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권]
第 三十六 章. 파양호( =番+邑(耶-耳),陽湖)에 물결 일다
[이야앗! -]
우렁찬 기합소리, 역홍(易弘)의 귀두도(鬼頭刀)가 바람을 끊으며 무서운 기세로 내리쳤다. 부하들은 그 기습적인 살수(殺手)가 성공했다고 확신을 가졌다. 허나, 사태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온 몸뚱이를 던지다시피 덮쳐들던 역홍이 발끝에 돌뿌리가 채인 것처럼 돌연 휘청하더니 전신을 부르르 떨었다. 그와 동시에 내리치던 강도(鋼刀)의 날이 목표를 베기도 전에 툭 떨어지면서 두 다리를 가누지 못하고 무엇엔가 떠밀린 듯 달려들던 기세 그대로 대청 문 바깥으로 뛰쳐나간 것이다.
[땡그렁....!]
[으와아....!]
귀두도가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와 더불어 가슴이 섬찍하도록 처절한 비명이 방안 사람들의 귀에 들려왔다. 뒤미처 <쿵!>하고 몸뚱이가 넘어가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역홍이 뛰쳐나가는 순간 한 곁으로 선뜻 비켜섰던 시철은 바깥쪽을 바라보지도 않고서 문지방을 넘어 방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여러분, 좋게 말할 때 모두들 곱게 돌아가시오! 이 길로 산서 땅을 떠나 두 번 다시 밟지 마시오. 잠시라도 어물거렸다간, 이 시철이 주인으로서 체통 잃는 행동을 보일 거요. 그 때 가서 내 손매를 탓하지 마시오! 역홍 영감은 우측 견정혈(肩井穴)에 자신의 단혼표(斷魂 =金+票)를 맞았소. 상처는 별것 아니지만 어서 데려다가 표창부터 뽑고 치료해주시구료. 그래야 죽지 않을 거외다!]
역홍의 부하들은 아무 대답이 없다. 손에 손에 암기를 거머쥐고 선 채, 이놈 저놈 서로 동료들의 눈치만 보면서 어떻게 해야 좋을지 결심이 서지 않는 모양이다. 그 꼬락서니를 지켜보던 시철이 코웃음을 치더니만, 다시 한 번 버럭 호통을 질렀다.
[단목응양 회주가 투르판 땅에 다녀오신 소감을 여러분한테 말씀 안 드립디까? 이 시철의 무공 수준이 어떻다는 것을 보고하지 않아서 여러분도 시철을 삼류쯤 되는 인물로 알고들 계신 모양이구료. 내 말 틀렸소? 그 자가 얘길 안해주었다면 그건 당신네들을 일부러 죽여버리기로 작심한 거야. 어서들 꺼지지 못하겠소! 내가 당신네들을 어쩌지 못하리라고 요행을 바라는 건 아니겠지?]
뭇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있는 판에, 문간쪽 제일 가까운 자리에 서 있던 사내가 돌연 쌍수를 번쩍 휘둘러쳤다. 수리전(袖裏箭) 두 자루가 공기를 가르면서 시철에게 날아들었다. 뒤미처 노한 기합소리 한 마디, 그는 장검을 뽑아들고 몸뚱이 채로 덮쳐왔다. 신검합일(身劒合一)의 돌발적인 기습이 사납기 이를 데 없다. 시철이 오른손을 썩 내밀어 수리전 두 자루를 냉큼 받아냈을 때, 사나이의 칼끝은 이미 심장부위에 찍어들고 있었다. 시철은 우측방으로 몸을 비틀어 아슬아슬하게 칼끝에서 비켜났다. 이어서 왼손아귀가 상대방의 칼잡은 손목 맥문(脈門)을 덥석 움켜잡자, 공격자는 칼을 다시 거둬들일 수도, 검초(劒招)를 변화시킬 도리도 없어 내지른 자세 그대로 엉거주춤 멈춰버리고 말았다.
사내는 돌격자세를 거두지 못하고 엉겁결에 적의 품 속으로 뛰어드는 형국이 되어버렸다. 시철이 품 안에 들어온 병아리를 그냥 내버려둘리가 만무하다. 그는 손아귀의 수리전 두 자루를 갈라잡기가 무섭게 한 자루를 그 낯짝에다 푹 찔러박았다. 날카로운 쇠꼬챙이는 인정 사정없이 제 주인의 오른뺨으로 뚫고 들어가 반대편으로 빠져나왔다. 살촉부터 꼬리 부분까지 똑같은 길이로 삐죽하니 드러난 살대, 앞부분에는 어느덧 선혈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시철은 다시 그 가슴팍에 떠다밀듯 일장을 쳐내어 도로 밀어붙였다.
[으악! --- 으와아....!]
사내는 입을 다물지도 못한 채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떠밀린 몸뚱이는 두 발바닥이 허공에 뜨는가 싶더니 그대로 네 활개를 활짝 벌리고 나가떨어져, 탁자 모서리까지 주르르 미끄러져 나갔다. 시철은 나머지 수리전 한 대를 방바닥에 내버리면서 꾸짖듯 엄한 목소리로 다시 호통을 쳤다.
[당신네 회주 단목응양의 뺨에도 저것과 똑같은 상처가 나 있을 거요. 내 철령전에 다쳤단 말도 안했을 테니, 여러분은 전혀 알 리가 없었겠지! 자, 이제부터 셋을 세겠소. 셈이 끝날 때까지 이대로 버텨계신 분은 나중에 이 사람더러 무정하단 말씀일랑 마시오! 그 결과가 궁금하신 분은 모두 남아 계셔도 괜찮소. 자아, 그럼 하나....!]
후닥닥 뛰는 기척이 들렸다. 문간 근처에 서 있던 두 명이 내뺀 것이다.
[둘....!]
[으와아!]
모든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꽁무니 빠지게 내뛰기 시작했다. 이때껏 탁자를
방패삼아 벽모퉁이에 몰려 있던 배운생 소저가 도망꾼 한 사람을 손짓해 불러 세웠다.
[잠깐! 귀하는 그 손에 들고 있는 걸 놓고 가요!]
지명당한 사내가 일순 머뭇거리더니,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던지고 동료들한테 뒤질세라 황급히 뛰어나갔다. 병법 삼십육계(三十六計)중 최상책이 무엇인가? 뭐니뭐니 해도 주위상계(走爲上計), 뺑소니가 최고란 말이다. 그제서야 배운생이 안도의 한숨을 푸우! 내쉬면서 탁자를 밀어제치고 뛰쳐나왔다. 얼굴에는 말도 못할 기쁨이 서렸다.
[시철 오빠, 어떻게 때맞춰 달려왔어요? 정말 위험했는데....]
시철은 두루마리를 주워들면서 빙글빙글 웃었다.
[이봐요, 멍텅구리 동생, 아무려면 내가 개구장이를 보내놓고 마음 편하게 있었을 줄 알았나? 아까 오면서 사룡(史龍)한테 그 얘기를 들었을 때, 난 벌써 흑응회 녀석들이 여기 깔려 있단 걸 알아차렸어. 어떤 작자들인지는 몰라도 말씀이야. 때마침 동생이 앞장 나서서 놈들의 주목을 끌어주었길래 나도 손쉽게 이 소굴을 알아낼 수가 있었지. 한데, 동생은 너무 대담하게 모험을 걸었어! 이 흑응회 녀석들은 하나같이 암기 쓰는 데는 귀신이야. 또 암기를 발사할 때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요. 그걸 모르나? 어쩌자고 이런 모험을 해?]
[오빠가 나빠요! 진작에 알려줄 일이지, 흑응회 놈들인 줄 내가 알기나 했나? 뭐!]
배운생은 짐짓 뾰루퉁하니 외면해 보인다.
[하하, 이것 봐요. 내가 먼저 알려줬더라면 동생 손에 오늘 몇 사람 목숨이
날라갔을 게 아닌가?]
그는 면박을 주면서 두루마리를 펼쳐보더니, 다시 덧붙였다.
[물론 나도 흑응회측이 파견한 놈들인지 확신을 가졌던 것도 아니고 말씀이야. 한데, 이것 참 묘한 그림이로군!]
두루마리에는 시철의 얼굴 모습이 판에 박은 듯 여실하게 그려져 있었다. 아직 흑응회에 직업 살수(殺手)로서 정식 가입되지 않은 수련생인 터라, 방회 사람들은 대다수 그의 얼굴을 익히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단목응양은 시철의 초상화를 그려 이들에게 휴대시키고 그 얼굴 모습과 닮은 사람을 찾아내어 처치하도록 한 것이다.
[정말 신통하네요! 어쩌면 오빠하고 이토록 똑같이 그렸을까? 이런 솜씨라면 일류 명화가의 붓질이에요!]
배운생은 감탄 연발이다. 시철은 덤덤하니 웃으면서 두루마리를 던져 버린다.
[흑응회에는 인재들이 수두룩하다오. 문무 겸전한 인물들도 적지 않은데, 아깝게도 그 재주와 능력을 올바로 쓰지 못하니 통탄할 노릇이지! 이 그림만 보더라도 제삼자의 구술(口述)을 귀로 듣고 장본인의 모습을 그대로 표현해 냈으니 기막힌 솜씨가 아니냔 말이야. 방금 쫓겨난 녀석들이 돌아가서 보고를 할 텐데, 아마 다음 번에 수색하러 오는 놈들은 이것 말고 동생 초상화도 한 장 더 가지고 다닐 거야!]
[말썽거리가 될 줄 알면서도 왜 그대로 살려 보냈어요? 호랑이떼를 산으로
풀어주는 격이 아녜요?]
[역홍 부자는 나하고 한 번 만난 인연이 있지! 오해 때문에 총계산(叢桂山)에서 대판 겨루었었거든. 그 인연을 생각해서라도 봐줄 수 밖에.... 더구나 7년만에 고향땅을 밟은 내가 마을에서 살인을 저지를 수야 없지! 마을 사람들한테 살인사건으로 폐를 끼쳐서야 어디 되겠나? 관가 녀석이 들들 볶고 수사를 벌일 텐데 말이야. 자, 이젠 가자구!]
[가다니, 어딜요?]
[고야산(姑倻山) 연화동(蓮花洞) 우리 외숙부님 댁으로 가야해요. 아버님과
어머님이 거기 피신해 계시거든.]
[좋아, 가요!]
[우선 마을에 들어가서 몇몇 사람 좀 만나기로 하지. 7년 전 내가 잡혀간 사흘 뒤에 도대체 어떤 놈들이 쳐들어와서 살인 방화를 저질렀는지 알아봐야겠어. 열일곱 집을 쑥대밭으로 만든 범인들 말이야.]
마을 사람들은 흑응회 불한당들이 몽땅 쫓겨가자, 마음놓고 아무 거리낌없이 묻는대로 대답해 주어 시철과 배운생은 한 시각도 못되어 알고 싶은 것을 모조리 알아낼 수가 있었다. 나용문(羅龍文) 일당이 시철의 집에 찾아들던 그 날, 이웃 사람들은 비록 얼굴을 내밀어 소동의 진상을 물어보지는 않았어도, 몇몇 사람은 으슥한 데 멀찌감치 숨어서 시씨 댁에 벌어진 사건을 낱낱이 훔쳐보았다. 더구나 그 일당의 얼굴모습까지 눈에 익혀 둔 사람도 있었다. 그날 밤중에 들이닥친 관군 수색대는 집뒤짐을 하고 당사자를 체포하려 하였으나 시철의 집이 불타 주저앉아버려 아무 단서도 얻지 못하자, 이정(里正;이장)과 부근 이웃 주민들만 잡아다가 심문했다. 그러나 아무런 소득이 없어 석방하고 말았다.
한데, 이튿날 판천파(坂泉坡)에서 열여덟 구의 시체가 새로이 발견되었다. 인명이 걸린 사건은 하늘도 무심하게 넘기지 않는다는데, 그것도 집단 살인사건이 발생했으니 후마진(候馬鎭) 고을은 발칵 뒤집힐 수 밖에 더 있겠는가. 사람은 물론이고 동네 개, 닭 한 마리조차도 관가에 끌려가 경을 칠 정도로 쑥대밭이 되어 버린 것이다. 후마진을 중심으로 인근 지역에는 일대 수색작전이 벌어져, 의심갈만한 사람이면 닥치는 대로 오랏줄을 엮어서 끌어다가 주리를 틀고 족쳐대었다. 후마진 고을은 꼬박 2개월 동안 난리탕을 치러야 했다. 허나, 고을 주민들이 무엇을 알겠는가? 심문관이 한 가지를 물으면 대답은 '모른다'였다. 관청 나으리의 역정이 대단하셨지만, 그렇다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니 속수무책, 울화통만 터뜨려 혐의자를 닥닥할 뿐이었다.
고을 사람들이 비협조적인 태도로 나오자, 시씨 댁에 대한 정보를 알아내기 위해
관가 나으리들을 배후에서 조종해 탐문수색을 벌이던 나용문 일당은 격분을 이기지
못해 사흘째 되는 날 비적으로 위장한 습격대를 후마진에 보내어 캄캄한 밤중에
불을 지르고 살인 약탈을 벌여 분풀이를 했다. 야간 습격에서 요행 목숨을 건져
살아남은 주민 가운데 한두 사람은 그 습격자들 중 시씨 댁을 결딴낸 장본인도
섞여있는 걸 분명히 목격했다. 사건 후, 관가에서 조사관이 나오기는 했으나,
형식적으로만 수사를 마감하고 서둘러 사건을 종결지었다. 수사결과, 곽산(藿山)의
비적들 소행이라는 것이다. 이래서 동네방네 곽산비적 체포 공고문만 몇 장
붙여놓고 현상을 걸었으나, 이를 믿는 사람도 없었거니와 현상금을 탐내어
나서려는 자도 물론 없었다.
시씨 일가족에게는 곽산 비적과 내통했다는 죄목이 걸렸다. 뿐만아니라 관군의
체포령에 항거하고 관군을 살상했다는 죄명까지 씌워 멸문(滅門)의 형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포고문이 붙여졌다. 관가에서는 불난 집에서 끌어낸 시체의 잔해가
시서(柴瑞) 부부의 것인지 아닌지 단정을 내릴 수 없었다. 시체 두 구 모두
잿더미로 화했기 때문에 단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상 생존했을 가능성에 비추어
전국 각처에 시서 부부의 초상을 그려 붙이고 무거운 상금으로 생사불문 체포
현상을 걸어놓는 정도로 사건을 마무리지었다. 사건의 진상은 청천백일보다 더
명백했다. 마을 열일곱 집을 불태우고 숱한 인명을 도륙한 살인 방화범은 나용문의
앞잡이들임에 추호도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시씨 댁에 대한 앙갚음, 이웃
사람들의 비협조적인 태도에 분풀이로 저지른 소행이었던 것이다. 진상을 명확하게 알아낸 시철과 배운생은 미련없이 고향 후마진을 등지고 고야산으로 향했다.
이튿날, 동관(潼關)을 벗어나 서쪽 천산북로(天山北路)를 따라 서역땅으로 나가는 대상(隊商) 일행 가운데 새로 채용한 짐꾼 두 사람이 끼어 있었다. 어느 틈엔가 의젓하게 화물 짐꾼으로 변장한 시철과 배운생 소저였다. 시철은 고야산 외숙부 댁에 무사히 살아계신 부모님과 외숙부 가족들을 모시고 울란망나이 산채를 향한 길에 오른 것이다.
그 계절 첫 번째 폭풍설이 몰아닥치기 전, 대상의 인마는 울란망나이산 부근에 무사히 도착했다. 대채주 배운금이 남녀 영웅들을 이끌고 10리 밖까지 마중을 나왔다. 화주(貨主)들은 영문도 모른 채 융숭한 영접을 받았다. 산채로 돌아가는 호송 인마 중에는 쑤쫑 부족 기마대뿐만 아니라 몽고 쵸로쓰 부족의 기주(旗主) 흘리라 테무진과 하부르공주가 거느린 철기(鐵騎)도 있었다. 장사꾼들은 난생 처음으로 험상궂은 투르판 부족과 몽고 기병대의 호위를 받아가며 기세도 당당하게 울란망나이 산채에 들어갔다.
그 후 2년 동안, 울란망나이산 부근 1천 리 이내의 중국 개척민과 몽고족, 투르판 부족들은 서로 친밀하게 융화되어 끊임없이 왕래하면서 평화롭게 살아나갔다.
다시는 투르판 족속이 몽고족에게 예속당하지도 않았고, 목초지를 빼앗기거나 가축을 약탈당하는 일도 없었다. 이들은 서로 필요한 것을 교환해 쓰는 지혜를 배워나갔다. 인근 일대의 몽고족이나 투르판 사람들은 산림과 들판에서 종종 두 필의 기마가 치닫는 광경을 목격하곤 했다. 신마(神馬) 일홀묵(一笏墨)을 탄 배운생 아가씨와 오추마(烏 =馬+錐-金,馬)를 탄 시철 한 쌍이 달리는 모습이었다.
두 남녀는 밭갈고 양떼 몰고 무예를 익히는 틈틈이 너르디너른 벌판에 말을
치달려가면서 날로 애정을 다져나가는 것이다.
시씨와 배씨 양 가문의 어른들은 이들 한 쌍을 천생배필로 인정하고 만 스무 살이 되는 해 혼례를 치러주기로 은밀히 약속해 두었다. 시철의 부모와 외숙부 식구들은 모두 울란망나이 산채의 한 가족이 되었다. 이쯤 되면 제아무리 하늘 높은 줄 모르는 황제님의 권력이라 하더라도 까마득히 멀리 떨어진 궁황절경(窮荒絶境)의 망명객들을 잡아다 처형할 도리는 없을 것이다. 시서 부부는 관가의 핍박에서 벗어나 일평생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쌍성과 그 대사형 태호, 이들 곤륜 삼우사(崑崙 三羽士)는 시철 일가족이 도착한 그 이듬해 곤륜산에 한 번 다녀오더니, 다음해에는 대적석산(大積石山)에서 동부(洞府)를 한군데 찾아내어 마침내 울란망나이 산채의 이웃으로 들어앉았다.
이들은 때없이 목장으로 찾아와 손님 노릇을 하면서 시철의 무예를 지도해 주었다. 뿐만 아니라 도사답지 못하게 속세를 그리워하는지, 가슴 속에 늘 중원을 생각하며 틈나는 대로 사천성 성도(成都)에 있는 친구를 방문하고 중원 무림계의 동정을 알아오는가 하면 조정의 움직임마저 탐색하곤 했다.
팔조창룡 도금산이 바로 그 친구였고 정보 제공자이기도 했다. 이 늙은 너구리 명포두께선 온갖 수단을 다 부려가며 성도부(成都府) 관청 아문을 들락거리면서 나으리들을 구워삶아 한 달에 한 차례씩 오는 저보(邸報;중앙 관보)를 입수해다가 울란망나이 산채로 넘겼다. 물론 그 저보 내용을 전부 다 보내는 것이 아니라 조정의 중요한 정책과 인사 동정, 중앙에 보고된 전국 각처의 동태만 간추려 뽑아 넘겨주는 것이다. 무엇보다 최우선으로 다루어진 것은 당연히 엄숭 부자의 움직임이었다.
어느 지방관이나 마찬가지로 성도부에서도 경사(京師;서울)에 파견관을 상주시켜 관보 전달 책임을 전담시키고 있었다. 저보란 명칭의 이 관보에는 조정에서 매일 공표하는 중요 소식, 크게는 연해(沿海) 왜구(倭寇)와 서북 동북방 변경을 침범한 몽고(蒙古), 타타르(撻袒), 오이랏트(瓦刺), 쥬르치(女眞), 투르판 족속들의 침략상황에서부터 작게는 대소 문무 백관의 승진, 좌천, 해임, 전보(轉補)에 관한 사항까지 낱낱이 기록되어 있다. 저보의 초안은 서울에 상주한 각 지방관청 파견자들이 1개월치씩 묶어 소속 지방으로 우송한다. 성도부에서는 또 현지에 상주한 주(州), 부(府), 현(縣) 등 각 고을 파견관들에게 이 관보를 베껴서 나누어 보내도록 한다. 그러므로 서울에서 일어난 중대한 소식이 각 고을까지 전파되었을 때면 벌써 4개월이 지난 구문(舊聞)이 되어버리고, 또 이것이 울란망나이 산채에 도달했을 때는 거의 반 년 세월이 흐른 뒤였다.
시철 일가족이 울란망나이 산채에 정착해 3년이 지난 해는 명세종(明世宗)
가정(嘉靖) 39년(1560)이었다.
그 해 10월, 강서성(江西省) 파양호( =番+邑(耶-耳),陽湖)에는 험악한 풍파가 일기 시작했다. 파양호와 양자강의 접경 구강부(九江府)에서 닻을 올린 범선(帆船) 한 척이 손님을 싣고 세찬 바람결에 파양호의 물결을 가르며 날듯이 경쾌하게 달리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호수 서남방 강서성의 성도(省都) 남창부(南昌府), 뱃길로 60리(120km)였다. 선상의 승객은 모두 여섯, 그 가운데 으뜸가는 손님은 새파랗게 젊은 청년 두 명이다. 키가 꺼부정하니 큰 꺽다리는 몸집이 숫사자처럼 다부지고 우람한데, 또 하나는 오종종하니 생긴 것이 곱상하기만 하다.
미목(眉目)이 청순한 꺽다리는 붉은 입술을 벌리고 웃을 때마다 상아처럼 새하얀 이빨이 돋보였다. 용모와 풍채가 남다르게 비범한 데다 말씨도 온화하고 점잖은 품이 세상 유람하는 샌님서생 같았다. 하지만 그가 걸친 옷차림은 선비 전형의 청삼(靑衫)이 아니라 평민들이 즐겨 입는 남철릭(藍天翼)에, 상투는 틀었으면서도 관대(冠帶)를 띠지 않은 것이 그 용모 풍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허나, 어찌 되었든간에 평민이라 해도 하류급 천민이 아닌 것만은 틀림없었다.
곱상한 청년은 선비의 수발을 드는 서동(書童) 같았다. 꺽다리와 다름없이 수수한 잿빛 철릭을 걸치고 등에는 검갑(劒匣)을 메었는데, 손에 든 것은 대나무 책상자였다. 이 청년의 생김새는 기막히도록 준수하고 아리땁다. 부리부리한 눈망울, 새하얀 눈자위에 흑진주처럼 새까만 눈동자 둘이 또란또란 반짝이는 것이 두드러지게 돋보였다. 사내의 입이라면 넙죽하게 커야 할 텐데 이 친구 입은 가련할 정도로 작고 예쁘기만 한 것이 사내대장부의 기개라곤 정말 눈꼽만치도 없다. 얼굴에도 발그레하니 홍조가 깃든 품이 여느 규중 처녀보다도 더 부드럽게 반들거리고 윤기가 돌았다. 그 시절, 돈많은 부잣집 자제들은 대개 맵씨좋은 서동을 거느리는 게 유행이라, 역시 이 꺽다리 샌님도 보아하니 부호의 자제, 그래서 요런 귀염성 있는 서동을 거느리고 세상 유람차 길떠난 게 분명하다.
그러나 이상한 노릇은, 샌님과 서동 간에 부르는 호칭이었다. 꺽다리는 성이
시씨(柴氏), 이름을 중평(中平)이라 했다. 이름이라면 통상 외자를 쓰고 자(字)를 붙일 나이가 되어서야 두 자짜리 호칭이 따르는게 상례인데, 이 청년은 드물게도 쌍명(雙名)을 쓴다. 그렇다면 본명을 감추고 있는 게 분명했다. 예쁘장한 서동은 성이 배씨, 이름은 운생이다. 둘만의 으슥한 자리가 되면 시중평더러 오빠라고 부르는 걸 듣건대, 요놈의 서동이 과연 진짜 여자인지 동성연애를 하는 사내녀석인지 아리송하기만 하다.
이들은 물론 시철과 배운생 소저였다. 여행길에 오르면서부터 둘이는 서로
형제지간으로 부르기로 약속하고서도 둘만의 시간을 가질 때에는 다정한 애인 사이로 돌아가곤 하는 것이다. 시철은 나이 스물이 차서 관례(冠禮) 의식을 올리고 자(字)를 얻었다. 그것이 중평이다. 성인이 되어 남의 앞에 나설 때는 으레 이름 대신 자를 쓰기도 하지만, 시철은 흑응회의 주목을 끌지 않기 위해서도 본명이 아닌 자를 내세우기로 했던 것이다.
두 번째로 중원 땅을 밟으면서, 이들 남녀는 흑응회에 관한 소식을 알아보려
했지만 단목응양 패거리는 땅 속으로 꺼졌는지 하늘로 솟았는지 아무런 단서도 잡을 수가 없었다. 3년 동안에 흑응회는 과연 어떻게 변신하였는가? 그건 아무도 몰랐다. 팔조창룡 덕분에 관보를 통해서 조정 소식은 그나마 얻어들을 수 있었는데, 흑응회측의 동정은 깜깜무소식이었다. 흑응회 자체가 워낙 비밀스런 활동을 벌이는 방회여서 그 움직임을 아는 이가 드물기도 하지만 이들이 투르판에서 호된 좌절을 겪고 난 다음부터는 더욱 비밀스럽게 움직여 나간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회주 단목응양이 사업을 지하로 깊숙하게 끌어들였다면 그 동태에 관한 정보를 캐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고 보아야 한다.
시철이 이번 여행길에 오른 목적은 두 가지였다. 우선 원주(袁州)와
분의현(分宜縣)에 가서 엄숭 일파의 동태를 탐색하고나서 다시 흠현(歆縣)으로 잠입, 나용문을 잡아죽인다는 계획이었다. 엄숭은 본래 원주부 분의현 태생이라, 그 아들 엄세번이 원주 부성(府城) 안에 어마어마한 저택을 지어놓고, 늙은 애비가 만년을 보내도록 주선하였는데, 현재 그 엄숭이 조정에서 실각하여 여기 내려와 있는 것이다. 엄세번 역시 충군형(充軍刑)을 받고 변방 수비부대로 이동 중 탈주하여 제 소굴에 돌아와 있을 뿐만 아니라, 국법(國法)따위는 안하무인 격으로 아예 무시하고 죄인 신분이면서도 원주 일대에 공공연히 낯을 쳐들고 횡행하고 있었다. 이번에 시철은 엄가의 소굴을 은밀히 뒤져내어 기회가 주어지는대로 엄세번을 잡아죽여 없앨 생각이었다. 다만, 노적(老賊) 엄숭은 나이가 84세, 제명에 죽을 날도 머지않았으므로 구태여 칼날에 그 더러운 피를 묻힐 필요 없이 그냥 국법에 맡겨 두기로 했다.
파양호 어구에서 남강부(南康府)까지는 뱃길로 1백 20리(240km), 여기서 다시 남창부까지는 2백 50리(500km)가 된다. 구강부에서 호구(湖口)까지는
55리(110km)이다. 계절이 늦가을 철을 다 보내고 초겨울로 접어들면서 삭풍이 세차게 불기 시작했으므로 오늘 뱃길 여행은 남강부 지경(地境)에 들어서서 일박할 예정이었다. 대고산(大孤山)까지는 아직도 5,6리나 더 나가야 하는데, 때는 벌써 정오에 가까워진다.
[선장, 저기 배 한 척이 오는구료! 이쪽으로 향하고 있는데....?]
점심참을 하려던 시철이 눈썰미 좋게 선장더러 귀띔해 준다. 하지만 선장 역시 진작에 보고 있었는지 별 대답이 없다. 동서쪽 모퉁이 3,4리 밖에서 노를 저어가며 배 한 척이 쏜살같이 빠르게 접근해왔다. 측면으로 다가드는 품으로 보아 뒤쫓아 온 게 분명하다. 뱃머리에는 붉은 깃발을 든 사람 하나가 우뚝 서서 맞바람에 깃폭을 펄럭이고 있다. 키를 잡고 있던 선장이 크게 외쳤다.
[반 돛을 내려라! 모든 선객들은 선실로 모시고!]
선원은 모두 여섯 명, 익숙한 솜씨로 밧줄을 잡고 돛대에 매달려 돛폭을 절반쯤끌어내리더니, 호수 경치를 즐기던 손님들을 재촉해 선창 안으로 몰려들인다.시철은 영문을 모른 채 선원을 붙잡고 물었다.
[여보, 무슨 일 났소?]
선원은 입열기도 귀찮다는 듯이 고물쪽을 손가락질해 보이기만 한다. 물론 노젓는 배가 따라붙고 있다는 걸 시철이 모르고 묻는 게 아닌데 말이다.
[저 배가 어쨌길래 손님을 선실로 몰아넣는 거야? 해적선(海賊船)이나 되는가?]
시철은 또 다그쳐 물었다. 바다가 아닌 바에야 해적선이 나타날 리 없지만, 호수가 너무 크다보니 바다나 마찬가지고 또 여기에 왕왕 출몰하는 수적(水賊)들의 배도 통상 해적선으로 불리우고 있다. 두 번째 질문을 받자, 그제서야 선원은 마지못해 무뚝뚝하니 대답을 한다.
[이 파양호에 강도들이 수두룩하긴 하지만, 우리처럼 국물도 건덕지도 없는 배는 털지 않습니다요.]
한 번 입을 여니, 벙어린 줄로만 알았던 선원도 말이 많은 편이다. 그는 고소를 머금고서 묻지도 않은 얘기를 다시 곁들였다.
[저 배는 호구현(湖口縣)에 주둔한 남호영(南湖營) 소속 수군(水軍)의 검문선(檢問船)입지요. 그러니까 손님들도 선실에 들어가서 여행증하고 화물
물표(物票)를 꺼내놓고 기다리십쇼. 검문 검색할 때 트집잡히면 곤란하니까요. 특히 화물하고 휴대품일랑 잘 간수하십쇼. 저 녀석들은 손에 닥치는 대로 제 물건처럼 마구 집어가니까 말입니다. 반도적놈들이라구요. 여하튼 빼앗기면 어디 가서 하소연할 데도 없으니 억울하지 않습니까?]
붉은 깃발의 정선명령을 내린 검문선은 천천히 부딪칠 기세를 줄여가면서 노질을 멈추고 흔들흔들 물 위에 표류하기 시작했다. 여객을 실은 범선은 속력을 절반이나 잃은 채 북쪽으로 흐르는 조류(潮流)에 밀려 움직였다. 범선의 돛과 수군선의 노질은 차이가 엄청나다. 섣불리 뺑소니를 쳐 봤자, 삽시간에 따라 잡히기 십상이다. 검문선 갑판에는 20여 명의 수군과 노수(櫓手)들이 도열했다. 붉은 깃발을 잡고 이물에 선 병용(兵勇)은 접현(接舷)을 시도하지 않고 큰소리로 이편을 향해 외쳤다. 검문 검색 용무로 추격한 것이 아닌 모양이었다.
[선장! 그 배를 냉큼 서안(西岸)에 갖다 대시오. 알겠소?]
선장은 허리를 굽신굽신하면서 대꾸했다.
[알았습니다요, 장군님! 알아모시겠습니다! 서안에 갖다대구말굽쇼....! 얘들아,
배를 서쪽 호숫가에 갖다 대거라!]
이왕(伊王)의 사신을 모신 배가 머지않아 이리로 통과하실 게다. 그래서 모든 민간 선박은 항로에 걸리적거리지 말고 서쪽으로 옮겨가라는 것이다. 어서 배를 띄워 가라구!]
[알겠습니다요! 소인, 분부대로 받들구말굽쇼!]
검문선이 먼저 움직였다. 여덟 자루의 긴 노가 일제히 물살을 가르면서 거칠 것 없이 남쪽으로 항진하기 시작한다. 세찬 물결에 범선이 기우뚱하다가는 이내 중심을 잡았다.
[나무아미타불....!]
선장은 염불 한 마디 뇌이더니, 선원들에게 다시 출항명령을 내린다.
[돛을 올려라!]
비좁은 선창에서 퀴퀴한 비린내에 코를 막고 있던 시철이 제일 먼저 갑판으로 기어 나왔다. 그는 선원 하나를 붙잡고 물었다.
[이왕의 영지(領地)는 하남부(河南府)일 텐데, 어째서 사신을 이 파양호로
보낸답디까?]
[그거야 우리 같은 천민들이 알 리 있겠습니까요?]
선원은 도리질을 하더니만 고개를 돌리고 저 갈 데로 휘적휘적 가버린다. 중도에서 물길이 막힌 범선은 이윽고 서쪽 대안에 닿아 돛을 내렸다. 선원들은 물 속에 닻을 텀벙 집어던지면서 쉴 새 없이 욕설을 퍼붓는다.
[제기랄 놈들! 그렇게 너른 물천지에 군함 1만 척이 떠도 자국 하나 안 날 텐데, 그깐 놈의 사신 호송선 두세 척을 통과시키느라 민간 선박을 깡그리 발묶어 놓다니, 원 이럴 수가 다 있단 말이야?]
[이봐 셋째! 떠들어 봤자 입만 아프네. 조심하라구, 공연히 주둥이 놀렸다간 그 모가지만 날릴 테니까 말야. 그저 꾹 참고 입닥치고 있어야 명이 긴 법일세. 알아듣겠나?]
동료 선원 하나가 호의어린 면박을 주었다. 한참 있다가 선장이 생각을 바꾸었는지 다시 출항명령을 내렸다.
[닻을 올려라! 연안을 따라서 슬금슬금 내려가보자!]
범선은 바람결에 돛을 뒤집고 대고산 서쪽 경사면(傾斜面)에 바짝따라 붙어 가면서 항진을 시작했다. 대고산은 일명 혜산(鞋山)이다. 전설에 따르면 상고시대 우(禹) 임금께서 황하의 범람을 다스리고 그 공적비를 세운 것이 이 산이 되었다고 한다. 또 일설에는 공적비를 세운 이가 우임금이 아니라, 진시황(秦始皇)이란 말도 있다. 산이라곤 하지만 차라리 거대한 암벽을 깎아세운 것처럼 우뚝 돌출하기만 했을 뿐, 그 둘레도 겨우 1리밖에 안된다. 암벽의 높이는 1백 장, 그 아래 사면으로 구비쳐 감도는 물결이 말도 못하게 사납고 거칠다. 정상에는 나무 숲이 우거졌어도 파도가 워낙 거세고 급류 때문에 이 일대 기류(氣流)마저 소용돌이를 쳐서 나는 새조차 머물지 않는다. 이 산 북방은 구강부에 속하고 남쪽은 남강부 관할지역이다. 뱃심 두둑한 선장의 결단으로, 범선은 마침내 남강부 지경에 들어섰다.
시철과 운생 소저는 뱃머리에 나란히 서서 대고산을 끊임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갑자기 시철의 눈빛이 반짝하더니, 운생 소저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저걸 좀 봐요! 저기 어선 한 척이 있지? 그 배에 탄 사람이 누굴 닮은 것 같지 않아?]
대고산 남쪽 낭떠러지 아래 바람을 등지고 떠서 물결에 오르락내리락 흔들리는 고깃배 한 척이 있었다. 거리는 반 리도 넘는데, 시철의 눈썰미는 그 배에 탄 사람조차 알아볼 만큼 뛰어나다. 배운생의 시력도 그에 못지 않아, 금방 목표를 알아보았는지 의아스레 되물어왔다.
[어때요, 검둥이 철탑 문천패 같지 않아요?]
[아주 닮았는 걸! 우리 선장한테 가서 그리로 좀 가까이 대 달라고 부탁해
봅시다.]
물결이 사납고 흐름도 급한데 바람을 잔뜩 안고서 달리는 배를 돌릴 수 있는지 모르겠다. 몇 마디 주고받는 사이에도 배는 벌써 20여 장이나 앞으로 나아갔다. 운생이 고개를 살래살래 내젓는다.
[봐요, 관군의 검문선이 아직도 저 앞에 지키고 있는걸? 관군이라면 저승사자보다 더 무서워하는 백성인데, 제아무리 호랑이 간을 씹어먹었기로소니 선장이 배를 돌릴 리가 없죠. 다 지나간 일이에요.]
하지만, 시철은 모처럼 잡은 기회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뭍에다 대어 달라고만 하자구. 우리 내려서 조각배 한 척 얻어 타고 살펴보면 될 게 아니야? 문천패만 잡으면 흑응회 소식도 좀 알아낼 수 있어!]
두 사람은 어디 급하게 길을 서둘러 갈 만한 일도 없다. 운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흑응회의 동정을 알아낼 수만 있다면 중도에서 하선하기로소니 대수로울 것도 없지 않는가 말이다.
[좋아요! 선장한테 가서 우선 배를 돌릴 수 있는지 없는지 알아보고, 정 안된다면 내리기로 하죠.]
물으나마나, 선장은 대고산쪽으로 뱃머리를 돌릴 수 없겠느냐는 요청에 도리질로 응수했다. 시철은 하는 수 없이 뭍에 배를 대어달라고했다. 남강부까지 가기로 약정하고 지불한 뱃삯은 되돌려주지 않아도 괜찮다는 데야 선장이 그 요청마저 도리질할 이유가 없다.
배를 갖다 댈 서안(西岸)은 오장산(吳章山)의 남은 줄기가 여산(盧山)으로 이어지는 지점으로, 남강부까지 40여 리나 남아 있는 성자현(星子縣)에 속한 곳이었다. 뱃머리에 서서 바라보노라니, 물가에는 하천이 여러 갈래 흘러드는 항만이 즐비하게 벌려졌고, 우거진 숲마다 황금빛 추색(秋色)으로 뒤덮였는데 연안에 바싹 붙은 대나무 숲만이 아직도 푸른 기운을 띠었다. 어렴풋이 호숫가에 정박한 고깃배 서너 척이 바라보이고, 호수 한가운데 오가는 장사꾼의 배가 돛폭의 그림자를 물 위에 드리우고 있는 것이 사뭇 시정(詩情)을 돋우고 있다.
범선은 느릿느릿하게 자그만 항만으로 들어가더니,
뭍에 널판을 걸치고 손님이 상륙하기를 기다렸다. 시철과 배운생은 행낭을 들고 널판 위로 가볍게 뛰어넘어 뭍에 올랐다. 그리고는 하류쪽 고깃배가 서너 척 정박한 곳을 더듬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밝은 대낮, 고기잡이에는 한창 좋은 시각인데도 이 게으름뱅이 어선들은 물가에 닻을 내린 채 낮잠만 자고 있다. 선창(船艙)에서 반 리남짓 떨어진 곳에 작은 마을이 하나 보이는데, 어찌된 셈인지 고깃배에도 마을에도 사람의 그림자라곤 하나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고깃배 세 척은 커다란 나무 아래 가지런히 묶여 물결치는 대로 흔들리고 있었다. 발판을 대놓지 않은 걸 보면 배 안에 사람이 없다는 얘기다. 시철은 행낭을 내려놓았다.
[여기서 기다려요. 내가 마을에 들어가 사람을 찾아볼 데니까.]
이 때 그리 멀지 않은 대나무 숲속에서 난데없이 어부차림을 한 사람 대여섯 명이 돌아 나왔다. 늦가을 날씨가 제법 쌀쌀한데도, 어부들은 세찬 바람도 두렵지 않은 모양으로 하나같이 웃통을 벗어붙였다. 거의 비슷한 시각에, 호수 북쪽 오솔길을 따라서 또 승려 한 사람과 두 명의 장한이 숲 속을 돌아나와 이리로 성큼성큼 걸어오기 시작했다.
[마을에 갈 것도 없겠군! 저기 어부들이 오고 있으니까 말이야.]
시철은 반가워서 어부들이 오는 길로 마중을 나갔다. 그런데 어부들보다 북쪽 숲 속에서 나타난 승려 일행 세 사람이 한 걸음 먼저 도달했다. 소식(素食)하는 승려치고 몸집이 남다르게 우람해 보이고 박박 밀어붙인 정수리에는 수계(受戒)한 흔적이 또렷하니 돋보였다. 나이는 40을 갓 넘겼을까 한데, 왁살스런 눈망울과 넙죽한 입에, 또 어디서 물어뜯겼는지 왼쪽 귓부리 절반이 날아가고 없다. 몸에 걸친 것은 낡아빠진 승포(僧布), 장삼 자락을 휘말아 허리춤에 찔러넣고 옆구리에는 동냥주머니를 찼는데, 겨드랑이 사이로 삐죽하니 내밀어진 것은 한 자루 방편산(方便 =金+産)이다. 앞가슴까지 길게 드리운 염주도 향나무 따위로 만든 게 아닌 듯, 시커먼 빛깔을 번쩍거리면서 묵직하게 늘어져 있었다
.
그 뒤를 따르는 장한 두 사람은 나이 50을 넘긴 듯한데, 생김새는 여간 사납고 흉포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등에는 조촐한 보따리 하나, 허리께에는 단도(單刀) 한 자루씩 차고 있는 품이 사나이다운 위세가 당당하다. 앞장 선 스님은 시철과 경쟁이라도 하려는 듯 다급한 걸음걸이로 어부들이 서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 모습을 본 시철의 눈빛이 고양이처럼 싹 변했다.
'이것 참 일이 귀찮게 생겼군....! 보아하니 수도하는 스님같지는 않은데, 피차 시비나 벌이지 말았으면 좋으련만....'
어부 차림의 여섯 사람도 한결같이 다부진 몸집에 상판도 흉악스럽게 생긴 것이 여간내기는 아닌 듯 싶었다. 손끝 하나 움직일 때마다 억세고 거친 동작이 순박한 어부 냄새라곤 눈꼽만치도 비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고기잡이들도 스님이나 마찬가지로 천직(天職)과는 거리가 먼 나으리들임에 분명하다.
이윽고 스님이 방편산을 땅바닥에 턱 내려놓더니, 한 손바닥을 곧추세워 인사를 건네면서 그 큼지막한 입을 열어 껄껄껄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목청이 얼마나 우렁찬지, 흡사 절간의 종을 울리는가 싶었다.
[나무아미타불! 시주님께서 이 배 임자들이시오?]
어부 가운데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양손으로 허리를 짚은 자세로 버텨 선 채 두 눈을 부라리며 대답하고 나섰다.
[그렇소. 배는 우리 것이지만, 애당초 우리 마을사람들은 부처님을 믿지 않으니까 동냥을 얻으려거든 딴 데로나 가보시구료! 어때, 내 말이 틀렸소? 마을을 온통 기어다니셔도 밥 한 술 얻어 자시긴 힘들 거요.]
냉소섞어 비웃는 말투나 버텨 선 자세나 난폭스럽고 불량하기 짝이 없다. 스님의 인상이 험상궂게 싹 변하더니, 딱 부릅뜬 눈망울에서 흉악스런 빛이 사방으로 쏘아져 나왔다. 어지간히 비윗장이 상했는가, 지팡이삼아 짚고 있던 방편산을 번쩍 들기가 무섭게 다시 한번 땅바닥에 콱 박아넣는다. 엄청나게 큰 삽 머리가땅속으로 절반이나 파묻혀 들어간 것을 보면 힘이 얼마나 센지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네녀석들, 그 당나귀 귓대기를 바짝 세우고 들어라! 이 부처님께선 동냥질하러 오신 게 아니라 네놈들 배 좀 벌려 타려고 왔단 말이다! 이 부처님 앞에서 재롱들 떠는 걸 보니 세상 살기가 싫어진 모양이로구나. 제미랄놈들, 또 그따위 불손한 댓거리를 했단봐라. 그놈의 개눈깔을 모조리 후벼내 줄고야 말 테다!]
출가한 승려 양반의 말투가 이처럼 거칠다니, 정말 사람 기절초풍할 노릇이다. 게다가 왁살스럽고 천박한 태도만 보더라도 더욱 놀라 자빠질 정도가 아니고 뭔가 말이다. 어부들의 반응이 말도 못 붙일만큼 거칠어진다고 누가 뭐랄 사람도 없을 것이다. 이래서 피차 쌍방은 어느 한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을 만큼 기막힌 맞수를 만난 셈이 되었다. 허나 귀신도 악당은 두려워 피한다고 했다. 화상이 한술 더 떠서 거칠게 나오자 어부들도 그만 기세가 수그러들어, 두 눈이 휘둥그래지면서 두어 걸음 양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댓거리하는 말투도 전보다 한결 녹신녹신해졌다.
[배는 우리 배요만, 빌려드릴 수는 없소!]
[못 빌려준다 해도, 난 기어코 타야겠어!]
[그런 억지가....!]
[부처님이 빌려 타기로 작정했으면, 싫더라도 승락해야 하네!]
곁에서 잠자코 하는 수작을 지켜보고 있던 어부 하나가 안되겠다 싶었는지 앞으로 썩 나서면서 냉랭하게 말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스님, 도대체 어딜 가려고 배를 빌리려는 거요?]
[그런 거 묻는 게 아니야! 부처님이 다 쓸 데가 있어 빌리는 거니까.]
[우린 남한테 배를 빌려 드릴 시간이 없소!]
[네깐 놈들, 시간이 있든 없든 아무 상관없어! 이 부처님은 사공이 필요한 게 아니라 배만 필요하니까.]
[당신이 무슨 재주로....]
[부처님 친구 분의 노젓는 솜씨를 못 봐서 그러나? 네녀석들보다 훨씬 나을 게다! 배는 이틀만 쓰겠다. 빌린 값은 후히 주마. 옛다!]
스님은 거침없이 혼자 떠들고 혼자 결정하더니, 상대가 뭐라든 아랑곳하지 않고 품 속에서 겨우 한 냥짜리 은화 한 닢 꺼내 어부들의 발치 아래 툭 던지고는 물가로 휘적휘적 내려가기 시작한다.
[이런 제미랄 놈의 화상....!]
어부가 욕설을 퍼붓고는 대뜸 손을 내밀어 그 앞을 가로막았다.
[잠깐 기다려! 이런 도둑놈의 화상 봤나? 잘 들어둬, 이 배가 뉘것인지 알기나 하고 이러는 거야? 흥, 알기만 하면 네놈이 표범 간을 통째로 씹어 먹었더라도 이런 억지는 못 쓸 거다! 어디서 감히....]
[주둥아리 닥쳐!]
스님의 목청이 어부보다 훨씬 더 크게 울렸다.
[어떤 거지같은 놈의 소유라도 상관없어! 이 부처님께서 빌려 쓰시기로 점찍어 놓은 이상 누구도 못 말린단 말이야! 이 화상이 삼산오악(三山五岳),
오호사해(五湖四海)를 두루 누비면서 한두 사람하고 부딪쳐 본 줄 알아? 그 따위 공갈로 날 기절시킬 생각일랑 아예 꿈도 꾸지말라구. 설사 황제님이 타시는 용주(龍舟)라 할지라도 이 부처님께서 쓰시겠다면 거절 못할 거야! 알아 듣겠나?]
[그놈의 입심 한 번 크구나!]
[나 반이승(牛耳僧) 정일대사(正一大師)님의 아가리를 좀 봐라! 입심이 크겠나 작겠나 말이다!]
[이런 죽일 놈의 화상 봤나!]
어부는 더이상 참지 못하고 노기찬 소리 한 마디 지르더니, 다짜고짜
흑호투심(黑虎偸心) 일격으로 스님의 앙가슴을 냅다 후려갈겼다.
[으하하핫!]
화상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통쾌한 웃음을 터뜨릴 뿐, 피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뻥!>하고 사나운 소리가 들리더니, 어부의 주먹은 그대로 화상의
가슴팍에 들어박혔다. 마치 맨주먹으로 북통을 두드리듯 억센 타격을 가했어도 화상은 웬 모기가 물어뜯느냐는 듯, 움쭉달싹조차 않고 여전히 그 자리에 버텨 서 있다. 첫 타격이 실패로 돌아갔어도, 어부의 눈초리에는 괴이한 미소가 한가닥서렸다. 그 다음 순간, 제이권이 번개처럼 날아가 <퍽!>하니 아랫배에 정통으로 들어맞았다.
[으핫하핫....! 쿨럭, 쿨럭....!]
제이권이 들어박히는 찰나 화상의 웃음소리가 뚝 끊기더니만 몸이 휘청하면서 1장 바깥으로 밀려나 하마터면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어느덧 화상의 낯빛이 싹 변다. 어부는 주먹을 자기 코 앞에 우뚝 세워보이면서 오만한 기색으로 한껏
거드름을 피우고 주먹에 먼지라도 묻은 듯 혹혹 불어댄다.
[흐흠, 이 어르신네가 네녀석이 기공을 연마했단 것쯤 모를 줄 알았더냐? 내
감산권(憾山拳) 한 대로 네놈을 때려죽이지는 못하지만 아마 기절초풍은 했을 게다]
화상은 얼른 원위치로 돌아와 다시 버티고 서더니 이를 악물고 묻는다.
[너 요녀석, 신권(神拳) 홍세방(洪世芳)이란 놈이로구나!]
[바로 날세!]
그러자, 화상은 두 주먹을 맞비비면서 임한 소리로 악을 버럭 질렀다.
[너 오늘로 세상 음식은 다 처먹은 줄 알아라! 이 부처님께서 서천(西天)
극락세계로 보내 줄 테니까.]
신권 홍세방은 코방귀를 터뜨리면서 사납게 으르렁댔다.
[허풍 좀 작작 떨어라! 넌 내 주먹 상대가 못돼!]
이 때, 다섯 명의 어부가 좌우로 쩍 갈라섰다. 화상의 동료 두 사람도 등짐
보따리를 벗어 내려놓았다. 쌍방간에는 널찍하니 공터를 남겨 싸움판이
형성되었다. 한낮의 게으른 분위기는 때아닌 싸움으로 팽팽하게 당겨지기
시작했다. 어부 측에서 두 사람이 더 나섰다. 이 편 두 명과 공평하게 일 대 일로
맞서보겠다는 의사표시였다.
[으으! --- 이 놈!]
화상이 앞으로 성큼 다가서며 쌍장을 비벼대었다. 사납게 부라리는 눈망울에서 흉포한 빛이 확 쏟아져 나오는 가운데, 쌍장은 차츰차츰 자주빛으로 시뻘겋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손바닥을 지켜보던 홍세방의 얼굴빛에서 오만스런 기색이 싹 걷히더니, 그 대신 의혹과 경악으로 가득 찼다.
[앗! 너는....너는 혈장(血掌) 서원룡(徐元龍)....?]
[제대로 맞췄네! 3년 전, 혈장 서원룡이 속세를 떠나 부처님이 되셨지! 그래서 지금은 법명을 반쪽 귀 달린 중녀석 반이승 정일대사라고 부른다네. 서원룡은 존재하지 않는단 말씀이야.]
[잠깐만....! 거기 좀 기다리쇼. 내가 우리 주인을 데려올 테니 다시 교섭을
해보도록 하시오!]
주춤주춤 물러나는 홍세방을 노려보면서, 반이승 정일대사는 코웃음섞어 엄하게 소리쳤다.
[게 섰거라! 네놈이 약은 꾀를 써서 이 부처님한테 한 방 먹였겠다? 이대로 곱게 끝날 성싶으냐? 얌전히 이리 와서 부처님의 자비스런 일장을 받도록 하시지! 그 다음에 네 주인인가 뭔가 하는 작자와 교섭을 해도 늦지 않으니까 말씀이야.]
홍세방, 그말에는 대꾸도 않고 뒤로 후딱 도약해 물러나더니, 몸을 빼쳐 냅다 뛰기 시작했다.
[흐흥, 어딜....! 뛰어 봤자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반이승은 괴소를 터뜨리면서 그림자처럼 따라붙더니 홍세방의 등을 겨누고 일장을 후려갈겨 보냈다. 홍세방은 도망쳐 봤자 그른 일이란 것을 깨달았는지, 우측방으로 선뜻 몸을 비키며 한 바퀴 선회해 가지고 일권으로 냉큼 역습을 가해왔다.
반이승의 왼손바닥이 맥문을 베어 내리쳤을 때 홍세방은 공교롭게도 역습을 하던 일권을 변화시켜 내지르고 있었다. 주먹과 장(掌)이 호되게 맞붙으면서 <팟!>하고 경쾌한 육성이 울린 다음 순간에, 두 사람의 그림자는 칼로 벤 듯 쩍 갈라졌다.
[아이쿠....!]
홍세방이 놀란 비명을 질렀다. 측방 비스듬하니 8척이나 물러간 그는 즉시 발을 빼치기가 무섭게 냅다뛰어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 자랑스런 주먹도 상처를 입었는지, 팔뚝 전체를 축 늘어뜨린 채 덜렁거리며 도망치는 것이다. 느긋이 관전하고 있던 나머지 어부들도 사세가 틀려먹었단 걸 깨닫고 와아! 함성을 질러가며 사면 팔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반이승은 놓칠소냐, 대갈일성을 터뜨리면서 단걸음에 따라붙더니만 홍세방의 오른 어깻죽지에 다시 한번 일장을 후려쳤다.
[이래야 비기는 거다, 요 녀석아!]
홍세방의 몸뚱이가 실 끊어진 연처럼 맥없이 훨훨 날아가더니, 2장 바깥 대나무 숲 속에 곤두박질쳤다. 이어서 <와악!>하고 피를 토하는 소리, 미친 듯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피차....원수맺은....일도 없으면서.... 독수를 쓰다니....! 으으욱....!]
아우성이 뚝 끊겼다. 혼절했는지 숨통이 끊어졌는지 아무도 모른다. 반이승은 성큼 돌아서더니, 제자리로 돌아와서 방편산을 뽑아들고 아직도 땅바닥에 굴러다니는 한 냥짜리 은화를 툭 걷어찼다. 은화는 정확하게 대나무 숲속 홍세방의 몸뚱이 곁에 날아가 떨어졌다.
[자아, 이젠 떠나자구! 배 한 척만 끌어내게.]
반이승이 동료 두 사람을 바라보고 기세 당당하게 외친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때아닌 싸움 구경을 하던 시철은 한 걸음 앞서 돌아와, 이때껏 물가에 서성거리며 기다리고 있던 배운생한테 다가갔다. 그는 이제 목격한 싸움의 당사자들의 내력도 모르거니와 자신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고 또 한 눈에 쌍방 모두가 올바른 길을 걷는 작자들이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일체 간여하지 않고 돌아선 것이다.
그가 필요한 것은 오로지 배 한 척뿐이었다. 애당초 시철이 어부를 만나러 가던 길에 한 발짝 늦은 만큼, 이제 반이승과 그 동료 두 사람은 반대로 시철의 등 뒤 가까이 따라붙는 형국이 되었다. 그리고 방향은 피차 배를 매어 둔 고목 아래 계류장(繫留場)일 수 밖에 없었다.
이 때, 발판도 걸쳐놓지 않은 배 세 척이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갑작스레 요동치기 시작했다. 반이승의 동료 하나가 먼저 소리를 질렀다.
[정일대사님, 배 안에 누군가 숨어 있습니다!]
세 사람은 두 다리에 힘을 붙여 속력을 내기 시작했다. 반이승 정일대사는 들고 있던 방편산마저 내던지고 앞장 서서 달렸다.
[풍덩....! 풍덩, 뭉덩....!]
물보라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고깃배 세 척의 선창 안에서 괴한이 하나씩 뛰쳐 나오면서 물 속으로 뛰어드는 소리였다.
[아뿔사! 저 배를....]
시철은 배 한 척 손에 넣는 일이 다급했다. 그는 운생과 상의할 겨를도 없이 단 두 걸음에 허공으로 솟구쳐 뛰어 우측방에 묶여 있는 어선위로 날아갔다. 그리고 갑판 위에 내려서기가 무섭게 선실로 뛰어들었다. 이 파양호 일대의 고기잡이배는 모두 활어(活魚)를 담아두는 선창(船艙)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배 밑바닥 선창에 대나무로 엮어 만든 광주리가 달려 항상 물 속에 잠겨 있고, 거기에 잡은 고기를 산 채로 넣어 팔릴 때까지 싱싱한 선도(鮮度)를 유지하는 것이다. 만약 배 밑바닥 광주리를 뜯어내거나 선창벽에 구멍이 뚫리는 날엔 일껏 잡은 생선을 다놓치는 것은 물론이요, 호수물이 쏟아져 들어와 어선마저 침몰하게 되는 것이다.
그의 예민한 청각은 배 밑창에서 무엇인가 뜯겨나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직감에 어떤 녀석이 배를 가라앉히려 장난질을 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시철은 우선 배부터 구해놓고 반이승측과 협상하기로작정했다. 갑판 아래 선창으로 내려가는 널판은 이미 열려 있었다. 과연 생각은 들어맞았다. 선창 벽에 뻥 뚫린 구멍으로 호수물이 콸콸콸 기세차게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손써 볼 여지는 전혀 없었다. 배를 구하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던 것이다. 그가 갑판 위로 다시 올라오는 것과 거의 동시에, 반이승이 씩씩거리면서 거칠게 배 위로 뛰어 올라왔다. 중심을 잃은 뱃머리가 빙그르 돌면서 출렁 흔들리고 한쪽으로 기울더니 고물쪽 궁둥이부터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갑판이 기우뚱하고 몸뚱이를 가누려는 듯 흔들리다가는 경사가 심해지면서 그물과 선구(船具) 나부랑이들이 한쪽으로 와르르 쏠렸다.
반이승은 인사 한 마디 없이 다짜고짜 대갈일성을 터뜨리더니 시철을 향해
거령개산(巨靈開山)의 일장부터 사납게 후려갈겼다. 그야말로 심통 사나운
거령신이 산을 쪼개듯 인정 사정없이 정수리에 일격을 가해오는 것이다. 갑판은 비좁고 기울어져 어디 피할 여지도 없었다. 그 자리에 서서 상대방의 공격을 고스란히 받아내는 길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이다. 억지로 맞받자면 공력이 심후한 자가 이기게 마련이다. 이 왁살스런 화상 반이승도 시철이 자신의 일장을 맞받으리라 예상한 터였으므로, 단숨에 때려 죽일 듯이 손매가 무섭기 이를 데 없었다.
시철은 그래도 상대방의 기분을 이해할 만큼의 아량은 있었다. 이 사나운
악승(惡僧)은 자기를 홍세방 일당으로 오해한 나머지 분김에 손질을 해오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무런 까닭없이 새로운 적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두 다리에 힘주어 몸의 중심을 잡고 상반신을 약간 비틀면서 측방으로 반 보쯤 물러나 간일발(間一髮)의 차이로 상대방의 일장을 피해낸 다음 호통을 질러 깨우쳐 주려 했다.
[손을 멈추시오! 이건 오해라니까....!]
분노에 눈이 뒤집힌 반이승, 그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다. 시철의 해명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그는 두 번째 공격을 퍼부었다. 제이장은 옆구리 늑골 부위를 베어 쳐왔다. 이쯤 되면 상대의 공격을 받지 않을래야 안 받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시철은 일장을 내리털어 번개 벼락치듯 민첩한 솜씨로 화상의 맥문을 후려쳐서 떨어냈다. 한데, 장세(掌勢)를 바깥으로 밀어내는 순간, 또 한쪽 일장이 가슴 정면을 노리고 쳐들어왔다. 그것도 심맥(心脈)의 치명적 요혈을 겨누어서 산악이라도 밀어붙일듯 무시무시한 기세로 쳐온 것이다. 부채살처럼 퍼진 손바람이 확!하고 들이닥쳤다.
시철은 가슴 속에서 울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 무지막지스런 중놈은 눈 앞에 선 사람을 누군지 확인해 보지도 않고 단매에 때려 죽이기로 작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편도 고분고분 맞아 죽을 수야 없는 노릇이 아닌가? 화통이 치민 그는 당장 반격으로 나갔다. 이제 막 앙가슴으로 쳐들어오는 상대방의 일장을 좌반수(左盤手)로 선뜻 무너뜨리면서 우장(右掌)이 질풍노도처럼 날아갔다. 반이승은 놀랄틈도 없었다. 그저손 그림자가 눈 앞에 정통으로 날아 닥치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좌우로 번뜩번뜩 출몰하면서 고막이 터져나가는 소리가 <퍽! 퍽!> 들려왔다. 칼날처럼 세운 손바닥 연속으로 방향을 바꾸어가면서 상대방의 왼쪽 바른쪽 목덜미 뿌리를 차례로 후려 베어낸 것이다.
[으왓....!]
반이승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무겁기가 이를 데없는 벽장(劈掌)을 연거푸 두 대나 얻어맞은 그는 층격에 못 이겨 4,5보나 털썩털썩 물러나던 끝에 마침내 발붙일 곳을 잃고 네 활개를 벌린 채 물속으로 풍덩 빠져들고 말았다. 물가에 서서 여유만만하게 구경하던 동료 두 사람이 깜짝 놀랐다.
[저런....! 괘씸한 놈 봤나?]
반이승이 내던지고 간 방편산을 간수한 사내가 노발대발, 손에 들고있는 병기를 휘두르면서 뱃머리로 훌떡 뛰쳐오르려 했다. 그러나 도약은 성공하지 못했다. 어느 틈에 귀신 유령처럼 따라붙은 그림자, 배운생이 바로 곁에서 손가락 두 개를 내밀어 이제 막 솟구쳐오른 사내의 무릎 안쪽 오금에 팽팽하니 당겨진 힘줄을 푹 찔러버린 것이다.
[풍덩! 풍덩....!]
물보라가 두 차례 연거푸 사면팔방으로 퉁겨나갔다. 뱃머리로 뛰어오르려던 사내는 반공중에 몸이 뜬 채로 살맞은 기러기처럼 수직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졌다. 아니, 사람보다 무거운 방편산이 먼저 떨어지고 뒤따라서 몸뚱이가 낙하한 것이다.
물깊이는 겨우 허리까지밖에 안 찼으나, 두 사람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물속에서 힌참동안이나 정신없이 허우적거리면서 흙탕물을 몇 모금 좋이 들이마시고 나서야 겨우 몸을 일으킬 수가 있었다. 엉망진창이란 말이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 게다. 반이승과 그 동료는 정말 눈뜨고 보지 못할 만큼 낭패스런 몰골로 허겁지겁 손발을 내둘러가면서 물 밖으로 기어나왔다. 물가에 나와서도 물을 들이킨 바람에 막힌 숨통을 트느라 콜록콜록 밭은 기침을 터뜨리면서 그 자리에 벌렁 누운 채 씨근벌떡거렸다.
시철은 어느새 육지에 올라와 있었다. 고기잡이 배도 벌써 물 밑으로 가라앉았다.
뭍에 가까운 탓으로 물이 그리 깊지 않아, 배는 선창만 잠겼을 뿐 뱃머리와 갑판의 절반을 수면에 드러낸 채 잡동사니들만 물결 흐르는 대로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배는 이제 쓸모가 없어진 셈이다. 물가에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사나이는 이미 배운생 소저한테 단단히 차단당해 움츠고 뛸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솜씨가 제아무리 뛰어나다 하기로서니 믿고 믿었던 화상과 동료 하나가 단숨에 물귀신 꼬락서니가 되어 벌벌 기어나오는 판국에 혼자 몸으로 어떻게 뻗댈 도리가 있으냔 말이다.
그는 배운생 앞에 꼿꼿하니 서서 황소처럼 두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을 따름이었다. 가까스로 물귀신을 면한 반이승, 낭패한 몰골이 뜨거운 물에 퉈겨낸 닭처럼 후줄그레 말씀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흉악스런 기세는 여전해서 몸뚱이를 추스르기가 무섭게 가해자인 시철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씩 다가들면서 빽! 하고 악을 썼다,
[좋다, 사내 새끼가 사내를 졌으면 빚을 갚아야 하는 법! 이 부처님께서도 그 양장(兩掌)의 치욕을 맹세코 갚아야 쓰겠다. 이 언덕배기가 널찍하니 한번 붙을 만한 장소군! 너하고 나하고 누가 죽든 끝까지 해보자꾸나. 네놈들이 배를 부서뜨린 이상, 이 부처님께서 용서해 주리라고 생각했다간 큰코 다칠 게다!]
시철은 냉정한 기색으로 제자리에 우뚝 서서 코웃음쳤다.
[대화상! 내 한 마디 권고하겠는데, 더이상 재미적은 꼴을 자초하지 마시구료. 무슨 인간이 그토록 아둔하고 당나귀 고집인지 모르겠소. 두 눈알이 왕방울만한 걸 보면 흑백은 분간할 줄 알 터인데, 성미가 흐리멍덩해서 그러신지 그저 닥치는 대로 아무한테나 주먹질부터 내미니, 어디 이래도 되는 거요? 나도 대화상이나 마찬가지로 배 한 척 빌리려고 찾아온 나그네요. 도대체 무슨 심술이 그처럼 사납소? 남의 얘기도 들어보지 않고 다짜고짜 손질을 해대니, 나로서도 참을래야 참을 도리가 없지 않겠소? 그 정도 가지고 승복을 못하시겠다면, 좋소! 내가 스님을 또 한 차례 목욕을 시켜드릴밖에! 어서 덤벼 보구료!]
귀가 반쪽인지, 이 스님은 말귀를 전혀 못 알아듣는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까맣게 모르는 반이승, <으흐흥!> 소리 한 마디 지르면서 죽기살기로 덤벼들기 시작했다. 이 때였다. 마을쪽 멀리서 왁자지껄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더니 시커먼 옷을 걸친 사내 10여 명이 헐레벌떡 이편으로 달려왔다. 선두 주자는 앞서 뺑소니쳤던 어부 다섯이었다.
[저기 있습니다! 바로 저 중놈입니다!]
[홍형은 아직 대나무숲에 정신을 잃고 있고요....!]
[이거, 죽을지 살지 모르겠네....!]
[저 죽일 놈의 화상, 아직도 어슬렁거리고 있는 걸 보니, 도망칠 생각도 없는 모양입니다.]
이놈 한 마디, 저놈 한 마디, 왁자지껄 뒤섞여서 무슨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으리만치 흥분에 들떠 있다. 화상은 사내들이 모두 도검을 휘두르면서 달려오는 것을 보자, 시철쪽은 포기하고 다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더니 두 손으로 휘저어 방편산을 건져들기가 무섭게 고래고래 악을 쓰며 둔덕으로 달려 올라갔다.
[이 빌어먹을 놈들, 깡그리 횝쓸어버리고나서 다시 보자꾸나!]
배운생에게 오금을 찍혀 공중제비로 물귀신이 되었던 사내는 뭍에 기어나온 이후 지금껏 한쪽 곁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추나술(推拏術)로 막힌 혈도를 열심히 풀고 있더니만, 이제서야 벌떡 일어나 허리춤의 단도(單刀)를 뽑아들면서 화상에게 소리쳤다.
[정일화상님, 우선 그 철염주(鐵念珠)로 몇 놈 거꾸러뜨리십쇼! 놈들이 너무
많습니다. 중과부적(衆寡不敵)으로 몰리는 마당에 자비심일랑 거두십쇼!]
[알았어!]
떼거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왔다. 목에 걸린 염주를 떼어 들려던 반이승, 무엇을 보았는지 손이 염주에 가서 딱 멎은 채 그만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해쓱하니 질린 얼굴빛, 자기도 모르게 실성해가지고 목소리마저 공포에 질렸다.
[맙소사, 저놈의 마귀녀석이....! 우린 볼장 다 봤구나....!]
두 장한도 마찬가지, 달려오는 선두 인물을 보자마자, 몸서리를 치더니 숨통이 딱 멎고 안색마저 납빛으로 질리고 만다.
[저 사람....! 저 사람이....!]
쏜살같이 선두로 달려온 인물은 검정 도포 차림에 환갑을 넘긴 듯 싶은
노인이었다. 짧게 쳐낸 수염이 황갈색으로 바래고 얼굴에는 주름살투성이었으나, 형광(炯光)이 번쩍거리는 독수리 눈매에 얄팍한 웃입술까지 늘어진 매부리코, 온 몸에서 뿜어나오는 음산한 기운만으로도 마주 선 사람을 압도하여 가슴을 두근거리게 한다. 노인은 선창가로 접근해 오면서도 쉴 새 없이 날카로운 눈매로 이쪽 사람들을 쏘아보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 굽어보는 훤칠한 키만 보아도 공포감이 우러나왔다. 아연실색한 것은 화상 일행뿐만이 아니었다. 배운생도 얼굴빛이 싹달라지더니 시철을 향해 속삭였다.
[오빠, 우리 떠나요! 저 중녀석이 오늘 임자 만났어요. 도망칠래야 어디 도망갈 데도 없을 거예요.]
[아니, 왜 그래? 동생이 저 사람들을 알고 있단 말이야?]
[선두에 달려오는 사람, 검정 도포 입은 노인 말이에요. 흑살귀왕(黑煞鬼王)
정계(程啓)란 인물이죠.]
[이런, 투르판에 사는 사람이 어떻게 알아?]
[오빠, 잊었군요. 오빠와 만났을 때는, 울란망나이 산채에 들어간지 3년 밖에 안되었을 때란 말이에요. 그 이전에는 중원 땅에서 자랐거든요.]
[아하, 내가 깜빡했구먼!]
[아버님을 따라서 강호를 쏘다니는 동안 여럿 알게 되었죠.]
[저 흑살귀왕이란 사람은 어떤 인물인데?]
[잔혹스럽고 악독하고, 여색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작자예요. 한평생 두 손에
피비린내가 가실 날이 없다죠. 하늘도 사람도 용서 못할 악마예요. 제 하고 싶은 짓이라면 거침없이 해치우는 성품이거든요. 아마 한 걸음에 한 가지씩 죄를 지었다는 게 옳은 표현일 거예요.]
[그럼, 저 반이승은 어떤가?]
[이름이 그렇게 썩 나돌지 않은 인물이에요. 저런 사람 얘긴 못 들어봤어요.
어쩌면 근년에 변성명을 하고 나타났을 거예요.]
[됐어. 그럼 우리 곁에서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구!]
[오빠 또 고질병이 발작한 모양이로군요? 세상에 해악을 끼치는 자라면 씨를 말리려는 병 말이에요. 하지만 저 마귀놈은 얕잡아보면 안돼요. 아주 무서운 인물이거든요.]
[알았어, 내가 알아서 잘 처리할께!]
배운생은 얼굴에 화사한 웃음결이 번졌다. 시철의 뜻이라면 기꺼이 따르겠다는 기색이다. 그녀는 등에 메고 있던 검갑을 풀어 건넸다.
[이 상화검(霜華劒)을 쓰세요. 저 늙은이도 보검을 가졌으니까, 아주 조심해야 돼요.]
시철은 빙긋 웃으면서 도리질을 한다.
[지금은 보검을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걸핏하면 날카로운 병기를 쓰다니 모양새가 별로 안좋아!]
두 사람이 소근거리는 동안, 흑살귀왕 정계가 들이닥쳤다. 흑살귀왕은 3장 거리를 떼고 뒷짐진 채 우뚝 서서 얼음장처럼 차디찬 눈길로 반이승 일행을 쓸어보더니, 이번에는 시철쪽을 뚫어져라 노려보고나서 다시 반이승에게 그 무시무시한 눈초리를 돌렸다.
[대머리 중놈! 네가 이 늙은이의 부하를 해쳤겠다?]
반이승은 몸을 부르르 떨면서 갑자기 반벙어리나 된 듯 떠듬떠듬 대답했다.
[피차.... 오해가....오해가 생겨서.... 빈승이 일부러.... 그건 것은....]
[흐흐흐.... 개 잡소리를! 증놈이 죽을려고 환장을 했구나!]
[빈승은 그런 게 아니라....]
[잔말 마랏! 네놈이 노부가 예약해놓은 배를 강제로 빼앗으려 했으렷다?
안그랬나?]
[빼앗으려는 게 아니라 빌려 타려고....]
[그래, 그 말이 맞다. 어거지로 빌려 타겠다고 했지?]
[실은 그게 아니고 뱃삯까지 지불하면서....]
[배는 네놈이 가라앉혔어! 이것 때문에 노부의 큰일을 망쳤단 말이다. 넌 이
노릇을 어떻게 할래?]
[배는....빈승이 가라앉힌 게 아니올시다!]
[저놈들이냐?]
흑살귀왕의 손가락이 시철쪽을 가리켰다.
[그건.... 빈승도 잘 모릅니다.... 다만 배 갑판에서.... 누군가 물속으로.... 뛰어들고.... 사라졌는데.... 배가 그만....]
그러자 어부 하나가 버럭 악을 썼다.
[이 부근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갑판 위에서 뛰어내린 놈이 어디있단 말입니까? 저 도적놈이 일을 저질러놓고 남한테 뒤집어씌우는 겁니다! 보십쇼, 저놈의 몸뚱이에선 지금도 물이 질퍽하지 않습니까?]
흑살귀왕은 음충맞게 웃으면서 판결을 내린다.
[떠들 것 없다! 이놈들이 가라앉힌 게 분명하니까. 그래도 대낮에 인명을 해쳐서야 어디 되겠나? 노부가 살아날 길은 한 구석 터주기로하지! 너희 다섯 놈, 스스로 오른팔을 한 쪽씩 베어내고 왼쪽 귀를 잘라 내놓고 썩 꺼지도록 해라!]
잔혹한 판결이 떨어졌다. 반이승은 몸서리를 치더니 다급하게 애걸복걸하기
시작했다.
[시주, 제발 그것만은.... 제발....]
[그럼, 이 늙은이가 직접 수고를 해주랴?]
그러자 어부 한 사람이 흑살귀왕의 말을 받아서 외쳤다.
[어르신네, 저 중놈은 그냥 살려서 보내면 안됩니다! 홍세방 형님이 진작에
저놈더러 이 배는 어르신네 소유라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저놈은 콧등으로도 듣지 않고 외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욕설까지 퍼부었습니다. 게다가 황제님이 타실 용주라도 제놈이 필요하면 내놔야한다고까지 했습니다. 오호사해, 삼산오악, 어느 곳 사람의 명성을 거들먹거려도 자기는 눈썹 하나 까딱않는다고 말입니다. 저런 광망스런 놈이 어르신네를 눈에나 차게 여기겠습니까?]
어부 녀석의 고자질은 반이승을 아예 구렁텅이에 파묻어 버리기로 작심했는지 간장치고 초치고 양념까지 섞어가며 흑살귀왕을 충동질했다.
[아니, 시주! 내가 언제 그런 말을....]
[닥쳐랏!]
노염이 치민 흑살귀왕은 벼락같은 호통으로 반이승의 변명을 썽둥 끊어버리고선, 얼음장같은 웃음을 실실 홀려내었다.
[중놈아, 너는 아무래도 죽어 줘야겠구나!]
[시주, 제발....!]
[네놈의 그 방편산으로 천령개(天靈蓋)를 힘껏 내리쳐라, 어서!]
반이승의 몸뚱아리가 소슬바람에 사시나무 흔들리듯 와들와들 떨리더니, 손아귀에 잡고 있던 방편산이 털썩 떨어진다. 너무나 공포에 질린 나머지 병기조차도 쥐고 있을 힘이 녹아버린 모양이다.
[그걸 주워 들어라! 네 놈의 정수리에다 대고 삽날을 딱 한 번만 내리찍으면 서방 극락세계로 가서 부처님이 되실 게 아니냐?]
흑살귀왕의 목소리가 저승사자처럼 음산하게 울렸다. 반이승은 얼굴빛이 아예 잿빛으로 변했다. 전신을 부들부들 떠느라 목구멍에선 변명 한 마디 애걸 한 마디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나는....나는....]
[그래도 삽질을 안할 거냐? 그렇다면 노부가 산 채로 네놈의 생껍질을 벗겨주랴?]
이 때였다. 돌연 시철이 끼어들어 큰소리로 반이승에게 외쳤다.
[여보쇼, 반이승! 제 손으로 자살해 죽든, 남의 손에 산 채로 생껍질을 벗기워서 죽든 매일반 아니오? 이래도 저래도 극락가기는 마찬가지일 텐데, 그 방편산은 이날 이 때껏 뭣하러 들고 다니셨소? 기왕지사 저승가실 몸 같으면 일평생 아껴오신 그 병기를 집어들고 한번 겨뤄보시구료! 어차피 죽기로 작정된 몸, 또 죽을 걱정일랑 안해도 좋으니까 마음놓고 싸워볼 만하지 않소? 혹시 누가 아오?
살아날 기회가 생길지. 싸우다 죽을 것 같으면 명예로운 전사(戰死)가 될 텐데, 그게 더 떳떳하지 않겠느냐 이 말이오.]
흑살귀왕이 노발대발, 성난 눈초리로 시철을 쏘아보면서 버락 악을 질렀다.
[요놈의 쥐새끼, 담보도 크구나! 니놈도 죽어야 해....! 한데, 이름이나 밝히고
죽어라. 성씨는 뭣이며 이름은 또 뭐냐?]
[소인의 성씨는 시(柴), 이름은 중평(中平), 이름 석 자 내밀 만한 위인도 못되는 무명 졸개요! 괜스리 고명하신 분의 귀만 더럽혔소이다.]
[네놈은 이 늙은이가 누군지 아느냐?]
[무슨 흑살귀왕 정계인가 뭔가 하는 분으로 알고 있소만, 이제 봤더니 소문 듣던 대로 경천동지(驚天動地)하실 만큼 대단한 분은 아닌 것 같구료!]
[넌 이제 죽었다! 어쩔 테냐, 노부와 겨뤄보고 죽겠느냐?]
[기왕에 죽을 바에야 한 번 싸워보고나 죽읍시다!]
[소원대로 해 주마!]
[나도 별로 할 말은 없소이다!]
흑살귀왕이 으르렁거리면서 발걸음을 막 옮겨 떼려는 참에, 역시 검정 옷차림을 한 중년 사나이가 불쑥 튀어나오더니 싸움을 대신 맡고나선다.
[닭모가지 끊는데 소잡는 칼을 써서야 어디 되겠습니까? 미력하나마 이 후배가 저놈을 요리할 테니, 어르신께선 힘을 아끼십시오.]
[좋다! 우선 저놈을 반 쯤만 죽여놓아라. 산 채로 염통과 생간을 꺼내서 이 늙은이 술 안주감이나 해야겠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새파란 애숭이 시철 따위, 중년 사내의 눈에 찰 까닭이 있겠는가. 한 마디로 쾌히 대답한 그는 댓바람에 몸을 날려 시철에게 덮쳐들었다. 갈퀴처럼 벌린 손아귀가 병아리 나꿔채듯 시철의 멱줄기를 움켜왔다.
[어딜! 누구한테 손찌검이냐?]
시철의 곁에 서 있던 배운생, 느닷없이 야무진 호통을 지르면서 마주 달려나오더니 왼 다리로 상대방의 중단(中段)을 휩쓸어 내질렀다. 실로 전광석화처럼 쾌속하기 이를 데 없이 뻗어나간 일격은 좌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법이 없이 상대방의 아랫배 중극혈(中極穴)에 정통으로 들어맞았다.
[억!]
중년 사나이는 외마디 소리와 함께 시철에게 덮쳐들던 기세 그대로 고꾸라졌다. 급작스레 힘을 잃은 그는 흡사 물에 빠진 흙인형 녹듯 맥없이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어떻게 해서든지 일어나 보려고 손갈퀴로 시철의 옷자락을 움켜 잡으려 했지만 그것도 마음뿐, 다섯손가락에 도무지 힘이 들어가지 않아 움킬 도리가 없다. 그는 시철의 발치까지 주르르 미끄러져내려 온 몸으로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키면서 숨막힌 신음성만 터뜨릴 따름이었다. 시철은 태연자약, 애걸하는 자세로 엎드린 중년 사내를 툭 차서 제쳐버리더니, 정면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오면서 흑살귀왕을 향해 일장 훈계를 한다.
[명가(名家)끼리 목숨 걸고 대결할 때는 생사가 눈 깜짝할 순간에 판가름날 뿐더러 공력이 깊은 자가 이기게 되는 법, 제 몸 아낄 줄모르고 분수에 넘치는 솜씨를 자랑하느라 앞발톱 뒷발톱 마구잡이로 휘두르다간 낭패를 당하게 되지! 어떻소, 늙다리 마귀대왕! 우리 둘 중 어느 쪽 공력이 센가 맨손으로 한 번 놀아보실까?]
아연실색을 한 흑살귀왕 정계, 입만 딱 벌린 채 두 눈알이 휘둥그래졌다. 도대체 방금 그 광경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애띤 서동녀석이 단 한 번 발길질로 자기가 신임하는 고수를 거꾸러뜨렸다는 사실, 더구나 한 동아리인 듯 싶은 이 꺽다리 녀석은 자기가 누구인지 뻔히 알면서도 당연하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도전해 오다니, 세상에 이런 하룻강아지들이 다 있었단 말인가? 그는 애숭이 상대를 노려보면서 한동안 말을 잊었다. 저 침착한 말투, 대담무쌍하게 나오는 태도로 보건대, 한 가닥 솜씨를 지닌 게 분명하다. 물론 겨뤄봐야 알겠지만, 우선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에 미치자, 흑살귀왕은 더이상 오만무례하게 굴 마음이 싹 가셨다. 거추장스런 도포자락을 말아 허리춤에 꾹 찔러넣고 신중한 자세로 장검을 뽑아들었다.
[노부가 하릴없어서 네깐 놈하고 드잡이질로 노닥거릴 듯 싶으냐? 병기나 뽑아라! 서로 바쁜데 단숨에 결판을 내주마!]
빼어잡은 칼은 역시 희대의 보검이었다. 검망(劒芒)이 번개처럼 번뜩이고 거울같은 칼빛에 사람의 모습이 비칠 정도였다. 한눈에도 단금절옥(斷金切玉), 무쇳덩어리를 두부 썰듯 쪼갤 수 있는 보검임에 틀림없다. 배운생이 검갑을 열어 헤치고 황급히 상화검을 꺼내 시철한테 던졌다.
[이것 받아요!]
시철은 보지도 않고 상화검을 한 손으로 나꿔챘다. 그리고는 장검을 뽑아 잡은 다음, 칼집을 허리춤에 찔러넣더니 칼날을 곧추세워 문호(門戶) 방어자세를 취하면서 남은 손으로 흑살귀왕을 손짓해 불렀다.
[늙다리 마귀대왕님, 소인은 이렇게 공손히 기다리고 있으니까 어디 한 수 가르쳐 주시오!]
흑살귀왕의 눈은 더욱 화등잔 만큼 커졌다. 일껏 도수대결(徒手對決)을 회피하고 자신있는 보검으로 결딴을 내려 했더니만, 상대방이 빼어든 병기를 보니 기가 막히게도 자기 것보다 훨씬 웃길짜리 보검이 아닌가 말이다. 이래서는 병기면에서 우세를 차지하긴 아예 꿈도 못꿀 일이다. 곤혹스런 표정을 짓던 그는 이판사판, 병기 대신에 검술, 검법으로 승부를 내기로 결심했다. 제깐 놈이 우수한 보검을 지녔기로소니 수십 년 해묵은 흑살귀왕 정계의 검술 수준을 능가하랴 싶었던 것이다.
[타앗! --]
위협어린 기합성 한 마디에 그는 벌써 중궁(中宮)을 밟고 압박해 들어가면서 낙엽 떨어지듯 가볍게 일검을 찍었다. 시철은 칼을 쭉 내밀어 상대방의 공격 위에 툭 얹더니만, 좌측방으로 보폭을 선뜻 이동시켰다.
이 순간, 흑살귀왕은 다시 한번 짧은 기합성을 낮게 터뜨렸다. 기합소리 가운데 검기(劒氣)가 번쩍 튀면서 보검은 무지개 그림자를 끝없이 펼쳐내어 그물 던져내듯 시철에게 덮어씌우더니, 그 속에서 돌연 실검(實劒) 한 가닥이 뻗어나와 기습적으로 찔러들었다. 그것이 바로 살수(殺手)였다.
시철의 보법은 날렵하고 기민하게 움직였다. 손에 잡은 장검도 용틀임하듯
자유자재, 쉴 새 없이 방향을 변화시켜가며 움직였다. 스스로 상대방이 쳐놓은 검망(劒網) 속에 뛰어들어서 그 공세를 산뜻하게 맞받아 치다가는 느닷없이 풍후뇌명(風吼雷鳴), 벼락 속에 폭풍우 휘몰아가듯 급선회를 하면서 기세 사납게 쌍검을 마주쳐 울렸다.
[쩽! 쩽그렁! 쩡....!]
칼날끼리의 접촉이 가벼운데도 쏟아져 나온 용음(龍吟)은 귀청에 해말간 진동을 울렸다. 거듭되는 일진일퇴, 그 속에서 두 사람은 수도 없이 출생입사(出生入死)의 경계를 찰나적으로 넘기고 또 넘어섰다. 싸움터 3장 안에는 어느 누구도 가까이 범접할 수 없었다. 쌍검 이 쏟아내는 검기(劒氣)에 부근 일대 지면에 나뒹굴던 마른 나믓가지들이 모조리 끊겨 사면팔방으로 어지럽게 날아갔다. 실꾸리처럼 얽힌 검투(劒鬪) 대결이 거의 20초가 지났을 무렵, 그제서야 두 사람은 피차 상대방의 검법 내력과 수준을 대략이나마 감잡기 시작했다. 이때 시철의 마음은 한결 안정되었다. 상대측 솜씨라든가 수준을 알아차린 바에야 더이상 기력을 소모해 가면서 싸울 필요가 없다는걸 깨달았던 것이다.
[이야압--!]
이윽고 시철의 입에서도 나지막하게 기염이 터져나왔다. 번개 벼락치듯 기습적으로 변화시킨 칼끝에는 어느덧 시씨 가문의 비전절학 뇌정검법(雷霆劒法)이 실려 있었다. 조부 시병건(柴秉乾)이 무림 일세를 풍미하고 허무에 빠져
봉검은둔(封劒隱遁)한 이래 수십 년 동안 강호상에서 잊혀진 검술이 그 손자의 손에서 다시 재현된 것이다. 시철은 한운(閑雲)으로부터 검결(劒訣)을 구술받은 이래 그 모진 투르판 여행길에서 잠시도 잊지 않고 연구를 거듭했다. 그는 수련을 쌓아가면서도 언젠가는 이 검법을 세상에 다시 내놓아 조부의 영예를 되살려보겠다는 야심을 불태웠다. 그리고 이제 그는 세상의 쓰레기 흑살귀왕을 상대로 생전 처음 뇌정검법의 실초(實招)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시철이 부여잡은 칼받이부터 칼끝까지 이르는 검신(劒身)에서 여태껏 들어보지 못한 용음(龍吟)이 마치 소나기 퍼붓기 직전 구름 속에서 천둥치듯 은은하게 울려나오더니, 훌떡 뒤집힌 검세가 장강대하(長江大河)의 물결 흐르듯 전혀 새로운 초식을 도도하게 쏟아내기 시작했다. 절초가 얹힌 상화보검은 더욱 신명이 들려 위력을 발휘하고, 검(劒)과 술(術)이 융화되면서 눈부신 광채를 뿜어냈다. 칼끝에 눈이 달린 듯, 상화검은 전에 없던 맹렬한 기세로 상대방의 가슴과 아랫배 사이 요혈을 노리고 가차없이 찔러들었다.
[챙그렁! 챙....!]
흑살귀왕은 앞가슴까지 짓쳐들어은 맹공(猛攻)을 다급한 손으로 막아내면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지금껏 주도권을 장악하여 일방적으로 공세를 전개하던 자신이 어느 틈엔가 수세로 전락한 것이다. 한두 차례 역습은 방어적 공격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으나, 방금 찔러든 상대방의 칼끝에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압력이 가중되어 있었던 것이다. 뒤미처 숨돌릴 여지도 없이 꼭같은 부위를 겨누고 또 한 차례의 공격이 퍼부어졌다. 흑살귀왕은 연속 3공격을 봉쇄한 다음,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생각으로는 반격에 운신할 공간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지만, 그 후퇴동작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받아랏!]
얼음장같은 질타가 귀청을 쩌렁 울렸다. 그와 동시에 비정하기 이를 데 없는
칼끝이 번뜩 광망을 흩뿌리더니 하단(下段)에서 중단(中段)으로 방향을 바꾸어, 순간적으로 노출된 허점을 뚫고 각박하게 찔러들었다.
[찌이익 ---]
비단폭 찢는 소리, 그와 동시에 흑살귀왕의 허리띠가 툭 떨어졌다.
[다음은 이것!]
상화보검이 다시 한번 무지개를 토해냈다. 옆구리에 차고 있던 칼집이 한가운데를 끊겨 두 동강난 채 땅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흑살귀왕은 그만 가슴이 써늘해져 엉겁결에 좌측방으로 훌쩍 몸을 날려 회피동작을 취했으나 그것도 헛수고, 상대방의 칼빛 무지개는 단 한 치 간격을 벌이지 않은 채 그림자처럼 따라붙어 온다. 흑살귀왕은 정신없이 칼을 휘둘러 그림자를 떨쳐버리려 애썼지만, 도저히 뿌리칠 수가 없다. 일검을 봉쇄하기가 무섭게 또 다른 그림자가 정반대의 공극(空隙)을 비집고서 기어드니, 이것 참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 아닌가 말이다.
그 틈서리는 여느 검술가로서도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바늘구멍, 순간적으로
열렸다가 눈 깜짝할 사이에 닫혀버리고 마는 허점인데, 이 귀신은 그 찰나를
놓치지 않고 파고 드는 것이다.
[쏴아아! -]
흑살귀왕의 칼잡은 오른손 도포자락이 큼지막하게 잘리워 바람결에 훨훨 날아가 2장 바깥에 너울너울 떨어진다. 그는 간담이 써늘해지고 말았다. 이번에는 칼날이 찔러들지도 않았는데 제물에 몸뚱이를 비틀어가며 후닥닥 뒷걸음질치더니 마구 손을 내젓고 미친 듯이 소리를 질러 대었다.
[잠깐....! 잠깐만 손을 멈춰....! 할 말이 있다구!]
시철이 그 자리에 우뚝 섰다. 냉막한 눈빛이 흑살귀왕과 그 일당, 반이승 일행을 한꺼번에 싸잡아 홅어나갔다. 결투장을 사면으로 에워싸고 관전하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새하얗게 질린 채 장승 막대처럼 멍한 표정으로 서 있을 따름이다.
이제까지 전개된 격투에 넋이 빠지고 혼백이 날아간 것이다. 흑살귀왕, 아예 2장 바깥으로 안전하게 더 물러나서야 겨우 몸뚱이를 바로 가누고 섰다. 창백하게 질린 얼굴, 콩알만한 땀방울이 비오듯 떨어지는 이마, 난폭스럽고 사악한 기세는 다 어디로 사라졌는지, 하늘높은 줄 모르고 설쳐대던 위풍마저 깡그리 사그러든 채, 마치 투계장(鬪鷄場)에서 진 수탉처럼 참담한 기색으로 후줄그레하니 서 있는 것이다. 시철은 칼집에 검을 꽂으면서 냉렝하게 쏘아붙였다.
[흑살귀왕, 당신의 평판은 아주 고약하오! 이날 이때껏 저질러 온 천인공로(天人共怒)할 악행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했소! 물론 나 역시 떠도는 소문만 믿고 당신을 죽음에 몰아넣고 싶은 생각은 없소. 허나, 이것만은 분명히 해
두겠소! 오늘 이후, 또다시 나쁜 짓을 저지르고 이 시철의 손에 걸리는 날엔
맹세코 당신을 죽여 없애고 말 거요!]
[중평! 네 행위도 떳떳한 건 아니다. 날더러 악한 놈이라 꾸짖으면서 그 무참한 독수로 해치려 들다니, 피차 이독공독(以毒攻毒)은 매일반 아니냐?]
[보기에 따라선 그럴 수도 있겠구료!]
[우선 내가 뭣 때문에 출도했는지 말해 주마. 작년에 간신 엄숭이 조정에서 탄핵을 받아 실각할 무렵, 엄가놈은 이왕(伊王) 주전(朱典)에게 구원을 요청하고 그 대가로 황금 5만 냥을 주기로 약속했다. 엄가놈은 이왕의 비호를 받아 겨우 목숨을 건져가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 때부터 이왕부의 독촉사절이 잇따라서 분의현에 들이닥쳤다. 극형을 면하게 해 주었으니까 약속한 황금 5만 냥을 내놓으라는 것이지! 엄가놈은 오늘날까지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질질 끌어왔으나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마침내 황금을 사절에게 넘겨주어 하남성 이왕부로 실어가게 하고 말았다. 그 황금 수송선이 호구현(湖口縣)에 조만간 통과하게 되었다.
한데, 엄가놈은 약속대로 황금을 넘겨주고도 너무나 아까워한 나머지 1백 명의 고수들을 호구현 일대에 파견해서 그 황금을 도로 빼앗으려고 공작하기 시작했다. 그 비밀이 새어나와, 우리네 삼산오악(三山五岳)의 영웅호걸들도 그 5만 냥에 달하는 불의(不義)의 재물을 채뜨리기로 결정한 것이다. 보아하니, 젊은 네 솜씨가 사뭇 놀랄 만한데, 남아 대장부라면 한 몫 끼어드는 것이 어떻겠느냐? 또 하나, 네가 받아 주기만 한다면 이 늙은이도 훌륭한 무림 후배와 벗을 맺기로 하마!]
시철은 가슴에 뭣인가 와닿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빙그레 웃었다.
[저도 한 몫 끼기로 하지요! 그러나 당신과 같은 마귀 친구를 두고싶은 생각은 눈꼽만치도 없습니다.]
[황금을 손에 넣든 안 넣든, 또 너와 벗을 맺든 안 맺든, 이 늙은이가 지금부터 개사귀정(改邪歸正), 마음 고쳐 먹고 올바른 길에 들어 서기로 결심한 것은 모두 네 덕분이다!]
[아니, 그건 또 무슨....?]
[이 늙은이도 한다면 하는 놈이다. 악심을 버리고 착하게 살겠노라 맹세하마! 이 손가락을 잘라 증명해 보이면 되겠느냐? 자, 보아라!]
흑살귀왕이 칼을 번쩍 쳐들고서 크게 외쳤다.
첫댓글 흑살귀왕... 니 멋진데...
그나저나 이제부터 흑살귀왕이 시철이를 졸졸 따라다닐 듯 한데요. ㅎㅎㅎ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