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국회는 민의가 모이는 곳이다. 국회 현상을 보면 사회의 문제점을 쉽게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미국 의회는 실용적하고, 대한민국 국회는 명분론적이다. 미국의회는 사회현실을 고칠려고 노력하고, 대한민국 국회는 권력을 사용할 생각만 하고 있다. 지금 사회는 일자리 수요와 공급의 선순환 구조로 움직이지 않는데 국회는 그 해답을 주지 못한다. 그 만큼 국회가 시대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다. 국회는 미래 준비가 할 수 없게 된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다. 그렇다면 국회는 사회 갈등만 양산하고 있는 곳이다.
한국 국회는 명분과 이념에 사로잡혀 있다. ‘자본가 혐오증’이 작동하는 것이다. 이 논리 로 일자리를 정부가 만든다고 생각한다. 공무원 증가로 그렇게 했다. 이는 국가 사회주의의 중국식 발상이다. 그렇다면 중국이 약자를 보호하는 곳인가? 신분사회의 권력은 약자에게 무자비하다. 그들은 약점만 보이면 폭력과 테러의 잣대를 들이댄다. 매일경제신문 한예경 기자(2023.01,24), 〈中경제 정점 찍었다지만 … 韓, 기술격차 벌려놔야 외교 대응〉, “지난 13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 백악관 내 대통령 집무실에서 만난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벽난로 앞에 나란히 앉아 양국 관계의 친밀감을 최대한 과시했다. 뒤따라 나온 미·일 정상회담 공동성명에는 ‘우리는 경제적 압박, 비시장 정책 및 관행, 자연재해 등과 같은 위협에 맞서기 위해 공급망의 회복력을 구축해나갈 것’이라는 문구가 삽입됐다. 비록 중국이라는 단어는 없었지만 '경제적 압박, 비시장 정책 및 관행(economic coercion, non-market policies and practices)'이란 문구가 중국의 경제 보복을 상징하는 것임을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중국의 경제 압박에 대응하기 위해 미·일이 공동전선을 구축한 것이다. 미·일뿐만이 아니다. 중국 경제 하강과 군사력 상승이라는 '피크 차이나' 현상에 대응하기 위해 각국에서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흔히 등장하는 대책은 중국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시장이나 투자를 다변화는 전략, 혹은 가치를 공유하는 국가들과 공급망을 강화해 중국에 맞서는 전략 등이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대중국 수출 통제 전략까지 등장했다...윤석열 정부도 다각화 전략이나 공급망 전략을 강조하고 있지만 말처럼 쉽지는 않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한중 수교 30주년을 기념해 서울대 국제학연구소에서 내놓은 연구 결과는 시사점이 크다. 연구에 참여한 조영남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한중 관계 30년을 평가하면서 ‘현재 한국이 당면한 최대 위기는 기술 경쟁력과 산업 경쟁력이 중국에 뒤지고 있는 현실’이라며 ‘기술 경쟁력 없이는 중국에 대접받을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윤석열 정부가 강조하고 있는 중국과의 '당당한 외교'를 위해서는 외교안보가 아니라 기술력을 키워야 한다는 냉혹한 주문이다.”
그런데 국회가 ‘자본가 혐오증’이라고 한다. 기술은 큰 기업에서 생산된다. 법인세 27.5%가 달리 나오는 것이 아니라 그 문화에서 나온다. 매일경제신문 김명수 논설실장(01.18), 〈美제조업 부활의 비결 '암묵적 카르텔'〉, “미국은 2007년 금융위기에 앞서 7년 전에도 우리가 잘 모르는 '경제위기'를 맞는다. 그 위기는 2000년, 중국에 대해 항구적 정상무역관계(PNTR) 자격을 주면서 시작한다. 중국산 수입품이 최혜국 대우 관세율을 적용받기 위해서는 매년 의회 승인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이를 영구 면제시켜준 것이다. 결과는 미국 제조업 부문의 일자리 급감이다. 연초 전미경제학회에서 만난 피터 숏(Peter Schott) 예일대 교수는 ‘중국에 대한 PNTR 제공 여파로 2001년 3월 이후 6년간 미국 내 제조업 부문에서만 고용이 18%나 줄었다’고 분석한다. 1800만명에 달하던 미국의 제조업 일자리였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전까지 6년 동안 300만개 넘게 줄어든 셈이다. 금융위기 당시 줄어든 일자리와 맞먹는 수준이다...피해를 입은 지역 근로자들이자 유권자들은 분노하고, 자유무역을 지지한 정치인들은 큰 타격을 받는다. 세계화 분야 석학인 숏 교수의 연구 결과다. 2000년대 초기엔 자유무역을 지지한 공화당이 해당 지역 선거에서 열세를 면치 못한다. 반면 민주당 의원들은 1990년대 클린턴 행정부 시절과 달리 적극적인 보호무역을 주장하면서 득표에 성공한다.”
대한민국 국회는 미국과 같은 체제를 갖고 있지만, 국민의 뜻과는 관계가 없어보인다. 누가봐도 4∙15 선거는 부정선거라는 것이 곧 판명이 난다. 그들은 일을 할 전문직 의원이 아니라는 소리이다. 스카이데일리 사설(01.24), 〈중재재해법 시행 1년 됐지만 사망자 되레 증가〉, 그들은 엉뚱한 법을 만든 것이다. 동아일보 권구용∙황성호 기자(01.25), 〈민생 위해 연다던 1월 국회...본회의 0번, 대다수 상임위도 ‘휴업’〉, 정치권이 올 스톱인데, 검찰은 문재인, 이재명 사건 언제 끝낼 것인가? 국가 핵심부가 그렇게 한가하다니 문제가 많다.
일자리∙출산 문제가 심각하다. 지금 명문대학에는 여성들로 꽉 차있는데, 국회는 그들을 수용할 생각도, 그럴 용기도 없다. 한국사회는 새로운 계급(the new class)의 연구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 미국 국회의원은 60대 후반 학생운동을 거쳤다. 우리보다 10∼15년이 앞선다. 당시 거리로 나온 대학생들은 주로 사회과학을 하거나, 인문학을 하는 학생들이었다.(알빈 굴드느, 1980. 71쪽). 교수들은 박봉에 프로젝트하느라 학생을 방기시켰다. 더욱이 그들의 교육은 구체적이지 못했다. 기업이 원하는 인재는 구체적 직업 교육을 받는 학생들이다. 그걸 실감한 의회는 제 빠르게 사회의 수요에 맞췄다. 10∼15년이 늦은 우리 386 운동권은 사회를 생각한 것인가?
이젠 AI로 사회가 흔들린다. 인문∙사회 과학을 한 학생들이 갈 곳이 없다. 잡 변동이 급격히 일어난다. 국회가 알 일이 없어...스카이데일리 조정진 편집인(01.24), 〈천사와 로봇〉, “실낙원 이후 신과 영적 교감이 단절된 사람은 스스로 교만해져 이번엔 자신을 빼닮은 로봇을 만들었다. 나아가 인공지능은 물론 대화한다는 AI 챗GPT까지 선보였다. 개발 동기는 인간을 돕고 인사(人使∙ 사람이 부리는 자, 즉 사람의 종)로 만든 것이다. 하지만 모든 존재물의 본능인 ‘스스로 알아서 하기’ 성향이 어디 가랴. 더욱이 똑똑해진 로봇은 사람의 일자리는 물론 대화 상대, 심지어 사랑의 대상까지 대체한다.”
국민의힘은 2030세대 여성이 ‘대깨문’이었다는 사실을 벌써 잊은 모양이다. 그 여성은 가임여성으로 대한민국 출산율과 관련이 있다. 북한은 지식인을 파고 든다. 조선일보 노석조 기자(01.24), 〈민노총 간부, 국보법 위반 혐의 목사와 접촉〉, 〈민노총 간부(조직국장), 목사에게 ‘지하망 동때 보고하라’ 北,지령 전달 의혹〉 새로운 계급에서 성직자가 포함된다니 문제는 더욱 심각하다. 옛말에 ‘중이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관심이 있다.’라고 했다. 교육은 성직자 양산을 한 것이다. 그리고 지도부는 여당 200석 목표로 광화문과 지면을 달군다. 신문은 광고가 없으니, 그들에 목을 맨다. 베트남 일이 남의 일이 아니다. 이젠 국회가 목사들의 운동장이 될 전망이다. 다른 종교는 ‘땅따먹기’에 보고만 있을 이유가 없다.
북한의 폭력과 테러는 새로운 계급에서 일어난다. 미국은 상하의원이 일자리에 합의를 도출한다고 한다. 우리는 아직도 남이냐 북이냐 이념전쟁을 한다.
중앙일보 염재호 전 고려대 총장(01.24), 〈‘뷰카(VUCA) 시대’의 사회시스템〉, “문명사의 대전환을 맞이한 요즘은 ‘뷰카 시대’라고 한다. 사회가 급변하고(volatile), 불확실하고(uncertain), 복잡하고(complex), 모호한(ambiguous) 상태라는 영어 첫 글자를 따서 뷰카(VUCA)라는 것이다....글로벌 기업들은 직원들의 업무 시간보다는 업무의 질을 평가한다.”
교육방향이 지역 맞춤형 형태로 바뀌어야 한다고 한다. 스카이데일리 오정근 균형발전위 지역공약이행지원특별위원장·한국금융ICT융합학회장(01.16). 〈‘지역 맞춤형 교육개혁’이 저출산 해결의 지름길〉, “새해 원단(元旦) 신년사에서 윤석열 대통령은 ‘세계 각국은 변화하는 기술, 폭발하는 인력 수요에 대응하고자 교육개혁에 사활을 걸고 있다’라며 ‘우리나라의 경쟁력과 직결되는 고등 교육에 대한 권한을 지역으로 과감하게 넘기고 그 지역의 산업과 연계해 나갈 수 있도록 지원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이러한 교육개혁 없이는 지역 균형발전을 이뤄내기 어렵다’며 ‘지역균형발전은 저출산 문제 해결의 지름길’이라고 강조했다. 5일 교육부·문화체육관광부 합동 업무보고에서는 ‘교육과 문화에 대한 혜택이 지역에도 골고루 돌아갈 수 있도록 여건이 마련돼야만 지방소멸을 막고 지역균형 발전에 핵심적인 방향이 된다’며 지역교육 및 문화 활성화를 강조했다. 이어 지역 공단에는 아이들 학교 보내는 문제와 문화적인 여건이 전혀 안 돼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는데 그렇게 해서는 지역 기업에 사람들이 내려올 수가 없다고 지적했다.”
새로운 계급의 재편이 일어나야 한다. 그 약점 해결하지 못하면, 국가 사회주의 폭력과 테러를 이겨낼 방법이 없다. 대한민국 국회와 미국 의회의 역할이 요구된다. 전환기를 살아온 윤정희 씨(1944∼2023)가 소개되었다. 그의 삶이 직업의 최고봉이었으며, 대한민국의 북한 대결에서 성공한 삶이었다. 대한민국 국회는 그런 사람의 집합일까? 의원내각제, 중대선거구, 연방제 개헉안은 그런 것일까? 북한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계급을 노린다.
윤정희 씨! 고인의 명복을 빈다.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01.21), 〈‘머릿속엔 늘 필름이’..詩처럼 살다간 은막의 여왕〉, “‘은막(銀幕)의 스타’ 윤정희(79)씨가 19일(현지 시각) 프랑스 파리에서 세상을 떠났다.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77)는 이메일을 통해서 ‘제 아내이자 오랜 세월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배우 윤정희가 딸 진희의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며 꿈꾸듯 편안한 얼굴로 세상을 떠났다’고 전했다...윤정희는 1967년 1200대1의 경쟁을 뚫고 영화 ‘청춘극장’의 주인공으로 화려하게 데뷔했다. 당시 본지 보도처럼 약정된 출연료만 ‘A급 스타와 맞먹는 50만원’에 이르렀다. 달걀 한 꾸러미(10개)가 110원, 돼지고기 한 근(600g)이 120원 하던 시절이었다. 곧바로 청룡영화상 인기상과 대종상 신인상을 휩쓸며 청춘 스타로 부상했다. 1960~1970년대 남정임·문희와 더불어 ‘원조 트로이카’로 불렸다. 청룡영화상·대종상 등 여우주연상만 25차례 받았고, 평생 출연작은 300여 편에 이른다. 김동호 전 부산국제영화제 위원장은 ‘제가 1988~1992년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재직할 당시, 윤정희씨가 공사에 기증한 시나리오만 300여 편에 이른다. 한국 영화계의 살아 있는 역사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애도했다. 그가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 다섯 편이 같은 날 개봉한 적도 있다. 영화감독 이장호(78)씨는 ‘이른 봄 바닷물에도 거침없이 들어갈 만큼 근성 있었고 노출 장면이 있으면 촬영을 모두 마친 뒤 스튜디오 뒤에서 혼자서 숨죽여 흐느낄 만큼 연약하고 인간적인 면도 지니고 있었다’고 기억했다. ‘1960년대 최고의 스타였지만 당시 연출부 막내였던 내게도 꼬박꼬박 장호씨라고 이름을 불러줄 만큼 다정다감한 분이셨다’고도 했다...2016년 한국영상자료원의 데뷔 50주년 특별전에서 ‘하늘나라에 갈 때까지 카메라 앞에 서겠다’고 말했다. 남편 백건우는 3년 전 투병 중인 아내를 대신해서 아름다운예술인상 공로예술인상을 받으면서 ’항상 그랬듯 (아내의) 머릿속에는 시나리오와 필름이 돌아가고 있다‘며 고개를 떨궜다. 평생 배우였던 그는 삶의 마지막 장면마저 영화 같았다.’”
백근우∙윤정희 씨의 납치 사건이 소개되었다. 자료로서 가치가 있어 원문을 소개한다. 〔마이클 리(『CIA 요원 마이클 리』, 조갑제∙com, 2013) 씨가 이정신 오이박사 단장에게 보낸 편지이다.〕 허술한 국회, 허술한 시스템이 대한민국이 아닌가?
1977년 7월 31일,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에서 북한 공작원들이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영화배우 윤정희를 납치 하려고 공작을 하였을 때에, 필자는 미국정부 <000 정보국> 요원으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그 당시 우리조직이 북한의 백건우 윤정희 납치공작 활동을 면밀히 파악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자그레브 주재 미국외교관 한사람의 도움으로 그 납치공작이 좌절되었지만, 만일 그들이 자그레브에 와 있는 <고려민항> 비행기를 타고 평양으로 가게 되는 경우라면 그 일을 선제공작으로 저지할 준비를 우리조직이 이미 하고 있었다. 이런 말을 누구도 한 일이 없으니 모든 사람들이 미국정부가 아무도 모르게 숨어서 우방 대한민국과 국민을 보호하기위하여 얼마나 노력하고 있었는지를 모르고 감사할 줄도 모른다. 필자는 동서냉전시대 40년간 미국정부의 관리로서 세계를 누비고 다니며 대한민국의 현대사를 뒤흔든 많은 대형 사건들을 담당했으며 첩보전선에서 목숨을 걸었다. 그 당시 비엔나는 북한의 대남공작기구들의 해외공작을 총지휘하는 첨탑이었다. 그들의 해외공작무대는 비엔나를 중심으로 파리, 코펜하겐, 로마, 리스본, 베오그라드, 자그레브, 부다페스트, 프라하, 모스크바, 베를린, 프랑크푸르트, 제네바, 런던, 카라치, 마카오, 홍콩, 싱가포르, 베이징, 그리고 미국 캐나다 일본의 주요도시를 거미집같은 조직망을 갖고 있었다. 이 조직망에서 여러 북한 공작원들이 활동하고 있을 때 그들과 어울려 협조한 한국의 재외동포들은 거의가 지성인들이었으며 조국을 배신한 좀비들이었다. 그 대표적인 실례가 바로 백건우와 윤정희의 납치시도사건이었다. 홍콩에서 1978년에 영화배우 최은희를 납치할 때 <이상희>라는 여자가 저들의 앞잡이 역할을 한 것처럼 파리에서는 백건우와 윤정희를 납치하려고 <박인경>이라는 여자가 앞잡이 역할을 하였다.
그때 이 공작을 위하여 비엔나에 있는 북한대사관에는 노동당 대외연락부 부부장 <정경희>가 나와 있었고 그녀가 총지휘 하였다. 비엔나주재 북한대사관 3등서기관 <이상준>과 그의 처 <방화자>가 모든 보조역할을 하였고 평양과의 통신, 공작원들과의 연락, 보급, 재정, 수행안내 등을 은밀히 처리하였으며 <자그레브> 현장에는 대남공작 베테랑인 <허묵>이 나가있었다. 이 사건의 배경과 어떻게 시작이 되었으며 어떻게 끝이 났는지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해 보면, 먼저 미스 코리아 출신 <윤정희>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본명은 <손미자>이고 1944년 7월 30일생이다. 1967년에 영화 <청춘극장>에 데뷔하였고 향후 7년 동안 무려 3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여 인기 절정에 올랐고 주연상 대종상을 포함하여 한국영화계에서 최다 수상자 배우였다. 1974년에 서강대학교 총장의 도움으로 파리에 있는 <소르본느> 대학교에 유학을 갔고 그곳에서 알게 된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1976년에 화백 <이응노>(1904-1989)의 주례로 결혼을 하였다. 그런 인연 때문에 백건우 윤정희 부부는 화백 이응노와 그의 두 번째 부인 박인경과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1977년 7월초 박인경이 윤정희 부부에게 접근하여, 스위스 취리히에 사는 <미하일 파블로비크>라는 거부가 고령의 부모를 위해 음악회를 열고자 하는데 백건우를 초청한다는 초청장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초청장의 수취인이 백건우가 아니라 박인경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백건우는 연주회가 취리히에서 열리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백건우가 바쁜 스케줄을 이유로 처음에는 거절하였으나, 박인경의 말이 백건우를 추천한 자기가 난처하게 되었다고 하여, 하는 수없이 초청에 응하겠다고 하였다.
1977년 7월 29일, 백건우 윤정희 부부와 그들의 생후 5개월 된 딸과 박인경이 파리에서 비행기로 취리히에 갔다. 공항에 내리니 <파블로비크>의 비서라고 하는 여자가 대기하고 있다가, 초청자의 노부모가 현재 <자그레브> 근교 별장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비행기를 갈아타고 <자그레브>로 가야한다고 하였다. 백건우는 비자 없이 자기들이 어떻게 공산국가인 유고슬라비아로 갈수가 있느냐고 하니까, 그 비서라는 여자는 초청자가 이미 입국수속을 하였다고 대답하면서 <취리히>발 <자그레브>행 왕복비행기표를 건네주었다. 그때 윤정희는 생후 5개월 된 딸을 위하여 요구르트를 사러 갔는데 그 사이에 박인경과 그 비서라는 여자가 자리를 옮겨 흰 봉투 하나를 박인경에게 주었다. 그 속에는 박인경만 알아야하는 공작지령이 들어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 여비서는 취리히에 남고 백건우와 윤정희와 그들의 딸과 박인경이 <자그레브>행 비행기를 탔다.
박인경은 누구인가 - <자그레브> 비행장에 도착하여 주위를 살펴보니, 그런 지방도시 작은 비행장에 <고려민항> 비행기 한 대가 눈에 띄었고 저쪽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여자 한사람이 있었는데 유독 그 여자만 어울리지 않게 썬 그라스를 썼고 흰 저고리에 검정색 동강치마를 입고 있어서 전형적인 북한여성의 옷차림이라고 직감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것을 목격한 윤정희는 대단히 불안하였고 긴장하였다고 한다. 윤정희의 예감이 맞았다. 그녀는 북한공작원 <허묵>과 함께 백건우 윤정희 납치공작에 참여한, 비엔나주재 북한대사관의 3등서기관 <이상준>의 처이며 이름은 <방화자>이었다. 그때 백건우가 마중 나온 사람이 있을 거라고 주위를 살피고 있었는데 박인경이 취리히에서 그 여자비서로부터 받은 흰 봉투를 주었다. 봉투 속에는 <아미크>라는 이름과 주소, 그 집을 찾아가는 약도, 그리고 돈 800 디나르가 들어 있었다. 택시를 타고 오라는 내용이었다. 거부라고 하는 사람들이 국제적인 피아니스트를 초청해놓고 마중도 안 나오고 택시를 타고 오라니 그런 결례가 어디 있나. 백건우는 이상한 예감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들이 택시를 타고 찾아간 집은 조용한 주택가 한복판에 제법 큰 3층집이었다. 연주회를 한다면 방문객들도 많이 오고 그들이 타고 온 차들도 마당에 주차되어 있어야 하겠는데 주위가 너무 조용하였다. 수상하다고 느낀 백건우는 아내와 딸을 택시 안에 남겨두고, 박인경과 함께 나와 주변을 살피다가 박인경이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더니 2층에 만찬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백건우가 따라 들어가 보니 1층은 방문이 모두 잠겨있고 창문도 커튼이 내려진 상태였으며, 2층에는 갑부가 마련하는 만찬이라고 믿기 어렵게 과일접시 하나와 빈 접시 몇 개가 놓여있을 뿐이었다.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시 후 3층에서 자기를 초청한 서양인이 아니라 동양남자 한사람이 나타났다. 그 순간 백건우는 그가 북한공작원임을 직감하고 쏜살같이 택시로 달려갔다. 그 동양인은 ‘wait, wait’ 를 연발하며 따라오고 택시가 출발하기 직전 거의 택시의 문 손잡이를 잡을 정도로 접근하였다. 백건우는 그 택시를 타고 급히 그곳에서 빠져나와 <자그레브>에 있는 미국영사관으로 달려갔다. 그자가 바로 북한공작원 <허묵>이었다.
그때가 1977년 7월 31일 오후6시가 조금 지나서였다. 미국영사관의 문은 닫혀있었고, 도서관이 아직 열려있어 백건우 가족이 그곳으로 뛰어들었다. 그때 마침 잔무정리를 위해 남아있었던 미국외교관 한사람이 백건우 가족을 만나 사정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즉시 그들의 안전을 위하여 자기가 임시로 묵고 있는 호텔로 안내한 후 자정 무렵에 4층 416호실로 옮겼다. 다음날 이른 아침에 누가 416호실의 문을 두드렸다. 백건우는 당황하여 그 미국외교관에게 전화를 걸어 도움을 요청하였다. 그는 그가 묵고 있던 3층에서 4층으로 올라왔을 때 거기에는 동양인 남자 2명과 여자 1명이 416호실 앞에 서있는 것을 목격 하였다. 그중 한명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바로 며칠 전 오스트리아 건국기념일 리셉션에서 보았던 북한사람이었다. 그가 바로 <허묵>이었다. 그는 즉시 백건우에게 전화하여, 지금 북한사람들이 문밖에 와 있으니 절대로 문을 열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그 미국외교관은 <크리스텐슨>이었고 그로부터 보고를 받은 우리 정보국 조직은 백건우 윤정희를 철저히 보호하고 파리로 무사히 귀환할 수 있도록 협조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그리고 북한사람들이 사라진 후에 그는 백건우 일행을 안전하게 공항까지 안내하고 파리 행 비행기 표를 구입하여 저들이 탑승하고 이륙하는 것까지 확인하였다.
그들이 사용한 암호에 차질이 - 이 납치공작이 실패한 중요한 원인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방화자>의 옷차림이 백건우 일행에게 불길한 신호를 보낸 것이며, 다음은 박인경이 <자그레브> 현장에서 그 집안에 들어갔을 때 사용해야할 암호에 착오가 있었던 것이다. 박인경이 “왔어요” 하면 잠복하고 있던 북한공작원들이 뛰어나와 백건우와 윤정희를 덮치도록 사전계획이 되어 있었는데, 박인경이 엉뚱하게 ‘다들 어디 갔나’ 라고 하는 바람에 잠복공작원들이 혼란에 빠졌다. 암호가 이상하자 <허묵>이 혼자 나타났고 백건우가 도주하였다. 그 다음날 그들이 호텔 앞에서 다시 한 번 납치를 시도했으나 미국외교관의 기지로 백건우 일행이 보호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이 납치미수사건 후 26년이 지난 2003년에는 북한이 이 납치공작을 공식적으로 시인한 외교문서가 발견되었다. 그 당시에는 <자그레브>가 유고슬라비아에 속해있었지만 지금은 신생국가 <크로아티아>의 수도이다. 이 문서는 현재 <크로아티아> 정부가 보관하고 있다. 그 당시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동맹 중앙위원회 간부회의 행정위원인 <도부리보예 비디치>가 북한대사 <정광순>을 불러 이 사건에 대해 질문하자 <정광순> 대사가 해명한 내용이다. 그가 말하기를, 이 납치시도 사건은 현지주재 북한외교관들과는 아무상관이 없으며 평양에서 직파한 공작 팀의 소행이라고 밝혔다.
박인경의 이후 행적 - 이 사건이 발생하고 17년 후인 1994년 1월부터 박인경 (1926년생)은 아무런 제재 없이 한국을 드나들고 있었다. 박인경은 2000년부터 2005년 9월까지 서울 종로구 평창동에서 <이응노 미술관>을 운영하였고, 대전광역시는 2007년에 <이응노 미술관>을 개관하고 박인경을 명예관장으로 추대하였다. 일부 언론에서 박인경의 이적행위에 대한 논란이 있었지만 김대중 정부 출범이후 한국정부는 아무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대한민국정부는 참으로 허술하기가 그지없다. 화백 이응노와 그의 처 박인경의 과거를 살펴보면, 그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이적행위를 범했다. 1958년에 프랑스 파리로 간 그들은 19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한국으로 압송되었고,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고 다시 파리로 돌아갔다. 그때 파리주재 한국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그들의 가택을 수색했는데 특수단파수신 라디오와 북한간첩 난수표와 자살용 청산가리가 발견 되었으며 세포조직명단에는 이응노와 윤이상이 중요멤버로 되어있었다. 그런데 한국정부가 이들에게 대전에는 이응노 미술관을 지어주고 통영에는 윤이상 기념관을 지어주었다. 박인경은 이응노 미술관의 관장이 되었고 한국에서 명사의 대접을 받으며 자유롭게 활동 하였다, 이 일을 우리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