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권]
第 五十 章. 사제(師弟)의 정리를 끊다
뭇사람들은 우르르 창문으로 몰려 호수 연안에서 벌어진 엄청난 상황변화를
지켜보았다. 망연자실 바라볼 수 밖에 딴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회주 부인은 사뭇 근심스런 기색을 띠고서 남편에게 핀잔을 주었다.
[응양, 그 처녀를 왜 안 데려왔어요? 여기 끌어다 놓았으면 그놈의 여우새끼를 낚을 텐데....]
회주도 그것이 안타깝던지, 이를 악물었다.
[나용문이란 놈, 기를 쓰고 안 내놓는 걸 어쩌란 말야! 그 계집을 이용해서 제 손으로 여우새끼를 잡아 죽이겠노라고 뻗대더군. 도대체 우리를 믿어줘야 말이지! 내 참, 세상에....!]
[그 사람도 이젠 날갯죽지 부러진 독수리 신세나 마찬가지 아녜요? 부하들도 비참하게 전멸당하다시피 되었으니, 지금 같으면 우리 흑응회보다 실력이 나을 것도 별로 없을 텐데, 어째서 툭 터놓고 우리와 손을 안 잡는지 모르겠군요. 큰일을 하려면 서로 힘을 합쳐야 되지 않겠어요?]
[그 작자 머리 속에는 악산선생의 안전밖에 더 중요한 것이 없어. 게다가
악산선생이 노가도 나루터를 떠나지 않으려 하니까, 그 작자도 우리와 손잡고 이 산항촌에서 여우사냥할 욕심이 없는 거야.]
[그럼 어떡하죠?]
[그따위 해적녀석 아예 상관 말자구! 우리끼리 여우놈을 해치울 수 있으니까.... 한데 근랑(瑾娘), 장웅(長雄)이란 녀석은 왜 여태껏 무소식이지?]
[저도 좀 이상한 생각이 들어요. 벌써 연락을 보내왔을 텐데....]
[재미 적은 일이 하나 터졌어!]
회주는 목소리를 한껏 낮춰 귀띔했다.
[아니, 무슨 일인데요?]
[도명심(屠明心) 사제가 인편에 긴급 전갈을 보내왔는데, 아주 곤란한 지경에 처해 있어. 그 여우새끼의 일당 중 한 놈이 명심 사제의 몸에다 무슨 장난질을 쳤는지, 지금 손발의 맥이 풀어지고 기공(氣功)이 몽땅 흩어져서 보통 사람처럼 된 모양이야. 사제를 북쪽으로 호송하던 구혼사자(拘魂使者) 왕조양(王朝陽)이 보내온 전갈이 또 기막히지 뭐야. 환자의 몸을 아무리 조사해봐도, 혈맥에 이상이 있고 내공력을 운기하는 기관이 모조리 파괴된 증세 말고는 도무지 그 원인을 모르겠다는 거야. 도대체 무슨 수법, 무슨 약물에 다쳤는지 알 수 없으면서 목숨은 위태롭다니, 이거 큰 탈 아닌가? 왕조양의 보고로는, 오늘 미시(未時) 안에 원인을 찾아내지 못하면 사제는 그만....]
[아니, 구혼사자는 수경투혈술(搜經透穴術)에 정통한 사람 아녜요? 그런데도
원인을 못 찾아낸단 말씀이에요?]
[으음....!]
[그렇다면.... 도사제는.... 이제 죽은 목숨....]
[지금 구혼사자는 사제를 오시(午時)까지 노가도 나루터에 데려가려고 애쓰고 있어. 나도 이미 그리로 사람을 보내 맞아올 수 있게 수배해 놓았지. 사제를 이리로 데려다가 풍사숙님한데 보이려고 말이야.]
[만일에....?]
[만일 풍사숙도 그 원인을 못 찾아내시면....하는 수 없지! 그 여우새끼한테
알아낼 밖에....]
[하지만 일단 그놈이 여기 들어오게 되면은 살아날 기회는 거의 없어요. 큰 불을 질러 사면팔방으로 포위해놓고 암기로 집중사격을 퍼부어서....]
[일단 불을 질러서 그놈을 이 안으로 몰아 들여야겠지! 고스란히 여기에 모셔들인 다음 잡아 꿇리고...., 제깐 놈이 죽음을 코 앞에 두고서도 실토 안할 리가 있나?]
단목 회주 부부가 소근소근 밀담을 주고받는 동안, 보루 2층 사람들은 창틀에 매달려서 호수 위에 벌어진 참혹스런 광경을 바라보느라 정신이 팔려 있었다.
안타깝게도 호수 기슭 1리 남짓한 거리를 남겨둔 채, 쌍돛배 세 척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 차례로 물 속에다 뱃머리를 쳐박고 가라앉았다. 늦가을철 바람이 거센 만큼 물결도 사납기 짝이 없는데, 수면에는 난파선 갑판 위에 쌓여 있던 선구(船具)와 잡동사니들이 사방으로 등등 떠다니고, 숱한 사람들이 그 부유물(浮遊物)에 매달려 물결치는 대로 정처없이 표류하면서 목청이 터져라 외쳐대고있는 것이다. 구원을 바라는 이들의 처절한 외침은 보루 2층에서 속수무책 멀거니 바라보는 이들의 귓전에 또렷이 들려왔다.
보루 아래층에는 거의 30명이나 되는 복면객들이 앉거나 눕거나, 벽에 기대서서 출동명령이 내려지기만을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는 창문이 없다. 그래서 호수 쪽에서 악다구리끓듯 소동이 벌어진줄 아무도 모른다. 그 밑 지하실은 면적이 그리 넓지 않다. 이나마도 한가운데 통로를 남겨두고 양씨 나으리댁 쌀가마니와 건어물, 절인 고기, 일용품 잡동사니가 꽉 들어 쌓여서 운신하기도 몹시 불편하다.
기름 등잔 한 개가 겨우 어슴푸레하니 암울한 광망을 비칠 뿐, 구석구석은 온통 깜깜절벽이다. 이 식량창고로 통하는 지하갱도 입구 양측에는 대도(大刀) 한 자루씩 짚은 사내 셋이 다리를 틀고 앉아서, 되는 말 안되는 말 입에서 나오는대로 세상사 한담(閑談)을 나눠가며 지루한 시간을 보내고 있있다. 지하도 문짝은 절반쯤 열려 있어서 땅굴 깊숙한 곳으로부터 불어 나온 미지근한 온풍(溫風)이 지하실을 감돌고는 활짝 열려진 아래층 대문을 거쳐 돌계단을 따라 2층 대청까지 쏟아져 들어간 다음, 창문을 통해 자유스런 바깥 세계로 빠져나가 사라진다.
지하도 입구 좌측의 감시꾼은 큼지막한 단도(單刀)를 칼집째 품어안은 자세로 차디찬 돌벽에 기대어 앉아서 주섬주섬 넋두리를 꺼내놓고 있었다.
[이거 정말 신세 따분하게 됐군! 엄씨댁으로 들어간 이후부터 우리 전제단(專諸壇) 사람들은 이름만 그럴 듯하게 남아 있지, 본업무 활동은 아예 없어져버린 모양이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천하를 종횡무진 누비고 다닌 직업 암살자들이 그 좋은 장사 다 때려치우고 엄씨댁 재산이나 지켜주고 전령(傳令) 노릇이나 하는 심부름꾼으로 전락하다니, 이거 정말 재미없어 죽겠어, 내 성미엔 죽어라고 안 맞는단 말씀이야!]
반대편 사내가 끌끌끌 목구멍 웃음을 토해낸다.
[이봐, 투정 말게나! 우리가 목숨 걸고서 그 위태위태한 짓을 더는 안해도, 먹을 것 마실 것 있겠다, 계집이 수두룩하게 생기는 판인데 여기서 뭐가 더 부족하다고 툴툴대나?]
[흥! 내 차라리 눈비맞고 모험을 하면서 사는 게 낫지, 도적놈의 종노릇은
못하겠어....!]
그러자, 세 번째 사내가 얼굴빛이 싹 변하더니 낮게 호통을 쳤다.
[갈가(葛哥)야, 주둥아리 닥쳐! 너 죽고 싶어 안달이 났냐?]
갈형(葛兄)이란 사내는 동료의 꾸지람을 대수롭지 않게 들어넘기고서 좀이 쑤시는지 두 다리를 쭉 내뻗고 허리를 비틀어가며 입이 째지도록 큰 하품을 한다.
[아이구 졸려라! 이런 곰팡내나고 지저분한 땅굴 밑바닥 신세가 무슨 말인들
못하겠나? 좋은 말한다고 누가 우리 일을 대신해 줄 것도 아닌데.... 더군다나 단주(壇主)님, 당주(堂主)님들께서 위신 떨어지게스리 이 땅굴 아가리 지키느라 내려올 턱도 없지 않나? 여보라구, 우리가 아무리 떠들어대도 야단칠 사람 하나 없으니까 걱정 말게. 자네두 사람이 내 친구가 아니라면 혹 모를까? 그렇지 않고서야....]
갈형은 느긋하니 떠벌이다가 문득 무슨 기척을 느꼈는지 벌떡 일어나더니, 지하도 아가리에 머리통을 쳐박고서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적지근한 바람만 활활 쏟아져 나올 뿐, 다섯 손가락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어두운 갱도 안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이상한 걸? 쥐생원이 들락거렸나?]
[하하핫! 여보게 신경 곤두세우지 말라구. 이 지하실에 생선 고깃더미가 평생토록 핥아도 남을 만큼 쌓였는데, 쥐떼가 없을 리 있겠나?]
오른편 친구가 껄껄대면서 퉁박을 준다. 하지만 갈형을 꾸짖던 자는 갱도 입구에 귀를 바짝 갖다붙이고서 한참 동안 듣더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쥐새끼같지는 않은데? 이것 봐, 갈가야! 자네 이 세상에 귀신있단 소리 못
들어봤나?]
이번에는 갈형이 낄낄대면서 핀잔을 준다.
[세상 천지 무슨 귀신이 다 있어? 노루 제 방귀에 놀란다구, 죄지은 녀석들이 뒤꽁무니가 켕겨서 그런 말을 떠벌였겠지. 진짜 귀신이 있다면야 우리 흑응회 사람들은 진작에 몽땅 염라국으로 끌려가서 이승에 남은 작자 하나도 없었을 걸세! 안 그런가?]
[아냐, 한 5년 전쯤 될까, 나도 귀신을 만난 적이 있는 걸? 절강성(浙江省)
금화현(金華縣)에 한탕 하러 갔는데....]
[이봐, 정통형(政通兄)! 그 귀신 얘길 끄집어내서 놀라게 할 거야? 지금이 아무리 대낮 오시(午時)지만, 이놈의 지하실은 염라국 지옥속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지옥에 들어앉아서 귀신 욕을 했다간 어떻게 되는지 알아? 가뜩이나 으시시하고 떨리는 판인데, 쓸데없이 귀신 얘기나 해서 질금질금 오줌지리게 하다니, 정말 심통 사나운 친구로군 그래! 이크, 저게 뭐야....?]
[으앗, 귀신 나왔다....!]
[아이구머니!]
반쯤 닫혀 있던 지하도 문짝이 저절로 삐거덕 열리더니, 시커먼 그림자 하나가 불쑥 뛰쳐나왔다. 가뜩이나 귀신 얘기로 간이 오므라들던 세 사내, 혼비백산을 해가지고 저도 모르게 비명을 질렀다.
그들은 처음부터 땅굴을 통풍구로 알고 있었으니만치, 전혀 경계태세를 취하지 않고 방심한 상태에서 손가락 하나 까딱거릴 틈도 없이 돌발적으로 출현한 귀신에게 혈도를 찍히고 말았다. 귀신의 타격수법은 실로 전광석화를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빨라, 그들은 눈 앞에 불쑥 나타난 시커먼 그림자를 어렴풋이 보았을 뿐, 이내 인사불성이 되고 말았다. 귀신은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지하도에서 먼저 뛰쳐나와 세 사내를 습격한 귀신은 뒤를 돌아다보고 동료 귀신에게 속삭였다.
[아저씨는 여기서 좀 기다려주십쇼. 누가 내려오거든 지하도 안으로 피하시고 상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숙부님은 이 일에 연루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연파조객이 빙그레 웃으면서 고개를 내저었다.
[기왕에 여기까지 왔는데, 좀 끼어들기로소니 안될 게 뭐 있는가? 우리 함께
올라가세!]
[아저씨, 제 말대로 해 주십쇼. 저하고 이놈들 사이에는 은원관계가 실꾸리처럼 뒤엉켜 있습니다. 딴 분이 상관할 일이 못됩니다. 또 저는 여기서 살계(殺戒)를 크게 열고 싶은 생각도 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응원하실 필요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나는 자네 목적이 무엇이든 간에 곽형의 신물(信物)을 본 이상 전력을 다해서 도와야 하네. 자네 혼자서 칼 한 자루 차고 호랑이떼 소굴에 들어가는 걸 그냥 봐넘길 내가 아닐세!]
[제가 물러날 퇴로를 확보해서 지켜주시기만 해도 얼마나 고맙고 마음 든든한지 모르겠습니다.]
[정 그렇다면 좋아! 내 여기 이 자리를 단단히 지켜줌세. 부디 조심해서 들어가게. 자넨 살계를 안 열겠다고 하지만, 놈들은 사나운 짐승이야!]
[감사합니다, 아저씨!]
시철은 기절해 넘어진 세 사내들을 흘끗 바라보다가, 뭔가 마음에 짚히는 것이 있었다. 목덜미에 하나같이 푸른 수건이 매어 있는 것이다.
'옳거니....! 소나무 숲에 매복한 김단주 일행도 모두들 푸른 복면을 하고 있었어! 그렇다면 이 수건이 그 복면이겠군....'
그는 아무 거나 한 폭 떼어가지고 두 눈만 내놓은 채 자기 얼굴을 가리웠다.
그리고 연파조객에게 손짓을 보낸 다음, 윗층으로 통하는 돌계단을 딛고 성큼성큼 올라가기 시작했다. 지상으로 통하는 문에는 파수꾼이 없었다. 돌계단을 따라서 오르면 바로 아래층 안채가 된다.
흑응회 패거리는 이 양씨네 저택을 점령해 임시 거처로 쓰는 만큼 내부 전체구조에 대한 파악이 부족했다. 창졸간에 계획을 변경시켜 이동해 왔기 때문에 보루 구석구석 샅샅이 탐색할 시간적 여유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방어태세에 구멍이 뚫려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어처구니없이 만전올 기했다고 마음을 놓고 있었다. 적이 온다면 분명 외부에서 침입할 터,
이들의 주의력은 완전히 마을 바깥쪽에만 쏠려 있었고, 내부 경계는 오히려 소홀한 점이 없지않았던 것이다. 자기네가 이 산항촌 마을에 생소한 바에야, 시철이란 놈도 별 수 없으리라 안심했는데, 뜻밖에도 이 무서운 적이 비밀 지하통로를 거쳐 심장부 깊숙이 나타날 줄이야 어디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아래충에선 출동명령을 대기중인 습격대원들이 모두 너른 대청 안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긴장이 풀린 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이들은 이제 닥쳐올 악투(惡鬪)에 대해서도 한결같이 낙관적인 생각을 품고 있었다.
외곽지역에는 형가단주 김안란이 제일선 공격대를 진두지휘(陳頭指揮)하고 있는데다, 그 저지선이 돌파되면 이 마을 도처에 물샐 틈 없는 화공(火攻)준비로 제이선 포위망이 설치되었고 여기에 암기습격을 담당한 자기네가 버티고 있는 것이다.
보루로 진입할 유일한 철문은 벌써부터 봉쇄되어서 자기네가 통제하고 있으므로, 시철이란 놈이 마을 앞 길에 나타나기 전까지 이 아래층은 어느 곳보다도 안전하고 조용한 휴식처인 셈이었다.
이들은 제각기 장차 직면할 무서운 싸움을 상상하면서 한껏 휴식을 즐겼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오직 하나, 외곽지대와 2,3층에서 감시를 맡은 동료들이 2리 밖 멀찌감치 경계를 서고있는 이상 쥐새끼 한 마리도 얼씬 못할 게 틀림없다. 싸움은 아직 멀었다. 그 때까지 밀린 잠이나 실컷 자두기로 하자꾸나....!
[저벅, 저벅, 저벅....!]
지하실에서 복면한 동료가 한 분 올라온다. 여기저기 앉거나 눕거나 흩어진
습격대원들은 잠시 눈길을 던졌다가는 이내 거두어들이고 말았다. 하필이면 그 숨막히고 답답하고 냄새나는 지하실에 배치되다니, 거 참 재수 옴붙은 친구로군! 이들은 방금 지하실에서 올라온 복면객에 대해 추호도 의심하지 않았다. 또 관심도 없었다. 모두들 푸른 수건으로 얼굴을 가린 처지인데다, 옷차림 역시 거의 똑같이 간편한 경장복이라, 의심하고 자시고 할 건덕지가 전혀 없는 것이다.
이들이 복면을 한 의도는 두 가지, 무서운 적 시철에게 자신들의 징체와 신분을 밝히지않기 위해서, 또 막상 싸움이 벌어졌을 때 적방에 자기네 무예 종류와 수준을 간파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동시에 화공이 발동되었을 때, 불티와 연기에 수염이 그슬리거나 질식되는 일도 피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이 복면객이 시철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았다. 그러기에 이
동료분(?)께서 자기들과 눈길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우물쭈물 머리를 수그린 채 다가왔을 때도 전혀 주의해 보지 않고 그냥 지나치게 내버려두었다. 지하실에서 올라온 이 동료분은 슬금슬금 왼쪽 벽면을 타고 일행의 등 뒤로 돌아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입구까지 옮겨갔다.
시철은 계단 어구에서 가장 가까운 벽 한 모퉁이에 슬그머니 궁둥이를 붙이고 쭈그려 앉았다. 그리고는 양 팔로 머리베개를 받친 채 눈을 반쯤 내리감고서 암암리에 주변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가 자리잡은 오른편 그리 멀지 않은 벽면에도 두 놈이 등을 돌린 자세로 기대어 앉아서 잠을 청하는 듯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아래층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다. 외부로 통하는 철제 대문도 굳게 닫혀서, 등잔불 하나만이 우중충한 광망(光芒)을 쏟아내고 있을 뿐, 숨막힐 듯 답답한 공기는 지하실이나 별 차이가 없다. 뒤채로 들어가는 대문이 활짝 열려 있고 그 안에 몇몇 사람의 그림자가 어른거리지만, 그것이 누군지 좀처럼 알아볼 수는 없었다. 시철의 눈길이 돌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다가는 문턱에 버텨선 두 명의 보초와 딱 마주쳤다. 그는 얼른 눈길을 돌리고 말았다. 이 보초들은 위아래층을 오르내리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있는 모양이다. 눈길은 돌렸지만 귀는 여전히 2층에 쏠려 있다.
2층에서 왁자지껄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새어나오는 걸 보면 거기도 적지 않은 패거리가 있음에 분명하다.
'단목 회주가 저 2층에 있을까, 없을까....?'
그는 2층의 동정에 온 신경을 쏟아 귀기울여 보았으나 단목 회주의 음성은 들리지 않았다. 2층 계단도 텅 빈 채로, 한참이 지나도록 오르내리는 사람이 없다.
'내가 직접 올라가보면 어떨까? 흑 정체가 탄로나지는 않을까?'
가까스로 적지의 중추 심장부에 스며드는데 성공한 판인데 섣부른 짓으로 실수를 저질러서야 되겠는가? 만약 이 시점에서 정체가 폭로되는 날이면 다 된 밥에 재뿌리는 격이다.
그래서 시철은 행동할 기회가 올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서 패거리들의 움직임을 좀 더 살펴보기로 결심했다.
기다리는 사람에게 시간의 흐름은 지긋지긋할 정도로 느린 법이다. 하물며 적지에 흘로 앉아 있을 떼는 그 불안과 초조감이야말로 이루 형언할 수 없을 것이다. 한참 동안 죽치고 앉아 있으려니 별 궁리가다 떠오른다.
'가만 있자...., 이러다가 누군가 지하실에 내려가기라도 하면 큰일인데
어쩐다....? 한 놈이라도 내려갔다간 기절해 자빠진 세 녀석을 발견하게 될 텐데, 연파조객이 그놈을 끽소리 안 나게 처치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다! 무슨 기척만 새어 올라오더라도 당장에 이 보루가 벌컥 뒤집히고 말 게다....!'
속으로 끓탕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2층에서 누군가 다급하게 외쳐 알리는 소리가 전해왔다.
[저것 좀 보십쇼! 소나무숲 속에서 웬 놈들이 싸우고 있습니다. 우리 편 같지는 않은데,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뒤미처 보초를 밀쳐가며 2층 계단을 급히 뛰어 내려오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아래층에다 대고 고함쳐 부르는 자가 있었다.
[우(于)부단주님! 회주께서 빨리 올라오시랍니다.]
[알았네!]
안채에서 대답하는 소리가 울렸다. 회색빛 경장 차림을 한 자가 대청을 거쳐 계단 위로 뛰어 올라갔다. 독사의 대가리처럼 세모진 눈매를 내놓고 역시 청색 수건으로 복면한 사내였다. 시철의 앞을 지나치는 동안, 그 매서운 눈초리에선 마주 보는 사람의 가슴이 써늘해질 정도로 흉악스런 광채가 쏘아져 나왔다.
그렇다! 이 자는 형가단(荊軻壇)의 부단주 구음적객(九陰吊客) 우천남(于天南)이다....! 회주가 불렀다니, 그렇다면 단목응양은 역시 2층에 있구나! 언제 노가도에서 달려왔을까....?
시철은 그걸 생각하면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흑응회의 기동성(機動性)이 기막힐 만큼 정확하고 빠른 데 놀라지 않을 수가없다.
도대체 우리 일행이 세 갈래길에서 이 산항촌으로 방향을 잡은걸 어떻게 알아내어 물샐 틈 없이 천라지망을 깔아놓고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거야 정말 귀신이 곡할 노릇 아닌가 말이다. 그는 우천남의 뒤를 따라서 당장 일어나 2층으로 올라가고 싶은 충동을 가까스로 억눌렀다. 참자, 아직은 일러! 좀 더 참고 기다려보자꾸나....!
이윽고 귀에 익은 단목 회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 부단주, 고 여우새끼가 도대체 몇 놈이나 데려왔소?]
[김단주의 신호를 받지 못해서, 저도 자세한 걸 모릅니다.]
[조사하러 간 구문 단주는 아직도 안 돌아왔나?]
[예, 아직....]
[하는 수 없군! 우 부단주가 몇 사람 데리고 다시 가보도록 하시오. 조심해서 말이야!]
지시를 내리는 회주의 말투에 초조감과 역정이 서렸다.
[알아 모시겠습니다. 이대로 곧 출발하겠습니다.]
다급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뛰어 내려온 우천남, 안채에 들어간지 얼마 안 있어 부하 다섯 명을 데리고 나왔다. 굳게 닫혀졌던 철문이 잠깐 열리는가 싶더니, 사람들을 내보내기가 무섭게 다시 철커덕 닫혔다. 모처럼 쏟아져 들던 찬 바람이 뚝 멎었다. 어수선하니 움직이는 틈을 타서, 시철은 안채쪽을 기웃거리다가 사뭇 낯익은 눈초리를 하나 발견하고서 그만 가슴이 철렁했다.
'저 놈이....! 오냐, 잘 됐다....!'
벌떡 일어선 시철은 안채를 향해 곧바로 걸어갔다. 2층에서 새로운 명령이
떨어지고 수색대가 출동하는 소란통이라, 다행스럽게도 그의 움직임을 눈여겨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채는 그리 넓지 않았다. 양씨네 안식구들의 거실인 듯, 후원쪽 끄트머리에 방 두 칸이 있는데, 반쯤 열려진 문틈으로 왁살스럽게 생긴 또 한 패거리가 여기저기 누워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든지 출동할 수 있도록 무상을 단단히 갖추었으나, 옷차림새를 보건대 흑응회 소속원들이 아니었다.
시철은 안채 내실로 들어가지 않았다. 복도 양 편 벽에 기대어 앉은 다섯과 걸상에 걸터앉은 남녀 넷 중 하나가 그 목표였다. 이들 역시 복면을 하고 있으므로, 걸상 끝을 차지한 사내를 빼놓고는 모두가 전혀 낯선 인물이었다.
시철이 노린 사람은 단 하나였다.
'미혼선객 여성동....! 이 작자도 흑응회에 투신했던가....?'
미혼선객(迷魂仙客) 여성동(呂成棟)이라면 바로 흑나비(黑胡蝶) 호추(胡秋)와 생사 결의를 맺었던 패거리다. 흑나비가 부하들 한 떼를 이끌고서 머나먼 투르판까지 활불(活佛) 라마의 조공행차를 습격, 약탈하러 떠났을 때, 구현운룡(九現雲龍)과 운몽쌍기(雲夢雙奇) 조차 가담했으면서도 전력(戰力)이 부족하여 그걸 메꾼답시고 오악광객(五岳狂客) 도영제(陶永濟)를 납치하는 실수를 저지르고, 시철의 일행 고령과 단목장풍을 잡아 가담할 것을 강요한 적이 있었다. 이 때, 오악광객과 고령 일행을 거꾸러뜨려 생포한 장본인이 바로 이 미혼선객 여성동이었다.
얼마 후 흑나비 일당은 성숙해(星宿海)에 도달하기 직전 팔조창룡을 비롯한 수사관들의 매복습격을 받아 거의 전멸당하고, 흑나비와 혈장(血掌) 오평(敖平)은 사로잡혀 즉석에서 처형되었으나, 그 막내인 미혼선객 여성동 하나만큼은 오악광객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도망치고 말았던 것이다.
그 뒤로 생사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결국은 흑응회의 그늘 아래 응크려 있을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미혼선객은 복면조차도 하지 않았다. 얼굴 모습도 전혀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그를 알아본 순간, 시철의 머리 속에는 놀라움과 아울러 기막힌 궁리가 하나 떠올라 펄쩍 뛸듯이 기뻐했다. 시철이 안채로 들어서자, 복도에 널려 있던 뭇사람들의 눈길이 집중되었다. 그는 문간에 서서 눈웃음 섞어 미혼선객을 향해 이리 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미혼선객은 그가 누군지도 모르고 걸상에서 일어났다.
흑응회 사람이 무슨 볼 일이 있어 부르는가 싶어, 그는 더 생각해볼 것도 없이 시철 앞으로 다가갔다. 시철은 그대로 돌아서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대청으로 나갔다. 미혼선객도 느긋하게 따라 가면서 의아스런 기색으로 물었다.
[형씨, 나한테 무슨 볼 일이 있으시오?]
시철은 아무 말도 말고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냈다. 그리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대청 안 패거리들은 그가 애당초 지하실에서 올라온 동료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여전히 관심을 두지 않았다. 지하실 문이 덜커덕 닫혔다. 멋모르고 따라 내려가던 미혼선객, 상대방이 아무렇게나 손을 내밀자 어둠컴컴한 속에서 계단 길을 인도하는 줄로만 알고 그 손을 맞잡았다.
시철의 오른손이 슬쩍 휘둘리기가 무섭게 그의 우측 기문혈(期門穴)을 찍어버렸다.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게 적당히 일격을 먹인 것이다. 암흑 속에서 길만 더듬느라 정신이 팔려 방심하고 있던 미혼선객은 뜻밖의 기습에 온 몸뚱이가 찌릿하는 감촉을 받았다. 방어할 틈도 없었다. 전신이 당장 뻣뻣하게 굳어지면서 지각을 잃어버린 것이다.
시철은 그의 몸뚱이를 쓰러지지 않게 부축해 안고서 나머지 계단을 내려섰다. 끝 계단을 딛고 내려섰을 때였다. 느닷없이 작살 한 자루가 목젖부위를 겨누고 휙! 하니 날아들었다. 날카로운 작살 끄트머리는 소리 하나 내지 않고 섬전(閃電)과도 같이 곧바로 인후(咽喉)를 노려 찔러든 것이다.
미혼선객의 무서운 미혼향만 경계해가며 제압하느라 잔뜩 주의를 기울이던 시철, 어둠 속에서 난데없이 불쑥 내밀어진 작살공격을 받고그만 등골이 오싹했다. 그래도 남다르게 반응이 예민한 터라 재빨리 몸을 틀어 피하면서 작살 끝을 덥석 움켜잡고 나지막하니 외쳤다.
[신숙부님, 접니다!]
계단 옆에서 놀라운 반응이 왔다.
[이크, 맙소사....!]
연파조객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몸뚱이마저 얼어붙고 말았다.
[자네였구만, 큰일날 뻔했어! 자네 방금 그 솜씨 기막히게 빠르던데, 그거 어디서 배웠나?]
대답 대신에, 시철은 작살 끝을 놓고서 다른 부탁을 했다.
[지하실 문 좀 지켜주십쇼. 누가 내려오는 기척이 있거들랑 귀뚜라미 소리로
경계신호를 보내주시고요.]
[그럼세!]
시철은 미혼선객을 커다란 쌀독 아래 쑤셔박아 놓고서 혈도를 쳐서 깨어나게 만든 다음, 나지막한 목소리로 요구했다.
[노형, 암말 말고 그 미흔향을 이리 내놓으쇼!]
미혼선객은 놀란 넋이 진정되지 않은 듯 떠듬떠듬 되물어왔다.
[당신....누구요? 우선배 부하가 아니오? 당신이 누군데....]
[쓰잘 데 없는 소리!]
[어째서 날 제압했소....? 무슨 까닭으로....?]
[잔소리 말고 어서 그 약이나 내놓으쇼! 아니면 생으로 껍질을 벗겨 죽일 테니까.]
시철은 낮게 으름장을 놓았다.
[아니, 뭐라구? 네놈이 날....]
[안되겠어, 우선 그 눈알부터 파내야겠군!]
시철이 눈알을 부라려가며 양 손가락으로 그 눈꺼풀을 찍으려 들자, 미혼선객은 그만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항복하고 말았다.
[알았어, 줄께! 여기 있다구!]
[그 손 치우쇼! 움쭉달싹도 말라구! 어디 감췄는지 그것만 얘기해.]
[내 소매 밑에....]
시철은 미혼선객의 옷깃을 들추고서 양 소맷자락 속에 묶어놓은 분무통(噴霧筒) 두 개를 끌러냈다. 지름이 두 치 남짓한 금속제 대롱이었다.
[해독약은?]
[여기 안 가지고 왔어....]
[내놓는 게 몸에 좋을 거요, 노형!]
[백보낭(百寶囊)속에....옥병이 하나 있을 거야.... 으으으!]
미혼선객 여성동은 정말 죽을 맛이다. 옥병을 꺼낸 시철이 그 효력을 시험해
보느라고 포로의 코끝에다 분무통을 쏜 다음 옥병의 해독약이 진짜라는 것을 거듭 증명하는 동안 연거푸 세 차례나 까무라쳤다가 깨어났기 때문이다. 시철은 약효가 확실하다는 것을 알고나자, 그제서야 아주 만족해서 미혼선객의 수혈(睡穴)을 찍어 푹 잠들게 만들었다.
[신숙부님, 코에 이걸 좀 바르십쇼.]
[그게 뭔가?]
[미혼선객의 일품 해독약입니다.]
시철은 연파조객과 자기 코 끝에 해독약을 바른 다음, 지하실 위로 올라가서
문짝을 절반만 열어놓고 분무기 두 통을 몽땅 뿜어내기 시작했다. 강호상에서도 일절(一絶)로 손꼽히는 미혼선객의 무서운 미향(迷香)은 아낌없이 쏟아져, 지하도의 강한 바람결에 실려 풍겨나갔다. 창문이 없고 철제 대문이 굳게 닫혀 있는 이상, 지하실은 아래층의 유일한 통풍구 역할을 한다. 지하실쪽에서 불어 올라간 바람은 미향을 끊임없이 윗층으로 풍겨나갔다.
[꽈당....!]
이윽고 육중한 물체가 넘어가는 소리, 어느 형씨꼐서 마수거리로 혼절해 쓰러진 모양이다. 누가 뭐래도 미혼선객의 미향은 확실히 지독한 것이었다.
냄새도 없고 빛깔도 없는 만큼 코끝에 스쳤다 하면 영락없다. 몇 년 전, 투르판 땅에서 팔조창룡을 비롯한 고수들이 사천지방의 강간 살인범을 일망타진, 몰살해버릴 때만 하더라도 멀거니 두 눈 뜨고 놓친 자는 미혼선객 하나뿐이었으니까, 그 독향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 만할 것이다.
아래층 안채 내실과 대청을 점령한 자들은 겨드랑이 밑에 혹이 생긴줄 까맣게 모르고 방심한 채 있다가 동료 한 명이 쓰러지는 변괴를 보게 되었다. 허나 그때는 이미 속수무책이었다. 제아무리 날고 기는 역전(歷戰)의 고수라 할지리도 가장 안전하다고 믿는 요새 안에서 전혀 경계하지 않은 상태로 불의의 돌발적인 사태에 직면한다면 그로서도 어쩔 도리가 엾다. 강호 경험이 풍부하고 무예실력이 뛰어나 봤자 그 역시 보통 사람이나 마찬가지로 미향에 거꾸러지는 액운을 모면할 길이 어디 있겠는가?
[꽈다당! 꽈당....! 털썩, 털썩....!]
강호 무림계에 내노라하는 영웅 호걸들이 경쟁이라도 하듯 너도나도 보기 좋게 거꾸러졌다. 그래도 분무통 속의 미향은 여전히 뿜어나온다.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위, 출입문을 지키던 보초 두 명이 돌연 허리를 꺾고 떼구르 굴러내렸다. 이 난리가 터진 줄 까맣게 모르고 2층에서는 단목 회주가 절반쯤 미친 사람처럼 으르렁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뭣들 하는 거야? 어서 빨리 남쪽 패거리한테 신호를 보내라구! 속히 배를 타고 나가서 물에 빠진 사람부터 건져내야 할 게 아닌가! 안중덕(安重德) 형제, 자넨 주채주(周寨主)더러 수하들을 거느리고 부둣가로 달려가 지원해 달라고 요청하게! 어서 빨리 서둘러!]
[옛! 알겠습니다!]
어지러운 발자국 소리가 들리더니, 와당탕퉁탕 계단을 딛고 내려오는 자가 있다. 그러나 다섯 발짝도 옮기지 못하고 앞으로 허리를 꺾고 꽈다당! 굴러
떨어져버렸다. 어느새 아래층 계단까지 달려 올라간 시철, 문지기 보초 두 놈의 몸뚱이를 치우기도 전에 또 하나가 굴러 떨어지자 미처 손을 뽑을 틈이 없다. 엉겁결에 비켜 서기는 했으나 절반쯤 닫히던 문이 다시 활짝 열리면서 머리통 하나가 불쓱 내밀어 이 기막힌 광경을 보고 말았다.
[앗! 이게 웬 일이야? 이크....!]
머리가 쑥 들어가고 문짝이 도로 닫히려 한다.
'이런,....들통났구나! 문짝이 닫혀버리면 내가 곤란하다....!'
시철은 분무통을 냅다 던져버리고 미친 표범처럼 날쌔게 돌계단 위로 뛰어올라갔다.
머리통을 내밀던 자가 무슨 일인가 싶어 마주 달려나오자, 그는 단 일격에 기절시키고 몸뚱이를 고스란히 받아내어 계단 아래로 굴려 보냈다.
[꽈다당!]
2층 문 앞에 다다랐을 떼, 그 앞에서는 엄한 호통이 터져나왔다.
[웬 소란들이냐?]
시철은 문짝을 왈칵 열어제치고 뛰어들면서 크게 마주 외쳤다.
[큰일 났습니다! 아래층에 강적이 침입했습니다!]
문짝이 열리자, 아래층 자욱하니 갇혀 있던 미향이 굴뚝이라도 뚫린 듯 얼씨구나 하고 2층으로 풍겨 올라갔다. 문 가까이 서성대던 복면객 세 사람이 앗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거꾸러졌다. 시철의 정면 가장 가까운 자리에 앉아 있던 도사 복장 차림의 중년인이 벌떡 일어났다. 그 오른쪽 의자를 차지한 사람은 호법 구뢰였다.
[앗! 미혼선객이다. 미향! 숨을 멈춰....!]
중년 도사는 말끝도 맺기 진에 몸뚱이가 휘청하더니 허리를 비틀면서 그대로 쓰러졌다.
[앗....!]
놀란 비명을 터뜨릴 틈도 없다. 대청 안 인물들은 하나같이 연기술(練氣術)에서 화후(火候)의 경지를 넘어선 정예 고수들이라, 비상사태에 직면하자 기민하게 호흡을 멎고 즉각 방어태세를 취했다. 그러나 이 중에도 한 순간 늦은 자는 7,8명이나 더 있었다.
호법 구뢰가 눈치 빠르게 움직였다. 그는 재빨리 시철 곁을 돌아 배후로 빠졌다. 퇴로를 차단당해서야 어디 될 법이나 한 일인가? 구뢰가 곁을스쳐 지나는 순간, 시철은 지체없이 반수(反手)로 일장을 후려쳤다.
[팍!]
매서운 손바닥 날이 구뢰의 뒤통수에 타격을 가하면서 무딘 소리를 냈다.
[꽈당!]
구뢰는 이마로 문기둥을 들이받고 한두 번 비틀거리더니, 돌계단 아래로 중심잃은 몸뚱이가 우당탕퉁탕 요란한 소음을 남기고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는 다시 움직이지 않았다.
바로 그 곁 눈치 빠른 복면자 또 한 명이 시철을 움켜 잡으려고 <휙!>하니 손을 내뻗으면서 무서운 기세로 덮쳐 들어왔다.
시철은 잽싸게 허리를 꺾어 피했다. 뒤미처 마주 뻗은 손아귀가 대마귀조(帶馬歸槽) 수법으로 상대방의 손목을 움켜, 고집 센 당나귀 마구간에 끌어넣듯 힘차게 당겨 끈 다음, 그 등판에 일장을 후려갈겼다.
복면자는 손발을 가누지 못하고 앞으로 푹 고꾸라지면서 견고한 돌벽에 <쾅!>소리가 나도록 머리통을 호되게 들이받고 말았다. 그리고 벽면을 따라서 주르르 미끄러져 내리더니 몸뚱이를 오그라뜨린 채 더는 움쭉달짝도 하지 않았다.
[탓!]
그 찰나, 회주 부인이 낮은 호통을 뱉아냈다. 장검을 뽑아들기가 무섭게 육박한 그녀는 한매토심(寒梅吐芯)으로 시철의 앞가슴 요혈을 곧바로 찔러 들었다. 선제공격으로 상대방의 손쓸 기회를 제압해 버린 것이다.
과연 시철에게는 공세를 차단할 공간도 시간적 여유도 전하 없었다.
그는 측방으로 선뜻 이동하여 우선 첫 일격에서 벗어났다. 회주 부인의 검세가 유성간월(流星趙月)로 훌쩍 바뀌더니, 바짝 따라붙어 추격해왔다.
허나, 시철에게는 벌써 칼을 뽑을 기회가 주어지고도 남았다. 휙 돌아선 그의 손아귀에서 칼날이 무지개를 그리면서 번뜩 날아갔다. 시철은 아낌없이
절초(絶招)를 구사했다. 간일발의 순간이라도 놓치는 날엔 만회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직감했던 것이다.
[쩡그렁! 챙!]
사나운 금속성이 연거푸 두 차례 울렸다. 허공에서 용틀임하듯 환영(幻影)을
그려내던 칼빛 무지개가 문득 멎더니, 사람의 그림자도 선뜻 갈라졌다. 흐드러지게 핀 모란꽃처럼 아리따운 회주 부인의 얼굴빛이 싹 변했다. 그녀는 단숨에 8척 거리나 도약해 물러섰다.
채색 머리수건 윗부분이 길게 찢겨지고 벌어진 틈서리에서 검은 머리칼이 우수수 떨어져 바람결에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 숱한 상황변화는 실로 극히 짧은 시각에 벌어진 것이었다. 시철이 돌입한
순간부터 격돌하여 호법 구뢰와 또 한 명을 거꾸러뜨리고 회주부인을 물리칠 때까지 상황의 발생도 빨랐지만 그 마무리도 전광석화처럼 끝을 맺었던 것이다. 회주 부인이 물러남과 동시에 두 번째 공격이 내습했다.
시철은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방어자세를 취했다. 공격자의 칼끝이 마치 하늘을 가로질러 뻗은 무지개처럼 거침없이 사나운 기세로 그의 허리께 요혈을 찔러 들어온 것이다.
[쩡!]
찔러든 칼끝을 옆으로 비껴내면서, 시철은 손목까지 찌르르 울려온 반탄력에
놀랐다. 하지만 한 걸음 선뜻 내딛은 보폭으로 상대방의 몸뚱이에 육박한 그의 왼손이 어깨우물에 얹히는가 싶더니 어느덧 견정혈을 움키고 있었다.
상대를 제압한 시철이 낮은 목소리로 꾸짖으면서 도로 밀어 내쫓았다.
[꺼떡대지 말고 저리 물러서 있어! 네가 나설 자리가 아냐!]
포로는 거친 손에 떠밀리다시피 풀려났다. 바로 시철의 막내 사매 주훤이었다. 그녀도 4년간 떨어진 세월 속에 어느덧 몸매도 풍신한 탯거리를 지닌 처녀로 성장해 있었다. 주훤은 장검을 놓쳐버린 손으로 어깻죽지를 주무르면서 비척비척 물러났다. 휘둥그래진 두 눈, 숨을 멎은 채 딱 벌린 입, 무슨 말을 할까 싶었으나 끝끝내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으음!]
단목 회주가 나지막하니 신음성을 내뱉더니, 시철을 향해 덤벼들려던 자들에게 뒤로 물러서라는 손짓을 보냈다. 뭇사람들은 병기를 거두고 물러나 일촉즉발의 경계태세만을 갖추었다.
모두들 미향이 흩어질 때까지 호흡을 멎고 있는 상태라, 호통소리한 마디 내지 않고 오로지 살기찬 눈으로 시철을 노려볼 따름이었다.
아래층에서 풍겨 올라오던 미향의 독성도 차츰 흐려지기 시작했다. 워낙 너른 면적에 퍼진데다 공기의 흐름도 자못 빨랐기 때문에 그 지독스런 미향은 바람결에 따라서 빠른 속도로 창문을 통해 빨려나가는 것이다.
이제 시철의 눈길은 동편 석실(石室)에 쏠려 있다. 방안의 정경이 전혀 보이지 않아, 손목을 묶인 처녀의 모습도 볼 수가 없었다. 그 문간에는 늙은이 젊은이 합쳐서 여섯 명이 길을 가로막고 버텨 섰다.
단 한 번의 돌격으로 방안까지 뛰어든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다. 더구나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다급한 김에 인질을 살해할지도 모른다. 공연히 생쥐를 잡으려다 장독 깨는 위험은 할 짓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무슨 수를 써서라도 방문은 제압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선 여기까지 애써 침투한 보람이 물거품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시철은 독하게 마음먹었다. 일이 다급한 처지에 정도(正道)만을 따질 입장이
아니다. 지금과 같은 상황, 이런 시점에서는 도리라든가 규칙, 인정 사정 따 따위 존재하지 않는다. 있다면 오직 하나, 죽느냐 사느냐 그 이해관계뿐이다. 왼손이 번쩍 들렸다.
[우와앗---!]
복면을 한 그 입에서 대갈일성, 마치 동굴 속에서 벼락때리는 듯한 기합성이
울렸다. 뒤이어 허공을 찢어내는 파공음....
[쏴아아! --]
발사된 철령전은 한두 대가 아니었다. 그것은 보루에 잠입할 당시부터
군공(群攻)에 미리 준비해 둔 소나기였다. 철령전의 꼬리를 쫓듯 신영(身影)이 번뜩 움직였다. 그는 이미 방문쪽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다.
호흡을 멎은 사람이면 숨통이 막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함부로 지체(肢體)를 놀려 움직일 수가 없다. 방문 앞에 버텨 선 여섯 사람은 바야흐로 암암리에 병기술(屛氣術)을 운공하여 미향의 침입을 겨우겨우 막고 있는 터였다.
이들이 성한 상태라도 모를 텐데 지금같이 오래도록 호흡을 정지한 상태에서 쾌속 절륜한 철령전의 소나기를 무슨 수로 피해내겠는가?
[으앗....!]
[아이쿠!]
놀람과 당황감에 찬 비명이 연거푸 터져나왔다. 저릿저릿한 충격을 받게 되니, 저도 모르게 막혔던 숨통을 터뜨리고 공기를 들이켤 도리밖에 없다.
[꽈다당! 꽈당....!]
몸뚱이가 차례로 넘어가는 소리, 여섯 사람은 똑같이 오른편 넙적다리에 쇠화살 한 대씩을 얻어맞고 기공이 파괴되는 무서운 고통에 이를 갈아가며 쓰러졌다. 이제 앞 길을 가로막을 자는 없다.
'됐다! 저지선이 뚫렸구나....!'
시철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러나 그 기쁨도 한 순간, 기습공격은 성공일보 직전에서 수포로 돌아갔다. 유령처럼 조용히 들이닥친 단목 회주의 칼빛 무지개가 눈 앞에 서릿발을 뿜어내며 찔러들고 있었던 것이다.
[앗! 저칼....!]
시철은 실성을 터뜨렸다. 맙소사! 단목응양이 휘둘러 친 병기는 다름아닌 운생의 상화보검이 아닌가....! 저것은 도저히 받아낼 수 없다....! 문짝을 향해 무서운 기세로 돌입하던 그는 엉겁결에 측방으로 허리를 틀어 회주의 일격에서 벗어났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시철의 진로를 선뜻 봉쇄해버린 단목응양.... 이것으로 시철의 기습돌파 시도는 눈 깜짝할 순간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그의 손아귀에는 아직도 철령전 석 자루가 남아 있다. 이것을 발사하려 했으나, 그마저 한발 늦었다. 뒤따라 움직인 또 한사람이 단목응양의 앞을 가로막아 우뚝 선 것이다. 번쩍 쳐들렸던 시철의 손이 맥을 잃고 스르르 내려오고 말았다. 그 입에선 암울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단목응양 앞에서 방패막이가 된 인물은 다름아닌 흑응회의 부회주, 바로 자신의 스승 표묘신룡 서방 그 사람이었던 것이다.
[웬 놈이냐!]
이때야 비로소 단목 회주의 입에서 엄한 호통이 터져나왔다. 시철은 얼음장처럼 싸느란 눈초리로 사면을 훑어보더니, 마침내 결단을 내린 듯 제 얼굴을 가리웠던 복면을 사납게 뜯어제쳤다.
[앗! 너는....?]
표묘신룡이 숨을 들이켰다. 시철은 장검을 거두어 넣었다. 허리를 구부리고 첫 인사를 올리는 그 얼굴이 침통하기 이를 데 없다.
[스승님, 평안하셨는지요. 제자 시철입니다.]
시철은 그 자리에 두 무릎꿇고 머리 조아려 스승을 뵈었다. 잃어버린 제자를
4년만에 다시 보게 된 표묘신룡 서방, 그의 일굴은 실로 참담하기 이를 데 없이 일그러졌다. 반도(叛徒)가 되어서 돌아온 제자....!
[짐승같은 놈! 아직도 날더러 스승이라 부를 낯짝이 있느냐?]
[육 년 동안 길러주시고 가르쳐구신 은혜, 이 제자가 하루 한 시인들 잊었겠습니까?]
[개 녀석이 담도 크구나! 기사멸조(欺師滅祖)의 대죄를 저지르고서도 이 하늘 아래 군사부(君師父)를 다시 뵐 마음이 있더냐? 그 죄 어떤 벌을 받게 되는지 알기나 하는가!]
표묘신룡의 노한 꾸짖음이 대청 안에 쩌렁쩌렁 울렸다.
[스승님, 변명으로 드리는 말씀이 아니올시다만....]
[닥쳐라!]
표묘신룡은 대갈일성, 오른손을 번쩍 휘둘렀다. 큰 사형 정충(程忠)이 선뜻 앞으로 나섰다. 그 칼끝은 돌바닥에 꿇어앉은 셋째 사제의 등줄기를 겨누었다. 시철은 피할 생각을 하다가 또 참았다. 그리고 여전히 무릎꿇고 움직이지 않은 채 목청을 돋우어 낭랑하게 부르짖었다.
[불초한 제자이오나, 이 마음은 황천후토(皇天后土)께서 굽어보십니다!]
[흐흠! 아직도 주둥아리를 놀려 변명할 생각이냐?]
[이 제자는....]
[스승된 몸으로서 네놈의 기사멸조한 죄부터 다스린 다음, 우리 회규(會規)에 따라서 반역대죄를 따지기로 하겠다! 정충아, 우선 그놈의 무장을 해제시켜라!]
정충이 다가와 시철의 허리춤에서 장검을 떼었다. 시철은 속에서 울컥 치밀어오른 반항의 충동을 다시 한 번 억누르고 비통하게 소리쳤다.
[스승님! 불초 제자놈에게 몇 마디 변명할 기회를 주십쇼!]
[한 가지만 묻겠다! 투르판에서 돌아은 직후 어찌하여 대천성채로 복귀하지
않았느냐? 스승의 분부는 거스를 수 없을 터, 네놈의 심중에 아직도 존장(尊長)을 대하는 마음이 남았더냐?]
[불초 제자, 만부득이한 일이었습니다....!]
[억지쓰지 마랏!]
[제자는....]
[정충아, 우선 이놈의 두 다리 힘줄부터 끊어놓거라!]
[분부 받드오리다!]
대답 한 마디, 정충의 칼끝은 곧바로 시철의 무릎 안쪽 오금을 겨누어 낮춰졌다. 검망(劒芒)이 번뜩 빛났다. 생사 존망이 왔다갔다 하는 판국에 시철이라고 순순히 목을 늘여 죽음을 받을 수야 없다. 대사형의 칼끝이 휙! 하니 찔러들자, 그는 손바닥을 뒤집어 일장을 내쳤다.
[쨍그렁!]
정충이 기세좋게 찔러들던 장검은 해말간 쇳소리를 울리면서 주인의 손아귀를 벗어나 허공으로 날았다. 이것을 보고 아연실색한 표묘신룡,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수리전(袖裏箭) 한 대를 쏘아보냈다. 그것은 제자의 심장부위를 노린 치명적 살수(殺手)였으며, 그리고 두 번 다시 만회할 길 없는 실수였다.
[탁....!]
스승의 무정한 쇠화살촉은 제자의 심장요혈에 정통으로 격중했다. 그러나 반탄력에 도로 퉁겨져나와 땅바닥에 떨어지고 말았다.
시철이 쇠화살을 집어들었다. 벌떡 몸을 일으킨 그의 눈썹이 당장 곤두서더니, 부릅뜬 호랑이 눈초리에서 저릿저릿한 냉전(冷電)이 사면팔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이윽고 그 입에서는 노염과 서글픔, 한맺힌 목소리가 침통하게 떨려나왔다.
[아무리 잔인한 호랑이도 제 새끼는 잡아먹지 않는 법, 이 제자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고 땅을 굽어 떳떳한 몸이외다! 스승님, 이 화살은 너무 지나친 형벌입니다! 너무 악독하셨습니다! 스승님..!]
[앗....! 네놈이 금강불괴법체(金剛不壞法體)를 단련했구나!]
표묘신룡이 기급을 해가지고 물었다. 그는 제 눈조차 믿을 수가 없었다. 시철은 쇠화살을 땅바닥에 내던지고 <푸우!> 긴 한숨을 토해냈다.
[스승님의 은혜가 무겁고 깊다 하나, 그래도 이 세상 천지에는 하늘의 도리가 있고 국법이 있으며, 그보다 더 무거운 인간의 정리가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이 몸더러 끓는 물 타는 불 속에 들어가라 하시면 지체없이 뛰어들련마는, 천리(天理)를 해치는 일을 하라시면, 불초 제자 그 분부는 감히 받들지 못하오리다!]
[너, 이 죽일 놈....!]
[절받으십시오! 불초 제자의 마지막 인사오이다.]
시철은 다시 그 자리에 엎드려 사배(四拜)를 올렸다. 그리고나서 표묘신룡의
쇠화살을 집어들었다. 새하얗게 질린 얼굴에 서릿발이 어리더니, 그 화살로 자신의 왼쪽 팔뚝에 <푹!> 찔러넣었다.
비정한 살촉은 뼈 틈서리를 꿰뚫고 들어가 반대편으로 절반이나 빠져나왔다.
그는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화살 박힌 손을 번쩍 쳐들고서 침통하게 외쳤다.
[나 시철은 하늘을 이고 땅을 딛고 서서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 결단코 천리를 해치는 미친 짓을 아니하오리다! 황천후토, 귀신 영령이시어! 굽어 살피소서! 불초 제자는 스승께서 내린 이 탈명신전(奪命神箭)을 뜨거운 피로 적셨나이다! 이것으로 사제지간의 정리를 끊고, 은혜도 원한도 모두 씻어버렸나이다!]
무서운 맹세요, 선언이다. 그는 입술을 악물고 팔뚝에 꽂힌 탈명신전을 꺾어
뽑아냈다. 살대가 빠지면서 시뻘건 선혈이 왈칵 솟구쳐 나왔다. 부러진 탈명신전을 스승의 발치 앞에 툭 내던진 시철, 범같은 눈망울에서 얼음장보다 더 차가운 빛을 쏘아내며, 한 마디 한 마디씩 끊어 말했다.
[당신은 나한테 비정함을 가르쳤으나, 나는 의리를 저버릴 수가 없소! 이제
마지막으로 부르리다. 스승님, 이 불초한 제자놈의 일에서 손을 떼십시오!
지금부터 스승님께 더이상 죄를 저지르지 않게 해주십시오. 부디 이 제자의 한 가닥 정리마저 버리지 않도록 아껴주십시오!]
일순 간절한 빛을 띠던 그의 눈길은 단목 회주에게 옮겨가면서 다시 얼음장으로 차갑게 돌변하고, 목청마저 우렁차게 바뀌었다.
[단목응양! 그대가 거느린 흑응회는 강호상에서 직업 암살로 장사를 해 왔을
뿐더러, 국적 엄숭 엄세번 부자의 문지방에 투신하여 사냥개 노릇을 했소! 그 행위는 개 돼지만도 못한 염치없는 짓이었소! 투르판에서 중원으로 돌아온 이후, 나 시철은 차마 흑응회의 정체와 내력을 만천하에 폭로한 적이 없었소. 이것만으로도 그대의 낯을 세워주었다고 생각하오.
허나, 그대는 내 동반자를 납치하고 온갖 수단 방법을가리지 않고 나 시철을 죽음에 몰아넣으려 했소. 그래도 나 시철은 과거 스승님과의 정리를 생각해서 그대와 다투지 않겠소. 내 동반자만 건네준다면 이대로 곱게 떠나리다!]
[아니, 너 죽일 놈의 새끼! 그래도 뻗댈 작정이냐?]
듣다 못한 표묘신룡, 안색이 새파랗게 질려가지고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오른손을 휘둘러 <철썩! 철썩!> 따귀를 돌려쳤다. 그는 순간적인 기회를 포착해서 나머지 왼손 하나로 시철이 반격하는 손길을 움켜잡으려 마음 먹었으나, 뜻밖에도 시철은 반격을 하기는 커녕 회피동작조차 취하지 않고 스승의 손매를 고스란히 얻어맞는 게 아닌가!
저항의 기회를 노려 제압하려던 그는 시철이 충격에 밀려 털썩털썩 뒷걸음질치는 바람에 그만 놓치고 말았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는, 안타깝게도시철은 이미 손끝 바깥으로 벗어나 있었던 것이다.
[스승님, 이래선 안됩니다! 이래서는....]
당장에 퉁퉁 부어오른 시철의 두 뺨 근육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바로 옆 방에서 또 다른 사람이 달려나오더니, 노성을 버럭 질러 꾸짖었다. 큰 공자 서창이었다.
[시철! 네놈의 눈에 아직도 사제간의 도리가 비치느냐? 그렇다면 당장 이 자리에 무릎꿇어라! 어서 꿇지 못할까!]
시철의 눈길이 서글프게 상대방을 노려보더니, 발작적으로 돌아서서 그대로 떠나려 했다.
[사제! 거기섰거라!]
큰 사형 정충의 장검이 번뜩하고 길을 가로막아 섰다.
[날 막지 마시오, 큰 사형!]
시철은 침착한 어조로 애원했다. 그러자, 사매 이봉(李鳳)마저 나서서 큰 사형과 어깨를 나란히 칼끝을 겨누었다.
[사형, 당신은 못 가!]
[넷째 사매, 이 어리석은 형이 여기서 죽기를 바라는가?]
시철의 가슴아픈 물음에, 이봉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나는.... 나는....]
[길을 비켜줘요!]
시철은 큰 사형에게 냉랭하니 요구했다. 돌연, 그 등 뒤에서 큰 공자 서창이
유령처럼 슬그머니 다가와, 손가락으로 번개같이 뇌호혈(腦戶穴)을 찔러들었다. 사면 팔방 위험한 적수들에게 에워싸인 시철, 단 한 순간도 놓치지않고 촉각을 곤두세운 그가 배후 습격에 당할 리가 있겠는가!
시철은 앞으로 나서는 대신 반대로 뒷걸음질쳐 물러나면서 지력(指力)이 뒤통수에 닿기 직전까지 기다렸다가 슬쩍 머리를 수그려 일격을 피해냈다. 서창의 일지는 허방을 찌르고 목표 귓밥을 스쳐 나가고 말았다. 그 다음에는 반격, 시철의 오른 손아귀가 번쩍 들리더니 반 푼의 오차도 없이 공격자의 맥문을 덥석 움켜버렸다.
손아귀에 억센 물체가 잡힌 것을 느끼면서, 그는 주저앉을 듯 허리를 낮춰가며 질풍같이 한걸음 더 물러났다.
서창의 하반신이 등에 얹히자, 그는 맥문을 움킨 오른손을 그냥 앞으로 썩
끌어당겼다.
서창의 역습 반응 또한 기막히게 빨랐다. 오른쪽 절반이 마비되어 저항력을
잃는다고 느낀 찰나, 그는 전광석화처럼 발길질을 내뻗음과 동시에 왼손 집게로 시철의 목젖을 급히 움켰다.
그러나, 서창은 자신보다 한층 뛰어난 역전의 고수와 상대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반격은 꼭 한 순간이 늦었다.
상대방의 등판에 하반신이 덥석 얹히자, 그 발길질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졌다. 인후(咽喉)를 움켜가던 왼손 집게도 목덜미에 닿기는 했지만, 그 다음에는 도무지 힘을 쏟아넣을 수가 없었다.
서창은 자기 몸뚱이가 공중에 붕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갑자기 하늘이 빙빙 돌고 땅바닥이 어지럽게 춤을 추있다. 그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또 어떻게 손을 써야 좋을지 미처 생각하기도 전에, 시철은 벌써 그 몸뚱이를 2장 바깥으로 힘껏 내던지고 있었다. 서창의 거구(巨軀)는 큰 사제 정충과 넷째 사매 이봉의 머리 위를 지나쳐 그 뒤로 날아갔다.
[꽈당!]
단단한 바위 벽 중턱에 부딪친 서창의 몸뚱이, 다시 한 번 지면으로
곤두박질치면서 <쿵!>하고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는 눈 앞이 캄캄해지고 넋이 다 빠져나가, 거의 기절하기 직전의 상태가 되고 말았다.
서창이 본의 아니게 공중제비를 도는 찰나, 또다시 청색 복면객 두사람이 펄쩍 뛰어 달려나오더니, 시철을 좌우에서 에워싸고 쌍검 협공을 가해왔다.
하지만 그들의 공격동작은 서창이 태질을 당하는 순간에 놀라움을 숨기지 못하고 주춤한 것이 결정적으로 패인이 되어버렸다.
쌍검이 찔러들자, 시철은 그 자리에 넙죽 엎드려 우측방으로 한 바퀴 굴러 나갔다. 그와 동시에 다리 한 짝이 빗자루질하듯 힘차게 지면을 휩쓸어 쳤다.
[따악!]
반응이 왔다.
[아이쿠....!]
오른쪽에서 공격하던 자가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덫에 걸린 노루새끼처럼 그
자리에 털썩 고꾸라졌다. 소당퇴(掃堂腿)의 일격에 그만 두 발목뼈가 모조리
부러진 것이다. 그가 다시 일어서려면 몇 해 좋이 병상에서 썩어야만 할 게
틀림없다. 눈치 빠른 시철, 상대방의 손아귀에서 떨어지는 장검을 받아들기가 무섭게 <획!> 내던졌다.
빠르다! 너무나 빨라서 그 동작을 눈길에 담아넣은 자는 한 사람도 없었다. 서슬 퍼런 칼날이 허공을 가르고 번뜻 빛나는가 싶더니, 어느덧 좌측방 공격자의 가슴을 꿰뚫고서 등 뒤로 1척 가까이나 빠져나가 있었다.
공격자의 몸뚱이가 휘청하는 순간, 굶주린 표범처럼 날쌔게 도약해 달려든 시철, 그 손아귀에서 장검을 선뜻 빼앗아 들고 나지막히 으르렁 거렸다.
[모두 거기 서시오! 또 누가 덤빌 테요?]
정충과 강화, 이봉, 주훤, 이들 네 사형 사매는 사면에서 일제히 덮쳐들다가
우뢰처럼 귀청을 때리는 호통에 흠칫 놀라, 저도 모르게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고 말았다.
[꽈당....!]
뒤이어 대청 바닥이 들썩하도록 큰소리가 울렸다. 장검에 가슴을 꿰뚫린 자의 몸뚱이가 넘어지는 소리였다. 실로 쾌속하기 이를 데 없는 역습, 놀랄 만큼 빠른 반사동작, 소름이 오싹 끼치도록 무섭고 사나운 공격력은 대청 안의 모든 적수들을 남김없이 위압하여 그 자리에 못박아놓고 말았다.
잠시 후, 표묘신룡의 입에서 미친 듯한 호통이 터졌다.
[정충! 강화! 이봉! 주훤! 어서 저 반도놈을 처치하지 못할까! 한꺼번에 덤벼라! 저 기사멸조한 짐승놈을 쳐죽이란 말이다!]
스승이 분부를 내렸는데, 감히 거스를 제자가 어디 있겠는가? 사형사매 넷은
무리한 명령인 줄 뻔히 알면서도 시철에게 덤벼들지 않을 수 없는 처지다.
[이얏!]
[얍!]
네 사람은 이구동성으로 사나운 폭갈(暴喝)을 터뜨렸다. 목표 하나를 놓고 넉 자루 장검이 번뜩 모아졌다.
대청이라야 연무장처럼 그리 너른 면적이 못되는 데다, 사면에 정신을 잃고 쓰러진 사람과 부상자, 시체가 즐비하게 널렸을 뿐 아니라 또 10여 명의 고수들이 에워싸고 있는 만큼, 다섯 명이 협공을 하기에는 워낙 비좁았다.
또한 집중공격을 받는 측도 유투술(游鬪術)을 쓸 수가 없어, 반드시
정면으로 강공(强攻)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대결을 하지 않는다면 모르거니와 일단 맞붙는 날에는 죽기 아니면 살기, 사형 사제들끼리 생사 결판을 내어야만 하는 위태로운 국면이 조성된 것이다.
미우니 고우니 해도 6년간 동문 사형제의 정리라면, 그것만으로도 세상 천지 어떤 보물보다 값진 것이다. 이런 사이에 시철이 어찌 차마 독수를 써서 사형 사매들을 해치고 싶겠는가마는, 상황이 극도로 험악한 데다 외따로 협공을 당하는 몸이니, 독수를 쓰지 않으려면 그 한 목숨 하늘에 붙일 도리밖에 딴 도리가 없다.
그는 이를 악물고 대갈일성 호통을 지르면서 선제공격으로 나갔다.
[타앗! --]
기합성을 따라 시철의 손아귀에서 한줄기 검홍(劒虹)이 번뜩였다. 그야말로 건곤 일척, 벼락에 놀란 번갯불처럼 길게 뻗어나간 일격이 넉 자루 장검의
공격진(攻擊陣) 속으로 돌입했다. 쌍방 다섯 명의 그림자가 후딱 합쳐져 한
덩어리를 이루었다.
[쩽그렁! 챙, 챙!]
주위의 관전자들은 그저 칼빛 그림자가 한데 뒤엉키고 날카로운 금속성이 귀청을 찢어가며 지긋지긋하게 울리는 소리만 보고 들었을 따름이었다.
그 다음, 허깨비같은 그림자 하나가 돌연 칼빛 그림자의 덮개를 벗어나 연기처럼 유연한 동작으로 탈출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것은 완연한 귀신의 환영(幻影)이라고 밖에 볼 수가 없었다.
관전자들이 그가 누구인지 미처 확인하기도 전에 그림자는 벌써 대청 문까지 접근하고 있었다.
대청 문을 봉쇄한 두 명의 복면객이 가까스로 그 존재를 알아차리고 손에 잡은 장검을 휘둘러가며 정신없이 앞길을 차단했다.
칼빛 무지개가 뻣속 깊숙이 에이는 검기(劒氣)를 뿜어내며 들이닥쳤다.
[쩡! --- 쩡! ---]
강철이 맞부딪는 쇳소리가 두 차례, 방어자가 휘두르던 장검 두 자루는 억센
충격을 받고 허공에 맥없이 퉁겨 날았다. 피할래야 도저히 피할 틈도 시간적
여유도 없다. 발꿈치를 물어뜯듯 바짝 들이닥친 칼빛 그림자 아래, 방어자들은 복면 속에서 숨막히는 비명을 질러댔다.
[으악!]
[아얏....!]
문턱에 발이 걸려 엉덩방아를 찧고 나가떨어진 두 사람은 몸뚱이를 가누지 못한 채 그대로 계단 아래까지 우당탕퉁탕 요란하게 굴러 내렸다.
시철의 검초가 발동했을 때부터 방어자들이 타격을 받아 굴러 떨어질 때까지 시각은 고작 눈 한 번 깜빡할 찰나였다.
겹겹으로 에워싸인 포위망을 돌파해 나온 시철이 수문장(守門將) 두 놈을 거꾸러뜨리고 막 대청 바깥으로 한 발 내딛으려던 순간이었다.
그는 등 뒤에서 또 다른 검기가 몸을 압박해드는 것을 직감했다.
뒤따라붙은 고수 두 명이 측방으로부터 기습적인 살초를 찔러든 것이다.
'이런, 사형과 사매들이 또 따라붙었구나....!'
그는 대선회(大旋回) 동작을 그리면서 다급하게 장검을 휘둘러 봉쇄했다.
그러나, 상대방의 검기가 이미 몸에 와닿는 것을 느끼자, 그 역시 독수로 반격하여 봉쇄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판단이 섰다.
한데, 선회동작을 취하는 찰나 얼핏 눈길에 잡힌 상대방이 결코 사형이나 사매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말았다. 시철의 가슴 속에서는 역겨운 반감이 불끈 솟구쳤다.
[타앗! --]
대갈일성 기염에 뒤따라, 그의 손에서는 춘뢰경칩(春雷驚蟄), 뇌정검법의 절초가 펼쳐졌다. 칼빛 무지개가 불쑥 나타났다가는 사라지고, 흐린 봄날 우뢰치듯 풍뢰성이 울리는가 싶더니 이내 스러졌다.
어지러이 움직이던 사람들의 그림자도 우뚝 멈춰 선 채, 또다시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시철은 문턱을 밟고 서 있었다.
문호에 곧추세운 칼끝이 시뻘겋게 피로 물들어 뭇사람의 눈길을 끌었다.
그의 왼팔 역시 피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마치 선지핏덩이로 뭉쳐놓은 것
같았다. 그 피는 스승의 탈명신전으로 꿰뚫린 상처에서 흘러나온 것이다.
시철은 벌써 적지않게 피를 잃어버린 상태였다.
후측방에서 기습공격을 시도한 두 사람은 석벽에 기대어 선 채 버둥버둥 살기 위해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러나 버둥거릴 때마다 자꾸만 꼬여가는 몸뚱이가 말을 듣지 않고, 벽면을 따라서 주르르주르르 천천히 무너져 내렸다. 이윽고 벽을 기댄 자세로 대청 바닥에 주저앉은 두 사람, 손발이 한바탕 경련을 일으키다가는 마침내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가슴 앞자락과 등판은 선혈로 온통 범벅이 되어 있었다. 앞가슴의 구미대혈(鳩尾大穴)에서부터 등까지 맞뚫리는 관통상을 입었던 것이다.
사형과 사매 네 사람은 정신을 놓고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다. 얼굴빛은 하나같이 다 타버린 잿빛으로 새카맣게 죽어 있었다. 방금 눈앞에서 벌어진 무서운 상황에 넋이 다 빠져나간 것이다.
스승 표묘신룡, 딱 벌어진 입에 혓바닥마저 얼어붙은 듯, 넋나간 기색으로 멍청하니 시철을 바라볼 따름이다. 큰 공자 서창이 부르르 몸서리를 쳤다. 석벽에 부딪쳐 머리통이 터지고 실낱같은 피를 흘리면서도 얼굴은 납빛으로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동편 석실 문을 가로막고 서 있던 회주 단목응양도 안색이 싹 바뀌었다. 한참만에야 겨우 말문이 트였는지, 그의 입에선 중얼중얼 혼잣말이 새어나왔다.
[이건....뇌정검술....뇌정검술이다....! 그가, 그가 살아 있다니....]
단목응양의 뇌리에 문득 뇌정검 시병건의 모습이 떠오른 모양이다. 표묘신룡이 황공스런 기색으로 회주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두려운 듯 떠듬떠듬 아뢰었다.
[저놈은....금강불괴법체를 연마했습니다.... 보검으로도 저놈을 해치기 어려울 듯 싶은데....]
[하지만, 저 놈의 팔뚝은 쇠붙이로 꿰뚫리지 않았소?]
회주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역정섞어 되물었다.
[그야 제 손으로 제 몸뚱이를 찌르자면 운공하지 않았을 테고, 그렇다면
범태육골(凡胎肉骨), 보통 사람이나 다를 바 없게 되지요.]
[부회주, 설마하니 여기서 손을 떼자는 말씀은 아니겠지?]
[여기서 부하들을 더 투입해봤자 아까운 인명만 희생시킬 뿐입니다.]
[그래, 어쩌면 좋겠소? 부회주 생각을 들어봅시다!]
[저하고 회주님하고 협공한다면 혹 살상할 수도 있을 듯 합니다만..]
그러자 단목 회주는 도리질을 하더니, 목소리를 한껏 낮춰 속삭였다.
[저놈은 당신과 감히 싸우려 들지 않을 거요. 스승 면전에 칼을 들이댈 용기는 없을 테니까, 그 약점을 노려 제압하시오. 내 말 미덥지 않소? 어디 시험해 보시구료!]
표묘신룡으로선 회주의 분부를 어길 수 없다. 그는 장검을 뽑아 잡고서 앞으로 나섰다. 시철은 한 발 한 발씩 뒷걸음질쳐가며 회주를 보고서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난 물러가리다! 당신과는 또 만날 때가 있겠지. 단목응양, 그대도 어느날인가 몰락할 때가 올거요. 당신이 죽는 그날까지 내스승을 곁에 붙잡아 두리라곤 생각되지 않소. 그대가 이 세상 다시 없는 몰염치꾼이라 하더라도, 내 스승을 당신네 부부 침상머리에 평생토록 모시고 있으리라 생각하면 그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거요.]
지나친 독설, 지나친 악담이 아닐 수 없다. 강호상의 위명이 쟁쟁하신 원로급 고수 보응신 단목웅양이 아니라, 이름없는 일개 촌부속자(村夫俗子)가 듣더라도 그냥 삼키기 어려우리만큼 각박한 모멸이었다.
부하들과 후배 문하생이 즐비하게 늘어선 면전에서 이런 모욕을 받았으니, 단목 회주님께서 이대로 물러서서야 될 법이나 한 일인가? 불끈 치밀어오른 울화에 머리통이 터질 지경으로 격노한 단목 회주, 수치감과 분노의 무명겁화(無名劫火) 불덩어리가 번갈아 오장육부를 지져대는 바람에 그만 발광 직전의 상태까지 이르고 말았다.
[모두들 저리 비켜! 내 칼로 저놈의 몸뚱아리를 천 번 만 번 쑤셔박고 육시처참을 해도, 내 이 맺힌 한은 안 풀릴 게다!]
이쯤 되면 늙은 호랑이가 여우새끼의 격장법(激將法)에 고스란히 걸려들고 만
셈이다. 스승과의 대결을 꺼린 시철, 한바탕 퍼부은 독설이 효과를 거두게 되자, 회심의 미소를 던져가며 단목 회주의 광기(狂氣)를 마음껏 비웃어 주었다.
[단목응양, 투르판에서 나는 그대를 용서해 풀어주었소! 애당초 나 시철은 당신과 같은 위인과 상대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동서남북 가는 곳마다 그대가 영웅호걸 노릇을 뽐내도록 피하고 양보해드렸지!
그러나, 당신은 무엇이 강하고 약한지 분별도 못하는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었소. 물론 나도 그대가 비루한 수단으로 더러운 돈을 벌어들이는 걸 참견하고 싶은 마음도, 또 그대가 어떤 개놈의 앞잡이 노릇을 하거나 말거나 시비를 걸 생각도 없지! 다만 내 동반자를 납치해 간 행위만큼은 용서해드리지 못하겠소! 자아, 어디 덤벼보시게나.]
칼자루에 손을 얹은 단목 회주, 두 눈망울에서 불길을 활활 뿜어내가며 서서히 시철 앞으로 육박하기 시작한다. 누군가 다급한 손길이 바닥에 쓰러진 시체와 부상자들을 한 곁으로 끌어당겨 싸움터를 넓혀 놓는다. 시철도 성큼성큼 2보 내딛더니, 칼끝을 스르르 곤두세우며 빙그레 웃었다.
[그대 손에 잡힌 칼은 이름이 상화(霜華), 바로 내 동반자의 소유물이지! 그 칼은 칼날에 솜털을 불어날려도 깨끗이 베어질 만큼 날카롭고, 바윗덩어리를 깎아 절벽을 만들 수도, 구리쇠를 단숨에 힘들이지않고 꿰뚫을 수도 있거든? 그대 솜씨에 신검마저 들렸으니 이야말로 범의 겨드랑이에 날개를 달아드린 격일세 그려! 어디 일평생 배운 솜씨를 마음껏 발휘해 보시오. 그리고 이 대청 바닥에 누구 피가 흐르는지 두고 보기로 합시다!]
바둑 내기에서 돌을 쥔 당국자(當局者)는 제 판에 미혹되지만 곁에서 보는
방관자(傍觀者)의 눈에는 대국(大局)이 또렷하게 보인다고 한다. 지금 여기서 회주 부인이 그 방관자였다.
그녀는 시철의 얼굴에 자신감과 침착성, 필승의 신념, 더구나 원한서린 냉혹성이 찰철 흘러 넘치는 것을 읽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자기 남편의 얼굴에는 충동심과 격한 분노, 수치감으로 일그러진 기색이 역력하게 돋보이고 있었다. 어느 대결에서나 이성을 잃은 쪽은 패배하게 마련이다.
지금 남편의 눈에는 사물이 또렷하게 보이지 않을터, 이래가지곤 기백과 투지면에서 이미 한 수 접히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녀는 다급한 나머지 남편에게 버럭 소리쳤다.
[응양! 저 방 안에 있는 사람을 조심해요. 작은 걸 못 참으면 큰일을 망치게
돼요!]
그 한 마디는 미망(迷妄) 속에서 헤매던 회주를 일깨우고도 남았다. 시철을 향해 곧바로 육박해가던 단목 회주의 발길이 주춤하더니,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크게 외쳤다.
[그 방의 계집년을 끌어내다 죽여라! 어서!]
회주는 포로를 죽인다는 위협으로 시철을 격노시켜, 그 얄밉도록 냉철한 이성을 잃고 발광하게 만들 생각이었다. 그러나 이 시도는 한마디로 실패했다. 시철의 가슴 속에 진작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한 대비책이 마련되어 있었을 줄이야 회주가 알 리 없었던 것이다. 시철은 코웃음쳐가며 그 엄포를 무시해버렸다.
[사람 놀라게 하지 마시구료! 당신이 누굴 죽이든 나하곤 아무 상관이 없으니까 말이외다!]
[그년은 바로 네 여자 친구야!]
[헛헛헛! 그녀가 여기 있다는 걸 내 눈으로 확인하지도 않았소이다.]
[좋다, 내 그년을 죽여서 보여주마!]
[그녀를 죽인다고 내 외눈 하나 깜짝할 줄 아시오? 당신처럼 비루하고 염치없는 일을 삼시 세 끼 밥먹듯 저지르는 인간이 납치한 인질쯤 죽이기로소니 누가 놀라겠소? 그 협박을 듣고보니, 지공대사(誌公大師) 말씀이 생각나는구료. '아내도 헛것이요, 자식도 헛것이라, 황천길에 오를 때면 서로 만나지도 못할 것을....(妻也空, 子也空, 黃泉路上不相逢)'
이것 보시오, 단목 회주님! 내 여자 동료는 둘째 치고, 부부란 게 도대체 뭐요? 속담에도 그러지 않습디까? '부부 사이란 본디 한 둥지 안의 날짐승 같아서, 죽을 때가 닥치면 제각기 훨훨 날아가 버린다하지 않았소?
나는 이제 전심 전력을 다 바친 터, 그녀를 구하든 못 구하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소. 물론 이것 하나만은 기억해 두어야 할 거요. 만약 당신이 그녀를 죽였을 때, 내가 어떻게할 것인가....?
아마 당신한테 그보다 1만 배나 더 참담한 댓가를 받아내겠지! 그대 단목응양의 집안 남녀노소를 샅샅이 뒤져내어 씨를 말려버릴 테고, 그대 단목응양이 거느린 흑응회 놈들을 낱낱이 뒤쫓아 잡아 죽일 때까지 영영 칼을 놓는 법이 없을 테니까 말이외다!
우선 여기 계신 분들부터 살아날 생각을 버려야 할 거요. 그 다음에는 회주의 어엿하신 사제 철골빙심께서 한 발 앞서 염라대왕을 뵙게 되겠지! 자아, 이쯤하면 아시겠군! 내가 두려워하는지 안하는지를 말이오.]
냉혹하기 이를 데 없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뭇사람의 귀청을 파고들어, 몸서리를 치게 만들었다. 이 때였다. 처음부터 지금껏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한 곁에 우두커니 서 있던 노인이 꿈틀 움직였다.
당나귀처럼 길다란 두상에 날카로운 매눈을 지닌 노인이었다. 그는 시종 묵묵히 돌아가는 헝세를 매섭게 지켜보다가, 시철의 끝마디 말에 그만 충동을 받았는지 버럭 고함을 치면서 앞으로 나섰다.
훌떡 뒤집힌 매의 눈초리, 모래씹듯 써걱써걱 듣기 거북스런 음성의 힐문이
시철에게 날아갔다.
[요녀석, 방금 뭐랬지? 여기 있는 우리 모두 다 죽인다구 했나?]
[아마 그럴 거요!]
시철의 대꾸는 여전히 냉랭하다.
[이거, 내 분통을 터뜨려 죽일 참이로구나!]
[벌써부터 안달하실 것 없소. 좀 있으면 곧 죽게 될 테니까!]
[
네놈은 지금 누굴 상대로 지껄이는지 알기나 하느냐?]
[흑응회의 앞잡이, 국적 엄가놈의 노예들!]
[아니, 뭐라구! 에이, 발칙한 노옴---!]
당나귀 노인은 더이상 말씨름을 해봤자, 제 입만 아프고 낯뜨거운 모욕만 자초하게 되는 줄 익히 알아차렸다. 그는 발연대노(勃然大怒), 두 번 다시 대꾸하지 않고 쌍수 열 손가락을 키처럼 벌리더니 댓바람에 날아들면서 사납게 외쳤다.
[나 천강산인(天 =四/正,散人), 니놈의 심간(心肝)이 어떻게 생겼는지 꺼내보고야 말 테다!]
시철은 천강산인이 누군지, 그 이름과 내력을 들어본 적이 없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만큼은 몇 명의 고수를 본보기로 죽여 뭇사람들을 제압하기로 마음 단단히 먹고 있었다.
그것으로 자신의 초진발속(超塵拔俗)한 무예 실력을 나타내어, 이 무림계 일류급 고수들의 간담을 써늘하게 만들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이제 눈
앞으로 덮쳐드는 늙은 마귀를 예리하게 살폈다.
한데, 이 늙은이는 경우가 유별났다. 뭇사람을 위압했다고 자부하던 시철은 문득 재미적은 예감이 들었다. 천강산인은 칼부림 따위는 애당초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듯 어엿하게 적수공권(赤手空拳)의 맨손으로 추호도 거칠 것 없이 덮쳐왔기 때문이다. 그
렇다면 이제껏 보인 살륙전은 이 늙은이를 위압시키지 못했다는 증거였다. 도수공격(徒手空擊)이라....! 천강산인은 근본적으로 시철의 존재를 무시해버리고 무위(武威)조차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는 얘기가 된다.
이 늙은 마귀는 무엇인가 단단히 믿고 있는 솜씨를 지녔다. 극히 위험하고 무서운 인물임에 분명하다.
시철은 속으로 위축감을 느꼈다. 여태껏 품어보지 않았던 경계심같은 것이 불쑥 솟구쳤다. 그는 아직 비어 있던 왼손으로 슬그머니 장봉록(藏鋒錄)을 꺼내 잡았다.
천강산인은 글자 그대로 단숨에 들이닥쳤다. 폐부까지 곧바로 찍어누르는 듯한 강기가 온 몸을 휩쓸고 독수리 발톱처럼 날카로운 열 손가락이 눈앞에 가물가물 뻗어왔다.
이런 일은 처음 겪어본 시철, 가슴이 그만 철렁 내려앉았다. 어쩐지 광망을 떤다 싶었더니, 천강산인은 현문(玄門) 지고무상(至高無上)의 절학인 강기를 연마한 것이다. 시철은 강기의 그물에서 탈출하려 했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열 손가락 응조(鷹爪)가 몸뚱이를 움킬 지경까지 육박한 것이다. 묵묵히 신공(神功)을 일으킨 시철은 그 힘을 칼끝에 얹어 벼락치듯 내찔렀다. 다음 순간, 그는 검봉(劒鋒)이 철벽에 부닥친 듯한 감촉을 받았다.
[앗....!]
경악성을 지를 틈도 없었다. 천강산인의 오른손이 훌떡 뒤집히면서 칼날을 덥석 움켜잡기가 무섭게 뒤로 당겨 끌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나머지 왼쪽 다섯 손가락은 앙가슴을 할퀴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무어라 형언키 어려운 불가항력적인 압력이 살갗에 닿는 순간, 시철은 체내의 기혈(氣血)이 들끓고 숨통마저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운기한 상태로 질식하는 날엔 모든 것이 끝장이다.
장검은 무쇠벽에 박힌 것처럼 요지부동, 몸뚱이도 강한 흡인력에 이끌려 앞으로 고꾸라질듯 쏠리기 시작했다. 간격이 좁허든 만큼 상대방의 다섯 손가락도 이제 옷깃에 와 닿았다. 시철은 생사일변(生死一變)의 찰나, 죽음과 삶이 순식간에 판가름나는 절대절명의 갈림길에 선 것이다.
그는 백시배심(白 =凹/兄-口,背心)이 흉부(胸部)와 배부(背部)를 보호해주리라는 것만 기대했다. 더구나 몸을 빠져 나갈 수도 없는 처지였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방법은 오직 하나, 양패구상(兩敗俱傷)으로 너 죽고나 죽는 길밖에 없다. 왼 손아귀에 감춰진 비수 장봉록, 그는 여기다 전력을 쏟아붓고 힘차게 밀어 보냈다.
비수 끄트머리에 섬뜩한 거부반응이 닿는가 싶더니, 이내 거침없이 곧바로 <푸욱!> 들어갔다. 돌연, 천강산인이 손을 풀고 사나운 동작으로 물러났다.
[찌 잇---!]
앙가슴에 파고들던 다섯 손가락이 옷깃을 할퀴어 찢어내면서 빠져나갔다. 시철도 연거푸 2,3보를 뒷걸음질쳐 물러났다. 얼마나 혼뜨검이 났는지 그의 얼굴빛은 온통 멍든 것처럼 시퍼렇게 질려 있었다.
[후두둑!]
무엇인가 발치 아래 땅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앞가슴 자락이 뜯겨나가면서 품 속에 간직했던 반죽소(班竹簫)가 떨어진 것이다. 비수 장봉록을 슬며시 손바닥 안에 감추던 그는 문득 오른손의 장검이 가벼워진 느낌을 받았다. 힐끗 굽어보니, 맙소사! 칼날이 끄트머리에서부터 한토막 듬뿍 꺾여서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 게 아닌가?
시철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방금 천강산인의 맨손에 움켜잡혔던 부분이 통째로 날아간 것이다. 만약 그 손아귀에 칼이 아닌 몸뚱이 어딘가를 잡혔다면 무슨 꼴을 당했을까 생각하니 등줄기가 오싹해지고 식은땀이 후줄그레 돋았다.
천강산인의 왼손에는 과연 칼날 한 토막이 쥐어져 있었다. 그 가슴과 아랫배
경계(境界)를 이루는 부위에선 핏자죽이 옷자락 겉면으로 배어나오더니만, 아주 빠른 속도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두 다리는 꼿꼿하게 지면을 딛고 있었고, 상체 한 번 휘청거리지 않았다.
그는 마치 나무로 깎아놓은 장승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움직이는 것이라곤, 바람도 없는데 흩날리는 수염과 귀밑머리뿐이었다. 시철은 황급히 반죽소를 집어다가 허리춤에 찔러넣었다.
천강산인의 눈길이 그 얼룩무늬 대나무 퉁소에 가서 멎었다. 반죽소를 보는 순간, 두 눈망울이 당장에라도 눈자위를 찢고 빠져나올 듯 휘둥그래지더니, 얼굴에는 이루 표현하기 어려운 착잡한 기색이 감돌았다.
실내의 관전자들은 경악에 못 이겨 하나같이 핼쏙 질린 얼굴로 땅바닥에 박힌 말뚝이 되어 있었다. 아무도 움직이는 사람이 없었다. 회주 단목응양은 벼락맞은 사람처럼 그 자리에 뻣벗하게 굳어진 채 쉴 새 없이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푸우....!]
천강산인은 가슴 가득 들이켰던 숨을 내뱉았다. 그리고 시철에게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너!.... 퉁소노인 안한운(安閑雲)의 제자인가?]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묻지도 않았소!]
시철의 대꾸는 얼음장이다.
[말해라....! 말해....!]
천강산인의 말소리가 이미 안정을 잃고 흔들린다.
[미안하오만, 아뢸 수가 없구료!]
[제발....부탁이야....! 말해주렴....]
시철은 그 물음에 간절한 애원의 기색이 서린 것을 느끼고 차마 대답을 안해 줄 수가 없다.
[정식 문하제자는 아니올시다.]
[그랬었군....!]
천강산인의 눈동자에 차츰 산광(散光)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얼굴의 근육도 푸들푸들 경련을 일으켰다. 허리가 비틀리자, 그는 이래선 안되겠다는 듯, 안간힘을 다 써서 꼿꼿하게 일으켜 세우더니 하늘을 우러러 목청이 터져라고 절규했다.
[네 스승.... 안한운도.... 광동(廣東) 결투에서.... 날 어쩌지 못했는데.... 그
제자 손에 패하다니.... 운명이로구나! 난원 통해....! 정말 원통.... 으윽....!]
최후의 말매듭도 짓지 못하고, 천강산인은 꼿꼿하게 선 채로 넘어갔다.
[꽈당....!]
대청 안은 또 한 차례 진동을 일으켰다. 앞으로 거꾸러진 몸뚱이는 두 번 다시 일어날 줄 모른다. 그래도 천강산인의 오른손은 천천히 자기 머리 위로 올라갔다.
[퍽!]
[아앗....!]
시철도 그의 적수들도 이구동성으로 경악에 찬 비명을 질렀다. 천강산인이 제 손으로 천령개(天靈蓋)를 부수고 자결할 줄이야 상상이나 했겠는가!
사람들은 모두 벙어리가 된 것처럼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시각이 얼마쯤 흘렀을까, 낯빛이 하얗게 질린 큰 공자 서창이 답답한 분위기를 못 참겠는지 버럭 소리쳤다.
[시철! 네가 죽인 사람,.... 전대(前代) 으뜸가는 흉마, 혈마(血魔) 천강산인이야!]
혈마 천강산인은 60년 전에 강호를 누비던 팔협(八俠) 칠마(七魔) 가운데
하나였다. 항렬로 따지자면 현재의 삼은일(三隱逸)보다도 한 대(代) 선배가 되는 인물이다. 소문으로는, 이들 팔협 칠마는 지금 모두 이 세상사람이 아니라고 했는데, 천강산인은 돌연 여기 나타났다가 어처구니없게도 이름없는 후배의 손에 죽음을 당했으니, 이야말로 하늘의 뜻이 아닌가 싶었다.
큰 공자의 외침을 듣고서, 그제서야 시철도 기급을 했다. 허나 내친김에 나머지 일을 마무리지으리라 마음을 다져먹었다. 그는 부러진 칼을 돌려 곧바로 단목 회주에게 겨누었다.
[귀하, 이제는 우리 둘이서 일 대 일로 생사 결판을 낼 때가 된 것 같소! 공연히 다른 부하들을 더 내세워 죽음의 구덩이에다 몰아넣지않는 게 좋을 듯 싶구료. 만약 포위공격을 하고 싶거든 휘파람 한 마디만 미리 불어주시오. 부하들이 우왕좌왕하다가 멋모르게 죽어서야 너무 억울하지 않겠소?]
표묘신룡 서방은 이날 이때껏 남몰래 품어온 의문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회주가 투르판에서 참담한 몰골로 돌아와서 자기 제자놈의 손에 당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사실 그는 미덥지 않았었다.
그러나 회주의 뺨에는 시철이 애용하던 병기 철령전으로 꿰뚫린 상처자국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긴가민가 갈피를 잡지 못하던 표묘신룡은 이제와서 모든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전대의 흉마 천강산인이 어떤 인물이었던가? 이 고수의 조력(爪力)은 단숨에 정련(精練) 강철을 바수어뜨리는 힘을 지녔다. 그런데도 시철의 앞가슴을 움킨 그 손에 옷자락만 뜯겨나간 것이다.
그는 시철이 금강불괴법체를 완성했다는 사실을 새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지금 만약 단목 회주가 시철의 도전에 응할 경우, 목숨이 1백 개 붙어 있어도 모자랄 게 틀림없다. 회주를 살리려면 방법은 하나, 스승인 자기가 직접 나서는 길밖에 없다. 물론 자신의 실력으로도 시철을 당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어쩌랴? 나설 수밖에....!
표묘신룡이 선뜻 몸을 날려 두 사람 중간에 가로막아 섰다.
[시철! 네 눈에는 정말로 어른이 안 보이는 모양이로구나! 죽일 놈!]
[우리 사제지간의 정리는 이미 끊겼습니다! 그 탈명신전 한 대로 스승과 제자간의 정분을 쏘아 떨어뜨렸으니까요.]
시철의 대꾸는 흐린 날 구름 속 우뢰소리처럼 무겁다.
[너 이놈! 짐승같은 놈!]
표묘신룡의 머리 속에 열화(烈火)가솟구쳤다. 그는 노성을 지르면서 즉각 일검부터 찔러들었다.
[쩡!]
세찬 금속성 이 단 한 차례 울렸다. 제자는 일검을 봉쇄하기가 무섭게 반대로 돌진해 들어갔다. 획! 하니 움직인 그림자 하나, 그 다음에는 반 동강으로 부러진 칼끝이 스승의 앞가슴에 찍듯이 가서 닿아 있었다.
부러진 장검은 바로 다시 만회할 수 없는 이들 사제간의 단절된 관계를 의미했다. 그러나, 시철은 칼끝을 밀어넣지 못한다. 그 입에서는 참담하기 그지없는 울부짖음이 터져나왔다.
[스승님! 절 핍박하지 마십쇼! 절 너무 몰아세우시면 안됩니다. 아아....! 좋습니다! 스승님은 빼놓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나머지 놈들, 인간의 성정을 잃어버린 사냥개들은 남김없이 몰살해 버릴랍니다. 스승님, 한 곁으로 물러나십쇼! 정말 안 물러나시겠습니까?]
[사제, 안되네!]
[사형! 제발.... 안돼!]
동문 사형 사매 네 사람이 비통하게 부르짖으면서 그 자리에 무릎 꿇었다.
첫댓글 나... 시철은 한다면 한다. 비켜라. ㅎㅎㅎ
시원하게 벌을 내리고 처벌을 해야 돼. 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