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관한 시모음 84)
여름의 차 3 /이혜민
그대를 기다리는 밤 내내
사연은 조금 늦게 다가와
빈방마다 조용한 기다림이 내렸다
섬돌 밑 귀뚜라미는 계절을 잊은 채
잠들지 못했다
이 때 내 떨리는 온몸을 일으켜
차를 우린다
몇 몇 차이파리는 길게 풀어져
차관을 채운다
그저 부질없는 세월만 탓하기도 하고
내 지나가는 생각도 내려놓고
여름의 차
그 앞에서 흐느끼는 심사
출렁이는 파도는 이내 잦아들고
애둘러 떠나는 울음보
그대 가슴 속에 내려놓고 싶은 밤
여름, 여름을 읽는다 /박명숙
여름 문이 열리면
태양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파란 바람 살랑이며 출렁이는 파도가
귓가에 속삭이듯 나를 부른다
하늘 밑
청보리밭이 누렇게 익어가고
청포도가 알알이 익어가면
여름 향기가 달콤하게 차오르고
담쟁이가 여름을 만나
푸르게 푸르게 펼쳐 놓은 벽화를 보라
말없이 하늘을 향해 촉수를 세우고
안간힘을 키우며 담을 넘는다
한차례 시원한 소나기를 만나
무더운 여름을 식혀주기도 하고
자연이 견디는 것처럼
여름은 무르익는 삶의 향기를 채운다
여름이면
열대야, 불야성에 잠 못 이루는 밤도
추억거리가 될 여름 이야기로
빛바랜 추억이 되어 아름답게 마주하겠지
이겨내야 한다
그 혹독한 여름의 심장에
지르는 아우성을 들어야 한다
뜨거운 태양을 즐기는
감자가 영글고 옥수수가 익어가고
배롱나무꽃, 무궁화, 자귀 꽃이
활짝 웃고 있는 나무의 일기를 읽으며
여름날의 푸른 철학을 배운다
혹독한 여름을 이겨내고
풍요로운 삶을 허락하는 계절이 오면
순종하는 자연처럼
긍정의 바람을 일으키고
지혜로운 삶의 여름을 읽는다
여름은
작은 미생물까지도 소리 내 읽어
또 다른 전진을 꿈꾸게 한다
포말하우트의 여름 /김희준
안개가 안아주는 밤에는 당신의 별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가려진 달이 가끔 구름의 테두리에서 벗어난다
안개가 보라색이야,
당신이 흩어진다 보라 너머 삼각형 자리가 태어난다
달 근처에는 어떤 고리로도 완성되지 않는 토성이 있다
그 아래 고래자리에선 흰 뿔을 가진 외눈박이 인어가 말라간다
생각보다 뭉툭한 당신의 손가락을 보는 일에 밤을 다 써버리고,
언젠가 저 손이 꼭 잡고 싶어 죽을 것 같던 시간이 도형에 갇힌다
긍휼에 가까워지는 마음을 길들이며
발음만으로 귀해지는 것에 당신을 오려 붙이는 것이다
백열전구에서 한 눈으로 슬퍼하는 인어를 꺼내오는 것이다
아내라고 불러도 될까
한 음절씩 아껴부르다가 내 안을 모두 내어주게 되는 일
허벅지를 베고 누운 당신의 귀를 넘겨줄 때
어쩐지 심장보다 엄지 쪽 물갈퀴가 아파온다
그림자를 자르다가 실수로 잘라버린 종이인형이 되어 절뚝이는 당신을 내 궤도로 들이는 일,
불구가 된 내 안이 절름거리는 일
아내야 아내야,
고리의 파편 되어 그 이름 부를 때
당신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거나
어느 때도 내 사람인 적 없던 아내를 부르며 안개를 안아보는 것이다
여름 꽃 /이원문
그 흔하게 피는 여름 꽃
냇둑으로 들길로 산자락 밑 밭둑으로
어쩌다 가재 잡이의 골짜기에 오르면
그 곳도 띄엄 띄엄 예쁜 꽃이 피었었지
모르는 이름의 그 예쁜 꽃들
소녀의 머리 빗은 듯 날리는 억새풀
그 많은 꽃 이름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
모두 다 모아 고향꽃이라 부르고 싶다
여름과 가을의 길목에 서서 /김재덕
가을을 준비하려 멀어지는 하늘처럼
자연도 하나둘 여름을 밀쳐내는가 봅니다
매미의 핏대 소리가 우렁하지만
고독에 꽃이 피듯 가을빛은 다가섭니다
그대는 가고
나는 남아 서성이다가
체념의 발길이 덧없다 한들
돌아선 마음에 갈색추억이 머물겠는지
하물며
소낙비에 그리움 씻겼는데
어찌 또다시 새벽달에 아픔을 심겠습니까
그래 놔두자
연어가 연어의 숙명을 되돌리지 못하듯
그 기억들 가슴이 잊겠냐마는
망설인 마음마저 지워지면 어쩌지..
서로서로 그리듯이
뜬구름보다도 못하게 이별을 준비합니다
그렇게 애달프면서….
여름 인생 /이원문
풀이파리에 흔들리는 마음
나도 모를 이 마음 무엇을 바라보나
그늘 시원히 바라보는 이파리
소스라쳐 눕다 다시 일어나고
일어나 다시 몸부림 치는 저 이파리
바람 불면 부는대로
가뭄에 비 오면 비 오는대로
처음도 비 바람에 저리 시달렸을까
씨앗 하나 잃을새라 매달린 세월
이제 그 세월도 절기 따라 넘는구나
여름 /조순자
오 푸르고 맑은 여름
청년처럼 힘차고 싱그럽다
오 내 사랑하는 자야
어서어서 창문을 열어라
밤새 갇혔던 탁한 공기처럼
묵은 일들은 훨훨 날려 보내고
힘 솟고 기쁨 가득한 여름
청산의 기운을 함빡 마셔라
저기 저 푸른 산 능선처럼
사랑의 마음 잇고 또 이어
깊은 계곡의 의연한 나무처럼
사랑의 어깨동무 깊숙히 걸어보라.
여름 숲 /고송 정종명
팔월의 태양 묵직하게 내려앉은
여름 숲에는 시원한 바람이 인다
진청 빛 떡갈 나뭇잎 펼쳐
부채처럼 살랑거리며 바람을 일으키며
된 더위를 물리치고
평소엔 없던 바람의 길
숲에 다다르면 나무 사이사이
이어진 길을 따라 우듬지로 오른다
허투루 살아가는 생 없다
숲 속 여린 생명들 더위에도 분주한
삶의 소용돌이 쉼이 없다
더위에 축 처진 어깨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 훔치며
숲에 들면 개울물 정겹게 흐르고
뭇 벌레들 화음 지친 맘 달래준다
두툼하게 살 오른 활엽수 잎 새
건들건들 바람을 일으켜
산속 열매들 새콤달콤 익혀 내고
여름 숲은 엄마의 품같이 넉넉하고 풍성하다
절정의 여름 숲 속엔 시원하고 정겨운
여름의 노래가 흥겹게 울린다.
여름이 오는 길목에서 /靑松 홍성길
이미 여름은
우리곁에 와 있는데
이제야 봄날이 간단다.
황량했던 대지에
하얀 눈 수북했던 앞개울 산마루
뒷 산마루에도
무성한 생명들을 낳아 길러놓고
이제야 봄날이 간단다.
연약한 봄바람이
따사로운 봄햇살이
산천초목 머리 위 하늘끝까지
노랗고 하얗고
진분홍의 붉은 물결
청초록의 푸른 물결
생기의 불 질러놓고 간단다.
이제서야 담장 너머엔
정열의 여인얼굴
장미꽃 엷은 가시촉 세우며
활짝 피려 하는데
봄날은 뒤돌아 간단다.
겨울내내 품고있던 생명의 씨앗
산고의 진통을 이겨내며
푸르게 푸르게 길러내고,
행복했던 추억도
아쉬었던 기억도
모두 내려놓고
여름이 오는 길목 저편으로
그렇게 봄날이 간단다.
여름이 오는 길목에서
봄날이 심어 준
올 때와 갈 때를 알고
소임을 다하면 말없이 돌아가라는
삶의 의미를
가슴으로 음미한다.
여름 /홍승우
누가 머래도 여름이다
과일이 열리는 여름이고
처녀 옷 고름 열리는 여름이다
얼음이 좋아 여름이고
여드름 피는 여름이다
그대
입술을 열어주오
사랑을 피워주오
여름에
이 여름 /하재연
일어나지 않은 일들 속에서
시간이 썩어간다.
냄새가 나네.
발생하지 않은 것들의 모서리가
서로를 찌른다.
발이 없어
자국이 남지 않았는데
냄새가 난다.
어쩌지.
이 여름인가.
할 수 없으니까
하지 않았던 것일까.
비가 쏟아진다.
속수무책으로.
납 가루처럼 무르게 무겁게
쏟아진다.
무엇을 버려야 하는 건가.
상한 것을 골라낼 수가 없는데.
왜 결국 이 여름인가.
여름이 간다. /박인걸
귀뚜라미 구슬프게 새벽부터 울고
늦호박 꽃잎에 주름이 깊다.
한 낯 내리 꽂던 햇살도 풀이 죽었고
매미들만 아직 자지러지게 운다.
능소화 끝물도 맥없이 땅에 뒹굴고
배롱나무 꽃 피었던 길이 허무하다.
일에 미친 도시는 꽃이 지는지도 모른다.
차들은 앞만 보고 달리고
간판은 대낮에도 불을 켜고 이목을 끈다.
길거리를 왕래하는 자들은
일에 매달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빌딩 안에 갇힌 자들은 비틀거릴 뿐이다.
밤알이 가시송이에서 익어가고
고개 숙인 벼이삭은 참새 습격을 받으며
길가 코스모스가 가을 춤을 추는데
콘크리트만 밟는 사람들은
생명 없는 냄새만 짙게 풍길 뿐이다.
새벽이슬은 여름을 지우고
바람은 가을을 열심히 퍼 나른다.
내가 걸어간 오솔길에도
여름이 지나간 발자국이 찍혀있다.
여름은 꾸물거리며 더디 간다 했더니
가을바람이 찾아와 새벽 창문을 닫는다.
지루했는데 여름이 가니 막상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