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고 소중한 인연은 세월이 흘러도 엊그제만 같다.. 육영수 여사가 세상과 결별한 것은 1974년. 그로부터 4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추억은 영롱하기만 하다. 그만큼 남긴 족적이 아름다웠기 때문이리라.
2014년 8월 15일은 추모 40주기. 박정희 대통령에 이어 딸 박근혜 대통령을 태생시킨 구미시민들에게 육영수 여사는 그리움 그 자체일 것이다.
1974년 8월 15일 제29회 광복절 기념식장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세상을 하직한 육 여사, 전국 곳곳에 마련된 분향소에는 눈물을 앞세운 국민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장례행렬을 바라보는 구미시민들은 오랫동안 눈물을 쏟아냈다. 지천을 흘러내린 냇물이 강을 이루듯 세월은 밀물지는 진한 그리움을 싣고 40년을 흘러 다시 우리 곁으로 다가왔다.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시절, 독재와 항거한 젊은이들이 철창으로 무더기 무더기 끌려가던 그 무렵, 그래도 그들의 가슴 속에 남아 있는 육영수 여사는 따스한 모정이었다. 그만큼 그 당시에도 육 여사는 모든 국민의 가슴 속을 아름다움과 은은한 사랑의 이미지로 채색케 했다.
그 만한 이유가 있었다. 육 여사는 생전에 그늘진 곳을 찾아다니며 국민들의 가슴 속에 따뜻한 모정을 심어주었다. 특히 고아원 어린이들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었고, 양로원 어르신들에 대한 공경심은 대단했다.
▶뭉그러진 손을 다소곳 잡아주던 사랑
그 당시, 가장 천대받던 곳은 다름 아닌 나환자촌, 육 여사는 전국의 77개 나환자촌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특히 전국 익산군 상지 나환자촌을 방문한 육 여사는 나환자들의 뭉그러진 손을 덥썩 어루지면서 그들에게 함박 웃음을 안겼고, 이 모습을 지켜 본 나환자들은 감동의 울음을 터뜨렸다. 이러한 감동이 아직도 우리들 가슴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일까. 세월은 흘러 40주기를 맞았지만, 흐르는 1백리 낙동강 물줄기 속에 육 여사의 따스한 웃음이 투영되어 있는 것만 같다.
육영수(192511월8일- 1974년 8월15일) 여사는 충청북도 옥천 출신이다, 본관은 관성 육씨. 아버지 육종관과 어머니 이경령 사이의 1남 3년 가운데 둘째딸로 태어났다. 큰 언니는 육 인순, 오빠는 육 인수 였다.
육 여사는 1930년 말 옥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942년 서울 배화여고를 졸업한 후 옥천 중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1950년 10월12일 당시 박정희 중령과 결혼했다.
육영수 여사는 근혜, 근영, 지만 등 3자녀를 낳았다.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이 제5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대통령 부인으로서 각종 사회 활동, 육영사업, 적십자 활동에 적극 참여 했다.사회 활동으로 육 여사는 양지회 활동과 함께 각 시군에 여성회관을 건립, 여성의 사회 참여를 선도하기도 했다.여성의 사회참여 운동을 가시화시킨 선구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여성에 대한 관심은 각별했다.
자연보호 운동, 식생활 개선, 의류 혁신, 문화사업 지원, 자원 봉사활동, 적십자 활동, 양지 진료소의 개설, 불우이웃 돕기, 윤락여성의 자활 운동, 양로원, 고아원 위문, 전몰 군경 미망인 자활운동 다양한 사회활동을 통해 국민 의식 개혁에 앞장선 육 여사는 특히 희망의 등불이라는 농어촌 여성 계몽지를 발간하기도 했다.
어린이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도 각별했다. 청소년들을 위해 경로효친 사상을 불어넣었고, 어린이 대공원 조성, 1969년 4월14일에는 육영재단을 설립, 어린이 회관을 짓고, 어린이 잡지<어깨동무> <꿈나무> < 보물섬>등을 발간했다. 아울러 청소년들에게 직업교육을 시킬 목적으로 정수 직업 훈련소를 개설하기도 했다.
그러나 1974년 8월 15일 광복 제 29주년 기념식장에서 재일교포 문세광의 흉탄에 맞아 세상을 떠났으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장례식이 있던 그해 8월19일, 국민의 애도 속에서 육 여사는 우리 곁을 떠나 국립묘지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퍼스트 레이디가 된 딸 박근혜
육영수 여사는 남편을 ‘여보’ ‘당신’등으로 부르지 않고, ‘드세요’ ‘저 좀 보세요’등으로 부를 정도로 조심스럽게 남편을 대했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는 옷 맵시에 마음을 쓰고, 절대 맨발이 보이지 않도록 버선을 신었다고도 한다. 육여사는 또 박정희 대통령을 위해 물이 든 세수대야를 받쳐 들었고, 마루에 서기도 했을 정도로 남편을 깍듯하게 모셨다고 한다.
1974년 어머니 육영수 여사가 세상을 떠나자, 1974년 서강대학교 전자공학과를 졸업하고, 프랑스 유학을 떠난 지금의 박근혜 대통령은 급히 귀국했다. 이후 어머니가 사망한 1974년부터 아버지가 사망한 1979년 10월까지 박 전대표는 퍼스트 레이디의 열할을 대신했다. 이 당시 박 근혜 대통령은 어머니의 뜻을 이어받아 새마을 운동의 일환인 새마음 운동을 주도했고, 1982년 육영재단, 1994년 정수장학회 등을 물려받아 운영했다.
이후 박근혜 대통령은 1998년 한나라당 후보로 대구의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당선되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세상과 결별한지 20년만의 일이었다.
▶구미시민, 박근혜 대통령에 한결같은 사랑
"구미의 딸이 저렇게 외롭고 고독해 보일 수가.."
2008년 3월 27일 구미 순천향병원에 마련된 고 김재학 생가보존회 회장의 빈소 앞에서 애도를 한 당시의 한나라당 박근혜 전대표, 물끄러미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 있던 구미의 한 시민은 이렇게 표현 했다, 대부분 시민들의 마음이 그랬으리라.
1974년 조총련계인 문세광에게 총탄을 맞아 유명을 달리한 고 육영수 여사, 1979년 10월 26일 비운을 맞은 박정희 전 대통령, 2006년 지방선거 유세 도중 피습을 당한 박근혜 전 대표, 2008년 3월 26일 피살된 박정희 대통령 생가보존회 김재학 회장.이러한 고독의 세월을 넘어 박근혜는 이 나라의 대통령으로서 나라를 꾸려 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