1운동 계획을 본격화시켜 갔던 것이다.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에 의해 초고가 작성되어 민족대표들의 협의를 거친 끝에 천도교에서 경영하던 보성사(普成社)에서 사장 이종일의 책임 아래 2만 1천여 매가 인쇄되었다. 거사일자는 3월 3일의 광무황제 국장일과 3월 2일의 일요일을 피하되, 국장에 참배하기 위해 상경한 사람들을 최대한 동원하기 위해 3월 1일로 결정하였다. 모든 준비를 마친 민족대표들은 2월 28일 밤, 손병희의 집에서 최종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민족대표들은 동일한 행동을 취하고, 일제에 체포되더라도 그동안의 경과를 정정당당히 밝힐 것 등을 결의하였다.
1919년 3월 1일 오후 2시, 사정상 불참한 4인을 제외하고 태화관에 집결한 29인의 민족대표들은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였다. 독립선언식은 민족대표들이 이종일이 가지고 온 독립선언서를 돌려보고, 한용운의 연설에 이어 만세삼창을 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났다. 하지만 탑골공원에서는 수천 명의 학생과 시민이 모여 있다가 2시 30분경 독자적인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곧 시가지로 물밀듯 밀려나가 만세시위를 전개함으로써 3․1운동의 불꽃을 지폈다. 시위대 중 일부는 덕수궁으로 들어가 광무황제의 영전에 조례를 올리기도 하였고, 프랑스 영사관에 들어가 한국인의 독립의사를 본국에 통고해줄 것을 요구하기도 하였으며, 미국 영사관 앞에서 독립을 요구하는 혈서를 들고 시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날 서울의 만세시위는 날이 저물도록 시내 도처에서 전개되었다.
유관순 또한 이 같은 3․1운동 추진 계획을 이화학당 내의 비밀결사인 이문회(以文會) 선배들을 통하여 감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유관순은 3․1운동이 발발하기 바로 전날 서명학 · 김분옥 · 김희자 · 국현숙 등 4명의 고등과 1학년 학생들과 시위 결사대를 조직, 만세시위에 참가하기로 굳게 맹세하였다. 드디어 3월 1일 탑골공원을 나온 만세 시위대가 학교 앞을 지나자 유관순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내가 있는 동안 너희들을 내보내 고생시킬 수 없다. 나를 밟고 넘어갈 테면 가라"라고 하는 프라이 교장의 만류를 뿌리치고 뒷담을 넘어 시위운동에 동참하였다. 유관순은 마치 잔 다르크처럼 구국의 화신으로 일제하 최대의 항일 민족독립운동이자, 민족혁명운동인 3․1운동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3월 5일 유관순은 5명의 시위 결사대 동지들과 함께 서울에서 전개된 최대의 시위운동인 남대문역(서울역) 만세 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1운동 학생 대표였던 강기덕과 김원벽 등이 주도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는 유관순을 비롯한 서울지역의 학생 거의 전부와 광무황제의 인산을 마치고 귀향하던 인사들이 대거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만여 명에 이른 시위행렬은 인력거를 타고 '대한독립기'를 앞세운 강기덕과 김원벽을 따라 한 갈래는 남대문 시장으로부터 한국은행을 거쳐 보신각에, 다른 한 갈래는 남대문으로부터 대한문 앞과 을지로 입구를 거쳐 보신각에 이르렀다. 그리고 보신각에서 다시 하나가 되어 부르짖는 시위 군중들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는 지축을 흔들며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퍼져 나가 잠재된 한국 민중의 독립 욕구를 일깨워 갔다. 유관순 또한 이 날의 만세 시위운동에 동참하여 민족 독립의 열기를 분출하며 항일 독립의지를 다져가고 있었다.
이같이 학생들이 3․1운동에 대거 참여하고, 학교가 만세 시위운동의 계획 추진 기지가 되어 가자 조선총독부는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을 반포하였다. 이에 학교가 문을 닫게 되자 유관순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고향에 전하고, 또 거기에서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유관순은 3월 13일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독립선언서를 몰래 숨겨 가지고 귀향하여 본격적으로 고향에서의 만세 시위운동을 추진하여 갔다.
우선 유관순은 동네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서울의 3․1운동 소식을 전하고, "삼천리 강산이 들끓고 있는데 우리 동네만 잠잠할 수 있느냐"라고 하면서 만세 시위운동의 필요성을 설득하였다. 그리고 부친의 주선으로 감리교 동면 속회장인 조인원(趙仁元)과 이백하(李伯夏) 등 20여 명의 동네 유지들과 상의하며 만세 시위운동의 구체적 방침을 세워 나갔다.
그리하여 4월 1일(음력 3월 1일) 아우내[竝川] 장날 정오에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정하고, 계획 추진 총본부는 지령리(지렁이골, 현 용두리)에, 중앙 연락기관은 장명리와 백전리에 두기로 하였다. 이 밖에도 천안장을 보러 다니는 안성 · 진천 · 청주 · 연기 · 목천 등의 각 면 · 각 촌에도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만세 시위운동 계획을 추진하여 갔다. 특히 유림 대표들과 집성촌 대표들을 움직여 시위 참가 인원을 확보하도록 하고, 거사 당일에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태극기를 직접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거사를 앞둔 3월 31일 유관순은 지령리 매봉에서 내일의 만세시위를 약속하고 다짐하는 봉화를 올렸다. 그러자 유관순과 연락이 닿았던 다른 여러 곳에서도 봉화를 올려 호응함으로써 서로 성공적인 거사를 기약하였다. 드디어 4월 1일 병천면 아우내 장날, 유관순은 장터 어귀에서 밤새 만든 태극기를 나누어 주면서 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러 모여드는 사람들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다.
오후 1시 3천여 장꾼이 장거리를 뒤덮었다. 유관순과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적으로 추진하였던 조인원이 긴 대나무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장터 한가운데 세우면서 아우내 장터의 만세시위 운동이 시작되었다. 조인원이 대표로 서울에서 숨겨 가져온 독립선언서를 꺼내어 낭독하고 '대한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약식의 독립선언식을 가진 것이다. 그런 다음 유관순을 필두로 3천여 명의 군중들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기를 앞세우고 태극기를 흔들며 만세 시위운동을 전개하여 갔다.
시위 대열이 아우내 장터 곳곳을 누비자 병천 헌병주재소의 헌병들이 달려와 총검을 휘두르며 만세 시위운동을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나중에는 이들의 지원 요청으로 천안 일본군 헌병분대원들과 수비대원들이 도착하여 총검으로 시위 운동자들을 학살함에 따라 이 날 19명의 사망자와 30명의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이때 유관순의 아버지 유중권이 "왜 사람을 함부로 죽이느냐"라고 항의하다가 일본 헌병의 총검에 찔려 순국하였고, 이를 보고 남편의 원수를 갚으려고 달려 들다가 유관순의 모친마저도 일본 헌병들에게 학살당하고 말았다. 이에 유관순은 숙부인 유중무(柳重武)와 조인원 · 조병호(趙炳鎬) 부자, 김용이(金用伊) 등과 함께 군중들을 이끌고, 아버지의 시신을 둘러메고 병천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여 항의 시위를 계속하였다.
유중무는 격분하여 주재소에서 두루마기의 끈을 풀어 헌병의 목을 졸라 매려고 하였고, 또 제지하는 헌병 보조원에게 "너는 보조원을 몇십 년이나 하겠느냐. 때려 죽이겠다"라고 윽박질렀다. 유관순 또한 고야마(小山) 주재소장의 멱살을 쥐고 흔들면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라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면서 독립운동의 정당성을 밝혔다. 김용이는 주재소의 헌병 보조원들에게 "조선 사람이면서 무엇 때문에 왜놈의 헌병 보조원을 하느냐. 함께 만세를 부르라. 그렇지 않으면 죽여도 시원치 않을 놈들"이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나아가 시위 군중들은 헌병들이 강탈했던 태극기를 도로 빼앗아 휘두르며 "죽은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도 함께 죽이라"라고 소리치며, "구금자를 석방하라"라고 요구하면서 주재소를 습격할 태세를 보였다. 이에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시위 군중들을 해산시킨 뒤, 그날 저녁 유관순과 유중무, 조인원 · 조병호 부자 등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하였다.
유관순은 천안헌병대에서 갖은 고문을 받으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이 시위 주동자라고 말하면서 죄 없는 다른 사람들을 석방하라고 호통치기도 하였다. 이후 공주감옥으로 이송될 때에는 군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을 지날 때마다 독립만세를 연이어 고창하여 불굴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공주감옥에서 유관순은 공주 영명학교에 다니면서 만세 시위운동을 주도하다가 잡혀 온 오빠 유우석을 만나게 되었다. 아우내 장터 만세시위로 부모를 잃고, 오빠까지 감옥에서 만나게 된 유관순의 심정은 오죽했겠는가. 오빠 유우석도 1919년 8월 29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6월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진행된 재판과정 중 유관순은 법정에서, "나는 한국 사람이다. 너희들은 우리 땅에 와서 우리 동포들을 수없이 죽이고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죽였으니 죄를 지은 자는 바로 너희들이다. 우리들은 너희들에게 형벌을 줄 권리는 있어도 너희들은 우리를 재판할 그 어떤 권리도 명분도 없다"라고 하면서 일제의 재판을 거부하는 당당함과 민족적 기개를 잃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유관순은 5월 31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경성복심법원에 공소하였다. 이에 따라 공주감옥에서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된 유관순은 여기에서도 아침저녁으로 독립만세를 고창함으로써 수감자들의 항일 독립의지를 고취하여 갔다.
유관순은 6월 30일 경성복심법원에서는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지만 상고하지 않아 형이 확정되었다. 함께 재판받았던 아우내장터의 만세시위주도자들은 재판결과에 불복하여 상고하였으나 같은 해 9월 11일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이후에도 유관순은 서대문 감옥에서의 온갖 탄압과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옥중 만세를 불렀다. 특히 1920년 3월 1일 3․1운동 1주년을 맞이해서는 수감 중인 동지들과 함께 대대적인 옥중 만세운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유관순은 지하 감방에 감금되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유관순은 고문으로 인해 방광이 터지는 중상을 입었으나 치료하지 못한 채 고문의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경, 서대문감옥에서 18살의 꽃다운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10월 12일에서야 유관순의 시신을 이화학당에서 인수하였고, 10월 14일 정동교회에서 장례식을 치른 후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 유관순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12:33~12:34 서울 중구 정동길 33 번지에 있는 구신아일보 별관으로 이동
* 12:34~12:36 구신아일보 별관을 사진촬영
* 12:36~12:40 서울 중구 정동 34-31 번지에 있는 아펜젤러 동상으로 이동
* 12:40~12:41 서울 중구 서소문로11길 19 번지에 있는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이동
* 12:41~12:57 배재학당역사박물관 관람
[배재학당역사박물관은 교육, 종교, 정치, 사회,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근대사를 새롭게 조명할 자료와 담론이 모여드는 공간이다.
배재학당은 1885년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서양식 근대 교육기관이다. 고종황제는 1887년 [유용한 인재를 기르고 배우는 집]이라는 뜻으로 이곳에 배재학당이란 이름을 하사하였다. 2008년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새롭게 태어난 배재학당 동관(서울시 기념물 제16호)은 1916년 준공된 유서 깊은 근대 건축물로, 아펜젤러가 초기부터 영어 수업을 비롯한 전인 교육을 실천했던 공간이자 김소월, 주시경, 나도향 등 수많은 근대 지식인들을 배출한 신교육의 발상지며, 신문화의 요람이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는 근대 교육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귀한 소장품들과 함께, 상설 전시실, 기획 전시실, 체험 교실 등을 갖추고 다양한 분야에서 한국 근대사를 새롭게 조명할 자료를 소장하여 전시한다. 수도권 지하철 1, 2호선 시청역 10번 출구에서 240m에 있다. 주위에 덕수궁과 서울시립미술관이 있어서 함께 둘러보면 좋다.]
12:57~12:59 덕수궁길 61 번지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으로 이동 [161m, 2분 소요]
12:59~14:00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1, 2층에서 전시 중인 작가 구본창(具本昌, 1953년생)의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2023.12.14. ~2024.3.10.)와 2층 천경자컬렉션전시실에서 상설전시 중인 천경자 작품과 2층 가나아트컬렉션전시실의 《80 도시현실》과 3층 전시실과 3층 중앙 홀과 3층 프로젝트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2023.12.07.~2024.03.03.)를 관람
[서울시립미술관(서소문본관)은 시대와 미술의 변화에 부응하고 서로를 채우며 성장해 가는 네트워크 미술관이다.
서울 도심 한복판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자리 잡은 서울시립미술관은 1920년대 건축양식으로 지어진 옛 대법원 건물을 전면부만 그대로 보존한 채 신축하였다. 미술작품을 체계적으로 수집하고 보존하여 다양한 기획전을 통해 일반 시민들에게 미술을 알리고, 현대미술의 발전을 위해 이와 관련된 출판 활동과 작가 지원 프로그램을 시행하며 다양한 교육 강좌를 운영하여 미술 문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미술관 본관 1, 2, 3층에는 총 6개의 전시실이 있는데, 이 중 1개는 상설전시실로 [천경자의 혼]을 상시 전시하고 있다. 지하에는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강의실과 세미나실이 자리하고 있다. 각 예술 분야의 자료를 소장한 자료실도 갖추고 있으며, 전시용 도록과 아트상품을 판매하는 뮤지엄샵과 카페테리아 등의 편의시설도 운영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정동극장, 정동제일교회가 있는 고전미 넘치는 장소를 품은 정동길 옆에 있어 미술관 관람의 여운을 이어갈 수 있다.
서울 중구 덕수궁길 61
영업시간
매주 월요일 휴무
- 입장 마감 시간 평일 19시 / 주말, 공휴일 17시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길로 접어들면 고풍스러운 건물 한 채가 우뚝 서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이다. 전시보다 먼저 미술관 건물 자체의 건축미가 두드러진다. 미술관 측은 르네상스 양식인 옛 대법원 건물의 전면부는 그대로 보존하고 후면부에 현대식 건물을 신축했다. 미술관에 들어섰을 때 가장 처음 만나는 공간이 바로 옛 건물의 전면부와 새 건물의 벽면을 유리로 연결한 매개 공간이다.
특히 유리 천장으로 쏟아지는 자연광은 정말 매력적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회는 전문성과 대중성을 적절히 조화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샤갈, 피카소, 마티스, 마그리트, 고흐 등 미술에 문외한인 사람도 익히 알 만한 세계 유명 화가들의 전시회는 물론 국제미디어아트비엔날레, 미술관 봄나들이전 등 특색 있는 기획 전시를 선보인다.]
[서울시립미술관은 2024년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한국현대사진뿐만 아니라 동시대미술을 대표하는 작가 구본창(具本昌, 1953년생)의 회고전 ≪구본창의 항해≫(2023.12.14. ~2024.3.10.)를 서소문본관 1, 2층에서 개최합니다.
구본창 작가는 1980년대부터 현재까지 한국현대사진의 시작과 전개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습니다. 그가 작가이자 기획자로 개최한 ≪사진 새시좌(視座)≫(1988.5.18.~6.17., 워커힐미술관, 서울)에 출품된 작품들은 ‘연출 사진(making photo)’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한국 사진계와 미술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사진이 객관적인 기록이라는 전통적 역할을 뛰어넘어 회화, 조각, 판화 등 다양한 매체의 속성을 반영해 주관적인 표현이 가능한 예술 세계라는 인식은 그의 전 작품을 관통하며 한국 현대 사진계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구본창 작가의 이번 대규모 회고전은 작가가 섬세한 기질을 지녔던 내성적인 소년 시절부터 현재까지 수집해온 사물과 이를 촬영한 작품, 중학생 때 촬영한 최초의 <자화상>(1968)을 포함한 사진들, 대학생 때 명화를 모사한 습작 등 그간 접하기 어려웠던 작품과 자료를 선보이는 ‘호기심의 방’으로 시작됩니다. 이어 작가가 유학 시절부터 제작한 <초기 유럽>(1979~1985) 시리즈부터 최근의 <익명자>(1996~현재) 시리즈에 이르기까지 총 50여 개의 작품 시리즈 중 선별한 43개 시리즈의 작품 500여 점과 자료 600여 점을 시기와 주제에 따라 ‘모험의 여정’, ‘하나의 세계’, ‘영혼의 사원’이라는 부제 하에 전시합니다. ≪구본창 사진전≫(2001.5.4.~6.24., 로댕갤러리, 서울)으로 대중에게 각인된 <태초에>(1991~2004)와 <굿바이 파라다이스>(1993) 시리즈, 그리고 ≪구본창(Bohnchang Koo)≫ (2006.7.7.~7.30., 국제갤러리, 서울)으로 조선백자를 국내외에 널리 알렸던 <백자>(2004~현재) 시리즈는 사실 그의 깊고 넓은 작품세계 일부라 할 수 있습니다. 본 전시는 도시풍경을 스냅 형식으로 담은 작품, 자신을 피사체로 삼아 다양하게 변주한 작품, 자연을 추상적으로 형상화한 작품, 오래된 사물이 지닌 손길과 시간을 섬세하게 담은 작품 등 다양한 소재와 형식의 작품을 폭넓게 선보입니다. 특히 1989년 단체전에서 단 한 번 일부 소개됐던 솔라리제이션(solarization) 기법의 <무제>(1989) 시리즈를 전시해 작가의 독특한 초현실적 미감을 보여줍니다. 또한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6·25전쟁, 군사독재라는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광화문 부재를 낮과 밤에 기록한 <콘크리트 광화문>(2010) 시리즈를 최초로 발표합니다. 이러한 작품에 더하여 주요 관련 자료를 전시하고 충실한 설명으로 감각적인 사진 안 깊은 곳에 켜켜이 쌓인 작가의 노고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이야기를 온전히 드러내 작품의 진면목을 널리 알리고자 합니다. 또한 작가의 성장 과정, 시기별 작품 전개 양상, 국내외 인사와의 인연과 영향, 국내외 전시 참여 계기와 전시 기획자로서의 면모 등을 면밀하고 체계적으로 작성한 연보를 통해 구본창 작가와 한국현대사진이 어떻게 연결돼 발전되어왔고 해외로 확장됐는지 상세히 파악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는 작가가 지닌 오래된 열성적 수집 습관으로 작품 및 전시 관련 자료를 소중히 보존해왔기에 가능했습니다.
자신의 길을 찾아 용기 내 먼 항해를 떠났던 1979년에서 4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구본창 작가의 작품은 국내외 유수의 미술관에 소장되었고, 전시 역시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이는 작가가 그간 작업을 위해서 전국 곳곳을 찾아다녔고 세계 각지를 누비고 다녔으며, 원하는 대상을 만나기 위해서 수 년에 걸친 기다림도 마다하지 않았던, 지난하지만 기꺼운 여정 끝에 다다른 눈부신 결과입니다. 그동안 한국을 대표하는 작가, 기획자로 국내외 전시를 통해 한국사진의 세계화에 기여했고, 한국 사진계의 선배, 동료, 후배들의 작업을 해외에 알렸으며 시대를 앞서가는 실험적인 작품활동으로 사진을 현대미술의 장르로 확장해온 구본창 작가의 회고전은 여러 면에서 유의미한 전시입니다. ‘구본창의 항해’를 따라 너와 나, 우리의 존재와 삶의 의미에 관해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연계 프로그램전시 연계 프로그램 「작가와의 대화: 구본창의 작품 제작」을 진행합니다. 한희진 학예연구사의 사회로 구본창 작가의 주요 작품을 시기별로 제작 방법 변화에 따라 이야기 나누며 작가의 작품세계를 깊이 이해해 보세요.
- 일시: [1회차] 2024. 1. 27.(토) 14:00-16:00 [2회차] 2024. 2. 17.(토) 14:00-16:00
- 장소: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지하 1층 세마홀
- 대상: 누구나
- 모집정원: 회차별 150명
- 참가비: 무료 ]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작품 상설전시
“내 그림들이 흩어지지 않고 시민들에게 영원히 남겨지길 바란다.”
1998년, 한국 화단의 대표적인 작가 천경자(千鏡子, 1924-2015) 화백은 시민과 후학들이 자신의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194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60여년에 걸쳐 제작한 작품 93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하였다.
한국화의 채색화 분야에서 독자적인 화풍을 이루어 온 작가의 독특한 작품세계와 그 기증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한 천경자 상설전시는 ‘영원한 나르시스트, 천경자’라는 이름으로 20여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는 꿈과 사랑, 환상에서 비롯된 정한(情恨)어린 스스로의 모습을 끊임없이 작품에 투영하는 작가의 작품세계를 은유한다.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거나 동식물로 표현되거나 상관없이, 그림은 나의 분신”이라고 말하는 천경자 화백의 작품세계는 마치 자신을 비추는 ‘거울’과도 같다.
전시는 이처럼 자전적(自傳的)인 성격을 가지는 작가의 작품 전반에 대한 자기고백적 측면에서 접근하여, ‘내 슬픈 전설의 이야기’, ‘환상의 드라마’, ‘영혼의 여행자’, ‘자유로운 여자’라는 네 개의 섹션으로 구성하였다. 다채로운 이야기로 구성된 이번 전시를 통해 천경자 화백의 작품 기증이 지닌 참뜻이 다시 한 번 빛나길 바라며, 앞으로도 지속적 연구를 통해 다각도로 재조명될 천경자 상설전시에 대한 관람객 여러분의 변함없는 관심과 사랑을 기대한다.]
[《80 도시현실》은 1980년대 도시를 둘러싼 한국의 현실을 서울시립미술관 가나아트 컬렉션과 소장품을 통해 다각도로 살펴보는 전시입니다. 가나아트 컬렉션은 2001년 가나아트 이호재 대표가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한 200점의 작품군으로 1980-90년대 한국의 사회현실을 적극적으로 반영한 민중미술 및 리얼리즘 계열의 작품들을 포괄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한국 사회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1960-70년대 고도 경제 성장을 기반으로 도시화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든 시기였습니다. 한국은 급격한 산업화와 경제적 성장을 이뤄냈지만, 빛나는 성장의 이면에는 여러 사회적 문제들이 존재했습니다. 근로자들은 열악한 노동조건에 처하고, 농촌 경제는 쇠락하며 이촌향도 현상은 심화되었습니다. 또한 강남개발, 중산층의 등장, 수입자유화 등으로 인해 도시를 중심으로 소비문화의 발달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도시화의 물결 속에서 당대의 예술가들은 자신만의 시각과 방식으로 다양한 작품을 제작하였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80년대 도시 현실의 여러 양상을 ‘도시화의 이면’, ‘도시인’, ‘도시를 넘어 - 생명의 근원’의 세 개의 소주제로 나누어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번 전시를 통하여 1980년대 도시를 둘러싼 다양한 사회적, 개인적 차원의 현실을 당대를 살아갔던 예술가의 눈을 빌려 읽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또한 당시의 문제의식과 고민이 40년이 지난 현재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숙고할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늘 어렴풋이 짐작했던 여러분께 처음으로 편지를 씁니다. 전시를 보는 것, 미술관에 방문하는 것은 여러분께 어떤 의미인가요? 여러분이 미술관에 오는 이유는 저마다 다를 테지만, 작가나 기획자는 보통 여러분께 말을 건네는 마음으로 작품과 전시를 만듭니다. 이번 전시는 특히나 대화가, 언어와 생각을 나누는 일이 중요하기에 그 마음을 담아 여러분께 말을 건네는 일로 전시를 시작합니다.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는 서울시립미술관의 2023년 기관 의제인 ‘공유’의 관점에서 동시대 미술관의 역할을 생각해 보는 전시입니다. 미술관은 작품을 소장하고, 연구하고, 전시하는 공간이었죠. 하지만 오늘날의 미술관은 다양한 군집의 사람들과 접촉하고 소통하며 공동의 경험과 가치를 짓는 사회적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에 ‘상호성’, ‘연결’처럼 관계를 향한 개념은 미술관 활동의 주요한 가치가 됩니다. 그리고 가진 것을 나눈다는 의미의 ‘공유’는 상대를, 또 그와의 만남과 접촉을 필요로 한다는 점에서 ‘관계’를 중심에 둔 동시대 미술관의 실천을 재고해 보기 위한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술관에서 누구와 무엇을 어떻게 나누고, 혹은 나눌 수 있을까요?
《우리가 모여 산을 이루는 이야기》는 미술관의 대표적인 공공재인 소장품을 공유의 중심으로 가져옵니다. 그리고 이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 싱가포르미술관, 퀸즐랜드주립미술관 등 세 기관의 소장품을 씨앗 삼아 만든 서로 다른 우리가 만나고 대화하는 자리입니다. 미술관이 실천하는 공유란, 의외의 만남 속에서 오해와 차이, 놀라움을 발견하며 공통의 이해를 찾아가는 여정이며, 이를 통해 각자의 앎의 반경을 새롭게 그려나가는 일일 것입니다. 그렇기에 전시를 구성하는 작품은 감상의 수동적인 대상을 넘어, 서로 다른 우리를 잇고 교차시키며 또 다른 공유의 실천을 만드는 도구이자 촉매제가 됩니다.
미술관에서, 넓게는 삶 속에서 공유를 실천하고자 할 때 선행되어야 할 움직임을 이번 전시는 실천어를 통해 상상합니다. 나의 안전한 반경 너머의 누군가를 마주하는 일(사랑하기), 상대의 언어를 이해하려는 의지(번역하기), 언어 이면의 의미를 발견하고 관계 맺는 과정(추상하기와 침묵하기), 공통의 감각과 경험을 세우려는 움직임(세우기), 이를 다방면으로 잇는 실천(섬하기), 그로써 새로운 모양을 만들어 보는 시도(물갈퀴만들기)가 구체적인 상황과 운동, 그리고 작품들의 관계망 속에서 펼쳐집니다. 여러분은 작품들 사이에서 연쇄하는 이 실천의 흐름을 따라가 볼 수도 있고, 자신만의 관계망을 재구성하며 공유의 의미를 재검토해 볼 수도 있습니다. 작품을 통해 우리는 새로운 상황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며, 함께 실천할 수 있는 움직임을 도모합니다.]
* 14:00~14:12 서울 중구 칠패로 5 번지에 있는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으로 이동 [이동거리 764m, 12분 소요]
탐방지 :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
탐방일 : 2024년01월31일(수요일)
날씨 : 청명한 날씨 [서울 종로구 : 최저기온 영하 1도C, 최고기온 6도C]
탐방코스 및 탐방 구간별 탐방 소요시간 (총 탐방시간 1시간11분 소요)
* 14:12~15:12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 탐방 & 이후창 조각가 ‘형상과 현상, 성스러움에 대하여’ 展 관람
[2019년 6월 개관한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은 순교한 천주교인들을 기리는 곳이지만 건축 디자인으로도 유명하여 많은 사람의 발걸음을 이끄는 곳이다. 서소문 일대에서는 60여 년간 수많은 사람이 천주교 박해를 받았으며, 희생당했다. 따라서 서소문 역사 공원에는 박해받은 천주교인들의 영혼들을 기리는 현양탑이 세워져 있다.
2014년 방문했던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이곳을 방문할 정도로 한국의 천주교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며. 건축 디자인 면에서도 특별해 2019년 서울시 건축상 최우수상을 받았다. 건물 내부는 굵은 직선과 곡선으로 이뤄졌으며 외부는 붉은색 벽돌로 지어져 강렬한 인상을 준다.
박물관에서는 천주교 박해와 관련한 전시와 예술 작품을 만나 볼 수 있다. 매주 목요일에 서소문 역사탐방 해설을 진행하고 있어 서소문 성지와 천주교의 역사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은 독특하게 지하에 자리하고 있으며, 지하 2층에서는 상설 전시를 만나 볼 수 있다.
계단을 따라 지하 3층으로 내려오면 하늘광장을 만나게 된다. 하늘광장은 경건함을 가득 담은 공간으로 절제된 사각형의 공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늘, 빛, 직선만이 존재하는 이 공간은 천주교 박해의 먹먹함과 슬픔이 그대로 담겨 있다.]
[이후창 조각가 ‘형상과 현상, 성스러움에 대하여’ 展 [이화순의 오늘의 작가]
이화순 칼럼니스트
聖과 俗 경계 없앤 전시, 2월 4일까지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서
보광 스님, 원종현 신부님 동반 관람한 ‘동반작가’전
레퀴엠 음악 속 아들 주검 껴안은 검은 聖母와 부처 등 25점
[시사오늘·시사ON·시사온= 이화순 칼럼니스트]
“검은 성모와 금빛 유리 조각 예수 ‘피에타’가 궁금한가요?”
모차르트의 레퀴엠 음악이 장중하게 흘러나오는 가운데 번쩍이는 미러볼 조명 아래 황금빛으로 빛나는 유리조각 아들의 주검을 껴안은 처연한 잿빛 성모(聖母) 마리아. 3000년만에 핀다는 우담바라가 핀 스테인리스스틸의 부처 머리….
천주교 성지라는 종교적 성격 때문에 충분히 조명받지 못한 명소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에 검은 성모마리아가 황금 유리 예수를 품에 안은 특별한 ‘피에타’가 있다. 유리와 금속 등 소재로 독창적 작품을 추구하는 이후창 초대전 <형상과 현상, 성스러움에 대하여>의 메인 작품. ‘형상과 현상-피에타’는 기대 없이 들어선 관람객들을 강력하게 사로잡는다.
어두운 특별 공간 맨 아래에서 파티장 높이의 ‘형상과 현상-피에타’.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에서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에 환상을 품었어도 좋다. 이후창 작가의 피에타는 그만의 매력이 출중하다. 모차르트의 미완성 장송곡 ‘레퀴엠 d단조 K.626’으로 가득 찬 공간을 조심조심 내려가면 천정의 미러볼 조명을 받으며 회전하는 피에타를 만나게 된다. 잿빛 성모마리아가 거울 유리 조각으로 된 아들 예수를 품에 안은 모습이다. 360도로 천천히 회전한다.
아들 주검을 안아주는 어머니는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검은 흑연 소재여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서양의 백인 여성을 모델로 한 미켈란젤로의 성모마리아와 달리 이후창의 피에타 주인공은 검은 어머니다. 처연하고 아름다운 어머니를 만들기 위해 스티로폼을 깎아 코팅제로 코팅한 후 흑연가루를 녹여 여러겹을 붓칠하는 과정을 거쳤다. 황금빛으로 보이는 거울 유리 조각을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유리를 직접 조각낸 후 공업용 실리콘으로 하나하나 붙여 만들었다. 예수는 온몸이 피범벅이 되어야 했지만 피 대신 빛을 뿜어대며 세상을 구원하는 모습이다.
아들보다 몸집도 작아야 할 어머니 뒷모습은 마치 아버지 같기도 하다. 인간과 신의 경계를 넘어선 아들의 주검을 안은 어머니. 어머니의 표정은 지극한 슬픔과 달관 그 어디쯤인지 심연을 알 수 있는 표정이다. 이곳에선 조용히 한참 머물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된다. 계단 이곳저곳에 관람객들이 조용히 작품을 음미하고 있다.
피에타를 보기 위해 먼저 지나쳐온 곳으로 돌아가니 스님과 신부님이 함께 작품 앞에 같이 있었다. 조계종 호계원장과 동국대 총장을 거친 보광스님(청계산 정토산회주)과 원종현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관장 신부님, 오원배작가(동국대명예교수)였다. 예술 앞에 모두 관람객일 뿐이었다.
금속성 부처 머리에 3000년에 한번 핀다는 우담바라가 피어있는 작품 ‘형상과 현상-우담바라’. 차가운 광택의 스테인리스스틸 소재 부처 머리에서 가지가 뻗어 나오고 그 가지들에서 꽃을 피운 형상이다.
그 옆에는 다양한 크기의 유리공을 탑처럼 쌓아 올린 ‘12지신 오벨리스크’가 서있다. 12개의 길고 짧은 유리 오벨리스크는 옥빛, 붉은빛, 아이보리 빛 형형색색 전시장을 환상적인 컬러로 물들인다. 작품 색깔이 카멜레온의 보호색처럼 다채롭게 변하는 것이다. 유리 기둥 꼭대기에는 올해의 띠 ‘용’을 비롯해, 쥐 소 호랑이 토끼 등 12개의 띠별 동물 형상 오브제가 붙어있다.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대변하는 듯한 ‘12지신 오벨리스크’ 옆에는 균열한 몸체의 금속 반가사유상이 오벨리스크를 머리에 이고 있다. ‘형상과 현상-반가사유상’이다. 빨간빛, 푸른빛 이 점멸하며 반가사유상의 균열한 틈새로 강렬하게 쏟아진다.
반가사유상이 석가모니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덧없음을 사유하던 모습에서 비롯된 것을 생각해 보면, 이 작품은 오벨리스크와 함께 인간의 끝없는 욕망과 인생의 덧없음에 대한 작가의 사유를 따라가게 한다.
보광 스님에게 작품 감상 소감을 넌지시 여쭈었다. “좋은 작품입니다”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원종현 관장 신부님은 말을 아꼈다.
이후창 작가는 서소문성지역사박물관 동반작가로 선정돼 2년여간 꼬박 이번 전시 준비에 매달렸다고 한다.
“불상과 반가사유상, 피에타, 십이지신 등이 있죠. 작품은 종교를 초월한 형상들이지요. 그리고 그들 위에 조명이 있어요. 빛의 변화에 따라 일루전의 형상들이 변하죠. 원효대사가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고 깨달음을 얻었다는 이야기 같은 거죠.”
종교인, 비종교인을 떠나 ‘모든 것의 원인은 내 속(마음)에 있다’는 원효대사의 깨달음을 메시지로 전하고 싶었다는 작가의 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당신 안에 답이 있다’ ‘행이건 불행이건 모든 것은 사람의 마음에 달려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거울은 깨지기 쉬운 점 등 여러 가지 면에서 사람과 속성이 닮아서 전시에서는 거울의 속성을 잘 표현하고자 한다”는 작가는 “이번 전시를 통해 형상과 현상을 통해 성스러움의 본질에 대한 저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을 만들어 보았다”고도 한다.
성(聖)과 속(俗)의 이분법도 사절한다.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어떻게든 연결되어 흐른다는 자연의 섭리와 이치를 작품을 통해 관람객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이후창 작가는 홍익대학교 조소과 박사과정을 졸업했고, 국내외에서 40여 회 개인전과 500여 회 그룹전을 진행했다.
미국Art New York, Art Palm Springs, CONTEXT Art Miami 및 중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에서도 큰 주목을 받았다. 2011년에는 제11회 하정웅 미술상을 수상했고, 2017년 ‘서울 국제 조각 페스타’ 관람객 투표에서 ‘최고 인기 작가상’에 뽑혔다. TV인기드라마 ‘호텔델루나’ ‘달의 연인-보보경심려’ ‘남자친구’ 등 여러 작품에서 비주얼 아트디렉터로 일찌감치 대중과도 눈맞춤을 했다. 전시는 2월 4일까지다.
이화순 칼럼니스트는…
에이앤씨미디어 대표이자 아트&미디어연구소 소장, 현대정책연구원 전문위원이다.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평창비엔날레 홍보위원장, 순천만국제자연환경미술제 홍보위원을 역임했다.
안산문화재단 이사, 서초문화재단 비상임이사, 음성품바축제 연구위원, 서울교통공사 문화예술철도 자문위원을 지냈다. 예술경영 석사, 경영학 박사. 스포츠조선 문화경제팀 팀장, 시사뉴스 문화 경제 국장·칼럼니스트로, 아트플래너, 아트컬럼니스트, 아트컨설턴트로도 활약했다.]
[빛·공간·산책 통한 ‘위안’… 종교 초월 ‘일상 속 쉼터’ [스페이스도슨트 방승환의 건축진담]
세계일보 기사 입력일 : 2024-01-29
(27) 서소문역사공원·성지역사박물관
‘콘솔레이션 홀’ 빛 극적인 연출 감동
‘하늘광장’ 들어서면 내면 세계 집중
‘순례의 길’ 따라 걷다보면 사색 잠겨
고난 장면 직접적 묘사 방식서 탈피
일반인들도 거부감 없이 녹아들어
“아이는 성당을 다녔으면 좋겠어.”
임신 사실을 알고 아내가 한 말이었다. 내게 신앙은 역사나 철학이지만 아내에게는 신념이었다. 아내는 자신이 느껴 온 믿음을 아이도 느끼며 살기를 원했다. 아이가 태어난 뒤 아내는 신앙생활을 위해, 그리고 난 건축물을 보기 위해 주말마다 다른 성당을 찾아다녔다. 가끔 방문했던 성지(聖地)에서는 천주교와 조선 후기 역사를 아이에게 들려주기도 했다.
그런데 성지에 갈 때마다 아이는 불편해했다. 성지에 조성된 박물관에 당시 신도들이 겪었던 고문과 핍박의 장면이 무서웠기 때문이다. 피 흘리고 뒤틀린 육체를 재현하는 방식 말고 그 시대를 이해하는 방법은 없을까? 무엇보다 그 전시물은 목숨까지 내놓으며 지키고 싶었던 그들의 신념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다 찾은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은 다른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하고 있었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천주교 순교자들의 절대적인 믿음이나 이를 실현한 초월적 의지 같은 비범함이 아니다. 그곳에서는 대다수의 종교가 추구하는 보편, 즉 종교를 통한 ‘위안’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방식은 천주교인들이 겪은 고난의 장면을 직접적으로 묘사하는 전시물이 아닌 일반인들이 거부감을 느끼지 않는 ‘빛’, ‘공간’, ‘산책’이다.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을 찾는 사람들이 가장 감동을 받는 장소는 ‘위안’, ‘위로’라는 뜻의 ‘콘솔레이션 홀(Consolation hall)’이다. 14m 깊이의 땅속에 배치된 콘솔레이션 홀은 2m가량 들린 상자로 둘러싸여 있다. 상자 안으로 들어서면 공간을 둘러싼 빛이 공연을 시작한다. 영상은 약현성당과 명동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박해의 시대였던 조선 후기 사회, 겸재 정선의 ‘금강내산전도’를 다루고 있다. 모두 천주교와 관련된 소재이지만 그 관계성이 직접적으로 드러나지는 않는다.
콘솔레이션 홀 가운데에는 빛의 우물이 박해 때 순교한 다섯 성인의 유해가 있는 곳을 비추고 있다. 그리고 그 빛은 안내자처럼 콘솔레이션 홀과 마주하고 있는 ‘하늘광장’으로 이어진다. “자네의 시작은 보잘것없었지만 자네의 앞날은 크게 번창할 것이네(욥기 8장 7절)”라는 성경 구절을 떠오르게 하는 장면이다. 동시에 성인들의 순교가 현재 한국 천주교의 형성과 지금의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상징하는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스토리라인을 이해할 수 없더라도 빛의 극적인 연출을 바라보는 방문객들은 이 세상에서 함께하지 못하는 누군가가 자신을 보살펴 주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 누군가가 반드시 절대자일 필요는 없다. 오히려 먼저 떠난 부모님, 친구, 반려동물이라면 빛이 주는 위로와 위안이 더 와 닿을 것이다.
빛의 안내를 따라 ‘하늘광장’으로 나가면 붉은 벽돌로 된 공간이 방문객을 맞는다. 삶의 주인인 각자를 상징하는 ‘영웅’과 이 땅에서 순교한 이들 중 성인의 반열에 오른 44인을 상징하는 ‘서 있는 사람들’이라는 작품이 서로 마주 보고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압도적으로 다가오는 건 ‘하늘 아래 빈 공간’이다.
이 땅은 천주교인들의 순교 성지이기 전에 형장이었다. 조선 정부는 동대문 밖에서 사형을 금했던 ‘서경(書經)’의 내용을 따르고 형벌의 집행을 통해 정부의 메시지를 확산하기 위해 도성 서쪽에 있는 저잣거리에 형장을 마련했다. 천주교 신자들을 포함해 형장에서 처형된 이들의 마지막 순간에는 비록 이곳이 북적이는 저잣거리라 하더라도 침묵만 가득 찬 진공의 공간으로 바뀌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을 맞이한 사람은 원망의 눈빛이나 동경의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늘만 보이는 빈 장소에서 성지라는 역사를 포함한 땅의 이야기와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을 상상해 본다.
숨소리마저 울리는 하늘광장은 하나의 재료로 만들어진 단순한 육면체 공간이다. 그래서 내면세계에 더 집중하게 된다. 더불어 어떤 방향으로도 천천히 걸을 수 있어서 모든 감각이 더 빠르게 안으로 침잠하게 된다. 걷기를 통한 사색은 하늘광장과 콘솔레이션 홀을 비롯해 ‘순례의 길’로 연결된 박물관 곳곳으로 확장된다. 순례는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보행’보다 휴식이나 명상을 목적으로 하는 ‘산책’에 가깝다. 그래서 움직임의 속도는 느리고 정처는 없으며 걷는 과정에서 마주치는 발견을 중시한다.
산책은 박물관이 들어선 서소문역사공원의 앞날을 생각하면 가장 중요한 행위다. 1905년 개통된 경의선은 이 땅을 도심과 갈라놨는데, 그럼으로써 이곳은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이후 서소문 고가도로가 개통(1966년)되면서 땅의 역사는 잊혀져 갔고, 그런 상태에서 설치된 지하주차장과 재활용 쓰레기처리장은 공원을 사람들의 관심 밖의 장소로 만들었다.
하지만 앞으로 경의선이 지하화되어 접근성이 좋아지고 남쪽을 지나는 칠패로 건너편에 서울역 북부역세권 개발이 완료되면 서소문역사공원은 반경 500m 내 유일한 근린공원이 된다. 당연히 시민들은 그간 이곳에서 그렇게 필요로 하지 않았던 공원으로서의 역할, 즉 여가와 휴식을 위한 산책의 공간을 요구하기 시작할 것이다.
서소문 밖 네거리의 역사와 천주교 성지로서의 역사를 구분할 수 없듯이 서소문근린공원을 리모델링해서 조성한 서소문역사공원도 공원이라는 도시 속 공공공간의 역할을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 박물관을 운영하는 천주교에게 요구되는 건 이 공간을 천주교라는 특수에 한정하지 않고 보편으로 넓히려는 노력이다.
순례의 길을 따라 서성이다 하늘광장 구석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았다. 순간 4대 박해 때 많은 천주교인이 기꺼이 순교를 택한 이유를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이 함께 모여 살았던 교우촌은 희망이 보이지 않았던 조선의 땅에서 하늘의 주인(天主)을 함께 외칠 수 있었던 공동체였다. 죽음과 배교를 선택해야 하는 순간 함께한 공동체를 배신하는 행위였던 배교는 그들에게 선택지가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죽어서도 공동체 안에 머물고 싶었다. 당시 천주교인들에게 절대자에 대한 믿음보다 중요했던 건 함께한 이들과의 결속이었다.
신앙을 통한 공동체 안에서의 결속은 모든 종교가 추구하는 가치다. 가톨릭은 그 공동체의 범위를 보편화함으로써 세계화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리스어로 가톨릭을 의미하는 ‘카톨리코스(καθολικος)’는 ‘보편적인’, ‘일반적인’을 뜻하기도 한다. 서소문역사공원과 성지역사박물관이 넓혀야 할 지평도 결국은 천주교인에서 확장된 대중과 공공이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 15:12~15:23 서소문성지 역사박물관에서 경찰청.동북아역사재단(중) 정류장까지 도보로 이동하여 탐방 완료 [11분, 666m 이동]
15:23~15:30 경찰청 맞은편에 있는 경찰청.동북아역사재단(중) 정류장에서 구산역1번출구.예일여고 정류장으로 가는 752번 버스 승차 대기
15:30~15:58 752번 버스를 타고 경찰청.동북아역사재단(중) 정류장에서 구산역1번출구.예일여고 정류장으로 이동 [28분, 12개 정류장 이동]
덕수궁 안내도
중명전 위치도
[이화여고 100주년기념관&서울유관순기념관&배재학당역사박물관&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본관 ] 위치도
서소문 성지 역사박물관 위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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