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과 화합
이단
내가 반야심경의 헛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어떤 분들이 나를 이단이라고, 남방에 가서 살지 왜 여기에서 분란을 조장하냐고 하신다.
그래서 이단이라고 하는 문제를 한 번 짚어보자.
이단이라는 것은 그 사회나 종교의 보편성에서 벗어난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난 이단이 맞다.
대승의 보편성에서 벗어난 것이므로 나를 이단이라고 지목한 것은 매우 타당하다.
그렇다고 이단이 잘못이라는, 진실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기독교도 초기에는 이단이었다.
기독교가 세상에 자리잡고 그게 보편적인 종교가 되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마녀 사냥, 십자군 전쟁과 같은 폭력성이 극단으로 흘러갔다.
지구가 둥글다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고있다는, 지금으로서는 아주 상식적인 진실마저도 밝히려면 목숨을 걸어야 했다.
나찌주의가 독일 사회의 보편적인 것이 되었고 대부분 독일인들이 거기에 동조하고 추종할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인류의 대학살이 발생했다.
대부분의 전체주의, 독재주의 국가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가?
다수가 독재에 침묵하거나 동조하거나 거기에 아부하면서 꿀을 빨 때, 힘없는 소수가 최루탄을 마셔가며 항거하다가 죽거나 다치거나 감방에 갔다.
이단이라고, 소수의 의견이라고 그게 거짓이라는 말이 아니다.
기독교인에게는 불교가 이단이고, 불교인에게는 기독교가 이단이다.
불교 안에서 따지면, 대승불교에서 초기불교가 이단이 되고, 남방에서 대승이 이단이 된다.
지구 전체로 따지면 초기불교가 보편성을 띠고 있고, 대승은 자기 지역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초기경전인 니까야는 독일어, 영어로 번역되고 많은 세계인들에게 읽혀지고 있지만, 대승경전은 중국인들이 영어로 번역해서 전파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환영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초기경전은 현실적이고 논리적인 반면에, 대승경전은 형이상학적이고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단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보다 그게 진실인가 거짓인가를 따지는 것이 중요할뿐이다.
-----
화합
내가 대승의 핵심경전을 비판하는 것을 두고, 어떤이가 말하길, 왜 논쟁거릴 만들어 분란을 일으키냐고, 왜 승가화합을 깨뜨리냐고 하시는데, 여기에 대해 이야기 해보자.
토론 또는 논쟁은 진실을 가리는데 아주 중요하다.
초기경전을 읽어보면, 붓다께서도 많은 이교도들의 도전을 받아들이셨고, 그들과 토론 또는 논쟁을 하셨다.
그 당시에는 바라문교가 보편성을 띤 사회였고, 붓다는 사문이라는 소수의 이단이었다.
바라문 스승들이 똑똑한 제자들을 교육시켜서 붓다에게 도전케 했다.
자이나교 교주가 똑똑한 제자들을 훈련시켜 붓다를 침몰시키려고 논쟁의 주자로 내보내기도 했다.
그 모든 논쟁에서 붓다는 상대방을 침몰시켰다.
그리고 도전자들을 모두 불교로 개종시켰다.
그래서 그 당시 타종교에서 붓다를 '개종의 마술사'라고 부르기도 했다.
붓다는 이렇게 토론의 최강자였다.
니까야를 읽어보면 경전의 대부분이 토론으로 이루어져 있다.
니까야의 대부분이 붓다와 이교도, 붓다와 비구들, 대장로 아라한들과 비구들, 붓다 또는 대장로들과 재가자들과의 토론, 대담 또는 법담(담마 토크)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하 깟짜야나가 논의 제일(論議第一)이라는 칭호를 얻을 것을 보면 토론이 일상화되어 있다는 의미도 된다.
깨달음의 길을 가는 데는 스승과 제자 사이에 대담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선어록도 거의 전부가 스승과 제자 사이의 토론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경전을 맹목적으로 믿는 것처럼 어리석은 짓은 없다.
특히 붓다의 말씀이 아니고, 과거 누군가가 붓다의 이름을 빌려 저술한 것으로 의심되는 경전은 그게 붓다의 가르침에 위배되는지 아닌지 따져보고 믿고 실천해야 한다.
스스로 판단이 안 설 때는 깨달은 분들에게 물어보거나 오래 수행한 분들에게 물어보아 참고를 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런 토론은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다.
그러면 니까야와 선어록에 나오는 모든 토론들은 모두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이 된다.
경전이 의심스러우면 문제제기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난 초기경전도 의심스러우면 한 번 따져본다.
교리에 대한 토론은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이 아니고 보다 건전한 승가를 구성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다.
맹목적인 믿음 추구만큼 위험한 것이 없다.
종교 또는 이데올로기 역사에서 그 위험성이 많이 증명되었지 않는가?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은 따로 있다.
파당을 이루고 조직관리를 하기, 자신들 조직에 해가 되는 자 징계하기, 본사 주지 자리를 가지고 세력 싸움하기, 불전함을 자기 호주머니 돈으로 여기기, 충성도에 따라 주지자리 배분하기, 등이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것이다.
모두가 화합해서 함께 가야한다는 말이 진실이든 거짓이든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함께 묻어가자는 말이라면, 그건 화합이 아니다.
항상 따뜻한 마음으로 서로서로 용서하고 포용하고 함께 가자고 한다면, 왜 붓다는 데와닷따를 용서하고 포용하지 않고
"그를 승가에서 축출한다. 그는 더 이상 승가의 일원이 아니다."
라고 선언했겠는가?
누군가가 나를 이단이라고, 승가의 화합을 깨뜨리는 자라고 비난하기에 이단과 화합에 대해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이게 변명처럼 들린다면 그게 변명이 되는 것이다.
거기에 대해 내가 변명이 아니라고 손사래칠 필요가 있겠는가?
어차피 소 귀에 경읽기이다.
첫댓글 사두 사두 사두 _()_
고맙습니다 스님
사두ㅡ사두ㅡ사두
_()_
_()_()_()_
요즘 많은 프랜차이즈 먹거리 업체가 성업 중입니다. 어느 업소라도 창업자가 규정한 메뉴와 레시피를 따르지 않으면 문을 닫아야 합니다.
하지만 창업자 예수님, 부처님의 메뉴와 레시피를 따르지 않고도 버젓이 성업 중인 교회, 절이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