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바위는 처음에는 복자바위라 불렸다. 병인박해(1866)때 순교한 다블뤼 안주교, 오매트리 오신부, 위앵 민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요셉의 사연이 깃든 바위로 다섯 분의 성인을 기리는 뜻으로 오성바위라고 이름을 붙여주었다.
병인박해 때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 될 때와 충남 보령 갈매못 형장으로 끌려갈 때 쉬었다 간 바위로 이 다섯 성인들이 여기서 쉬는 동안 포졸들이 포승을 풀어 주어서 안주교는 교우들을 만나 격려하고 함께 기도한 후 막걸리로 목을 축였다고 한다.
그 앞의 돌은 김대건 신부와 함께 입국한 다블뤼 안주교가 21년간 숨어 살던 방을 드나들 때마다 밟고 다니던 문지방돌이다.
형구돌은 조선시대 중죄인을 사형(교수형)에 처할 때 사용하는 형구이다.
1866년 프랑스가 조선을 침략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는 내용의 글을 반포, 쇄국 의지를 강하게 천명하였다.
그 뒤 1871년 미국이 조선을 침략한 신미양요가 일어나고, 미군이 강화도에서 조선군과 싸운 뒤 4월 25일 퇴각하자,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종로 네거리, 경기도 강화, 경상도 동래군·함양군·경주·부산진 등을 포함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던 것이다.
그 비석에는 병인양요 이래의 구호인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의 12자가 큰 글자로, 그 옆에 “우리들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가 작은 글자로 각각 새겨져 있다.
은언군 이인(恩彦君 李䄄, 1754년 2월 1일 ~ 1801년 6월 30일)은 조선 후기의 왕족으로, 조선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셋째아들로 정조의 이복동생이다.
사도세자의 아들 중 정조, 은전군과 함께 성년기까지 살아남았다. 철종의 할아버지로, 25대 왕 철종은 그의 서자 전계대원군의 서자이자 셋째 아들이었다. 본관은 전주, 자는 명흥(明興),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1771년 은언군과 은신군 형제의 빚을 홍봉한 등이 대신 갚아주자, 노론이 세손을 제거하려는 것에 위협을 느낀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1776년 석방되어 돌아와 원릉 수릉관, 종부시제조, 가덕대부 수릉관, 수덕대부 등을 역임하였다. 1778년(정조 2) 그의 아들 상계군이 홍국영에 의해 원빈 홍씨의 양자로 내정되었으나 1786년 상계군을 추대하려던 구선복(具善復)의 계획이 발각되면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 이후 노론벽파는 여러 번 그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요구하였으나 정조는 상소를 물리치고 그를 보호하였다. 정조 사후 그를 죽이라는 상소는 계속되었다. 1801년 그의 정실 상산군부인 송씨와 며느리 상계군부인 신씨가 천주교를 신봉하는 사실을 알고 배소에서 탈출하려다가 붙잡혀 사사되었다.
철종 즉위 후 복권되고, 그와 상계군에 관련된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의 기사는 대량 세초되었다. 양주 신혈면 진관리(현. 서울시 은평구 진관외동) 북한산의 지산 이말산에 안장된 그의 분묘는 6.25 전쟁 중 유실되었다. (위키트리에서 인용)
참고로 묘비를 보면 '有明 朝鮮國'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조선이 명나라에 속국임을 나타내는 의미의 부끄러운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남상교는 충주목사를 지낸 정3품 당상관 출신의 관리로 1827년(순조 27)에 북경에서 영세, 입교하였고, 세례명은 아우구스티노였다. 동생 남탄교(南坦敎)의 아들 남종삼(南鍾三)을 입양하여 입교시켰고, 천주교 교인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아들 남종삼은 새남터에서, 남상교는 공주 진영(鎭營)의 옥에서 83세로 세상을 떠났다.
남상교는 순교한 천주교 신자일 뿐 아니라 선정 치리자로서도 칭앙을 받았다. 현풍현감(1837년 12월∼1840년 12월)을 지냈을 당시, 일가족이 현풍에 3년 동안 살았는데 흉년이 들어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도왔기 때문에 그 덕을 기려 청덕비가 세워졌다. 이 비는 현풍 사무소에 있다가 1974년 5월 27일 절두산 성지로 옮겨졌다.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1762∼1836)과 더불어 실학을 추구하였으며, 덕망 높은 치리자와 농산 학자로서도 이름을 날렸다.
남상교는 정약용, 이학규(李學逵, 1770∼1835) 이후 남인계 시인들 중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자 한시문에 능한 문학가로서 당대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남상교와 직접 교유한 홍한주(洪翰周, 1798∼1868)는 저서 『지수염필(智水拈筆)』에서 그의 시를 일컬어 ‘시인(詩人)의 시’라고 극찬하였다.
22세 때인 1838년(헌종 4)에는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교리(弘文館校理)·영해현감(寧海縣監)을 거쳐 철종 때에는 정3품인 승지(承旨)가 되어 왕을 보필하였다. 또한 고종 초에는 왕족 자제들의 교육을 담당하였으므로 자연 당시의 실권자인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도 친교를 가졌다.
천주교에 입교한 것은 아버지 남상교의 영향이 컸는데,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에는 이유일(李惟一)에게 천주교를 배웠다고 진술하였다. 입교 후에는 베르뇌(Berneux) · 다블뤼(Daveluy) 주교 등과 교류하면서 교회 일에 관여했고, 1861년에 입국한 리델(Ridel) 신부에게 조선말을 가르치기도 했다.
고종 말에 이르러 조선을 둘러싼 국제정세가 점차 미묘해져 가는 가운데 만주(滿洲)의 연해주(沿海州)를 차지한 러시아는 두만강을 경계로 조선과 접하게 되었다. 그러자 점차 통상을 요구하며 자주 국경을 넘어오므로, 조정은 위기감에 긴장이 고조되었고, 이에 실권자인 흥선대원군은 사태해결책을 강구하기에 부심하고 있었다.
이 때 남종삼은 홍봉주(洪鳳周)·이유일·김면호(金勉浩) 등 교인들과 상의하여, 국내에서 전교 중인 베르뇌·다블뤼(Daveluy) 등 프랑스 선교사의 힘을 빌려, 영국·프랑스와 동맹을 맺어 러시아의 남침을 저지해야 한다는 방아책(防俄策)을 흥선대원군에게 건의하기에 이르렀다.
남종삼은 이렇게 해서 러시아의 남침을 막는 동시에 쇄국 조선의 문호를 개방하여 신앙의 자유도 구현케 하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방아책에 대하여 당초 관심을 가졌던 대원군이 주교 베르뇌·다블뤼와의 면담이 서울에 부재중인 관계로 지연되는 동안 심경의 변화를 일으켰다.
설상가상으로 북경에서 천주교 박해가 일어났다는 와전된 정보가 전해지자, 천주교 접근에서 천주교 박해로 돌변하여 1866년 초에 천주교도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게 되었다.
이에 프랑스 선교사를 비롯한 수많은 신자들이 체포되었는데, 남종삼도 3월 1일 경기도 고양에서 체포된 후 3월 7일 서소문 밖 네거리에서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다. 1968년 10월 6일 시복(諡福)되었고, 1984년 5월 6일 성인품(聖人品)에 올랐다.
박순집(베드로)은 순교자를 모시는 일에 일생을 바친 신앙의 증거자로 박순집의 아버지 박바오로는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치명한 범주교, 샤스탕, 모방 신부의 시신을 목숨을 걸고 노고산에 매장하였다가 4년 후에 자기 문중 산인 관악 삼성산에 안전하게 이장하기도 하였다.
박바오로는 10월 17일 이곳 절두산에서 순교하였다. 박순집은 아버지의 성업을 이어 부친 일가족 6명의 순교자는 물론 무명의 순교자 그리고 성인 베르뇌 장주교와 신부 4명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 왜고개에 안장, 순교자 모시는 일에 헌신하였다.
이후 박해가 잦아들자 선교에 앞장서는 열의를 보이기도 했다. 이후 1979년 9월 26일 박순집의 공적을 기리고 그의 부친 순교자 박바오로를 비롯한 “일가족 16위 순교자 현양비”를 제막하였다. 박순집에 의해 성인들과 순교자들이 묻혔던 왜고개에는 현재 군종교구 국군중앙성당이 세워져 있다.
부친, 형제, 삼촌, 고모, 형수, 조카, 장모, 이모에 이르기까지 한집안 열여섯 명의 가족들이 한꺼번에 치명한 박순집(1830-1912년) 일가의 이야기가 새겨져 있으며, 묘소는 강화도 갑곶진에 자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