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선정 소장의 달리 인문여행 <11> 나폴리
국제신문 2023-03-19
쓰레기·마피아의 도시? 서민 삶 껴안은 항구도시 뒷골목
- 세계 3대 미항인 나폴리 항구에
- 아픈 역사 품은 ‘카스텔 델로보’
- 유럽 최초 대학·오페라 극장까지
- 가난하고 위험한 곳 선입견에도
- 도시 거리 늘 관광객들로 북적
- 모두를 위한 커피 ‘카페 소스페소’
- 과격함·정겨움이 공존하는 도시
나폴리의 첫인상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 이탈리아 마피아 조직에 관한 이야기나 범죄율에 대한 정보를 모르더라도, 나폴리는 이탈리아의 다른 도시와는 확연히 다르다. 길거리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엄청난 쓰레기가 그렇고, 오래돼 지저분해 보이는 도시 건물들의 외관이 그렇고, 도시 전체를 뒤덮고 있는 그래피티가 그렇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
보메로 언덕위에 있는 산텔모 성에서 내려다 본 나폴리 성과 항구의 모습. 멀리 폼페이를 삼킨 베수비우스 산이 보인다. |
이탈리아 반도 전체가 하나의 통일 국가가 되기 이전까지 거의 1000년이 넘도록 나폴리는 북이탈리아와는 전혀 다른 역사를 쓰면서 남쪽 이탈리아의 정치·경제의 중심지 역할을 해왔다. 기원전 2000년경에도 이곳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그리스의 식민지 민족이었던 쿠마에인들이 기원전 5세기경께 건설한 도시를 나폴리의 기원으로 삼는다. 이름 역시 그들이 세운 새로운 도시, 즉 네아폴리스(Neapolis)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탈리아 반도에 속하면서도 그리스와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만큼 나폴리는 그리스적인 것과 이탈리아적인 것 모두를 받아들이면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했다. 역사적으로도 로마제국은 물론이고 이후 스페인과 프랑스를 비롯한 여러 왕국과 제국의 지배를 받으면서 언어뿐만 아니라 시민의 성격 역시 다른 지역 이탈리아인과는 다르다.
하지만, 한때는 양시칠리아 왕국의 수도로서 번성했던 나폴리가 통일된 이탈리아에서는 변방 도시의 하나로 전전긍긍하고 있는 모습이다. 게다가 근대화 이후 도시로 밀려든 빈민과 이주 노동자들에 의해 점점 더 빈부 격차가 심해지고 치안도 불안정한 도시로 전락해버린 듯하다. 그러나, 이러한 선입견만으로 단정 짓기엔 나폴리는 매력적이다. 그래서일까, 도시의 거리는 늘 관광객들로 차고 넘친다.
■ 베일에 싸인 그리스도
|
스파카 나폴리. 나폴리 구도심을 둘로 갈라놓은 듯 길게 일자로 연결되어 있는 도로다. |
첫인상이나 선입견을 무시한 채 나폴리의 안을 들여다보자. 우선, 나폴리에는 토마스 아퀴나스가 다녔던 유럽 최초의 대학 가운데 하나인 ‘나폴리대학’이 있다. 설립 연도가 1224년이다. 1294년부터 짓기 시작한 이곳 두오모 성당보다도 앞선다. 두오모 성당 역시 기독교인들에게는 특별하다. 기독교 박해 당시 참수당한 성 야누아리오의 유해와 유혈을 모시고 있는데, 해마다 3회에 걸쳐 일반인에게 유해가 공개되는 날이면 응고된 피가 액체로 변하는 것을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 야누아리우스의 기적’으로 불린다. 일반 여행객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고 있는 또 다른 성당은 구시가지 뒷골목에 있는 ‘뮤제오 카펠라 산세베로’다. 가족 예배당이었던 이곳은 이제 박물관으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베일에 싸인 그리스도’라는 조각상을 보기 위해 세계 각지에서 몰려든 관광객들로 늘 붐빈다. 대리석 조각이라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섬세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예수의 주검에서 슬픔보다는 오히려 평온함을 느낀다.
이외에도 나폴리에는 유럽 최초의 오페라 극장이 있다. 1737년에 건축을 시작한 산 카를로 극장이다. 그밖에도 인근의 폼베이 유적지를 전시하고 있는 국립 고고학 박물관 및 망명자이던 카라바조의 작품들이 걸려 있는 성당과 미술관들도 이곳에 있다. 선입견을 버리고 들여다보아야 보이는 것들이다.
■ 전설의 카스텔 델로보
나폴리 사람들은 하루의 시작을 커피와 함께한다. 이른 아침 골목 카페에서 ‘카페’를 주문하고는 선 채로 단 몇 초 만에 커피잔을 비운 후 곁에 있는 차가운 물잔을 들이키고는 길을 나서는 이곳 사람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니 나폴리에서의 시작은 1890년에 처음으로 문을 연 나폴리에서 가장 오래된 카페인 ‘그랑 카페 감브리누스’(Gran Cafe Gambrinus)에서 열어보자.
항구 근처에 있는 이 유서 깊은 카페는 오전 7시부터 문을 연 채 손님들을 맞이한다. 역사와 명성만큼이나 카페 감브리누스를 다녀간 유명인도 많다. 카페 한쪽에 마련해놓은 진열장에는 다녀간 이들의 사진과 커피잔이 진열되어 있는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의 ‘엘리자베스 황후’의 것도 있다.
나폴리 현지인처럼 단숨에 들이킨 커피 한 잔으로 아침을 깨운 후 카페 문을 나서 오른쪽으로 돌면 눈 앞에 넓은 광장과 둥근 지붕의 특이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레알 폰티피샤 성당과 궁전으로 둘러싸인 ‘플레비시토 광장’이다. 그 광장을 나와 조금만 걸으면 세계 3대 미항인 나폴리 항구다. 다시 지중해의 바다를 바라보면서 항구를 따라 오른쪽으로 몇 분만 걸으면 바다 끝에 홀로 우뚝 솟은 오래된 성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달걀성이라는 뜻의 ‘카스텔 델로보’다. 초기에는 왕궁으로 지어졌으나 오랜 기간 외세의 침략을 감시하고 대비하는 군사적인 요새 역할을 해 온 성이다. 고대 로마의 대시인인 베르길리우스가 성의 지하에 마법의 달걀을 숨겨놓고 그 달걀이 깨지는 날 성이 무너질 것이라 예언했다는 전설이 이 성을 더욱 신비롭게 만드는 듯하다.
■ 바다를 즐기다
근현대를 지나 산업화가 급격히 진행되면서 항구도시들도 눈에 띄는 변화를 겪는다. 바다와 인접한 지역이 점점 어촌 기능을 상실하면서 해변은 바다와 싸우던 사람들의 공간이 아니라 바다를 즐기려는 사람들의 공간이 된다. 나폴리도 그렇다. 오래전 뱃사람들의 거친 숨소리로 가득했을 이곳은 이제 관광객들을 위한 고급 호텔과 레스토랑, 그리고 쇼핑 가게들로 채워지고 있다. 항구 근처에는 델로보 성에 비해 새로운 성이라는 의미의 ‘카스텔 누오보’(누오보 성)도 있다.
그 성을 뒤로 한 채 왼쪽으로 길을 따라 걸으면 유럽 최초의 오페라 극장인 산카를로 극장이 나타난다. 그 곁에는 유리와 철제로 지붕을 덮은 커다란 회랑 쇼핑센터인 ‘움베르코 1세 갤러리’가 웅장한 모습으로 서 있다. 밀라노의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 갤러리’를 연상시킨다. 그러고 보니, 바다를 중심으로 한 모든 것이 크고 웅장하고 화려한 것들로 이루어져 있다. 모두가 공유했고 누구의 것도 아니었을 바다마저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과 권력의 것이 돼 가고 있음을 이곳 나폴리에서도 확인하는 듯하다.
■ 모두를 위한 커피
바다와 가까운 곳에 밀집해있는 크고 화려한 쇼핑가와 관공서를 지나 바다에서 멀어질수록 건물들은 작고 지저분해지고 길도 좁아진다. 어느새 좁은 골목이 미로처럼 연결돼 있고 보이는 모든 면에는 그래피티가 그려진 나폴리의 시끌벅적한 원도심에 다다른다. 그 가운데를 관통하면서 이곳의 모세혈관처럼 복잡하게 연결된 골목길을 하나로 이어주는 상징적인 길이 있는데 ‘스파카 나폴리’다. 이름이 의미하듯 나폴리 도심을 둘로 갈라놓은 듯 길게 일자로 이어져 있는데 이 길을 걸으면서 구도심을 보아야 나폴리를 제대로 느낄 수 있다.
엘레나 페란테의 소설 ‘나의 눈부신 친구’를 떠올리며, 길 양옆으로 즐비한 가게에서 피자 하나를 사 들고 다시 걷는다. 이곳을 방문한 마르게리타 왕비가 좋아하면서 유명세를 타고 세계적인 음식이 되었지만, 원래 피자는 이곳의 가난한 노동자들이 싸고 간편하게 먹던 길거리 음식이었다. 그러니 오래전 나폴리 노동자처럼 길을 걸으며 베어 먹어야 제맛이다. 그렇게 구도심을 따라 걸으니 마을 시장이 나타났다. 지나가는 사람들도 구경할 겸 작은 길카페에 앉아 커피를 주문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좀 전에 주문을 받던 카페 청년이 카페 앞에 주차해 둔 스쿠터를 타고 어디론가 서둘러 간다. 손에는 여러 잔의 에스프레소가 들어있는 배달 상자가 들려있다. 그렇다. 나폴리는 유럽에서는 보기 드물게 커피를 배달하는 도시다. 배달에 실려 가는 커피 향기에 사람의 향기를 느끼고 있는 와중에 한 남성이 선 채로 에스프레소를 주문한다. 그런데 커피값을 지불하고 나가는 그 남자가 ‘카페 소스페소’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나폴리를 배경으로 만든 다큐 영화 ‘카페 소스페소, 모두를 위한 커피’의 현장을 목격한 순간이다.
카페 소스페소는 커피를 즐기는 나폴리 사람들이 돈이 없어서 커피조차 마실 수 없는 누군가를 위해 대신 미리 내는 커피값이다. 감동 어린 눈길로 바라보는 내게 온 팔뚝에 문신을 한 카페 주인장이 이렇게 말한다. “나폴리 사람들은 모두 커피를 좋아한다. 돈이 있든 없든 커피를 마시는 즐거움 정도는 나눌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고 말이다.
시장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부산의 원도심을 떠올리게 만드는 나폴리의 구도심 언덕길이 나타난다. 그 길을 따라 계속 걸어가거나 푸니쿨라를 타고 올라가면 보메로 언덕이 나타나고 이어서 나폴리 전체를 360도로 내려다볼 수 있는 산텔모 성(Castel Sant‘Elmo)이 나타난다.
바다와 도시를 지키기 위한 성과 궁전·성당, 그리고 그 속에서 부딪히며 살아왔던 서민의 삶을 껴안은 작은 골목길과 오래된 집들이 한눈에 펼쳐진다. 게다가 저 보이는 건물들 아래에는 고대와 중세에 채석장과 지하 수로로 쓰이다가 세계대전 때는 대피소로 이용되었던 거대한 지하도시(Sotterranea)도 있다. ‘사람도 도시도 보이는 것만으로 쉽게 단정 짓지 말아야 한다’. 겉과 속이 다른 도시, 나폴리가 말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