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서적-천주교회사 *정학.성리학-사학.천주학 *전라도:전주+나주(감옥) *책롱사건-1801.1.19.임대인 토마스가 포천 홍교만프란치스코 사베리오의 집에 있던 책롱을 황사영 알렉시오의 집으로 옮기려다 발각 *백제불교 초전도래지 백제불교 초전 법륜지 백제불교초전지설 ★영광지역 첫신자-이우집 ★영광복산-현 장성군 삼계면 부성리. 복산 마을 *영광군종교전래순서 불교1c말-유교15C-천주교18c말-개신교19c말-원불교20c초 2018-한국천주교회사연구 (이원순저.한국교회사연구소) 4.5~ .박해를 받으면서도 불사조와 같이 꾸준히 발전되어 나온 기적의 교회가 한국 천주교회였다. .한국 천주교회 초기의 역사는 자율적인 학습에 의한 신앙의 도달이요, 교회의 창설이라는 무성직.무미사의 신앙공동체로 출발된 역사였다. .가성직제 해체후 1801 주신부 사후 30여년간 성직자영입운동 펼쳐 .그 결과 1831년 조선교구설정 돼 한국천주교회는 교정상 독립된 사목단위의 자리차지 -이는 한국천주교회의 제2의 출발이다. .청국의 경우 영.불 등 식민주의국가의 전치적 야욕이 교안에 편승되어 중국사에 뼈아픈 불행조성. .한역서학서-서양의 종교.윤리와 지리.천문.역사.과학.기술서적을 한문번역서 .중국천주교- 1601 이태리 마테오리치 입성.전파 *42개 전도소. 대소 160여개 교회당. 15만명 교인 .불과 60여명의 야소회 전교성직자들의 활동덕분 -성공원인: 야소회성직자들의 한문학의 힘이 컸다.펜의 힘! 저술활동 .천주실의. 천주성교실록 등 ★그들은 중국고전을 능히 잘읽고 밝았으며 중국의 문물.제도. 풍습을 깊이 연구하여 자유자재로 저술활동하여 중국 사대부교양층에 추앙을 받았다. -중국전교와 서양문물 전수에 크게 기여 .명.청대 중국전도 야소회신부들은 북경의 동.남.북 세 천주당에 머물며 활동했는데. 각 천주당에는 풍부한 장서를 가진 도서관 시설이 있었다. -여기에 10.000여권의 서교서적보유 -1684 파리외방전교회 진출 ★한역서학서의 조선 전파와 조선학자들의 열독이 묘당에 문제가되어, 정조 15년에(1791)에 한역서학서의 소각령이 내려졌다. .박지원.박제가 등 북학파의 인물들은 북경에 들어가 직접 천주당을 관람하였고 서양 예수회선비와 접촉의 기회를 가졌던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학의 과학.기술의 측면에는 지극한 열성을 보였으나 천주교에 대하여는 그것이 불교보다 하위의 것이고, 하늘을 업신여기고, 사람을 속이는 의식체계라고 파악하였다. .정약용은 문화적 쇄국 세계인 조선사회에서 단 한발도 국외로 나가보지 않았으면서도 누구보다도 서학과의 접촉이 다양했던 인물이 실학의 집대성자인 정약용이다. -23세 때 이벽을 통해 천주교 접촉 2018-천주교창립사. 이벽 (간추린 우리나라 천주교회사) -변기영 몬시뇰저. -한국천주교회창립사연구원 한국천주교발상지천진암성지 발간(2007. 11. 제3판 간행) .2018.1.17일독 *"조선천주교회는 1779년부터 1835년까지 56년간이나 성직자 없이 평신도들이 세웠으니, 이들은 마땅히 조선천주교회 창립자들이라고 불러야 한다." -"비록 2명의 중국인 사제들이 잠시 있었던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는...자기들의 조국에 복음의 씨를 뿌렸으며, 1836년에 프랑스 선교사들이 처음으로 한국에 도착할 때까지 성직자 없이 자기들끼리 교회를 세우고 발전시켰으며,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위하여 목숨까지 바쳤습니다." -교황 요한바오로2세 1984년 103위 시성식 때 *조선 천주교회는 10대 후반과 20대 초반의 청소년 선비들이 선교사 없이, 성직자나 수도자없이, 한국천주교 발상지 천진암 성지를 본거지로 하여 10여 년간 자발적인 진리탐구와 실천, 증거와 민족정신으로 창립되었다.(109쪽) -한국천주교회창립성조 5위 .이벽(1754~1785) -31세 .권일신(1742~1792)-50세 .이승훈(1756~1801)-46세 .정약종(1760~1801)-41세 .권철신(1736~1801)-65세 -그외 남인계 학자 .정약전((1758~1816)-58세 .정약용(1762~1836)-74세 .성호 이익(1681~1763) .안정복(1712~1791) '거룩하고위대한 순교선조들' '신앙선조들의 순교영성' '한국교회를발전시키는원동력 .하느님말씀, 곧 천명 .익명의 그리스도인, . 무늬만의 그리스도인 .임시준성직자단.임시성직단 -가성직제도 .주교-권일신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사제-이승훈베드로.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 류항검 아우구스티노. 최창현 요한 등 10여 명 -설교.성세.고백성사.견진성사 집행(2년여간) .1784 한국천주교회창립 .1785. 을사추조적발사건 .1785 & 1786 이벽 사망 (광암 이벽 세례자요한 성조) .1786년 배교자 사망설과 1785년 순교자 사망설로 나눠 .별명: '돌로 된 담벼락' .키가 8척, 한손으로 백근을 들어올릴수있는 크고 건장한, 잘생긴 외모의 장정이 갑자기 전염병 죽음은 의문시 됨-가족들이 사실과 다른 유언비어일 수도-독살설제기. .양근고을 찾아가 권철신일가친지들을 입교시켜 .을사추조적발사건후 외부로 부터 철저히 차단 당해. .문중으로부터의 축출과 패가망신을 두려워한 부친 -성조이벽 배교자적 처신 논란 -1786 역병페스트에 걸려 사망 *페스트:역병이라고 불리는 티프스의 일종 .이벽은 8일간 앓은뒤 33세의 나이로 죽었다. *변기영몬시뇰은, 또는 문중에선 1785년 늦은 봄 내지 초여름에 31세 나이로 사망으로 주장함(다블뤼.달레 주장을 오류로 반박) .1979 이벽 가문의 족보와 묘소발견, 이장하여 이벽 인물평가에 결정적 전기마련. -23개의 치아와 복부 부분만 유독 까맣게 변색됨을 볼수있어 차후 감식검증 필요성 제기. .부친은 이벽 신앙으로 자살시도 .부친의 강력한 반대에 못이겨 배교했다. "이러한 가정 내에서의 박해로 이승훈.이벽.정약전 등 교회의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배교하기 시작했다." .이벽의 부친 이부만은 이벽에게 배교를 강요하고 "만일 네가 배교치 않는다면, 내가 목을 매달아 죽겠다."고 위협하므로, 그는 효심에 의해 하는 수 없이 거짓 배교를 선언하고 말았다. .광암 이벽의 사망을 접한 1814년 강진 귀양소 다산서옥에서 '보성중용강의'를 손보면서 "광암이 죽은지 30년이 지났으니 이제는 질문할 곳이 없구나! 광암이 아직 살았더라면 그의 진덕박학이 어찌 내게 비할까 보냐! 하나는 살고 하나는 죽었으니 아무리 슬퍼한들 어디가 닿으리오. 지금 나는 이 책을 부등켜 안고 울음을 금치 못하노라."하였다. .원로 사학자 이원순은 이벽이 드높은 경학의 경지에 이르렀던 학덕을 겸비한 귀인으로서, 동양의 유교 윤리와 서양 그리스도교 윤리의 조화로운 통합을 도모했던, 실로 보기 드문 진정한 구도자적 인물이었음을 적시하고 있다. -원로 교회사학자 최석우몬시뇰 주장. 다블뤼주교와 달레도... *다블뤼(Daveluy) 주교의 「조선순교자 역사 비망록」(1850년) .조선에 천주교회를 시작하기 위하여 천주께서 간택하신 사람은 이벽이다. .진정한 의미의 조선천주교회 역사는 이벽의 강학에서 시작되었다. .이벽은 조선에 천주교회를 창립하기 위하여 권철신을 선택하였다. .이벽은 1777년 겨울, 권철신.정약전.정약종.이승훈 등과 천진암에서 천학논증 강학하였다. .이승훈은 이벽의 말씀을 대도사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 .이벽은 뛰어난 자질과 인격으로 열의와 정성으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조선의 문호를 열었다. *Maubant 신부의 「조선천주교회 창립사 보고서 문헌」(1838) .이벽은 새 개종자들과 힘을 합쳐 조선 신도회 대표로 1783년 가을에 이승훈을 북경에 파견하였다. *이승훈 성현의 「서간」(1787) ."제 평생에 대성현을 한 분 만났는데, 이 분은 다년간 천주교 연구에 전념하여 박학하고 실행하였고, 내게 천주교를 가르쳤고, 내게 영혼을 불어넣었습니다. *첫째, 그분들이 천주교 신앙으로 인하여 박해자들한테 죽음을 당한 것만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신앙으로 인한 죽음이라는 사실은 가장 정확하고 중요한 시성 근거의 제1차 기본 자료가 아닐 수 없다.(113쪽) *결국 신앙선조들의 순교는 그분들의 죽음 자체를 통하여 자증되고도 남는다. 그러나 그 분들의 죽음에 관한 언급이나 일부 기록의 자구 몇 개만을 가지고 배교를 입증할 수는 없다."(120쪽.변기영 몬시뇰) *다섯째, 박해자들의 보고서나 각종 기록은 참고할만한 것일뿐이니, 그 이유는 저들이 신앙인들을 잡아다가 혹독하게 형벌하고 교활하게 회유하며 잔인하게 죽이던 흉악무도한 악당들이었기 때문이다.(117쪽) *여섯째, 200여 년 전 당시의 조선사회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와 너무나 상이한 문화를 지니고 있었던 시대임을 인정해야 한다. 특히 부모에 대한 효도는 최상의 덕목이었으므로, 부모의 명을 거스르는 불효막심한 행위는 어떤 것이든 지간에, 특히 불효스러운 인간관계나 처신은 식자들에게 감히 생각지도 못하는 시대였다. 효성을 거스르지 않으려는 자세를 배교시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118쪽) *Longford 교수의 「계림팔도지=The Story of Korea」의 내용 일부(1911년) .1720년에 이이명이 가지고 온 천주교 서적들을 조선선비들이 50년간 연구하였는데, 그 중에 이벽이 1770년부터 1783년까지 13년까지 천주교를 연구하고는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어 1784년에 영세하고 오게 하였다.(Longford 교수는 1800년대말 영국 왕실 국립대학교수로서, 25년간 일본과 조선에 머물면서 조선과 일본과 문화사를 연구 집필한 학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