第 五十二 章. 교활한 너구리, 가면을 벗기우다
민강묵교와 여화룡은 애당초 구유귀왕의 행방 같은 것은 염두에도 두지 않는 모양으로, 시철이 출발명령을 내리기가 무섭게 일지화와 금전표를 각각 안아 들고서 성큼성큼 따라나섰다.
[호수에서의 일은 어떻게 된 겁니까?]
시철은 민강묵교와 나란히 걸으면서 들리지 않게 소근소근 물었다. 그랬더니,
민강묵교는 누구나 다 들으라는 듯이 거침없이 큰소리로 대답했다.
[놈들의 배 세 척을 몽땅 뒤엎어버렸지 뭐! 육지에서 내노라하는 고수 녀석들, 물 속에선 아주 젬병이더구만. 숱하게 빠져 죽어서 물고기 밥이 됐으니까 말씀이야. 으핫핫핫! 막판에 온 놈이 누군 줄 아나? 바로 나용문의 부하 노릇을 하는 위대하신 해적 비어(飛魚) 근해(斬海)였어.
이 날치 녀석이 고깃배 몇 척을 끌고 와서 물귀신들을 건져 올리길래, 또 달라붙어서 한두 척 엎어버렸지. 한데, 때마침 여씨 둘째 아우님이 배를 타고 날치란 놈의 배를 따라붙은 걸 보았어. 언제 어느틈에 섞여들었는지, 정말 미꾸라지가 따로 없더구만. 그래서 우리는 암호를 주고받아 만날 약속을 정해 놓았다네. 덕분에 날치 녀석은 일단 우리 손에서 풀려나서 겨우 목숨을 건진 셈이 된 걸세. 핫핫핫!]
귀를 곤두세우고 엿들었는가, 민자건의 얼굴빛이 그만 싹 변하더니 얼른 따라붙어 묻는다.
[시형, 아까 뭐라고 그랬지? 마을에 들어갔을 때 광응(狂鷹)을 보았다고 안그랬나?]
[그 미치광이 독수리 말이오? 본 정도가 아니라 직접 만나서 쫓아버렸지! 내가 혈마 천강산인을 죽이는 걸 보고 혼비백산을 해서 달아났으니까!]
시철의 대답은 얼음장보다 더 차디차다. 곁에서 듣던 민강묵교와 여화룡이
기절초풍을 해가지고 거의 이구동성으로 물어왔다.
[아니, 뭐라구? 자네....자네가 혈마 천강산인을 죽였단 말인가?]
[그 늙은이, 제 입으로 혈마 천강산인이라고 떠벌렸으니까, 거짓은 아닐 겁니다.]
[그놈이....그놈이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었다니! 도대체 믿을 수가 없구먼.
아냐, 아냐! 가짜 놈일 걸세!]
시철은 혈마의 생김새와 그가 무서운 강기로 공격해오던 상황을 낱낱이
설명해주었다. 이 때, 민강묵교의 팔에 안겨 가던 일지화가 끼어들었다.
[시철 아우님, 그 늙은 마귀놈은 진짜 혈마 천강산인이었소. 미치광이 독수리가 오늘 아침 노가도에서 우연히 만나 끌어들인 무서운 고수요. 미치광이 독수리는 아마 전부터 그놈과 알고 있었던 모양입디다.
혈마는 무슨 조건에 혹했는지 모르나, 여하튼 광응의 초빙을 받아들이고 따라와서 최고의 귀빈 대접을 받았는데, 광응보다 한 걸음 앞서 몇몇 고수들을 거느리고 산항촌 마을로 떠났소. 출발 당시에 광응이한 말투로 보건대, 아우님을 처치할 매복 선발대로 부탁을 받은 모양입디다. 한데, 그 무시무시한 늙은이가 여기 와서 목숨을 날려 보낼 줄은 정말 뜻밖이로군요.]
민강묵교는 혓바닥이 얼어붙어, 한참 동안이나 말을 못하더니만 겨우 숨 한모금 들이켜고서 중얼거렸다.
[당신 말대로라면, 그 늙은이는 진짜 혈마인 듯하군! 어쩐지 일도(一道)가 여기 왜 나타났는가 싶었더니.... 세상 만사 참말로 알다가도 모를 노릇일세. 그 흉악스런 마귀놈이 오늘같은 최후를 맞이할 줄이야! 그것도 이름모를 풋내기 후배의 손에 떨어져서 비참하게 죽다니....]
민강묵교는 감회가 무량한 듯 고개를 절레절레 내둘렀다.
[나대협님, 일도를 보셨습니까?]
시철이 물었다.
[아무렴, 봤지. 그분이 부상당한 구유귀왕을 데려갔네. 고깃배 한척을 빌려 타고서 지금쯤 미치광이 독수리 일당을 뒤쫓고 있을 걸세.]
[아저씨, 그럼 어째서 구유귀왕을 데려가도록 내버려 두셨습니까?]
[하하! 여보게, 날더러 그분을 막으라구? 어림도 없는 말씀 말게나! 일도로
말하자면 강호 무림계에서 손꼽히는 의협 영웅일세. 그 명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고 하는 소린가? 또 그분은 절대로 구유귀왕을 해치지 않네.]
[일도와 혈마 사이에 무슨 관련이 있단 말입니까?]
민자건은 얼른 말꼬리를 바꾸어 물었다. 민강묵교는 곁눈질로 잠시 흘겨보다가 천천히 설명해주었다.
[40여 년 전, 일도의 사형 정청우사(正淸羽士)가 강호상에 처음 발을 내딛은 지 얼마 안되어서 그 혈마의 손에 피살당했네. 일도는 사형의 복수를 하려고 여러 차례 도전했지만, 번번이 혈마의 칼 아래 참패했네. 싸울 때마다 목숨을 잃어버릴 뻔했으니까, 애당초 혈마의 상대가 못된 셈이지. 그 후, 일도는 아예 산문(山門)을 걸어닫고 10년 동안 고심참담 수련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현문강기(玄門 =四/正,氣)를 단련했다네.
그리고 하산해서 또다시 복수전을 하려고 혈마를 찾아 나섰지. 하지만 그 때는 팔협(八俠) 칠마(七魔)들이 차례로 세상을 뜨거나 종적을 감추어 몰락해버린 뒤였네.
일도는 의협을 행하면서 강호상의 떠돌이가 되어 암암리에 혈마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다녔지. 30년 이래 흉신악살 요사스런 무리들을 얼마나 죽였는지, 그 손에서 피비린내가 가실날이 없었고, 그럴수록 일도의 협명(俠名)은 만천하에 두루 떨쳐졌네. 그리하여 일도 정원우사(正源羽士)는 드디어 무림계 정상급 고수의 영예로운 반열에 오르게 되었지. 그러나 혈마 천강살인의 행방은 끝끝내 찾아내지 못했네. 설혹 그 두 사람이 강호상에게 마주쳤다 하더라도, 승부는 알 수 없었을 걸세.
혈마는 나이 1백 살을 넘겼지만, 현문의 양생지술(養生之術)에 정통해서 후배 일도를 능가할 만한 정력을 유지했다니까, 둘이서 맞대결을 벌였을 경우, 누가 누구 손에 쓰러져 죽을 것인지 예측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네. 그런데 시철 아우님이 거뜬하게 그 늙은 마귀를 죽였다니, 만약 강호상에 이 소문이 퍼져 나간다면 이후부터는 아무도 시철 아우님의 비위를 감히 건드릴 자가 없을 걸세.]
그러자, 시철은 오히려 이맛살을 찌푸리고 불안스런 기색을 지었다.
[아마 정반대로 골치 아픈 일만 더 많이 벌어질 겁니다. 속담에 뭐라고 했습니까? 사람은 이름나는 걸 두려워하고 돼지는 살찌는 걸 무서워한다고 안그랬습니까?
옛날부터 제 분수 넘치게 이름을 떨치려고 목숨걸어 유명인사에게 도전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여기저기서 아무 때나 어중이 떠중이들이 불쑥불쑥 몰려와서 무술시합을 요구할텐데, 그 귀찮은 꼴을 무슨 수로 감당해내야 합니까? 유명인사가 안되어도 좋으니까, 제발 아무 소문없이 틀어박혀 한평생 보냈으면 소원이 없겠습니다.]
[이보라구, 우리가 소문을 퍼뜨리지 않더라도 그 짓을 할 참새는 얼마든지 따로 있네. 광응 일당이 노가도에 도착하는 날엔, 발없는 말이 천 리를 달린다고, 얼마 안 가서 그 소문이 온 천하에 두루 퍼질테니 말이야.]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걷다보니, 어느덧 세 갈래 길 어구에 다다랐다. 일행은 금전표가 자백한 대로 북쪽 큰 길을 따라 산비탈을 하나 넘어섰다. 과연 그 산비탈 북사면(北斜面) 아래 노변에는 아담한 마을이 하나 자리잡고 있었다. 시철은 여화룡의 품에 안겨가던 금전표에게 다가가서 또 한 차례 으름장을 놓았다.
[범가야, 이제 만약 저 마을에 들어가서 한지무환의 식구들을 찾아내지 못했을 때는 네놈의 생껍질을 벗겨 죽이고야 말 테다! 알겠나?]
여화룡은 몸서리를 치는 금전표를 보며 껄껄껄 웃었다.
[우리 시철 아우님, 평소에는 성미가 골샌님처럼 온화하고 겸손하다 싶었더니만, 이제 보니 왁살스런 면도 다 있었군 그래! 금전표, 자네 아무래도 하느님한테 인질들이 그 자리에 고스란히 잘 있도록 해달라고 기도를 올려두는 게 좋겠어. 자백한 말이 단 한 마디라도 삐딱하게 어긋났다가는, 자넨 꼼짝없이 죽은 목숨일 테니까 말씀이야!
이 길거리로 말하자면 자네 패거리가 풀방구리에 쥐 드나들듯 쉴 새 없이 오락가락하고 있는데, 그 중 어떤 녀석이 오가는 길에 제 마음대로, 인질을 딴 데로 옮겨다 놓았다면, 자네 신세는 우리 아우님 손에 차마 눈뜨고 못 볼 참담한 꼬락서니가 되지 않겠나?]
큰 길은 마을 한가운데를 꿰뚫고 지나갔다. 높직한 비탈 위에서 북편을 굽어보니, 마을 북쪽에서도 경장 차림을 갖춘 세 사람이 바쁜 걸음걸이로 달려오고 있다. 이렇게 되면 쌍방은 남북에서 거의 같은 시각에 마을 중심지에 다다를 공산이 커졌다. 시철은 무심결에 뒤를 흘끗 돌아보다가 산비탈 아래 또 다른 패거리를 발견했다. 울긋불긋 어수선한 옷자락을 펄럭거리면서 남녀 어덟 명이 건각(健脚)을 놀려 날으듯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크! 남황팔마(南荒八魔)도 오는구먼!]
눈살을 찌푸리고 투덜거리던 시철, 문득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빙그레 웃더니만 일부러 발걸음을 늦추기 시작했다. 마을 어구에 다다르자, 이번에는 금전표가 기급을 해가지고 일행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빨리! 저 오른편 여덟 번째 집이야! 저기 오는 세 사람은 내 동료들이오.
인질들을 딴 데로 옮겨가려고 온 모양이야! 저 친구들한테 빼앗기면 안돼! 난 죽는단 말야!]
호송자 세 명은 인질들이 갇힌 여덟 번째 집에서 불과 세 집 떨어진 지점에 이르고 있었다. 반면, 이쪽 패는 겨우 동구(洞口)에 발을 들여놓은 형편이라 쌍방 간의 거리는 아직도 10여 장이나 떨어졌다. 호송자들의 걸음걸이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슬금슬금 걸어오면서 이제 막 동네 어구에 들어선 이쪽 패거리를 눈여겨 훑어보는 품이, 사뭇 경계심을 품고 있는 듯 싶었다. 느릿느릿 굼벵이처럼 걷던 시철이 상대방을 향해 손을 흔들어보였다. 그리고 호송자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틈을 놓치지 않고 돌연 선두 민자건을 앞지르더니, 마치 시윗줄에서 벗어난 화살처럼 일약 3장거리를 달려나갔다. 그 돌발적인 행동은 상대방을 놀라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영문을 모른 채 우호적인 손짓에 농락당한 이들은, 다음 순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뒤늦게 칼을 뽑아 들었다. 그리고 마을 사람들이 내다보고있는 가운데 흉악스런 기세로 여덟 번째 초가집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시철과의 전속력 경주가 벌어진 것이다.
초가집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고 문짝에는 숯토막으로 그린 괴상한 그림이
서투르게 그려져 있었다. 달리기에서 이긴 쪽은 역시 호송자들, 제일 빨리 당도한 중년 사내 하나가 문기둥 곁에 몸을 찰싹 붙이고 기대어 서서 장검으로 경계를 하는 동안, 두 번째 사내가 돌진하면서 발길질을 날려 있는 힘껏 문짝을 걷어찼다.
농사꾼의 허름한 집 나무문짝은 억센 발길질에 맥도 못 쓰고 <와지끈 퉁탕!> 넘어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사내는 안마당으로 첫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집 안의 감시자들을 향해 한 마디 경고를 발하려 입을 열었을 때, 철령전 한대가 무시무시한 속력으로 먼저 들이닥쳤다.
[쏴아아! -]
공기를 찢는 소리, 뒤미처 비정한 쇠화살은 반 푼의 오차도 없이 그 오른편
겨드랑이 늑골 사이를 꿰뚫고 <푹!> 소리가 나도록 깊숙이 들어박혔다.
[아악....!]
엄청난 층격에 사내의 몸뚱이는 상반신을 꼿꼿하게 세운 채 앞으로 털썩
고꾸라졌다. 외마디 비명 소리가 중도에서 뚝 끊겼다. 세 번째로 도달한 중년인이 그 광경을 보고선 혼비백산, 문간에 들여놓던 발을 얼른 빼더니 황급히 뒷걸음질쳐 물러나와 돌아섰다. 그리고는 가슴 앞에 장검을 곧추세워 방어태세를 취한 채 고함을 질렀다.
[웬 놈이냐! 어디서 암기로 사람을 해치는 거냐?]
시철은 두 사람의 면전에 우뚝 서 있다. 거리는 불과 8척, 두 자루 장검이 겨누고 있는데도 두려운 기색 한 점 없이 양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 코웃음쳐 대꾸했다.
[나 말인가? 산서 출신의 시철이오!]
그 한 마디는 저승사자가 부르는 소리였다.
[앗, 시철....!]
두 사람은 당장에 혓바닥이 얼어붙어 반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그악스런 기세도 삽시간에 스러지고 얼굴빛은 종잇장처럼 하얗게 질려버렸다. 시철이 물었다.
[당신들, 광응의 부하들이지?]
두 사람은 대답을 못한다. 그렇다고 인정하는 날엔 여지없이 죽음을 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이들의 눈망울에는 공포가 깃들었다.
[인질을 받으러 오셨는가?]
시철은 다시 물었다. 그제서야 첫 번째 중년인이 까칠까칠 마른 혓바닥으로 입술을 핥아가며 겨우 입을 떼었다.
[당신....당신, 알고 있었소....?]
[당신네 두목 미치광이 독수리는 지금 산항촌에서 쫓겨나 뱃길로 노가도로
도망치고 있소. 알고들 계시나?]
[모르오....정말 몰랐소....!]
[내 동반자, 그녀는 지금 어디 갇혀 있소?]
[우리는 그저 분부만 받들고 와서....]
[바른 대로 불지 않을 때는, 나 시철이....]
[받아랏!]
[이얍!]
두 사람은 시철이 말하느라 집중력이 흩어진 순간을 노렸다. 처음부터 겨누고 있던 쌍검이 돌발적으로 동시에 찔러나왔다. 발을 내딛는 보법과 출검(出劒) 동작이 제법 구색을 갖추고 신속하기 이를 데 없는 협공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빠르다면 시철은 더욱 빠르다. 상대방의 기습공세가 발동하자마자, 시철의 허리춤 칼집에서 장검 날이 섬전(閃電)과도 같은 속도로 번뜩 빠져나왔다.
[챙!]
우측방의 일격을 무너뜨린 칼날이 곧바로 훌떡 뒤집히면서 맞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그 순간, 좌측방의 공격이 허방을 찌르고 빗나갔다.
[푸르릇!]
검망(劒芒)이 번쩍 날았다. 우측방의 중년인은 반격에 밀린 힘을 최대한 이용하여 재빨리 뒷걸음질쳐 물러나다가는 <쿵!>소리가 나도록 담벼락에 등판이 부딪쳤다.
그래도 반응은 상당히 빨라, 등에 충격을 느끼자 순간적으로 허리를 비틀어
쓰러지더니 측방으로 떼굴떼굴 몸을 굴려 피해 나갔다. 한 바퀴를 굴렀을까, 그의 몸뚱이는 엄청나게 무거운 압력이 짓누르는 바람에 정지하고 말았다. 하늘에서 바윗덩어리가 떨어진 듯, 느닷없는 가죽신 발바닥 한 짝이 허리께를 콱 짓밟아 멈추게 만든 것이다.
[꼼짝 마시오, 형씨! 으하하핫....!]
바윗덩어리에 짓눌린 개구리가 무슨 수로 꼼지락거리겠는가? 중년인은 허리가 끊어지는 듯한 아픔 속에 웃음소리와 호통을 들으면서 본능적으로 뺨따귀를 쓰다듬었다. 손가락 틈서리로 피가 샘솟듯이 뿜어나왔다. 시철의 칼날에 찢긴 상처는 손가락 한 개를 물고도 남을 만큼길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안 움직여....! 난 꼼짝달싹도 안할 테니까, 제발....!]
중년인을 개구리로 만든 사람은 민강묵교, 일지화를 품에 안고서도 동작
하나만큼은 민첩하기 짝이 없다. 모처럼의 일검이 허방을 내지른 좌측방
공격자에게도 요행은 없었다. 그는 미처 선회동작으로 공세변화를 취할 틈이
없었다. 겨드랑이 아래 섬뜩한 촉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감촉은 고통을
수반하고 있었다.
'아이쿠, 찔렸구나....!'
뒤이어 시철의 호통소리가 고막을 쩌렁 울렸다.
[노형, 칼을 버리시지! 말로 하자구!]
칼을 버리면 무방비 상태, 비정한 놈이 그대로 장검 끝을 밀어넣기만하면
겨드랑이에서 염통과 허파를 헤집고 반대편 어깻죽지까지 맞구멍이 뚫릴 판이다.
상상만 해도 가슴 속이 써늘하다. 그렇다고 칼을 안버릴 수도 없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살아날 묘책을 쥐어짜냈다. 그리고 병기를 내던졌다.
[자, 나는 비무장이오! 죽일 테면 죽여 보시구료!]
기막히도록 엉큼한 꾀였다. 시철이 빙그레 웃었다.
[형씨, 말씀 안해도 강호상의 규칙쯤은 알고 있으니까, 그 따위 후림때로 날
넘겨짚을 생각일랑 마시구려! 우리는 벌써 한 수 교환했고, 또 형씨는 내 칼에 제압당해서 무장을 해제한 거요. 패배자의 손에 병기가 없다는 한마디로 죽음을 모면할 성 싶소? 허나 그런 묘책을 짜내느라 고생하셨으니, 나도 죽이지는 않겠소.
다만, 노형께서 언제 또 암습을 할지 모르니까, 그 오른 팔뚝은 잘라놓고 얘기를 해야겠소. 노형은 아직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단 말씀이오.]
[아니, 안돼....! 졌소! 졌어....! 내가 깨끗이 항복하겠소!]
사내는 두 팔을 홰홰 내저어가면서 정신없이 소리쳤다.
[진작에 그러셔야지! 그럼 묻겠소. 내 동반자는 지금 어디 갇혀있소?]
[노가도....노가도에 있소.]
[감시 책임자는 누구요?]
[나용문 어른이오.]
[그만하면 됐소! 어서 썩 꺼지시오. 남쪽으로 가는 거요! 노가도에 돌아가선
안되오. 내 말 알겠소?]
[이대로 놓아준다고....? 알았소, 분부대로 남쪽....남쪽으로 가리다!]
[여보게! 이놈들을 그냥 풀어주는 거야?]
민강묵교가 뜨악해서 물었다.
[이런 인간을 죽여봤자 천지화기(天地和氣)만 더럽혀질 뿐입니다. 노가도에
돌아가서 보고하지 않겠다는 확약만 받아내면 되겠지요. 또 우리는 지금 노가도로 인질을 구하러 가는 길인데, 저 인간들이 죽으려고 같은 방향으로 가겠습니까?]
시철은 아무렇게나 대답하면서 집 안으로 한 발 내딛더니, 문득 생각난 것처럼 뒤를 돌아보고 민자건에게 소리쳤다.
[민형, 수고스럽지만 저 세 놈들을 동네 어구까지 압송해 주시겠소? 북쪽 길이 아니라 확실하게 남쪽으로 가는 걸 감시해야 하니까 말이오. 이크! 남황팔마가 벌써 당도했구먼! 내가 상대할 테니, 민형은 어서 저놈들을 끌고 가시구료!]
그러나, 민자건은 떠날 생각을 않고 머뭇거리면서 시간을 끈다. 시철과 남황팔마 사이에 어떤 수작을 주고받는지 보고야 말겠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시철이 다시 대문 바깥으로 나왔을 때, 남황팔마는 이미 5,6장까지 다가오고 있었다. 선두 패는 독고마랑(毒蠱魔娘)과 백독장마(百毒 =疾-矢/章,魔), 시철을 보고 먼저 반색을 한 것은 늙은 여마(女魔)다.
[이런! 또 만났구나! 요녀석, 그 황금을 네가 챙겼지? 어디다 숨겼어?]
마귀 여덟 명이 한 바탕 바람불듯 씽하니 달려와서 반원형으로 시철일행을 빙 둘러쌌다. 그 다음에 백독장마가 낄낄낄 너털옷음을 터뜨려가며 수작을 걸어왔다.
[여봐, 어린 친구! 건더기하고 국물을 혼자 꿀떡 삼켜서야 어디 쓰겠나? 우리 잘 협상해 가치고 한 숨가락씩 나눠 먹자구. 어때, 우리 서로 친구가 되는 것이....?]
시철도 너털웃음으로 맞받아 눙쳤다. 그러나 고개는 도리질이다.
[여러분이 잘못 아셨소이다! 생각 좀 해보시구려. 5만 냥이나 되는 황금을 내가 무슨 수로 혼자 챙겼겠소! 어제 한낮 호수 위에서 황금쟁탈전이 벌어졌을 때만 하더라도, 나는 힘이 딸리고 외로운 들고양이 신세였소.
아무도 날 패거리에 끼어주지 않는데야 어디다 명함을 내밀겠느냐 말입니다. 손아귀로 콱 움키고 보면 맹물뿐이라, 황금은 커녕 얻은 것이라고는 구리반지 한개도 없었지 뭐요? 게다가 하마터면 불구덩이 속에 갇혀서 통돼지구이가 될 뻔했으니, 그걸로 볼장 다 본 셈아니오?
나중에 알았지만, 그 황금선은 엄가놈의 부하들이 나꿔채 끌어갔다고 합디다. 만약 내가 그 황금을 손에 넣었다면 천 리 만 리 멀찌감치 달아빼고 말았지, 뭘 더 얻어 먹으려고 여기서 이렇게 어슬렁거리겠소?
나는 황금 따위 포기한 지 벌써 오래요. 지금은 해적 나용문을 찾아서 빚청산이나 할까 해서 노가도로 가는 길이니까, 제발 그놈의 골치 아픈 황금 얘기랑 꺼내지도 마시구려!]
[여봐, 자네 그 말 진짜인가?]
[제가 뭣 때문에 어르신네를 속이겠습니까?]
[나용문이 노가도에 있다고 했지?]
[여기서 노가도 나루터까진 5리도 못됩니다. 제 말 미덥지 않으시거든 휑하니 갔다오시지요.]
[나용문한테 무슨 빚을 받아내려는가?]
[여자 동료가 그 도적놈의 수중에 잡혀 있습니다. 가서 구출해야지요.]
[우리 한 패가 되어서 가면 어떨까?]
[아니지요, 저는 여기서 다리참이나 쉴랍니다. 지금같은 대명천지 밝은 대낮에 사람을 구하러 뛰어들다니, 죽으려고 환장한 놈이 아니고서야 누가 그런 짓을 하겠습니까? 전 그런 수엔 안 넘어갑니다.]
[그럼 언제 뛰어들 작정인가?]
[오늘 밤입니다. 3경쯤 해서 지형부터 파악해놓고, 4경 끝이나 5경초, 놈들의
경계가 풀어지는 새벽녘에 쳐들어갈 작정이지요.]
[좋아, 그렇다면 우리도 예서 다리참이나 쉬기로 하지!]
백독장마는 여우새끼 뱃속을 훤히 들여다본 듯, 능글맞게 웃으면서 대답했다.
시철이 그토록 호락호락한 풋내기가 아니라는 사실을 몇차례 골탕먹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던 것이다.
[아무러나, 좋으실대로 하시지요.]
시철도 데면데면 웃어가며 대수롭지 않게 넘겨버렸다. 그리고는 휘적휘적
안마당으로 들어서더니, 땅바닥에 쓰러진 사내를 뒤채놓고 그 겨드랑이에 박힌 철령전을 쑥 잡아뽑았다.
[여보, 두 양반! 당신네 동료를 데려가야지!]
그는 포로 두 사람을 손짓해 불러다가 부상당한 동료를 부축해 떠나보내면서 민자건에게 압송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민자건은 좀처럼 발길이 안 떨어지는 모양으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불만 가득찬 기색이 되어 포로들을 몰아 떠났다.
시철이 분부한 대로 이들의 발길은 마을 남쪽으로 향했다.
남황팔마도 쉴 자리를 잡았다. 여덟 명의 불한당은 바로 오른편 초가집 대문을 걷어차고 제 집인 양 와르르 몰려 들어갔다. 그리고 잠시 왁자지껄 소동이 벌어지더니 독갈이랑 혼자서 그 집 주인들을 깡그리 몰아내어 나왔다. 주인 식구들을 쫓아내고서도, 독갈이랑은 문간에 기대어 선 채, 다시 들어가지 않았다.
시철 일행의 움직임을 감시하는 제1번 보초가 된 것이다. 민강묵교가 대청에 올라서면서 끌끌끌 웃음을 참지 못한다.
[여보게, 자네 그 수 한 번 일품으로 쓰더구만!]
[누구 말입니까? 남활팔마 말씀인가요?]
[아니지, 너구리한테 말일세!]
한지무환의 아들 딸, 며느리는 안채 방 안에 갇혀 있었다. 그러나 감시꾼은 단 한 놈도 보이지 않았다. 애당초 금전표가 인질 감시자 넷을 박아두었는데, 감시꾼들은 바깥쪽에서 들려온 경보에 놀라 문틈으로 내다보다가, 때마침 당도한 남황팔마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만 혼비백산, 인질을 팽개쳐버린 채 뒷문으로 빠져나가 삼십육계 줄행랑을 쳐버린 것이다.
시철은 진작부더 감시꾼들이 기웃거리는 낌새를 챘지만, 일부러 모른 척 놓아보내고 뒤쫓지 않았다. 그래야만 노가도측에 자기와 남황팔마들이 주고받은 얘기가 전달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결국 시철은 양 면으로 자신의 계획을 적방에 흘려보낸 셈이 되었다.
한지무환의 자녀들은 호신무예를 익혔을 뿐으로 아직 강호상에 나온 적이 없었다.
이들 세 사람은 시철에게 구원을 받고서 고마움을 이기지 못하여 보는 이에게마다 감동어린 인사를 올렸다. 시철은 이들에게 길떠날 차비를 시키고 지름길로 해서 속히 유가시로 돌아가라는 분부를 내렸다. 그러나 한지무환의 자녀와 며느리는 은인의 분부를 거역했다.
이대로 여기서 기다리면 아버님이 마을 사람들을 거느리고 구원차 달려올 테니까, 큰 힘은 못되지만 그 병력으로 시철을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이리하여, 불청객 두 패거리는 낯선 마을에 버티고 앉아서 어두운밤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시철 일행이 마을에서 때를 기다리는 동안, 남호취영(南湖嘴營)에는 30척의 병력 수송선이 도착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맞은편 구강부(九江府)에서도 폭풍의 조짐이 일기 시작했다. 관군 정규병 1천 명과 민간인의 사복을 입은 병용(兵勇) 1백여 명이 부성(府城) 안에 집결을 완료한 상태로 대기중이었던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이 무렵 또 다른 관군 대부대가 주간 잠복, 야간
행군으로 남강부(南康府) 대로상을 따라 은밀하게 진격하고 있었다. 이들의
중간목표는 남창부(南昌府), 거기서 다시 육로를 따라 남진할 경우, 임강(臨江) 분의현(分宜縣)을 거쳐 원주부(袁州府)에 다다르게 된다. 원주부는 바로 엄승 엄세번의 세력 거점이다. 정오가 지나서 남호취영에 닻을 내린 병력 수송선단에는 정규군과 편의대원(便衣隊員;秕艮隊) 도합 4백여 명의 병력이 타고 있었다.
이 부대를 거느린 지휘관은 엄격하기로 명성이 드높으신 남경성(南京省)
휘주부(徽州府)의 추관(推官:檢察官) 율기(栗祈)였다.
구강부에 집결한 병력의 통군(統軍) 나으리는 그 내력이 지방 백성으로서는
상상조차 못할 인물이다. 바로 위명이 쟁쟁하신 철면어사(鐵面御史) 임윤(林潤) 대인이시다. 공정 무사(公正無私)하기로는 당대에 으뜸, 얼굴에 철판 깔고 국법을 집행하신다는 임대인은 경사(京師)에서 직접 내려온 흠차대신(欽差大臣)의 직권을 행사한다.
육로를 따라 은밀히 남창부로 진격중인 통군 나으리는 원주부(袁州府)의
추관(推官) 직에 있던 곽간신(郭諫臣)이었다. 일개 부(府)의 검찰관이라면
불법부정을 적발 처벌하는 권한을 지녔다. 그러므로 추관 앞에서는 한 지방의 대소 관원과 백성들이 감히 우러를 수 없으리만치 엄하고 무서운 존재다. 그런데, 곽간신은 운수 사납게도 부임지를 잘못 배정받았다.
원주부라면 바로 엄숭 엄세번 부자의 고향이요, 세력거점이었다. 성내에는 온통 엄가 일족의 저택과 누각이 구름처럼 잇대었을 뿐 아니라, 사사로운 정부조직 오부(五府)를 설치해서 수백 명의 노예병(奴隷兵)과 망명객, 자객(刺客)들로 편성된 비밀 군사집단을 양성하여 막강한 세력을 떨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의 눈에는 검찰관따윈 비치지도 않았다.
한 마디로 원주부 일대는 엄씨의 천하였던 것이다.
명 세종(明世宗) 가정(嘉靖) 38년(1559), 엄세번은 또다시 대규모 건설공사를 벌여 1천여 명이나 되는 목공 석수를 동원, 호화찬란한 누대(樓臺)를 세우기 시작했다.
검찰관 나으리는 국법에 의거해서 이 공사를 중지시키려고 엄씨 저택을 방문했다가 문전에 들어서지도 못한채 노예들에게 죽도록 매를 맞고 실신한 상태로 길바닥에 내던져지는 참담한 꼴을 당했다. 하마터면 늙은 목숨을 날릴 뻔한 그는 분김에 엄가 세력을 타도할 결심을 굳혔다.
몇 달 후, 만신창이가 된 몸을 추스르게 되자, 곽추관 나으리는 직속상관이신 철면어사 임윤 대인께 밀서를 올렸다. 그 비밀 보고서에는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은밀히 부하정탐꾼을 풀어 조사해놓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현재 공사장에 투입된 목공 석수 1천 명은 진짜 기술자들이 아니라 전국에서 지명수배중인 탈주병(脫走兵)과 비적의 무리들을 끌어모아 위장(僞裝)시킨 정예 반란군이라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어사 임윤은 즉각 방증자료를 은밀히 수집해 나갔다. 이 무렵, 임대인은 황제의 칙명을 받들어 강서(江西), 절강(浙江), 남경(南京) 일대의 왜구 방어태세를 감찰하느라 순시중이었는데, 곽추관의 밀서를 받고서 근 1년 남짓 고심참담한 끝에 마침내 엄씨 부자의 사병(私兵) 조직 증거를 잡아내었으며, 이 반역음모를 황제에게 긴급 상소(上疏) 하여 엄가부자의 운명을 결딴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남호취영에 집결한 병력은 안경부(安慶府)로부터 양자강 하류를 거슬러 올라온 선단이었다. 이 병선(兵船)들은 도착 즉시 재출항 준비를 마치고, 민간복으로 위장한 편의대(便衣隊)가 소문없이 먼저 남쪽으로 출동했다.
시철 일행과 남황팔마가 다리참을 쉬는 마을에서 노가도 나루터까지 거리는 불과 5리(10km), 무림계 친구라면 1각의 시간도 채 못되어서 들이닥칠 수 있으므로 미리 서둘러 떠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한밤중에 떠나겠노라고 떠벌렸던 시철은 오후를 넘겨 신시(申時;15:00) 초가 되자 곧바로 몸단속을 하고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떠나기에 앞서, 그는 일지화를 농가에 남겨두고 한지무환의 자녀들더러 잘 보살펴줄 것을 부탁해 놓았다.
시철과 민강묵교, 민자건, 여화룡이 금전표를 데리고 대문 밖으로 나서자, 이웃집 남황팔마도 눈치 빠르게 쏟아져 나왔다. 피차 맞대놓고 껄껄 웃기는 했으나, 서로 속셈이 다른 줄 뻔히 아는 터라, 마귀 여덟 명은 잠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시철 일행보다 10여 장 뒤에 갈짓자 걸음걸이로 휘적휘적 시원스레 따라붙었다.
이들 두 패거리의 발길은 노가도 쪽이었다.
궁정호(宮亭湖)이 일대에는 동쪽을 향해 깊이 5,6리 정도의 뿔처럼 뻗어나간
항만이 제법 너른 면적을 형성하고 있다. 이 항만의 동쪽 끄트머리에 작은 하천 두 갈래가 흘러든다.
만약 노가도에서 배를 타지않고 남쪽 기슭으로 건너가려면 바로 이 동쪽으로 감돌아 지나가야만 하는데, 그 우회거리는 15,6리나 멀다. 당시만 하더라도 호수 한가운데 개펄과 모래로 이루어진 톱이 북편 기슭에 가깝게 자리잡았는데, 그 북안(北岸)이 바로 노가촌(勞家村), 여기서 작은 나무 다리가 모래톱까지 걸쳐 있고 그 모래톱 남쪽에 나루터가 있어서 왕복선을 갖다댄다.
봄철과 여름철, 물이 한창 불어날 계절에는 다리를 건너다닐 수가 없으므로, 양쪽 기슭을 오가는 모든 길은 오로지 나릇배에 의지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노가도는 제법 부유한 마을이다. 거주민의 태반이 고기잡이로 살아가는데,
가호(家戶)만도 1백 호에 가깝다. 이 마을 북쪽은 노가도의 부호들이 사는
구역이라, 대부분 기와집인데다 사이사이로 높직한 2,3층 집이 대여섯 채 우뚝 솟아 있다.
이 누각집으로 말하자면 노가도의 정화(精華)라고 일컬을 만하다. 마을
북편 중심에는 노씨(勞氏) 가문의 사당(祠堂)이 자리잡고, 그 사당을 중심으로 건물 30여 채가 세워졌다. 청명절(淸明節), 조상에게 시제(時祭)를 올리는 날이면 이 건물안에 3,4백 개의 잔치상을 벌일 수가 있어서, 온 마을 자제들이 모두 들어앉아 하루를 즐긴다.
큰 길은 마을 서편을 돌아서 남쏙 나루터로 곧장 내려간다. 그 북쪽 10리쯤만 가면 바로 호구현성(湖口縣城)이라, 마을 사람들은 물건을 사고 팔기 위해 성 안에 들어가는데 겨우 반 나절 시간이 소요될 뿐이다.
남쪽 기슭 나루터에는 또 다른 마을이 하나 있다. 일곱 가호 밖에 안되는 작은 촌이라서 이름조차 없다. 한 겨울철 갈수기(渴水期)에는 나룻배도 북편 기슭 모래톱까지 밖에 닿을 수 없기 때문에, 여행자들은 모래톱을 가로질러서 다리 건너 노가촌으로 들어가게 된다. 나릇배는 두 척, 하루 한 시도 쉴 새 없이 양쪽 기슭을 왕복하면서 손님들을 실어나르고 있다.
무명촌(無名村)의 서남편 모퉁이에는 나무가 울창한 동산이 하나 자리 잡았는데, 그 산비탈은 동쪽을 향해 뻗어나와 마을 남쪽에 제법 높직한 언덕배기를 이루면서 닿아 있었다. 이 무명촌 고개 마루턱에 올라서서 굽어보면, 물건너편 노가도 일대의 형편이 한눈에 아주 뚜렷하게 들어온다.
시철은 이 고개 마루턱에서 걸음을 멈추고 1각 남짓한 동안 찬찬히 물건너 노가촌의 지형과 동태를 바라보더니, 일행들에게 분부를 내렸다.
[해가 아직 남았으니까 여기서 좀 쉬었다 가기로 하지요. 그리고 민형, 포로
녀석을 끌고 다니느라 힘드실 텐데, 금전표란 놈은 여기서 처치해 버립시다.
어떻소?]
말을 마치자, 그는 길 곁 나무 그루터기에 기대어 앉으면서 민자건을 향해
능글맞게 웃었다. 민자건의 얼굴빛이 또 싹 변했다.
[아니, 시형! 여기까지 애써서 데려왔는데, 그냥 죽이기는 아깝지 않소?
혼혈(昏穴)이나 찍어서 던져둡시다.]
[흐흐후! 저 따위 사나운 도적놈을 이 세상에 남겨 두었다가, 또 무슨 짓을 얼마나 저지를지 누가 알겠소?]
민자건이 반박을 하려는데, 이번에는 민강묵교가 낄낄거리면서 먼저 끼어들었다.
[여보, 민씨 아우! 자네 그 철골빙심이 죽을 때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알기나 하는가? 경맥(經脈)은 모두 터져서 산산조각이 났지, 관절마다 뼈다귀가 물러났지, 근육도 흐트러지고 풀어졌지,.... 그것참 눈뜨고 못 볼 광경이더구만! 내 말대로 유가시에 들어가기 직전에 죽였더라면 그토록 차마 말못할 고통은 면하고 갔을 걸세. 그것이 철골빙심한테는 편한 길이었겠지.
자네가 기를 쓰고 데려가자고 고집을 부리는 통에, 그 사람만 죽을 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고통을 배가 터지도록 당했지 뭔가? 우리 민씨 아우님도 그런 면에선 아주 비정하단 말씀이야.
금전표마저 그런 식으로 고통스럽게 죽이려거든 이리 내주게. 자네 대신 내가 수고해 줌세. 아주 깨끗이, 편하게 처치할 테니까.]
[아니, 철골빙심이 죽었단 말요? 그 사람....죽는 걸 누가 봤소?]
민자건이 멍청해져서 뜨악하게 묻는다.
[에헴!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그 녀석 오늘 신시(申時)까지 밖에 더 못살게 되어 있단 말씀이야. 지금이 바로 신시 초니까, 그 무진 고통을 받으면서 죽어가고 있을 걸세. 이 세상 천하에 그놈의 목숨을 구할 만한 사람은 아마 없으렷다?]
[어어....! 그럼 나대협이 그 사람 몸 속에다 농간을 부렸단 말이오?]
[아니, 바로 나요!]
시철이 냉랭하게 대답했다.
[시형이....? 무슨 수법을 쓰셨소? 혹 그걸 푸는 사람이라도..?]
[이건 비밀이오. 말씀 못 드려서 미안하구료. 그건 그렇고.... 민형은 저 범가놈을 죽일 데요, 안 죽일 테요?]
이 때 멀찌감치 뒤처져 오던 남황팔마가 당도했다. 선두 독고마랑이 귓결에 듣고서 반색을 하면서 묻는다.
[자네들, 그거 무슨 얘긴가? 누굴 죽인다고?]
[바로 저놈, 나용문의 앞잡이요!]
시철의 손가락이 핏기라곤 한 점도 없는 금전표를 가리켰다.
[이런! 그것 참 잘 됐네그려. 나한테 넘길 생각은 없나?]
[안될 것도 없지요.]
시철이 큰 선심쓰듯 대답했다.
[고맙네, 고마워! 이것 찬 오랜만에 손 좀 풀어보겠군 그래!]
독고마랑 대신에 백독장마가 아주 고마운 표정으로 두 손바닥을 싹싹 비벼가며
선뜻 나선다. 그러자, 민자건이 이거 큰일났다 싶었는지 금전표 앞을 얼른
가로막으면서 고함쳤다.
[아무도 못 건드려! 이 사람은 아직 우리한테 쓸모가 있단 말야!]
시철의 얼굴이 당장 굳어졌다.
[민자건! 당신은 도대체 어느 편 사탐이오? 우리라니, 누구 쪽을 가리키는 말인가? 민형, 요즈음 가만 봤더니만 마음이 아주 약해지셨는 걸!
지난번 배 안에서 웃어가며 해적 요해야차 학천민을 죽여버리던 영웅 호걸다운 기백은 몽땅 사라진 모양이구려. 당신, 도대체 무슨 속셈을 지녔소?]
그러자, 민자건은 얼른 허물어질듯 웃어가며 시철의 공박을 막았다.
[아니, 아니....! 제가 시형하고 맞서려는 게 아니오. 이 범가 놈을 왁살스런 팔마 수중에 넘겼다가 참혹스런 꼴이나 당할까 싶어서....]
[그럼 어쩌시겠소?]
[죽일 때 죽이더라도 고통은 면하게 해 줍시다.]
그 말을 듣더니, 백독장마가 눈을 훌떡 까뒤집고 호미장(虎尾杖)을 내질러 가며 버럭 악을 쓴다.
[요 개같은 놈의 자슥 봤나? 이 백독장마 어르신께서 심심풀이 좀하자는데, 훼방을 놓아? 시철 아우가 그놈 나한테 넘겨주기로 승락했는데,
네깐 놈이 뭔데 나서서 감놓아라 배놓아라 참견이냐? 저리 멀찌감치 꺼져! 안 갈테야? 공연히 노부 성깔 건드리고 나중에 손매 사나우니 마느니 발광 떨지 말란 말이다!]
일은 민강묵교가 거뜬히 해결했다. 금전표의 두 발목을 덥석 잡기가 무섭게
팔마쪽으로 힘껏 내던져 준 것이다.
[옛소! 이러면 간단하지 않나? 으핫핫핫! 동행자들끼리 화목을 상해서야 어디 되겠소? 그놈 잘만 주무르면 기막힌 황금 소식을 알아낼거요!]
민자건은 기급을 해서 얼른 막으려고 했으나 한 발 늦었다. 독갈이랑이 늙은
표범의 몸뚱이를 냉큼 받아버린 뒤였던 것이다. 싸느란 눈초리로 민자건의 하는 양을 흘겨보던 시철, 다시 걸음을 옮겨 떼면서 짐짓 딴소리를 늘어놓았다.
[일단 나루터까지 내려가 봅시다. 해저물기 전에 물건너 가는 것이 좋겠는데,
배편이 될지 모르겠군!]
대안에서 건너온 나룻배가 다시 뜨려고 한다. 또 한 척은 벌써 물 한가운데 떠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 배가 돌아와야 건널 참이라, 서두를 필요가 하나도 없지만 시철은 일행을 데리고 출발했다.
남황딸마는 느긋하게 둘러앉아 포로를 닥달하기 시작했다. 금전표의 처절한 비명소리가 고막을 찢는데도, 시철은 외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성큼성큼 나루터를 향해 내려갔다.
물가의 마을은 이름조차 없는 만큼 낯선 사람이 들어서도 개짖는 소리, 닭울음 소리 하나 들리지 않고 조용하기만 히다. 동구 밖에서 부두쪽으로 돌아나오면 대나무 울타리가 둘러친 선창이 바로 보인다.
선두 시철은 부둣가에 서있는 세 사람을 발견했다. 나룻배를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두 명은 농사꾼 옷차림을 한 장한(壯漢)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푸른 머리수건에 빨래 광주리를 인 시골 아낙이었다.
이들 세사람은 울타리 모퉁이에 서서 하염없이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웅성웅성 손님 한 떼가 들어서자, 이들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바라보았다.
그리고 시철 일행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일이 벌어졌다. 시골 아낙네가 두 팔을 활짝 벌리고 반색을 하면서 다가온 것이다.
[오빠....! 아이구, 시철님도 오셨군요!]
시철은 일순 멍청해지고 말았다. 그녀의 모습을 알아본 순간, 가슴속에 의혹이 뭉게뭉게 일기 시작했다.
'이게 웬일이냐? 큰 공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이 계집은 민자건의 아내, 단목응양의 며느리가 아닌가? 세상에....! 요 앙큼한 것이 내 손에 죽으려고 또
나타났구나....!'
지금은 선비의 상투와 옥색 두루마기를 벗고 수수한 시골 아낙으로 바뀌어 있지만, 그녀는 틀림없이 민자강이었다. 시철은 암암리에 공력을 돋우어 경계하면서 민자강이 다가오는 모습을 유심히 살폈다.
남장을 했을 때보다 한결 부드럽고도 활기차게 움직이는 몸매에서 여자다운 곡선미가 돋보이고, 사내의 가슴이 두근거릴만큼 발랄한 청춘의 냄새, 젊은 아낙의 무르익은 체취가 풍겨나왔다.
시철은 모르고 있다. 자기 스승 표묘신룡이 단목 회주를 따라 배편으로 이
노가도에 오지 않았다는 사실, 그리고 회주에게 보고하러 간 대사형 정충과 구문종 일행 아홉 명이 모두 숲 속에 잠복중이던 다섯 신비객의 손에 제압당하여, 일체의 상황보고가 회주에게 전달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철의 입장으로서는 민자강의 출현을 단목응양이 보다 더 무서운 음모를 꾸며, 이 부근에 철통같은 매복진을 깔아놓은 것으로 밖에 이해할 수 없었고, 또 그 매복에 자신이 빠져들었다고 착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여차직하면 일전을 불사할 태세를 갖추고서도 겉으로는 시침을 뚝 뗀 채 민자강을 맞아들여 물었다.
[아니, 민소저! 어떻게 여기 와 계시오?]
그러나 시철은 대답을 듣지 못했다. 민자건이 먼저 뛰어나와 앞을 가로막더니,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부여잡고서 격동을 이기지 못한 듯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물었던 것이다.
[아이구, 하느님 고맙습니다! 이렇게 무사하다니....동생! 그 위험한 데서 어떻게 빠져나왔어? 시씨댁 소저는 어디 있어? 같이 탈출하지 않았나?]
[그걸 한 마디로 어떻게 다 얘길해요? 아이 참....!]
민자강은 우울한 기색이 되어가지고 탄식을 내뱉고서 말을 잇는다.
[우리 둘은 난장강에서 미향을 맡고 기절했어요. 정말 무서운 악몽을 꾼 것
같아요.]
이 때 시철이 서쪽을 가리키면서 그녀의 말을 중단시켰다.
[여기는 얘기할 데가 못되겠소. 갑시다! 저기 반 리쯤 가면 대나무숲이 있는데, 그리로 옮겨서 얘길 계속합시다. 나도 민소저한데 물어볼게 많으니까요.]
여화룡이 먼저 앞장을 섰다.
[하하핫! 우리 민씨 아우님 복도 많지 뭐요? 이렇게 아리따운 누이동생을 다
두셨을 줄이야.... 정말, 소나기 빗방울을 맞고 떨어진 꽃잎처럼 아름다우시구먼! 하하하! 정말 우리 나이 불혹(不惑)을 넘긴 것이 한스럽구려! 민강묵교 형님, 뭘 기웃거리는 거요? 눈치없게스리.... 우리 한 발 앞서 갑시다. 오랜만에 젊은이들끼리 친숙해질 기회를 주어야 하지 않겠소?]
상당히 무례하고 경박스런 말투였다. 뒤따르던 민자건이 사뭇 듣기 거북했는지, 얼굴에 당장 불쾌한 기색이 확 피어올랐다. 그러나 용케도 발작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이 일대에는 길이라곤 따로 없다. 어디로 향하든지, 호수 기슭을 따라서 시든 잡초더미와 바싹 마른 갈대숲을 헤쳐가며 이리 돌고 저리 감돌아 나가야만 한다.
여화룡과 민강묵교 두 길잡이는 일부러 소리가 나도록 양 손으로 갈대숲을 와수수와수수 헤쳐가면서 앞 길을 텄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 호수를 끼고 대나무가 빽빽하니 들어찬 숲 속에 들어섰다.
시철은 길잡이 뒤를 따라가는 도중에도 단 한 순간이나마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러나 습격대가 매복한 기척은 아무 데도 없었다.
그가 호수 기슭을 끼고 은밀한 곳으로 대화 장소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보다 시끄러운 남황팔마부터 떼어 놓아야겠다는 의도와, 부둣가에서 어슬렁거리던 시골 사람 둘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이 무림계 인물이라는 것은 한눈에 보아서도 알아차릴 수 있는데다, 아무리 생각해도 민자강이 꼬리를 달고 온 한 패거리라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다. 이들은 언제든지 물건너 긴급경보를 전달할 위치에서 있는 것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매복습격대의 실마리를 찾아내어 반격할 대책을 세워놓지 않으면 안될 입장이었다. 수영 솜씨는 자신이 있다. 만약의 사태에 언제든지 가까운 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어 위기를 벗어나면 된다. 게다가 민강묵교와 여씨 쌍걸의 형님 같은 천하 제일의 상어 두 마리가 곁에 도사리고 있는 한, 수중탈출의 안전은 용왕님께서 보장해주신 것이나 다를 바 없다.
대나무 숲까지 별다른 낌새가 보이지 않게 되자, 그는 숲의 서북쪽 모퉁이를
돌아서 물 가에 닿은 잔디밭을 선택했다. 그 자리 역시 대나무로 둘러쳐져 날으는 새나 굽어볼까, 삼면이 꽉 막힌 곳이었다.
시철은 걸음을 멈추고 자리잡아 앉았다.
심문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민자강도 무릎을 도사리고 마주 앉았다. 시철이 첫 물음을 던졌다.
[잠깐 쉬었다 가기로 합시다. 민소저, 제 누이동생 소식 좀 아시오?]
민자강은 쓴 웃음을 짓고 대답했다.
[난장강에서 미향을 맡고 쓰러진 이후, 다시 깨어났을 때에는 잡혀있는 곳이
어딘지 전혀 몰랐어요. 연혈(軟穴)을 찍혀 움쭉달싹도 못하는데다가 밤낮없이 감시자가 따라붙어서 도망칠 엄두조차 내지 못했거든요.
감시자는 무예가 아주 뛰어난 중년 여자 둘이었는데, 손가락 하나만 까딱해도 펄쩍 뛸 만큼 지독스레 경계를 했어요. 납치당한 이후 다섯 차례나 고문을 당했는데 시소저와는 두 번 대질심문을 당했어요.]
[놈들이 뭘 묻습디까?]
시철의 추궁이 각박해지기 시작했다.
[당신 행방이죠. 그리고 당신이 어떻게 해서 그런 무예를 지니게 되었는지
자백하라는 거예요. 하지만, 난들 어떻게 알겠어요? 고스란히 닥달만 당할 수 밖에 없었죠. 문초하던 놈들 가운데 나용문이 제일 악질이었어요. 정말 냉혹스럽고 잔인한 놈이더군요. 그 직후부터는 줄곧 쫓고 쫓기고, 도망치고 피신하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어요.
자련장에서 불이 났을 때, 놈들은 시철님의 여동생을 데리고 딴 길로 군웅들의 포위를 돌파해 나갔어요. 그 이후 우리는 다시 만나지 못했죠.
오늘 아침, 저 남쪽 작은 마을에서 쉬게 되었는데, 놈들이 아침을 먹느라고 감시가 소홀해진 틈을 타서 나는 손목에 묶인 쇠힘줄을 끊고 가까스로 놈들의 마수에서 빠져 나왔어요.
그동안 귓결에 듣자니, 나용문은 인질을 데리고 노가도에 와서 사당(祠堂) 북쪽 노씨 여섯째 나으리 댁에 머물고 있다더군요. 나는 오빠와 당신이 그리로 구원하러 달려올 줄 예상하고서 시골 아낙으로 변장해서 이 나루터에 와 기다리고 있었던 거예요. 그런데 얼마 안 있어 광응의 부하 둘이 남쪽에서
나타났어요. 바로 아까 그 두 놈이죠. 주고 받는 얘길 들으니까, 당신을 유인해서 데려갈 궁리를 하고 있더군요.]
[그래, 놈들이 뭐랍디까?]
[당신, 그 산항촌 마을에 들어가지 않으셨나요?]
민자강이 되물어왔다.
[그렇소, 갔었지! 민소저도 산항촌에 계셨을 텐데, 아닌가?]
시철은 의미심장하게 반문했다. 그러나 민자강은 앙큼스런 기색으로 외눈 하나 깜짝 않고 대답한다.
[내가 거길 왜 가요? 산항촌이 어디 붙어 있는지조차 모르는 걸요. 나는 오늘 아침에 탈출해 나왔단 말이에요.]
[아하, 그러셨군! 하면, 그 산항촌에서 날 잡으려고 내세웠던 미끼는 당신이
아니라 내 누이동생이었네 그려! 또 한 가지, 그녀는 나용문의 수중에 잡혀 있지 않고 바로 그 미치광이 독수리란 놈의 손아귀에 있다는 결론이 나오는 군요. 나용문은 이 노가도에 엎드려 있었고, 미치광이 독수리는 날 잡으려고 산항촌에서 매복습격대를 진두 지휘하고 있었으니까 말이외다. 물론 그 미끼도 같이 데리고 말이오. 그런데, 어떻게 민소저의 귀에 그 따위 엉터리 소식이 전해졌을까....?]
[그건.... 나도 잘 모르지만.... 나용문이란 놈이 그녀를 노씨 댁에 감금하고 있는 것만큼은 확실해요. 광응의 손에는 절대로 없었어요. 지금 악산선생 엄년과 나용문은 모두 그 노씨 저택에서 배편을 준비하고 있어요. 아마 원주(袁州)로 돌아갈 모양이에요.]
[광응이란 놈은 어디 있소?]
[역시 노가도에....]
[흐흠!]
그 대답을 코웃음으로 무시해버린 시철, 풀밭에 벌렁 누워가면서 아무렇게나
중얼거린다.
[미치광이 독수리도 거기 함께 있다? 좋지, 오늘 밤중에 그 노씨댁을 방문해야겠군. 닥치는 대로 하나씩 하나씩 쳐죽여 가면서 말씀이야. 삼 경이 되려면 아직 시간도 많이 남았으니까, 느긋하게 좀 쉬었다 떠납시다.]
민자건이 부스럭부스럭 몸을 일으키더니 옷자락에 뭍은 검불을 털어내면서
시철에게 한 마디 툭 던졌다.
[아, 시장기가 도는구먼! 시형, 예서 기다리고들 계시우. 내가 먹을 걸 찾아가지고 오리다.]
그러자, 여화룡이 품 속에서 큼지막한 보따리를 꺼내더니만 싱긋 웃었다.
[그럴 것 없네! 내 이럴 줄 알고 음식을 듬뿍 준비해 가지고 왔으니까. 자네가 또 여기저기 천둥벌거숭이로 마구 뛰어다니면서 벌집을 건드려 놓으면, 우리더러 무슨 수로 감당하라는 말인가? 으하하핫!]
이죽이죽 능글맞게 민자건을 도로 끌어앉힌 그는 보따리를 시철한테 툭 던져주었다. 시철은 풀밭에 누운 채 고개를 돌려 왼편 가까이 앉아 있는 민자강에게 슬쩍 물었다.
[민소저, 당신도 그 미치광이 독수리란 놈을 보았을 테니까, 놈의 내력을 알
만하겠구료?]
[내가 어떻게 알아요? 한데, 시철님은 왜 그런 걸 묻죠? 누이동생의 안위 따 따위 전혀 관심도 없나봐!]
민자강은 교묘하게 화제를 바꾸어버린다. 시철은 덤덤하니 웃으면서 팔베개를 베고서 어쩔 도리가 없다는 듯 서글픈 미소를 지었다.
[우리네 강호 사람들은 부평초(浮萍草)같은 신세 아니오? 뜨내기들이 생사안위 따위에 무슨 애착이 있으며, 관심을 두겠소? 물론 내가 누이동생의 목숨에 관심이 없다는 건 아니오. 지금도 최선을 다하고 있지 않소?]
[그렇다면, 어째서 누이동생에 대해선 묻지 않고 엉뚱한 사람을 묻는 거예요? 나같으면 그게 더 걱정이 될 텐데....]
[일이란 게 걱정만 한다고 해서 풀려지지는 않는 거요. 걱정을 하면 마음이
흔들리고 심란해져서 충동적으로 조급하게 일을 처리하려 들게되지요. 그런 행위는 일에 아무런 보탬이 못됩니다. 모든 위험과 난관을 냉정하게 대응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목숨이 열 개 백 개가 있어도이 날 이때껏 살아남지 못했을 거외다.]
민강묵교가 손뼉을 쳐가며 껄껄껄 웃었다.
[그것 참 옳은 말씀일세! 역경을 헤쳐나가는데 꼭 귀담아 들어둬야 할 명언이야. 오늘 밤 우리는 어떤 위기와 맞부딪쳐 싸워야 할지 모르는 판국인데, 조바심을 내고 충동적으로 적지에 뛰어들어서야 어디 되겠나?
지금은 기분을 탁 풀고 생사를 도외시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한 때일세. 그래야만 눈깜짝할 사이에 수천 수만 번이나 변화하는 위태로운 국면에 대처할 수 있단 말이네. 하하하! 오늘밤이 지나면, 여기 앉아있는 사람 중에서 누가 살아남고 또 누가 죽어 자빠질지도 모르지 않나? 걱정이나 하고 긴장한다고 해서 죽을 목숨이 살아날 것도 아닐텐데,
신경 쓸 게 뭐 있나? 아직 해저물녘도 안됐는데, 지금부터 근심걱정에다 두려운 생각을 품는다면, 우리는 적과 싸우기도 전에 벌써 패배한 것이나 다를 바 없네. 자, 그런 생각일랑 다 걷어치우고, 우리 기분풀이 얘기나 좀 하자구! 민소저, 염치없는 질문이지만 금년 나이가 어떻게 되셨소?]
느닷없이 나이를 묻자, 민자강은 어리둥절 영문을 모르다가 이내 얼굴이 발갛게 물들더니, 쭈몃쭈몃 내키지 않는 대답을 한다.
[올해.... 스물이에요.]
이 때였다. 시철이 불쑥 끼어들었다.
[민소저는 한창 꽃다운 나이에 아리땁고 선녀같으신 몸매를 지니셨는데, 아직도 시집을 안 가셨소? 어느 낭군이 맞아들이실지 모르나, 참말 복도 많으신 분이겠구료!]
이번에는 민자건이 깜짝 놀랐다. 시철의 입에서 이런 무례 막심한 언사가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것이다. 그는 시철을 노려보았다. 마주 바라보는 시철의 얼굴에 뜻모를 야릇한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민자강은 뜻하지 않게 놀림감이 되자, 목덜미까지 벌겋게 물들어 고개를 떨어뜨리고 있을 따름이다. 여화룡도 빠질세라 낄낄낄 심술궂은 웃음을 터뜨리더니, 일부러 목소리를 꾸며가지고 민자강을 궁지에 몰아넣는다.
[민소저, 부끄러워하지 마시구려! 평생 한 몸 맡기고 살아야 하는 막중한 대사(大事)를 놓고 말 못할 게 어디 있소? 얘기 좀 해보시오.]
[여대협도....농담 마세요.]
민자강은 고개를 외로 꼬아 뭇사내들의 시선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저는 강호상을 떠돌아 다니는 게 좋아서 아직껏 정혼하지 않았어요]
민강묵교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뻔뻔스레 물고 늘어졌다.
[어흠, 우리 무림계 사람들은 남자나 여자나 할 것 없이 대다수가 혼기를 놓치고 나이 지긋해서야 결혼할 생각을 지닌단 말씀이야!
한창 펄펄 뛰는 나이에 강호상을 누비다가,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룬 다음에 가정을 꾸미는 게 보통이지. 민소저도 방년 스물에 아직 정혼을 안하신 모양이지만, 별뚝스레 늦은 건 아니외다. 누가 민소저더러 노처녀라고 흉볼 작자는 없다, 이 말이오. 핫핫핫! 자, 그럼 이 늙은이가 중매쟁이 노릇을 해볼까 하는데 어떻소? 월궁항아(月宮姮娥)님 같으신 우리 민소저한테 어울릴 만한 짝을 찾아서 인연을 맺어 드리지!]
[나대협! 그 농담 지나치지 않소?]
민자건이 듣다 못해 벌컥 화를 낸다.
[아니, 여보게! 내 말이 어째서 농담인가? 남녀가 장성하면 시집가고 장가드는 게 당연한데, 그런 일을 가지고 농담을 하다니 말이나 될 법한가? 내 보기에는 자넨 벌써 남의 집 사위노릇을 하는 줄 아는데 그렇다고 누이동생을 처녀로 늙혀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
이 나금전이 허풍을 떠는 게 아니라, 진짜 자네한데 기막힌 매부감을 하나 찾아주려고 그러네. 절대로 자네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까, 마음 푹 놓고 기대해 보시게나!]
그러나, 이 때쯤 되어서 민자건의 얼굴은 분을 못 참아 하얗게 질리다 못해
새파래져 있었다.
[나대협, 닥치시오!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그 따위 얘길 꺼내는거요? 당신은 시도 때도 모르시오?]
[핫핫핫! 여보 민형, 오해 마시구려....!]
민자건은 후딱 뒤돌아보았다. 시철까지 가세하다니, 오늘은 왜들 이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시철은 능글맞게 웃어가며 말을 이었다.
[민형이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인데, 노여워하지 않았으면 고맙겠소. 나대협께서는 우리 긴장감을 풀어주느라 호의로 그런 거니까 말이외다.
하기야, 민형의 동생 되시는 분으로 말하자면 치마두른 여장부, 건괵영웅(巾 =巾+國,英雄), 아니지 영자(英雌)라고 해야 옳겠군! 실례했소이다, 암컷 수컷도 구별을 못해서.... 여하튼 민소저는 무림계 사람인만큼 남녀지간의 예법이나 결혼얘기 따위에 구애받지 않으실 터, 우리가 좀 툭 터놓고 솔직히 말씀드리기로소니 큰 실례는 안되리라고 생각하오.
또 나대협 말씀이 어디 틀린 데나 있소? 남녀가 장성하면 시집가고 장가드는 게 당연한 일이지, 무슨 괴변이나 된단 말이오? 나대협께선 무림계의 명성이 자못 뛰어난 분이시라, 좋은 친구분도 많고 또 훌륭한 자제들도 적지 않게 보아두셨을 거외다. 나대협께서 중매를 서신다면 민소저한테도 그리 욕될 것이 없다고 생각되는데, 오빠께서 왜 그리 펄쩍 뛰는지 모르겠구려.
핫핫핫....! 나대협님, 벌써 마음에 점찍어둔 신랑감이 있으시지요? 아예 툭
까놓고 말씀해 보십쇼.]
[하하하! 여보게, 시철 아우님! 자네도 민소저의 배필로 누군가 점찍어 놓은
인물이 있는 모양이로군?]
[바로 그겁니다.]
[핫핫! 내 맞춰볼까? 지척이 천 리라구, 멀리서 찾을 게 뭐 있나? 나는 바로 자넬 점찍어 뒀네!]
[농담 마십쇼, 핫핫핫! 저 따위 떠돌이가 어디 한 구석 민소저 낭군감으로 자격이나 있겠습니까?]
[아니, 이런....!]
민자건이 발작을 일으키려고 소리치려는 판에, 여화룡이 냉큼 손뼉을 쳐가며 가로 막아버렸다.
[이거, 기막힌 말씀이로군! 과연 어울리는 한 쌍 배필이 되겠는걸? 월궁항아
같으신 민규수에 강호의 젊은 영웅 시철 아우님이라, 됐네, 됐어! 여보게 시철 아우, 이리 좀 가까이 와서 민소저와 나란히 앉아보게, 한 쌍이 천생배필인지 관상을 보아줌세 그려!]
[입 닥쳐....!]
드디어 민자건의 분노가 정수리 꼭대기에서 폭발했다.
[여화룡, 내 경고하겠다! 더이상 내 누이동생한테 모욕적인 언사를쓰면 그냥
놔두지 않겠다!]
그래도 여화룡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능글맞게 대꾸한다.
[아이쿠, 민씨 아우님 웬 성을 그렇게 내시는고? 오빠야 좋든 싫든, 결국 누이동생이 결정할 일이 아닌가? 시철 아우님으로 말하자면 명문출신에다가 인품이나 무예 수준도 출중한데, 어디가 어때서 민규수의 배필감이 못 된다는 건가? 내가 민소저한테 모욕적인 언사를 쓰다니, 천부당 만부당하신 말씀일세!
여자는 이 세상에 태어나면 시집을 가야하는 법, 누이도 시집보내고 딸도 시집보내 남의 집 식구가 되는 게 아닌가? 적어도 오빠 되는 사람이라면 자기가 직접 매부감을 골라주진 못할 망정 누이동생 시집 못 가게 훼방을 놓아서야 어디 쓰겠나? 누이동생의 종신대사(終身大事)는 막을 수도 없거니와 간섭할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네.
설마하니, 누이동생을 한평생 집안구석에 틀어박아놓고 무슨 딴 짓거리를 할 생각은 아니겠지? 흠흠, 자네가 시철 아우님한테 불만이 있어서 이 혼사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막을 권리는 없을 듯한데, 어떻게 생각하나?]
그러자, 시철이 벌떡 일어나더니 껄껄 웃어가며 아예 민자강이 있는 왼쪽 자리로 옮겨 앉는다.
[자, 입씨름할 것 하나도 없소! 공연스레 우리끼리 화목을 상할게 뭐 있소?
안그렇습니까, 민소저?]
시철은 짐짓 경망스레 그녀의 보드라운 어깨에다 손을 털썩 갖다 얹었다.
[민소저, 나는 내가 당신의 배필감이 못된다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소. 그러니까 여대협의 허튼 소리에 마음쓰실 것 하나도 없어요. 내 친구 중에 나이 젊고 뛰어난 인물이 하나 있는데, 민소저 마음에도 꼭 드실 거요. 어떻소, 내가 중매를 서 드리리까?]
민자강은 자기 어깨에 걸터놓은 손을 뿌리치려 했으나, 어찌 된 셈인지 그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어디 그뿐이랴, 흡사 거대한 빨판이 끌어당기는 듯한 힘에 쏠려 자신도 모르게 몸뚱이가 시철쪽으로 기울어지는 걸 가누어서 세울 도리가 없으니, 이것 참말 야단났다!
얼핏 보면 자기가 상대방을 밀치면서도 마지못한 척 오히려 기대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 되니, 민자건은 허파가 터져나갈 정도로 미쳐버리고 말았다. 그는 시철이 더이상 주절거리기 전에 후딱 달려오더니 손가락질을 해가면서 버럭 악을 질렀다.
[그 손 못 치워? 체통머리 없게 웬일이야....! 네놈이....!]
시철은 냉큼 손을 거두었다. 이쯤 하면 효과가 있겠구나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드디어 본론으로 화제를 이끌어갈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자건형, 냉정하시구려. 이런 얘기는 재미 없으신 모양인데, 그럼 그만 둡시다. 시간 보낼 화제는 아직도 많이 있으니까.... 우리 그 미치광이 독수리 얘길 해보는 게 어떻겠소?]
민자건은 그래도 성이 안 풀리는지 허리춤에 양 손을 얹고 씨근벌떡거리며 서서 시철을 노려보았다.
[아무 얘기나 지껄일 테면 해 보시오! 허나, 내 누이동생은 화제에 끌어들여선 안되오! 알겠소?]
[좋아, 그럽시다! 민형은 내가 그 미치광이 독수리의 정체를 알아낸 걸 모르고 계시겠지?]
[알아냈단....말이오?]
분노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었던 민자건의 표정이 뜨악한 기색으로 바뀌어 냉큼 물어온다. 시철은 느긋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깡그리 파악해냈지!]
[어디....설명 좀 해보시구려....]
[언제부터 별호를 바꾸어 쓰는지 모르겠으나, 광응(狂鷹)이란 그놈은 비로
보응신(報應神) 단목응양(端木鷹揚)입디다. 그놈의 두 뺨에는 맞뚫린 상처가 나 있지! 그건 내 철령전에 맞아서 다친 거요. 옛날에는 신주(辰州) 장원에다 둥지를 틀고 들어앉았었는데, 요즈음은 엄가놈의 문지방에다 소굴을 차려놓고서 사냥개 노릇을 하고 있더군.
그놈한테는 아들이 둘, 딸이 하나 있는데, 맏아들은 단목장웅, 진작에 혼인해서 아내를 두었습디다. 둘째 아들은 단목장풍, 무식하기가 이를 데 없고 세상천지 뭐가 뭔지 모르고 날뛰기만 하는 철부지에다 무예 수준도 삼류밖에 못 지닌 위인이더군.
고명딸 단목자운, 제법 곱상하게는 생겼지만 성미가 거칠고 어리광만 부리면서 자랐기 때문에 누가 데려다가 함께 살지는 몰라도 평생 속께나 푹푹 썩을 거요. 언젠가는 나한테 호감을 보인 적도 있었지만, 내가 그 따위 비천한 혈통을 가진 계집하고 상대할 리가 있겠소? 어림도 없는 노릇이지! 한데 말씀이야,
그 단목응양의 맏며느리는 정말 기막히게 잘 생겼더군! 나도 홀딱 빠질 뻔했으니까 말이오. 그런데 한 가지 더 기막힌 것은....]
[그녀가 어쨌단 말이야?]
민자건의 얼굴빚은 시퍼렇다 못해 죽은 잿빛으로 바랬다.
[남편한테 더할 나위없이 잘 해주는 여자라고 하는데, 듣자하니 침상에서 방중술(房中術)이 굉장하다고 그럽디다....]
그 말에 놀란 사람은 여화룡이다. 시철이 쌍소리를 다 지껄일 줄은 생각조차
못했던 것이다.
[여보게! 그 돼먹지 못한 소릴랑 안할 수 없나?]
[돼먹지 못한 소리가 아니라 사실입니다. 하하하....!]
시철은 여화룡의 꾸지람을 예사로 들어넘기면서 빙글빙글 웃었다.
[좋습니다. 부도덕한 얘기는 안하기로 하지요. 그럼 미치광이 독수리의 맏아드님 단목장웅 얘길 들어보실까요? 그놈 진짜 못된 물건입디다! 제 애비보다 한 술 더 뜨는 작자니까, 말할 나위 있겠습니까? 흐흐흐!
신주 지방에서 소문이 파다하게 나도는 개잡놈이라서, 천리(天理)를 해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해치우는 놈입니다. 사람도 죽이고 불도 지르고, 남의 집 부녀자를 잡아다가 겁탈한 다음에 죽여서 입을 봉하고, 그것도 모자라서 기생집 갈보집에 틀어박혀 진이 다빠져서야 나온다니, 이루 말도 못할 색마(色魔)라더군요. 심지어는 제 마누라까지 거기 데려다가....]
[허튼 소리 말앗! 나는 그 터무니없는 말을 안 들을 테다!]
민자건이 짐승처럼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시철은 태연자약, 자기 하고 싶은 얘기를 다끄집어낼 작정이다.
[민형이 듣기 싫거든 안 들어도 좋소. 허나, 내 말을 막지는 못할거요. 안 그렇소? 병법에도 그랬듯이, '지피지기,백전불태(知彼知己,百戰不殆)'라,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도 있지 않소?
현재 우리의 적수는 단목응양, 어차피 결전을 벌이게 된 바에야 그놈의 집안 내력을 낱낱이 밝혀서 알아두어야만 좋다고 생각해서 다 말씀드리는 거요. 나한테는 단목응양이 전혀 낯선 인물이 아니외다. 그래서 단목 일가의 비루한 혈통, 몰염치한 내력을 아는껏 설명해 드리고, 적장(敵將)의 인품을 이해하는 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외다.
그자가 한창 젊었을 시절에는 강호상에서 제법 협객의 명성을 떨친 것도 사실이오. 허나 썩어빠진 풀 가지곤 도배를 못하는 법, 천생 비루한 집안에서
태어났으니 5대 조상 적부더 전해 내려온 노예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아깝게도 늘그막에 훼절(毁節)하여 노예보다 못한 엄숭 엄세번의 앞잡이 신세가 되고 말았소.
이거야말로 제발로 진수렁에 뛰어든 격이니까, 비천한 노예보다도 더 하류 잡배가 아니고 뭣이겠소? 그놈은 한 손에 사람잡는 칼, 또 한 손에 방화(放火)의 횃불을 받쳐들고서 엄가놈의 발 밑에 꿇어앉아 주인의 분부만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냥개가 되었소. 게다가 그 늙은 아내도....]
[타앗! --]
민자건의 입에서 목청이 터져 나가라고 기합성이 울렸다.
쌍수가 번쩍 휘둘러 치는 가운데 은빛 광망이 빗발처럼 쏘아져 나갔다.
거의 같은 찰나, 민자강도 허리를 틀더니 치마 밑에서 분사통을 하나 꺼내기가 무섭게 민강묵교와 여화룡 앞으로 불쑥 내밀고서 용수철을 눌렀다.
[쏴아악....]
반룡통(磻龍筒)이었다.
[앗!]
민강묵교와 여화룡은 이구동성으로 외마디 소리를 지르면서 재빨리 곤두박질치더니, 단숨에 1장 바깥으로 멀찌감치 굴러나갔다. 시철은 양 팔을 쩍 벌린 자세로 가슴을 펴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민자건이 쏜 암기는 단 한 대도 빗나가지 않고 폭우 쏟아지듯 거침없이 그 앞가슴과 배에 격중했다. 그러나 표적에 맞기가 무섭게 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별도로 안면을 노리고 들이닥친 석 대도 목표까지 도달할 수가 없었다. 언제 집어들었는지, 시철은 앞서 여화룡이 던져준 음식 보따리를 들어 가로막고 있었던 것이다. 시철은 자리를 박차고 벌떡 일어났다.
[흐흥, 내 당신들이 너구리 본색을 드러낼 때까지 기다렸소이다. 부모님과 5대 조상까지 욕을 얻어먹는 자리에 당신처럼 비범한 인물께서 무슨 수로 참고만 계시겠소?]
[앗....!]
[맙소사....!]
민자건 남매는 외마디 경악성밖에 나올 것이 없다.
지근거리에서 기습적으로 암기를 발사했는데, 그게 실패할 줄이야 상상이나 했으랴! 그것도 상대방의 몸뚱이를 뚫지 못하고 비듬 떨어지듯 모조리 퉁겨나올 줄은 정말 꿈에도 생각지 못한 것이다.
두 사람은 입만 딱벌린 채 귀신이나 만난 것처럼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시철의 손가락이 민자강을 가리키고 엄한 질문이 날아갔다.
[당신은 산항촌에서 달려왔을 터, 내가 당신네 정체를 파악한 줄 몰랐을 리가 없을 텐데? 당신의 시아버님께서 절맥문심정을 안 주십디까? 또 내 스승님의 탈명신전도 얻지 못하셨소? 아니면 그 두 가지 암기가 나용문이란 놈의 반룡통보다 훨씬 효력이 떨어진 모양이로구료! 나용문의 패도적인 암기 반룡단수장(磻龍短手杖)을 며느리 손에 쥐어준 걸 보아하니, 단목응양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회개하지 않았소이다 그려! 정말로 늑대보다 더 악랄한 위인일세....
단목장웅! 공평히 대결할 기회를 한 번만 주겠어. 당신네 부부가 손을 맞잡고 협공해보시오. 아니면 무장을 풀고 항복하든지, 둘 중에 한가지만 선텍하시오. 지금부터 다섯을 세겠소. 그 안에 결심해야 하오. 딴 길은 없으니까, 결단을 내리시오!]
민자건, 아니 가면을 벗기운 단목장웅은 좌측방으로 보폭을 옮겨가며 아무 소리도 않고 눈초리만 데굴데굴 굴리기 시작한다.
[귀하,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도망칠 데는 없소! 빨리 죽고 싶거든 뛰어 보시구려. 자아, 그럼 셈을 하겠소. 하나!]
시철의 얼음장같은 질타에 이어서 첫 수가 세어졌다.
[물 속으로 뛰어들 생각이신가? 그쪽은 우리 둘이서 맡고 있으니까, 죽기는
매일반일세!]
민강묵교가 버럭 소리쳐 일깨운다.
[둘!]
[사람 살려라고 소리치고 싶겠지? 어디 목청껏 외쳐보시지 그래?]
여화룡이 이죽이죽 따라붙었다.
[셋!]
단목장웅이 후딱 돌아서자마자 냅다 뛰기 시작했다. 목숨이 걸린터라, 신법이 질풍처럼 빠르고 날렵하다. 그러나 눈 앞에 유령처럼 따라붙은 시철이 면전에다 대고 또 한 마디 질타를 터뜨렸다.
[넷!]
민자강은 허겁지겁 쇄독문심침을 한 움큼 꺼내가지고 반룡통 안에 장전하느라 바쁘다. 하지만 손발이 떨려서 단 한 대도 밀어넣지 못하고 땅바닥에 우수수 떨어뜨리고 만다.
[다섯!]
최후의 숫자가 고막에 쩌렁하니 울렸다.
[으와아....!]
두 사람은 좌우 반대편으로 갈라져 미친 듯이 도약질을 섞어가며 내뛰기 시작했다. 달음박질치면서도 민자강의 손은 반룡통에 또 쉬독문심침을 장전하고 있었다.
[퓨웅! ---]
그 장거리를 도약해 달아났을까, 이제 막 지면에 내려서던 단목장웅의 몸뚱이가 휘청하더니, 미처 땅바닥을 딛지 못하고 앞으로 털썩 고꾸라졌다.
[아이쿠....!]
오른쪽 다리 오금에 철령전을 얻어맞았으니, 제가 무슨 수로 버텨 서 있겠는가.
[게 섰거랏!]
정신없이 내뛰던 민자강, 바로 등뒤에서 흐통소리가 따라붙자 그대로 돌아서면서 쇄독문심침을 발사했다. 그러나 웬걸! 등 뒤에는 아무도 없다. 이어서 솥뚜껑 같은 손바닥 하나가 어깨 위에 털썩 올라왔다. 그녀는 팔꿈치로 뒤편을 내지르면서 그 기세를 몰아 장검부터 뽑아잡았다. 팔꿈치공격도 허방, 장검 역시 절반도 미처 못 빼어 들었는데, 멱줄기는 어느새 강철과도 같은 사내의 팔뚝에 휘감겨 조여들고 있었다. 비명은 커녕 숨통마저 턱 막혔다.
그녀는 칼의 손잡이를 놓고 몸부림쳐가며 두 손으로 그 팔뚝을 풀어버리려고 애를 썼지만 허사였다. 턱 밑이 번쩍 쳐들리고 두 발이 허공에 데룽데룽 매달린 채, 절망적으로 버둥거릴 때마다 힘만 쭉쭉 빠져나갈 따름이었다.
얼마 안 있어, 그녀의 몸뚱이에선 버둥거릴 기력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질식상태에 빠진 그녀는 혓바닥을 빼어물고 두 눈동자가 훌떡 뒤집혔다.
그제서야 시철은 민자강의 목줄기를 풀어 자기 남편 겉에 툭 내던졌다. 엉금엉금 기어 일어나려던 단목장웅, 느닷없이 억센 발끝에 척추열여섯 번째 뼈마디 아래 양관혈(陽關穴)을 짓눌려서 도로 털썩 엎어지고 말았다.
혈도를 제압당하자, 온 몸뚱이가 나른하게 풀리고 도무지 용을 쓸 수가 없게 된 것이다. 뒤이어서 음침한 경고가 고막을 쩌렁하니울려왔다.
[꼼짝하면 죽이겠소! 하기야 그동안에 정분도 들었으니까, 내 손으로는 차마 죽일 수야 없겠지. 남황팔마한테 넘겨주면, 아마 그 사람들은 좋아서 펄펄 띌 거외다!]
민자강은 겨우 숨을 들이키다가 그 말을 듣자,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시철 아우님, 제발....! 제발 그놈들 손에만은....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이런
짓을....]
[배소저를 암습한 장본인이 당신이었지?]
[그래요, 내가.... 하지만 분부를 받고서 했을 뿐이에요....]
[지금 어디 있소?]
[나도 그건....확실히 몰라요.]
[시아버지는 이 노가도에 도착했소?]
[네, 지금 나용문과 같이 계셔요.]
[내 스승님은?]
[모르겠어요. 그분은 배를 타지 않았어요.]
[내가 산항촌에서 한 경고를 들었겠지? 그걸 잊다니....! 단목회주가 어쩌자고 제 며느리를 자객으로 내보냈을꼬....? 비열한 위인같으니!]
[아무리 통사정을 했어도, 나용문은 끝끝내 인질을 풀어 놓으려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희 시아버님도 부득이 화근을 끊어버릴 마지막 수단으로 나오신 거죠. 당신이 죽지 않는 이상, 개인적인 원한이나 복수보다도 흑응회의 전체 세력이 토붕와해(土崩瓦解), 참담하게 전멸당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으셨지요. 당신은 혈마 천강산인을 맞대기가 무섭게 죽여버렸어요.
그 한 가지만으로도 천하 무적인 사람한테 딴 부하들을 보내봤자 범의 아가리에 양떼 몰아넣는 격이지요. 시아버님은 생각다 못해 궁여지책으로 나같은 걸 보내서 요행을 바라신 거예요.]
[부둣가에 서성거리고 있는 두 놈도 당신네 동료들이지?]
[그래요, 내 연락책임을 맡고 있어요. 내가 주는 소식을 노가도에 전달하기로 되었죠. 당신이 부둣가에서 안면올 바꾸지 않고 여기까지 날 데려왔으니까, 그 사람들도 의심하지 않고 여전히 거기서 내가 암습에 성공했단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거예요.]
[일어나시오!]
시철이 냉랭하게 분부를 내렸다.
[아니, 날 어디로 끌어가려고....? 남황팔마한데....?]
민자강의 얼굴에 핏기가 싹 걷히고 공포에 질려서 소리쳤다.
[당신을 부두까지 데려가겠소. 거기 가서, 두 형씨한데 노가도로 소식을 전하게 하시오. 시철 일당은 오늘 밤 4경쯤 되어서 노씨 저택을 습격, 인질을 구출하러 들어갈 예정이니, 때맞춰서 흑응회 전 병력을 멀찌감치 피신시켜 두라고 하시오.
공격목표는 나용문 패거리뿐, 그밖의 사람이 다치지 않도록 조치하란 말이오. 또 한 가지, 전령편에 엉뚱한 소식을 전하면 안되오. 그랬다가는 당신 눈 앞에서 사랑하는 남편의 뼈마디를 하나 하나씩 부러뜨려 폐품으로 만들어버릴 테니까! 그 때가서 내가 무정하다느니, 손찌검이 악랄하다느니, 울고불고 해봤자 소용없소. 내 말 아시겠지? 잘 알아들었으면 떠납시다!]
얼마 후, 부두에서 돌아온 시철은 단목장웅과 민자강을 한 대씩 먹여 기절시켜놓고 양 어깨, 팔, 손목의 관절을 비틀어뽑은 다음, 부부의 몸뚱이를 한 덩어리로 단단히 결박지워서 풀섶 으슥한 데다 감춰놓았다.
민강묵교가 음식 보따리를 풀고 그 속에서 철판 한 장을 꺼내놓았다. 철판에는 단목장웅이 발사한 절맥문심정 석 대가 삼각형으로 가지런히 꽂혀 있었다. 깊이는 세 푼이 못되었으나, 철판에 박힌 공력만으로도 민강묵교의 혀를 내두르게 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것 좀 보게! 정말 무서운 놈이로구만.... 이걸 정통으로 얻어맞았다가는 혼원기공(渾元氣功)조차 못 당해낼 걸세! 내가기공만을 전문으로 파괴하는 무기야! 좌우지간에 큰일날 뻔했어.... 시철 아우, 이제부턴 어떻게 할 작정인가?]
[어씨댁 둘째 어르신의 배는 어디다 대기로 약속하셨습니까?]
[날이 저물면 호수 한가운데 모래톱 서쪽 끄트머리에 올 걸세.]
[그거 잘 됐습니다. 우리 일단 여기서 헤어졌다가, 2경 초 하가만(賀家灣) 남쪽 반 리 지점 모래톱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지요. 그곳이 동북쪽보다 훨씬 안전할 듯 싶습니다. 놈들의 경계는 서쪽으로 집중될테니까요. 만약 호수 기슭에 은신한 데가 마땅치 않거든, 동남쪽 반리쯤 옮겨 호수 한가운데서 만나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헤엄쳐서 찾아갈 테니까요. 뱃머리에는 등불 신호를 매달지 마십쇼. 삿대 하나만 걸쳐놓아도 알아볼 수 있습니다.]
[좋아, 그렇게 함세! 자넨 혼자서 상의촌(尙義村)으로 봉전(封典)이란 인물을
찾아갈 셈이로구만. 무슨 다른 도움은 필요없겠나?]
[저 혼자서도 넉넉합니다. 곽숙부님의 신표(信標)를 지녔으니까, 별로 문제는 안될 겁니다.]
[됐네, 여기서 헤어지자구! 조심하게. 2경 초에 만나기로 하고!]
시철은 길이 3척 짜리로 갈대 줄기를 한 개 끊어가지고 조용히 물속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자맥질로 깊숙이 헤어나가기 시작했다. 밝은 대낮에 호수를 가로질러 건너자면 양 편 기슭 감시자의 눈에서 벗어나기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시철은 노가도 서편 3리 지점에 상륙했다. 갈대 줄기를 입에 물고 숨쉬어 가며 깊숙이 잠수하여 호수를 가로지르는 도중, 단 한 차례도 수면에 솟구치지 않고서 마침내 귀신도 모르게 무사히 상륙한 것이다.
노가도 북쪽 3,4리 지점에 상의촌 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워낙 마을규모가 작고 보잘 것 없는 터라 별로 사람의 눈길을 끌지 못한 곳이기는하나, 여기에도 봉전이란 은둔자가 살고 있었다. 부근 시골 사람들은 그가 20여 년 전에 팽택(彭澤)에서 이사온 착실한 농부라고만 아는 처지다.
상의촌 일대의 경치가 아름답기도 하려니와, 또 주민들이 소박하고 풍습이 돈후해서 마음에 들었는지, 그는 이사온 직후 수십 묘(畝)나 되는 기름진 밭을 사들여 이 평화로운 마을에 안주할 터를 잡고 눌러앉은 것이다.
봉전은 괴퍅스런 은둔자가 아니었다. 마을 노인들과도 항상 잘 어울려 인심을 많이 얻는가 하면, 큰 물에 다리가 떠내려가거나 길이 파이면 제 비용을 들여서 고쳐놓는 데 조금도 인색하지 않고 늘 앞장을 섰다.
2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는 이 마을에서 가장 존경받는 어른이 되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가 선량하고 기백있는 농부라는 것을 알았으나, 일신에 절예(絶藝)를 갖춘 무림의 호걸이라는 사실만큼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저녁 노을이 뉘엿뉘엿 지는 가운데, 시철은 마을 어구에 들어섰다. 동구에 발을 들여놓으면서, 그는 본능적으로 경계심을 품기 시작했다. 마을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누군가 은밀하게 숨어서 움직이는 듯한 느낌, 또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이 남의 감시 아래 놓였다는 느낌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해질 녘인 만큼 집집마다 굴뚝에서 저녁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것이야 의당 그러려니 싶은데, 이맘 때면 마을에 뛰어다니면서 놀아야 할 아이들이 코쭝배기도 비치지 않을 뿐더러, 동네 개들조차 대문 안에 갇혀서 낯선 사람의 기척에 컹컹 짖어댈 뿐 길거리에 어슬렁거리는 놈은 단 한 마리도 없다는 점이 사뭇 수상쩍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어느 초가집 앞에 다가서서 사립문을 두드렸다.
[누가 왔소?]
안에서 늙은이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는 호구진에서 왔습니다. 봉전 어르신을 좀 뵈오러....]
시철은 대답을 하면서 조용히 사립문을 열었다. 문간에 마중나온 이는 늙수그레한 촌로(村老)였다.
[손님, 때를 잘못 맞춰 오셨소이다. 우리 집 주인은 외출하고 안계시는 걸요. 또 호구진에는 알 만한 친구분도 없는데, 손님께서 사람을 잘못 찾아오신 게 아니오?]
시철은 사방을 둘러보고나서 목소리를 한껏 낮추어 대답했다.
[저는 어응담(魚鷹潭)에서 곽경 숙부님의 분부를 받들어 왔습니다. 어르신께 전할 소식이 있으니, 부탁드립니다.]
그 말을 듣자, 영감님도 목소리를 낮추고 대문 한 곁으로 슬쩍 물러나 들어갈 길을 터주었다.
[들어와서 말씀하시구려. 자, 이리로....!]
대청 안은 어둠침침했다. 신위(神位)를 모신 제단 위에 장명등(長明燈) 하나만이 암울하게 붉은 빛을 흔들흔들 쏟아내고 있을 따름이다. 이윽고 시철은 안채로 통하는 문간에 어렴풋이 서 있는 그림자를 알아보았다. 여느 시골 농부의 옷차림, 시원스레 트인 이마, 네모난 얼굴윤곽만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지만, 희끗희끗 세기 시작한 짧은 수염아래로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시철은 그 앞으로 다가가서 공손히 인사를 올렸다.
[어르신께서 봉전 나으리시군요. 후배 시철, 문안 드립니다.]
[이런! 자네가 이 늙은이를 어찌 아는가?]
시철은 가마우지 새가 부각된 녹옥을 꺼내 바치면서 빙긋 웃었다.
[저는 곽숙부님의 신물을 가져왔습니다. 남검(南劒) 여괴원(黎魁元) 노선배님의 도움을 받고자 하오니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봉전은 신물을 받아들고 한참 동안이나 자세히 살피더니, 시철에게 되돌려 주면서 덤덤하니 웃는다.
[자네가 뭘 원하는지 모르나, 내 힘껏 도와줌세. 힘이 부족할지도 모르지만 최선을 다하겠네. 다만, 자네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그것부터 설명해 주어야 하네. 이 늙은이는 평생토록 악한 짓은....]
[선배님께서 이름을 감추고 속세를 피해 은둔하시는 심정, 필경 무슨 고충이
있으리라 생각됩니다. 불초 후배, 어디 감히 노선배님께 하늘을 우러르지 못할 일을 가지고 왔겠습니까? 후배는 결코 일대의 검호(劒豪)이신 남검 여대협의 영명(英名)을 욕되게 하지 않으렵니다.]
그리고 시철은 즉석에서 자기가 파양호에 온 이후 겪어온 일과 계획해 놓은 바를 차근차근 말씀드렸다. 남검 여괴원은 잠자코 설명을 듣는 동안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얘기가 끝나자 침착한 어조로 비평했다.
[철불 하남산이라면, 양자강 일대를 주름잡는 외톨박이 대도(大盜)일세. 또 그 사람은 금종조(金鐘 =四/卓) 기공을 8성(成) 화후(火候)에 이르도록 연마한 몸이라서, 일단 운기했다 하면 정련 강철만큼이나 견고해지는 인물일세. 그러니까 쉽사리 상대할 위인이 아닐세.]
[철불 당사자와 맞대결할 문제는 저한테 맡겨주시면 됩니다. 선배님께서는
하가만으로 들어가는 도로 형편, 기관 매복이 어디에 설치되어 있는지 알려주시는 것만으로도 제게 큰 힘이 되겠습니다.]
남검은 오랜만에 호걸스런 웃음을 터뜨린다.
[기왕지사 나설 바에야 수수방관만 하고 있을 줄 아는가? 내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 곧장 떠나기로 하세! 지금 이 마을에는 관헌들이 적지않게 몰려와 있네. 그러니까, 자네도 옷차림을 바꾸도록 하게. 그 거렁뱅이 꼴을 하고서는 온전히 나가지 못할 테니까, 자, 안으로 들어가세!]
첫댓글 시철이가... 시철이가... 드디어 입성하나요??? ㅎㅎㅎㅎ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