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988
12월28일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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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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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6DLzDyP0Zng (유동철 리노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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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 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정당한 절차를 밟지 않고 폭력이나 편법으로 권력을 차지한 부당한 권력자들, 그도 아니면 통치자로서의 자격 여건을 전혀 갖추지 못해, 그 자리에 앉지 말았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는 한 가지 공통된 특징이 있습니다. 혹시라도 누군가 자신의 자리를 치고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자리에 대한 일상적 불안감, 위기감입니다.
헤로데가 대표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역사 안에 큰 수치요 오점으로 남은 군사정권 시절의 독재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헤로데의 경우 아기 예수님의 탄생으로 인해 안 그래도 부실하고 불안불안한 자신의 왕권이 크게 흔들림을 느낍니다.
그 결과 인간의 탈을 쓴 자로서 결코 하지 말아야 할 악행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 결과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잔혹한 악인으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버리고 만 것입니다.
대체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죽임을 당한 아기들의 운명이 참으로 가련합니다. 가문의 미래요 희망이던 아기들이 아무런 죄도 없이 끔찍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지켜봐야만 했던 부모들의 마음을 예레미야 예언자가 미리 예언했습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오 복음 2장 18절)
유다인들도 과거 우리나라 백성들처럼 남아선호사상이 유별났습니다. 그런 금쪽같은 아기들, 가문의 대를 잇고, 가계를 이어야 할 아기들, 보물 같고 목숨 같던 아기들을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잃었으니 고을 전체가 깊은 슬픔에 잠겨버리고 말았습니다.
거룩하신 아기 예수님의 탄생 그 이면에 무수한 아기들의 희생이 있었습니다. 지극한 선인 앞에는 그에 맞서는 반드시 극악무도한 악인이 존재하기 마련입니다. 악한 인간 존재의 강한 시기 질투심과 극단적 이기주의로 인한 피해자가 속출합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무죄한 아기들의 죽음이지만 성 쿠옷불트데우스 주교는 이렇게 아기들을 칭송하고 있습니다.
“어린 것들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갔고 그들의 부모들은 죽어가는 순교자들을 보고 애통해 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말 못하는 그 아기들을 자신의 합당한 증거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은 아직 말을 못하면서도 그리스도를 고백했습니다. 그들은 사지를 움직여 투쟁할 힘이 없는 아기에 불과했지만 벌써 승리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이상 정권욕과 사리사욕에 눈이 먼 지도자들, 기본이 갖춰지지 않은 정신 나간 지도자들, 인간미라고는 손톱만큼도 없는 야수 같은 지도자들로 인한 선의의 피해자가 나오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죄 없이 죽어간 아기 순교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또 다른 무엇인가를 원하시리라 믿습니다.
개념 없는 지도자, 정신 나간 리더들의 돌발행동으로 인해 무고한 피해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움직이는 것, 불의 앞에 침묵하지 않는 것,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지니는 것, 참 정의, 참 진리의 길을 따라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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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iKWZMQLx0t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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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모두 누군가를 위해 죽는다. 다만 그 누군가가 누구인지 모르는 게 문제다.>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죽이려는 헤로데에게 대신 죽은 순교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전하게 성장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요했습니다. 헤로데는 그때 아기 예수님이 죽었을 것이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을 위해 희생된 어린 영혼들은 교회에서 순교자 지위에 오릅니다.
제일 문제 되는 것은 아기들이 자기 의지로 순교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공경받을 만 하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생각해봅시다. 만약 내가 산길을 차를 몰고 가다가 웅덩이를 피하려고 차를 비트는 바람에 길가에 있던 어미 새가 치어 죽였습니다. 내려보니 둥지에 새끼 새들이 있습니다. 어미가 없으니 이들은 다른 동물들에게 잡아먹힐 것이 확실합니다. 이때 나는 어떤 마음이 들까요? 그 새끼 새들에 대한 책임을 지려 하지 않을까요?
마찬가지입니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 있어야 했고 그들의 영혼을 주님께서 책임져주셔야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러나 만약 어미 새가 독사에게 물려 죽었다고 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그 독사는 새끼들도 잡아먹을 것입니다. 사랑의 마음이 있는 하느님께서는 사랑도 있고 능력도 있으십니다. 그러니 당신 아드님을 살리기 위해 어쩔 수 없는 희생을 당하는 영혼들을 구원하십니다.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우리 죽음이 누구를 위한 죽음이어야 그 보상을 받게 되는지 잘 깨닫게 해줍니다. 나에게 사랑을 지닌 분이시고 그 보답을 해줄 능력을 지니신 분을 위해 목숨을 바칠 때 내 죽음이 헛되지 않습니다. 주님은 나 대신 죽어주고 싶으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모든 존재하는 것은 무언가를 위해 존재합니다.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말입니다. 여러분 방 안에 있는 것들을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사 놓은 것들입니다. 그것들은 저절로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그것들은 반드시 여러분을 위해 존재합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피조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매트릭스’(1999)란 영화에서 네오는 낮에는 평범한 회사원, 밤에는 해커로 살아갑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그에게 모피어스란 자가 나타나 빨간 약과 파란 약 두 개 중 하나를 선택하라 합니다. 파란 약을 먹으면 그냥 이전처럼 침대에서 깨어나겠지만 빨간 약을 먹으면 진실을 알게 되리란 것입니다.
네오는 진리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빨간약을 먹습니다. 그랬더니 눈을 떴을 때 믿지 못할 현실에 직면하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신이 살아온 세계는 기계에 의해 프로그램된 조작된 세상이었고, 인간들이 그렇게 허상의 세계에서 사는 동안 기계들이 인간을 빨아먹고 있었던 것입니다. 네오는 이제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가는 모든 사람이 자아라는 기계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고 그것을 저지하려는 기계의 세력과 맞서 싸웁니다.
나를 위해 살 수는 없습니다. 착각입니다. 우리는 누구든 모두 누군가를 위해 살게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그 누군가가 과연 나의 생명을 바치는 값을 되돌려줄 대상인지 명확히 아는 게 중요합니다. 자아는 나를 이용할 뿐 나에게 자신을 위해 일한 값을 쳐주지 않습니다. 어차피 누군가를 위해 죽어야 한다면 내 죽음의 값을 되돌려줄 수 있는 분을 위해 죽어야 합니다. 그분이란 나를 만드신 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딸이 무덤에서 외롭지 않도록 무덤 속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는 중국 아빠의 사연이 있습니다. 중국 쓰촨성에 사는 장 리용씨와 딸 신레이의 사연입니다. 리용씨 딸은 태어난 지 두 달 만에 ‘지중해빈혈’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지중해빈혈’은 유전적 결함으로 인해 적혈구 내 헤모글로빈 기능에 장애를 일으키는 질병으로 중증의 경우 적극적인 수혈 요법이 필요하고, 15세가 되기도 전에 목숨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리용 씨는 가난한 농사꾼이었지만 사랑하는 딸을 살리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돈을 빌려 가며 딸의 비싼 치료비를 감당해 왔습니다. 그간 치료비로만 10만 위안(약 1680만 원)을 사용했지만, 딸의 병세에는 차도가 없었습니다. 리용씨 부부는 의사에게 “제대혈(탯줄혈액) 이식을 통해 딸을 살릴 수 있다”라는 소식을 접하고 둘째 아이를 뱄습니다. 하지만 이마저도 비싼 수술비용을 감당할 수 없어 결국 모든 치료를 포기했습니다.
엄마 뎅민 씨는 “우리에겐 이제 어떠한 선택도 남아 있지 않다”라고 토로했습니다. 부부는 딸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이별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리용 씨는 딸의 묏자리를 알아보고 직접 무덤을 팠습니다. 이후 리용 씨는 딸과 함께 이곳을 매일 방문하고 있습니다. 그는 이곳에서 딸이 죽은 후에도 이 장소를 무서워하지 않고 편하게 지낼 수 있었으면 하는 마음으로 무덤 속에 누워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리용 씨는 “궁지에 몰린 우리에게 다른 선택지가 없다. 더 이상 돈을 빌릴 곳도 없다”라며 “2살 딸아이가 묻힐 이곳에 데려와 같이 놀면서 익숙해지게 하는 일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라고 설명했습니다. 이어 “딸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은 매일 같이 딸과 함께 이곳을 동행하는 것”이라며 “딸이 무덤을 편안하게 느끼도록, 죽는 순간이 다가오면 너무 두려워하지 않고 편히 잠들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말했습니다.
리용 씨 가족의 안타까운 사연은 피어 비디오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온라인에서 퍼졌고 사연을 접한 중국 네티즌들은 신레이의 치료비를 위한 모금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 힘으로 딸의 병이 낫기를 바랍니다. 부모는 자녀가 죽을 때 그 책임을 느낍니다. 그래서 자신도 그 무덤에 함께 들어갈 수 있으면 그렇게 하려는 마음을 지닙니다. 그 마음을 지니신 분이 하느님이라면 어떨까요?
우리는 누구나 누구를 위한 죽음으로 나아갑니다. 나라를 위한 죽음일 수도 있고, 내가 믿는 신조를 위한 죽음을 수도 있으며, 가족을 위한 죽음일 수도 있고, 이도 저도 아니면 자기 자신을 위한 죽음일 수도 있습니다. 결국, 내 목숨을 바치는 대상이 나에 대한 사랑도 없고, 비록 사랑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보답할 능력이 없는 대상이라면 나의 삶과 죽음은 헛된 것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해 죽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세상에 나의 죽음에 대한 보답으로 영원한 삶으로 되돌려줄 사랑과 능력이 있는 분이 하느님 외에 누가 있겠습니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심장이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심장을 하느님을 위해 썼기 때문일 것입니다. 파도바의 안토니오 성인은 혀와 성대가 썩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을 주님 말씀을 전하는 데 썼기 때문입니다.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오른손과 발이 썩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선교하기 위해 그것들을 희생하였기 때문입니다. 온몸이 썩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십자가의 글라라 성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신의 심장에 받아들여 온몸이 수백 년이 지나도 썩지 않습니다.
우리가 하찮은 새 한 마리를 어쩔 수 없이 죽였어도 그 새끼들에게라도 보답을 해준다면, 어쩔 수 없이 누군가를 위해 희생해야 하는 나의 목숨을 그리스도를 위해 희생해 볼 가치가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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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2,13-18: 성가정의 이집트 피난.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큰 신비를 본다. 동방박사들이 예수님 곁에 머물지 않은 이유와 성가정이 베들레헴에 남아 있지 않은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들은 만남의 기쁨을 누린 뒤 모두 다 도망자처럼 서둘러 달아나야 했다. 박사들은 페르시아로, 성가정은 이집트로 가야 했다. 왜 그랬을까? 예수께서 헤로데의 손에 잡히셨다면, 그분의 육신의 삶은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섭리로 마무리되었다.
헤로데는 구세주를 없애려고 베들레헴으로 전갈을 보내, 박사들에게서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이라고 명령했다. 그는 이 명령이 생명의 근원이신 주님께까지 미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의 사악함을 이미 알고 계셨다. 그리하여 성가정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신다. 베들레헴의 아이들과 인근 마을의 두 살 이하의 아기들이 모두 죽임을 당했다. 그리스도 대신 죽은 이 죄 없는 아기들은 그리스도의 첫 순교자들이 되었다. 이 아기들과 젖먹이들이 그리스도 대신 죽임을 당하며 순교자의 완전한 찬미를 바쳤지만, 하느님의 임금님을 거슬러 자신을 지키려고 아이들을 죽인 헤로데는 파멸했다. 이 아기들은 그리스도를 위해 죽을 자격을 지녔던 첫 순교자들이었다.
이 아기들이 죽은 것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기 때문일까? 이 아기들의 죽음은 앞으로 오랜 기간 이어질 인간 사악함의 시작이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18절) 라마는 사울 왕의 도성이었고 사울은 벤야민 지파였다. 벤야민은 라헬의 아들이며 베들레헴 가까이 라헬의 무덤이 있다. 아기들이 라헬의 묘비가 있는 베들레헴에서 학살당했기 때문에 라헬이 운다고 하는 것이다.(창세 35,16-20)
마태오는 아기들의 “울음소리”와, 어머니들의 “통곡 소리”를 표현한다. 아기들이 우는 것은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다. 어머니들이 우는 것은 마치 내장이 뜯겨 나가듯이 아기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죽어가는 아기들보다 남겨진 어머니들의 슬픔이 더 큰 것이다. 아기들의 슬픔은 죽음으로 인도되기 때문이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떨어졌기 때문이니, 한순간의 슬픔이다. 그들은 죽음이 두려운 것인지 아직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들의 슬픔은 갑절이었다. 그들은 아기가 죽임을 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들에게는 이제 아기가 없기 때문이다. 아기들에게는 그들의 슬픔에 복된 끝을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어머니들은 아기를 잊지 못해 슬픔이 가라앉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우리는 흔히 “왜 하느님께서 계신다면 이런 일을 그냥 내버려 두시는가?” 하며 불평을 하고 신앙도 버리려고 하는 사람도 있고, 신앙을 거부하는 사람도 있다. 이런 것은 분명히 인간의 잘못이다. 인간이 욕심이 저지르는 잘못이기에 인재이다. 우리 인간의 회개가 필요한 것이지 하느님께 탓을 돌릴 수가 없다. 나의 잘못으로 우리 가운데 나신 예수님을 죽이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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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정의>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3-18)
헤로데는 메시아께서 태어나신 곳이 어디인지 묻는 동방박사들에게 그곳이 베들레헴이라는 것을 알려 주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가서 그 아기에 관하여 잘 알아보시오. 그리고 그 아기를 찾거든 나에게 알려 주시오.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마태 2,8) 아마도 헤로데는 처음부터 ‘그 아기’를 죽이려고 생각했을 것이고, 동방박사들이 배반자 유다와 같은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박사들은 “나도 가서 경배하겠소.”라는 헤로데의 말을 믿었을 텐데, 만일에 그들이 ‘헤로데에게 돌아가지 말라는 천사의 지시를’(마태 2,12) 받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계신 곳을 헤로데에게 알려 주었을 것이고, 메시아가 곧 예수님이라는 것도 알려 주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예수님은 태어나자마자 죽게 되었을 것이고,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학살당하는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동방박사들이 헤로데에게 가는 것을 막은 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왜 헤로데가 하려는 일을 미리 막지 않으셨을까?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막으셨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천사를 헤로데에게 보내셨거나, 또는 누군가를 보내서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랬더라도 천사의 말을, 또는 사람들의 충고를 따르거나 거부하는 것은 인간의 선택입니다.
복음서 저자는 성가정이 이집트로 피신한 일과 베들레헴의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구약성경의 예언이 이루어진 일이라고 해석하는데, 그것은 ‘사후 해석’일 뿐이고, 처음부터 하느님께서 그렇게 계획하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한 것은 예언을 이루기 위해서 한 일이 아니라, 분명히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거스르는 범죄를 저지른 일입니다. 인간의 범죄가 하느님의 뜻일 수는 없습니다.
천사는 왜 헤로데의 계획을 요셉에게만 알려 주었을까? 그리고 요셉은 왜 헤로데의 계획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그냥 떠났을까? 복음서의 표현만 보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는데, 우리는 하느님께서 성가정만 구하시고 다른 아기들은 죽게 내버려 두셨다고 생각할 수 없습니다. 또 ‘의로운 사람’인 요셉이(마태 1,19)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그냥 가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실제로 어떤 상황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의 결과만 보고 함부로 판단할 일은 아닙니다. 천사가, 또는 요셉이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었지만, 어떤 이는 그 말을 믿고 피신하고, 어떤 이는 안 믿고 그냥 가만히 있고...... 여러 가지 상황이 있었을 수 있습니다. 어떻든 베들레헴의 아기들은 예수님 때문에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그런 억울한 죽음이 끊임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 인간 세상의 현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위로도 마다한다.”라는 말을 주목해야 합니다. 베들레헴의 아기들의 부모들처럼 끔찍한 불행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그 어떤 말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도 언젠가는 부활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 위로가 될까? 하느님(예수님)께서 힘들어하는 사람들보다 더 힘들어하시고, 아파하는 사람들보다 더 아파하시고, 슬퍼하는 사람들보다 더 슬퍼하시면서 함께 울고 계신다는 말이 위로가 될까? 야고보서 저자의 다음 말은 ‘말로만 하는 위로’에도 해당됩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날 먹을 양식조차 없는데,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이 녹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고 말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야고 2,16)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에게 ‘빈말’로 위로하는 것으로 그치는 종교는 아무 소용이(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독재자(살인자)를 법으로 재판하고 처벌하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서 그런 독재자가 생기지 않도록 미리 막는 것도 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 물론 그런다고 모든 원한이 풀리고 고통과 슬픔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빈말로 위로하는 것보다는 그래도 우리가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어떤 경우에도 사적인 복수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 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로마 12,19) “평화의 하느님께서 머지않아 사탄을 짓부수시어 여러분의 발아래 놓으실 것입니다."(로마 16,20) 우리는 날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기를, 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 신앙인은 이 세상을 하느님 나라로 변화시키기 위해서 노력하고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완전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나라이고, 동시에 ‘완전한 정의’가 실현되는 나라입니다. 우리가 ‘정의 구현’을 위해서 노력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그 일은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이 힘을 합쳐야 합니다. (만일에 이 세상에 사랑만 있고 정의가 없다면, 그 사랑에는 힘이 없고, 금방 약육강식의 짐승들 세상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러나 정의만 있고 사랑이 없다면, 회개와 용서를 인정하지 않는 무자비하고 차가운 세상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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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주일이면 부르클린 한인성당으로 가고 있습니다. 성당 근처에는 오랜 된 공동묘지가 있습니다. 일찍 도착하게 되면 묘지를 둘러보고 있습니다. 200년 전에 조성된 묘지입니다. 묘지를 둘러보면서 라틴어 격언이 생각났습니다. "Hodie mihi, Cras tibi(오늘은 내게, 내일은 네게!)" 웅장하게 잘 차려진 묘비도 있었습니다. 낡아 알아 볼 수 없는 묘비도 있었습니다. 최근에 누군가 다녀갔던 흔적이 있는 묘비도 있었습니다. 잡초만 우거진 묘비도 있었습니다. 90세가 넘게 장수한 묘비도 있었습니다. 40대에 세상을 떠난 묘비도 있었습니다. 장난감이 있는 묘비를 보니 아직 어린 죽음도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은 순서가 있겠지만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순서가 없다는 것도 새삼 느낍니다. 묘비의 모습이 다양하듯이, 다양한 삶이 있겠지만 우리는 모두 언젠가 죽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결국 우리 삶의 최종 목적지는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천상의 삶을 준비해야 합니다.
교회는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록하였고, 그분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의 무덤 위에는 교회를 세웠고, 성지를 조성하였습니다. 교회가 순교자들의 죽음을 기억하고, 공경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셨지만 부활하셨음을 우리는 신앙의 신비로 믿고 있습니다. 순교자들은 목숨을 바치면서 신앙의 신비를 증언하였습니다. 예수님 홀로 외롭게 죽은 것이 아니라, 순교자들 또한 천상의 별이 되어 예수님과 함께 하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주변을 보면 ‘편한 것’이 무조건 좋은 것만은 아닌 때도 있습니다. 설탕이 달다고 지나치게 많이 섭취하면 몸에 해로운 것과 비슷합니다. 반면에 지금 힘들고 어렵지만, 꾸준히 하면 삶에 도움이 되는 것도 있습니다. 기도와 묵상이 그렇습니다. 처음에는 힘들지만, 꾸준히 하면 삶의 ‘나침판’이 되어 줍니다. 예전에 ‘전체와 부분’에 대한 집합을 배웠습니다. 작은 것에 얽매이면 큰 것을 놓치기 쉽습니다. 아무리 큰일을 하여도 작은 것을 소홀히 해서도 안 될 것입니다. 성서를 보면 세부적인 내용에는 때로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는 결국은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을 향해 나가는 배와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여정의 기록이 성서입니다. 제 몸에도 삶의 흔적들이 있습니다. 어린 시절 연탄재에 맞아서 난 상처도 있습니다. 뜨거운 물에 덴 흔적도 있습니다. 다리의 골절로 수술을 받은 자국도 있습니다. 얼굴을 보면 이제 조금씩 세월의 흔적들이 묻어 있습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있음에도 매일 아침 감사기도를 드립니다.
우리 인간들은 왜 살아야 하는지, 왜 죽는지, 고통과 시련은 왜 다가오는지에 대한 의미를 부여하는 유일한 생명체입니다. 이것이 다른 생명체와 인간을 구별하는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깊은 묵상 중에 ‘신앙의 원리와 기초’를 찾았습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라면 ‘부귀보다 가난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다.’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이냐시오 성인이 보았던 ‘원리와 기초’입니다.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온몸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 속에서 드러낼 수 있다면 우리는 순간을 살아도 영원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고 산다면 억만년을 살아도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국립현충원에는 ‘이름 없는 무명용사’들을 위한 탑이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는 것은 그들이 조국을 지키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찬미하나이다. 주 하느님. 주님이신 하느님을 찬양하나이다. 눈부신 순교자들의 무리가 주님을 기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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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청주교구 서철 바오로 신부님]
마태오 복음사가는, 하느님께서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푸신 구원의 위업을 예수님 안에서 계속하시고 그것을 완성하신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겪은 중요한 체험들에 참여하시어 새로운 ‘모세’로 제시됩니다. 파라오가 히브리 사내아이를 죽이는 가운데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살리시고, 피신시키시어, 이스라엘 백성을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데려가셨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께서는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서 예수님을 이집트로 피신시키시고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로 보내 주십니다.
이어서 복음사가는 죄 없는 아기들의 학살로 말미암은 아픔과 비탄을 전합니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비통한 울음소리와 통곡 소리가 들려온다.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예레 31,15)
라마는 예루살렘이 함락된 뒤에 유배자들이 바빌론으로 끌려가던 출발지로, 라헬은 이스라엘 왕국의 멸망과 유배 그리고 그 안에서 자식을 잃은 모든 어머니의 눈물과 통곡을 대변합니다. 이 울부짖음은 하느님을 향한 외침이면서 아직 주어지지 않은 위로에 대한 요청입니다.
‘사실 하느님만이 이에 응답하실 수 있는데,말을 능가하는 유일한 참된 위로는 부활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만이 우리에게 참된 위로를 가져다주며, 우리의 기운을 북돋아 줍니다.’(베네딕토 16세, 『나자렛 예수 - 유년기』, 157-158면 참조)
어느 신부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무죄한 이의, 한 아이의 죽음, 상처와 아픔 앞에서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하느님이시라면 도대체 뭘 하셨나?’ 하고 끊임없이 물었습니다. 그렇게 묻다가 ‘사랑만이 전능하다고 믿으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고, 힘이 아니라 ‘상처받는 사람 곁에서 더 힘들어하시고, 더 아파하시는 하느님’을 보았습니다. 문제를 풀어 주시고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나보다 더 아파하시면서 내 곁을 지켜 주시는 아름다운 분을 만났습니다. 그 아름다운 분을 외면한다면 인간이 아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예수님처럼 아름다워지려고 발버둥 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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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뒤 그분의 어린 시절과 관련하여 다음의 네 가지 사건을 소개합니다. 별을 보고 경배하러 온 동방 박사들, 성가정의 이집트 피신, 헤로데의 죄 없는 아기들 살해, 성가정의 무사 귀환입니다.
이 네 사건은 구약의 위대한 지도자 모세의 출생과 그 어린 시절을 비교할 때, 나름대로 문학적이고 신학적인 일관성이 있습니다.
탈출기의 처음 장들은 모세의 출생과 청년 시절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집트 임금 파라오는 모세와 모든 히브리 남자 아이를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탈출기 1장 16절.22절 참조)
그러나 모세는 파라오의 딸에게 구출되고 (탈출기 2장 1절-10절 참조), 청년 시절에는 이집트인을 죽인 탓에 파라오에 쫓겨 미디안 땅으로 달아났다가 그가 죽자 이집트로 돌아갑니다.(탈출기 2장 15절.23절 / 4장 19절-20절 참조)
이러한 모세에 관한 전통적인 해석은 신약 성경이 쓰일 때 폭넓게 활용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마태오 1장 21절)이라는 예수님 탄생 예고는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언제나 역사 안에서 계시하시는 하느님을 깨닫게 합니다.
출생 배경에 대한 열등감으로 정적을 제거하는 데 빈틈없고 잔인하였던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두 죽입니다. 하느님을 거슬러 죄 없는 아이들을 죽이고 마는 파라오와 헤로데의 비겁함을 우리는 과감히 던져 버려야 합니다.
바로 그때에 우리는 이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을, 죄에서 인간을 구원하실 하느님의 섭리 안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말씀을 오늘 함께 나눕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비겁함의 영을 주신 것이 아니라, 힘과 사랑과 절제의 영을 주셨습니다.”(티모테오 2서 1장 7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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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님]
동·서방 가톨릭 교회는 예수님을 없애려고 헤로데가 살해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을 공경합니다. 어떤 옛 교부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아기들은 말도 배우기 전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합니다. 아기들은 싸울 줄 모릅니다.…… 그럼에도 이미 순교의 가지를 들고 의기양양하게 갑니다.”
헤로데의 잔인함은 백성들을 당황스럽게 합니다. 한 아기에게 자신의 권력을 빼앗길지 모른다는 두려움은 그를 더 잔인하게 만듭니다. 참으로 헤로데는 악행과 폭력의 탈을 뒤집어쓴 듯합니다. 그의 마음에 고통과 눈물, 외침과 불평을 불러일으키는 살인적인 분노가 끓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당화할 수 없는 참극을 저지르면서도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려고 합니다. 악행의 잔혹함은 아무 권력도 없고 오로지 믿음만 강한 요셉과 대조됩니다. 요셉은 천사의 말을 듣고 순종합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라.”
오늘 복음은 과거에만 얽매이지 않고, 지금도 발생하는 믿기 어려운 현실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날 수백만 명의 아이들은 배고픔과 질병에 시달리고, 폭력과 납치, 착취와 억압의 대상입니다. 갈수록 무감각해지고 무뎌진 마음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이들의 잔인한 무관심 속에 아이들이 ‘새로운 죄 없는 순교자들’이 되어 목숨을 잃습니다. 오늘날에도 전쟁과 대립, 이념과 갈등으로 순진한 아이들이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잔인함은 온 세상에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주님의 천사가 하는 말을 듣고 악행의 탈을 쓴 임금과 그 어리석은 종들의 살인적인 행위에서 요셉이 보여 준 행동처럼, 그리스도인들과 마음이 착한 이들은 잔인함에 맞서 분개하며 온갖 고통과 어려움을 겪고 있는 아이들을 살리는 일에 적극적으로 함께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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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류한영 베드로 신부님]
헤로데 임금은 자신의 왕위를 지키려고 죄 없는 아기들을 모두 죽였습니다. 우리는 “인간의 잔혹함과 모성애의 통곡을 보여 주는 이 사건을 하느님께서 왜 허락하셨을까?”하고 묻게 됩니다.
지상의 왕은 철통 같은 성벽을 쌓아 왕권을 수호하지만, 천상의 왕은 비천한 마구간에서 태어나며 왕권을 포기합니다. 지상의 왕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경쟁자를 죽이며 왕권을 쟁탈하지만, 천상의 왕은 자신의 목숨을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내어 줌으로써 영원한 왕좌에 앉습니다.
죄 없는 아기들은 그들을 구원하려고 목숨을 바칠 구세주를 대신하여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평화의 임금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세상과 하느님을 화해시키시고 죄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 오셨습니다.
죄 없는 아기들은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들의 목숨을 바침으로써, 자신들의 남은 생애를 희생으로 하느님께 바침으로써, 영원한 생명과 기쁨의 나라에 먼저 들어가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많은 사람이 공포와 슬픔에 싸여 있는 가운데, 그들은 그리스도를 증언하며 하늘 나라에 들어갔습니다.
말도 못 하는 아이들의 생명은 조물주를 찬양하며, 머지않아 선포될 복음의 위력을 미리 알려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속죄 죽음을 미리 보여 줍니다. 그들은 죽음의 세력도 꺾을 수 없는 하느님의 사랑을 소리 높여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때문에 살해된 죄 없는 아기들은 흠 없는 어린양을 따르며 영원히 외치네. 주님, 영광받으소서.”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연약한 아이들의 삶이 보여 주는 주님의 영광과 승리를 기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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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기념하는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축일”은 무죄한 이들의 고통의 신비를 드러내줍니다. 사실, 죄 없는 아기들이 학살당한 일은 겉으로는 헤로데의 잔인한 학살을 드러내지만, 실상은 메시아가 태어났음을 알려줍니다. 곧 그들의 죽음은 구유에서 태어난 아기가 메시아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일은 메시아가 나타나심에 대한 지상의 왕의 두려움 때문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헤로데의 죄 없는 아기 학살을 두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예레미아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라마에서 들리는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이는 예레미야가 아들을 잃은 야곱의 아내 라헬의 통곡을 들어 예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보다 앞서 있었던 일을 기억합니다. 모세가 히브인들을 억압하면서 저질렀던 어린 사내아기들을 살해한 사건입니다.
사실, 파라오와 헤로데, 그들은 모두 자신을 지키고자 빛을 두려워한 이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이러한 완고함과 자기중심적인 폭력과 독선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지 않는지 잘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곧 자신의 왕국의 지키기 위해 사랑의 왕국을 저버리고 있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 말씀은 이러한 일들이 일어난 이유를 확고하고 분명하게 밝힙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마태 2,14)
이는 하느님께서 베푸는 구원의 역사는 그 어떤 어둠에도 방해에도 아랑 곳 없이 반드시 이루지리는 것을 말해줍니다. 곧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를 막을 수는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죄 없는 아기들이 살육당하는 소식을 들었을 때, 아기 예수님의 어머니 마음은 어떠했을까? 살인자 아닌 살인자가 되어버린 그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분명, 죽어가는 아기들의 “울음소리”보다 어머니들의 “애끊는 통곡소리”가 훨씬 더 컷을 것입니다. 아기들의 슬픔은 한 순간이었고 그들의 죽음은 슬픔의 끝이었겠지만, 아기를 잃은 어머니들의 슬픔은 그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죽은 모든 아기 어머니들의 아픔을 통째로 짊어지셔야만 했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가 희생되어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그녀가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차라리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죄 없는 아기들의 죽음에 모든 책임을 떠맡아 고통을 받아야 했던 마리아는 또다시 아무런 죄도 없는 당신 아드님 예수님의 죽음을 떠맡아 고통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토록, 죄 없으면서도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써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가 봅니다. 아기 예수님도 훗날 타인의 허물을 뒤집어쓰고 가실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혹 무죄하면서도 억울함을 당할 때가 있다면, 바로 그 일을 순교로 삼아야 할 일입니다.
주님!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는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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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소리.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마태 2,18)
주님!
자신의 아기 때문에 다른 아기들이 살육당할 때,
어머니 마음은 미어지셨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의 아기를 희생시켜 다른 아기들을 살리고 싶었을 것입니다.
이토록, 주님의 뜻을 따르는 길은
죽는 것보다도 더 큰 아픔을 짊어지는 일인가 봅니다.
그러니 저희도 어처구니없고 황당할 때, 부당한 고통을 당할 때,
도저히 받아들여지지 않고 억울하고 원망스러울 때,
어머니 마리아처럼 슬픔을 넘어 구속의 신비를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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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헤로데는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였다."(마태2,16)
<첫 순교자들!>
오늘은 헤로데의 탐욕에 의해 잔인하게 살해된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순교자'는 '자기가 믿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이며,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어간 사람들'입니다.
헤로데에 의해 살해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은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죽은 '죄의 물듦이 없는 첫 순교자들'입니다.
우리의 마음 안에서만 바라보면 죄 없이 죽어간 아기들의 죽음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구원 계획이라는 전체 안에서 바라보고, 무엇보다도 신앙 때문에 스스로 기쁘게 목숨을 던진 수많은 순교자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헤로데의 탐욕은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 곳곳에서 계속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의 탐욕으로 인하여 세상에 태어나지도 못하고 엄마 뱃속에서 죽어가는 수많은 '낙태아들'입니다.
분명 하느님 앞에서 헴 바쳐야 할 '인간의 큰 죄'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고백하면, 그분은 성실하시고 의로우신 분이시므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우리 죄만이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1요한1,9: 2,1c-2)
이것이 바로 '성탄의 본질이며, 성탄의 기쁨'입니다.
우리의 속죄 제물이신 분께로 나아가, 우리의 큰 죄를 고백하고, 그분의 크신 자비에 힘입어 다시 태어나, 생명을 지키는데 일에 앞장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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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떠나온 이들과 함께>
마태오 2,13-18 (헤로데가 아기들을 학살하다)
박사들이 돌아간 뒤, 꿈에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서 말하였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요셉은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다.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내가 내 아들을 이집트에서 불러내었다.”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
그때에 헤로데는 박사들에게 속은 것을 알고 크게 화를 내었다. 그리고 사람들을 보내어, 박사들에게서 정확히 알아낸 시간을 기준으로, 베들레헴과 그 온 일대에 사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 그리하여 예레미야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졌다. “라마에서 소리가 들린다. 울음소리와 애끊는 통곡 소리. 라헬이 자식들을 잃고 운다. 자식들이 없으니 위로도 마다한다.”
<떠나온 이들과 함께>
떠날 수 없어
떠나지 못하고
쓰러지는 이들의
애끊는 울부짖음과
흩뿌려지는 붉은 피
여린 가슴에 새기고
도저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 질질 끌며
가고 싶지 않은 길
쫓겨나듯 떠나야하는
서러운 이들이 있으니
곁에
떠나온 이들 있거든
정성스레 함께할 일이다
떠나 살아남은 이들과
떠나지 못해 죽은 이들을
참으로 살리는 것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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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얇은 A4 용지 한 장이 있습니다. 이 종이의 절반을 접고, 또 절반을 접고 또 절반을 접습니다.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절반을 접어 나간다면 몇 번까지 접을 수 있을까요? 그래도 10번은 접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러나 직접 해보니 7번까지도 쉽지 않았습니다. 이 A4 용지 접기의 기록이 기네스북에 있습니다. 몇 번일까요? 9번이었습니다. 저보다 단 두 번 더 접을 수뿐이었습니다.
종이접기도 이렇게 어렵습니다. 하물며 우리의 마음 접기가 과연 쉬울까요? 누군가에게 큰 상처를 받은 사람에게 “네가 참아!”라고 말합니다. 쉽게 마음을 접을 수 있을까요? 물질적인 욕심이 커지는 상황에서 “돈이 전부는 아니야!”라는 말을 듣고 마음을 접을 수 있을까요?
마음을 접는 것은 종이접기보다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딱 한 번을 접기도 힘듭니다. 그러나 힘들다고 포기하면 힘든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한 번만 접을 수 있다면, 이것이 커다란 경험이 되어 접어야 할 것들을 계속해서 접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접는 것은 특별히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을 접는 것입니다. 그래야 잘못된 판단에서 벗어나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은 죄 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입니다. 헤로데 대왕은 점령군인 로마 정부가 정책적으로 세운 유다인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짜 유다인이 아니었고 혼혈 유다인 취급을 받던 이두메아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로마인들의 비호를 받으면서도 유다인들에게 자기도 유다인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부서진 성전을 다시 짓는 등의 열성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문제는 이 모든 행동이 권력을 유지하려는 마음 때문이었습니다.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마음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헤로데 대왕의 나이는 70세였다고 합니다. 지금이야 70세이면 젊다고 말하지만, 당시에는 엄청나게 많은 나이였습니다. 그런데도 권력욕을 내려놓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동방박사가 말한 유다인들의 임금으로 태어난 아기를 없애야겠다는 생각에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여버리는 악행을 합니다.
잘못된 마음을 접지 못했던 헤로데 대왕이었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고 진정한 겸손의 삶으로 자신을 낮추지 못했습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들이 영원할 것이라고 착각해서 마음을 접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요? 이천 년 넘게 욕을 먹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우리도 쓸모없는 마음은 과감하게 접을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뜻을 가리는 마음은 모두 필요 없는 마음으로 과감하게 접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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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 잡러는 어때요?>
저의 책 읽는 모습을 신기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꽤 많더군요. 책 한 권을 끝까지 다 읽는 것이 아니라, 하루에 7권을 각각 50페이지 정도씩 읽기 때문입니다. 책 내용이 헷갈리지 않느냐고 묻지만, 각각 다른 장르의 책을 보기에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부족한 부분을 매워가면서 풍요로운 독서를 할 수 있게 됩니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만 파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저것 하다가 이도 저도 안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여러 개의 우물을 파는 사람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회사원이면서 작가인 사람, 유튜버이면서 웹툰 작가 그리고 전혀 다른 일까지 하는 요즘 말로 소위 ‘N 잡러’라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 52시간제 도입으로 여유가 생겼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본인이 충분히 소화할 수 있다면, 또 주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이렇게 여러 일을 함께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부족한 부분을 매우면서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삶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말도 듣습니다. 회사에서는 근로자의 성실 의무를 지키라고 하기 때문입니다. 본업에 지장을 주고 직장 질서를 해칠 수 있다는 이유를 듭니다.
너무 구태의연한 생각이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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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순교자의 피>
성 예로니모는 “순교자의 피는 믿음의 씨앗”이라고 했습니다. 순교자들의 희생과 증거의 삶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그들의 모범을 따라 주 하느님께로 나갑니다. 사람들이 돌을 던질 때 “주 예수님, 제 영을 받아주십시오.” 하며 주님의 품을 찾은 첫 순교자 스테파노, 오늘 기억하는 죄 없는 어린이들의 순교는 우리에게 주님을 향한 열정을 일깨워 주며 인간의 욕심이 얼마나 큰 화를 불러오는지 가르쳐 줍니다.
헤로데는 두 살 이내의 아기를 모조리 죽여서(마태 2,16). 자기의 권력을 넘보는 싹을 잘라 버리고자 했습니다. 이런 일은 이미 이스라엘이 한창 피어날 때 이집트에서도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힘과 생명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아들들을 죽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은 모두 강에 던져 버리고, 딸은 모두 살려 두어라.”(탈출1,22)
이런 일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낙태 건수는 정부 추정치만 년 40여만 건에 이릅니다. 출생아는 2020년 30만 건을 밑돌았으니 소리소문없이 낙태로 희생되는 생명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도 먼저 보호받아야 할 태아들이 어머니 뱃속에서 죽어가고 있으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부모들의 이기적인 마음과 인간의 이기심이 무죄한 생명을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유린하고 있으니 그들의 통곡을 누가 위로해 줄 수 있을까요?
어린아이를 방치하고 방치를 넘어 학대를 일삼은 부모 이야기가 종종 뉴스거리가 되었습니다. 모성과 부성을 잃어가는 세태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여성의 자기 결정권 보다, 태아의 생명권이 우선이라는 사실은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우리의 이기심과 질투심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지 깊이 성찰해야 하겠습니다.
요셉은 한밤중에 천사가 전해준 하느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마태 2,13)
요셉은 그 말씀을 듣고 ‘일어나 밤에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가서, 헤로데가 죽을 때까지 거기에 있었습니다.’(마태2,14) 온갖 어려움을 마다않고 지체없이 발길을 옮기는 요셉의 태도는 곧 순교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행동은 일상 안에서 주님의 뜻을 따라 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몸에 배어있는 행동입니다. 우리도 언제 어느 때 부름을 받던지 기꺼이 따라나설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순교는 일상 안에서 이루어집니다.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는 말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일생을 통하여 자기 의지를 희생으로 바쳤다면 그 사람을 감히 순교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일상 안에서도 하느님의 손길과 안배는 언제나 함께합니다. 악의 세력이 아무리 강하다 하더라도 그 어둠이 빛을 이겨본 적이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시련과 고통, 어려움 속에서도 주님께서 역사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고 그분의 손길과 요청에 단호히 응답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순교자들이 이 지상에서 소멸된 것으로 생각하지만 천국에서 찬란하게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성 베드로 크리솔로고) 어떤 처지와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굽히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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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느님 빛 속에서의 삶>
-절망은 없다-
“깨끗한 아기들의 죄없는 죽음, 주님을 위하여서 빛을 발하니
천사는 두 살아래 모든 아기를, 하늘로 옹위하여 데려갔도다.”
오늘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 아침성무일도시 찬미가 한 연이,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의 죽음의 의미를 밝혀줍니다. 어제 우여 곡절 끝에 결혼하게 된 예비부부의 카톡 메시지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마침 형제가 어제 축일인 ‘사도 요한’ 세례명으로 이번 성탄에 세례를 받았으니 축하해달라는 내용과 더불어 부부가 정했다는 부부 십계명이었습니다.
“둘이 부부 십계명 정했어요.”
1.바람을 피지 않기.
2.휴일때는 사랑하는 사람과 지내기.
3.간섭하지 않고 반복하여 잔소리 않기.
4.싸울 수 있으나 즉시 둘이 해결하기.
5.서로 존중하기.
6.거짓말 않기.
7.서로 건드리지 않기.
8.가족을 지켜주기.
9.함께하지 못할 때 미리 전화하기.
10.10시 통행금지 시간 지키기.”
특히 오랜 고뇌 끝에 결단하여 결혼하게 될 자매는 한결같은 믿음으로 빛 속에서 살아 온 분입니다. 결혼하게 될 형제도 참 사연이 많지만 전에 자매와 함께 부산에서 수도원의 저를 방문했을 때 양말 세 켤레를 선물한 가난하나 소박하고 순수한 마음을 지닌 분입니다.
예비부부 얼굴이 웬지 닮았다는 느낌도 들었는데 마침내 형제는 사도 요한으로 세례를 받았고, 5월에는 결혼식을 갖고 신혼 여행은 수도원 피정으로 대체하여 예약한 예비부부입니다. 새삼 빛 속에서 한결같이 살아 온 자매에게 절망은 없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됩니다.
오늘은 ‘죄없는 아기 순교자들’ 축일입니다. 죽음이 절망의 마지막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새 삶의 시작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주님을 떠나서 죽음의 의미는 해결 난망難望임을 깨닫습니다. 아침 성무일도시 초대송과 독서의 기도 세 후렴이 이를 분명히 합니다.
-“무죄한 어린 순교자들의 화관이신 그리스도 나셨으니, 어서 와 조배드리세”(초대송 후렴)
“1.어린이들은 마치 어린 양처럼 뛰놀며 그들을 구원하신 주님을 찬양하였도다.”
2.그들은 사람들 가운데서 구출되어 하느님과 어린양에게 바쳐진 첫 열매이며, 아무런 흠없이 하느님의 옥좌 앞에 서 있는도다.
3.영원한 그리움이 그들 위에 있고, 기쁨과 즐거움이 따르겠으며, 걱정과 한숨은 사라지리라.”-
이어지는 본기도 역시 이들 영혼을 위로하며 우리 모두 한곁같이 믿음의 삶을 살도록 격려합니다.
“하느님, 죄 없이 살해된 아기 순교자들이 말도 배우기 전에, 죽음으로 주님을 찬미하였으니, 저희도 입으로 고백하는 믿음을 삶으로 드러내게 하소서.”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지금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이미 이집트에서 모세의 탄생시 파라오 임금에 의해 살해된 무수한 죄없는 히브리인 아기들에 이어, 오늘 예수님에 앞서 무죄한 이들이 순교하였고, 무죄하신 예수님 역시 십자가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얼마나 많은 무죄한 순교자들의 피로 점철된 교회 역사인지요!
이런 악순환의 반복되는 역사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빛속에서 하루하루 빛이신 주님의 인도하에 사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우리만이라도 악순환의 반복되는 역사에서 탈출해야 하겠습니다. 바로 앞서 소개한 예비부부가, 또 오늘 복음의 성 요셉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악의 어둠 속에 하느님 빛의 인도 따라 악의 질곡에서 탈출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이들에게 결코 절망은 없습니다.
마치 오늘 복음 장면이 선과 악의 싸움 같습니다. 요셉과 헤로데 임금의 대결이지만 요셉의 배경에는 늘 빛이신 하느님이 계시니 실제는 하느님과 헤로데의 대결입니다. 그러니 악이 선을, 악마가 하느님을 결코 이길 수는 없습니다. 암흑속의 빛처럼 하느님은 주님의 천사를 통해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구출해 주십니다.
“일어나 아기와 그 어머니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신하여, 내가 너에게 일러 줄 때까지 거기에 있어라. 헤로데가 아기를 찾아 없애 버리려고 한다.”
이미 하느님의 구원 섭리의 역사 안에 있는 요셉과 그 성가정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하루하루 한결같이 하느님 빛에 따라 충실히 책임을 다하며 살아가는 가장 성 요셉의 믿음의 삶이 감동적입니다.
바로 여기서 아기 예수님으로 인해 죄없이 죽은 아기 순교자들은 존재의미는 무엇인지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궁극의 원인은 인간의 무지에 있습니다. 무지한 탐욕의 인간들에게 악순환의 반복되는 역사는 계속될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으로 인한 무죄한 아기 순교자들에게는 물론 하느님의 구원이 뒤따르겠지만 우리가 무지속에 있는 한 무지의 악순환 중에 무죄한 이들의 죽음은 알게 모르게 계속될 것입니다.
무지의 악, 무지의 죄, 무지의 병입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회개를 통해 무지의 질곡에서 벗어나 빛 속에서 사는 일이 화급하고 절실한 과제로 부과됩니다. 바로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느님의 빛 속에 사는 것입니다. 제1독서에서 사도 요한을 통한 주님의 가르침이 고맙습니다. 인간 무지의 어둠에 대한 답은 하느님의 빛뿐임을 깨닫습니다
“하느님은 빛이시며 그분께는 어둠이 전혀없다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느님과 친교를 나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에서 살아간다면, 우리는 거짓말을 하는 것이고 진리를 실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빛 속에 계신 것처럼 우리도 빛 속에서 살아가면, 우리는 서로 친교를 나누게 되고, 그분 아드님이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이 해 줍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실뿐 아니라, 온 세상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이십니다. 바로 이런 예수 그리스도만이 무지의 죄와 악에 대한 근원적 처방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빛이자 생명이신 주님과 일치되어 빛 속에서 진리를 실천하며 살게 하십니다.
빛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절망은 없습니다. 빛이신 주님께서 친히 우리 평생 삶의 인도자가 되시어 우리의 앞길을 밝혀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결코 무지로 인한 악순환의 반복의 삶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제 제가 가르쳐 드린 ‘오소서, 주 하느님!’ 기도문을 자주 바치시기 바랍니다. 무지로 인한 악순환의 반복의 질곡에서 하느님 은총으로 벗어난 이들의 오늘 화답송 시편을 통한 고백입니다.
“우리는 사냥꾼의 그물에서 새처럼 벗어났네. 그물은 찢어지고 우리는 벗어났네. 우리의 도움은 주님 이름에 있으니,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네.”(시편124,7-8).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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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들을 모조리 죽여 버렸다."(마태 2, 16)
생명은
그냥 생명이
아니다.
모두가
소중한
하느님의
생명들이다.
하느님의
생명들이
오늘
종잇조각처럼
구겨지고
찢어지고
뭉개진다.
우리가 사랑한
생명을 우리가
죽이고 있는
모습이다.
견딜 수 없는
아픔이 있다.
자식을 잃은
부모들의
아픔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같이
처참한 날에도
죽음을 위로하는
성탄이 있다.
절대자의
성탄 앞에
우리가
내놓는 것은
언제나 죄 없는
아기들의 비통한
죽음이다.
부질없이
깨어지는
헤로데의 권력과
헤로데의 욕망을
멈추어야 한다.
인간의 욕망으로
희생된 죄 없는
수 많은
아기들을 위해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참된 생명의
동반자는
언제나 참된
생명이었다.
욕망과 욕심에
눈이 먼
우리들을
일깨워주는
아기 순교자들의
아픈 희생이다.
짧은 행복
긴 고통의
악순환을 이제
멈추어야 한다.
욕심을
내려놓는
성탄이다.
생명을
들어올리는
성탄이다.
생명의 길을
다시 찾게하는
생명의 처절한
통곡소리를
들어야한다.
비참과
참혹 사이에서
통곡하시는
하느님이시다.
하느님의
통곡에서
만나게되는
우리들의
아픈 현실이다.
생명을
죽이는 것은
하느님을
죽이는 것이다.
생명의 가치를
다시금
되새기게 하는
하느님의
성탄이다.
우리는
성탄 앞에
무엇을
보여주고 있는가를
반성한다.
잔인한
욕망이 아닌
맑은 사랑의
기쁨을 나누는
오늘이길
기도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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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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