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색의 숲’에서 나를 만나다…그리고 마음을 비우다, 군위 사유원
농민신문 2022-10-07
[우리 동네 핫플] (10) 경북 군위 사유원
유재성 태창철강 회장, 나무 밀반출 막으려 조성
20만평 규모에 조경림과 다양한 건축물 숨쉬어
오묘한 곡선미 소나무·느티나무 군락지 ‘독보적’
공간 곳곳에 이름도 특별…사유의 길도 정겨워
경북 군위군 부계면의 사유원 내 소요헌. ‘장자’의 소요유에서 따온 이름이다. 포르투갈 건축 거장 알바로 시자의 작품으로 천천히 거닐며 산책하기 좋은 공간이다. 사진제공=김종오 사진작가
자본주의는 악마의 속성을 지녔다. 밤낮없이 돈을 벌어야 그나마 제자리를 지킬 수 있다. 고된 노동이 끝나면 누군가는 지쳐 쓰러져 잠들거나 또 다른 누군가는 소비에 탐닉하기도 한다. 온갖 미디어에서는 나를 찾고, 삶을 돌아보는 행위가 쓸데없는 짓이라고 선전한다. 그래서일까. 우연히 알게 된 ‘사유원’이라는 곳에 관심이 간다. 이름에 우리가 흔적기관처럼 잊고 지냈던 ‘사유’라는 말이 들어갔다. 자못 궁금해진다. 과수원일까, 산사일까, 아니면 명상하는 곳일까? 고독한 가을의 색채가 바림질을 하는 이때 사유원이 있다는 경북 군위군 부계면으로 향했다.
빛과 어둠이 작품인 소요헌 내부.
◆ 모과나무를 지켜라 = 사유원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낮은 산에 들어선 수목원이다. 허나 여느 수목원과는 분명히 다른 점이 있다. 66만㎡(20만평) 규모 땅에 원래부터 자라던 나무는 물론, 간벌 후 들어선 조경림, 유명 건축가의 작품이 옴살을 이룬다.
사유원의 첫인상은 이렇다. 도도한 표정에다 팔짱을 낀 맞선 상대 같다. 먼저 1인당 입장료가 5만원이 넘는다. 사전예약제로 운영하는 만큼 관람일 기준으로 2일 전에 예약을 해놓지 않으면 들어가기도 어렵다. 그곳에서 식사하겠다며 런치·디너 프로그램에 참여할라치면 추가 비용을 감수해야 한다. 한 지역 철강회사 대표가 조성했다는 얘길 들으니 혹시 ‘가진 자의 고매한 취미생활’만을 엿보고 나와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마저 앞선다.
그런데 꽤 높은 지대에 있는 ‘유원’이란 정원에 다다르니 이런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는 걸 깨닫는다. 전통 양식의 한옥 ‘사야정’에 앉아 내려다보는 풍광은 단언컨대 일생에 한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로 독보적이다. 오묘한 곡선미를 뽐내는 소나무, 마음속 깊은 곳까지 비춰줄 것 같은 계곡과 연못은 서포 김만중의 소설 속 성진과 팔선녀가 노닐었을 것만 같은 분위기를 자아낸다. 맞은편에는 ‘한유시경’이라 이름 붙여진 느티나무 군락지가 광활하게 펼쳐진다. 원경에는 삿갓구름이 살짝 걸터앉은 늠름한 팔공산이 퍽 드레가 있어 보인다.
문득 2만3000여명이 사는 이 작은 고장에 그림 같은 수목원이 어떻게 자리하게 됐는지 궁금해졌다. 사유원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설립자 유재성 태창철강 회장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30여년 전 일본으로 밀반출되려던 300년 된 모과나무를 눈으로 직접 확인한 그는 더이상의 불행을 막아보겠다며 팔을 걷어붙였다. 국내에서도 가치 있는 모과나무를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는 소문이 돌자 전국에서 진귀한 모과나무가 유 회장에게 모여들었다. 모과나무를 관리할 땅이 필요해진 것이다.
2010년 이곳 사유원 터에 하마터면 일본에 뺏길 뻔한 모과나무 네그루를 심은 것이 수목원의 시초다. 그 이후 다양한 공간과 건축물이 하나둘 지며리 들어서면서 마침내 지난해 9월 공식 개장했다.
◆ 창세의 시작, 이름을 짓는다는 것 = 성경 속 신은 첫번째 피조물 아담에게 세상 모든 것에 이름을 지어줄 권리를 줬다. ‘이름을 부여한다는 것’은 혼돈에서 질서의 세계로 진입한다는 뜻이다. 작명이야말로 곧 창세의 시작이자 끝이다. 설립자도 같은 생각을 품었을까. 공간 하나하나에 정성스레 이름 붙인 그의 마음자리가 따뜻하게 다가온다.
사유원 정문의 이름은 치허문(致虛門). 노자 <도덕경>에 나오는 ‘치허극(致虛極·완전한 비움에 이르게 하라)’이라는 구절에서 연유했다. 더하거나 모자람이 없는 소담한 멋을 부리는 모과나무 108그루의 군락지, 그것의 이름은 풍설기천년(風雪幾千年)이다. ‘오랜 기간 풍상을 맞으면서도 천년을 이어가라’는 소망이 담겼다.
소백세심대(小百洗心臺)라는 곳도 있다. 1439m 높이 소백산을 바라보면서 탐욕 가득한 마음을 씻어내는 장소다. 이곳에선 화장실 작명도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다불유시(多不有時·시간은 있으나 많지 않다)는 화장실의 영어식 표기 WC를 한자로 재치 있게 풀어낸 이름이다. 시름을 잊는다는 뜻의 망우정(忘憂亭), 욕망을 씻는다는 뜻의 세욕소(洗慾所)도 화장실에 딱 걸맞은 이름이다.
공간 명칭은 한자어지만 길만은 우리말에 양보했다. 치허문에서 수목원 중심으로 향하는 비나리길, 팔공청향대와 금오유현대를 잇는 미리내길, 앵당과 소요헌 사이에 놓인 초하루길은 이름 때문인지 사유의 여정이 꽤나 정겹다.
◆ 건축예술의 거대한 향연 = “수목원이면서도 수목원이 아녜요. 찾는 이에게 사색할 시간과 공간을 마련해주려는 것이 이곳의 원래 목적이니깐요.” 이곳 운영을 책임지는 한상철 사유원 상무의 설명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곳은 사유의 세계로 안내할 건축예술이 살아 숨 쉬는 거대한 향연장이다.
대표적인 작가가 알바로 시자다. 포르투갈이 낳은 세계적인 건축가로 1992년에는 건축계의 노벨상인 프리츠커상을 받았다. 그는 이곳에 소요헌이라는 작품을 남겼다. V(브이)자 형태의 콘크리트 구조물은 어떠한 꾸밈이 없고, 오로지 빛과 어둠만으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구현해내려 했다. 원래 이곳에 피카소의 그림 게르니카(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다룬 작품)가 걸릴 예정이었단다. 그 대신 전쟁의 무정함, 평화를 향한 염원이 담긴 철제 구조물이 보는 이를 숙연하게 한다.
한국을 대표하는 건축가 승효상의 작품도 꽃송아리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사유원 탄생을 알리는 첫 작품인 전망대 ‘현암’, 계곡 위를 거닐게 해주는 ‘와사’, 물탱크를 개조한 작은 망루 ‘첨단’에서 빈자의 미학을 추구해온 작가의 명징한 예술혼을 발견한다.
알바로 시자가 설계한 성당 가운데 가장 규모가 작다는 ‘내심낙원’은 ‘사유의 극치’에 다다를 수 있는 건축물이다. 한 사람만이 앉을 수 있는 의자와 탁자, 회색 벽면, 윗부분이 생략된 미완의 T자형 십자가,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빛줄기만이 성스러운 공간을 채운다. 삿된 마음을 내려놓고 고독한 가운데 신에게 자신의 죄를 눈물로써 고백한다면 구원받을 수 있을까.
한국의 석학 김익진 선생은 1966년 가톨릭 번역서 <내심낙원>을 펴냈다. 그는 해방 무렵 부모에게 물려받은 재산 대부분을 소작농에게 나눠주고 가톨릭에 귀의했다. 그를 만났다면 이런 말을 남겼으리라. “낙원은 저 멀리 내세에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라 비우고 나누는 자에게 주어지는 현생의 선물인 게지요.”
군위=이문수 기자, 사진=현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