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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스님들이 출가를 한다는 게 가족에게나 주변 지인들에게 고통과 상처를 주는 이기적인 결단 아닌가요?"
아주 간혹 듣는 질문입니다. 제가 대답했습니다.
"예.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누군가에게는 출가라는 게 그다지 의미가 없는 일일 수도, 혹 부러운 행동일 수도 있고, 또 어떤 누군가에게는 분명 상처가 되는 일이기도 하지요. 제 부모님이 특히나 그러셨겠지요..."
차례와 세배를 마치고 해인사로 출가하는 설날 아침, 아버지는 바둑을 둔다고 아예 저를 쳐다보지도 않으셨고, 어머니는 아파트 입구까지 나와 제 팔을 부여잡고 우셨습니다. 누이들은 멀찌감치 서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건 아니었습니다. 출가를 응원해 준 제 친구들도 있었으니까요. 한번 안아주며 잘 살라고 응원해 주었습니다. 친구니까 그럴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순간의 상황만 있는 게 아닙니다. 시간도 있습니다. 시간은 흐릅니다. 그래서 상황은 변화합니다. 상황이 변화하니 생각도 변하고 의미도 변합니다. 모든 게 변합니다. 이것이 참 중요합니다.
제가 출가하고 몇 년 동안 부모님은 아마도 저를 퍽 원망하셨을 것입니다. 대학까지 졸업시켜 이제 번듯한 사회인으로 자리매김하는 모습을 흐뭇하게 지켜보기를 기대하셨지만, 이를 다 팽개치고 절로 들어가겠다고 하니 속이 많이 상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게 그리 한 모습만이겠습니까.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고, 친구들도 하나둘 세상을 떠나고, 애지중지 키워놓은 자식들이 온갖 말썽을 부려대는 모습도 더러 보셨을 겁니다. 그러면서 무심하게 출가해버린 자식에 대한 원망도 차츰 내려놓게 되고, 어떤 때에는 아들이 출가한 상황을 되레 편안하게 보셨을지도 모릅니다. 특별히 좋은 일도 없지만, 절에 머무르며 수행이라는 것을 한다며 저 좋은 대로 살고 있으니 나쁜 일도 없기 때문입니다. 좋음도 없고 나쁨마저도 없으면, 그냥 그대로 편안해지는 것이기도 합니다. .. 중략..
절에 들어온 지 6년이 지나서야 가족들을 처음으로 만났습니다. 조모와 부모님, 누이들, 매형, 조카들 고모부 내외까지 대가족이 제가 머물고 있는 수도암으로 찾아왔습니다. 큰 사형스님이 먼저 가족들과 함께 차를 마신 뒤 나중에 제가 다실로 들어갔습니다. 차를 내리는 팽주 자리에 앉아 보니, 작은 방 안에 많은 가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게 보였습니다. 6년의 시간이 지났으니, 모두들 조금씩 나이가 든 모습이었습니다. 가족들 얼굴을 한번 쓰윽 둘러보고 난 뒤, 문득 이러한 말이 떠올랐습니다.
'사람들이 왔구나....'
분명 제 가족이지만 그렇게 '사람들'로 떠올랐습니다. 그런데 제일 앞에 앉아 있던 조모께서 저를 빤히 쳐다보며 하신 말씀이 워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런데요, 스님... 우리 OO이는 언제 와요?"
가족들이 박장대소하며 웃었습니다. OO이는 바로 눈앞에 있지 않느냐고 말해 주었습니다. 조모의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아니, 니가 진짜 OO이여?"
조모는 눈앞의 저를 의심하셨습니다. 정도는 다를지언정 가족들 모두 조모와 비슷한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모두들 아들, 오빠, 남동생, 조카를 보러 대전에서, 서울에서 멀리 김천 시골까지 달려왔건만, 정작 눈앞에 나타난 것은 민머리 스님이었던 것입니다. 제가 가족들을 '사람들'로 보았듯 가족들도 저를 '스님'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 중략..
지금은 부모님과 잘 지냅니다. 일 년에 두 번 전화를 드리고, 추석날 하루는 대전 집에서 잡니다. 아무런 걱정거리 드린 적 없이 절집에서 수행하며 잘 지내고 있으니, 이 정도면 나름대로 효자 노릇하는 것이라고 한 사형스님께서 말씀해 주신 적도 있습니다. 만약 이 와중에 제가 부모님께, 저 환속할라요, 수도리 마을에 향숙이하고 결혼해서 염소 키우며 살라요, 염소 삼백 마리 사주세요, 라고 한다면, 그때부터 부모님은 꽤나 골치를 앓을 것입니다. 왜 지금까지 절에서 잘 살아놓고 그러냐며 저를 말리려 들 것입니다.
시간이란 이런 것입니다. 아들의 출가 소식을 처음 들었을 때는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을 받아들이고 감당하기 힘들어 울분을 느끼기도 하셨을 테지만, 시간이 흘러 그 마음 누그러들고, 또 아들래미가 일년에 한두 번은 전화를 하고 추석에 와서 하룻밤은 꼭 자고 가면서 스님으로 잘 살고 있으면, 스님이 된 아들이 영 밉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시간은 흐르고 상황은 변합니다. 모든 것은 변합니다. 무상은 결코 나쁜게 아닙니다. 흐르는 것을 받아들이고 변하는 것에 적응하면 매 장소, 매 순간이 새로운 모습으로 재탄생 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이 무상에 있습니다.
-<질문이 멈춰지면 스스로 답이 된다>(저자: 원제스님)에서 발췌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