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에 관한 시모음 15)
여름밤의 詩 /정형근
나뭇잎 위에
웅크리고 잠든 둥근 이슬이 슬프다
가시지 않는 매일의 통증
희미한 불꽃이 밤을 지킨다
온갖 해충(害蟲)이 달려들어 와
심장을 가두고 소리 질러도 의연할 뿐
오롯이 밤이면 어둠을 밝힌다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너처럼 밤이 지나면 잠드는 허수아비
노을이 지면 괜스레 설렌다
밤이 좋아 달을 바라보며
이야기하는 기쁨으로 너의 필요를 알고
비 오는 밤
빗소리는 득음의 詩가 된다
여름밤 숲속 너럭바위 /박영춘
자드락밭 옆 오솔길 가녘 숲속에
팔자 좋게 드러누운 너럭바위
샛별이 밝음을 돋보여주는 초저녁이면
풀벌레들은 둘러앉아 합창을 합니다
달빛이 너럭바위에 휘영청 내려앉으면
반딧불은 불을 끄고 이파리에 숨습니다
밤이 이슥히 이지러지면
별빛은 가물가물 졸고
이슬은 풀잎에서 반짝반짝
달빛을 데리고 침실로 미끄러집니다
이때쯤이면 벌레들 새들은
너럭바위 둘레 풀잎에 걸터앉아
사랑이 익어가는 소리를 엿듣습니다
사랑이 무르익어 노릇노릇할 때쯤이면
새들은 슬금슬금 둥지로 날아듭니다
별들은 눈을 반쯤 감아줍니다
너럭바위는
아무 일도 모른다는 척 잠만 잡니다
어느 여름 밤에 /정심 김덕성
세미하게 들려오는
바람소리 아니 님의 숨결인 듯
밤을 깨우며 스쳐간다
하얗게 불타는 나의 영혼
님의 형상이 희미하게 떠오르는
기다리다 못해 이제 지쳐버린
긴 여름밤에 찾아 헤맨다
폭염으로 이어지는 열대야
긴긴 여름밤을 촛불로 불 밝히며
꿈 같이 흘러가는 세월 속에
행여나 님이 오시려나
그 날 떠나시며 꼭
다시 오시겠다고 한 그 한마디
어둠속에 불을 밝히며 기다리는데
고요 속에 님의 고운 숨결인 둣
세미하게 들려올 뿐
여름밤 /이원문
밤하늘의 별나라
저 별 나라에 누가 살고 있을까
은하수 길 따라 별 나라에 가던 날
누가 나의 마중을 그렇게 기다렸지
밤하늘에 별 가득
모깃불 연기 속 어디에 숨었었나
그 잠깐 다시 나와 두 눈에 쏱아지면
별 하나 나 하나 어느 시간이 세어줄지
다 못 세고 지친 밤
내려오는 눈꺼플을 어찌할까
모깃불 꺼지는 밤 하늘에 별만 가득
댑싸리의 밤하늘 별만 남아 반짝였다
여름밤 /목필균
언제부터인지 잠의 문고리는 뻑뻑하다
창밖 불빛을 암막 커튼으로 차단하고
누워도 머릿속에 불이 켜진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따라
이리저리 뒤척이는 몸은 끈적거리고
새벽부터 찾아온 매미는
아파트 방충망을 붙잡고 자지러지게 울어
그냥 일어나
손 전화로 세상 이야기에 기웃대며
생각의 꼬리를 자른다
여름 밤의 꿈(爾惟) /김상협
나르는 새는
돌아 보지 않고
스쳐간 바람은
돌아오지 않는 데
하얀 별들만
까만 밤을 기억한다
눈 속에 오래 머문
생생한 모습으로
보이지 않으면 멀어지는
시간의 진리도
별이 뜨는 밤이면
꿈처럼 다가온다
* 爾(이) 너 , 惟(유)생각할
여름밤 /김수영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소음도 번쩍인다
여름은 이래서 좋고 여름밤은
이래서 더욱 좋다
소음에 시달린 마당 한구석에
철늦게 핀 여름장미의 흰 구름
소나기가 지나고 바람이 불듯
하더니 또 안 불고
소음은 더욱 번성해진다
사람이 사람을 아끼는 날
소음이 더욱 번성하다 남은 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던 날
소음이 더욱 번성하기 전날
우리는 언제나 소음의 2층
땅의 2층이 하늘인 것처럼
이렇게 인정의 하늘이 가까와진
일이 없다 남을 불쌍히 생각함은
나를 불쌍히 생각함이라
나와 또 나의 아들까지도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다 남은 날
땅에만 소음이 있는 줄만 알았더니
하늘에도 천둥이, 우리의 귀가
들을 수 없는 더 큰 천둥이 있는 줄
알았다 그것이 먼저 있는 줄 알았다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천둥도 번쩍인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이래서 좋아진다
여름밤 /이선영
방바닥을 옮겨 다니며 잠 못 드는 여름밤
나를 잠들지 못하게 하는 건 바로 섭씨 30도 넘어가는 너란 무더위
창문을 열고
잠옷의 단추 몇 개를 끄르고
나는 너를 견디려고 밤 내 허덕인다.
한 여름밤의 무더위
나에겐 선잠 드는 더운 밤들만 계속된다.
여름밤 추억 /박인걸
별 숲에 갇힌 산촌 마을에
풀벌레 노랫소리 깊어가는 밤
은하수 강물처럼 빗겨 흐를 때
아스라이 떠오르는 어떤 그리움
북두칠성 지쳐서 산위에 눕고
길잃은 반달은 중천에 걸려
반딧불이 하나둘 불 밝힐 때면
미소짓던 소녀가 마음흔들고
바람한 점 없는 열대야에도
거불거불 피어나는 모깃불 연기
멍석에 누운 어린 소년은
소녀와 손잡고 별숲을 달린다.
냇물은 여전히 여울져 흐르고
장독대 봉숭아꽃 여간 수줍고
점박이 바둑이 깊이 잠들 때
그리움 품은 소년도 꿈길을 간다.
여름밤 2 /소산 문재학
삼복(三伏)을 달구는 열기
연일 폭염 폭염이다.
짜증 나는 찜통더위가
열대야로 이어지는 밤
끈적이는 온몸은
숨이 턱턱 막히고
뒤척이는 몸부림에
꿀잠은 멀리 달아난다.
한줄기
생명수 같은
시원한 냉기 바람은
갈증으로 타는데
고요를 깨드리는
풀벌레들 울음소리만
여름밤을
하얗게 지새우네.
여름밤에 바람 /이시향
여름을 꽉 채운
바람의 몸짓은
한점 흔들림도 없이
밤이 되어도
끈적한 땀방울 흘린다
선선한 가을로
다이어트한 바람 불어오길
바라며 찾은 태화 강변
부채의 날갯짓으로
겨울 찬바람을 추억하는
손놀림이 바쁘다
숨이 턱턱 막히는지
수면 위로 나와
뻐끔거리는 열대어
바라보는 도시의 밤이
열대야로 흐느적거린다
여름밤 /서덕준
여름밤입니다
체온이 오르내리는 능선에서 들나비 떼가 속살거리고
내 일기장의 낱낱 페이지 사이마다
저녁별이 책갈피를 들추고 내려앉습니다
내가 섬기는 문장들이 바람으로 불어옵니다
반딧불이 화관처럼 머리 위를 비행하는 밤
짙어지는 벌판에 개여울과 나란히 서서
꽃말도 없는 이들이 웅성대는 소리를 듣습니다
이보다 안온한 밤이 없을 것입니다.
한여름 밤의 꿈 /노장로 최홍종
겨우 차를 얻어 타고 나선길이라
마음은 이미 허공중에 애드벌룬을 띄우고
질척이는 시골길 비포장도로를 죽을힘을 다해 가보지만
차는 중도에서 바퀴가 땅속에 묻혀 오도 가도 못하여
모두 내려 차를 밀고 당기고 고생 끝에 차는 움직이고
그러나 이것이 무슨 낭패란 말입니까? 난감하네...
그만 자동차는 나를 길에 혼자 내버려 두고
저희들끼리 훌쩍 떠나고 말았지요.
초행길을 묻고 찾아 겨우 버스정류장에 왔건만
돈도 지갑도 없어 이쪽저쪽을 뒤져 찾은 현금은
천 원짜리 몇 장이 고작이고 그나마 빨래로 구겨져
돈으로 거의 쓸모가 없어 애를 태우며 차를 기다리나
종일 기다려 온 버스는 대롱대롱 매달려가고
아우성이 긴급 사이렌소리와 함께 겁을 주어
타볼 엄두가 나지 않고 전혀 탈 수도 없다
걸어야지 방향도 모르고 물어볼 이도 없이
가까스로 죽을힘을 다해 찾아낸 집은
문이 잠겨 들어 갈 수 없는데 창문이 조금 열려
창문틈사이로 몸을 던져 이젠 되었다고
겨우 머리와 몸이 빠져나와 휴 하고 한숨 돌리니
어디서 시계의 알람소리가 요란스레 울린다.
여름밤 강가에서 /박외도
해는 기울고 상계 봉에 달이 뜨면
밤마다 얘기별 들을 데리고 나와
강물 속에 뛰어들어
목욕하는 달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시원한 강가에서 너를 바라보노라
별들이 별똥별 되어 뛰어내릴 제
강가에서 받아 품으려 했지만
모두 형체도 없이 사라져 가니
나 혼자 안타까워 서러웠노라
저를 어쩌나 밤이라 아무도 없으니
너를 도울 자 없구나
여름의 길목에서
안타깝고 불쌍하다
사람에게는 기쁨과 설움이 있고
달도 밝음과 어둠이 있으니
세상은 완벽할 수 없음이로다.
달은 자식 잃은 설움에 구슬피 우는데
강물 속의 달은 혼자 어찌할 줄을 모르고
달이 둘인가 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위의 달은 실상이요 강물 속은 허상이라
무슨 영문인가 하고 어리둥절하였노라.
한여름 밤의 세레나데 /최삼용
황혼의 절정마저 어둠에 혼절당한 후
오늘은 달빛 펼쳐 테이블보로 깔고
별빛을 장신구로 건다
적막 속에서 가로등 불빛 등블 삼아
멍 파티 오픈한 여름밤
홀림체로 적어 아무나 읽지 못할
오늘 치의 내 일기처럼
밤은 몸을 열어 숨길 수 없는 전부를 숨기지만
어둠 자락 비집던 도심 불빛은
덧난 사랑의 상처 되어 화닥거린다
병앓이 중 통증마저 황홀한 게 사랑병 아니던가
별 모가지 꺾어 고압 전선줄에 음표로 걸쳐 놓고
바람의 촉수가 바이올린 활 되어
닿는 장애물마다에서 하모니를 만든다면
그대 가슴 녹아질 세레나데가 될까?
오늘 밤 메신저로도 전하지 못한 내 사랑의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