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전 11: 34 시장하거든 집에서 먹을지니 ( 하 )
4] 교회와 주의 만찬 : 박조준 목사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대할 때 가급적 책망보다 칭찬하는 일을 하려고 힘을 썼습니다. 그러나 거룩한 예식을 행하는 데 혼란을 일으킨 일에 있어서만은 날카로운 책망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일부 사람들의 잘못으로 인해서 거룩한 예식의 의미를 완전히 전도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이 거룩한 예식은 성도들의 영적인 생활에 유익을 주기 위한 것이었는데 오히려 해를 가져오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본문 17절을 보세요. “내가 명하는 이 일에 너희를 칭찬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저희의 모임이 유익이 못 되고 도리어 해로움이라”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정해 주신 규례는 우리에게 유익하지 못하면 해롭게 되기 쉽습니다. 우리의 영혼을 돕지 못하면 해칩니다. 우리를 부드럽게 만들지 못하면 우리를 굳어지게 합니다. 바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부패가 일어나게 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은 생명이 있을 때 아름답습니다. 생명이 없어지면 가장 추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백합꽃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생명이 있을 때 향기를 발합니다. 그러나 그 생명이 없어질 때 썩어 버리고, 냄새나고, 가장 추한 것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얼마나 좋습니까? 그러나 그 생명이 없어질 때면 가장 더럽고 무서운 것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짐승은 죽어서 길가에 있어도 그렇게 무섭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서 길가에 있으면 무섭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장 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생명이 없으면 가장 추해집니다.
18~19절에 뭐라고 했습니까? “첫째는 너희가 교회에 모일 때에 너희 중에 분쟁이 있다 함을 듣고 대강 믿노니 너희 중에 편당이 있어야 너희 중에 옳다 인정함을 받은 자들이 나타나게 되리라.” 세상 사람들이 싸우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그저 그런 세상이지 하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성도들이 다투게 되면 어떻게 사랑을 부르짖는 성도들이 싸울 수가 있냐며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여기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이 교회에 모일 때마다 분쟁한다고 했는데 ‘스키스마타’(σχισματα)는 분열을 의미합니다. 규례를 지킴에 있어서 한 마음이 되지 못하고 서로 싸웠습니다. 교제를 권하면서도 분열을 일으킬 수가 있습니다. 분당을 지으면서도 한 교회에 출석할 수가 있습니다. 서로 틀린 마음을 가지고도 같은 식탁에 앉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극이요, 불행입니다. 불화하고 분쟁하며 분열을 일으킬 때 사랑이 없고 마음이 멀어집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교제를 떠나서 서로 미워할 수가 있고, 교제를 하면서도 사랑이 없을 수가 있습니다. 말로는 사랑하고 축복하면서도 그 마음엔 미움과 저주가 있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곧 분열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의 분열을 듣고 믿을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고린도교회 안에 이단이 들어왔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싸움 붙이고, 이간질하고, 당파를 만들고, 신앙의 터를 파괴하는 일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마음속의 믿음과 양심을 파괴하면 사랑에 금이 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편지할 때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했습니다. 믿음을 저버리게 되면 범사에 부정적이고, 소극적이고, 불참하고, 비협조적입니다. 이렇게 되면 양심을 버리기 때문에 파괴적이고, 허위적이 되어 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이렇게 꾀이는 자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나님의 진리를 고수하는 사람은 인정을 받습니다. 하나님의 지혜에 의해 다른 사람들의 악함과 실수가 성도에게는 경건과 충성의 금박이 됩니다.
여기서 바울은 분열을 책망하면서 무질서를 꾸짖습니다. 사도 바울 당시 고린도에 있는 교회의 경우에 아주 사교적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모여서 식사를 하는 일이 자주 있었습니다. 성도의 교제는 아름답고 좋은 일입니다. 사람은 서로 나눠 먹을 때 마음이 열리고 사랑을 나누게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 당시 ‘에라노스’라는 일종의 회식이 있었는데, 거기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각각 먹을 것들을 가지고 와서 그것들을 전부 다 모아 놓고 다 함께 나눠 먹는 회식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아름다운 관습이었습니다.
요사이 우리 교회에서 선교회 모임을 가질 때, 또는 구역 예배를 드릴 때 각 가정에서 한 가지씩 음식을 해 가지고 와서 모아 놓고 나눠 드시는 것을 보면 얼마나 보기 좋은지요. 그리고 서로 사랑을 나누는 좋은 기회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서는 이와 같은 애찬이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말았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교회에는 다 똑같은 형편에 있는 분들이 모이는 것이 아니고 부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이 함께 모였습니다. 그런데 음식을 좋은 것으로 잔뜩 가져올 수 있는 사람도 있지만 그 당시에는 노예와 같이 그렇지 못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노예들에게 있어서는 이 애찬은 한 주일에 한번 배부르게,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식사의 기회였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서는 똑같이 나눠 먹는다는 정신이 없어지고 말았습니다. 부자들은 음식을 많이 해 가지고 와서 서로 나눠 먹으려고 하지 아니하고 부자들끼리 모여서 해온 음식을 나눠 먹어 버렸고 가난한 사람들은 거의 먹을 것도 없이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래서 교인들 사이의 사회적인 격차를 없애려던 회식이 오히려 격차를 더 심하게 만드는 결과가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교제를 가져야 할 사람들이 계급 의식에 사로잡힌 무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주저 없이 책망했습니다. 22절에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고 했습니다.
교회도 세상에 처해 있기 때문에 우리가 힘쓰지 않으면 세상 물결이 그대로 흘러 들어오기가 쉽습니다.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적인 장벽, 부한 자와 가난한 자, 유식한 사람과 무식한 사람, 권력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 사이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장소입니다. 세상 어디에서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여러 계층의 사람이 모여서 교제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일부 특수한 계층의 사람들만 모이면 참다운 의미의 교회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교회에 오셔서도 세상적인 것을 마음에 두어 사장 노릇, 장관 노릇, 교장 노릇 하려고 하게 되면 문제가 있습니다. 교회는 주 안에서 서로 사랑으로, 세상의 것은 다 벗어 놓고 교제하는 곳입니다.
초대교회 때만 하더라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차별이 지금보다 더 심하게 있었습니다. 자유인과 노예, 헬라인과 야만인(헬라어를 말하지 못하는 사람), 유대인과 이방인, 로마 시민과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소수 종족, 교양 있는 사람과 무지한 사람 등의 차별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이런 차별이 있지만 교회는 모든 인간이 자유로웠던 유일한 장소였습니다. 어느 교회 역사가는 초대교회의 회중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들은 한정된 범위 안에서 있지만 로마를 괴롭히고, 지금도 유럽을 괴롭히고 있는 사회 문제를 이미 적당하게 해결했었습니다. 그들은 부인들을 정당한 지위에까지 끌어 올렸고, 노동의 신성을 회복했고, 걸인을 없앴고, 노예 제도의 악을 뽑아 버렸습니다. 이 혁명의 비결은 종족과 계급의 이기주의가 주님의 성만찬상 앞에서 잊어버리게 되고, 새로운 사회의 기초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서 죽으신 인류 안에 분명히 보여지는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사랑 안에 발견되었다는 데 있습니다.”
사회적인 계급과 차별이 있는 교회란 참된 의미의 교회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참된 교회란 그리스도께서 결합되었기 때문에 또한 서로 결합되어 있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찬식도 이러한 의미가 있습니다. 나눠주기를 잊어버린 교회는 참된 교회가 아닙니다. 물건을 혼자 가지고 있거나 자기들 모임에서만 가지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작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다른 사람이 빈곤에 처했을 때 자기만 가지고는 괴로워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나눠주는 데서 그리스도인의 최대의 특권을 누립니다.
23절 이하에는 주의 만찬의 의미를 말씀합니다. 이것은 교회에서 가장 신성한 예배 중의 하나인 성찬식에 대해서 말합니다. 고린도전서는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쓰여진 마가복음보다도 먼저 쓰여졌기 때문에 우리가 아는 한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한 것으로서는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성찬식의 의미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각각 다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떡과 포도주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어떤 뜻인가를 이해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육체를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 시점에서 예수님의 몸과 이 떡은 전혀 별개의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은 내 몸을 상징한다”는 의미로 말씀하신 것도 아닙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그 의미가 맞습니다. 성찬식 때 나누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합니다. 그러나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믿음과 사랑과 하나님께 대한 따뜻한 존경심을 가지고 떡을 받아 입에 넣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단지 예수님의 몸을 기념하는 것만이 아니라 주님과의 산 교제를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될 것입니다. 믿음 없는 사람에게는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 만찬은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했습니다. 언약이란 두 사람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옛 계약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것이 곧 율법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조건이었습니다. 이 계약 관계가 계속 성립이 되려면 이 율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옛 계약 아래 인간들은 하나님을 다만 무서워하기만 했습니다.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는 도저히 없었기 때문에 저들은 계약 불이행이란 죄로 문책을 받아 왔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에 의해 새로운 관계가 사람에게 열렸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아니라 사랑에 의존하는 관계였습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랑의 자유로운 은총에 의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전면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래서 옛 계약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범죄자가 재판장 앞에 나오는 것 같았지만 새 언약 밑에서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가듯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새로운 관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생명을 대속물로 내놓아야 했던 것입니다. “피는 생명이라”고 율법은 말했습니다(신 12:23). 그 관계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생명을 희생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므로 성찬식의 붉은 포도주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피가 없이는 새로운 언약, 하나님과 인간과의 새로운 관계가 절대로 실현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성찬식에 참예하는 사람은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 거룩한 상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면 안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지금 자기가 행하고 있는 일의 위대함을 깨닫지 못하고 그 일의 신성함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신다”는 말은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인 것도 모르고, 형제와 싸우며, 그를 경멸하고 이유야 어떻든 형제와 마음이 하나될 수 없는 사람을 말합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식사를 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는데 너희 중 한 사람이 나를 배반할 것이다.” 이 말씀을 듣는 순간 가룟 유다 외에는 모두가 깜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그 방은 아주 조용해졌습니다. 자기의 마음을 한번씩 두들겨 보고 다짐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이 한 명씩 묻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저입니까?” “주님, 저입니까?” 열한 제자가 똑같은 말과 떨리는 음성으로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이 말에는 자신을 의심도 해 보고, 아니라고 부정도 하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하는 다짐이 들어있습니다. 이때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떡그릇에 손을 옮기셨습니다. 그때 마침 그릇에 와 있던 손 하나가 있었습니다. 그 손이 누구의 손이었습니까? 가룟 유다의 손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와 함께 그릇에 손을 넣는 그가 나를 팔리라.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지만 은혜를 배반한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않았다면 자기에게 좋을 뻔했다.”
예수님은 누가 그를 배반할 것을 분명히 아시고 최후의 순간 그에게 지도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지목을 받은 유다도 다른 제자와 같이 물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이 전혀 달랐습니다. “랍비여, 내니이까?” 했습니다. 그러면 유다의 질문은 무엇이 다릅니까? 가룟 유다는 ‘주님’이란 말 대신에 ‘랍비’라는 말을 썼습니다. 랍비는 율법 선생을 말합니다. 물론 교육자와 피교육자라고 해서 다 그럴 수는 없지만 유대인의 율법 선생과 백성들 사이에는 따뜻한 정의 교류보다는 냉랭한 법의 선만이 왕래했습니다. 그러므로 랍비는 그 시대의 관념으로 존칭이기는 했지만 사람들과의 마음의 거리는 하늘과 땅의 거리였습니다. 가룟 유다는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지만 예수님과 유다 사이에는 이런 거리가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룟 유다는 예수님을 존경은 하였지만 사랑하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존경의 대상은 언제나 사랑의 대상보다 천대를 받습니다. 보통 때는 몰라도 우리가 양자택일할 수밖에 없을 때, 둘 중에 하나를 결정할 수밖에 없을 때는 사랑의 대상을 택하고 존경의 대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가룟 유다는 존경하던 예수님은 버리고 그가 사랑하던 돈을 택했습니다. 전에 데마 같은 사람도 사도 바울을 존경하며 같이 복음을 전하는 일을 위해 어려움을 함께 당하며 다녔습니다. 그러나 결국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사도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다고 했습니다.
다른 열한 제자는 예수님을 누구로 불렀습니까? “주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이 가룟 유다보다 나은 사람들은 아니었습니다. 판단력이 부족하여 가끔 착각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용서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 실수도 했습니다. 화목할 줄 모르는 마음 때문에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해 드리기도 했습니다. 비겁한 성격 때문에 도망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하게 보장할 수 있는 것은 저들은 예수님을 팔 자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존경하기보다는 믿고 사랑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랍비여, 저입니까?”라는 이 물음 속에는 주님께 도달할 수 없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입으로는 “랍비여”라고 부르면서도 자기의 계획과 음모를 다 실행하려는 숨은 악의가 그대로 그의 마음속에 꿈틀거리고 있었습니다. “랍비여, 저입니까?”하고 묻는 말에 예수님께서 “네가 말했다”고 대답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네 속에는 다른 주인을 모시고 나와는 거리가 멀어. 그래서 네가 나를 배반할 것이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 장면을 보면서도 다른 열한 제자가 어떻게 가만히 앉아 있었을까요? 겟세마네 동산에서 예수를 잡으러 온 말고의 귀를 자르던 베드로가 어떻게 가만히 있었을까요? 사마리아 동네에서 예수님의 일행을 영접하지 않는다고 당장 하늘에서 불을 내려 멸망시켜 버리고 말자고 제의하던 야고보와 요한이 어떻게 이처럼 가만히 있었는지 모르겠어요. 예수님이 가룟 유다를 분명히 지적해서 말씀했는데도 열한 제자가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입니다. 열한 제자들의 의분이나 유다를 향한 어떤 행동을 복음서 기자가 뽑았는지, 아니면 제자들 자신이 가만히 생각해 본 결과 자기 자신들도 가룟 유다보다 낫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고 너무 부끄러워서 가만히 있었는지 어쨌든 만찬석은 물 뿌린 듯 조용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때 고요히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손수 떡을 떼어 주시면서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다” 말씀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이 인류를 위하여 원수의 손에 죽으실 것과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실 것을 암시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나눠주시면서 “이것을 받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의 흘리신 피가 인류의 죄를 속하는 구속의 피가 된 것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 말씀을 읽으면서 우리 마음속으로 “주님, 저입니까?” 한번 물어 보시는 기회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 저는 약합니다. 실수는 과거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을 팔지는 않겠습니다. 아무리 세상에 아름답고 화려한 것이 있다고 하더라도 주님만이 나의 주요, 나의 전부입니다. 주님은 나의 선생이 아니라 나의 마음의 보좌를 차지할 왕이시며 영원하신 생명이십니다.” 마음 중심으로부터의 이와 같은 다짐과 고백이 있어야겠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약속에 대한 소망의 기쁨을 소유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 장의 교훈을 정리해 보자.
첫째, 여자 성도의 머리
본문은 여자가 머리에 수건이나 모자를 쓰든지 긴 머리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가 남편의 권세 아래 있음을 나타낸다.
남자와 여자는 영적 특권에 있어서는 동등하지만, 그 지위와 역할에 있어서는 구별된다.
여자의 긴 머리는 머리 수건이나 모자를 대신하여 주신 것이다.
이것은 특히 여자가 공적 모임에서 기도할 때나 말씀을 전할 때 해당한다고 본다.
둘째, 성찬 예식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기억하면서 시시때때로 성찬 의식을 행해야 한다.
성찬식은 주께서 친히 세우시고 명하신 바이며 우리가 주의 재림 때까지 행해야 할 의식이다.
그것은 복음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죄 씻음을 증언하는 의식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신 것을 감사해야 한다.
셋째, 예식의 모범
우리는 성찬 시 바른 지식과 믿음이 없이 참여함으로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성찬의 떡과 포도즙을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고 생각하며 먹고 마셔야 하고, 이런 지식과 믿음 없이 참여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