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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신사들의 모습을 묘사한 그림)
조선과 일본은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서로 교류하며 문화를 교환해왔다. 이미 조선 초기때에 일본과의 교류를 위해 왜관을 지었으며 신숙주나 강희맹 등 여러 실력있는 문신들도 일본에 사신으로 드나들었다.
임진왜란 이후로는 일본인들이 전쟁 중에 저지른 만행에 대한 조선인들의 적개감이 극심해져 잠시 교류가 중단되었으나 에도 막부 이후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장장 2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를 파견해 문물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이토록 오랫동안 교류하는 와중에도 조선인과 일본인 간에는 분명히 넘을 수 없는 벽, '문화의 차이'가 있었고, 결국 서로 끝까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일본에서 유행하던 남색(男色), 즉 남성간의 동성연애의 풍조에 대한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조선사람들도 여러 기록을 남겼다.
이는 1420년에 세종의 명을 받들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온 강희맹이 남긴 기록이다. 그 말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서는 아름다운 소년들이 화장을 하고 여자처럼 치장하니 나라의 귀인들이 이를 아꼈다고 하였다.
희롱삼아 왜인의 말을 인용하여 남창사(男娼詞)를 지었다 이는 1719년에 통신사의 일원으로써 일본에 방문한 제술관 신유한이 남긴 기록이다. 어째 그 정도가 강희맹이 다녀왔을 때 보다 더욱 심화된 느낌이 든다. 신유한의 기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관백이라 함은 곧 막부 최고 권력자인 정이대장군을 이르는 말인데, 이 기록에 따르면 정이대장군부터 돈많은 부호나 무사들, 그리고 일반 백성들까지 남첩을 가까이 할정도로 남색 풍습은 당시의 일본에서 일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더욱이 여첩보다 남첩을 더 아껴 행여나 남첩이 바람이라도 나면 이를 극심히 질투하여 살인사건까지 난 모양이다.
그런데 신유한의 다음 기록은 더 재미있다.
일본에서 남색이 성행하는 것을 보고 심한 멘붕이 온 신유한은 당시 일본 최고의 조선통이자 식견있는 유학자였던 통역관 아메노모리 호슈(雨森芳洲), 즉 우삼동에게 이런 풍습에 대해 따져보았다. 그러나 우삼동은 되려 "넌 임마ㅋ 아직 그 재미를 몰?ㅋ"라며 웃으며 대꾸하니 신유한은 우삼동같은 유학자도 이 모양이니 여긴 대체 얼마나 글러먹은 것이냐 한탄한다 . -_-
위의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의 남색 풍조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반응은 이런 정도였다. 그도 그럴듯이, 조선 사람들의 성리학적 사고로는 일본의 남색 풍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것이었다. 그들의 눈에 일본의 풍습은 대개가 기이하게 느껴졌으나 특히 남색 행위가 가장 기이하게 느껴졌을 것임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사실 일본의 남색 풍조, 즉 슈도(衆道) 문화는 여색이 금지된 승려들이나 오랫동안 전쟁터에 나가있어야 했던 무사들 사이에서 형성되어 그 것이 곧 온나라로 퍼져 전국적인 대유행을 타게 된 것으로 굳이 그 것을 유학적 잣대에 빗대어서 도덕적으로 못났다고 평가하기는 힘든 측면이 있다.
그런데 그렇다고 하여 조선에 남색의 풍습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26년에 민속학자 이능화가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남긴 기록은 다음과 같다. 미동(美童)은 세속에서는 비역 이라 칭하는데 남색(男色)을 이른다. 우리나라 풍속에서는 만약 미동이 하나 있으면, 여러 사람들이 질투하여 서로 차지하려고 장소를 정해서 각법(脚法), 속칭 택기연(擇基緣)으로 싸워 자웅을 결정지어 이긴 자가 미동을 차지한다. 세속에서는 이것을 급기롱이라 한다. 조선조 철종 말년부터 고종초기까지 이 풍속이 대단히 성하였으나 오늘날에는 볼 수 없다. 즉 조선 말기에 들어서 미소년을 두고 사람들끼리 결투를 했다는 말이 되는데-_-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해괴해보일 수 있으나 그 당시 사람들은 어찌 생각했을지 모르겠다.
출처 - http://cafe.naver.com/booheong/79705
우리나라 신라때의 화랑도 저랬다 하니 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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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올드팝,FM,역사,지식 이거저거 원문보기 글쓴이: 황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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