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에 관한 시모음 1)
여름날의 추억 /최영복
우리 뛰어놀던 그해 여름 바닷가에는
모래알 같은 수많은 이야기들이
바람결에 흩어지고 있을 때
우리 모습은 더는 없었다
출렁이는 파도를 타고 춤을 추듯
밀려온 지난날의 추억들
홀로 남은 외로운 가슴속을
헤집으며 파고들 때 나는 빠져나갈
길을 잃어버렸다
그해 무더웠던 여름날 뜨거웠던 사랑
그리고 이별의 순간들이
어수선한 기억 속에
표류하다 서서히 찢겨나간 난파선처럼
상처에 얼룩진 혼돈의 세월
오늘도 누구 한 사람
반겨주지 않는 쓸쓸한 바닷가에는
우리 함께 걸었던 그해 여름날은
다시 오지 않았다
어느 여름날 /최순명
돌담길 푸른 잎 속에
호박꽃 활짝 웃고
돌 사이 돌나물
아장아장 햇살 맞으면
수돗가에 마실 나온
늦은 잠 참개구리
마중물한 바가지
펌프가 먹어 가면
쏟아지는 청정의 물
'' 옜다.''
'' 으후, 시원타 '’
어머니 손에
등을 맡기면 흐뭇한 마음
맞아,
난 널 기다린 게 아니라
어머니 손길을
기다렸던 거야
한여름 더위 극성을 떨어도
얼음 같은 등목이면
여기가 천국이네
마루에 점심밥은
감자로 호박잎, 된장 싸고
돌나물에 밥도 비비면
매미소리 정다운
풍족한 하루속에
내일의 바람이 분다.
여름날의 회상 /송태봉
무심코 하늘을 쳐다보니
희미한 빛을 발하고있는 작은 조각달
높은 하늘 저 멀리 떠있던 별들이
그 옆으로 슬며시 내려와 앉았다
선명한 하늘에
지친듯 멈춰 떠있는 작은 구름 두어점
구름이 가던길을 멈추니
숲속 작은 나무와 풀벌레도 따라 움직임을 멈춘다
초대하지 않았지만 문득 찾아온 고독이란 감정
보랏빛 노을처럼 아련한 감상이고 싶지만
그것은 절실하게 느껴지는 아픔이었고
목이 쉬어라 외쳐 떨쳐버리고 싶은 슬픔이 되어버린다
어지러운 여름날 /박희홍
태양을 향해 날던
이카로스의 날개
달콤하게 녹아
불꽃처럼 피어오른
아지랑이 되어
남실대는 파도에 빠져
흔적 찾을 수 없다
용기인지 만용인지
욕심 다스리지 못해
되풀이되는 비극
신의 마음도 여린지
다스리지 못하나 보다
여름날의 유희 /안영준
주룩주룩
쉼 없이 밤새 내린 비는
아침이 오기 전
시치미떼고 사라졌다
모른 척 능글맞게
동산을 올라 중천에 떠
세상을 밝히는 해는
환한 미소로 내려다본다
땅속에 묻혀
숨죽인 매미는 억울한 듯
악을 쓰고 소리 내어
격하게 운다
고추잠자리 된장잠자리
누가 보든 말든
앞마당에서
쌍쌍 파티에 여념이 없다
여름날의 사랑 /최순명
덮다,
후덥지근한 날
선풍기 앞에
망부석 같이 앉아 있는
이 뜨거움은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그대 그리움 때문일까
가물어진 논바닥
물 스며들 듯
마셔도 마셔도 끝없는
이 목마름은
채워도 채워도 모자란
그대 사랑의 깊이 같다.
여름날 /허형만
- 성모 마리아
제가 당신의 그림자 끝에서도
평화와 안식을 꿈꿀 수 있음은
먼길 부르튼 아픔이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천둥 치고 벼락 치는
그토록 긴긴 세월 속에서도
푸른 바람과 넉넉한 기쁨으로
이 여름을 지탱할 수 있음은
제가 당신의 서러움까지도
고이 품어 간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늘 당신 가까이에 있고
당신은 저로부터 멀리 계시나
눈빛만으로도 손길만으로도
눈물겨운 사랑을 전할 수 있음은
참으로 더없는 행복입니다
여름날 /허향숙
플랫폼 벤치에서
할머니 두 분이 도란도란
말씀을 나눈다
하나님이 요즘 불을 너무
많이 지피고 계시네
그러게 말야
우린 사명대사처럼
도력도 없는데 말이지
라며 웃는다
땡볕 이고도 풋풋하게 핀
연꽃들 같다
비 개인 여름날 /세영 박광호
먹구름 물러가니
푸른 하늘엔 뭉게구름 피어나고
머~언 산 능선엔 그리움 젖어든다
가뭄의 단비에 몸을 씻은
녹색 짙은 산숲에선
비들기 구구 울고
모든 농작물은 키를 높이며
열매를 부풀인다
공원엔 아이들이
엄마와 함께 즐기고
쓰레기 줍는 공공근로자는
유모차의 아이에게 손을 흔든다
여름의 더위가 무덥기도 하련만
자연과 삶의 이런 모습들은
우리에게 행복을 안겨준다
여름날의 성당 /세영 박광호
뜨거운 태양 등으로 가리고
십자가 높이 치켜든
언덕위의 성당
무거운 짐 진 자들 다 오라하시네
네가 쉴 곳이 이곳인 즉
내가 너를 품어 안으리
그 음성 들리네
세파에 물 키고
숨 막히는 이 고통을
쫓아가 다 고하고 싶네
한 낮 뙤약볕의 신열을 식히기엔
아름드리 느티나무
짙은 그늘이 좋겠으나
아픈 마음 달래기엔
십자가 그늘이 좋으리
여름날의 로망 /청아 이세복
용광로처럼 이글거리는
회색빛 빌딩 사이에
에어컨 실외기가 화병 나겠다
스트레스로 몸살 앓다가
검댕이 숯처럼 타버릴 것 같은 가슴들
늘 푸른 광야를 달려 바다를 동경하겠지
모래톱 쌓인 바다
하얀 물거품에 발 담그고
서핑을 보는 것만으로도 대리만족일 터
카라반을 끌고 다니며
불빛 하나둘 켜지는 텐트들
부러울 만큼 즐기는 게 인상적이었다
붉은 주홍빛으로 물드는 노을과
어둑한 별빛을 바라보며
못다 한 이야기는 모닥불 속에서
풀벌레 소리랑 익어갈 거야.
도둑이 든 여름 /서덕준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나의 여름이 모든 색을 잃고
흑백이 되어도 좋습니다
내가 세상의 꽃들과 들풀,
숲의 색을 모두 훔쳐올 테니
전부 그대의 것 하십시오
그러니 그대는 나의 여름이 되세요
여름날 /장유정
푸른 거탑들 연일 쑥쑥 쑥
하늘 위로 치솟으며
여름을 부른다
매미는 제짝을 찾아 구애 송을 부르고
뜨거운 뙤약볕 연일인데
푸른 숲속은 천국이다
시원한 바람 향기
가슴 안기고
한 발자국 뗄 적마다
나무의 싱그러움 그리고 푸른 물빛
비색 옛 도공들이
청자에 새긴 물빛
하늘 물빛 푸른 비색 새겨놓다
여름날 흐르는 물빛 속에
님들의 옛 향기가
여름날의 향수 /정형근
여름이 오면
초록의 향기가 머무는 숲속
졸졸 물소리 여울지는 산촌
그리운 내 고향으로 가고 싶다
아침이면 종달새 소리 들리는 그곳으로
배낭을 둘러메고 떠나고 싶은 밤
차이콥스키를 듣고
피카소를 이해하고
칵테일을 좋아하는 친구와
화이트와인 한두 잔 마시며
순수함 속으로 빠져들고 싶어라
진한 고독을 좋아하는 여인과
진솔한 마음속 대화 둘만의
순수한 세월을 나누고 싶어라
마주 보며 어쭙잖은 시 나부랭이
한 편을 놓고 흥얼흥얼 읊조리고 싶어라
무한의 구도를 위해 남도로 떠나는
형극(荊棘)의 순례길로 떠나기에 어울리는 나이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발걸음이 소중하겠지
그래서 그날을 못 잊어서 하겠지
그리고 그날도 서서히 잊혀지리라
다시 돌아오는 외로운 나와 너에
동행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겠지
떠나야 한다. 또 다른 순간을 위하여
슬퍼하지 않고 고독하지도 않고
외롭게 방황하지 않고 살 수는 없을까
누구라도
여름이 도망가기 전에 녹색 그늘에 안겨
내 붉은 심장에 울음을 받아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 실컷 울고 싶다
유월의 하늘이 푸른 날 솔바람은
날 일으켜 세우며 어서 떠나라 하네.
여름날의 잔상 /황다연
농익은 가을 산이
수채화를 그려놓고
유혹의 손길 뻗어 오니
누군들 거부하랴
낮게 흐르는 개울물과
어우러진 산새의 음률은
여름 내내 새겨온
시간 속 흔적에
화음을 맞추며 들썩인다
설익은 잎새
숭숭 가슴 뚫린 삶 내려놓고
갈바람에 흔들리다
허허로운 몸짓으로 낙하하는
신비로운 춤사위
듬성듬성 무리 지어
천연염으로 펼쳐놓은 오색 물결
뜨겁게 달구었던 태양의 작품일까
생명의 에너지 사그라들 때까지
빗장 풀고 쉼 하는 여름날의 잔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