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四十二 章. 민강묵교(岷江墨蛟)
민자건이 찌른 일검은 정확하게 후심(後心)을 꿰뚫고 앞가슴으로 빠져나갔다.
키다리는 비명을 지르고 싶어도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뒤미처 도달한 시철이 한
목숨 구하려고 손을 썼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당신....! 내가 살려서 잡으라고 안그랬소? 당신, 정말 이러기요?]
성질이 뻗칠대로 뻗친 시철, 민자건을 향해 사납게 소리쳤다. 그러나 민자건은
태연자약, 등줄기에 박힌 장검을 쓰윽 뽑아내기만 할 따름이다. 칼날이
뽑혀나가자, 키다리는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민자건은 시체를 툭 걷어차더니,
그제서야 변명을 한다.
[미안하게 되었구료. 난 또 이놈이 피할 줄 알았지 뭐요. 밥통같은 녀석, 그
일검도 못 피하는 주제에 누굴 습격한답시고 매복해 있었노..? 시형, 정말
미안스럽소. 잘못 생각해서 죽여버리고 말았으니..]
[아까운 노릇이야....]
[뭐가 아깝단 말이오? 이 자를 살려서 어쩔 셈이셨소?]
[누가 이놈들을 시켜서 우리를 매복 습격하도록 사주했는지 그걸 캐물으려고
그랬던 거요.]
[그렇다면 정말 미안하게 됐구료.]
시철은 두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후딱 돌아서서 사방을 두리번거리다가
새삼스레 깜짝 놀랐다.
[이크! 두 아가씨가 어딜 갔지? 안 보이는데....?]
그제서야 민자건도 기급을 해가지고 큰소리로 외쳐부르기 시작했다.
[자강아....! 자강아....!]
시철의 가슴속에서 심장고동이 마구뛰기 시작했다. 방정맞게 불길한 생각이
들있다. 그는 처음 싸우던 자리로 달려가면서 고래고래 소리쳐 불렀다.
[운생....! 운생....! 운---새---앵---....!]
그러나 운생의 응답 대신 안타깝게 외쳐부르는 소리만 메아리쳐 울려왔다. 어디로
갔을까....? 두 여인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 것이다. 시철과 민자건은 반쯤 미친
사람이 되어 난장강 공동묘지 부근을 마구 헤매가며 찾아다녔다. 하지만 두 여인은
커녕 사람의 그림자라곤 반조각도 보이지 않았다. 민자건이 발광한 듯, 여기저기
마구 치달으면서 쑤시고 뒤지고 하더니만, 원한에 사무친 목소리로 버럭 악을
질렀다.
[그놈 짓이다! 구유귀왕, 그놈 짓이야! 그 개같은 놈이 동생을 납치해 갔어....!
천하에 찢어 죽일 놈의 늙은이가....]
시철의 발길은 북쪽으로 달려갔다. 구유귀왕이 사라진 쪽, 처참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던 방향이었다. 거기서 찾아낸 것은 황폐한 무덤아래 쓰러져 있는 시체 두
구였다. 그러나 구유귀왕의 모습은 여기서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단념하지 않고
수색을 계속했다. 시체 두 구가 또 발견되었을뿐, 구유귀왕이나 운생의 흔적은
찾을 수가 없다. 이 때였다. 좌전방 무덤 위에 느닷없이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유령처럼 불쑥 솟구쳐 오르더니, 얼음장보다도 더 싸느란 음성으로 느릿느릿한
마디씩 끊어가며 말을 걸어왔다.
[주인없는 들귀신, 외로운 무주고혼(無主孤魂)들만 떠도는 난장강에, 살아있는
인간이라곤 너희 둘과 나, 셋뿐인데, 고래고래 악을 쓸건 뭐냐?]
시철은 소스라쳐 놀랐으나,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경계태세를 취하면서 상대방에게
접근해가기 시작했다.
[저희 동료 세 사람을 잃었습니다. 그들을 찾느라 소리를 지른 겁니다.]
[목구멍이 터지도록 불러봤자 응답할 사람은 여기 없다. 이 부근에는 산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으니까 말이야. 저 동쪽에 남자 여덟 놈이 죽어 자빠졌는데,
가서 찾아보려무나! 혹시 너희 동료들인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하지요.]
[흐흐흐! 그 여덟 놈 가운데 너희 친구들이 있다면, 네놈들도 살 생각은 버려야 할
게다.]
[무슨 뜻으로 하시는 말씀이신지?]
[노부가 이 난장강을 지나치는데, 저 죽일 놈들 여덟이서 말 한 마디 묻지 않고
다짜고짜 습격해 오길래 나도 홧김에 몽땅 때려 죽였단 말이다. 그러니까 저 여덟
놈의 귀신이 네 친구라면 내가 살려둘 듯 싶으냐?]
민자건도 이성을 되찾았는지, 무덤 아래로 다가오면서 냉소를 친다.
[당신 그 입심 한번 크구려! 도대체 성함이 뭐요?]
[노부 이름을 듣고 죽으려나? 그럼 소원대로 알려주지. 한등교다!]
[앗....!]
그 마지막 한 마디에, 민자건은 숨이 턱 막혀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치면서
뒷걸음질쳤다.
[앗....!]
놀란 것은 민자건뿐이 아니었다. 그러나 시철의 놀라움은 기쁨과 반가움에 가득 찬
것이었다. 그는 실성을 하다시피 큰소리로 상대방을 불렀다.
[한영감님....!]
[뭐라구? 한영감이라....?]
[어르신네! 십 년 전 산서땅을 지나치시다가 후마진 시씨댁에 들르신 기억
나십니까? 그 꼬마를 아직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아니, 이럴 수가....? 네가.... 네가 바로 그 시씨댁 꼬마놈이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네가.... 네가....!]
[지금 찾고 있는 동료 중 한 분이 구유귀왕 허선배님이십니다.]
[뭐라구, 그 친구도 여길 왔어?]
[예, 그 노인장께서 저를 이리로 데려오셨습니다. 또 다른 동료는 아가씨 두
명이구요.... 한데, 모두들 여기서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무덤 위의 그림자는 녹장옹(綠杖翁) 한등교(韓騰蛟), 바로 그 사람이었다. 10년
전, 그는 산서 관도상(官道上)의 판천파(坂泉坡)를 지나치던 중,
평양현승(平陽縣丞)으로 좌천되어 가던 왕종무(王宗茂)가 나용문 일당의 습격을
받아 위기에 빠진 것을 구출해주고 시철의 집에 머문적이 있었다. 그는 그 때 열
살박이 꼬마 시철에 대한 인상이 깊게 박혔었다. 그 때문에 이제 자기 앞의 청년이
누구란 걸 듣고 얼마나 반가운지 몰랐던 것이다. 더구나, 그 괴팍스런
구유귀왕마저 어린 꼬마녀석을 돕다가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사실에, 그는 마음이
뿌듯한 감을 느꼈고 한편으로는 불안감이 치밀어 올랐다.
[이거, 뭔가 잘못된 모양이야! 구유귀왕이 어떤 작자들한데 잡혀간게 아닌지 몰라.
오늘 밤 여기에 매복한 놈들은 하나같이 기막힌 솜씨를 지닌 고수들이었어. 이런
놈들 수중에 떨어졌다면 아주 재미없을 텐데...]
녹장옹이 발을 동동 구르며 불안해하자 시철은 거꾸로 녹장옹을 위로해 드릴
형편이 되고 말았다.
[고정하십쇼. 어르신께서 그토록 우려하실 상황은 아닐 겁니다. 서둘러서 배 한
척을 찾아보기로 하지요. 어쩌면 그분도 상처를 입고 어딘가에 숨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곁에서 민자건이 냉소를 친다.
[십중팔구, 그 늙은이는 엄가놈이나 이왕부측 첩자 노릇을 하는 사냥개일 거요!
그러니까 우리 누이동생들을 납치해 간 거 아니오?]
그 말에 녹장옹이 펄쩍 뛰면서 무섭게 으르렁거렸다.
[닥쳐라! 네놈이 도대체 누군데 냄새나는 주둥아리로 구유귀왕을 헐뜯는 거냐?
구유귀왕이 어떤 인물인지 알기나 하고서 그 따위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그야 비적이나 강도는 아닐지라도 영웅 호걸이라고 말할 순 없겠습지요.]
무엇을 믿고 있는가, 민자건도 지지 않고 큰소리로 대꾸한다. 녹장옹은 그 별난
지팡이로 땅바닥을 쿵! 하니 짓쪄가면서 음험스레 소리쳤다. 민자건의 방자한
모습을 노려보는 눈길에 차츰 살기가 서렸다.
[으음, 발칙한 놈....! 남을 헐뜯는 재주가 비상하구나. 꼬마 녀석의 친구라니까
나도 이만큼 양보한다만, 그렇다고 주둥아릴 아무렇게나 너불대다간 큰코 다칠
게다. 네 푼수를 알란 말이다!]
분위기가 험악스러워지자, 시철이 얼른 나서서 녹장옹에게 굽신굽신 사과를
올렸다.
[어르신, 노염을 푸십쇼! 누이동생을 잃어버린 조바심을 못 이기고 격한 감정에
어르신의 기분을 건드린 모양입니다. 너르신 아량으로 용서해 주십쇼.]
[이놈은 누구냐?]
그래도 녹장옹의 말투에는 역정이 서렸다.
[저는 민자건이라고 합니다.]
시철 대신 장본인이 대꾸했다. 그 목소리에도 만만치 않은 분노가 섞여 있었다.
녹장옹은 얼음처럼 차가운 미소를 건넸다.
[젊은 놈이 노부 면전에다 대고 내 친구를 모욕하다니, 고것만 살고 이 세상을
하직할 모양이로구나! 이번 만큼은 눈감아 주겠다만, 이후에는 예외 없을 줄
알아라! 그 때 가서 또 너불거렸다간 후회해도 늦을 게다.]
우여곡절 끝에 수색자는 한 사람 더 늘었으나, 여전히 소득은 없었다. 최초 습격을
받았던 장소로 돌아와서, 녹장옹은 엎어진 시체 한구를 뒤집어놓고 화섭자를 꺼내
밝히더니, 시체의 얼굴을 보고 깜짝놀랐다.
[이크! 이 녀석은 사대금강(四大金剛)의 하나, 후구중(侯九重)아닌가? 이놈의
추혼정(追魂釘) 솜씨는 무림계에서도 공포의 대상으로 손꼽히지! 검술도
발군(拔群)의 실력인데다. 흉악 잔인한 성격으로도 무림을 진동시키는
인물이야.... 너희들이 죽였느냐, 아니면 구유귀왕이 처치했느냐?]
[제가 죽였습니다. 이 자가 동료 한 명하고 쌍검합벽(雙劒合璧)으로 공격하길래
그냥 찔러 죽였지요.]
시철은 덤덤하니 대답했다. 녹장옹의 눈이 반짝 빛났다. 그는 잠시동안 시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내 추측이 틀림없다면.... 너는 필시 조부님의 검법을....?]
[부득이 해서 자위수단으로 썼습니다.]
시철은 얼른 녹장옹의 말을 차단해버렸다. 그 입에서 조부님의 별호와 이름이
나올까 보아 두려웠던 것이다. 민자건이 듣고 있는 자리에서 자신의 내력이
폭로되는 것이 꺼림칙했다. 녹장옹도 재빨리 눈치채고 그저 고개만 끄덕거렸다.
[흠흠.... 호랑이 집안에 개아들은 없다더니, 과연 헛말이 아니로구나. 솔직히
말해서, 이놈의 솜씨는 정말 무시무시하다. 노부가 목숨걸고 맞상대를 한다
치더라도 아마 1백 초 안에 이 친구를 염라대왕앞으로 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사실대로 말씀드리자면, 저도 출기불의(出其不意), 기습공격에 요행히 따라서
죽일 수 있었을 뿐입니다.]
[그래, 어쨌든 대단하다.... 이제부턴 어떻게 할 작정이냐?]
[저희 다섯은 애당초 자포마군의 배를 빼앗아 쓸 생각으로 여기 왔습니다. 배가
있어야만이 물 위에서 황금 수송선을 공격할 수 있으니까요. 엄가놈의 패거리가
이왕부측과 쟁탈전을 벌이는 틈에, 저희는 그 황금을 채뜨려 빈민들한테 넘길
생각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테 지금 허선배님과 두 아가씨가 실종되었으니, 일단
황금 쟁탈문제는 집어치우고 우선 그 동료들의 행방부터 수색해야겠습니다. 그분들
안전이 보다 더 중대하니까요.]
[자포마군 패거리는 해질 녘에 벌써 철수했다. 황금 탈취에 나선 군웅들 역시 일승
일도까지 느닷없이 끼어들었단 소문을 듣고 뿔뿔이 흩어진 모양이더구나. 황금이
실려 있다는 역선(驛船)이 저녁 무렵에 도착한다니까. 허겁지겁 달려갈 수 밖에 더
있겠느냐? 허나, 그 역선에는 바윗덩어리만 실렸을 거야. 너희들도 일찌감치 여길
뜨는 게 좋을거다. 자 이젠 떠나자꾸나. 나도 친구를 찾아가서 실종자들의 행방을
수소문해보마.]
[어르신, 저는 내일 아침 해뜰 때까지 여기서 기다려 보겠습니다.]
[내일 아침까지라구?]
[마른 풀밭이 너무 깊어서 아침 해나 떠야 단서가 될 만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하지요. 어르신께서 친구분을 만나러 가신 동안, 저희는
여기서 좋은 소식이 올 때까지 기다리기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좋다, 그럼 네 동료들의 생김새하고 이름을 알려다오. 내일 아침에 여기서
만나기로 하되, 만약 제 때에 오지 못할 것 같으면 훗날 내가 너 있는 데로
찾아가마.]
민자건이 끼어들었다.
[시형, 우리도 여기서 해뜰 때까지 앉아 기다릴 게 아니라, 둘이서 방향을 갈라
단서될 만한 것을 찾아보기로 합시다. 시형은 남쪽을 맡고나는 북쪽으로 나갔다가
내일 새벽 이 자리에서 다시 만나는 게 어떻소?]
[그것도 좋겠군! 그럼 나는 동쪽으로 시작해서 남녘을 뒤질 테니까, 민형은
서쪽으로부터....]
[그래요, 서쪽은 나한테 맡기시오. 그럼 떠납시다!]
[서로 조심해서 움직입시다. 그럼 내일 새벽!]
세 사람은 각자 할 일을 맡아가지고 떠날 곳을 향해 헤어졌다. 북쪽 수색을
자청해서 맡은 민자건은 시철과 녹장옹의 모습이 보이지않게 되자, 돌연 발걸음에
험을 주어 빠른 속력으로 내닫기 시작했다. 그 동작은 결코 수색하려는 움직임이
아니었다. 그는 상석종산(上石鍾山) 동편 기슭에 접근하자, 거침없이 어느 과수원
나무숲을 곧바로 뚫고 들어갔다.
[부우엉....! 부우엉....!]
민자건이 숲속에 들어선 직후, 칠흑같은 어둠 속에서 돌인 귀곡성(鬼哭聲)과 같이
음침한 부엉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부엉! 부엉!....!]
민자건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똑같은 부엉이 울음으로 짧게 응답했다. 그가
도착한 곳은 토담으로 둘러싸인 초가집이었다. 집 모퉁이에는 잠복초소가 설치되어
보초 두 명이 엎드려 있었다. 그러나, 민자건이 다가섰어도 잠복조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막으려는 기척도 보이지 않았다. 민자건은 서슴치 않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불빛 한 점없이 먹물을 뿌린 듯 다섯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캄캄
절벽의 암흑 천지였으나 그는 사람이 있는가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이윽고 그의
입에서는 혼자 중얼거리듯 촉박한 말이 줄줄 흘러나왔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속히 전달할 것! 팔호(八虎)와 칠표(七彪), 그리고
사대금강은 그 여우놈과 녹장옹의 손에 전멸당했음. 아깝게도 구유귀왕은 놓쳤음.
신속히 병력을 증파해서 구유귀왕과 녹장옹을 잡아 죽일 것! 여우놈은 나한테
맡기고 신경쓸 필요 없음. 그 여우놈의 무공 수준은 도저히 헤아릴 수 없음. 만약
지금 이후로 계속 차단습격할 패거리를 출동시킬 경우에는, 절대로 변변치 못한
인물을 파견하지 말 것. 현재 상황으로는 우리측에 그 여우놈을 처치할 인물은
없다고 판단됨. 무력보다는 계략을 써서 없애는 것이 바람직함. 현재 수정되는
계획과 진척중인 사항을 내게 조속히 알려주기 바람. 여우놈은 내일 아침까지
난장강 공동묘지에 그대로 있을 예정임. 새벽 이전에 진행상황과 전체 계획을
나한테 통보해 주어야 할 것임. 그럴 시간적 여유가 없으면 지금 당장 나를
본거지로 안내할 것.... 이상이다!]
그러자, 어둠이 비로소 응답했다. 아주 늙은 목소리였다.
[우리 패는 현재 이 호구 지역에 없습니다....]
어둠은 잠깐 머뭇거리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그 여우놈이 그토록 매서운 솜씨를 지닌 줄 모르고.... 칠표, 팔호, 사대금강을
매복시켰습니다. 그 정도만 가지고도 충분히 처치할 수 있으려니 싶었는데.... 또
실패로군요. 방금 지시하신 말씀, 곧바로 위에 보고를 올리겠습니다. 여기서
쉬시면서 다음 소식을 기다리도록 하시지요.]
[그게 무슨 말인가? 우리 패가 이 호구 지역에 하나도 없다니...., 그렇다면 일승
일도가 여기 나타났단 말인가....?]
[일승 일도가 끼어든 것도 우리 거점을 이동하게 된 원인 중에 하나입니다만,
문제는 혼강호사측에서 벌어졌습니다.]
[혼강호사측이라....? 그게 어때서?]
[그 놈은 여우새끼한테 철령전을 한 대 얻어맞고서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일껏 힘들여 꾸민 계략이 외부에 누설된 데다가 중상까지 입고,
모처럼 끌어들여 놓은 지원세력마저 쁠뿔이 흩어졌지 않습니까? 자기 부하들의
힘만으로는 벅차게 되자, 그놈은 당초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그 삽혈맹 대회가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 군웅들과 손을 맞잡을 생각은 단념하지 않고 노획물을
공평하게 나누자는 조건으로 몇몇 패거리를 규합해가지고 진짜 황금 수송선의
비밀을 알려준겁니다. 현재, 혼강호사측은 선박을 몽땅 동원해서 미끼로 던진
역선(驛船)이 도착하자마자 돛을 올리고 진짜 황금 수송선이 떠 있는 곳으로
항행하는 중입니다. 사테가 이렇게 바뀌니, 우리 패도 놈들의 뒤를 부랴부랴
따라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지요.]
[우리가 그 따위 수적 패거리의 얼토당토 않는 소리를 믿어서야 될 법이나
하겠는가! 너무 경솔하게 움직이는 것 같군.]
[상황이 너무나 돌발적이라서 제지할 틈도 없었습니다.]
[이용가치도 없는데, 왜 죽여버리지 않는 게야?]
[여우놈한테 부상을 입은 뒤로 경계 감시가 아주 심해졌습니다. 또 그런 일이
돌발하리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가까이 다가설 수도 없었습지요.
그놈은 출동하기 직전에야 그 중요한 얘기를 꺼내놓았습니다. 그러니 손쓸 만한
기회를 도저히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난 자네들 쪽 일을 알고 싶어! 그러니 다음 지시가 내려오거든 잊지말고 속히
전령을 보내 알려주도록! 알겠나? 지금 이후로 나는 난장강 서북쪽 모퉁이, 제 5
잠복초소에서 자네 소식을 기다리겠다. 날이 밝기전까지 연락이 없을 때는 이동할
테니까,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날쫓아와 소식을 전하도록 하라구! 단단히 기억해
둬, 내 말 알아듣겠나?]
[잘 알아 모시겠습니다!]
얼마 후, 민자건은 초가집을 나와 서남방으로 출발했다. 망망한 어둠이 그의
모습을 가리워 주었다. 하릇밤을 꼬박 허탕친 시철은 불안감에 조바심을 못 견뎌
오장육부가 활활 불타올랐다. 동틀 무렵, 그는 발광 일보 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두 아가씨가 사마외도의 손아귀에 떨어졌다면 무사할 리가 있느냔 말이다. 생각만
해도 몸서리가 처질 노릇이다. 그는 자신이 아직껏 미쳐서 죽지 않은 게 이상할
정도였다. 공동묘지 현장에 다시 돌아와보니, 민자건과 녹장옹은 아직도 온 기척이
없다. 풀밭에 핏자국만 뚝뚝 떨어져 있고, 시체들은 하나같이 뻣벗하게 굳어져
있을 뿐이었다. 약속한 동료들마저 보이지 않으니, 낙심천만한 마음에 실망까지
겹쳐 우러났다. 그런테, 이제 다시 보니 거친 풀섶이 온통 누군가의 발자국에 마구
짓밟혀 단서가 될 만한 것은 모조리 흩어져 버리고 없지 않은가! 어떤 놈이 사람
미치는 꼴을 보려고 현장을 깨끗이 청소해 버린 것이다.
그의 머리 속에는 새삼스레 의문이 뭉게뭉게 일기 시작했다.
'이건 어젯밤에 없던 발자국들이다! 풀섶이 이토록 짓밟히지는 않았어.... 우리가
수색하러 떠난 사이에 또 다른 불청객들이, 그것도 한둘이 아니라 떼거리로
몰려왔다 간 모양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난데없이 이토록 많은 발자취가 생겨날 리
있는가....? 고이한 일이로구나!'
못 견딜 정도로 초조한 가운데서도, 그는 냉정을 되찾아 상황을 추리해 보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이든지 해야만 미쳐 죽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이윽고 서편 관목
숲속에 민자건의 모습이 홀쩍 나타났다. 민자건은 멀리서부터 목청껏 외쳐
물어왔다.
[시형! 뭣 좀 찾아내셨소?]
시철은 그만 얼음물을 한 사발 들이 킨 느낌이 들었다. 이쪽은 별무소득이라도
저편에 요행을 바라고 있는 판인데, 민자건의 말투를 들으니 빈손이기는
마찬가지인 게 분명했다. 결국 하룻밤 내내 뛴 것이 헛고생만 한 셈이다. 시철은
맥빠진 소리로 대꾸했다.
[없소! 아무 것도.... 한데, 어젯밤 우리가 떠난 뒤에 웬 놈들이 여길 마구 짓밟고
지나갔소.]
[아니, 뭐라구?]
민자건이 화들짝 놀라 더욱 빨리 달려왔다. 얼굴에는 수심이 태산처럼 뒤덮였고,
목청마저 조바심에 갈라져 나왔다.
[그럼, 한선배님은....?]
[아직 안 오셨소.]
[시형, 우리 이러고만 있을 게 아니라, 어젯밤에 왔던 길을 따라서 다시
뒤져봅시다.]
두 사람은 넋이 빠진 걸음걸이로 어젯밤 왔던 길을 되밟아 가면서 발자취를 세밀히
살피기 시작했다. 짓밟혀 넘어진 풀초리는 그리 많지않아, 남겨진 흔적도 가까스로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앞장 서서 달리던 민자건이 공동묘지 외곽을 둘러싼
토담 근처에 이르더니, 돌연 눈빛에 번쩍하고 생기가 돌았다. 그는 앞쪽 관목 숲을
가리켜 보이면서 크게 외쳤다.
[시형, 저걸 좀 봐요! 저게 뭘까?]
나뭇가지 위에 청색 힝겊 두 조각이 아침 바람결에 펄럭펄럭 휘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하얀 종이 한 장이 달라붙어 있는 것도 어렴풋이 보였다. 시철은 한 달음에
쏜살같이 뛰어갔다. 나무 아래 도달한 그는 허겁지겁 손을 뻗어 그 헝겊조각을
떼어내다가는 자기도 모르게 긴장된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이건....! 두 아가씨 옷자락에서 찢어낸 거야....!]
[그 종잇장에 뭐라고 쓰였나 봅시다!]
헐레벌떡 뒤따라 달려은 민자건이 외쳤다.
종이에 쓰인 것은 해서체(解書體)로 단 석 줄이었다.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나려 면 속히 홍교(虹橋)로 가거라. 무지개 다리아래 배가
정박해 있을 터, 해가 뜨면 그 배는 딴 곳으로 떠날 것이니, 늦지 않게 가야
소원을 이를 수 있으리라!>
[이거.... 어떻게 하지?]
민자건이 두려운 기색으로 물었다. 시철의 얼굴 근육은 돌덩어리처럼 굳어졌다.
악문 입술, 호랑이 눈망울에는 노여움과 살기가 용솟음쳐 나왔다. 그는 종잇장을
접어서 품속에 간직한 다음에 한 마디로 결단을 내렸다.
[갑시다! 설사 그것이 도산검해(刀山劒海), 불타는 지옥이라 하더라도 내 모조리
훌떡 뒤집어 놓고야 말 테니까!]
[그럼 어쩐다....?]
[민형, 가든 말든 뜻대로 하구료. 하지만 나는 꼭 가봐야 되겠소!]
[무슨 말씀! 내 안 갈 리가 있겠소?]
[그럼 떠납시다!]
[한선배님이 오실 텐데, 안 기다릴 거요?]
[시간이 없소. 마냥 기다리다가는 때를 놓칠 거요. 몇 마디 적어서 남겨놓고
떠납시다.]
시철은 고집스럽게 대꾸하더니, 그 길로 다시 돌아서서 녹장옹과 처음 만났던
무덤까지 달려가더니, 방금 그 종잇장을 봉분 위에 돌멩이로 눌러놓고 비석에는 단
한마디를 새겼다.
<저는 홍교로 갑니다!>
두 사람이 허겁지겁 홍교 방면으로 떠난 지 얼마 안 있어, 일별정 근처 수풀
속에서 검정 옷을 걸친 사나이 두 명이 뛰어나왔다. 그들은 봉분 위에 눌러놓았던
종잇장을 회수하고 비석에 쓰인 칼자국 내용이 안 보이도록 문질러 없앤 다음,
동북쪽을 향해 손을 휘저었다.
[손형과 왕형 둘이서 한가 늙은이를 처치할 수 있을까 모르겠어. 빨리 그리로
가자구!]
사나이 중 하나가 근심스런 표정으로 동료에게 말을 건넸다.
[여보게, 이 비석 글자를 지워버리기만 할 게 아니라, 그 늙다리를 노가도(勞家渡)
나루터로 유인해서 죽이는 것이 어떨까?]
동료가 의견을 내자, 사나이는 당장 고개를 끄덕였다.
[지당하신 말씀! 그리로 유인해다가 늙은 놈의 닭껍질을 벗겨 죽이세!]
그는 칼을 뽑아 비석에 다시 글을 새겨놓았다.
<저는 남쪽 노가도 나루터로 갑니다. 어르신께서 속히 오셔 지원해주십쇼.>
노가도는 호구현성 남쪽 10리 지점에 있는 나루터다. 북안에 나무교량이 하나 걸쳐
있기는 하지만, 봄여름철에 장마가 져서 물이 넘칠때는 나릇배를 타고 건너다녀야
하는 곳이다. 홍교는 성 남대문 바깥 홍교항(虹橋港)을 가리킨다. 큼지막한
초석(礎石)을 세우고 그 위에 널판을 깔아 만든 다리가 걸터앉았다.
시철과 민자건이 홍교항에 다다랐을 때는 벌써 동녘 하늘에 햇무리가 떠오르고
있었다. 이들은 교각 난간 아래 작은 외돛단배 한 척이 슬금슬금 선창 밖으로
벗어나는 것을 발견했다. 갑판 위에 뱃군 넷이서 길다란 장대로 물밑을 눌러 배를
출항시키고 있는 것이다. 시철은 헐레벌떡 부두 아래로 달려 내려가면서 큰소리로
외쳐 불렀다.
[여보, 선장! 그 배 이리로 몰고 오시오!]
뱃군 하나가 삿대질을 멈추고서 맞고함을 질렀다.
[용건이 뭔가?]
[당신네와 약속한 사람이오!]
[성씨는?]
[시씨, 그리고 민씨요!]
[아침 해가 벌써 닷 발이나 떴소. 당신네는 한 발 늦었군!]
[보시오, 동녘에는 햇무리밖에 더 있소? 해는 아직도 머리를 안 내밀었단 말이오!]
[늦었어, 때가 지났는 걸?]
[너무 각박하구료! 도대체 이럴 수가 있소?]
돛단배는 이미 선창가에서 8,9장이나 멀리 떨어졌다. 그제서야 뱃군들은 삿대질을
그만두고 돛을 올릴 준비에 들어갔다. 시철이 나무라자, 그 뱃군은 목젖을
들썩거려가며 껄껄 대고 웃는다.
[으하하핫....! 으하하핫! 이 어르신께선 명령대로 받들어 시행할 줄 밖에 모르는
위인이야. 날더러 각박하다니? 이것봐, 그 한 발 늦은 게 무슨 결과를 가져오는지 알기나 하는가? 평생토록 한을 품게된다 이 말씀일세! 으하하핫....]
내공력이 얼마나 세찬 인물인지, 웃음소리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다. 미친 웃음소리 가운데, 돛대 위에는 황갈색의 돛폭이 오르면서 바람을 맞아 활짝 펼쳐지기 시작한다. 이어서 뱃머리가 빙그르 돌더니, 돛단배는 물 위에 뜬 고니새처럼 두둥실 떠서 항구 바깥을 향해 준마가 달리듯 빠른 속도로 미끄러져 나갔다. 하늘에는 새털구름이 한 겹 얇게 깔렸는데, 아침 햇살이 황금빛을 쏟아 비치기 시작하면서 구름층을 뚫고 나와 금빛 찬란한 무지개 다리를 수놓았다. 이윽고 아침해가 불끈 떠올랐다. 시철은 호수 기슭을 따라 미친 듯이 돛단배를 쫓아 달리면서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당신네 정체가 뭐요? 어디서 왔소? 근거지가 어디요? 제발 알려주시오!]
[정체같은 거 묻지 말게나! 그 무지개 다리 위에서 기다리면 누군가 접선하러 오는 사람이 있을 걸세. 그 사람까지 놓치면 끝장인 줄이나 알라구! 하하하하....!]
그러나 일껏 잡은 실마리를 그냥 놓쳐보낼소냐? 시철은 혼신의 힘을 다 쏟아 물가를 따라서 쫓아 내려갔다. 포구(浦口)를 벗어난 배는 외항(外港)의 너른 수역으로 접어들더니 황포돛이 바람을 잔뜩 머금고 남쪽상류를 향해 쏜살같이 달리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항로에 들어선 것이다. 시철과 민자건은 수면에 접한 호안(湖岸)을 따라 급박하게 뒤쫓았다. 눈이 뒤집힐 정도로 황급한 이들에게는 길같은 게 따로 보일 리가 없다. 허나, 아무리 죽을 힘을 다해 뒤쫓았지만 안타깝게도 배는 점점 눈길을 벗어나 아스라히 멀어져 가기만 한다.
갑판 위에 선 자들의 모습이 가물가물하게 보일 지경이 되자, 시철은 절망한
나머지 하마터면 그 자리에 털석 주저앉을 뻔했다. 이 때, 석문산(石問山)
아래쪽에서 또 한척의 범선(帆船)이 날렵한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외돛을 단 고깃배였다. 뱃머리를 둔 방향으로 보건대, 이 배도 석종산으로 뜨는 게 분명하다.
시철은 반가운 나머지 두 손을 마구 휘저으면서 미친 듯이 소리쳐 불렀다.
[여보--! 사공! --그 배 좀 이리 돌려줘요!]
팽팽하니 부푼 돛폭이 거짓말처럼 단번에 빙그르 돌았다. 뱃머리도 방향을 틀었다.
범선은 시철이 서 있는 기슭으로 미끄러지듯 달려오더니 5,6장 거리를 두고서 돛폭을 주르르 내리고 속력을 줄였다. 갑판 위에는 세 사람, 그 중 키잡이는 반 백의 나이에 몸집이 왜소한 사나이였고, 나머지 두 사람은 40줄에 접어든 중년이다. 모두들 뱃군답게 몸이 다부지고 살갗도 건장한 구리빛이다. 네모꼴의 너부죽한 얼굴 윤곽, 부리부리한 두 눈망울에는 재치가 번뜩이고 민첩성이 돋보였다. 기묘하게도 이들 두 사람은 얼굴 모습이나 몸매가 판에 박아놓은 듯 똑같아, 얼핏 보아서는 누가 누군지 분별하기 어려울 만큼 닮았다. 그렇다면 쌍둥이 형제임에 틀림없다.
장대를 한 개씩 잡고 배를 기슭으로 대는 동작마저도 기가 막히게 율동을 맞추어 한결 맵시 있었지만, 시철의 입장에선 그런 걸 감상하고 있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이윽고 배는 물가에 다다랐다.
[손님, 무슨 일로 부르셨소?]
키잡이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시철은 두 주먹 맞잡아 인사를 올리면서 다급하게 부탁을 했다.
[제게 급한 일이 생겼습니다. 아저씨께서 편의 좀 봐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제 성은 시(柴)갑니다. 절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무슨 일인데 그러시나....?]
시철은 손을 들어 1리 밖에 가물가물 떠가는 범선을 가리켰다.
[저기 가는 쾌선을 쫓아가야만 합니다. 아저씨, 은화 20냥을 드릴테니 절
도와주십쇼! 제발 부탁입니다.]
[저 배를 쫓아가서 뭘 하려구?]
[거기 제 친구 둘이 타고 있습니다.]
민자건이 불쑥 대답을 채뜨렸다. 그러나 시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그 대답을 수정했다.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저 배는 저희 원수가타고 있습니다. 어쩌면 물 위에서 영업하는 수상 강도일지도 모릅니다. 굉장히 위험한 놈들이지요. 그러니까 아저씨께선 저희를 그 배 곁에까지만 데려다주시고 곧바로 떨어져서 떠나야 합니다. 저희들 때문에 위험스런 일을 당하여선 안되니까요. 세 분 아저씨를 그런 위험한 일에 말려들게 하고싶지는 않습니다. 이런 사정 말씀을 다드렸으니, 저희를 태우고 가시든지 안 가시든 아저씨께서 결정만 하시면 됩니다.]
가만 듣고만 있던 키잡이가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아주 솔직한 분이로군그래! 내 가슴이 탁 트이는 걸? 아주 마음에 들었어! 됐소, 잔말은 그만하고 어서 배에 오르시구료!]
[고맙습니다, 아저씨!]
두 사람이 단숨에 뛰어오르자, 키잡이는 손을 번쩍 휘저었다. 쌍둥이 뱃군의
삿대질 한 번에 배는 가볍게 물가를 벗어났다. 이어서 돛폭이 오르고 바람결에 팽팽하게 부풀었다. 배는 보이지 않는 힘의 손길에 이끌려 시위를 벗어난 화살처럼 물결을 부서뜨려가며 힘차게 달리기 시작했다. 시철은 고물에 자리잡고 앉아 키잡이를 향해 빙긋이 미소를 건넸다.
[아저씨 밝은 눈빛하며 손놀림 몸놀리시는 거동을 뵙건대, 정(精), 은(隱), 경(勁), 정(靜)을 모두 갖추셨군요. 필시 고도의 내가연기(內家練氣)를 익히신 분인 듯 한데, 어떻습니까, 제가 잘못 짚은 건 아니겠지요? 이 후배는 시중평이라고 합니다. 여기 이 친구분은 민자건입니다. 아저씨의 함자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키잡이는 너털웃음을 섞어 아주 속시원하게 대답한다.
[하하하, 자네 정말 눈썰미가 대단하군 그래! 아무리 감추려고 해도 자네 눈길은 못 벗어나겠어. 보잘 것 없는 이름이지만 실토를 하지. 나금전(羅錦全)일세!]
대답을 듣고 정작 놀란 사람은 시철이 아니라 민자건이었다. 그는 화들짝 놀라 얼굴빛마저 싹 변하더니, 의아스레 혼잣말로 중얼거린다.
[사천성 성도부.... 그 성도부 일대를 주름잡는 수상(水上)의 영웅도 나씨성을
가졌다던테.... 물질하는 솜씨가 천하무적이라고 소문이 자자한 인물,
민강묵교(泯江墨蛟), 그 사람이.... 바로....?]
그는 말끝을 다 맺지 못하고 키잡이를 똑바로 주시했다. 방금 말한 인물이 바로 당신이냐, 묻는 눈초리였다. 키잡이는 한 손으로 짧은 턱수염을 쓰다듬어 내리면서 빙그레 웃는다.
[하하, 제대로 보셨소! 그게 바로 나요. 건달패의 별명이 지나치게 알려진
모양이구료. 노형한테 웃음거리나 안되었으면 좋겠소, 하하하!]
그제서야 시철도 깜짝 놀라 일어서서 다시 허리굽혀 정중한 인사를올렸다.
[아이구, 민강묵교 대협이셨군요! 몰라뵙고 실례를 했습니다.]
민자건은 인사치레 따원 생각도 없는지, 이번에는 뱃머리쪽을 가리키고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저 두 형씨는 가릉쌍웅(嘉陵雙雄), 가릉강 일대의 여씨쌍걸(余氏雙傑)이시겠군요?]
[하하하! 노형께서 이토록 견문이 박식한 걸 보니 강호상을 오래 누비고 다닌 호걸임에 분명하구료. 사천성 양자강 상류 지역에 와본 분이 아니고서는
가릉쌍웅의 이름과 별호를 알지 못할 텐데 말씀이야. 노형, 언제 사천땅에 오신 적이 있소?]
[그저 남이 하는 말을 전해 들었을 뿐, 가본 적은 없습니다.]
[소문을 들으셨다....? 그럼 강호인물 가운데 노형 친구가 굉장히 많은
모양이구료.]
[그렇게 썩 많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강호를 돌아다니다 보면 친구가 많을수록 유리하지요. 사해지내(四海之內) 모든 사람이 형제가 될 수 있지 않습니까? 한데, 나대협께서 이 머나먼 파양호까지 왕림하시다니, 무슨 일로 행차하셨는지 모르겠습니다그려.]
[노형은 무슨 용건으로 이 파양호엘 오셨소?]
[이왕부의 황금 5만 냥....! 하지만 나대협께서는 무림의 명문 아미파(峨嵋派)
출신으로 의로운 협객이신 줄 알고 있는데, 그런 분이 황금 보물 따위에 뜻을 두고 오신 건 아니겠습지요?]
[하하, 그 말씀 옳소! 나는 황금 보물 따원 흥미가 없소이다. 모처럼 견식을 넓힐 기회가 왔구나 싶어 찾아온 거요. 우리 아미 문하제자들은 밥빌어 먹는 거지떼도 아니고 도둑 강도 노릇을 할 만한 재능도 못되고, 피비린내나는 돈을 긁어모으거나 제 양심을 저버리고 살인, 방화, 약탈하는 무리측에도 끼어들지 못하니까 말이오, 하하하!]
시철이 그 말을 듣더니 고소를 머금고서 되받아 농쳤다.
[하하! 나대협 그 말씀 천금보다 무겁습니다. 저는 황금에 눈독을 들이기는
했으나, 뜻이 꼭 그런 데만 있는 게 아니올시다. 제 생각으로는....]
민강묵교가 얼른 웃음으로 그 말을 중도 차단해버렸다.
[으핫핫! 시씨 아우님, 내 말 언짢게 여기지 마시오. 그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씨부렁거린 거지, 별 뜻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요. 신경쓸거 하나도 없어요.!]
조수는 그리 급하게 흐르지 않았으나 북풍이 사뭇 세차게 불어, 돛폭이 거의
찢어질 정도로 바람을 잔뜩 안았으므로 배는 흐름을 거슬러가며 쏜살같이 미끄러져 나아갔다. 이런 저런 얘기를 주고받는 동안, 추격거리는 벌써 4,5리가 넘고, 쌍방의 간격도 1리 남짓에서 절반으로 좁혀 들었다. 앞쪽 범선은 이보다 약간 크고 넓었으나, 민강묵교처럼 조타술(操舵術)이 매끄럽지 못해 경쾌한 느낌이 떨어졌다. 그것은 물살을 가르고 나아가는 뱃전을 보더라도 뚜렷하게 차이가 났다.
이윽고 쌍방의 거리가 20장 안으로 줄어들자, 민강묵교는 벌떡 일어나더니
한다리로 키를 고정시키고서 저고리와 바지를 벗었다. 그속에는 언제부터 입고 있었는지 기름먹인 검정 비단의 잠수복이 나타났다. 머리에 검정 두건을
뒤집어쓰자, 민강묵교는 별명 그대로 옻칠을 한 검정 이무기 한 마리가 되었다.
그는 갑판의 널짝을 걷어 올리고 수중전(水中戰) 병기 용수구(龍鬚鉤) 한 자루를 꺼내 등에다 비끄러매고나서 통쾌한 듯 껄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여보게, 시아우. 만약 물속에 뛰어들 일이 생기거들랑 선창 안에 잠수복 몇 벌 더 준비해 두었으니까, 그걸 입도록 하게! 만사는 불여튼튼이라니까. 핫핫핫!]
시철도 얼굴 표정을 허물어뜨리고 마주 웃음을 터뜨렸다.
[잘 봐 두십쇼! 이래뵈도 제 수영솜씨는 알아주셔야 할 겁니다. 세 분 앞에 못난 꼬락서니는 안 보일 테니까요.]
시철의 호언장담을 듣는 척 마는 척, 민자건은 대경실색을 해가지고 멍청한
표정으로 민강묵교쪽을 바라보았다.
[이런 맙소사....! 나대협께선 진작부터 준비를 하고 오셨구료! 그런데도 황금선은....]
[하하! 이 배는 사천땅에서부터 양자강 줄기를 타고 끌어온 거요. 또 호신용
장비는 내 몸에서 한시도 떨어진 적이 없으니 새삼 놀랄 일도 아니지! 내가 뭘 준비했다고 호들갑이신가? 저 앞에 도망치는 배에 누가 탔는지 알기나 하시오? 대명이 쟁쟁하신 해적 요해야차(鬧海夜叉) 학천민( =赤+耶-耳,天民)이란 말씀이지! 두 분이 물속에 뛰어들지 않고서는 저 해적 두목을 잡을 생각일랑 아예 말구료!]
뱃머리에 서 있던 여씨 쌍걸도 어느 틈엔가 잠수복으로 갈아입었다. 맏이
여노대(余路大)는 선창 뚜껑을 열어 제치고 큼지막한 강궁(强弓)한 자루와
화살통을 꺼내더니, 시철에게 던져주면서 소리쳤다.
[시아우님! 이건 당신 드리겠소. 기막힌 솜씨나 보여주시구료. 우선 저놈의
돛대부터 쏘아 꺾어놓을 수 있겠소?]
이번 만큼은 시철도 깜짝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아니, 여대협께서 제가 활을 잘 쏜다는 걸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하! 무예를 닦는 사람이 활쏘고 말달리기를 못한대서야 어디 말이나 되는
일이오? 그 정도 수련은 기본이시겠지!]
여노대는 호방하게 대꾸하더니, 다시 말을 잇는다.
[물 위는 시아우 책임이오. 물 밑은 우리 형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하하하! 오늘 이 강물의 미꾸라지 영웅하고 바다의 해적 나으리와 어느 편 솜씨가 뛰어난지 잘 봐 두시구료! 강한 놈은 살고 약한 놈은 죽어 없어질 테니 말이오.]
[해적이라면 수영솜씨가 뛰어날 텐데....]
[핫핫핫! 헤엄이나 자맥질, 이 두 가지는 바다에서보다 강물이 더 어려운
법이지요. 믿지 못하시겠거든 눈이나 잘 닦아 놓고 기다려 보시구료.]
시철은 두말 않고 활을 집어들어 시윗줄을 당겨본다. 활의 힘은 삼석궁(三石弓), 게다가 보기 드문 상등품이란 걸 확인하자, 그는 흡족한 미소를 띠고서 화살통을 어깨에 멘 다음, 화살 한 대를 뽑아 잡았다.
[나대협, 저는 한두 놈을 생포하고 싶습니다.]
[그래? 핫핫핫! 아우님이 죽일 생각을 안 먹는 바에야 저 친구들 가운데 제 목숨 제 손으로 끊으면 혹 모를까, 죽을 놈은 하나도 없을테니 마음 푹 놓게!]
민강묵교는 호걸스러운 웃음을 터뜨리면서 시원시원하게 대답한다. 바람이 점점 세차게 불었다. 속력을 낼수록 배의 요동질도 한결 심해졌다. 더구나 쌍방의 거리는 20장 남짓, 아직 활을 쏘기에는 사거리(射距離)가 좀 먼 편이다. 그러나 시철은 자신만만, 활시위를 가득 당겨 표적을 겨누었다. 요동이 심하고 바람도 거센 만큼, 표적은 가늠에서 오르락내리락 좀처럼 포착되지 않는다. 민강묵교와 여씨쌍걸의 눈이 장난기어린 웃음을 머금은 채 시철의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다.
[윙!]
시윗줄이 울리는 소리, 화살 한 대가 꼬리깃을 부르르 떨어가며 힘차게 쏘아져 나갔다. 이어서 저릿저릿한 파공음이 화살을 따라 잡으려고 기를 써가며
울려퍼졌다. 선상의 눈길이 그 뒤를 쫓았다. 해적 학천민의 배는 여전히 앞으로 앞으로 전속력을 내어 질주하고 있다. 갑자기 돛폭이 사납게 펄럭이면서 바람을 잃고 뚝 떨어지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배가 기우뚱하다가 무섭게 흔들리더니 측현(側舷) 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난데없이 터진 변고에, 갑판 위 사람들은 일대 혼란을 일으켜, 우왕좌왕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기 시작했다.
[야아....!]
여씨 쌍걸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이런, 돛줄을 끊다니....! 신궁의 솜씨로다. 정말 대단해! 시아우님, 이번에는
키잡이요!]
민강묵교도 혀를 내두르며 손뻑까지 철썩 철썩 치더니, 다음 목표를 지시해
주었다.
[위잉!]
활시위가 또 한 차례 울렸다. 화살대는 <쏴아! -->하고 바람을 가르면서
무지개처럼 날아갔다. 목표는 뱃고물의 키잡이....
민강묵교는 오른손으로 돛줄을 움켜잡고 왼손 하나만으로 키를 조종하면서
익숙하게 배를 몰아나갔다. 배는 펄펄 뛰는 생선처럼 파도를 넘나들고 가르면서 매끄럽게 물 위로 날듯이 달렸다.
[으악....!]
앞쪽배에서 느닷없는 비명이 처참하게 울리더니, 조타수(操舵手)가 갑판 아래로 푹 고꾸라졌다. 키잡이를 놓친 배는 즉시 방향을 잃고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선상에는 모두 여섯 명, 키잡이가 거꾸러지고 통제력을 잃은 배가 제 꼬리를 물 듯 그 자리에서 맴돌자, 네 명이 황급히 노에 매달려 중심을 잡느라 애를 쓰기 시작했다. 뒤미처 고물쪽 선실 문이 활짝 열리더니, 푸른 빛 잠수복을 걸친 사내가 뛰쳐나와 키잡이를 부축해 내려놓고 키자루를 잡았다. 밧줄이 끊겨 떨어진 돛폭이선실 지붕 위에 가로뉜 채 강풍을 받아 이리저리 마구 펄럭이고 그 기세에 밀려 뱃전도 정신 못 차리게 요동을 쳤다. 뱃전이 기울 때마다 인정사정없이 들이닥친파도가 배 안의 사람들을 흠뻑 뒤집어 씌워 물에 빠진 생쥐꼴을 만들어버렸다.
시철이 탄 배는 우측방으로부터 10여 장이나 추월해 나갔다. 그는 세 번째
낭아전(狼牙箭)을 시윗줄에 먹여 당기면서 벼락치듯 대갈일성을 터뜨렸다.
[노질을 멈추고 항복하라! 그렇지 않으면 이 화살 아래 사정을 두지않을 테다! 항복하라!]
수상전 병기로는 활이 으뜸이다. 해적 학천민의 배에는 유감스럽게도 활과 화살이 없었다. 그렇다면 철두철미 얻어맞는 수 밖에 딴 도리가 없다.
[쌔 액! ---]
지근거리에서 파공음이 바람을 가르면서 울렸다. 죽어라고 애써 노를 젓던 사내가 절통한 비명을 지르더니, 노를 떨어뜨리고 벌렁 나자빠졌다. 게다가 운수 나쁘게도 그 순간 뱃전이 또 한 바퀴 빙그르 도는 바람에, 화살을 맞은 자는 의지할 데를 잃고 그대로 허공으로 날으려다가는 <풍덩!>하고 물 속에 빠져버렸다.
[휘리릿!]
키잡이를 구하려던 사나이가 뜻모를 휘파람 암호를 한 마디 터뜨리더니, 몸을 솟구쳐 그대로 물 속에 텀벙 뛰어들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여씨 쌍걸, 형제가 서로 마주 보며 광소를 터뜨린다.
[으하하핫....! 으하하핫....!]
웃음소리가 미처 다끝나기도 전이었다. 쌍둥이 형제는 선 자세 그대로 벌렁
곤두박질쳐 물속으로 뛰어든다.
[텀벙, 텀벙....!]
그 때에는 시철의 네 번째 낭아전이 시읫줄을 떠나고 있었다. 표적은 이제 막 뱃머리에서 물로 뛰어들고 있던 세 사나이, 그 가운데 한 명은 끝내 한 발 늦었다.
착수(着水) 동작이 허공에서 마무리되기 직전, 그보다 먼저 들이닥친 화살은
인정사정없이 그 넙적다리를 꿰뚫어 버렸던 것이다.
[으와앗! ---]
[풍덩!]
비명소리는 중도에서 몸뚱이와 더불어 물속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저런....! 세 놈을 놓쳤군요.]
시철이 아까운 듯 중얼거리자, 민강묵교는 껄껄껄 웃었다.
[염려말게. 단 한 놈도 못 도망칠 테니까! 으핫핫....!]
말꼬리가 떨어지기도 전에, 민강묵교의 시커먼 몸뚱이도 풍덩! 어수선한 물보라를 일으키며 수면 아래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키는 어느틈엔가 돛줄로 단단히 얽어 고정시켜 놓고 가버린 것이다. 이제 배 위에 남은 것은 시철과 민자건 두 사람뿐이었다. 뱃머리는 남쪽으로 항행을 계속하고 있다. 시철은 노젓기엔 익숙하지만 돛단배는 조종할 줄 모른다. 이렇듯 너른 물 위에서 범선을 만져본 적도 없거니와 키를 어떻게 놓아야 뱃머리가 어느 방향으로 돌아가는지조차깜깜 절벽이라, 수상전(水上戰)을 책임지라는 여노대의 말에 어리둥절, 꿀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돛대나 키를 일체 건드리지 않고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전부다.
어느덧 수면에는 크고 작은 선박이 적지 않게 떠 있었다. 시철은 별로 주의깊게 살피지 않았으나, 민자건은 흘낏 좌우를 둘러보다가, 색다른 배 두 척을 발견하고서 얼른 외면해 비렸다. 그의 눈길이 닿은 곳에는 버들잎처럼 날렵하게 생긴 쾌속선 두 척이 바야흐로 물살을 가르며 좌우 양편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소형 쾌속정이면서도 긴 노가 여덟 개, 그리고 노수(櫓手) 여덟 명과 잠수복차림을 한 사내가 셋씩 타고 있다.
시철의 눈은 전방 수면 위를 훑고 있었다. 물속에서의 격투가 언제 수면 위로 옮겨 벌어질지 모르기 때문에 주의력은 온통 수면 위아래에 집중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수면의 파도가 너무 사납게 출렁거리고 있기 때문에, 어쩌다가 물거품 사이로 사람의 머리통이 불끈 솟구쳤다가는 눈 깜짝할 순간에 사라지기만 한 터라 결투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도대체 알 방법이 없었다. 배는 낯선 손님 둘만 실은 채 여전히 남쪽으로 쏜살같이 흘러갔다. 뱃머리에 우뚝 선 민자건의 열굴은 수중전 따원 전혀 흥미도 없는지 그저 무표정 일색이다. 민강묵교의 배는 주인이 잠수한 위치에서 한참이나 멀리 흘러내려 온 셈이다. 그 대신 키와 돛을 잃은 해적 학천민의 배는 아직도 원위치 부근에서 기우뚱기우뚱 흔들리며 이동하고 있었다.
조류(潮流)는 배를 북쪽으로 몰고가려 하는데, 맞바람결이 남쪽으로 불기 때문에 옮겨가는 속도가 사뭇 느릿느릿하다. 이따금씩 돌풍이 거세게 불 때마다, 학천민의 배는 풍랑에 뒤집힐 듯 요동질을 치고 뱃전에 파도가 넘쳐들었다.
버들잎 모양의 쾌속선은 야생마가 치닫듯 거침없이 파도를 부서뜨리며 접근해왔다.
여덟 자루의 긴 노가 물살을 가르며 규칙적으로 활개짓을 펼칠 때마다 배는 단숨에 쓰윽 쓰윽 전진해나가는 것이다. 노수(櫓手)들의 동작이 가지런하고 힘쓰기도 고른 것으로 보건대 오랜 기간 엄격한 훈련을 받았음이 틀림없었다. 쾌속선의 목표는 민강묵교의 어선이 아닌 모양으로, 거의 본 척 만 척하고 학천민의 범선을 향해 곧바로 짓쳐나아갔다. 그것을 본 민자건이 몹시 안타까운 표정을 짓더니, 시철을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시형, 돛을 내려요! 배의 속력이 너무 빠르지 않아? 이대로 달리다간 나대협 일행이 따라잡지 못할 거야! 이래가지곤 무슨 수로 우리가 호응을 하겠소? 어서 그 돛을 내리라구!]
허나, 시철은 도리질이다.
[안돼요! 나대협은 배가 저절로 가게 내버려두었단 말이오. 그분이 다 미리
생각해서 조정해 놓았을 테니까 그분들 걱정일랑 안해도 될 것이요!]
[미리 생각해놓다니, 난그렇지 않다고 보는데? 민강묵교는 강적을 너무
앝잡아보고서 물 속에 뛰어들기만 하면 단숨에 요해야차를 잡을 수 있는 줄로 잘못 생각한 모양이야. 하지만 그 늙은 해적 자맥질 솜씨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기나 하시오? 그런 고수를 단숨에 사로잡다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노릇이지!]
[그건 민형이 잘못 생각하셨소. 나대협은 강적을 섣부르게 상대할 분이 아니오. 그 분은 진작부터 적방에 응원군이 들이닥칠 걸 미리 예상했고 우리한테 무슨 일이나 벌어지지 않을까 해서 멀찌감치 떠내려가도록 안배하신 거요. 그래야만 당신네도 마음놓고 물 속의 적을 요리할 수 있단 말이지. 저길 보라구! 저 쾌속선 두 척이 누구 편일 듯 싶소? 지금 목표를 착각해서 학천민의 배에 충돌해가고 있지만 이내 방향을 돌릴 테니 두고 보시구료.]
[아니, 저 쾌속선을 보고 계셨구료?]
[민형은 언제부터 알고 계셨소? 난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는데.]
[나는.... 나는....]
민자건은 대꾸를 못하고 말더듬이가 되어 버렸다. 이때 다행스럽게도 뱃고물쪽에서 너털웃음 소리가 들려와 그를 긍지에서 끌어내 주었다. 민강묵교의 유별난 웃음소리였다. 두 사람이 소스라쳐 뒤돌아보니, 뱃전이 철렁하고 흔들렸는가 싶었는테 어느덧 시커먼 몸뚱이가 벌써 갑판 위에 올라서고 있었다. 뒤이어서 민강묵교는 두 손을 뱃전바깥으로 내밀더니 그물질하듯 웬 물체를 힘껏 끌어당겨 올린 다음, 갑판 위에 그대로 태질을 쳐버렸다. 물에 흠삑 젖은 사람의 몸뚱이였다.
[핫핫핫! 시아우님은 과연 눈치빠른 분이로구만. 내 진짜 그런 생각으로 배를 흘려 보냈으니까. 만약 그 자리에 배를 멈춰 두었더라면저 쾌속선 두 척한테 양면으로 받혀서 침몰했을 거야! 저 쾌속 습격선이 누구 편인지 안 물어봐도 알겠지? 거기서 어물어물 물속 싸움 구경이나 할 처지가 아니었다 이 말씀이오.]
[여대협 형제분은 어디....?]
시철이 자못 근심스레 물었다.
[아직 물 밑에서 때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걱정할 것 없소. 여기 내가 잡아온 이 물텅벙이가 바로 요해야차 학천민이오. 문초할 일은 잠시 보류해두기로 하고, 먼저 저 쾌속선 두 척부터 모조리 초청해서 공짜로 용궁 나들이를 시켜쥐야겠소.]
그말에 민자건이 기급을 해가지고 민강묵교한테 매달렸다.
[저 쾌속선을.... 아니, 아니지,.... 저는 헤엄을 못 쳐요! 싸움이 벌어지는 날엔 꼼짝달싹도 못하고 저부터 용궁 나들이를 갈 형편입니다. 저놈들이 학천민의 배를 잘못 알고 지나쳤으니까, 이대로 떠나는게 좋겠습니다. 구태여 유인해다 물속에 쳐박을 게 뭐 있습니까? 무엇보다 이놈부터 심문하는 일이 더 급할 것 같습니다.]
[좀 있다가는 저놈들이 우리를 추격해올 걸세. 그 떼는 더 엄청나게 많은
적선(敵船)이 몰리겠지. 그래서야 재미적은 일이 아니겠나?]
빈정거리는 말투로 한 마디 끝내자, 민강묵교는 하늘을 우러러 길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바탕 장소성(長笑聲)이 구천(九天)에 이르도록 쩌렁쩌렁 울리는
가운데, 돛폭이 빙글 돌았다. 고정시켰던 키를 풀어 사납게 비트는 순간, 배는 잠자다가 놀란 준마처럼 소스라치게 방향을 바꾸더니, 한쪽 뱃전을 수면에 닿도록 기울인 채 쏜살같이 미끄러져나가기 시작했다. 호탕한 웃음소리가 물 위에 메아리치고 항로가 바뀌자, 과연 쾌속선 패거리들의 주목을 끌어들이고도 남을 만큼 효과가 있었다. 쾌속선 두 척은 이제 막 요해야차 학천민이 내버린 배 곁을 스쳐지나가면서 배 안이 텅 빈 것을 보고 당황하던 참이었다. 이때 웃음소리와 더불어 고깃배 한 척이 쏜살같이 서쪽 기슭으로 내빼는 것을 발견하자, 그들은 일제히 뱃머리를 돌려 다급하게 노저어가며 전속력으로 따라붙기 시작했다. 민강묵교는 키를 잡은 채 우뚝 서서 추격선을 바라보며 목청껏 노랫가락을 읊었다.
<물결 흔적 남기며 하늘가에는 외로운 배 한 척, (浪跡天涯一孤舟)
오호 사해를 내 마음껏 떠도는구나. (五湖四海任我遊)
도도한 강물 보니 세상 만사 슬퍼지네, (滾滾江河悲世道)
인간의 마음이 강물보다 잘도 흐르니. (人心好比水長流)>
민강묵교의 노롓가락에는 웃음과 비분이 한데 어루어져 울려나왔다.
[나대협께서 비분강개한 노랫가락을 읊으셨는데, 무슨 사연이라도 있으신지요?]
시철은 멋적게 웃으면서 물었다. 그 내용에서 짚히는 바가 있었던 것이다.
[아우님, 알고 싶은가?]
민강묵교가 천연덕스레 되물어왔다.
[제가 듣기로는 나대협께서 저를 꾸짖는 말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닐세!]
[그렇다면....?]
[아우님이 황금선을 넘보고 있기는 하지만, 착한 뜻에서 나온 것이니까 시비를 걸 생각은 전혀 없네. 다른 감회가 우러나서 부른 노래일세.]
[어떤 감회를 가리키는 말쏨이십니까?]
[노랫가락에 안그랬나? 요즘 세도 인심(世道人心)을 두고 속이 상해서 읊은 걸세. 우리네처럼 무예를 닦은 사람이라면 목적을 의당 의협생활에 두고 영웅 호걸다운 행동에 뜻을 두어, 위태로운 이를 붙들어 일으키고 기울어지는 이를 구제하며, 간사한 자와 포악한 자를 제거하여야 마땅한 일일세. 그런데 1백년 이래로 세도 인심은 날이면날마다 강물처럼 하류로 흘러 무림계의 인품과 덕성도 날로 추락해가고 있는실정이 아닌가?
돈 한 푼에 조상과 스승을 팔아먹는 자가 부지기수로 늘어나고, 갈보집 문턱 지분(脂粉) 향기에 자신을 팔아먹는 패류(悖類)들만 해도 수레로 실어내고도 말로 될 만큼 수두룩하네. 어디 그뿐인가, 헛된 명성 때문에 의롭지 못한 행위를 밥먹듯 저지르고, 피비린내 나는 돈을 벌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가 하면, 구차스레 살기 위해 친구를 팔고, 하찮은 목숨을 탐내어 못하는 짓이 없는 세상일세. 온 천하를 통틀어 사면 팔방 어디를 둘러보더라도 이 따위 더럽고 비루한 인간들만 가득 차 있으니, 통탄할 노릇이 아니고 뭣이겠나?]
[나대협께선 좀....]
[날더러 말이 지나치다고 할 텐가, 그렇지? 핫핫핫....! 자네처럼 세상 경험이
모자란 젊은이한테는 지나치게 들리겠지. 세상사 분명한 시비를 가릴 줄 모르니까 탓할 일도 아닐세그려! 내 말 미덥지 않거든, 자네 주변 인물을 유심히 살펴보게나. 겉으로야 아무리 마음씨좋은 측근일지라도 마음 속에 품고 있는 비루한 생각은 꺼내볼 수가 없으니 말일세. 이런 사람일수록 겉으로는 크게 의롭고 어질게 보이거든?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게 바로 그 말이라네. 또 길이 멀어야 준마의 힘을 알 수 있고 일을 오래 해보면 인심을 알 수 있다는 속담도 그 뜻이지. 자네도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주변사람들의 참다운 면모, 가면 속에 감추어진 정체를 발견할 수 있을걸세. 자, 쓸데없는 얘길랑 그만 집어치우세. 보라구! 해적선의 영웅나으리들께서 물귀신이 되고 있지 않는가? 으핫핫핫!.... 용궁으로 직행하는구먼!]
시철과 민자건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민강묵교가 떠드는 사이, 10장 남짓한
거리까지 추격해 온 두 척의 쾌속선, 급작스레 기우뚱하더니만 두 척이 동시에 훌떡 뒤집혀버리는 것이 아닌가! 노수와 키잡이들이 경악에 찬 비명을 지르며
기울어진 갑판 위에서 데굴데굴 구르다가는 싸라기 쏟아내듯 와르르 물속으로 곤두박질쳐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복한 쾌속선 둘레의 수면은 삽시간에 가마솥 물이 끓어오르듯 부글부글 뒤집히고 물보라가 철벙철벙 일었다.
[으하하핫....!]
민강묵교는 목을 놓아가며 웃음을 터뜨리더니, 돛줄과 키를 잽싸게 움직여 배를 처음 항로(航路)로 되돌려 놓고는 반돛을 내린 다음, 고물에 우뚝 서서 큰소리로 외쳐대었다.
[여러분, 목욕이나 실컷 해 두시오! 목숨이 질겨서 용왕님을 안만나실 분은 훗날 다시 뵐 날이 있으리다!]
잠시 후, 뱃전에서 물보라치는 소리가 텀벙텀벙 들리더니, 수면 위로 양 손이 불쑥 솟아나와 뱃전을 부여잡았다. 그것도 좌우 양쪽에서 동시에 똑같은 동작이 일어났다. 갑판 위로 뛰어오른 것은 역시 두 사람, 가릉강의 쌍둥이 여씨 쌍걸이었다.
[떠납시다! 저만하면 놈들도 혼줄이 났을 테니까요.]
얼굴에 뚝뚝 흐르는 물방울을 훑어 내리면서 맏이 여노대가 말했다.
[좋지, 좋아! 분부만 내리라구! 으하하핫....!]
민강묵교, 속이 후련하도록 껄껄껄 웃어가며 밧줄을 팽팽하게 당겼다. 돛폭이 당장에 바람결을 잔뜩 머금고 부풀더니, 배는 물 위를 날듯이 떠서 가볍게 치닫기 시작했다. 항로는 남쪽 방향이었다. 2리 남짓 배를 몰아가던 민강묵교는 그제서야 시철에게 지시를 내렸다.
[아우님, 이제부터 그 녀석을 닥달해보시지 그래?]
[내가 도와드리지!]
여씨 형제가 경쟁하듯 앞다투어 나서더니, 기절한 요해야차 학천민을 선실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맏이 여노대는 시철을 보고 빙글빙글 웃어가며 형리(刑吏) 노릇을 자청해 왔다.
[시씨 아우님은 마음이 너무 여리고, 민씨 아우님은 겁쟁이 선비님이시라, 어디 생사람 고문같은 걸 하시겠소? 내가 부엌칼을 잡고 요리할테니까, 시아우님은 그저 묻기만 하시구료. 내 손아귀에 치도곤을 잡은 이상 저놈도 안 불곤 배겨나지 못할 거외다.]
그는 요해야차의 양 어깨뼈 관절을 익숙한 솜씨를 비틀어 놓고 인중혈(人中穴)에 일지(一指)를 찌른 다음, 뒤통수를 철썩 후려갈기면서 버럭 악을 썼다.
[학가야! 죽은 척할 것 없어. 물도 배터지게 먹이지는 않았으니까 말이다. 순순히 달랠 때 눈을 뜨라구!]
여노대는 엄포를 놓으면서 포로의 잠수복마저 깡그리 벗겨내었다. 바다를 주름잡던 야차(夜叉)는 껍질을 모조리 벗기우고 벌거숭이가 되어 선실 바닥에 뉘었다. 말씀으로는 물을 안 먹였다고 했지만, 입에서는 거품섞인 물이 쿨럭거릴 때마다 쉴 새 없이 흘러나왔다. 사나운 눈꺼풀도 한참 동안이나 경련을 일으키더니, 포로는 마침내 허탈한 목소리로 첫 마디를 뱉어냈다.
[여보쇼....! 우리는 평생 알지도 못하는 사인데 어째서....]
[철썩! 철썩!]
대답은 따귀 두 대로 돌아갔다. 여노대는 눈을 부릅뜨고 시철을 가리켰다.
[개놈의 자식, 천생 얻어맞아야 불 놈 아닌가? 말해라! 여기 이 아우님을 모른다고 시침떼지는 않으렷다?]
[나는.... 나는 그저....]
[어떤 놈이 시키더냐? 누구의 명령을 받고 무지개 다리 아래 가서 이 아우님을 매복처로 끌어들이려 했는가 그 말이다!]
[나는....]
[말 안할 테냐? 그럼 이 태세(太歲) 나으리께서 기분 좋게 주물러드릴까? 어젯밤에 너희 개잡놈의 패거리들이 주고 받은 말, 일거수일투족을 하나도 안 놓치고 똑똑히 보아두었단 말이다. 네놈한테 물어보지 않더라도 뻔한 일이지만, 네 아가리로 직접 불어야 이 아우님 마음을 눈물겹도록 감동시킬 게 아니냐? 아무리 천박스런 잡놈이라도 남의 자비를 얻으려면 감동시키는 재간쯤은 있어야지!]
[당신 정말 이러기요....?]
[흐흠, 해적 나으리께서 기가 되살아나셨군! 어디 그럼....]
여노대는 큼지막한 못을 하나 집어들었다. 대가리가 네모난 선박수리용
쇠못이었다. 그는 포로의 중극혈(中極穴)에 못 끄트머리를 얹고서 사나운 기색으로 으르렁거렸다.
[여기 시아우님이 질문할 때마다 차근차근 답변을 해야 돼! 대답이 틀릴 때는 이 쇠못이 혈도를 뚫고 들어갈 거야. 중극혈이 박살나면 평생토록 고자노릇을 하게 되겠지! 황제님이 불러다가 태감(太監;내시) 벼슬을 준다면 영광일까, 아들 손자 보기는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할 거야. 그 다음, 질문에도 순순히 대답을 거부하거나 틀릴 경우, 네놈의 생살을 한 줌씩 뜯어내겠어. 자네 기공(氣功)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간 큰코 다쳐! 내 손아귀 아래에서는 무쇠로 두들겨 만든 놈이라도 못 배겨 낼 톄니까, 맛을 보고 싶거든 어디 마음대로 하라구!]
[으으으....네놈이 나를....!]
[이 개자식, 어디다 대고 이놈 저놈이야? 아직도 정신을 덜 차린 모양이로군.
어디, 정신 번쩍 나도록 한 번 해드릴까? 자, 시아우, 질문을 하게!]
시철이 말문을 열기도 전에, 포로는 도리어 여노대를 향해 물었다.
[도대체 당신은 누구요? 어쩌자고 이 시가놈을 돕는 거요?]
[허어,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도둑놈이 거꾸로 매를 들어? 안되겠구먼, 네놈이 아무래도 따끔한 맛을 먼저 보고 싶은 모양인데, 그렇다면 소원을 안 들어줄 수가 없지! 실망시켜 드려서야 어디쓰겠나?]
여노대는 천연덕스레 주절거리더니, 물갈퀴같은 왼손을 번쩍 내뻗었다.
[아이쿠....!]
해적 야차의 입에서는 당장 비명이 터져나왔다. 무서운 고통을 참지못하고 온 몸이 바짝 오그라들었다. 오른편 젖가슴은 삽시간에 시삘겋게 피투성이가 되었다. 신경이 민감한 부위의 살점이 한 움큼 생으로뜯겨나간 것이다.
여노대는 살점을 한 곁에 내려놓고선 빙글빙글 웃었다.
[내가 누구냐고 물었나? 이름은 여노대, 자택은 사천성 가정부(嘉定府),
시아우님과는 친구 사일세. 친구를 위해서라면 양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안 도와주곤 못 배기는 성미지! 이만하면 대답이 홉족하시겠나?]
[나는 그걸 묻는 게 아니라....]
[잘 들어 둬! 이제부터 네놈의 질문도 받아주겠다만, 그 한 마디에 살점을
이만큼씩 뜯어내고 대답해 줄거야. 장사 거래는 괴차 공평해야하니까.... 어디 알고 싶어 게 있거든 또 물어봐!]
여노대의 얼굴은 자못 진지하다. 요해야차 학천민이 언감생심(焉敢生心), 어찌 제 살점을 뜯겨가며 질문할 리 있으랴? 그는 자기 눈 앞에 굽어보고 있는 여노대의 표정을 보고서 진짜 상대하기 어려운 강호의 독종과 마주쳤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악문 입술 사이로 으드득 어금니 갈리는 소리가 났다. 원한맺힌 눈동자, 독살스런 눈초리로 여노대를 똑바로 노려보면서 으스러져라고 이를 뿌드득 뿌드득 갈아붙였다.
[날 죽여라! 내 목숨이 붙어 있는 한, 기어코 네놈의 소굴로 찾아가서 이 원수를 갚고야 말 데니까.... 오늘 이 파양호에 빠져 죽어선 안된다. 쉽게 죽으면 내가 원수갚을 데를 어디서 찾겠느냐?]
[하하하, 이 여노대 앞에서 바다의 물텀벙이가 격장법(激將法)을 다 쓰시는구먼! 너 따위 인간쓰레기가 독살부리는 꼬락서니를 내 어디 한두 번 겪는 줄 알았느냐? 이것 보게, 물텀벙이 나으리! 내가 진짜 네놈을 죽이겠다고 마음만 먹으면, 네깐놈의 해적선 1백 척이 겹겹이 둘러싸도 네 모가지는 내꺼가 된단 말씀이다!
용궁으로 도망쳐봐라, 이 여노대가 놓칠 듯 싶은가? 그따위 허풍 공갈일랑
집어치우고, 이제부터 묻는 말에 얌전히 불기나 하라구....! 여보게 시아우님, 이 친구가 나한테 더 물을 게 없는 모양일세. 이제부턴 아우님 질문할 차례야!]
포로와 고문자가 입씨름을 주고 받은 동안, 시철은 딴 생각에 잠겼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누굴까? 민강묵교와 여씨 쌍걸은 초면의 나한테 성심성의로 협조를 해주고 있는데, 어째서일까....? 방금 여노대는 자기와 친구 사이라고 했다. 옆구리에 칼이 들어가도 도와준다니, 이건 맹탕 헛소리로 하는 말이 아니다. 더구나, 민강묵교의 비분 강개한 노랫가락이며, 충고해주는 말 뜻은 의미심장한 것이었다. 어째서 날돕고 나서는 걸까....?'
[여보게, 시아우님....!]
여노대가 또 한 차례 부르는 소리에, 그는 얼른 정신을 가다듬고 포로에게 첫 질문을 던졌다.
[누가 당신을 보냈소? 날 배로 유인하게 한 자는 누구요?]
본격적인 심문이 시작되자, 포로의 얼굴도 심각해졌다. 요해야차는 시철의 첫 질문을 받고 순간적으로 망설였다. 바른대로 불어야 할것이냐, 아니면 허투루 딴청을 부려야 할 것이냐, 양단간에 결심이 서지 않는 것이다. 그의 눈길은 저도 모르게 여노대쪽으로 향했다. 언제 다시 집어들었는지, 빙글빙글 웃는 고문자의 손길에 자기 젖꼭지 살점이 쥐여 있었다. 그것을 본 포로는 몸서리치면서 얼른 결단을 내렸다.
[통령해신(統領海神) 유장(劉璋).... 그분의 명령을 받고 왔소.]
[나를 어디로 데려갈 계획이었소?]
[좌려산(左 =緣-絲/蟲,山)....유통령이 거기서 기다리고 있을 거요.]
[어젯밤 난장강 공동묘지에서 두 처녀를 납치한 것은 당신네들 짓이오?]
[그런 일은 모르오!]
여기서 시철의 눈길은 여노대에게 향했다. 여노대가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인다. 포로의 자백내용이 사실이란 뜻이다. 시철은 다시 질문에 들어갔다.
[지금 두 처녀는 어디에 있소?]
[얼핏 듣기로는 호수 건너편 기슭, 성자현(星子縣) 동남쪽 2리 지점
황파기(黃婆磯)에 있답니다.]
[당신, 날 데리러 왔으면서 왜 갑자기 변덕을 부리고 골탕을 먹인거요?]
[유통령 말이, 당신은 아주 위험인물이라 배 안에서 흉악스런 짓을 저지를 우려가 있다고 했소. 또 당신 헤엄치는 솜씨가 기막히게 좋다길래, 다급하면 헤엄쳐서라도 뒤따라올 것이라고 예상한 거요. 우리는 좌려산까지 당신을 유인해다가 죽일 계획이었소만, 여의치 않을 때는 헤엄쳐오는 물 위에서 처치할 생각을 품었던 거요.]
[좌려산은 이 호수 동쪽에 있고, 황파기는 남쪽에 있소! 그럴 계획을 세웠다면, 당신네는 처음부터 나하고 협상할 생각은 전혀 없었던 모양이로군?]
[그렇소, 당신 목숨 외에는 협상이고 자시고 할 게 없었으니까.]
[학형, 부탁 하나 드립시다. 나를 황파기로 데려다 주시오.]
[그건 안되겠소. 나뿐만 아니라 유통령조차도 황파기에 두 여자가 정말 있는지 없는지 모르니까 말이오.]
[그렇다면,.... 유통령이란 사람도 역시....?]
[그 지휘자는 누구요?]
[수령(首領) 나용문(羅龍文)이오.]
[아하, 그 엄가놈의 사냥개 말씀이로군!]
이때, 여노대가 그 말을 받았다.
[시아우님, 결과를 끌어내지 못하시는 모양인데, 이 해적 녀석의 자백한 내용 중에서 몇 가지 추측해볼 수가 있겠소.]
[여대협께서 어떤 추리를 하셨습니까?]
[나 역시 그 정도밖에 아는 건 없지만, 이놈이 모르는 걸 딱 한 가지 알고는
있소.]
[그게 무엇입니까?]
[아우님의 동료 두 분, 그 여자들은 배에 타고 있었소. 지금 그놈의 배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는 없소만....]
[그 배를 어떻게 찾을 수 없을까요?]
[황금 수송선을 약탈하러 숱한 배가 몰려들 거요. 그중에 낯익은 놈을 골라잡을 수 밖에.... 그 방법에 희망을 걸어 봅시다.]
[그렇다면 지금부터 황금 수송선을 뒤쫓자는 말씀이로군요.]
[희망은 걸어볼 만하오. 아우님도 거기 대비하여 잠수복을 입어 두는 것이 좋을 듯 싶소.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황금선과 맞닥뜨리게 될 테니까 물속에서 손을 쓰는 게 가장 승산 있거든?]
이제껏 잠자코 지켜보고만 있던 민자건이 얼른 말끝을 가로채면서 냉소를 던진다.
[시형, 우리가 잘못 생각하는 것같소! 이 사람들이 쳐놓은 올가미에 걸리지
않는다고 누가 보장할 수 있겠소? 여보 가릉 쌍웅 형제분! 당신네가 황금선을 약탈하도록 우리를 미끼로 내세우는 것 아니오?]
그 말에 여노대가 쌍심지를 돋우더니, 코방귀를 응수한다.
[자네, 우리 형제를 이 따위 해적놈들과 한 패거리로 몰아세우는거 아닌가? 솔직히 말씀하시지!]
[유비무환(有備無患)이라, 미리 방비책을 세워두어서 나쁠 것 하나도 없겠지요! 아까 민강묵교도 안 그렇습디까? 주변 사람 믿지 말라구....]
민자건의 응수에는 불만과 분노가 잔뜩 서렸다.
[그렇다....? 우리를 의심한다 이런 말씀이로군....!]
여노대는 쇠못을 오른손에 바꿔 잡더니, 그대로 요해야차 학천민의 멱줄기에
겨누고서 민자건을 살기찬 눈으로 노려보았다.
[흐흐흐! 자넨 날더러 이 해적놈을 죽여 진심을 나타내라는 뜻이렷다? 그렇다면, 나도 생각이 있지! 이놈을 다시 한 번 족쳐서....]
[여대협, 잠깐만....!]
당황한 시철이 급히 말리려 할 때였다. 곁에 섰던 민자건, 느닷없이 발길질을 날려 포로의 머리통을 힘껏 걷어차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민자건은 여노대를 향해 사과인지 빈정거림인지 모를 소리를던졌다.
[여대협께서 날 막지 않으시는군! 내가 잘못 생각했나?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이런 여대협을 의심하다니, 공연한 소리를 했구료.]
요해야차 학천민, 뼈가죽에 뇌수(腦髓)만 가득 담긴 머리통이 민자건의 억센
발길질을 무슨 수로 당해낸단 말인가? 학천민은 태양혈(太陽穴)을 정통으로
걷어채여 당장 골통이 바스러지고 뇌수를 흩뿌리면서 즉사하고 말았다. 몸뚱이가 한바탕 경련을 일으키고 오그라들었을 뿐, 한많은 비명 한 마디 못 지른 채 황천객이 되어버린 것이다. 여노대는 껄껄껄 뜻모를 웃음을 터뜨리더니, 요해야차의 시체와 민자건을 번같아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일평생 못된 짓만 저지르던 해적 녀석이 오늘부터 구천지하(九泉之下)에서 한을 품고 서럽게 우시겠군, 하하핫! 민씨아우님, 그 한 수 기막히게 쓰셨구료. 악랄하고 절묘한 수였어. 정말 기막힌 묘수였다니까! 으하핫! 여보 민씨 아우님, 기왕지사 수고하신 바에 뒷처리도 좀 해주시구료. 이 물텀벙이를 끌어내다가 파양호 물고기밥이나 되게 던져 넣으시지! 그래야만 아우님도 한가닥 정분상 마음이 편해질 테니 말이오. 으하하핫....!]
웃음뿐만 아니라 말뜻도 전혀 모를 소리였다. 시철이 묻기도 전에, 여노대는
웃음소리를 끌면서 휑하니 선실 바깥으로 나가버린다. 시철은 마지막 경련을
일으키는 시체를 지그시 굽어보다가, 민자건에게 눈길을 돌렸다.
[민형, 이거 너무하는 짓 아니오? 우리가 어려운 지경에 처해 있을 때, 나대협, 여대협 형제분의 도움을 받았는데, 민형은 어째서 그런 말을....]
그러나, 민자건은 시체를 바깥으로 끌어내면서 그 말끝을 채뜨렸다.
[시형, 날 원망할 것 없소! 이 강호는 도깨비 소굴이오. 누구도 함부로 믿어서는 안된단 말이오. 아무리 생각해도 민강묵교 패거리가 이토록 때맞춰서 공교롭게 나타나다니, 의심을 안할 수 있겠소? 그래서 위험한 줄 뻔히 알면서도 일부러 충격을 주어본 거요. 이 사람들이 설혹 놈들과 한 패거리는 아닐지라도 딴 생각을 품었는지는 모르니까, 미리 윽박질러 두는 것도 좋지 않겠소? 만사는 불여 튼튼! 이 말씀이지!]
이 때 선실 뒤쪽 뱃고물에서 여노대가 들었는지 또 한차례 호걸스런 웃음이
들려왔다.
[당신, 남을 믿지 말란 그 앞머리 말씀은 지당하신 충언이구료. 핫핫핫! 민씨
아우님께서 또 우리한테 의심이 들거든 한마디만 지르쇼! 내 이 배를 곧장
기슭에다 대고 귀하를 공손히 상륙시켜 드릴 테니까 말이오. 그래야만 피차
꺼림칙스러울 것도 없고 또 훗날 오해도 사지않을 거 아니오?]
시철의 얼굴에는 차츰 불쾌한 기색이 감돌았다. 민자건을 노려보는 눈길도 어느덧 호의가 사라지고 없다.
[민형, 그토록 마음에 꺼림척한 앙금이 남거들랑 아무 때라도 상륙하도록 하시오. 나 시중평은 여기 계신 세 분 대협을 깊이 믿고 있으니까, 배를 타고 가다가 이분들과 함께 죽더라도 유감은 없소!]
말을 마치자, 그는 돌아서서 선실 구석에 쌓아 놓은 잠수복 한 벌을 집어 들더니, 그 자리에서 홀흘 옷을 벗고 갈아 입기 시작했다.
[미안하게 됐소, 정말 미안하구료....!]
민자건은 연신 사과를 하면서도 얼굴 표정은 울그락 푸르락이다.
[텀벙....!]
학천민의 시체를 수장(水葬)하고 다시 돌아은 민자건, 아무 소리도 않고 잠수복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배는 세찬 바람결에 실려 파도를 깨뜨리면서 쑥쑥 항진해 나갔다. 사시(巳時)가 될 무렵, 민강묵교 일행은 조용히 대고산 기슭을 감돌아 넘어섰다. 이들의 뒤에는 쌍돛배 세 척이 일렬 종대로 나란히 따라 붙고 있었다.
피차 간격은 반 리 정도, 그러나 돛대 하나를 더 세운 이장선(二檣船)인 만큼 그 속도는 민강묵교의 것보다 비할 수 없이 빠르다. 얼마 안 있어, 세척의 쌍돛배는 쏜살같이 따라 붙어 고물 우측 후방으로 차츰 접근해오기 시작했다.
호수 서편 기슭은 산악이 첩첩으로 병풍을 두르고 있었다. 물가에 산자락을 댄 봉우리 위에서 돌인 이상한 섬광이 번쩍거리기 시작했다. 3리나 떨어진 사람의 눈이 부시도록 강렬한 빛이었다. 섬광은 길게 짧게 끊임없이 번뜩였다. 줄잡아서 1백회 이상 번쩍거리던 섬광은 마침내 빛을 거두고, 울창한 나무숲 그늘만이 더욱 짙게 돋보였다. 거리가 너무 멀어서, 아무리 신경을 집중시켜 보아도 어슴푸레한 산비탈 윤곽만 눈에 들어올 뿐, 움직이는 물체라곤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시철은 한참 동안이나 의아스런 눈길로 섬광을 바라보다가, 그것이 사라지자 키를 잡고 있는 민강묵교에게 알려주었다.
[나대협, 저 산봉우리에 번쩍거리는 걸 보셨습니까? 섬광 말입니다. 아마 구리 거울로 햇빛을 반사한 모양인데요....]
그러나, 민강묵교는 시철의 말이 들리지 않는 듯 전혀 반응이 없다. 언제부터인가 얼굴에는 엄숙하고도 침중한 기색이 서려 있었다. 두 눈망울은 신광(神光)을 쏘아내면서 잠시도 멎을 줄 모른 채 호수 양측면을 훑어 보고 있다. 민강묵교 나금전의 눈빛이 다시 번뜩 빛났다. 먹이감을 발견한 표범의 그것과도 같이 활기차고 매서운 눈초리였다.
<제6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