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운세] 4월 28일 일요일(음력 3월 19일 甲子)
조선일보
오늘의 탄생화와 꽃말 4/28일 [ 4월 28일 탄생화] 앵초(빨강)(Primrose) 꽃말 : 비할 바 없는 아름다움 분류 : 앵초과 원산지 : 유럽,아시아 [꽃말 이야기] 보통 5개의 꽃잎.만약 꽃잎이 6개인 앵초를 발견한다면 이제 곧 연인이 나타날 것입니다. 유럽에서는 지금도 그런 말들이 남아 있습니다. 문학에서는 비애를 나타내는 꽃으로 되어 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겨울이야기'에 나오는 '앵초'는 시집 못 가고 죽은 처녀의 비극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인고 하니. 꽃이 피기 시작하는 것은 이른 봄. 그것도 아직 겨울에 가까울 즈음, 게다가 여름이 되기 전에 시들고 맙니다. 벌이나 나비도 찾지 않고 열매도 열지 않는다 해 그렇게 연상된 것은 아닐까요? [꽃점 이야기] 다른 사람의 말에 별로 구애받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착실하게 일해 나가는 사람. 혼자서 무슨 일이든 해내고 마는 사람. 그런 만큼 다른 사람 앞에서 장점을 발휘할 경우가 너무 없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능력이 있었다니!"하고 나중에 평가받으며 남들을 놀라게 하기도 하는 타입. 당신의 연인은 결혼 후 당신의 숨겨진 장점을 많이 발견하게 되겠지요. 앵초櫻草(빨강) Primrose, Red (primrose/Primula 앵초목 앵초과 앵초속의 총칭) : 앵초목 앵초과 앵초속의 총칭. 북반구 온대지역에 400종 이상이나 분화되어 있는 여러해살이풀인데, 앵초나 설앵초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종류가 많고 중요한 원예식물의 한 무리를 이루고 있다. 한국에서는 외국산 앵초속 원예식물을 프리뮬러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다. 다음은 외국산이나 외국에서 관상용으로 품종개량하여 많이 재배되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⑴ 프리뮬러말라코이데스 P. malacoides:중국 윈난성[雲南省] 원산이다. 영국명은 fairy primrose. 유럽에서 온실 화초로 개량되어 품종이 많다. 소륜(小輪) 2배체계 품종과 대륜 4배체계 품종이 있다. 잎은 종이질의 긴타원형이고 꽃줄기와 잎 뒤에 흰 가루를 띤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있다. 온실재배에서는 12월부터 이듬해 5월까지 계속 피고 나비 2∼5㎝의 꽃이 여러 단 돌려난다. 꽃색깔은 붉은색·주홍색·연분홍색·자홍색·흰색 등이며 겹꽃 종류도 있다. ⑵ 프리뮬러오브코니카 P. obconica:중국 후베이성[湖北省] 원산이다. 영어명은 top primrose. 1879년 유럽으로 보내져 그곳에서 품종개량 되었다. 잎은 둥글고 크며 줄기잎에 선모(毛毛)가 있고 프리민(primine)이라는 독소가 함유되어 있다. 보통 겨울∼봄에 잘 피는 온실재배용이다. 꽃의 나비 3∼6㎝, 높이 10∼20㎝의 꽃줄기 위에 산형꽃차례로 핀다. 꽃색깔은 붉은색·연주홍색·흰색·등자색 등이 있다. ⑶ 프리뮬러시넨시스 P. sinensis:중국 원산이다. 영국명은 chinese primrose. 잎은 크고 얕게 갈라진 심장꼴이다. 겨울∼봄에 꽃이 피며 나비 3∼4㎝의 꽃이 여러 단 돌려난다. 꽃색깔은 진빨강색·주홍색·연분홍색·흰색 등이다. 온실용 종이다. ⑷ 프리뮬러폴리안타 P. polyantha:유럽 원산인 앵초속의 P. veris·P.elatior 에 P.vulgaris 등의 종이 교잡되어 원예적으로 육성된 종이다. 영어명은 polyanthus primrose. 거꿀달걀꼴의 잎이 뿌리에서 나고 이른봄에 높이 10∼15㎝의 꽃줄기 위에 나비 2∼8㎝의 큰꽃이 산형꽃차례로 핀다. 암적색·붉은색·오렌지색·노란색·연분홍색·흰색·자홍색·등청색·자청색 등 여러 색깔이 있다. 화단이나 분재용으로 재배된다. 근연인 원예육성종으로 프리뮬러아카울리스 P. acaulis라고 하는 프리뮬러불루가리스 P. vulugaris의 개량종이나 프리뮬러폴리안타 P. polyantha와 프리뮬러줄리에 P. juliae(카프카스 원산)의 교배에 의한 줄리안계 P. X juliana 등이 있다. 일찍 피며 작은 꽃이 귀엽고 튼튼하므로 꽃가게에서 많이 볼 수 있다. ⑸ 프리뮬러케웬시스 P. kewensis:19세기말 영국의 큐식물원에서 생긴 프리뮬러플로리분다 P. floribunda와 프리뮬러베르티킬라타 P.verticillata와의 자연교잡종이다. 톱니가 있는 거꿀달걀꼴 잎이 뿌리에서 나고 높이 20∼30㎝의 꽃줄기가 뻗으며 나비 2∼3㎝의 선명한 노란색 꽃이 여러 단 돌려난다. 겨울∼봄에 꽃이 핀다. 줄기 전체에 흰 가루가 있는 것을 파리노사 var. farinosa라고 한다. 온실용 종이다. [꽃 말] : 아름다움, 첫사랑, 청춘시대靑春時代 [탄생화] : 귀하는 무슨 일이든 혼자서 해내고 말기 때문에 다른 사람 앞에서 장점長點을 발휘發揮할 기회機會가 너무나 없는 것이 흠입니다.
4월 28일 오늘의 역사
B.C.57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위에 오름 1406 (조선 태종 6) 덕수궁 창건 1467 (조선 세조 13) 원각사탑 준공 1545 (조선 인종 1) 충무공 이순신 태어남 1617 (조선 광해군 5) 의병장 곽재우 세상 떠남
1871 대원군 전국 서원 철폐
1884 한-영 수호통상조약 비준서 교환
1894 동학군 전주 점령 1896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 태어남
1896 작가·승려 김일엽(金一葉, 김원주) 출생 1896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출생 1905 경의선, 용산-신의주 시운전 1906 광혜원서 최초로 창녀 검진 1916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대각(大覺) 1920 이은, 일 왕족 이방자 여사와 결혼 1926 독립운동가 송학선 제등(사이토)조선총독 암살 미수 1936 서울 성신 여학교 설립 1948 유엔한국위, 선거감시 결정 1949 농지개혁 실시 1950 북한비행사 이건순 귀순 1950 국립 중앙극장 개편 1950 풀브라이트 한국장학재단(한미교육위원단 KAEC)창립
1952 대일강화조약-미일 안보조약 발효
1952 휴전회담 본회담 재개 중립국 감시단 구성에 합의
1955 독립운동가 이창용 사망 1956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 평화통일선언 채택 1960 이기붕 일가족, 경무대서 자살
1960 허정 과도내각 출범 1960 서울신문 자진 무기휴간
1965 라만 말레이시아 수상 내한 1969 아산 현충사 중건
1969 김수환 추기경 서임식 (로마 베드로 대성당) 1973 전 수도경비사령관 윤필용 소장 징역 15년 선고 1973 북한, IPU 이사회 결의로 회원국 가입 1974 신민당 총재 지낸 유진산 세상 떠남
1976 보사부 임신중절을 합법화하는 모건복지법안 결의
1976 그레나다의 에릭 매튜 게이리 수상 내한 1977 경북 선산의 도리사에서 진신사리함 출현 1978 싱글러브 소장 카터의 주한미군 철수 반대로 인책 퇴역 1980 동국대 산악회, 마나슬루봉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오름 1981 국무회의 노인-장애자 복지법안 결의
1981 한국평생교육기구 창립
1984 레이건 미 대통령, 중국 북경에서 조자양, 호요방과 한국 문제 논의
1987 가톨릭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창립 1991 남과 북의 IPU 대표단, 평양 만수대에서 만남
1993 천상의 시인 천상병씨 별세
1994 불교 태고종 우백암 종정 입적 1994 15C 청화보상화당초문 접시, 세계 도자기경매사상 최고가 308만$에 팔림 1995 북한, 평화를 위한 평양 국제 체육 및 문화 축전 개최 1995 대구지하철 공사장에서 도시가스 폭발로 98명 사망 1998 주양자 보건복지부 장관, 부동산 투기혐의로 경질, 후임에 김모임 1998 정부, 실업자 의료보험 대책 발표. 종전 직장의료보험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기간을 6개월에서 1년으로 연장하고 의료보험료를 50%로 낮추어 분기별로 분할 납부할 수 있도록 함
2000 제1회 전주 국제영화제 개막
2002 제4차 이산가족 상봉
2003 한국.미국.프랑스 공동개발한 우주망원경 갤렉스 우주공간에 발사
2003 남해 5개섬 잇는 연륙연도교 개통
2004 광주 광역시 지하철 개통
2006 '꽃바다'서 향기·때깔에 취해봐요
2007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의 국장이 승하 550년 만에 거행
2008 KBS, 방송 금지곡 418곡 해제
2008 최초 우주인 이소연씨 귀국
2009 목포 명물 ‘갓바위’ 천연기념물 됐다
해 외
32 로마 제국 7대 황제 오토 출생
1686 뉴턴(Newton, Sir lsaac), 만유인력 법칙 발표
1758 제임스 먼로 미국 대통령 출생
1876 영국 의회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황제 칭호를 줌
1886 미국 감리교 여선교사 스크랜튼 여성교육기관 설립
1922 프랑스 대통령 폴 데샤넬 사망
1928 프랑스의 화가 클라인(Klein, Yves, 1928~1962) 출생 1937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 태어남 1945 이탈리아 독재자 뭇솔리니, 애인 클라라와 함께 교수형당함 1952 미-일 안전보장조약 발효 1952 미 극동군 사령부 해체- 대일강화조약-미일안보조약 발효 1956 프랑스군, 베트남 철수 완료
1967 캐시어스 클레이(Cassius Clay, 무하마드 알리) 징병 거부 1969 미군 전면 개혁 1969 프랑스 드골 대통령, 국민투표 패배로 사임 1981 일본 북중부 후쿠이현 쓰루가 핵발전소에서 방사능 누출사고.278명이 방사능에 노출되었고, 주변토양과 해역이 심각하게
1982 영국.포클랜드 봉쇄 발표 오염 1983 중국, 첫 징세제 도입 발표
1984 레이건 미 대통령, 중국 북경에서 조자양, 호요방과 한국 문제 논의
1999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22년 만에 새단장 공개
1999 레이저 발명가 아서 숄로 사망
2001 미국 억만장자 데니스 티토 세계최초로 우주 관광
2003 자오쯔양 중국 전 총서기 사망
2005 스위스, 세계에서 3번째로 긴 터널 관통
2007 영국성공회, 1400년만에 첫 여성 부주교
2009 러시아 발레의 전설 막시모바 타계
2009 돼지인플루엔자 인간-인간 감염 첫 확인
2009 - 목포 명물 ‘갓바위’ 천연기념물 됐다
목포 명물 ‘갓바위’ 천연기념물 됐다
전남 목포의 명물인 ‘갓바위’가 천연기념물이 됐다. 문화재청은 목포시 용해동 산 86-24 일대 갓바위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 500호로 지정했다고 29일 밝혔다. 목포 갓바위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영산강 하구에 있으며 삿갓을 쓴 사람 모습의 특이한 형상으로 유명하다. 이는 풍화작용과 해식작용으로 형성된 풍화혈(風化穴) 때문이다. 문화재청은 갓바위 지역이 해식 및 풍화 작용의 영향이 암석에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곳으로 문화재적 가치가 높아 천연기념물로 지정했다. 목포시 관계자는 “목포 해안의 갓바위는 인위적 요인이 전혀 작용하지 않고 순수 자연적인 과정으로 빚어진 자연 조각품”이라며 “다른 지역 풍화혈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희귀성이 있다”고 말했다. 문화재보호법 제정 시행과 더불어 1962년 12월 3일 대구 도동의 측백나무 수림이 1호로 지정된 뒤 이번까지 500호에 이르는 천연기념물이 탄생했다. 정승호 기자 shjung@donga.com /동아일보 2009-04-30 07:33
현존 415건..목포 갓바위 500호 영예
국가지정 문화재의 하나인 천연기념물이 500호를 돌파했다. 문화재청(청장 이건무)은 전남 목포시 용해동 산 86-24 일대 ’갓바위’를 국가지정문화재인 천연기념물 500호로 지정했다고 28일 밝혔다. 문화재보호법 제정ㆍ시행과 더불어 1962년 12월3일 대구 도동의 측백나무 수림이 1호로 지정된 이래 이번까지 500호에 이르는 천연기념물이 탄생한 것이다. 이 중에는 ’독도천연보호구역’(면적 18만902㎡)이라는 이름으로 1982년 11월16일 336호로 지정된 독도가 포함돼 있다. 하지만 목포 갓바위가 500호라 해서 현재 이만한 숫자의 천연기념물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지정 대상에 동ㆍ식물이 많은 까닭에 태풍이나 벼락, 혹은 돌림병과 같은 각종 재해로 천연기념물이 생명력을 상실하고, 지정 해제가 된 경우도 더러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500호라는 숫자 안에는 1962년 12월3일 문화재보호법 시행에 따라 천연기념물을 새로 지정하면서, 일본강점기 이래 천연기념물로 지정돼 있던 북한 내 문화재를 지정과 동시에 해제한 숫자까지 포함돼 있다. 문화재청 천연기념물과 관계자는 “500호 목포 갓바위까지 이르는 천연기념물 중 현존하는 것은 416건으로 집계되므로 84건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가 해제된 셈”이라면서 “북한 소재 천연기념물이 어떻게 해서 1962년에 지정됐다가 해제됐는지 현재로서는 그 곡절을 파악하기 힘들다”고 말했다. 천연기념물을 비롯한 국가지정 문화재는 설혹 해당 문화재 지정이 해제되더라도, 유명한 운동선수의 등번호가 흔히 그런 것처럼, 그 번호는 ’영구 결번’ 처리된다. 이번에 지정된 목포 갓바위는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영산강 하구에 있어 풍화 작용과 해안침식 작용의 결과로 형성된 풍화혈(風化穴.tafoni)로서, 삿갓 쓴 사람 형상을 한다. 이 갓바위는 인위적 요인 없이 순수 자연적인 과정으로 빚어진 풍화혈 상태의 자연 조각품이라는 점이 높이 평가됐다.
2009 - 돼지인플루엔자 인간-인간 감염 첫 확인
또 28일엔 돼지인플루엔자가 멕시코 이외 지역에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감염된 첫 사례가 미국 뉴욕에서 확인됐다. 후쿠다 게이지 세계보건기구(WHO) 사무차장은 이날 “뉴욕에서 멕시코에 간 적이 없는 일부 학생들이 감염됐다”며 “이는 바이러스가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염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에이피>(AP) 통신 등이 전했다.
- 돼지인플루엔자 인간-인간 감염 첫 확인
WTO, “미국서 발생”…미 첫 사망자 가능성도 전세계 29개국으로 확산…멕시코 159명 사망
멕시코에서 시작된 돼지 인플루엔자(SI)가 북남미, 아시아, 유럽, 중동 등 전 세계로 빠르게 확산되면서 SI 공포가 지구촌을 뒤흔들고 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미국에서 SI 바이러스의 인간 대 인간 감염사례가 확인됐다고 밝혀 SI 확산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미국, 캐나다, 영국, 스페인에 이어 뉴질랜드, 이스라엘, 독일, 코스타리카 등에서 감염 사례가 확인됐으며, 한국, 태국 등 아시아에서도 의심 환자가 속출하고 있다.
SI 감염 사례가 확인된 국가는 멕시코를 비롯해 미국, 캐나다, 영국, 코스타리카, 이스라엘, 뉴질랜드, 스페인, 독일 등 9개국.
AFP,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한국, 아르헨티나, 브라질, 호주, 오스트리아, 칠레, 콜롬비아, 덴마크, 프랑스, 홍콩, 인도네시아, 아일랜드, 네덜란드, 폴란드, 스웨덴, 스위스, 태국, 노르웨이, 과테말라, 엘살바도르 등 20개국에서 감염 의심 사례가 보고됐다.
SI 진원지인 멕시코에서는 SI 추정 사망자가 159명으로 늘어났으며, SI에 감염된 것으로 의심되는 환자의 수도 2천500명에 육박하고 있다.
멕시코에서는 SI 공포가 확산되면서 주민들이 사재기에 나서는 등 극도의 불안감으로 패닉 상태에 빠졌으며, 멕시코 당국이 아즈텍, 마야 피라미드 등 유적지들을 폐쇄한 가운데 외국인 관광객의 발길도 뚝 끊겨 예약 취소가 잇따르는 등 멕시코 관광산업도 타격을 입고 있다.
호세 앙헬 코르도바 멕시코 보건장관은 28일 밤(현지시간) 기자회견을 갖고 SI로 인해 숨진 것으로 추정되는 사람의 수가 159명으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코르도바 장관은 그러나 최근 며칠간 사망률이 다소 진정세를 보이고 있다면서 SI 감염이 의심되는 증상으로 병원에 입원한 환자의 수도 1천311명으로 감소했다고 말했다.
또 SI로 인해 숨진 것으로 확인된 사람의 수도 종전의 20명에서 7명으로 조정했다.
미국에서는 SI 감염으로 인한 첫 사망자가 나올 가능성이 제기돼 보건당국이 바짝 긴장하고 있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검시관들은 28일 최근 사망한 2명에 대한 정밀 부검에 착수, SI가 사망 원인인지 조사중이다.
미국의 SI 감염자는 6개 주 68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미국 내에서 SI 감염자가 가장 많이 발생한 뉴욕시(45명)는 멕시코에 이어 '제2의 SI 진원지'가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커지면서 시 당국에 비상이 걸렸으며, 13건의 감염 사례가 확인된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아널드 슈워제네거 주지사가 28일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중국에서는 산시(陝西)성 중학생 100여명이 집단으로 독감 증세를 보여 중국 당국이 긴장하고 있다.
2003년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로 홍역을 치른 중국은 SI 상륙을 막기 위해 비상체제에 돌입한 상태.
홍콩 정부는 홍콩에서 단 한 명의 감염 환자라도 발생할 경우 즉각 모든 학교들에 대해 휴교령을 내리기로 했다. 홍콩 위생방호센터는 지난 주말 북미 지역에서 돌아온 여행객 4명을 상대로 28일 SI 바이러스 감염 여부에 대한 검사를 실시했다.
유럽과 중동에서도 신규 SI 환자가 잇따라 나오고 있다.
독일 바이에른주(州) 보건부는 29일 성명을 첫 SI 감염 사례가 확인됐다고 밝혔으며, 스페인에서는 지난 28일 두 번째 SI 감염자가 발생했다.
영국에서는 멕시코로 신혼여행을 다녀온 부부가 SI에 감염된 것으로 확인됐으며 이스라엘에서도 2명의 환자가 확인돼 중동 지역도 더이상 안전지대가 아님을 보여줬다.
중남미에서는 코스타리카에서 처음으로 SI 감염 사례가 확인됐으며 브라질에서는 20명이 SI 감염이 의심돼 관찰 대상에 올랐다.
뉴질랜드에서는 28일 SI 감염이 공식 확인됐으며 호주 당국은 SI 감염이 의심되는 호주인 91명을 추적, 검사하고 있다.
전 세계적인 SI 확산으로 인해 경기회복이 지연될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되면서 금융시장도 직격탄을 맞고 있다. 28일 국제 금융시장과 상품시장에서 주요 국가들의 주가가 이틀째 하락했으며 석유, 구리 등 원자재와 돼지고기 가격도 동반 하락했다.
전 세계 주요 기업들도 멕시코와 미국의 거점을 일시 폐쇄하거나 근무자와 가족들을 귀환시키는가 하면 불필요한 해외 출장을 취소하는 등 대책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구글은 28일 멕시코시티 사무실을 폐쇄했으며 제록스는 업무차 또는 휴가차 멕시코를 방문한 임직원이 복귀 후 72시간이 지나기 전에는 출근하지 말도록 했다.
(서울=연합뉴스) yunzhen@yna.co.kr /한겨레 2009-04-29 오후 04:32:04
2009 - '러시아 발레의 전설' 막시모바 타계
막시모바 /한겨레
‘볼쇼이의 전설’ 막시모바 타계
러시아 발레의 살아 있는 전설 예카테리나 막시모바(사진)가 28일 돌연 타계했다. 향년 70.
볼쇼이발레단은 막시모바가 이날 집에서 숨을 거뒀으나 사망 원인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밝혔다. 막시모바는 볼쇼이발레단의 무대를 30년간 빛낸 뒤 발레 코치를 지냈으며 평소 건강이 나쁘다는 이야기는 없었다.
그는 1958년 볼쇼이발레단에서 <호두까기 인형>의 마샤 역으로 무대에 첫발을 내디딘 이후 88년 은퇴할 때까지 30년간 볼쇼이 무대를 지배해왔다. /한겨레 2009-04-29 오후 06:52:21
2008 - 최초 우주인 이소연씨 귀국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인인 이소연씨가 12일간의 우주 비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오늘 오전 귀국했습니다. 이 씨는 오늘 오전 9시 13분, 모스크바발 대한항공 편을 통해 예비 우주인 고산 씨와 함께 인천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다소 초췌한 모습으로 부축을 받으며 입국한 이 씨는 건강은 어떠냐는 질문에 허리가 좀 아프지만 다른 곳은 괜찮다고 답했습니다. 이 씨는 도착 뒤 가진 기자 회견에서, 귀환선 착륙 과정에서의 탄도 비행 문제와 관련해 자세한 경위에 대해 아직 들은 바가 없다며, 현재 러시아 측이 정밀 조사를 벌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이 씨는 이어, 우주 정거장에서 한 18가지 실험 가운데 어린이들을 위한 물 실험이 가장 인상 깊었다며. 이번 기회를 통해 우주과학 기술 발전이 하루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했습니다. 이와 함께 앞으로도 우주기술을 위해 많은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며, 앞으로 제2, 제3의 우주인을 위해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했습니다. 우주 관광객 논란에 대해서는 일본 등 다른 나라도 현재 외국 우주선을 타고 가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며, 관광객이라는 표현은 맞지 않다고 강조했습니다. 이 씨는 내일은 정부 중앙청사에서 공식 기자 회견을 가진 뒤,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 우주 비행을 주제로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이소연 씨는 이후, 충분한 휴식을 갖고 근력 회복 훈련을 실시한 뒤, 각종 우주 개발 사업에 참여할 계획입니다.
박현진 기자 /KBS 뉴스 2008.04.28 (09:34)
- 우주인1호 이소연씨 귀국
“착륙때 충격은 영광의 상처” “우주강국 되려면 지원 중요”
“지구 착륙 때 충격이 워낙 커 아직 통증이 남아 있지만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해요.”
28일 오전 인천국제공항으로 귀국한 한국 첫 우주인 이소연(30)씨는 기자회견에서 지난 19일 지구 귀환 때 귀환선이 곤두박질치다시피 착륙한 것을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몸이 다 회복되지 않았다는 그는 “우주정거장에서 보낸 열흘 동안 너무 많은 분들이 성원해 줘 감사하다”고 말했다. 이씨는 이날 예비우주인 고산(31)씨와 함께 대한항공 924편으로 귀국했다.
이씨는 12일 동안의 우주비행 뒤 지난 19일 소유스 귀환선을 타고 귀환했으나, 당시 귀환선이 지상과 30도 각도를 유지하지 못하고 거의 수직으로 떨어지는 바람에 ‘러시아의 착륙 기술 문제’ 논란이 불거졌다. 이상착륙을 놓고 러시아 쪽에 문제제기를 했느냐는 물음에, 이씨는 “(거의 수직 상태인) ‘탄도궤도’로 지상에 착륙해 문제가 됐는데 10년 전엔 탄도궤도가 정상 착륙 방식이었다”며 “미국도 큰 우려를 나타내지 않고 있으며 외교적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번 우주비행을 ‘우주관광’이라고 평하는 일부 시선에 대해선 “자기 나라 우주선을 타고 가지 않았다고 ‘우주여행객’이라 말한다면 일본·유럽 우주인들도 우주여행객”이라며 “나사(NASA·미국 항공우주국)의 우주인이 ‘누가 뭐래도 당신은 우주인’이라고 말해 줄 땐 울 뻔했다”며 불편한 마음을 드러냈다. 그는 “우주사업엔 항상 찬반양론이 있지만 우리가 우주강국이 되려면 이번처럼 노력, 정성, 서포트(국민 성원)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가장 중요하게 느꼈다”고 말했다.
이씨는 당분간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공군 항공우주의료원에서 쉬면서 의학검진을 받을 예정이다.
인천공항/오철우 기자 cheolwoo@hani.co.kr /한겨레 2008-04-28 오후 07:44:33
"무사귀환 했습니다" 한국 최초 우주인 이소연 씨 귀국
한국 첫 우주인 이소연 씨가 12일간의 우주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오늘(28일) 오전 9시 13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오전 9시 35분쯤 입국장을 빠져나온 이 씨는 취재진들에게 잔잔한 미소를 보이며 손을 흔들었지만 이씨의 어머니와 껴안는 과정에서 몸이 불편한 듯 잠시 얼굴을 찌푸리기도 했다. 이 씨가 탑승한 러시아 모스크바발 대한항공 KE924편은 도착 예정시각보다 10분 정도 빠른 오전 9시 13분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이씨는 동료 고산 씨와 함께 오전 11시부터 인천공항 CS아카데미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우주 비행에 대한 소감을 발표할 예정이다. 이씨는 29일 정부 중앙청사에서 공식 기자회견을 가진 뒤 6월초에는 유엔을 방문해 우주 퍼포먼스 때 사용했던 유엔기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전달하는 등 앞으로 국내 과학기술 홍보대사로 활동할 계획이다. CBS사회부 강인영 기자 Kangin@cbs.co.kr /노컷뉴스 2008-04-28 오전 9:40:53
한국 첫 우주인 이소연씨 귀국
한국 첫 우주인으로 12일간 우주임무를 무사히 마친 이소연(29) 씨가 28일 오전 9시 15분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이 씨와 예비우주인 고산(31) 씨는 이날 대한항공 924편으로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했다. 이 씨는 지난 8일 러시아의 소유스 TMA-12호를 타고 우주비행에 나섰으며 10일부터 19일까지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머물며 18가지 과학실험과 각종 우주퍼포먼스 등 우주임무를 수행했다. 이 씨는 또 지난 19일 소유스 TMA-11호를 타고 귀환한 뒤 지금까지 모스크바 인근 가가린우주인훈련센터 병원에서 휴식과 건강검진, 지구적응 훈련을 받아왔다. 이 씨는 귀환 당시 충격으로 아직도 일부 근육통 등 통증이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해 한국항공우주연구원 백홍렬 원장은 “이 씨의 건강상태는 비행과 장거리 여행에 지장이 없을 정도로 양호한 상태”라고 말했다. 이 씨는 오전 11시 인천국제공항 CS아카데미에서 귀국 기자회견을 가질 예정이며 29일에는 교육과기부를 방문해 김도연장관에게 임무완수를 보고할 예정이다. 이 씨는 또 청와대와 일정 조정이 끝나는 대로 청와대를 방문, 이명박 대통령을 만나고 6월에는 유엔(UN)을 방문해 우주퍼포먼스 때 사용했던 ’유엔기’를 반기문 사무총장에게 전달할 계획이다. 이 씨는 앞으로 우주과학 분야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우주과학과 관련된 강의, 강연, 교육활동, 언론 인터뷰 등 과학문화 확산을 위한 홍보대사로서의 활동도 수행하게 된다.
연합뉴스 /조선닷컴 2008.04.28 10:01
2008 - KBS, 방송 금지곡 418곡 해제
KBS는 방송 부적격으로 분류했던 418곡을 금지곡에서 해제했다.
KBS는 28일 "과거에 방송 부적격으로 방송이 금지됐던 가요 1천55곡을 재심의해 418곡을 금지곡 목록에서 해제했다"고 밝혔다.
418곡 가운데는 박상민의 '무기여 잘 있거라'(외설 퇴폐 불륜), 조용필의 '이끌어주오'(외국곡), 서태지의 '1996년 그들이 지구를 지배했을 때'(가사 부적격), 한대수의 '과부타령'(가사 부적격), 윤도현의 '이 땅에 살기 위하여'(가사 부적격) 등 유명 가수의 곡도 포함돼 있다.
해제곡들에 대해 KBS는 "체제 부정 등으로 방송 부적격 판정을 받았으나 현 시점에서 현실성이 없거나, 외설ㆍ퇴폐 등으로 부적격 판정을 받았지만 그 내용이 비교적 심하지 않은 노래들"이라면서 "나머지 637곡은 표절, 가사 내용 저속, 간접광고 등 공영방송에서 방송하기가 부적합한 내용인 것으로 판정돼 다시 부적격 결정이 내려졌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재심의된 1천55곡은 1995~2000년 사이 방송 심의규제에 묶여있던 부적격 가요들이다. KBS는 2004년에도 1965~1994년 당시 공연윤리위원회 시절의 방송금지 가요였던 1천46곡을 재심의해 676곡을 방송 금지곡에서 해제한 바 있다.
한편 MBC도 1991~2000년 방송사 자율 심의 조치에 따라 방송 금지했던 가요에 대해 금지곡 해제 여부를 놓고 심의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MBC 심의평가부의 한 관계자는 "1991~2000년 MBC가 방송 부적격 판정을 내린 후 지금까지 금지곡으로 묶여 있는 곡은 약 300곡 정도인데 그 후로 8년의 세월이 흐르며 시대상황이 바뀌어 지금도 이 노래들을 금지하는 것이 과연 적절한지를 놓고 심의 작업을 하고 있다"면서 "올해 말께 관련 작업을 마무리한 후 구체적인 결과를 공식적으로 알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서울=연합뉴스) /한겨레 2008-04-28 오후 04:18:47
2007년]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의 국장이 승하 550년 만에 거행 ‘임금 단종이시여, 이제 편히 영면하소서 …’ 조선왕조 제6대 임금인 단종(1441~1457)의 국장이 승하 550년 만에 거행된다. 단종은 숨진 뒤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지 못했다. 강원도 영월군은 단종이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긴 뒤 강원도 두메산골로 유배됐다가 사약을 받고 어린 나이로 생을 마감한 한을 풀어주기 위해 오는 28일 국장을 치른다고 17일 밝혔다. 영월군은 1967년 단종과 그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충신들의 넋을 위로하는 단종제를 해마다 개최해오던 중 단종 승하 550주년을 맞은 올해 영월군민들의 뜻을 모아 단종제 기간 중에 특별행사로 단종 국장을 거행하기로 했다. 영월군과 단종제위원회는 28일의 국장 행사를 차질없이 치르기 위해 18일 오전 10시 국장 예행연습을 하는데 이번 국장은 조선 왕실 후손 등의 철저한 고증을 거쳐 대여(국상 때 쓰는 큰 상여)와 각종 복식, 소품 등을 준비했다. 국장은 원래 고명을 시작으로 재궁(관)을 능에 안치하는 반우에 이르기까지 총 48개의 의례를 5~6개월에 걸쳐 진행한다. 그러나 이번 국장에서는 재궁이 궁을 나서기 전 영면을 기원하는 견전, 재궁을 대여에 올리고 혼백여 등이 장지를 향해가는 발인반차, 노제, 장지(장릉)에 도착해 승천을 기원하는 죽안마(대나무와 한지를 이용해 말의 형상을 만든 것) 태우기, 제향이 끝난 뒤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반우반차 등의 행사만 거행한다. 이 가운데 죽안마 태우기는 1926년 순종 국장 이후 볼 수 없었던 장식물을 81년 만에 재현한 것으로 큰 구경거리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한편, 단종은 승하한 뒤에도 장례를 치르지 못한 채 주검이 방치되던 중 당시 영월 호장이었던 충신 엄흥도에 의해 현재의 영월 장릉터에 가매장됐다. 영월/김종화 기자 /한겨레 2007-04-17
2007 - 영국성공회, 1400년만에 첫 여성 부주교
쉴러 왓슨 캔터베리 부주교 임명 /한겨레
쉴러 왓슨 캔터베리 부주교 임명 ‘여성 주교 걸음마’
영국 성공회가 1400년 만에 처음으로 여성 부주교(archdeacon)를 맞게 됐다.
성공회 수장인 로완 윌리엄스 캔터베리 대주교는 28일 500여명의 신도가 모인 가운데, 대주교 관할 옥스퍼드 교구의 쉴러 왓슨(53) 버킹엄 부주교를 캔터베리 부주교로 임명했다.
은퇴한 패트릭 에번스 전 부주교의 뒤를 이어 캔터베리 부주교의 직위에 오르게 된 왓슨은 앞으로 윌리엄스 대주교가 관할하는 잉글랜드의 43개 교구 가운데 27개 교구의 주교를 선출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된다. 여성이 고위 성직에 오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성공회의 이러한 결정은 여성을 주교로 임명하기 위한 첫 단계로 분석되고 있다. 가톨릭과 달리 성공회는 여성 사제를 인정하고 있으며, 지난 1994년 처음으로 여성이 사제로 임명된 바 있다.
왓슨 부주교는 서품식에 앞서 “교회와 교회의 역사를 사랑한다"며 “성직자가 된다는 것은 매혹적인 일이지만 오늘과 같은 사회에서는 가장 힘든 일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스코틀랜드의 명문 세인트앤드루스대학에서 고전학을 전공한 왓슨 부주교는 옥스퍼드대 신학과에서 1년간의 예과 과정을 거친 뒤, 27년간 잉글랜드 북동부와 런던 등지에서 성직자 생활을 했다.
런던/AFP·연합 /한겨레 2007-04-29 오후 08:20:00
2006 - '꽃바다'서 향기·때깔에 취해봐요
‘꽃과 하나되는 꽃세상으로 오세요.’
국내 최대 규모의 화훼축제 ‘2006 고양세계꽃박람회’가 28일 화려한 개막식과 함께 관람객을 맞기 시작했다.
내달 10일까지 13일 동안 경기도 고양시 한국국제전시장(KINTEX)에서 열리는 이번 전시회엔 해외 27개국 105개 업체와 국내 139개 업체가 참가했다.
총 1만 6000여평의 실내 전시장이 파도 정원, 모자이크 정원, 대륙별 꽃 정원 등 7개 정원과 세계관·한국관·주제관·분재관·통일관·자연생태관 등 12개 전시관으로 꾸며져 세계 화훼산업의 트렌드를 한눈에 볼 수 있다.
축구장 8배 크기에 달하는 박람회장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높이 10m의 대형 꽃 전망대가 눈에 들어온다.
대형 무대에서는 평양 예술단 공연, 어버이날 특집 악극 등 하루 6회 이상 무료공연이 행사기간중 매일 펼쳐진다.
●다양한 정원
‘파도 정원’은 파도·고래·등대·배·바다 이야기 등으로 구분돼 벽에 꽃으로 파도를 조성하고, 물개와 돌고래가 망망대해를 자유롭게 노니는 모습과 등대와 배, 해변의 모습 등을 표현했다.
‘모자이크 정원’은 자생화·관엽식물·분화·수생식물 등을 색상에 따라 배치, 연속성과 통일성을 함께 엿볼 수 있으며 한옥·솟대·돌담 등 구조물을 통해 정감을 느끼도록 했다.
‘대륙별 꽃 정원’은 대륙별 특징을 살려 아시아는 왕대나무·소나무 등으로, 아메리카는 신대륙의 이미지에 맞는 고목과 특산 수종으로, 아프리카는 선인장·관엽 등으로 꾸며 연출했다.
●주 전시관
‘주제관’은 철쭉동산, 알 정원, 꽃 조형물 정원, 디지털체험관, 웰빙 정원, 미니어처 정원 등으로 만들어졌으며, 이중 디지털체험관은 관람객이 모니터 앞에 서면 몸에서 장미꽃이 피어나는 신비한 체험을 할 수 있다.
‘분재관’은 단풍·해송·진백·철쭉 등의 분재가 석물·폭포·물레방아 등 소품에 어울려 연출된다. 대형 타이완산 분재 10여점과 억원대를 호가하는 고가분재 작품들도 출품됐다.
●특별전시관
‘통일관’에는 백두산의 아리, 구름미나리아재비, 산톱풀 등 모두 77종의 백두산 자생식물이 석부작·목부작·화분·토피어리 등으로 다양하게 연출돼 있다.
‘자연생태관’에는 다리가 4개인 윌커리하늘소, 좌우 날개 색 상이 완전히 다른 데모레우스호랑나비, 뿔이 6개 달린 오각뿔풍뎅이, 좌우 대칭으로 암수 한몸인 세리시우스사슴벌레 등 세계적으로 희귀한 11점의 곤충 표본이 30여종 1500여점의 국내외 곤충들과 함께 전시됐다.
이밖에 싱가포르 국립 난공원이 개발한 ‘유명인들의 이름을 딴 난(蘭)’들이 세계관에 전시돼 색다른 볼거리를 제공한다. 영국 왕세자비인 ‘다이애나 비 란’, 성룡의 영어 이름인 ‘재키 챈 난’, 미국 대통령 부인 ‘로라 부시 난’, 한류 영화배우 ‘배용준 란’, 대통령 부인 ‘권양숙 란’ 등 5종이다.
●체험·판매 행사
3000∼5000원을 부담하면 청아플라워즈, 윤 플로리스트 아카데미 등 전국의 저명한 화훼 교실과 단체의 화훼 체험강좌를 현장에서 들을 수 있다. 꽃다발·꽃바구니·코르사주 만들기와 식물심기를 배운다. 꽃잎을 소재로 압화(꽃누르미) 휴대전화줄과 열쇠고리를 만들어 볼 수 있다.
동물얼굴 만들기 등 꽃과 식물을 이용한 토피어리 제작 강좌도 열린다.
박람회 조직위원회는 전시장내에 마련된 대형 꽃판매장에서 시중 가격에 비해 30% 이상 싼 가격에 난과 선인장, 소규모 관엽 등 다양한 꽃과 꽃씨 등을 판매한다고 밝혔다. 화훼용 비료와 재배기구, 농약과 화훼재배 관련 전문서적이나 잡지 등도 다양하게 갖춰져 있다.
박람회조직위원회는 이번 박람회를 통해 1500만달러의 화훼수출과 550억원의 지역생산유발효과를 거둘 것으로 예상한다. 관람객들은 2만여대 주차규모의 KINTEX 임시주차장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다. 지하철 3호선 대화역에서 도보로는 10분 거리다. 개장은 오전 9시∼오후 8시, 주말은 8시30분까지다. 현장판매 입장료는 성인 1만원, 학생 6000원, 어린이와 65세 이상 노인, 장애인·국가유공자 및 기초생활 수급자 등 특별할인 대상자들은 4000원이다. 평일만 적용되는 단체는 30명 이상 성인 1인당 7000원, 학생 5000원 , 어린이 및 특별할인 대상자는 3000원이다. 문의 (031)908-7752∼4.
고양 한만교기자 mghann@seoul.co.kr /서울신문 2006-04-28 8면
2005 - 스위스, 세계에서 3번째로 긴 터널 관통
세계에서 3번째로 긴 터널이 중단없는 전진끝에 마침내 뚫렸다.
스위스 수도 베른에서 알프스 산맥 밑을 지나 남쪽의 발레 칸톤으로 연결되는전장 34.6㎞의 뢰치베르크 터널이 28일 관통식을 갖고 6년간의 쉼없는 발파 공사를마감했다.
남은 것은 오는 2007년 철도 개통을 위한 2단계 작업. 지난 1999년 착공된 뢰치베르크 터널은 2천500명이 24시간 교대근무로 공사에투입됐으며 발파작업에서 나온 암석과 토양은 1천600만t에 이른다.
양쪽에서 파들어간 터널의 오차는 10㎝에 불과해 스위스의 정밀한 기술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이 터널은 일본 아오모리현 덴마바야시무라-아오모리시를 잇는 하코다터널을 제치고 육상 터널로는 세계 최장. 스페인의 과다라마 터널(28.4㎞)도수개월내 관통을 앞두고 있어 하코다 터널은 3위로 밀려날 전망이다.
. 뢰치베르크 터널은 해저터널까지 포함하면 일본 혼슈와 홋카이도섬을 잇는 세이칸 터널(53.9㎞)과 영불해협의 '처널'(50.5㎞)에 이어 세번째로 긴 터널이다.
스위스는 알프스 산맥 밑으로 이보다 훨씬 긴 고타르 터널도 야심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고타르 터널의 총연장은 57㎞에 이르러 육상 및 해저터널을 막론하고 세계최장이다.
현재 공정률은 50%.
(제네바/연합뉴스) /한겨레 국제 2005.04.29(금) 01:36
2004년] 광주광역시 지하철 개통 2004년 4월 28일, 광주광역시에 지하철 1호선이 착공 7년 8개월여 만에 부분(1구간) 개통돼 광주에도 본격적인 지하철시대의 막이 올랐다. 1구간은 차량기지 1개(용산)와 정거장 13개를 포함하고 있으며, 차량은 1편성에 4량씩 모두 13편성(52량)이 운행한다. 지난 1996년 8월 착공돼 1조 443억원을 들여 7년 4개월여 만인 지난 해 말 토목과 기전분야 공사가 마무리됐다.
광주 지하철은 쾌적한 지하환경을 위해 모든 역사에 냉방시설을 갖췄다. 또한 모든 역사에 장애인용 엘리베이터를 설치했다. 지하철 내에 화재 등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자동으로 운전사령에게 통보되며, 환기설비가 제연모드로 자동 전환되도록 했다. 객실 내장재와 바닥재는 국제 수준의 난연성 내장재를 사용했다. 도청역과 금남로4가역에는 국내 처음으로 스크린도어를 설치, 고객의 안전을 확보하고 소음과 열차풍·분진 등을 차단해 쾌적성을 높일 수 있도록 했다.
광주 지하철 전동차는 (주)로템과 조달계약을 맺어 주요 핵심장치를 100% 국산화해 설계·제작했다. 이에 따라 고장 발생 때 신속한 대응과 조치가 가능하며, 외국의 기술과 고가의 부품에 의존해야 했던 문제도 해결할 수 있게 됐다. 또 전동차 차체를 국내 최초로 알루미늄합금으로 제작, 타도시의 기존 전동차보다 중량을 20% 가량 줄였다. 이에 따라 승차감과 소음차단 효과를 향상시키고 운행동력비도 절감할 수 있게 됐다. 열차 사이에 문이 없는 ‘일체형 통로(Gangway)’는 방음·단열효과가 우수하며, 4량의 전동차에서 일어나는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어 만약의 사태 발생 시 신속한 대응과 대피가 가능하다./조선
광주지하철 역사적 첫 발차
7년여 동안 총사업비 1조443억원 연인원 46만2천명 7년여 땀방울 끝 1호선 1구간 역사적 개통 96년 8월 첫삽을 뜬 이래 근 8년에 걸친 공사 끝에 광주지하철이 드디어 역사적인 첫 운행을 시작했다. 서울, 부산, 인천, 대구에 이어 국내 다섯번째 지하철 개통이다. 광주광역시는 28일 오전 10시 광주광역시 서구 상무동 광주도시철도공사앞 상무역 광장에서 강동석 건설교통부장관, 심재민 시장권한대행, 문원호 광주도시철도공사 사장 등 각계 인사와 시민 1천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광주지하철 1호선 1구간(상무-녹동) 11.96킬로미터 13개 역사에 대한 개통식을 갖고 첫 운행을 시작했다. 이날 10시 50분 역사적인 광주지하철에 첫발을 뗀 광주지하철 92량은 개통식에 참석한 시민들을 태우고 상무역에서 소태역까지 운행을 개시해 광주지하철의 첫 발을 성공적으로 내딛었다.
개통행사에 맞춰 금남로 지하상가 번영회 등 지하철 인근 주민들은 역사적인 광주지하철 개통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내걸고 쌍촌역에서는 인근 초등학교 어린이 악단이 나와 첫 지하철이 역구내로 들어오자 축하연주를 하는 등 온 도시가 지하철 개통으로 들뜬 분위기였다. 이날 개통 행사에 참석한 시민들은 대체적으로 광주지하철의 첫 운행에 만족스러운 표정들이었으나 시내버스와의 환승체계 구축과 엄청난 부채, 그리고 운영적자 등은 광주지하철의 아쉬운 점으로 지적됐다.
광주지하철은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광주지하철은 91년 8월 도시철도 건설 타당성 용역을 실시한 뒤 96년 8월 28일 첫 삽을 떴다. 이번에 개통된 1호선 1구간(상무-녹동)은 총사업비 1조443억원 연인원 46만2천명, 장비 연7만3천277대가 투입됐다. ...
시민의소리(http://www.siminsori.com) 2004년 04월 28일 (수) 00:00:00
2003 - 경남 남해군 창선도와 사천시 사이 해협 '연륙연도교' 개통
창선-삼천포대교
남해 창선도와 사천시를 연결하는 한려수도 최고의 명물, 총연장 3.4km에 5개의 교량으로 구성된 창선·삼천포대교 세계에서 보기드문 다리의 향연 지난 2003년 4월 28일 성웅이충무공의 탄신일을 기하여 1973년 남해대교가 개통된지 30년만에 창선·삼천포대교를 개통하였다. 대한민국 최고의 관광명물로 탄생한 창선·삼천포대교. 길이 3.4km의 창선·삼천포대교는 삼천포와 창선도 사이 3개의 섬을 연결하는 5개의 교량으로 전국에서 유일하게 해상국도(국도3호)로 세계적으로 보기드문 관광명소이다. 남해의 새로운 관문으로 탄생한 이 다리는 창선도의 육상교량으로 150m길이의 PC빔교인 단항교, 창선과 사천 늑도를 잇는 340m의 하로식아치교인 창선대교, 사천시의 늑도와 초량을 잇는 340m 길이의 PC BOX인 늑도대교, 초양섬과 모개섬을 잇는 202m의 종로식 아치교인 초양대교, 모개섬과 사천시를 연결하는 436m의 콘크리트 사장교인 삼천포대교라는 다섯개의 교량이 다리박물관을 방불케하는 장관을 연출한다. 1995년 2월 착공하여 2003년 4월 개통된 창선·삼천포대교는 전체공사비가 1,830여억원으로 한국 최초로 섬과 섬을 연결하는 교량으로 교량 자체가 국제적인 관광지로 자리매김 할 것이다. 남해군 또한 주변 개발을 통해 명실상부한 한려수도의 중심으로 부상하고 있다. 이제 곧 창선·삼천포대교 주변에 전망타워, 콘도, 호텔, 유람선이 투자유치 되고, 해양레포츠 시설이 들어서게 될 것이다. 남해군 창선면 북쪽 끝 단항의 해발 150m 높이에 있는 전망타워에서 바라본 섬과 다리들의 장관을 상상해보라. 일출과 일몰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남해의 동북 끝, 바다에는 어선들이 하얀 물살을 일으키며 조업에 한창이고, 다리를 질주하는 차량의 불빛이 꼬리를 문다.
2003 - 한국ㆍ미국ㆍ프랑스 공동개발한 우주망원경 갤렉스 우주공간에 발사
갤렉스 자외선 우주망원경 /조선
한국ㆍ미국ㆍ프랑스 공동개발한 우주망원경 갤렉스 우주공간에 발사
국내 연구진이 참여해 만든 최초의 우주망원경이 2003년 4월 28일 우주공간에 발사됐다. 연세대학교 자외선우주망원경연구단(단장 이영욱)은 미 항공우주국(NASA), 프랑스 우주천문연구소(LAS) 등과 함께 개발한 자외선 우주망원경 갤렉스(GALEX ·Galaxy Evolution Explorer)를 이날 오후 9시(한국시각)쯤 미국 플로리다의 케네디우주센터에서 페가수스 XL 로켓에 실어 발사했다고 밝혔다.
갤렉스는 당시 세계에서 유일한 자외선 우주망원경으로, 우주의 역사를 탐구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됐다. 갤렉스는 지구 대기권의 오존층의 방해를 받지 않아 70억~80억광년 이상 떨어진 고온의 별에서 나오는 자외선을 감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시야도 허블 망원경 등 기존의 가시광선 우주망원경의 수백 배에 달한다.
갤렉스는 앞으로 28개월 동안 지구 상공 690km 궤도에서 지름 50cm의 반사경을 사용해 주로 먼 외부 은하의 별들을 관측할 예정이다. 관측 결과를 처리할 자료센터는 캘리포니아공대, 존스홉킨스대학, 연세대학교 등 세 곳에 설치된다. 자외선우주망원경연구단은 갤렉스의 관측자료를 국내 학계와 공유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갤렉스 망원경은 1998년부터 미국 캘리포니아공대를 주축으로 미국·프랑스·한국 3개국 연구팀이 함께 참여해 제작했으며, 한국은 15명의 과학자가 개발에 참여했다. /조선
2002 제4차 이산가족 상봉 ← 상봉을 마치고 버스에 오른 남측 가족들이 배웅나온 북측 가족들의 손을 놓지 못하며 아쉬워하고 있다. 2002년 4월 28일 북한 금강산에서는 전해 2월의 서울·평양에 이어 남과 북의 부모·자녀, 형제들이 부둥켜안고 반세기 이산의 한(恨)을 풀었다.
이산가족 상봉은 동년 4월 3일 임동원 특사 방북을 통해 이루어졌다. 장소가 협소해 남북한 이산가족들이 시차를 두고 순차적으로 상대측 가족들을 만났다. 남쪽 이산가족 100명이 먼저 금강산에 가서 2박3일 동안 북한의 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북쪽 이산가족 100명을 만날 남한의 가족들이 다시 금강산으로 가서 상봉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이날 오후 금강산여관에선 이틀전인 26일 숨진 어머니 어병선(93)씨 대신 상봉단에 포함된 이부자(62)씨를 비롯해 남측 이산가족 99명이 북한의 가족 183명과 단체상봉을 가졌다. 남북 이산가족들은 이날 저녁 북한 적십자회 주최로 금강산여관에서 만찬을 가진 뒤 금강산에서의 첫 밤을 보낸 후 30일 오전 금강산여관에서 북측 가족·친척 183명과의 작별상봉을 끝으로 2박3일간의 짧은 상봉일정을 마치고, 장전항을 떠나 속초로 돌아왔다. 또 5월 1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북측 이산가족 100명을 만날 남측 가족·친척 468명이 금강산으로 떠났다가 3일 돌아왔다./조선
남북 이산가족 상봉 일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1985년 ’이산가족 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방문에 관한 합의서’를 바탕으로 처음으로 성사됐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이후 15년 동안 이뤄지지 않다가 2000년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정상회담에서 합의된 6.15공동선언으로 본격화 돼 올해로 14차까지 진행됐다. 다음은 이산가족 상봉관련 일지. ▲1985. 9.20∼ 9.23 = 남북한 고향방문 및 예술공연단 서울·평양 교환 방문. ▲2000. 8.15∼ 8.18 = 제 1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서울·평양). ▲2000.11.30∼12. 2 = 제 2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서울·평양, 납북자·국군포로 처음 포함). ▲2001. 2.26∼ 2.28 = 제 3차 이산가족방문단 교환 (서울·평양, 2000년 12월 개최 합의 후 북측이 내부사정을 이유로 지연 개최) . ▲2002. 4.28∼ 5. 3 = 제 4차 이산가족 순차상봉(금강산, 2001년 10월 개최 합의 후 북측이 남측의 9.11테러 관련 경계태세 강화를 이유로 지연 개최). ▲2002. 9.13∼ 9.18 = 제 5차 이산가족 순차상봉(금강산). ▲2003. 2.20∼ 2.25 = 제 6차 이산가족 순차상봉(금강산). ▲2003. 6.27∼ 7. 2 = 제 7차 이산가족 순차상봉(금강산). ▲2003. 9.20∼ 9.25 = 제 8차 이산가족 순차상봉(금강산). ▲2004. 3.29∼ 4. 3 = 제 9차 이산가족 순차상봉(금강산). ▲2004. 7.11∼ 7.16 = 제10차 이산가족 순차상봉(금강산). ▲2005. 8.12 = 남북 이산가족 화상상봉센터 개소식. ▲2005. 8.15 = 화상상봉시스템 개통, 제 1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5. 8.26∼ 8.31 = 제11차 이산가족 순차상봉(금강산). ▲2005.11. 5∼11.10 = 제12차 이산가족 순차상봉(금강산). ▲2005.11.24∼11.25 = 제 2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5.12. 8∼12. 9 = 제 3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6. 2.27∼ 2.28 = 제 4차 이산가족 화상상봉. ▲2006. 3.20∼ 3.25 = 제13차 이산가족 순차상봉 (금강산, 공동취재단 ’납북’ 용어사용 문제로 전원 철수). ▲2006. 6.19∼ 6.30 = 제14차 이산가족 순차상봉 (금강산,’납북 고교생’ 김영남씨 남측 가족 상봉). ▲2006. 7.19 = 북, 이산가족 상봉 중단 통보. [2006-07-20 08:23 ]연합 /한겨레 필통 한토마
2001 - 미국 억만장자 데니스 티토, 세계최초로 우주 관광
세계최초의 우주관광객 데니스 티토 /조선
최초의 우주관광객인 미국인 사업가 데니스 티토, 러시아 우주선 '소유즈·tm32' 우주선에 탑승
미국의 억만장자 기업인 데니스 티토(60)가 2001년 4월 28일 세계에서 최초로 우주 관광객이 됐다. 티토를 태운 러시아 우주선 `소유즈-TM32`호는 이날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바이코누르 우주선 기지에서 발사됐으며, 30일 국제우주정거장(ISS)과 도킹에 성공했다.
미 항공우주국 엔지니어 출신으로 캘리포니아주에서 투자금융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티토는 5월 6일까지 8박9일간 우주여행을 위해 무려 2000만 달러 (약260억원)를 지불했다. 사상 첫 우주관광객이 된 티토는 발사 전날인 27일 기자회견에서 "우주여행을 향한 내 필생의 꿈이 실현되는 것"이라고 감격해 했으며, 28일 우주를 향해 날아오른 뒤 첫마디로 `좋다`는 뜻의 러시아어 "하라쇼"를 연발했다.
10대 때인 1957년 소련 인공위성 `스푸트니크`호가 처음으로 우주비행에 성공했을 때 이미 우주여행을 꿈꾸기 시작했다는 티토는 10년 전부터 모스크바 당국에 우주정거장 `미르`호로의 우주여행을 허락해달라고 졸라왔으며, 미르가 2001년 3월에 폐기돼 남태평양에 수장되자 ISS 여행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이탈리아 이민 후손인 그는 키 164cm에 체중 63kg의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강인한 의지와 각고의 노력으로 꿈을 이루었다. 티토는 우주여행 전에 900시간의 훈련을 받았다. /조선
[어제의 오늘]2001년 사상 첫 민간인 우주여행ㆍ억만장자 티토 2000만달러 지출
“천국에 다녀온 기분이었다.” 2001년 4월28일 미국인 억만장자 데니스 티토가 인류 역사상 첫 ‘우주관광’ 길에 올랐다. 러시아의 소유스 우주선을 타고 국제우주정거장(ISS)을 방문, 7일 22시간 4분 동안 우주공간에 머물며 지구를 128바퀴 돈 뒤 귀환한 것이다.
1940년 뉴욕에서 태어난 티토는 항공우주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로, 미 항공우주국(NASA) 제트추진연구소에서 일하다가 72년 독립해 투자회사를 차렸다. 그의 회사는 시장의 리스크를 수학적으로 분석하는 기법을 통해 급성장했다. 첨단기술산업 분야 투자컨설팅으로 갑부가 된 티토에겐 ‘우주여행’이라는 오랜 꿈이 있었다. 마침 90년대 러시아의 기업 민영화 과정에서 소유스 우주선을 만들던 국영 항공우주개발회사가 NPO에네르기아라는 기업으로 바뀌고, 레이건 미 행정부 시절 상무부에서 일했던 제프리 맨버가 NPO에네르기아와의 친분을 바탕으로 소유스와 국제우주정거장의 상업적 이용권을 따냈다. 티토는 2000년 맨버와 손잡고 개인 우주관광 상품을 구매한 첫 손님이 됐다. 티토가 이 관광에 들인 돈은 2000만달러에 이른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NASA는 티토의 계획에 반대하며 미국 내 우주센터에서 훈련을 하게 해달라는 요청을 거부했다고 한다. 나중에 미 의회는 티토를 불러 민간 우주여행의 상세한 내용을 물었고, 미국에서도 뒤늦게 우주관광 붐이 일었다. 티토를 시작으로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업가 마크 셔틀워스, 미국 사업가 그레고리 올슨과 아누셰 안사리, 찰스 시모니 등 우주여행가들이 잇달아 탄생했다. 여행상품 가격을 200만달러 선으로 낮춘 ‘간이 우주관광’ 상품도 등장했다. 우주선을 타고 대기권 밖으로 나가 무중력 상태를 경험해보는 상품이다. 미국 서부 사막지대에 ‘민간 우주기지’들이 여러 곳 생겨났다. 모험가 겸 박애주의자로 유명한 영국 기업가 리처드 브랜슨이 운영하는 버진 갤럭틱은 지난해 말 사상 최초의 민간 우주선 ‘스페이스십 2’를 공개했다. 이 비행기는 이르면 내년부터 여행객들을 우주로 태워보낼 예정이다.
구정은 기자 ttalgi21@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0-04-27 17:45:46
2000년 :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 2000년 4월 28일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가 개막했다. 이 영화제는 주류영화들과는 다른 대안적 영화와 디지털 영화를 소개하는 부문경쟁을 도입한 비경쟁 영화제다. 1회는 7일간 개최됐으며 영미권·유럽·러시아·오스트레일리아·아시아 등의 영화 140여 편이 참여했다. 영화제는 2000년 1회를 시작으로 매년 4월 말 개최되고 있으며 2010년 현재 11회 개막을 앞두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로 '영화거리'가 붐비고 있다. /조선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 개막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가 2000년 4월 28일 개막됐다. 영화제는 12만명의 관객을 끌어들이며 5월 4일 막을 내렸다. 영화제는 당초 우려를 불식하고 기간 내내 관객들의 열띤 호응을 받으며 170편 상영작 중 80%가 매진을 기록하는 성과를 거뒀다. 유료객석 9만4000석의 매표율도 85%에 달했다.
부산과 부천에 이어 국내에서 세번째로 개최된 국제영화제라는 핸디캡을 딛고, `대안영화`를 내세운 전주영화제의 전략도 성공한 것으로 평가받았다. 디지털 영화의 미래에 대해 갖가지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전주영화제는 `N 비전` 부문을 중심으로 디지털 영화를 모아 상영하고 관련 심포지엄을 여는 등의 돋보이는 기획으로 새로운 매체의 현주소를 정리해냈다. 영화제의 성황은 그간 지방 영화팬들이 얼마나 이런 행사에 목말라했는지를 잘 보여줬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국제영화제가 3개나 열릴 필요가 있는가"하는 의문에 대해 전주는 잠재 관객을 `개발`해냄으로써 답을 던졌다. 하지만 영화제 운영에선 많은 시행착오들이 빚어져 다음해 행사의 과제로 남았다. 관객들은 이구동성으로 북새통을 이룬 매표창구를 문제점으로 꼽았다. 티켓발매업무 혼란으로 표를 사기 위해 1시간 넘도록 무작정 기다려야 하는 상황이 속출했고, 전산망이 수시로 다운되는 소동도 잦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가 프린트 배달사고로 상영이 1시간 지체되는 등 상영사고도 적잖았다. /조선
1999년]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22년 만에 새단장 공개 ← 다빈치의 ‘최후의만찬’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대작 ‘최후의 만찬’이 22년간의 복원 작업을 마치고 1999년 4월 28일 일반에 공개됐다. 이탈리아 밀라노의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성당의 홀 벽면에 그려진 `최후의 만찬`은 예수가 12제자와 식사를 하는 모습을 담은 것으로 르네상스 시대 최고걸작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다빈치가 1494년~1498년에 걸쳐 완성한 이 그림은 수백년이 지나면서 습기와 먼지등으로 손상돼 왔으며 이에 따라 수백년간 걸쳐 수차례 작업을 했다. 그러나 보수 작업에도 불구하고 작품 색상이 어두워지고 표면이 떨어져 나가는 등 오히려 훼손이 심해지자 1977년부터 전문가들을 동원, 본격적인 복원 작업을 시작해 이번에 완성을 보게됐다.
반면 복원 작업으로 원작품의 예술성이 손상을 입었다는 지적이 제기되면서 비평가들은 이번 복원 작업은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주장하고 복원된 그림 자체의 예술성은 인정할 수 있을지라도 복원 작품에서 다빈치의 흔적은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1995년]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사고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사고 현장
1995년 4월 28일 대구 지하철 공사장에서 가스가 폭발, 국내 지하철공사 사상 최대 규모의 참사가 발생했다. 이날 오전 7시50분쯤 대구시 달서구 상인동 영남중고 앞 네거리 대구 지하철 1-2공구 부근에서 도시가스관이 폭발, 등교길 학생과 출근길 시민 등 총 1백1명이 숨지고 2백2명이 다치는 사고가 발생한 것이다.
이 사고로 차량통행을 위해 공사장 위에 임시 설치한 복공판 4백여m가 무너졌고, 차량 1백50대와 건물 3백46채가 무차별 폭탄공격을 받은 듯 파손됐다. 이로 인한 재산 피해액이 5백40억원에 다다랐다.
사고가 나자 경찰 소방대원 민방위대원 군인 등 3천3백여명이 투입돼 사체 발굴과 부상자 구조작업을 벌였으나 가스 대량 누출과 파열된 수도관에서 쏟아진 물로 구조에 어려움을 겪었다.
사고는 인부들이 굴착중 실수로 도시가스 배관을 파손하고서 방치하는 바람에 일어난 인재로 지하굴착 공사장의 안전관리와 도시가스에 대한 안전의식을 다시 인식시켜 주는 계기가 됐다./조선
1993년] ‘천상의 시인’ 천상병 씨 별세 ← 동백림 사건에 연루돼 고문을 받고 풀려난 천상병 시인은 서울 상대 출신의 엘리트였으나 고문후유증으로 행려병자가 되기도 했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떠돌이 괴짜 시인 천상병씨(63)가 1993년 4월 28일 오전11시 자신의 시처럼 하늘로 돌아갔다. 간경화증에다 오랜 행려병까지 지니고 있었지만 "88세까지 살라는 어떤 계시를 들었다"고 평소 주장했던 그였다. 1950년대에는 고은, 김관식과 함께 문단의 3괴요, 1970년대 이후에는 중광, 이외수와 더불어 3괴로 불려온 천하의 괴짜 시인. 그의 일생은 그와 아무 관련없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를 받으면서부터 구겨지기 시작했다. 일본 관서지방에서 태어난 그는 해방후 귀국, 마산중학을 거쳐 서울상대에 진학했던 전도양양한 젊은이였다. 뒤늦게 모국어의 아름다움에 이끌려 학업보다는 시쓰기에 골몰했고 4학년 2학기에는 대학을 중퇴해 버렸다. 줄담배와 폭음, 숱한 기행과 일화를 남기며 시를 쓰던 그는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된 베를린 유학생 친구와의 관계를 고백하라’며 중앙정보부에 끌려갔고 거기서 세차례나 모진 전기고문을 당했다. 6개월간 정보부에 갇혀있다 나오자 극심한 고문 후유증과 영양실조로 인해 거리를 헤매이는 행려병자가 되었다. 그런 세월이 이어지면서 그의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던 문단에서는 행려병으로 인한 사망으로 판단. 1971년 말 유고시집 ‘새’를 발간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그의 초기 시는 우주의 근원과 죽음의 피안, 인생의 비통한 현실을 노래했으나 말년에 이르러서는 아무런 수식없이 동화풍의 맑고 간결한 시들을 발표했다. /조선
1987 - 가톨릭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창립
‘가난한 자들의 벗’ 가톨릭 빈민사목위 창립 20돌 28일 ‘복음적인 가난’ 기념행사
아무도 돌보지 않은 가난한 자들의 벗이 되어준 가톨릭 서울대교구 빈민사목위원회가 창립 20돌을 맞는다. 빈민위는 창립일인 28일 오후 2시 서울 명동성당 문화관 꼬스트홀에서 ‘복음적인 가난’을 주제로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이 자리에선 빈민위원장인 이강서 신부가 ‘빈민사목 청빈실천 10년 의제’를 제안하고, 빈민위의 산파 구실을 했던 고 제정구 의원과 20년 간 부위원장으로 헌신하다가 지난 1월 세상을 떠난 고 김동주씨의 유족들에게 감사패가 헌정된다.
빈민위는 다음달 5~6일엔 제정구 의원의 생가인 경남 고성과 섬진강 일대를 돌아보는 추모기행을 펼친다.
빈민사목위는 ‘86 아시안게임’과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목동·사당동·상계동 빈민지역 재개발 과정에서 폭력적인 강제철거로 인해 보금자리가 파괴돼 대책 없이 쫓기는 빈민들을 위해 1985년 창립된 ‘천주교도시빈민회’를 모태로 1987년 4월28일 설립됐다. 심용섭·김병도·남국현·추영호·양권식·정일우·신부와 양헬레나·손인숙·장옥자 수녀, 제정구·김혜경·김영준·최재선·박젬마·이화복씨, 황인철·조영래 변호사, 김형국 교수 등이 사목위의 초대 멤버들이다.
이들은 빈민지역에서 강제철거 반대와 생존권 투쟁, 주거권 입법운동을 벌이면서 애기방, 공부방, 일자리방, 주민회관을 만들어 빈민들의 활로를 모색하는데 함께 해왔다. 또 92년 빈민지역에 도시공소를 세워 헌신한 빈민사목위원들의 꾸준한 노력으로 98년 9월 이후 빈민사목 지역 센터인 다섯 곳의 선교본당과 여덟 곳의 평화의집을 세웠다.
poor.or.kr. (02)777-7261.
조연현 기자 /한겨레 2007-04-27 오후 06:36:47
1984 레이건 미 대통령, 중국 북경에서 조자양, 호요방과 한국 문제 논의 레이건 대통령; 남북한 직접회담 지지, 미국 중국이 참여하는 4자회담 제의 조자양 총리; 3자회담의 조속한 개최 제의 호요방 총서기; 주한미군 반대, 평화적인 연방제 주장
1974 신민당 총재 지낸 유진산 세상 떠남
유진산(柳珍山, 1905년 10월 18일 ~ 1974년 4월 28일)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청년운동가, 정치인으로 충청남도 금산군에서 태어났으며, 해방 정국에서는 우익청년단체를 운용하였다. 정부 수립 이후, 반민특위에 가담하여 친일파 단속, 척결활동을 했으나 실패했고, 제1공화국 제3공화국, 제4공화국 시절에는 야당 정치인으로 신민당 대표 등으로 활동하였다. 정치적 계보는 민주당 구파였다.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한 이후 민주당, 신민당, 민정당, 신민당 등에서 활동하였다. 본명은 유영필(柳永弼), 호는 옥계(玉溪)이다. 진산(珍山)은 원래 그의 필명이자 호였으나 나중에 이름이 되었다.[1] 이승만의 측근이었던 임영신과는 같은 고향 출신으로 서로 알고 지냈다 한다.
[편집] 생애
편집] 생애 초기
] 출생과 수학
충남 금산 태생으로, 아버지는 유경덕(柳敬德)이고 어머니는 김경하(金敬夏)이다. 어렸을 때부터 임영신 등과 가까이 지냈다. 소년기에 김현신(金賢信)과 결혼하였다.
1918년 경성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2학년 때 3.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교내 독립만세 벽보사건으로 인하여, 다니고 있던 경성 고등보통학교를 2학년 때 자퇴하고, 이후 보성중학교로 편입하였다. 1923년에 고려대학교를 졸업하였다. 1926년 일본으로 건너가, 와세다 대학 예과에서 영어를 수학한 뒤,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와세다 대학 정경학부를 다녔으나, 독서회 사건으로 이치가니 형무소(市谷刑務所)에 투옥되었다. 이 때문에 3학년 재학 중 다시 대학교도 중퇴해야 했다.[2]
[편집] 농민, 사회 운동
한편 농민운동에 투신했다가 1932년 쌍엽농민회(雙葉農民會)를 조직해 농민운동을 하였고, <농민독본>이란 책을 편찬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조선총독부 당국으로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되어 감시를 당하였다. 농민운동을 펴다가 일본경찰의 감시대상이 되어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33년 장시성(江西省) 난창(南昌)에서 한인회(韓人會)를 조직하고, 충칭(重慶) 임시정부의 연락원으로 독립운동을 지원하던 중 1934년 일본 영사관 관헌에 붙잡혀 서대문형무소에서 4개월간 구금되었다. 1935년에서 광복까지 《농민독본 農民讀本》의 편집을 하면서 필명을 진산(眞山:나중에 珍山으로 고침.)이라 하고, 전진한(錢鎭漢)·김산(金山) 등과 농민운동을 전개하였고, 이 무렵부터 조병옥(趙炳玉)·백관수(白寬洙)·장택상(張澤相) 등을 만나 줄곧 연락, 교유하였다.
태평양 전쟁 이후 창씨개명을 거절하고 버티다가 1942년에는 만주로 건너가, 충칭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만주 연락원이 되었으나,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어, 한국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광복 후에는, 대한민주청년동맹을 만들어 최고위원이 되었고, 백의사같은 비밀 우익 단체에서의 활동을 시작으로 정계에 투신하여, 국회의원이 되었다.
1935년에서 광복 직전까지 그는 독립운동과 사회활동을 하는 한편으로 농민독본(農民讀本)의 편집을 하면서 필명을 진산(眞山, 나중에 珍山으로 고침.)이라 하다가 그대로 이름화되었다
[편집] 광복 이후
편집] 광복 직후
광복 직후 우익청년단체 흥국사를 조직하여 좌익의 최대단체였던 건청(建靑)을 해체시키고, 이른바 조선인민공화국의 인민대표자회의를 강제 해산시켰다.
1945년 12월 김구가 반탁을 주장하며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하자 유진산 역시 신탁통치 반대운동에 가담하였다. 이후 해방정국에서 전진한, 김두한 등과 비좌파와 우파적 성향의 노동운동단체와 청년단체에서 활약하였다. 1946년 4월 9일 좌익청년단체 조선민주청년동맹에 대항한 반공주의 우익 청년단체 대한민주청년동맹을 조직, 결성하고 대한민청 회장에 피선되었다.
김두한을 감찰부장으로 임명하여 활동하였으나, 미군정에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해산명령을 받고 1947년 폐지하는듯 하다가 단체의 이름을 '청년조선총동맹'이라는 조직으로 이름을 바꾸고 계속 반공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이후 이승만의 청년단체통합 지시로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등 다른 청년단체들과 통합하여 1948년 12월 통합 출범한 '대한청년단'에 가입했다. 이후 대한청년단 최고지도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편집] 반민특위 실패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한편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에서도 활동하여 친일파 단속 및 검거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1949년 당시 노덕술 등 친일파들이 시도한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요인 암살음모사건의 암살표적으로 되기도 하였다.[3]
여러 번 살해, 암살 협박을 받았으나 뜻을 굽히지 않다가, 반민특위가 강제해산되면서 실패하고 만다. 1949년 3월 18일 고려역도구락부 창립에 참가, 고려역도구락부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편집] 정치 활동
편집] 정계 입문 초기
- 한국 전쟁, 대한국민당 (1948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950년 5월 제2대 국회의원 총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하였고, 그해 6월 6.25 전쟁이 터지자 바로 피난갔다. 1951년 국민당 총무부장에 선출되었고 1954년 제3대 총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된 이래, 국회의원으로 7번 연속 당선되었고, 1954년에는 반(反)이승만 인사와 야당인사들이 모여 신당 창당을 준비하던 호헌동지회에 가담하였다.
호헌동지회가 조봉암의 영입을 놓고 찬성과 반대 의견이 나뉘어졌을 때 유진산은, 조봉암의 영입을 반대하는 조병옥, 김준연, 김도연, 장면 등과 같은 입장에 섰다. 조봉암의 호헌동지회 가입은무산되었다.
[편집] 야당 정치인
1955년 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9월 18일 민주당 중앙상무위원에 선출되었고, 그날 당직자 선거에서 유진산은 민주당 중앙당 노동부장[4]에 선출되었다.이후 민주당 구파 정치인으로 활동하였으며 구파의 대부로 불렸다.[5] 그러나유진산은 직접 나서지 않았다. 1956년 민주당 중앙당 노동부장[4]을 거쳐 그해 민주당 선거대책위원장을 지냈다.
1959년 윤보선이 민주당 구파 출신으로 최고위원에 피선되었는데, 1960년 4.19 혁명 이후, 유진산은 그 자신이 직접 나서지 않고 윤보선을 조병옥(趙炳玉) 사후의 구파 리더로 추대하였다.[5] 윤보선은 당시 민주당 구파의 얼굴마담격으로 등장했다.[5] 윤보선과 계획하고 같은 구파 출신의 김도연을 국무총리로 올리려고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총리 서리로 지명된 김도연이 낙마하자 그는 장면 내각에 도전하였다.
[편집] 5.16 군사 정변 직후
1960년 12월 민주당 신구파를 보수양당으로 분당시켜, 신민당의 창당을 주도하였다. 5.16 군사쿠데타 후에 유진산은 군정에 대한 물리적 투쟁 보다는 야당으로서의 대결을 주장했다. 그에 의하면 "군인들이 시퍼런 칼을 들고 나섰으니, 우리들은 광목을 몇 필이고 풀어 그 시퍼런 칼을 둘둘 감아 무디게 해야 되지 않겠나." 라는 것이었다. 군사 정변 이후에도 그는 줄곧 야당의 중진으로 활약하였고, 1962년 3월 박정희의 3·22군정연장성명에 반대하여 민주구국선언대회를 주관하였다.
민주당 구파 계열의 지도자로 활동하였으나 윤보선과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1964년 8월 윤보선과 결별했다. 민정이양이 된 후 그는 1963년 5월 민정당(民政黨)을 창당하여 김병로(金炳魯)를 당대표로 추대하였고, 그해 11월 전국구로 6대국회에 진출하였다.
[편집] 생애 후반
[편집] 3공화국 이후
1964년 8월 윤보선과 유진산이 결별한 이후 민주당 구파는양분되었다.[6] 신언론법안 제정을 쟁점으로 야당 내에서도 윤보선과 유진산간의 갈등이 표면화되었다. 윤보선은 유진산이 이 법안을 통과시키자, 그가 공화당으로부터 거액의 자금을 수뢰하였다고 비난하였다.[7]
1967년 신민당 부총재에 선출되었고, 민주당 구파계열 인사로 당의 지도부를 구성했다.
1969년 삼선개헌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68년부터 대통령 3선연임 금지조항을 폐지하자는 개헌논의가 나오자 1969년 1월 21일 그는 일당의 영구 집권은 부패와 부정, 그리고 독재정권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역사의 교훈이라고 말했다.[8][9]
1970년 신민당 총재를 지냈다. 1970년의 신민당(新民黨) 대선 예비후보 경선에서 유진산의 선출이 유력시되었다. 그러나 이는 박정희 정권의 공작으로, 국민들이 유진산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때문이었다.[10] 유진산은 대통령 후보 경선을 포기하는 대신, 자신에게 후보자 지명권을 달라고 당내에 요구하였다. 그러나 김대중은 자기가 지명될리 없다는 것을 알고 이를 반대했지만, 유진산은 후보자 지명을 강행하여, 자신의 계보의 정치적 적자인 김영삼을 대선 후보자로 추대했다.[10]
1970년 단일지도체제의 신민당 당수가 되었을 때 그는 정무위원과 당직을 자파만으로 독점하지 않았다. 타협과 안배의 정치가 치고의 정치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신파나 외부 영입 인사들도 당 간부로 선임하는 것에 반발한 윤보선 등은 그가 따로 자기 세력을 키우려 한다고 의심했다.
[편집] 진산파동
- 이 부분의 본문은 진산파동입니다.
5·25 국회의원 총선 후보등록 마감일인 1971년 5월 6일 갑자기 자신의 지역구인 서울 영등포 갑구 출마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를 등록함으로써 제1차 진산파동이 발생했다.[11] 유진산이 자기 지역구를 포기하고 전국구 1번 후보로 중앙선관위에 등록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중앙선관위 밖에 있던 일부 신민당 청년 당원들은 극도로 흥분하여 거센 항의를 계속하였고[11], 유진산은 자파 청년당원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봉변을 모면하였다.[11] 이에 불만을 품은 당내 소장층과 영등포 갑구 당원 등이 강력하게 반발하여 당수직 사퇴를 요구하는 사태로 벌어졌다. 이에 대해 신민당 비주류인 김대중은 6인 수권위원회의 구성원 중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등 3인과 협의해 유진산을 당에서 제명하고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는 수습안을 발표했다.[11]
71년 5월 8일 성명을 통해 "나는 이미 당수직 사퇴 뿐만 아니라 정계은퇴도 각오가 되어 있지만, 당수에게 선거구를 팔아 먹었다는 누명을 씌워 당권을 가로채겠다는 행위를 먼저 규명하고 제재를 가해야 한다."[11]고 선엄하면서 김대중의 당수권한대행 취임 기도를 강하게 비판했다.[11]
결국 사태는 제3자에 의한 중재를 통한 수습을 하게 되었다.[12] 이에 김영삼, 이철승, 김재광, 김형일, 이중재, 박영록 등 당 중진들은
- 유진산의 당수직 사퇴
- 당수직에 대한 다음 승계권자인 운영위원회 부의장 양일동 고흥문 홍익표의 사퇴
- 총선기간 중 김홍일 전당대회의장을 당수권한대행으로 한다.[12]
는 중재안을 제시했다.[12] 김대중은 이 중재안에 대해 처음에는 거부의사를 나타냈으나, 더 이상의 별다른 수습안이 없는 상태에서 결국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12] 이에 따라 신민당은 5월 10일 운영위원회를 열고 유진산과 양일동 등 운영위원회 부의장들의 사퇴서를 수리하고 김홍일을 신민당 당수 권한대행으로 임명한다.[12]
1971년 제1차 진산파동의 여파로 같은 구파인 김영삼에게 총재직을 주고 당 총재직에서 물러났다가, 1973년 다시 신민당 총재에 선임되었지만, 얼마 안가 제2차 진산파동으로 다시 총재직에서 내려와, 역시 얼마 뒤에 다시 당선되었다.
[편집] 사망
1972년 박정희가 유신을 선포하자 유신반대 국민 서명운동을 추진하였다. 1973년 전당대회에서 다시 신민당 당수로 당선되었고, 73년 가을 박정희와 박정희·유진산회담을 하였다. 이후 여당에 대한 타협, 화합론을 주장하다가 윤보선으로부터 사쿠라 라는 질책을 당했는데, 이후 사쿠라 라는 별명이 꼬리표처럼 따라다녔다.
1974년초 유신헌법개헌투쟁을 선언하고 나섰으나 병으로 실패했다. 1974년 4월 28일에 결장암으로 사망하였고, 5월에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1969 - 김수환 추기경 서임식 (로마 베드로 대성당)
교황 바오로 6세에게 추기경 반지를 받고 있다(로마 베드로 대성당, 1969. 4)
김수환 추기경 서임식 (로마 베드로 대성당)
1968년 5월 29일 명동대성당에서 교구장 착좌식이 엄숙히 거행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3월 교황 바오로 6세가 발표한 새 추기경 명단에 김수환 대주교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 탄생한 것이다. 추기경 서임식은 1969년 4월 28일 로마 베드로 대성당에서 열렸다. 당시 김 추기경의 나이는 47세로, 전 세계 추기경 134명 가운데 최연소였다. 교황을 보필하고 교황 선거권과 피선출권을 갖는 고위 성직자라는, 자리의 높고 낮음을 떠나 한국 교회가 세계 교회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크다는 반증이었기에 한국 천주교회 2세기만의 큰 경사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후 30년 동안 서울대교구장으로 재임하면서 두 차례에 걸쳐 한국 천주교 주교회의 의장을 역임했고, 주교회의 산하 여러 분과 위원장과 전국 단체들의 총재를 맡았으며, 1975년 6월 1일부터 평양교구장 서리를 겸했다. 또 1970년에는 아시아 천주교 주교회의 구성 준비 위원장으로 선출되었으며, 1967년 이후에는 한국 대표로서 여섯 차례에 걸쳐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김수환 추기경은 1998년 5월 29일 서울대교구장과 평양교구장 서리직을 사임한다. 서울대교구장을 맡은 지 30년, 목자 생활 47년 만이었다.
“1998년 서울대교구장직에서 물러날 때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다. 다른 사람들이 점수를 매긴다면 겨우 낙제점을 면할 정도겠지만 내 나름대로는 십자가를 지고 걷는 심정으로 살아왔다. 힘들고 지쳐서 그 십자가를 내려놓고 싶을 때도 많았다. 특히 1970년대와 1980년대 사회 격동기의 한가운데 있을 때,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조차 압력과 비난이 쏟아질 때는 한 사제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감수해야 하는 고통이 어떠했는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그럴 때마다 나를 사랑해 주시는 분들의 기도와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 내가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를 벗어 던지지 않고 끌고라도 갈 수 있었던 힘은 많은 이들의 기도에서 나왔다고 생각한다”
(평화방송·평화신문,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김수환 추기경 홈페이지
1969년]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 사임 ← 프랑스의 전쟁 영웅이자 대통령을 지낸 故 샤를 드골 프랑스 제5공화국의 초대 대통령 샤를 드골이 1969년 4월 28일 사임했다. 이날 실시된 국민투표에서 그가 제안한 지방자치제 개혁과 상원 개혁안을 52.42%의 국민들이 반대한 것이 사임 이유였다. 부결이 1965년부터 1972년까지 보장된 대통령직의 사임을 강제한 것은 아니었지만 10여일전 한 TV인터뷰에서 "그의 제안이 국민투표에서 거부된다면 사임하겠다"는 공언이 그를 사임하게 했다. 상원의장 알랭포에가 대통령 권한대행을 잠시 수행했으나 그해 6월 16일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조르주 퐁피두가 프랑스 제5공화국의 두 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1890년에 태어나 생시르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드골은 1차 대전 때 일선 장교로 참전했다 부상당해 독일군의 포로가 됐다. 2차 대전때는 기갑사단장, 국방차관직을 수행하다 파리가 독일군에 함락되자 런던으로 망명, 그곳에서 대독항전을 독려하며 레지스탕스를 조직했다. 1958년 6월 총리가 된 드골은 그 해 9월 28일 마침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시킨 제5공화국을 발족시켰다. 1958년과 1965년 연이어 대통령에 당선된 드골은 NATO 탈퇴 등 ‘위대한 프랑스’를 기치로 내걸며 미국의 패권주의에 맞섰고, 캐나다에서는 퀴벡의 독립을 부추겼다. 사임 1년뒤인 1970년 11월 9일 세상을 떠났다. /조선
1969년] 현충사 중건 준공 ← 현충사, 사적 제155호, 충남 아산시 염치면 백암리 역대 용장으로 가장 명성을 떨치신 이순신 장군의 424회 탄신일을 맞은 4월 28일에 이 분의 영정을 모신 현충사에서 동 사의 중건준공식과 아울러 기념행사를 거행한다. 이순신 장군은 선조 9년(1576년)에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임진왜란 때는 (1592년-1598년) 삼도수군 통제사로서 풍신수길이 총지휘하는 왜군을 남해 각 해상에서 포촉 섬멸하므로서 상륙한 왜군을 퇴각케하여 국운을 회복시켰다. 문무를 겸비한 이순신 장군은 세계 해전사상 처음으로 장갑선인 거북선을 전술적으로 구사하여 적의 대함대를 공격하였음은 특색있는 전적(戰績)으로서 널리 전해 내려오고 있다. 국가 존망이 목전에 처했음에도 사색당쟁(四色黨爭)에 영일(寧日)이 없던 조신들과는 달리 국가와 민족을 구한다는 일념으로 격전장에서 선두지휘하던 그 분은 오늘날 민족의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현충사는 충남 아산군 온양에 소재하며 그의 후손들이 관리하여 오던 중 최근 이 곳을 애국애족의 상징적인 구심점으로 삼아 조국 근대화의 대업을 성취하는 계기를 마련코자 사당을 중건하고 경내를 새로이 단장하여 우리나라 최초로 성역화하게 되었다.
1967년] 캐시어스 클레이(Cassius Clay, 무하마드 알리) 징병 거부
무하마드 알리가 1965년 5월 25일 미국 루이스턴에서 열린 세계헤비급 방어전에서 도전자 소니 리스톤을 링 위에 눕힌 뒤 오른손 주먹을 휘두르며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있는 유명한 장면 세계헤비급 챔피언 캐시어스 클레이가 텍사스주 휴스턴 징병국의 육군입대명령을 거부했다. 1967년 4월 28일 휴스턴 징병국에 출두한 클레이는 신체검사에서 합격했지만, ‘자신은 아랍 모슬림의 선교사’라며 정부가 일반 목사의 병역을 면제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은 징병을 거부한다는 의사를 표명했다. WBA는 즉각 클레이의 타이틀을 취소하는 등 클레이의 병역거부는 큰 파문을 일으켰다. 6월 휴스턴연방지구재판소는 클레이에게 5년의 금고와 1만달러의 벌금형을 판결했다. 한편 클레이는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반전운동과 흑인해방운동의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또한 클레이라는 이름 대신에 이슬람교도로 1964년부터 사용해온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됐다. /조선
1960 - 허정 과도내각 출범
1960년 오늘 허정 과도정권이 출범한다.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자 허정 외무부장관이 과도내각의 수반으로서 대통령권한대행을 맡았다. 두 달 뒤인 6월 15일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안이 국회를 통과하고 7월 29일 민의원,참의원선거가 실시돼 민주당이 압승한다. 허정 대통령대행은 8월 12일 민의원,참의원 합동회의에서 윤보선 대통령과 장면 국모총리를 선출할 때까지 과도정부를 이끌었다. /YTN
1960년] 이기붕 일가 자살 ← 제3대 민의원 의장을 지내던 때의 이기붕 부부 1960년 4월 28일 이기붕 일가가 장남 강석의 권총으로 자살했다. 같은 해 3월 15일에 실시된 정·부통령 선거에서 이기붕은 자유당 부통령 후보로, 장면은 민주당 후보로 나왔다. 이승만 정권의 강력한 견제세력이었던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죽자 이승만의 대통령 재선은 확실해졌고, 현직 부통령인 장면과 이승만의 세력인 이기붕과의 경합이 더욱 중요한 문제로 등장했다. 결국 온갖 부정과 투표 총계의 조작·날조로 이기붕이 840만 표를 얻어 부통령에 당선되었다. 민주당은 국회에서 선거의 무효를 주장했고, 3·15부정선거에 대한 학생·시민들의 거센 항의는 4·19혁명으로 이어져 전국적인 반정부시위가 계속되었다. 결국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인 내각이 물러나고, 이승만은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권력 아래 정치적 전횡을 일삼아 국민들의 원성을 샀던 이기붕 역시 부통령직을 사임하고 경무대에 피신해 있다가 전가족이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했다./브리태니커
[어제의 오늘]1960년 친일인사 박마리아 사망
ㆍ자유당 정권 때 ‘권력욕의 화신’
1960년 4월28일 경무대 별관. 육군 소위 이강석은 권총을 쥐고 가족들 앞에 나타났다. 4·19 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하고,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로 망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다. 부정선거로 당선된 부통령직에서 물러난 이기붕과 함께 있던 그의 친어머니 박마리아가 생의 마지막 순간에 어떤 말을 남겼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이강석은 부모와 동생 강욱을 모두 살해한 뒤 자결한 것으로 알려져있다. 박마리아는 ‘권력욕의 화신’으로 불렸던 여자다. 식민기간에는 친일인사였고 해방 후에는 남편 이기붕 뒤에서 정계를 쥐락펴락했다. 그는 가난한 농부의 외동딸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교회 전도사로 일하던 홀어머니 밑에서 생활고에 시달렸다. 허드렛일 품삯으로 연명하던 그는 민며느리로 들어가라는 주위의 권고를 물리치고 동네 목사의 주선으로 개성 호수돈 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해 이후 이화여전 영문과와 미국 석박사 등을 마쳤다. 귀국 이후 이화여전에서 잠시 교단에 섰던 그는 유학시절 만났던 10살 연상의 이기붕이 귀국해 재회하면서 1935년 그와 결혼했다. 이후 조선 YWCA에서 일제식민기의 대표적 여성지식인으로 활동하면서 친일행적이 본격화됐다. 박마리아는 김활란, 유각경과 함께 태평양 전쟁과 관련, 일본의 침략을 지원했고 1942년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에 가담했으며 각종 간담회에서 징병제에 호응하라고 촉구했다. 이후 그가 친일행위에 대해 반성했다는 기록은 없다. 영어가 유창했던 그는 해방 이후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의 비서를 지내면서 남편의 출세를 도모했다. 이기붕이 일제 말기 종로 국일관 지배인에서 이승만 정권의 2인자로 떠오르는 데에는 박마리아의 영향이 컸다고 한다. 남편이 대통령 비서실장, 서울특별시장, 국방부 장관 등을 지내고 자유당을 창당해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을 하는 동안 박마리아는 대한부인회 부회장을 자천해 선출되고, 이화여대 문리대 학장, YWCA 회장직에 오르면서 여성계에서 영향력을 확대했다. 이미 권력의 정점이나 다름없었지만 박씨의 욕망은 브레이크 고장난 전차와도 같았다. 권력욕 때문에 소생이 없던 이승만 부부에게 1957년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들여보내기도 했고, 1960년 남편이 부통령 후보에 지목되자 여성단체 조직을 선거 정치활동에 동원하면서 여성계의 반발을 샀다. 그의 동떨어진 현실인식은 당시 부정선거로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이어질 때 “신을 두려워할 줄 아는 국민이라야 위대한 국가를 건설할 수 있다”며 ‘종교교육’을 해법으로 내놓은 일화에서도 드러났다. 최민영 기자 min@kyunghyang.com /경향신문 2011-04-27 22:25:36
이기붕-사망
1960년 자유당의 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3·15 부정선거를 통해 부통령 선거에 당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하고 자유당, 국회의장직 마저 제명되었다. 4월 28일 경무대 별관에서 당시 육군 소위로 복무 중이던 아들 이강석(李康石)이 권총을 이용해 이기붕과 박마리아, 동생인 이강욱(李康旭)을 차례로 쏘아 죽이고 자살함으로써 그의 일가족들과 함께 자살했다. 이기붕 일가족 자살에 대해서는 의혹과 논란이 되었는데, 당시 경무대 경호실장 곽영주가 이승만의 하야를 막기 위해 여론을 무마시키고자 그를 비밀리에 살해했다는 설이 있다. 이는 많은 연구를 해야될 뿐 현재는 아무런 기록이 없다. /위키백과
1956 조선로동당 제3차 대회, 평화통일선언 채택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1) 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전조선 자유선거에 의한 연합정부 수립 2)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예속적 불평등조약 폐기 3) 남북조선 인민간의 상호접촉과 협상, 상설위원회 조직 4) 조선에서 평화유지와 조선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국제적 협상 체결
1955년] 독립운동가 이창용(李昌用) 사망 1910. 3. 12 황해 신천~1955. 4. 28. 아버지는 광희(光熙)이다. 1931년 4월 베이징[北京]에서 손기업(孫基業)·이상일(李尙逸)·박민항(朴敏杭) 등이 일제 밀정과 고관을 암살하기 위해 조직한 조선혁명당총연맹(朝鮮革命黨總聯盟)에 가입했다. 1932년 10월 손기업 지휘하에 박민항·최윤식(崔潤植)과 같이 톈진[天津]의 일본 조계를 습격했다.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박민항·최윤식과 더불어 만주 일본전권대사 무토[武藤信義]를 암살하고, 관동군사령부를 폭파하기 위해 펑톈[奉天]에 파견되었다. 중국 구국군(救國軍) 장쉐량[張學良]의 협조로 폭탄을 확보하고 거사자금 7,000원을 마련하여 박민항 등과 함께 창춘[長春]·펑톈 등지를 전전하면서 무토의 암살기회를 엿보다가 창춘 중앙여관에서 무기가 발각되어 일본헌병대에 체포되었다. 1933년 5월 창춘 일본군법회의에서 징역 10년의 언도를 받고 뤼순[旅順] 형무소에서 복역한 후 만기 출옥했다. 1963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브리태니커
1952 - 대일강화조약-미일안보조약 발효
미-일 안전보장조약 발효 - 미 극동군 사령부 해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되어 연합국의 일본 점령이 끝나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영어:Treaty of Peace with Japan, 일본어:日本国との平和条約) 은 1951년9월 8일미국샌프란시스코전쟁기념 공연예술 센터에서 맺어진 일본과 연합국 사이의 평화조약이다. 대일강화조약 (對日講和條約) 이라고도 불린다. 1952년4월 28일에 발효하였다.
이 조약을 맺음으로서 제2차 세계 대전의 공식적인 종전을 선언하였으나, 전쟁 피해국가인 한국과 중국의 참여가 배제되었다는 문제점이 있다. 일본은 이 조약의 영토 반환 목록에 한국의 독도가 없다는 사실로 독도에 대해 지속적인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다. /위키백과
1950 - 풀브라이트 한국장학재단(한미교육위원단 KAEC) 창립
윌리엄 풀브라이트 /조선
풀브라이트 한국장학재단(한미교육위원단 KAEC) 창립
1950년 4월 28일 한미간의 교육교류를 위한 풀브라이트 한국장학재단이 창립됐다. 1945년 `전쟁수익금으로 타 국가와 교육교류를 하자`는 법안을 제출한 미국 아칸소주 상원의원 윌리엄 풀브라이트의 이름을 딴 풀브라이트 장학재단은 현재 전세계 1백30여국에서 운영되고 있다.
한국장학재단은 1950년 창립됐으나 한국전쟁의 발발로 1960년에서야 1기를 선발할 수 있었다. 풀브라이트는 1942년 초선 하원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해 국제연합 창설의 모태가 된 국제평화유지기구의 창설을 제안하였으며, 1945년 상원에 진출해 1974년까지 상원의원을 지냈다. 1959년 이후 15년간 상원 외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미국의 대외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인물이기도 하다. /조선
1945년] 무솔리니 처형 1945년 4월 28일 이탈리아 파시즘을 이끈 베니토 무솔리니가 정부 클라레타 페타치와 함께 처형되었다. 1940년 이탈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이 전쟁에서 무솔리니는 자신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그리스를 침공하는 등 무모한 전투를 시도했으나 참패했다. 1943년 연합군이 시칠리아 상륙에 성공하자 무솔리니는 총리직을 박탈당하고, 아브루치 지역에 있는 그란사소디탈리아의 한 호텔에 유폐되었다가 독일 특공대의 도움을 받아 뮌헨으로 탈출했다. 그는 북부에 새로운 파시스트 정부를 수립했으며, 치아노를 비롯한 대평의회 반역자들을 처단하자는 히틀러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1945년 독일군 방어선이 무너지자 파르티잔 지도자들은 무솔리니의 처단을 결의했고, 무솔리니는 인스부르크로 퇴각하는 독일군 트럭에 숨어 있다가 발각되어 사살되었다./브리태니커
← 무솔리니(가운데)와 그의 정부(情婦) 클라라 페타치는 처형 후 밀라노 로레타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일반에 공개됐다. 서쪽과 동쪽에서 각각 진격해 들어온 미군과 소련군이 독일 엘베강 중류 토르가우 부근에서 감격적인 악수를 교환함으로써 2차대전도 사실상 마침표를 찍은 1945년 4월 25일.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독재자 무솔리니가 정부(情婦) 클라라 페타치와 함께 밀라노를 탈출한다. 목적지는 스위스. 그러나 둘은 스위스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탈출 이틀 만에 이탈리아 북부 코모 호수 근처에서 파르티잔에 체포돼 좀더 살아보려던 꿈도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살려만 주면 제국을 주겠다”며 목숨을 구걸했으나 용서받기에는 그가 인류에 끼친 악행이 너무 컸다. 27일 약식재판을 거쳐 총살형에 처해졌고 시체는 28일 밀라노의 로레타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군중 앞에 공개됐다. 이틀 뒤에는 히틀러도 애인 에바 브라운과 함께 자살을 선택한다. 무솔리니·히틀러에 앞서 4월 12일 미국 대통령 루스벨트도 세상을 떠 2차대전의 주역 네 사람 중 처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2차대전의 결말을 보지 못한 채 모두 세상을 떠났다./조선
1928년] 프랑스의 화가 클라인(Klein, Yves, 1928~1962) 출생 "청색은 바다와 하늘을 우리에게 상기시킨다. 만질 수 있고 볼 수 있는 자연세계에서 가장 추상적인 것이 바로 그것이다." - 이브 클라인 니스 출생. 누보 레알리슴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1958년 ‘허공’전시회를 열어 화제를 모았고, ‘인터내셔널 클라인즈 블루’라 이름 지은 푸른 하늘, 깊은 바다의 색조를 즐겨 썼으며, 금박(金箔)·불·물·공기 등 그리스의 철학적 원소를 사용하였다. 또 페인트를 칠한 여자들의 나신(裸身)을 캔버스에 굴려 그림을 그렸고, 그 자신이 2층집에서 뛰어내리는 ‘허공의 극장’을 연출하는 등 ‘예술의 혁명’을 지향한 기행(奇行)으로 짧은 생애를 마쳤다. 1995년 1월 말까지 독일의 쾰른(루트비히 박물관)과 뒤셀도르프(노르트라인 베스트팔렌 미술관)에서 열린 이브 클라인의 1차 순회전시는 그의 실험정신을 그대로 전한다. 작품활동은 불과 8년이나 그의 이념과 작업은 요셉 보이스를 비롯한 현대의 행위예술·팝아트·미니멀리즘 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naver
1926 독립운동가 송학선(宋學先 1893 - 1927]) 의거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 제등齋藤 實) 암살미수,
*독립운동가. 서울 출생. 집안이 가난하여 보통학교를 중도에 그만두고 방랑생활을 하다가 1909년 일본인이 경영하는 오쿠다농구회사[奧田農具會社]에 고용되었으나 병으로 실직하였다. 안중근(安重根)의 의거 후 항일운동을 결심하고 기회를 기다리던 중,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사살하기로 결심하였다. 26년 4월 26일 순종이 죽자 사이토가 조문하기 위하여 창덕궁으로 올 것을 예상하고, ★4월 28일 금호문(金虎門)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경성부의원 다카야마 고코[高山孝行]·사토 도라지로[佐藤虎次郎]·이케다 조지로[池田長次郎] 등이 탄 차를 총독의 차로 오인, 뛰어올라 살해하였다. 현장에서 붙잡혀 다음해 사형되었다. 62년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출처:엠파스백과 100.empas.com)
1920년] 영친왕, 일왕족 마사코와 정략결혼 ← 1920년 4월 28일 영친왕과 마사코 여사의 혼인 기념사진. 1920년 4월 28일, 조선조의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英親王)이 일본 왕족 나시모토(梨宮)의 장녀 마사코(方子)와 일본 도쿄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일제가 왕실규정을 고쳐가면서까지 둘의 결혼을 고집한 것은 양국간 잡혼(雜婚)을 통한 내선융합(內鮮融合) 정책 때문이었다.
고종과 귀비 엄씨 사이에서 태어난 영친왕 이은(李垠)은 조선조 마지막 왕 순종의 이복동생이다. 1900년에 영왕(英王)으로 봉해지고 1907년에 황태자로 책봉됐으나 그해 말 이토(伊藤) 조선 통감에 의해 유학이라는 명분으로 일본에 인질로 잡혀가 1910년 국권상실과 함께 왕세제로 격하됐다.
마사코는 원래 일본 왕세자 히로히토(裕仁)의 비로 간택됐으나 임신불능 판정을 받아 조선 왕실의 절손(絶孫)을 노린 일제에 의해 조선 왕족의 세자비로 자리바꿈했다. 히로히토는 4년 뒤 마사코의 사촌인 나가코(良子)와 결혼한다.
영친왕이 결혼한 이날, 서울에서는 한 여인이 눈물짓고 있었다. 1904년에 영친왕의 비로 간택됐으나 일제의 회유와 협박을 이기지 못하고 1918년에 강제파혼당한 민갑완이라는 여인이었다. ‘왕세자의 약혼녀’로 정절을 지키던 민씨는 영친왕이 서거(1970년)한 뒤 못다 이룬 사랑의 한을 품고 1973년 쓸쓸히 생을 마쳤다.
영친왕의 정략 결혼은 1920년 3월 5일 창간 직후의 조선일보에도 뜻밖의 피해를 안겼다. 결혼식 날 조선일보는 영친왕의 결혼소식과 함께 민씨의 강제파혼 전말을 소개했는데 이 기사가 조선총독부 눈에 거슬려 압수됐던 것. 창간 50여일 만에 이뤄진, 일제 치하 조선일보 최초의 압수기사였다./조선
1916 - 원불교 창시자 박중빈 `대각(大覺)`
1916 - 원불교 개교 - 10월 11일에서~
소태산 대종사 박중빈(少太山 大宗師 朴重彬, 1891년 5월 5일 - 1943년 6월 1일)은 원불교의 창시자이다.
1891년 전라남도 영광군 길룡리에서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7세부터 자연현상과 인생에 대하여 특별한 의문을 품고, 20여년간 구도고행을 계속하여 마침내 1916년 4월 28일, 큰 깨달음(大覺)을 이루었다고 주장하였다. 위의 날짜는 원불교의 개교일이다.
이후 박중빈은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주창하고 먼저 미신타파, 문맹퇴치, 저축조합 운동을 했다.
새회상 창립의 경제적 기초를 세운 2만 6천 여평의 정관평 방언공사와 인류구원을 위한 혈성(血誠)의 기도로 법계의 인증을 받은 법인성사, 법신불 일원상을 최고의 종지(宗旨)로 삼아 교리와 제도를 제정한 봉래제법 등을 하며 원불교를 만들었다. 교단의 중심지로 익산에 총부를 건설하였다.
1943년 6월 1일,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위키백과
원불교 대각개교절 (4월 28일)
대각개교절은 교조인 소태산(少太山) 박중빈(朴重彬·1891~1943) 대종사가 깨달음을 얻은, 원불교 창교일. 전통의 종교들이 창시자의 생일을 최고의 축일로 기리지만 원불교는 창교자가 깨달음을 얻은 날을 최고 경축일로 삼고 있다.
1896년]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 나혜석 출생 ← 한국 최초 여성 서양화가이자 여성운동가인 나혜석. 한국 근대여성사를 축소해 놓은 듯한 삶을 살다간 나혜석이 1896년 4월 28일 경기도 수원에서 양반 관료의 딸로 태어났다. 국내 첫 여성 서양화가, 문필가, 페미니스트, 독립운동가 등 다양한 이력이 설명해 주듯 그는 한국 근대 여성사와 궤적을 함께 할 만큼 활동범위가 넓었다. `여성도 인간이외다`라는 나혜석의 외침은 당시의 지배질서와 이데올로기에 대한 일대 선언이었고 도전이었다.
진명여학교를 평균 99점의 우등성적으로 졸업하고 1913년 동경여자 미술전문학교에 입학,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가 된 나혜석은 유학중 조선여자 친목회를 조직, `여자계`를 출간하는 등 활발한 문필활동을 했고, 페미니즘 운동에도 참여했다. 1918년에 열었던 국내 첫 서양화 개인전은 당시로서는 큰 화제가 됐다. 경성일보사 내청각에서 열린 이 전시에는 당시 5천명의 인파가 몰렸고 평균 월급이 20원에도 미치지 못하던 시절에 작품 `신춘`이 3백50원에 팔리는 등 성황을 이뤘다. 3.1운동에도 가담해 옥고를 치렀고, 의열단 사건에도 연루되는 등 그는 독립운동에도 적극성을 보였다.
문학분야에서도 탁월한 기량을 보여 1918년에 발표한 자전소설 `경희`는 국내 첫 페미니즘 문학으로 평가받았다. 그러나 그를 유명하게 한 것은 화가나 여성운동가로서의 족적보다는 자유연애와 이혼으로 이어지는 파란의 삶이었다. 후일 1920년 외교관이 된 김우영과 결혼해 유럽과 미국 등지를 여행했던 그는 파리에 체류하며 프랑스의 인상주의를 배우는 등 화풍의 변화를 겪었지만 최린과의 염문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1931년 35살의 나이로 이혼당한 나혜석은 1934년에 발표한 ‘이혼고백서’와 최린 상대의 제소장으로 사회적 이단아로 몰려 산사를 오가는 생활 끝에 1948년 12월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사회의 냉대와 경제적 어려움이 원인이 된 신경쇠약증세로 고생하다 서울의 한 시립병원 무연고자 병동서 52세 나이로 쓸쓸히 숨을 거둔 것이다./조선
1896 국어학자 일석 이희승 태어남
이희승( 李熙昇, 1896~1989)의 본관은 전의( 全義)이고 호는 일석( 一石)이다. 국어국문학자로 의왕시 포일동( 浦一洞) 87-13번지에서 태어나 5세 때까지 살다가 1900년 어머니와 함께 상경하였다. 이후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고 ‘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서울대학교 교수로 재직하면서 우리나라의 국문학 발전에 노력하였다. 생가는 목조( 木造)에 슬레이트지붕을 얹은 평범한 ‘ㅁ’자형 집으로 건축학적으로 특기할 만한 사항은 없으나, 당시 의왕시 농가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유적으로 평가된다. 규모는 대지면적 1,260㎡, 건축면적 152㎡, 총면적 152㎡이며 1896년(고종 33)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1896년] 작가·승려 김일엽(金一葉, 김원주) 출생 1896. 4. 28 평남 용강~1971. 2. 1. 이성에 대한 그리움이 담긴 한 맺힌 시를 쓰다가 불교에 귀의하면서 선시(禪詩)를 썼다. 본명은 원주(元周). 일명 하엽(荷葉)·백연도엽(白蓮道葉). 목사의 맏딸로 태어났고 일엽이라는 이름은 이광수가 지어주었다. 하엽은 불명(佛名), 백연도엽은 만공선사가 하명한 도호(道號)이다. 9세 때 신학문의 길로 들어서 진남포 삼숭여학교, 이화학당에서 공부했고 일본 닛신[日新]학교에 다니면서 신학문운동과 여성운동을 했다. 결혼에 실패한 뒤 분방한 사생활과 자유연애에 환멸을 느끼고 속세와 인연을 끊고 만공선사가 있던 충남 예산 수덕사에서 불도를 닦았다. 12세 때 〈동생의 죽음〉이라는 신체시를 썼고 이화학당 시절 '이문회'(梨文會] 활동을 했다. 25세에 〈신여자〉를 창간했으며 나혜석·김명순 등과 자유연애와 여성해방을 부르짖었다. 남편과 이혼 뒤에 1920년 10월 YMCA에서 여성교육과 사회문제에 대한 강연을 했으며 〈폐허〉 2호에〈먼저 현상(現象)을 타파하라〉등의 글을 발표했다. 〈신민공론〉의 편집동인이었고 〈혜원〉(신민공론, 1921. 6)·〈단장〉(문예시대, 1927. 1) 등의 단편을 발표했다. 〈오도송 悟道頌〉·〈절구〉등에서 사물·중생을 자신과 하나로 보는 좌선(坐禪)의 미학을 보여주었다. 수필집 〈청춘을 불사르고〉(1962)·〈어느 수도인의 회상〉(1965) 등을 펴냈다./브리태니커
1894 동학군 전주 점령
잘못된 정치와 행정을 일삼던 벼슬아치를 나무라며 시작한 동학농민운동의 투쟁의 자취가 남아 있는 곳으로 동학군이 전주성을 점령하는 계기가 된 황룡전투의 전적지이다.1894년 동학농민군은 전주 점령 계획을 세우고 가장 좋은 장소로 황룡을 선택했다.총알을 막을 수 있도록 대나무를 원통모양으로 엮어 만든 장태라는 신무기를 이용하여 동학농민군은 이 지역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주를 점령하였다.1994∼97년 장성군에서 이곳에 승전기념공원을 비롯해 여러 시설물을 갖추어 놓았다.주위 경관도 어울리게 꾸미고 있으며, 근처에 경군대장이었던 이학승의 뜻을 기리기 위해 세운 순의비도 볼 수 있다.살아 있는 교육장으로서 역사와 시대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이곳은 집강소를 설치하여 농민 통치기반을 마련했던 곳으로도 뜻깊은 유적이다.
1876년] 영국 의회,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도황제 칭호를 줌 ← 1837년 즉위식 당시의 빅토리아 여왕 1837년 6월 18세의 나이로 영국여왕이 되었다. 그런데 하노버가에서는 여자의 왕위계승을 인정하지 않았으므로 이 시점에서 1714년 이후 계속되던 영국 하노버의 동군연합(同君聯合)은 없어졌다. 동군연합이란 각각 별개의 두 나라가 서로 독립을 침범하지 않고 동일한 군주를 추대하여 연합해 있는 것으로, 영국에서는 몇 번 있었다. 1840년 2월에 외사촌인 작센 코부르크 고타공가의 앨버트와 결혼하였다. 1841년에는 황태자(나중의 에드워드 7세)가 태어났고, 또 몇몇 자녀를 얻었다. 여왕은 널리 국민의 존경을 얻은 현모양처로서 행동하였고, 떨어져 있던 왕가의 평판을 회복하였다. 남편인 앨버트는 공적인 면에서도 여왕의 좋은 협력자가 되어 정당제가 혼란하였던 1840∼1850년대에 정치면에서 여왕을 보좌하는 한편으로 1851년의 런던세계박람회를 성공시키는 등 과학기술과 예술의 진흥에도 힘썼다. 1861년 앨버트가 병으로 죽자, 그 후 여왕은 공적인 무대에 등장하는 것을 피했으나, 정치에는 강한 관심을 계속해서 가졌다. 자유당의 W.E. 글래드스턴을 싫어하였고, 보수당의 B. 디즈레일리를 총애하였다. 그리고 디즈레일리의 정책을 지지하여 1876년에는 인도 여제(女帝)도 겸하였다. /yahoo
1871 대원군 전국 서원 철폐
서원은 우리나라의 선현을 배향하고 유생들을 가르치던 조선의 대표적인 사학교육기관으로, 1543년(중종 38) 풍기군수 주세붕이 설립한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 그 효시이다. 그 뒤 풍기군수로 있던 이황이 조정에 사액(賜額)과 전토(田土)를 주도록 건의함에 따라, 1550년(명종 5) 백운동서원에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액(額)을 내린 것이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시초이다. 초기의 서원은 인재 양성과 선현 배향, 유교적 향촌 질서 유지 등 긍정적인 기능을 발휘하였으나 차츰 혈연·지연 관계나 학벌·사제·당파 관계 등과 연결되어 병폐도 많았다. 그리하여 지방양반들이 서원을 거점으로 백성들을 토색질하고 지방관청에 피해를 준다는 이유로, 설립이 제한되고 훼철을 명령받기도 하였다. 1703년(숙종 29) 서원을 사사로이 설립하는 경우 그 지방의 관리를 벌하고 이를 주도한 유생은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서원금령이 내려졌고, 1713년에는 1714년 이후부터 서원의 설립을 금하고 사액을 내리지 않을 것을 결정했다. 그후 1741년(영조 17)에 1714년 이후 건립된 서원을 조사하여 훼철하게 했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서원 건립은 거의 중단되었으나, 기존의 서원은 그 폐단이 더욱 심해졌다. 이에 1864년(고종 1) 집권한 흥선대원군은 왕권의 권위를 높이고 민폐를 줄이는 한편 병인양요로 궁핍한 국가재정에 도움이 되게 하려는 의도로 서원철폐 작업을 벌였다. 첫 단계로 첩설(疊設)·사설(私設) 서원을 조사하여 폐지하고 서원의 경제적 기반을 조사하여 불법적인 것은 국가에 환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듬해인 1865년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송시열이 창건한 만동묘와 화양서원에 철폐 명령이 내려졌다. 1868년에는 서원에 하사한 토지도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고, 지방 수령이 서원의 장을 맡도록 했으며, 1870년에는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서원은 사액서원이라도 훼철하도록 하였다. 이 조처로 전국 650개 서원 중 소수서원·도산서원·도동서원 등 사표가 될 만한 47개의 서원만 남겨지고 나머지는 모두 훼철되었다.
1686년] 뉴턴(Newton, Sir lsaac), 만유인력 법칙 발표 1679년 경 뉴턴은 행성 운동과 연관하여 역제곱 법칙을 언급하는 편지를 후크로부터 받았다. 뉴턴은 이 편지를 받고 이런 내용이 자신이 젊었을 때 가졌던 생각과 유사하다고 느꼈고, 이 역제곱 법칙을 행성운동을 해결하는 데 본격적으로 이용할 생각을 하게 된다. 당시 핼리 (Edmond Halley, 1656-1742)는 후크와 함께 역제곱 법칙을 이론적 바탕으로 해서 행성의 운동을 해결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 작업을 성공시킬 수 없었다. 뉴턴이 역제곱 법칙을 바탕으로 해서 행성의 운동 문제를 해결했다는 소문에 접한 핼리는 1684년 8월 케임브리지의 뉴턴을 방문했다. 핼리는 뉴턴의 이 '발명'을 보다 분명히 하기 위해 이것을 작은 책으로 출판하도록 뉴턴에게 권유했다. 핼리의 권유를 받은 뉴턴은 처음에는 『운동에 관해서』라는 작은 논문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왕립학회로부터 출판 약속을 받은 뒤 뉴턴은 이보다 더 긴 분량의 책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뒤 18개월 동안 집필에 전념한 뉴턴은 1687년 고전역학의 완성판이라고 불리는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 혹은 『프린키피아』 라는 3권의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 1686년 왕립학회에 『프린키피아』 제 1권의 완성된 원고가 접수되었을 때, 후크는 뉴턴이 자신의 생각을 표절했다고 주장했다. 아마도 당시 쇠락해가던 후크로서는 뉴턴이 자신의 책에서 후크도 역제곱 법칙에 관한 생각을 했다는 사실만을 인용해주는 정도로도 만족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광학에 관한 글에서 후크와 격렬한 논쟁을 한 쓰라린 경험이 있었던 뉴턴은 이 정도의 아량도 보여주지 않았다. 후크의 표절 주장에도 불구하고 뉴턴은 자신의 원고를 계속 집필해갔으며, 심지어 자신의 원고에서 후크에 대한 거의 모든 인용을 삭제해버렸다. 후크에 대한 뉴턴의 분노는 이에 그치지 않았다. 뉴턴은 후크가 죽기 전까지는 자신이 이미 집필한 광학에 관한 책을 출판하지 않았으며, 왕립학회의 회장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1617 (조선 광해군 5) 의병장 곽재우 세상 떠남
조선 중기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으로 본관은 현풍( 玄風), 자는 계수( 季綏), 호는 망우당( 忘憂堂)이다. 아버지는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곽월( 郭越)이며, 어머니는 진주강씨( 晉州姜氏)로 경상남도 의령( 宜寧)에서 출생하였다. 1585년(선조 18) 별시( 別試) 문과에 급제하였으나 답안지에 왕의 뜻에 거슬린 글귀가 있었기 때문에 파방( 罷榜)되었다. 이 일로 과거를 포기하고 은거하다가 1592년 4월 1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 왕이 의주( 義州)로 피난하자 같은 달 22일 제일 먼저 의령에서 수십명의 사람들을 모아 의병을 일으켰다. 의병의 군세는 더욱 커져 2천에 달하였고, 5월에는 함안군을 수복하고 정암진( 鼎巖津:솥바위나루) 도하작전을 전개한 왜병을 맞아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이때 홍의( 紅衣)를 입고 선두에서 많은 왜적을 무찔렀으므로 홍의장군이라고도 불렸다. 조정에서는 이 공을 인정하여 그해 7월 유곡찰방( 幽谷察訪)에 임명하였다가 다시 형조정랑을 제수하였다. 10월에는 절충장군( 折衝將軍)으로 승진하여 조방장( 助防將)을 겸임하다가 성주목사( 星州牧使)에 임명되어 악견산성( 岳堅山城) 등 성지를 수축하였다. 또한 1차 진주성전투에 휘하의 병사들을 보내어 김시민(金時敏) 장군이 승리하는데 조력하였다. [임진왜란 때 관군과 의병의 활동] 1595년 진주목사에 임명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가 1597년 정유재란 때 경상좌도방어사( 慶尙左道防禦使)로 임명되어 다시 벼슬길에 나아가 화왕산성( 火旺山城)을 수비하면서 왜장 가토( 加藤淸正)군을 맞아 싸웠다. 이후 계모의 상을 이유로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창암진( 蒼巖津) 강가에 망우정( 忘憂亭)을 짓고 은둔하고 있다가 1604년(선조 37) 찰리사( 察理使)에 임명되어 인동( 仁同)의 천생산성( 天生山城)을 보수하였고, 10월에는 가선대부용양위상호군( 嘉善大夫龍驤 衛上護軍)에 임명되었다. 이후 또 다시 낙향하였다가 1610년( 광해군 2년) 광해군의 간청으로 오위도총부의 부총관을 역임하였고, 이어 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612년 전라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 1613년(광해군 5)에는 영창대군( 永昌大君)을 신구( 伸救)하는 상소문을 올린 후에 다시는 벼슬길에 나오지 않았다. 그는 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한성부 좌윤 등 여러 차례에 걸쳐 관직제수를 거부하고 낙향을 거듭하였는데 당쟁으로 나라의 형편이 날로 어지러워질 뿐만 아니라, 통제사 이순신( 李舜臣)이 죄없이 잡혀 올라오고, 또 절친한 사이인 광주의병장 김덕령( 金德齡)이 이몽학(李夢鶴)의 난에 휘말려 죽는 등의 일련의 사태를 보고 더 이상 관직생활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1709년(숙종 35) 병조판서겸 지의금부사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익( 忠翼)이다. 저서로는 《망우당집》이 있다. 그의 묘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신당리에 있고, 그의 사우( 祠宇)에는 예연서원( 禮淵書院)이라는 사액이 내려졌다.
1545년] 충무공 이순신 장군 출생 ← 이순신 영정, 이상범이 제작했으며 1932년 6월 현충사 중건 때 봉안되었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어디서 일성호가는 나의 애를 끊나니." - 이순신 이순신은 임진왜란을 맞아 크게 활약한 조선 선조 때의 장군이다. 시호는 충무이다. 서울에서 태어나 1576년 무과에 급제한 뒤 낮은 벼슬에 있었으나, 1589년 유성룡의 추천으로 고사리첨사로 승진했다. 1591년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임명된 이후 왜적의 침입에 대비하고자 거북선을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사천·당항포·한산도 등지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러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원균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으나, 원균이 칠천량에서 적에게 크게 패하자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전선들을 재정비해 남아 있는 함선 12척으로 명량해협에서 130여 척의 왜군 함대를 물리쳤다(명량대첩). 이듬해에 적이 500여 척의 배로 철수 작전을 시작하자, 명나라 수군과 함께 노량 앞바다에서 적을 무찌르던 중 유탄에 맞아 전사했다(노량해전). 시문에도 뛰어나 <난중일기>와 여러 편의 시조·한시 작품을 남겼다. 아산의 현충사, 충무의 충렬사 등에 그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브리태니커
1467년] 원각사 13층탑 완성 서울특별시 종로구 탑골(파고다)공원에 있는 원각사지 십층석탑(圓覺寺址十層石塔)은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2호로 지정되었다. 높이 약 12m이다. 이 탑보다 약 120년 전에 만들어진 고려시대 경천사(敬天寺) 십층석탑(국보 86)을 모방하여 만든 탑이다. '아(亞)' 자형의 3층 기단, 이와 같은 평면의 3층 탑신, 네모꼴로 된 4층 이상의 탑신이 경천사 십층석탑과 기본적으로 같다. 탑신부는 층층이 아름다운 기와집을 모각하여 기둥·난간·공포(? 包), 지붕의 기와골까지 섬세한 수법이다. 옥신(屋身)에는 수많은 부처 ·보살상 ·천인(天人) 등과 구름·용·사자·모란·연꽃·인물·새·선인(仙人) 등이 새겨져 있다. 조선시대 석탑으로는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우수한 조각솜씨를 보여주는 세련된 석탑이다. 1465년(세조11) 현재의 탑골공원 자리에 원각사가 세워졌으며 1467년(세조 13)에 십층석탑이 건조되었다. 맨 위 3층은 오랫동안 무너져 내려져 있던 것을 1947년에 원상태로 복구하였다. /naver
1406 (조선 태종 6) 덕수궁 창건
조선조의 덕수궁 조선조에는 두 곳의 덕수궁이 있었다. 하나는 건국 초에 있었고 또 하나는 대한제국 말에 있었다. 덕수궁이라는 명칭은 선왕(先王, 上王)이 머무는 궁이라는 뜻의 일반명사이다. 국초의 덕수궁은 개성에 창건되었다. 태조는 한양천도로 인심을 잃어 정종에게 양위하였고 정종은 민심의 수습책으로 개성으로 다시 돌아가야 했다. 정종은 상왕인 태조를 위해 정종2년(1400) 6월에 개성에 덕수궁을 지었다. 태조는 덕수궁에 머물면서 중국의 사신을 맞이하는 등의 대외활동을 하였다. 태종이 즉위한 뒤 한양으로의 천도가 이루어지자 창덕궁과 함께 덕수궁 짓는 일도 시작하였다. 공사는 태종6년(1406) 4월에 완공되었다. 태조는 그 신궁에서 중국의 사신을 접견하기도 했다. 고종의 덕수궁은 조선조가 멸망되기 직전의 왕궁이 되었다. 그러나 고종이 승하하자 공궐이 되었다.
32년 - 로마 제국 7대 황제 오토 출생
마르쿠스 살비우스 오토(Marcus Salvius Otho, 32년~69년)는 로마 제국의 일곱 번째 황제이다. 그가 자신이 살해한 갈바에 이어 69년 4월 16일에 자살함으로써 69년에 죽은 두 번째 황제가 되었다.
생애
오토는 32년 4월 28일 에트루리아 남부에 있는 페렌티엄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귀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의 할아버지는 원로원으로부터 에퀴스트리안의 직위를 임명받았으며 집정관까지 되었다.
오토는 네로 황제의 신임을 받았으나 네로가 그의 아내 사비나와 사랑에 빠짐에 따라 신임을 잃어 루시타니아의 총독으로 보내졌다. 오토의 사랑을 시기한 네로는 사비나를 자신의 아내로 삼았다.
갈바가 네로정권을 뒤집고자 세력을 구축하자 그를 지지한 오토는 네로의 종말에 한 몫을 했다. 예전부터 권력을 원했던 그는 자신이 군인들에게 인기가 있음을 이용하여 갈바와 그의 후계자 피소를 죽이고 권력을 손에 쥐게 되었다. 그는 곧 원로원의 투표에 의해 네로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지 3개월 후 비텔리우스가 다시 내란을 일으키고 초기 진압에 실패한 오토는 자신의 침대에서 자살을 함으로 내란으로 나라가 혼란에 빠지는 것을 막았다. 그는 황제 시절엔 원로원으로부터 의심의 눈초리를 받았지만 그의 뜻 깊은 죽음으로 그의 위상이 회복되었다. /위키백과
B.C.57 신라 시조 박혁거세, 왕위에 오름
박혁거세 신화】 삼국유사 권1 기이, 신라 시조 혁거세왕
진한 땅에 옛날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
그 첫째의 것이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이니, 남쪽의 지금 담엄사 일대에 위치했었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알평(謁平), 그는 하늘에서 표암봉으로 내려왔다. 이 알천 양산촌의 우두머리 알평이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그 둘째 것이 돌산 고허촌(突山高墟村)이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소벌도리 (蘇伐都利). 그는 하늘에서 형산으로 내려왔다. 이 돌산 고허촌의 우두머리 소벌도리는 사량부(沙梁部) 정씨의 조상이 되었다. 이 사량부를 지금은 남산부라고 하며 구량벌, 마등오, 도북, 회덕 등의 남쪽에 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그 셋째의 것은 무산 대수촌(茂山大樹村)이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구례마 (俱禮馬: '俱'자 대신에 '仇"자를 쓰기도 함)인데, 그는 하늘에서 이산(伊山: 계비산이라고도 함)으로 내려왔다. 이 무산 대수촌의 우두머리 구례마는 점량부(漸梁部)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라고 하여 박곡촌 등의 서쪽에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그 넷째의 것은 취산 진지촌(嘴山珍支村)이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지백호 (智伯虎)다. 그는 하늘에서 화산(花山)으로 내려왔다. 이 취산 진지촌의 우두머리 지백호는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통선부라 하여 시파 등의 남동쪽에 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이 바로 본피부의 사람이었다. 지금도 황룡사 남쪽에 있는 미탄사 남쪽에 옛터가 있어 그것이 문창후(文昌候) 최치원의 옛날 살던 집터라고들 말하고 있으니 거의 틀림이 없다.
그 다섯째의 것은 금산 가리촌(金山加里村 금강산 백률사의 북산 일대다. 여기 금강산은 경주 북쪽에 있는 산을 가리킴)이다. 이 금산 가리촌의 우두머리 지타('祗陀'로도 씀) 한기부(韓岐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라고 하여 상서지 ·하서지 ·내아 등의 동쪽에 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그 여섯째의 것은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이다. 이 마을의 우두머리는 호진(虎珍), 그는 하늘에서 금강산으로 내려왔다. 이 명활산 고야촌의 우두머리 호진은 습비부(習比部) 설씨 (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라 하여 물이촌 ·잉구미촌 ·궐곡('葛谷'이라고도 씀) 등의 동북쪽에 있는 마을들이 이에 속한다.
이상 6촌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들 6부의 조상이 모두 하늘로부터 내려온 것 같다. 노례왕(삼국사기에는 '유리 이사금(儒理泥師今)'으로 되어 있다. 그 즉위 9년은 A.D.32년이다) 즉위 9년에 비로소 6촌을 6부로 개정하여 그 명칭을 고치고, 그리고 여섯 가지 성을 각각 내려 주었던 것이다.
오늘날 그곳 풍속에 중흥부를 어미라 하고, 장복부를 아비,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고 하는데 그 연유는 자세하지 않다.
중국 전한의 선제 (宣帝) 5년(B.C. 69) 3월 초하룻날에 있었던 일이다.
【고본에는 건무 원년이라 하고, 또는 건원 3년 등이라고 하나 모두 잘못이다 여기서 건무는 후한 광무제의 연호로 그 원년은 AD. 25년, 건원은 전한의 무제 연호로 그 3년은 B.C. 138년이 된다】
6부의 조상, 즉 6촌의 우두머리들은 각기 그 자제들을 데리고 알천가 언덕에 모였다. 회의를 하기 위해서다. 그들은 한결같이 말했다.
"우리에겐 위에 군림하여 백성을 다스려 갈 군주가 없다. 때문에 백성들은 각자 제 마음 내키는 대로들 행동하여 질서가 잡혀지지 않고있다. 어찌 덕 있는 분을 찾아내어 군주로 맞이하지 않겠으며, 나라를 세우고 도성을 갖추지 않을까 보냐?"
그때다. 회의장소인 알천가 언덕에서 남쪽으로 그다지 멀지 않은 양산 기슭에 이상한 기운이 보였다. 그들은 좀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바라보았다. 양산 기슭의 나정(蘿井) 곁, 그 신비스러운 기운은 땅으로 드리워져 있었고, 그것은 마치 전광과 같았다.
그리고 그 서기가 드리워진 곳엔 흰 말 한 마리가 꿇어 절하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곳으로 몰려갔다. 그리고 흰 말이 절하고 있는 곳을 찾았다. 그 흰 말 앞에는 자줏빛 알(혹은 푸른 빛깔의 큰 알이라고도 함)이 하나 놓여져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더니 길게 소리쳐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그 알을 갈라 보았다. 알에선 한 사내아이가 나왔다. 생김새가 단정하고 아름 다웠다. 모두들 놀라고 신기해했다. 아이를 동천(동천사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 데리고 가서 몸을 씻겼다. 아이의 몸에선 광채가 났다. 새와 짐승들이 덩달아 춤을 추었다. 하늘과 땅이 울렁이고 해와 달의 빛이 더욱 청명해졌다.
그래서 혁거세왕(赫居世王 '혁거세'란 아마 향언(鄕言)일 것이다 혹은 '불구내왕 (弗?內王)'이라고도 하니 '밝게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라 이름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의 직위에 대한 칭호는 거슬한(居瑟邯 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이는 그가 최초로 입을 열 때 스스로 일컫기를 '알지 거서간 한번 일어나다'고 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로부터 거서간'은 왕자의 존칭이 되었다)이라고 했다.
6촌 사람들은 하늘이 자기들의 임금님을 내려 준 이 경사를 여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들은 말했다.
"이제 천자님은 이미 강림하셨다. 그렇다면 또 덕 있는 아가씨를 찾아 왕후로 짝을 지어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역시 이날 사량리에 있는 알영 우물가에서 한 마리 계룡이 나타나더니 그 왼편 옆구리로 한 계집아이를 탄생시켰다.(흑은 용이 나타나 죽기에 그 배를 갈라 동녀를 얻었다고 한다)
그 자태가 유달리 고왔다. 그러나 한 가지 그의 입술이 마치 닭의 부리처럼 생겼었다. 곧 월성 북쪽에 있는 시내로 데리고 가서 씻겼더니 그 부리가 빠지면서 예쁘장한 사람의 입술이 나타났다. 부리가 빠졌다고 해서 그 시내의 이름을 발천(潑川 )이라 했다.
남산 서쪽 비탈(지금의 창림사터임)에다 궁실을 짓고서 두 신성한 아이들을 받들어 길렀다. 사내아이는 알에서 태어났고, 그 알이 마치 박 같았으므로 박(朴)이라 성을 지었다. 그리고 계집아이는 그가 나왔던 우물의 이름 알영 (閼英)을 따서 이름으로 했다.
성남아(聖黑兒)와 성녀아(聖女兒), 이 둘이 자라 열세 살이 되었을 때, 즉 한의 선제 17년(B.C. 57)에 성남아 혁거세는 왕으로 추대되었고 성녀아 알영은 왕후가 되었다. 그리고 국호를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이라 일컬었다. 혹은 '사라'·'사로'라고도 했다.
처음 왕이 계정(鷄井)에서 출생했기 때문에 국호를 '계림국(鷄林國)이라 하기도 했는데 그것은 계림이 상서로움을 나타낸 때문이었다. 한편 다른 얘기로는 탈해왕 시대에 김알지(金閼智)를 얻게 될 때, 닭이 숲 속에서 울었다고 해서 국호를 계림으로 고쳤다고도 한다.
'신라'란 국호를 정한 것은 후대의 일이다.
혁거세왕은 나라를 다스린 지 61년, 하늘로 올라갔다. 하늘로 올라간 뒤 7일 만에 왕의 유체(遺體)가 흩어져 땅으로 떨어지며 알영 왕후도 따라 돌아가셨다 고 한다.
서라벌 사람들이 그 흩어져 내린 왕의 유체를 한자리에 모아 장사 지내려 했더니 커다란 구렁이 한 마리가 사람들을 쫓아내며 그렇게 못하게 했다. 하는 수 없어 다섯 부분으로 흩어져 놓인 그대로 각기 따로 능을 모았다. 다섯 개의 능, 그래서 오릉이라 했다. 한편 구렁이에 관련된 능이기 때문에 사능이라고도 했다. 담엄사 북쪽에 있는 능이 그것이다.
태자 남해(南解)가 왕위를 계승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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