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 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심리학이 체제유지의 도구로 이용되는 현실에 대한 양심있는 학자의 목소리를 들 을 수 있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몇 해전부터 불기 시작한 자기계발서류의 책에 사용된 사이비 심리학에 늘 미심쩍었지요.
또한, 교육청에서 주관하는 담임교사를 위한 상담연수중 가졌던 의구심과 반발심이 있었습니다.
http://cafe.daum.net/jahachingu?t__nil_cafemy=item
(지
역에서 문화운동을 앞장세우면서 풀어야할 현안이 있어 현실참여하면서 만든 까페에 올린 글입니다. 당시에 가졌던 비판의 관점이 조금은
평면적이었음을 알 수 있군요... 책이 나온 2010년 1월이면 제가 상담연수 받던 시점이라 또한 서점에서 책 찾아볼 생각 좀
해볼걸 ... 하는 후회와 반성을 합니다. ^^;)
올봄에 나온 바바라 에런 라이크의 " Smile
or Die"를 "긍정의 함정"이라는 제목으로 번역한 책은 그 목소리의 톤으로 보았을 때, 심리학과 모종의 경영학, 정치학이
연동하는 지점을 경계하는 태세를 갖추어야함을 유머러스하게 주장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에런라이크 특유의 유머는
날카로운 분석과 지적으로 드러난 체제의 맨얼굴에 독자들이 지레 겁먹지 않도록 하는 일종의 완충장치로 기능하였고, 사실, 강연을
들으면서 홀가분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해학과 풍자의 힘이겠지요. 한마디로 속이 시원해지는 책이요, 강연이었습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u5um8QWWRvo
한
편, 오자와 교수의 "심리학은 아이들 편인가"라는 책은 독자로 하여금 전에는 보이지도 않던 적이 바로 눈앞에 있음을 자각하게
하면서 이에 대적할 내공을 길러주는 책이라고 하겠습니다. 독자들이 스스로일 수 있도록 하는 가운데, 평상심을 잃지 않고 일상과
생활에서 겪은 바를 되돌아보게 하는 자리를 마련해주는 책입니다. 공자가 말하였다는 하학이상달을 실천해보도록 기를 불어넣어주는
책이랄까요.
오자와 교수의 책을 읽으며 저에게 특별히 자세한 생각을 불러일으켰던 몇 가지를 모아 생활속에서 느꼈던 또다른 의문점들과 이어보았습니다.
전문성과 관리사회
전문성이라는 이름아래 개개인의 생활세계의 생생한 경험이 재단되고 평가되는 인생을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문명화된 21세기 인간 삶의 처음과 끝을 전문적인 관리가 차지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한국의 학교에서 교사들이 감당해야하는 자잘한 행정관련일들과 학생관련 보고 사항, 기록업무들, 신변관련 규율들을 두고 마이크로 메네지먼트(micromanagement)의 지옥이라던 어느 원어민 선생님의 말도 떠오릅니다. 보다 일반적인 우리네 삶의 결을 살피자면, 집
이 아닌 병원에서 태어나고 죽는 것이 당연하게 치부되는 예를 들어 보 수 있겠지요. 탄생과 죽음에 개입하는 그 모든 전문적인 처치와
관리에 들어가는 자원의 집약이 새로운 세기의 인간다움?의 한 표상으로 자리 잡았다고 해야할 것 같습니다.
다행하게도
아직 상을 당한 일이 없는 저는 병원에서 인생을 시작한 딸과 아들이 있는 정도입니다. 생각해보면 첫째인 딸을 낳기위해 병원을
다녔던 10년전 무렵이 가장 어려웠던 시기중 하나였습니다. 아토피로 고생하며 딸을 낳았지요. 피부과 전문의를
찾아다니다 지친끝에 스스로 해결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오만가지 수를 다 쓰던 시절이었답니다. 그렇게 유기농식품과 생협을 알게
되었고, 풍욕과 냉온욕, 3년가까운 시기동안의 채식으로 이를 이겨내었습니다.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생활전반을 옥죄는 과도한 전문적 관리에 기가 질렸던 시기가 아닌가 합니다. 실제로 아토피에 대해서 개인의 지나친
스트레스를 원인으로 꼽기도 하니까요. (이는 또한 전문적인 의료진들이 설명하고 밝혀낸 것들이기도 합니다.)
아파트에서
사는 삶이란 관리사무소에서 모든 것을 알아서 해주는 편안한 삶이기도 하지만, 그 집요한 관리때문에 기가 막히고 숨이 막히는
삶이기도 하니까요. 공지사항을 시도 때도 없이 각 가정의 거실에 달린 수신기로 방송하는 시스템. 꽃이 지고 낙엽이 지는 것을
끝까지 느낄 겨를을 주지 않고 늘 개끗하기만한 단지안 정원관리. - 아파트에서 나와 빌라단지를 거쳐 단독주택에 살고 있는 요즘
기억에 남는 아파트 생활의 단점이라고나 할까요.
마당에 피고 지는 꽃을 보는 일, 출퇴근길 계절의
오고감을 알리는 꽃잎과 낙엽을 밟는 일, 그 고운 색들이 차차 퇴색되어 가는 걸 보노라면 인생의 무상함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이치가 내 마음 가까이 다가옵니다. 그러니 한결 마음이 놓입니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지를 새길 수 있으니까요.
한편, 인간의 삶이 관리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인식이 지배하는 이 때에 관리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뒤집어 말해서, 소외이며,
배제라는 것은 아닐까요? 예를 들어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고 버리는 여고생들과 외로이 고독사하거나 자살하는 이들.
내집 안방에서 가족들과 온갖 감정의 회한과 이를 넘어서는 위안을 받으며 생을 마감하지 못하는 것이 전문성을 띤 관리에 옥죄인, 현대의 자연스럽지 못한 사망의식의 대상이 되는 경우라면, 철저히 버려진 채로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이들도 있으니까요.매니저맘과 학원의 집중적인 관리에 혹사당하는 아이들 반대편엔 아무렇게나 방치된 아이들이 있듯이.
관
리의 양극화라고 불러 마땅할 이런 극심한 삶의 결에서의 차이가 어떤 미래를 불러올것인지?
정신이 아연할 정도로 살아가는 방식의
차이, 문화의 차이가 달라지는 것이 못내 두렵습니다. 누구는 돈을 주고 사는 관리서비스가 사실은 치명적인 독이 되고, 누구에게는
최소한의 돌봄마저 사치일 수밖에 없어 마지막엔 노숙자라는 이름으로 관리를 받아야하는 처지에 이르기도 하는 현실... 실로 주체가
상실된 시대에 살고 있음입니다.
관심이나 배려와 같은 좋은 말들과 노동이 만나는 과정에 중간 든 화폐가 사실은 제일 힘센 주인노릇을 하는 게지요?
소유가 아닌 존재를 이야기하는 에리히 프롬을 다시 읽고 싶어집니다.
학교라는 곳
한
아이에게 학교는 어떤 곳인가 물었을때, 답이었다고 하지요. "참는 곳"
저는 기본적으로 이 아이가 학교와 다른 장소의 차이점을 잘
짚어내었고 어찌 보면 학교만의 덕목을 스스로 마음에 들건 안들건 잘 터득한 것으로 이해하였습니다.
전화 통화에서 말씀드렸듯이 대안교육적인 상상력을 실천하시는 분들에게 소구할만한 레토릭이란 이런 지점들인 것 같습니다. 근대성을 비판할 때, 국가주의를 비판할 때, 아이의 입장을 빌기란 참으로 용이한 전략이기도 하니까요.
일본과 같은 등교거부문제나, 공교육이 오히려 사회불평등을 고착화한다는 비판, 아이들에게서 배움의 활기와 창의력을 빼앗는 장소이므로 학교를 없애야한다는 지적에 이르기까지 공교육은 낱낱이 연구되어졌고 충분히 채찍질당하고 있습니다.
그
러나 그 모오든 비판에도 불구하고 근대의 공교육제도는 근대 이전에는 생각지도 못한 것들을 이루게 한 밑거름이었으며 귀족들과 일부
지배계층의 전유물이던 교육에 공공성이라는 개념을 부여하여 (형식상, 절차상이나마) 만인의 것이 되도록 하였습니다. 다음세대를
위한다면, 집단지성이 건전하고 성숙한 비판을 가함과 동시에 새로운 방법론을 발명하여 늘 진보하도록 하여야할 세기의 유산이 공교육제도 아닐까요. 다양한 학자들이 다양한 해결법을 제시하기도 하고 실제로 실험적인 시도가 이루어지는 곳이 또한 공교육이라는 현장이니까요.
장
자는 사람의 하늘 (인지천)과 하늘의 하늘(천지천)으로 인간본성을 구분하였다고 합니다. 한 개인의 재능을 바탕으로 그의 열망을
이룩하도록 하여 사람의 하늘을 열어주는 자아실현 기능을 가짐과 동시에 천지천, 모든 인간이 가진 본성으로 돌아가 자기극복을 통한
자기발견을 이룩하도록 이끌어 주는 것이 교육의 이상적인 모습 아닐까요.
" 학교라는 곳은 참는 곳"이라는 어린이의
말은 그런 의미에서 교사에게, 교육자에게, 교육심리학자에게, 교육철학자에게 많은 것을 생각케 한다고 봅니다. "사회라는 곳은
참는 곳"이라는 말도 어른들에게는 한편, 타당한 말이거든요. (물론 여기서 "참는 것"은 구체적으로 그 외연을 구분하여
다루어야하겠습니다만,)
손쉽게들 수 있는 예로는 자연주의교육을 불교교육에서 당의정식 교육이라 비판하고 있는 점을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인간의 본능과 욕구를 최대의 공략처로 삼는 후기자본주의 사회에서 학습자의 자기조절능력과 자기극복능력은 어쩌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일 수 있다는 점( 오래된 미래교육 -정재걸 지음 중 )에서 "아이편이 되는 것'에 보다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를 발견합니다. 더우기, 참는 것을 "톨레랑스"로서, 몸으로 배워 지혜로운 삶을 살아가면 어떨까 하는 바람이 생깁니다. 타인은 결국 "참아내야할 존재"이기도 한 것입니다.
한국과 같은 획일적인 입시제도와 깡마른 교과서적 지식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 그러나 동시에 이에 대한 내면에서의 반발심이 미래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런지, 걱정이 앞서기도 합니다.
그
러나, 진정한 의미에서 "참는 것"은 자아실현과 자기극복이라는 나와 우리를 동시에 생각하는 사람으로 커나가는 데
필요불가결하기에 학교에서, 사회에서, 가정에서 어른들이 이를 실천하는 본을 보이는 이상향을 꿈꿔보게도 되는 군요.
첫댓글 마음이 불편하여... 어떤 경우 부분은 지우고자 합니다. 단, Ensemble님께는 메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옛날에는 무당이 의사노릇, 집사노릇, 학교장노릇까지 다했지요. 돌이켜보니 참으로 세상이 일을 쪼개고 또 쪼개며 살아왔다는 생각이 듭니다. 환원주의적인 사고가 가장 믿을만 하다고 믿었건만 세상은 옛날보다 각박하기만 합니다. 부친개를 주고 받는 일도 뚝 끊긴지 오래고 누가 태어나고 누가 죽는지도 길을 걷노라면 알 수 없습니다. 사람이란 본디 하나이고 소우주인데 스스로 콘베이어벨트에 부속품으로 조립된 듯 관리받고 있으니, 정이란 것조차 돈으로 사는 세상이 그래서 되었는지 모릅니다. 저는 점점 육식이 꺼려집니다. 생선이 불쌍하고 소고기가 싫어집니다. 인간이 잘 먹고 산지가 얼마나되었다고 흥청망청인지 모르겠어요.
조금만 가난하게 살면 안되는 건지 묻고 싶네요. 조금만 불편하게 살고 조금만 욕심을 줄여 살면 행복이란 놈을 잡을텐데....맞아요. 나부터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맑을샘 선생님....저는 한살림을 먹고 사는데 밥이나 한끼 해서 나눠 먹고 삽시다. 그리고 저도 언젠가는 마당 딸린 집에서 살고 싶은데....영...용기가 안나네요. 한 번 들어가면 나올줄모르는 범생이라서...
방학전 모임은 잘 하셨는지요? 당시에 컨디션이 좋지 않았어요. 가야금 선생님께 사주를 보았더니 제가 가장 예민하고 까다로운 사람들에 속한다네요. 마음을 다스리며 방학을 지내볼까 합니다. 교육문제에 대한 관심과 염려가 가끔은 버거울 때가 있네요. 아랫글에 올리신 옛제자의 편지같은 글들이 힘을 줍니다. 집이란 인연이라고 하니까, 언젠가 마음이 닿는 곳을 찾을 수 있을 것 입니다. 방학동안 건강하세요~~ ^^, 좋은 글 읽으러 자주 들리겠습니다.
지난 모임에서 함께 하고 싶었는데 아쉬웠어요ㅠㅠ. 다음엔 그쪽 부암동에서 해야할 것 같아요. ㅎㅎㅎ 상추와 풋고추만 준비하세요. 탁주와 된장은 제가 가져가겠습니다. 그저 사는 일상의 소소한 삶을 말하며 시나 한 수 주고 받으며 바람처럼 살면 되지 않을까요?!! 마석봉 선생님이 저한테 이렇게 말하더라구요. 우리 모임에 나오면 참 편안한 마음이 생기고 기분이 좋아진다구요. 사는 게 다 이런거지 않나요?
네에~ 날을 함 잡아 보는 것도 좋을 듯하네요~^^
앗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