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에 관한 시모음 2)
여름날의 비애 /김재덕
잦은 비에 시달리고
몽글거리는 열대야까지
예기치 못한 고통이다
그늘 밑에 숨겨놓은
보물 하나 꺼내기도 전에
사랑꾼 쩌렁쩌렁하다
굶주린 밉상까지
심술보다운 빨대 짓으로
살갗 두두룩 붓다 보니
이 꼴 저 꼴 망설일 것 없이
흰동백꽃 보고픈 대로
순간 이동 가능할지 궁금해진다
갈색 변화를 꾀하다가
사색의 계절을 준비하겠지만
사랑하겠다던 속 시끄러운 놈
사랑은 해봤을까
여름날 /조태일
햇살, 눈 시리도록 쏟아진다
초목들, 질세라 몸 비틀어
진초록 한껏 뿜는다
햇살, 하이얀 눈물
따갑게 떨구어
초목들, 하염없이 몸 젖는다
창문을 열어라
찌든 마음도 열어라
방마다 웅성거린다
마음마다 마른 강물 뒤척인다
푸른 목소리 푸른 메아리
이파리마다 웅얼거린다.
여름, 어느 날 /권복례
풍만한 가슴 아래로
홀라비꽃, 초롱꽃,
며느리밥풀꽃, 동자꽃
다 거느리고서
혼자 좋아서 실실
웃고 있는 여름산
여름날 이 하루 /박영춘
짧은 밤 긴 여름날
감꽃은 가뭇없이 지고
애감 도사리는 왜
지레 따라 떨어지는가
살아가기 힘 든 양
변하는 환경에 고개 내졌다
여름날 이 하루 밤이면
잠마저 찾아오지 않는구나
적응하기 어려워
살아가며
변해가는 무질서 속에서
사랑해야 하는 일까지도
변해야 하는 때
닥쳐오는구나
애감꼬투리
빗물에 떠내려가는
여름 날 이 매미
옷 갈아입을 날 잊었는가
질 꽃은 지고
필 꽃은 피고
올 꽃은 오리라 믿으면서도
바뀐 암수 열매를 포기하는
예측 까다로운 변화 속에서
아니지 아니야
고개 저어 봐야 무엇 하는가
여름날 이 하루도
어제 본 꽃
오늘 보이지 않는데
여름날 /정종목
숲이었으면
연못이었으면 차라리 늪이었으면
진창 속 숨은 꿈틀거림으로
흐물 흐물
썩어
융융한 소용돌이 뚫고
한여름 푸른 꽃대 올라왔으면
수련 이 한 켜 한 켜
눈부신 꽃잎 펼치고
네 자궁 속에 웅크린
혼곤한 잠이었으면
여름날의 해 /정민기
여름날의 해는 그해 가난했던 시절
어머니처럼 살을 너무 많이 덜어 놓는다
저 햇살, 너무도 많이 빠지는 살
거저 주어도 안 먹는 가난을 실컷 먹었다
고집스럽게도 꾸역꾸역 먹고 마셨던
가난이란 가난은 모두 짊어지고 살았다
긴긴 고도를 잃어버리고 곤두박질치는 세월
동그라미를 그리며 원 없이 떨어지는 깃털
파닥파닥, 비린 생선보다도 더 비리기만 했다
꽃밭의 모자이크처럼 날아다니는 나비 떼,
여름 한때의 한차례 소나기를 다 맞은 듯
내게는 추억이란 추억은 추호도 없는 것 같다
살을 놓쳐버린 해는 어쩌지 못해 이글거리고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은 뙤약볕을 내려놓는다
공중에 해의 살 조각이 흩어지는 작은 생각
다가오는 가을에는 낭비하고 싶지는 않다
뜨거운 이 적막을 버리고 단풍처럼 물들어
조각구름 띄엄띄엄 추억 건너가게 하고 싶다
타오르며 복종하는 해처럼 이글이글한
지난날의 기억 모두 높이 솟아오르고 있다
나무 아래에서 뉘엿뉘엿 지는 생각 본다
여름날 스케치 /사랑아 곽기용
산허리 끝자락에 구름옷 걸치고
열목어 노닐며 살찌우는
삼십여리길 구비구비마다
어름창고 한시절을 품었음일까 보다
인적드문 깊은 골짜기에 바람꽃 여미고
구룡령 숨결따라 모난돌 구르고 굴리며
시절 인연들과 무더위잡기 숨바꼭질로
땀내음 저민 을수골
송사리 입질하 듯
간지럽게 파고드는 가을 맛에 머물러
한가로히 불볕 더위 삼켜버린
물비늘 반짝임에 취해
멍 때림은 자리 잡고
끊임없는 여울목 들락임 소리
졸졸졸 속삭임따라
세월의 틈바구니를 휘젓고 싶었던
노을바람 한자락 주워봅니다
여름날 /이시영
동쪽 하늘이
발그레한 걸 보니
거기서
누가
무지개 꿈을 꾸고 있나 봐.
여름날의 꿈 /박명숙
주룩주룩
비만 내렸던 것 같다
마음에 흐르는 눈물도 많았다
해바라기의 눈물도 보았다
눅눅하고 불쾌지수가 높았던
여름밤의 악몽
모퉁이마다 괴물 같은 장마가
훑고 간 삶의 터를 짓밟아 놓고
상처투성인 우리는 또
잡초처럼 일어선다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매미의 사랑은 쟁쟁거리며
도심 속에서 아우성치고
여름의 끝자락에
살아있는 것들의 희망이
꿈꾸기 시작하면
의지하고 기댈 수 있는
사랑의 힘으로 일으켜 세우고
또, 그렇게 남은 계절을 건너며
상처 위에 딱딱해진 딱지는
떨어져 새살이 돋아 아물고
삶의 의미를 한 자락 배울 때쯤
여름날의 꿈은 저물고
시나브로 가을바람의 기척에
향기가 번지고 부푼 희망의
씨앗을 맺겠지.
뜨거운 여름날 /윤민순
뜨겁다
뜨거워야 핀다지요
여름날들 볼 수 없을 만큼
눈부심은 이겨내라는 단단한 쌀알 같아
여름날의 시원한 생수는 단맛을 녹이는 따뜻함이죠
더욱 뜨거워야 해
옛 추억의 그대를 감상하며
뜨거운 흔적의 등에 담고 있었기에
기억의 솔향 불어온 지금이지요
편리함의 지금
시원한 향기는 새들의 날개짓으로
떠나는말 뜨거워야 단단한 마음이지요 .
어느 여름 날 /박인걸
매미소리 청청한 오후
풋풋했던 시절을 떠올린다.
아무 근심도 없이 풀밭을 휘저으며
고운 소녀와 함께 마냥 즐거웠다.
전쟁이 지나간 자리에는
총상 입은 나무들이 싸매지 못해 아파하고
아무렇게나 널브러진 박격포탄에도
우리는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아직 못다 자란 소년의 눈에는
여름 햇살에 피어나는 산나리 꽃과
손잡은 소녀는 한 쌍이었다.
인생의 사계절을 읽지 못한 나는
시간의 속도를 읽지 못했다.
삶의 유한성을 인식하였을 때는
세상이 아름답던 눈에 안개가 끼었다.
그 시절 여름과 지금의 여름에
작열하는 햇살과 푸른 숲은 같지만
내 머리카락에 내려앉은 늦가을에
땀이 흐르는 무더위에도 마음은 서늘하다.
소나기 지나간 여름날 /송진권
길마다 미꾸라지 올챙이 박실박실 기어나왔지
뻐끔뻐끔 입을 벌린 채 튀어나왔지
소나기에 섞여 내려온 피라미 붕어 새끼
길가 웅덩이에서 놀았지
험상궂은 산은 안개를 쓰고
서리서리 열두발 늘인 용을 놀게 했지
해와 달이 한 하늘에서 놀고
명암이 음양이 한자리에서
지지고 볶고 놀았지
사내와 계집이
사람과 짐승이 한 하늘에서 놀았지
애초에 구분된 것도 없고
사람이고 짐승이고 다 한 말을 하고
하늘이고 땅이고 따악 맞붙어서
우물이며 산골작 도랑마다 용이 오르고
남에서는 주작이 북에서는 현묘가 놀았지
꼭 오늘만 같았지
길바닥 웅덩이마다 물고기가 뛰어오르고
산천초목 다 눈을 번히 뜨고
굼실굼실 승천하는 용을 보았지
무지갯빛 꼬리의 봉황이 날아다니는 걸 보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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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24절기 시모음
여름날에 관한 시모음 2)
와룡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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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6.29 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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