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법사지 3층 석탑...절마당은 민가가 들어서고 ..채소밭이 되어
인간의 목숨은 얼마나 하찮은가..수십년밖에 못사니.. 풀보다도 못한
서로 잘났다고..개거품.. 이탑은 천년을 지탱하지 않는가..>>.
<<,글 사진 홍삿갓>>>.
세월이 오고 세월이 가고..
혹독한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꽃이 피고 또지고...
나그네는 수없이 한데잠을 자고 밥을 얻어 먹고...
오늘은 어디가서 밥을 걸식하고.. 어느집 허청에서 잠을 청하나
"'김삿갓"'같은 나그네도 그리 날마다 걱정하였을테지요..
.
오늘도 친우도반.. 무착선사와 같이 원주로 말머리를 돌렷습니다요..
새벽찬바람은 아직도 매서웠으나.. 낮이 되자 여느 겨울 날씨는 아니더이다..
땅속에서는 파란 싹들이 "'우투리"'군사들처럼 밀고 올라오고
산수유 나무가지엔 물이 올라 꽃망울이 터지려고 준비중이더이다...
여러 선조들의 발자취 국사 선사들의 비문.. 불에 타버려 흔적만 남은 폐사지들을 보면서..
인간들의 탐욕과..동물이나 식물은 그저 긴장없이 살아가는데..
인간들만 유독.. 탐욕스럽고 서로 죽이고 음해하고 속이고 더많이 먹고 더 많이 싸려고..
투쟁하는 ..하느님은 왜 모든 동물 다 제치고 이런탐욕스런
인간에게 "'영장"'이란 자리를 내줘서.. 약자들의 눈물과.호소와 기도를
들으시는건가요...
오늘은 원주 지역 답사 야그 해드려요....
나무관세음 보살... 인샬라 ..산티산티...
<<꽃은 세월을 따라 향기를 전하지만..솔로몬의 영화도 길섶의 백화 한송이만 못햇다니..>>>>
""'법천사지에서 멀지 않은곳에 거돈사지가 있는데..
여기도 현재는 절은 없어지고 절의 흔적만 남아 있는데... 3층 석탑도 남아 있지여...
고려시대.. 수도인 개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곳이기에... 원주 지역에
아주 큰 절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런 대형절들은 ..불교가 국교이고 해서..
왕실에서 물심양면으로 엄청나게 지원을 해서...불교의메카가 된곳이라 하네요..
거돈사지 원공국사 승묘탑비는 보물 78호인데요...
지광국사 현묘탑비보다 "'완성도"'가 조금떨어져서.. 국보가 아니고 보물이랍니다...
원공국사는 지광 국사보다 두세대정도 선배되는분이고요..
법명은 지종(智宗)이었으며..고려 현종 16년(1023) 세웠으며..해동공자 최충이 글을 짓고
김거웅이 글을 썼는데..비문글씨는 "'해서체"'인데,,구양순의 서법을 계승한것이랍니다
머릿돌을 옮길때..너무 무거워..부근 농가의 소들을 동원 공사를 마쳤다는군여... <<<김두한 가옥... 안동김씨 후손.. 뒤에 무덤.. 무덤을 지키는 묘막..
협객 김두한이 아닙니다...동명이인..>>>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제자들이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탑비머리에..온갖그림들..
고려시대 최고 지성..가방끈이 가장 긴..그 당시에는 불교사찰이 최고 학부..>>>
국보59호인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는
고려 성종때..법천사터에 세워진..지광국사의 사리탑 비입니다...
보통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만들고 임금이 죽으면 "'능"'을 만들지만..
스님이 돌아가셔..화장하고 유골 남은것을 사리탑에 안치 하는것인데...
이사리탑이 현존 우리나라 승탑<사리탑>중에서 가장 아름다운것이랍니다..
현재는 절이 없어지고.. 절의터만 남았는데.. 그래서.."'법천사지"'라고 부른답니다..
지광국사<984-1067>가 입적하시자..
고려문종 21년<1067> 그공적을 추모하기위해 사리탑과 그 비를세움
사리탐은 경복궁으로 옮겨 여기에 없고.. 탑비만이 그자리를 지키고 있답니다.. 외롭게..
비문 내용은 "'지광국사의 행장과 공적을 추모하는 글...
비문은 "'정유산"'이 짓고 "'안민후"'가 글씨를 썼는데.. 중국 구양순체를 기본으로
부드러운 글씨체라는군요.. 가히 고려시대 대표적 걸작이랍니다... 강추 합니다..
<<<거돈사지 3층석탑.. 후학들이 견학중입니다..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절터중 하나..
원주 부근에 고려시대 폐사지가 유독 믾다.. 임진왜란때 많이 폐사..
조선이 유교신봉하면서 불교를 핍박.. 또 많이 인위적 폐사..>>>>
<<<거돈가지 3층 석탑.>>>>
<,저멀리 노수는 수백년을 살아 이절의 영욕을 다 봤을터... 말이 없다..
봐도 못본체 들어도 못들은 체..>>>>
<<,원주 관음사... 절마당...세계에서 가장큰 염주가 있어 유명...>>>
<<<황진이가 흠모했던 세종대왕 증손자 벽계수 묘.. 얼짱이었다고 당대 최고 미남>>>>
<<<점심은 메기매운탕으로 회원들과...파김치 꼬들배기 맛있더구만..>>>
<<<인목대비 아버지 딸때문에 부귀영화.. 복이 화가되어 처형
인조 반정후 신원... 위패를 모신 사당.. 영창대군 외할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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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남은 인복대비의 아버지.. 영창대군의 외할아버지 조선 중기의 문신, 외척이며 자는 공언, 본관은< 연안>이며< 선조>>의 장인으로,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는 그의 둘째딸이고요
선조 18년사마시에 합격하여 관직에 올랐으며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연천 현감을
거쳐 1601년 사간원 정언․헌납․사헌부 지평 등을 지냈습니다요
.둘째 딸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로 간택되자 돈녕부도정으로 특진했다가 보국숭록대부 로 승자되고, 연흥부원군에 봉군되었고
인목왕후의 아들인<< 영창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는 혐의로 사약을 받고
세 아들과 함께 사약을 받고 죽었으며
황진이가 시를 지을정도로 짝사랑했던..
<<부처 말씀"'사랑하지마라..못봐서 괴롭다.""'>>
‘벽계수’는 세종의 증손자인 벽계도정 종숙이라는군요
''지족선사도 작살을 내고 "'10년공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유명한 말을 탄생시킨..
/ 일도창해하면 다시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하니 쉬여간들 엇더리’ 라며 애닯아 했다.는군요
왕족중의 왕족.. 대개 왕족은 벼슬을 안하는데..특이한케이스...
황진이는 남자보는 눈이 있었다는군요...<<마음을 준 또 다른 진짜 남자>>>>
황진이가 유일하게 진짜 마음을 준 "'소세양"'이란인물..
연산군때 여러 장관을 지낸 멋쟁이...
1504년(연산군 10) 진사시에 이어 1509년(중종 4)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고
정언을 거쳐 수찬에 재직 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의 복위를 건의, 현릉에 이장하게 하였으며
1514년 사가독서를 했고, 직제학을 거쳐 사성이 되었다는군요
1521년 영접사 이행의 종사관으로 명나라 사신을 맞았고, 그 뒤 왕자사부 등을 지냈으며.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나, 1530년 왜구에 대한 방비를 소홀히 했다 하여 파직되었고.
이듬해 다시 기용되어 형조판서 등을 거쳐 1533년 지중추부사에 올라 진하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답니다요
. 1537년 형조·호조·병조·이조판서를 거쳐 우찬성이 되었구요....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충신 절개의 상징 ..원천석선생..
태종 이방원의 어릴적 가정교사..
우리 교과서에 나오는 "'흥망이 유수하니 시조 작가
500년 왕업이 한낱 목동의 피리소리에만 남아 있다는 탄식....
오상고절이 너뿐인가 하노라.. 엄동설한이 되어봐야..소마무같은
지조가 있는 나무를 비로소 알게되니.. 이런 절개가 없었다면...
500년 고려 역사는 하찮은 야그에 불과 했겠지요....
부귀영화 미인향락을 앞에 두고 단호히 "'노"'라고 말할수 있는
절개와 학문.. 부끄러움을 아는 지성.. 원천석선생...
이런선생님을 뵙고 와서 오늘은 눈이 시원하군요
"""""" 흥망(興亡)이 유수(有數)하니 만월대(滿月臺)도 추초(秋草)로다
오백년(五百年) 왕업(王業)이 목적(牧笛)에 부쳐시니
석양(夕陽)에 지나는 객(客)이 눈물계워 하노라.""""""'
<<<인목대비; 아버지 연흥 부원군 김제남 신도비... 영욕을 함께한 풍운아
한 인물의 영욕의 역사를 바라본 노 거수들..오늘도 의연히 서서
몇십년 살려고 1000년 근심을 하고 발버둥치는 인간의
하찮음을 나무래는듯...봄의 싹을 준비하는...수목들이 아름답다>>>.
<<< 거돈사지 원공국사 부도비..봄을 맞아 마당에 산수유나무가 꽃망울을 준비중..>>>
<<<<김제남.. 신도비.. 비석을 안고 있는 거북이 목이 뒤로 돌아가 있어..
이채롭다..혹자는 연흥부원군이 세상에 염증을 느껴..
부귀영화도 싫다고 고개를 돌렸다는 해석도 분분... 남 관세음>>>>
<<<흥법사지 진공대사 부도비... 비석이 망실되어..인위적 파괴로 보임...
지대석 위에 균형을 잃고 이수.. 머리부분만 얹혀잇는 슬픈 모습.>>>>
<<원주 거돈사지..절은 없어지고 터만남아..나그네를 슬프게 한다>>
<<<글 사진 홍삿갓>>>
<<관음사 법당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큰 염주 108개..
한개의 무게가 40키로.. 기네스북 감.무착선사가 포즈....>>>.
제일 한국인 3세 임종구씨 2000년 된 무쇠 같은 단단함을 지닌 부빙가나무를 일본 나고야 항에서 사들여 2000년 5월에 108 염주를 3벌을 완성한 뒤 현재 1벌은 일본 오사카 통국사에 있고 한벌은 북한 묘향산 보현사에.. 또 한 벌은 원주 치악산 관음사에 봉안한 것이라 합니다.
<<<원주 관음사 가는 길복... 회원님들과>>>>
<<<관음사 경내에 있는 부처상..>>>
<<<세종의 어릴적 스승..원천석 선생 묘소.. 소박하다..
세종이 왕이 된후 옛스승을 찾아갔으나.. 고려에 충성 지조지킨
선생은 미리알고 자취 감춰.. 왕에게 원선생 거쳐 속인 노인은 나중에 자결했다고도.
원천석 선생 본관은 원주, 자는 자정, 호는 운곡(. 고려말에 정용별장을 지낸 열(悅)의
손자이며, 종부시령을 지낸 윤적의 아들로 원주원씨의 중시조이며.
어려서부터 재명이 있었으며, 문장이 여유있고 학문이 해박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고려말의 정치가 문란함을 보고 개탄하면서 치악산에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부모를 봉양하고 살았고
. 일찍이 방원을 왕자 시절에 가르친 바 있어 그가 즉위하자 기용하려고
자주 불렀으나 응하지 않았으며, 태종이 그의 집을 찾아갔으나 미리 소문을 듣고는 산속으로 피해버렸으며
왕은 계석에 올라 집 지키는 할머니를 불러 선물을 후히주고 돌아가
아들 형(泂)을 기천 현감으로 임명하였는데,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태종대>>라 하였고
지금도 치악산 각림사절에 있답니다요.
그가 치악산에 은거하면서 끝내
출사하지 않은 것은 고려왕조에 대한 충의심 때문이었던 것을
그가 남긴 몇 편의 시문과 시조를 통하여 엿볼 수 있다는군요.
<<<거돈사지를 찾아온 나그네...철모르는 산수유는 꽃망울 터트릴준비를 완료..>>
<<<거돈사지 터에 있는 수백년된 보호수 느티나무...
흥망이 유수하니..이나무는 거돈사지의 영화를 보았을터.. 말이 없다...>>>>
<<,법천사지 지광국사 현묘탑..비문의 용트림...범상치 않다.
용은 중국에서 탄생했다는 해설사..그러나 용봉문화는 사실은
동이족이 만든 것.. 요하문명.홍산문화발굴터에서
중국 황하문명의 선생님 수천년앞선 홍산문화에서
수천점의 용봉문양이 쏟아졌으니... 용과봉은 유럽에도 건너가
합스부르크 왕가 문양에도 있고.. 고조선에서 갈려나간 투르크족이 세운
터키에도 있고 기독교문화에도 건너가..베드로 성당
프랑스 노틀담사원 벽에도 용과 봉이 수없이 새겨져 있고..
고구려무덤에는 말할것이 없고....>>>
<<<,인목대비 아버지 김제남..아들과 함께 처형.. 인조반정후..고단한 혼을 모신 사당>>>
<<<태종의 스승 원천석 선생 묘소... 무학대사가 친히 명당을 점지..>>
<<<법천사지 현묘탑비..지광국사 유적을 둘러보는 회원님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