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반야월 사람입니다
중학교 무렵 까진 그곳은 읍이었으며 시골 모습을 그대로 간직했던 곳입니다(훨씬 뒤까지도 그랬나?)
나의 유년의 모든 추억과 시절이 담겨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도로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 되던 그때 저 살던 동네는 금호강과 더 가까웠고 대구의 특산물 중 사과와 보리가 가까웠습니다. 저의 집 바로 옆 도랑을 사이로 과수원이 있었고 작은 사잇길로 보리밭이 펼쳐져 있었습니다.
겨울에도 얼음 살짝 낀 논에 겉잎은 누런빛을 띄고 있었으나 가을 보리가 자라고 있었고, 그 보리는 봄이면 학교 가는 내 발목에 이슬을 묻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대궁은 무릎까지 자랐다.
버선 코 같은 하얀 사과 꽃이 떨어지고 수줍은 복숭아 꽂이 피면 완연한 봄인 것을 알았고 나도 서서히 들로 나가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때쯤 나는 시간이 나기만 하면 친구와 미나리꽝이 있고 빈 논이 있던 넓은 들판으로 나갔다.
서너 마리의 토끼를 키우던 그때, 풀을 뜯으러 가는 것이 놀이터로 가는 격이었다.
그때 그곳은 사방이 풀이었다. 펼쳐진 보리밭 중간 중간에 빈 논에서 자라고 있는 풀은 연하였다 그러면 나는 맨발로 풀 위를 뛰며 하늘을 보고 구름, 하늘, 어쩌구 하며 뛰었다
자연에 동화되어 눈을 뜨고도 꿈을 꾸던 시절이었다
하늘에 무지개 바라보면
내 마음 뛰노나니,
나 어려서 그러하였고
어른 된 지금도 그러하거늘
나 늙어서도 그러할지어다.
아니면 이제라도 나의 목숨 거둬 가소서.
어린이는 어른의 아버지
소원하노니 내 생애의 하루하루가
자연에 대한 숭배로 이루어질진저( 좋아하는 시)
아마도 이런 시를 짓고 싶다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르겟다.
우리 집은 여형제가 다섯명이다. 이름 지으시기도 어려웠겠지만 너무나 수월하게 지으셨다.
큰딸은 아버지 어머니의 이름 끝자를 따서 짓고(애정이 돈독), 엉덩이에 몽고점이 유난히 크다고 점순이 또 딸을 낳았다고 서운이, 태를 목에 걸고 나왔네 하며 태순이, 그리고 나....
그런데 드디어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 낳고 우리 집은 난리 아닌 난리가 났다. 못 먹어보던 과자부터 먹게 되었고 이름은 물론 작명소 가서 짓고 심지어 여름엔 동생 고추에 땀띠 난다고 나보고 부채로 부치라고 시켰다
업을 때에도 그것이 눌린다고 업지도 못하게 하였다
급한 일이 있어 난 몰래 그 아이를 업고 어딜 갔다 오다 실수로 도랑에 동생을 빠트렸다
아이는 차가운 물에 놀라 울고 나는 가슴이 벌렁 벌렁 하고...
그 사실은 아무도 모르는데 말을 배우지 못한 어린 동생은 다음부터는 나만 보면 울었다.
그리하여 난 그 아이를 지키지 않아도 되었다.
난 원래의 나의 생활을 찾을 수 있었다.
담벼락을 사이에 두고 살고 있던 덩치가 큰 나보다 두 살 어린 남 학생이 나를 아주 괴롭혔다. 날 좋아했었나?
너무 나를 괴롭혀서 한 번 손 봐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나는 왜구와 함께 물에 빠진 논개와는 달랐다. 처음엔 나무 몽둥이를 등뒤로 숨겨 가서 그아이의 뒤를 후려칠까도 생각 했는데 생각을 바꾸어 그 아이를 어찌어찌 유인하여 도랑 속으로 "팍" 밀어 넣었다
내가 자라는 사이 도랑물은 하수구 물과 섞여 더러워져 가고 있었다.
나는 거사를 도모한 열사처럼 도망가는 게 아니라 잠시 피신하기로 했다.
뛰어도 논과 밭, 그리고 울타리 쳐 진 과수원인 전부인 동네에서 난 바람처럼 사잇길로 휘휘돌고 어두워지길 기다려야 했다.
그날은 별일이 없이 지나갔으나 그 일로 그 집의 형과 누나의 심경을 건드리는 일이 되었다. 그 집의 형과(엄청 큰 고등학생)우리의 연약한 여자들과 패거리 싸움이 되었다.
언니는 그 집 누나와 싸웠고 나는 그 아이의 동생과 투닥이다 그 아이를 잡으러 그 집안으로 들어가다(호랑이 굴) 큰 손바닥이 얼굴을 후려치는 것을 느꼈다. 그때는 무지 크게 보였던 큰형의 손바닥이었다
번쩍 불이 튀고 짝 소리가 나더니 소나기 쏟아지듯 오줌이 나왔다(오줌 조금 쌌슴다)
나는 그때 힘이 없으면 복수라는 건 꿈도 못 꾼다는 걸 몸소 깨달았습니다. 맞습니다 깨달음은 번개 치듯 순간이었습니다.
그곳은 탱자 꽃 피면 봄이 왔고 깻잎 잎파리 향 짙은 여름과 붉은 사과처럼 가을의 놀이 아름다웠던 곳이었습니다
그곳도 개발의 바람이 다가와서 사과나무 대신 흰나비 완두콩 꽃밭이 되더니 아파트 단지로 묶여 보상을 받고 일곱 여덟집 되던 이웃들은 같은 시기에 그곳에서 떠나 왔습니다.
나의 유년의 추억을 울타리처럼 묶고 말이죠
그곳이 반야월이랍니다
첫댓글 이 글은 한글 97에 썼다 옮긴 글입니다. 중국통은 날 싫어 하는지 글이 3번이나 등록 취소 되었습니다.ㅎㅎㅎ만 써놓은 곳은 임시저장 해본것
고즈느기님 꼬리 지운것에 미안 함을 담으며 이글을 대신 합니다
한폭의 수채화를 보듯 눈에 선히 잡힐듯한 정겨운 고향풍경입니다.미나리꽝도 오랫만에 듣는군요.몽둥이로 뒷통수를 후려 팰 정도로 무지막지 하셨구나..ㅎㅎ.저도 그 아래 송정에서 한 4년 지낸적이 있습니다.반야월 30번 종점인가 그 길 맞은편에 반야월 파출소가 있었지요.잘 읽었습니다.
서울생이지만,제 친정도 딸넷에 귀한 막내 아들하나..공감되는 부분이 많네요. 왠지 추억에 잠기고픈 글 입니다...감사!!
ㅎㅎㅎ 마치 고향에 돌아가서 타임머신을 돌려놓고 있는듯합니다.그리고 어린시절은 누구나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 이겠지요.그런데 반야월님은 꽤나 재미있는 어린시절을 보냈네요.동생 고추에 부채질 해주면서 ㅋㅋ 그 동생도 이제는 ? 올캐보고 고추 말린 품삯 달라세요.^^ 옛 생각 납니다.
많이 들어보던 동네인데요ㅎㅎ 정겨운얘기 동감하면서~ 즐감했습니다.
옛날이 그립네요. 촌닭소리 들어도 촌닭인것이 싫지 않은 것은, 그 안에 추억이 있어서 그안을 들여다 볼때 행복이 넘실대기 때문입니다. 정감있는 얘기 잘 보고 갑니다.
나두 딸넷 낳고 아들 ,다시 딸난 집의 장녀.그래서 무녀리지요.^^
오랜만 입니다 반야월님,잘 계신가?... 대구에서 신천동지나 ->아양교->동촌->방촌->그리고 반야월 이지요? 내 어릴적 그 길은 영천까지 양쪽에 가수원이 이어졌습니다. 여름 방학이면 동촌에서 멱 감고 아버지가 있던 방촌 우리 가수원까지 형님의 자전거뒤에 메달려 가던 아련한 추억이 떠 오릅니다,
저도 대구촌닭입니다만. 그런 아름다운 풍경속의 추억은 없습니다만. 이글을 읽으니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음꽃이 핍니다. 전 경산에서 가져온 사과 홍옥의 아름다운 빛깔이 떠오릅니다. 무척 시었지요? 지금은 그런 사과 구경 못하지요. 지금도 한번씩 자인장에 놀러 갑니다. ㅎㅎㅎㅎ 고향언니 홍옥사과
저는 대구의 방천둑에서 목욕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염색천을 삶고 말리던 모습들...그리고 그곳에서 가수초청 선거유세가 있었는데... 모두들 기억하셔요? 진달래 피고 새가 울면는 두고 두고 그리운 사람~~~~~~가수가 누군지는 기억안납니다.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홍옥 사과
어? 반야월님. 제 꼬리글 지우셨다는 말이 뭐에요? 아이고 지금 이글 봤네요 크흐~ 시 잘 받아보았습니다.
정훈희.
와 정말 오염되지 않은 그림을 보는듯 합니다. 저두 이런류의 추억이 있었던것 같은데, 세상이라는 곳에 갖혀 이리저리 치이다 보니, 모든것이 아득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