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게디포도원의고벨화
엔게디 포도원
[아 1:14]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엔게디]라는 지명은 다윗과 아주 인연이 깊은 곳이다.
다윗은 양치기 시절에 하나님의 기름 부음을 받고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될 것을 명 받았다.
그 기름 부음은 영광과 즐거움의 시작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과 역경의 시작이었다.
그 이후부터 그는 사울왕에게 핍박을 받아 심한 고난을 겪었으며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면서 피신을 하기 위해 이곳 저곳을 전전했다. 그러는 도중에 그가 사울을 피해 숨어 살던 곳이 바로이 [엔게디]라는 황무지이었다. 사무엘상 24장 1절의 표현대로는 [엔게디 황무지]이다.
이 황무지는 다른 말로 하면 [광야]라는 뜻이다.
이 [광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는 말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출애굽하여 40년간을 지낸 곳이 바로 이 [광야]라는 곳이다.
이 [광야]는 많은 고난이 도사리고 있는 곳이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이끌어내시고 바로 가나안 복된 땅을 인도하지 않으시고 어째서 광야를 지나게 하셨을까?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우리의 신앙이 애굽에 살던 때가 있고
출애굽하는 사건이 있다. 그다음에는 [광야]를 지나야만 한다. [광야]를 지나지 않고서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반드시 겪어야 할 장소이다.
그런데 문제는 [광야]라는 곳을 너무 쉽게 생각해 버리는 것이 현실의 기독교인들이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대체적으로 예배당에 출석하고 있으면 모두가 [광야]에 나왔다고 생각해 버리는 것이다.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를 빠뜨리고 넘어가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에게는 통하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통할 리가 없다.
잘 생각해 보라!
다윗이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나서 핍박이 시작되었다.
그 기름부음이 없이는 [엔게디 황무지]도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는 사건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엔게디 황무지]가 우리 앞에 펼쳐지는 것이다. 이 순서를 무시하지 말라. 예배당에 나온 것으로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것이라고 밀어부친다면 할말은 없다.
그러나 그것은 억지란 말이다. 이런 문제를 생각하기 싫어하고 그저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면서 그 열심이 곧 기름부음을 받았으니까 나오는 것이겠지...하고 생각해 버린다.
오늘은 [광야]에 관한 말씀을 하고 있으니 이 문제는 깊이 다루지 않겠다.
들을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
여하튼 다윗은 기름부음을 받고나서부터 핍박이 시작되어 심한 고난과 방황을 경험하게 되었는데,
이것은 옛날의 역사를 기록하여 우리에게 역사 공부를 시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오늘날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고나서 부터는 핍박이 시작된다.
우리가 언제 하나님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았는가? 그럼 우리가 왕이란 말인가?
그렇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다. 성령으로 우리에게 기름부으신 그 날부터 우리는 왕이다.[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와같이 기름부어 세우신 것이다.
그런데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이 말씀대로 우리가 빛에 들어간 그 시간부터 어두움과는 원수가 되어있는 것이다. 이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어두움과는 원수가 되지 않았다면 그것은 우리가 빛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가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두움... 이 둘은 서로 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빛이 된 후로부터는 어두움의 핍박이 찾아오는 것이다.
한마디로 사울은 하나님을 거역한 [어두움의 표상]이고
다윗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그 은혜가운데 거하는 [빛의 표상]이다.
사울은 다윗이 죽도록 미웠다. 그래서 그를 죽이려고 뒤를 쫓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다윗을 기름부으시는 그 시간부터 이스라엘의 실제적인 왕으로 세우지를 않고 사울에게 쫓김을 받게 하셨는가? 여기에는 여러 가지 얘기들이 많을 수 있지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한다.
[신 8:16]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다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먹이신 것은 그들을 낮추시고 시험하시고 결국에는 복을 주려하심이다.
[시험하사]는 연단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을 낮추시고 시험하시려고 광야를 통과하게 하신 하나님께서
또한 다윗을 [엔게디 황무지]로 이끌어 오신 것이다.
또한 다윗을 [엔게디 황무지]로 이끄신 하나님께서
오늘날 우리들도 역시 그곳을 통과하도록 인도하시는 것이다.
성경의 어떤 사건은 어떤 지나간 인물에서 끝나야하는 사건이 아니다.
그것은 곧바로 현재의 우리와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성경은 우리에게 의미없는 책이 되어 버리고 만다.
다윗의 얘기는 다윗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다윗의 얘기는 오늘날 바로 나의 얘기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다윗의 경험은 다윗에게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곧 우리의 경험으로 닥아와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기름부음을 받고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고 나면 그 기름부음이 우리를 인도하사 반드시 성경의 모든 사건들이 내 안에서 실제가 되게하신다.
그렇지 않다면 아직 기름부음과 나는 상관이 없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시인한다는 말씀의 의미를 아는가?
성경과 나와의 하나되는 경험! 이것이 없이는 결코 시인한다는 의미를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엔게디 황무지]에 대한 얘기를 더하자.
그 고난과 핍박을 피해 도망다니는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 있을 때.......
솔로몬은 자기 부친 다윗이 [엔게디 황무지]에서 어떤 상태에 있었던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윗이 말할 수 없는 고난 속에서 [엔게디 황무지]에 숨어있을 때 거기는 온전한 절망만 있지 않았다. 이스라엘을 광야로 인도하시던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소망으로 계시면서 만나와 샘이 되어주시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셨다.
오! 하나님, 진실로 그와같이 다윗에게도 행하셨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 그분은 바로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엔게디 황무지의 포도원에서 다윗을 먹이시던 그분이 바로 [고벨화 송이] 이시다.
광야에서 만나와 샘물로 이스라엘을 먹이시던 하나님께서
[엔게디]에서 포도원으로 다윗을 양육하셨던 것이다. 그 포도원 안에 가장 귀하신 분그분이 바로 [고벨화 송이] 이셨다. 그분이 거기서 다윗을 위로하시고 먹이셨던 것이다.
고벨화는 지난 번에도 공부를 했다.
[고벨]은 구속하는 속전이다. 더 나아가서 이 [고벨]은 방주가 물에 새지 않도록 하는귀중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고벨]은 창세기6장14절에 나온다.한번 읽어보자[창 6:14]
너는 잣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짓되 그 안에 간들을 막고
역청으로 그 안팎에 칠하라
여기 나오는 [역청]이라는 단어가 바로 [고벨]이다.
방주를 아무리 잘 지었다 하더라도 이 [역청]으로 안팎에 칠하지 아니하면
그 방주는 무용지물이 되어 버린다. 왜 [역청]이라는 단어와 [속전]이라는 단어가 구약성경에서 동일한 단어로 사용되는가를 이해할만 하지 않은가?
그리스도의 속죄함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아무리 그 크기가 엄청나더라도 결국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의 신앙은 반드시 안팎으로 역청을 칠해야 한다.
빈틈없이 역청으로 칠해야 한다. 조금이라도 칠하지 않은 곳이 있다면
심판의 물은 그 틈으로 들어오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은 우리의 신앙은
하나님의 심판의 물이 점점 가득하게 되어 물속에 가라앉게 될 것이다.
[고벨화 송이]는 엔게디 황무지에서 고난을 당하는 다윗에게 힘이요, 방패요,산성이시며, 그의 소망이셨다. 다윗은 모든 고난을 바로 이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때문에 견디고 이길 수 있었던 것이다.
주님의 구속하심은 우리의 모든 고난 속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이시다.
그 [고벨화 송이]를 바라보는 모든 성도들에게 환란은 미미한 것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바울은[롬 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라고 외치면서 고난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고난을 받는 것을 당연지사라고 담담해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계속해서 바울 사도는 그것을 능히 이길 수 있음을 장담하고 있다.
[롬 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넉넉히 이긴단다. 세상에!
넉넉히 이긴다니까 고난이 끝나고 세상에서 큰 부자가 되는 것을 상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것은 계산 착오다. 성서의 축복은 그런 식의 것이 아니다.
넉넉히 이긴다는 것은 세상의 그런 것들을 배설물 처럼 여기는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 한 것이다.
인간들은 모두가 제 입장에서 모든 것을 좋게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성경의 모든 좋은 구절들을 다 제것으로 삼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성경의 모든 좋은 구절들을 자기들 생각대로 해석을 해 버리고는 그렇게 이루어지길 바라는 것이다.
한심한 인생들이 아닌가?
그래서 성경에 복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게 다 돈복인줄로 착각을 한다.
지혜라는 단어가 나오면 그게 모두 I.Q 가 높아져서 세상에서 공부 잘하고 출세 잘하게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하고 그렇게 가르치고 그렇게 배운다.
모두가 끼리끼리 모여서 저희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다 해먹으려 한다.
하나님은 저 만큼 밀려나 계시다.
집집마다 가게마다 특별히 예수쟁이들이 운영하는 곳에는 어김없이 걸려있는 성구가 있는데 그게 무엇인 줄 아는가?[욥 8:7]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
그 말씀대로 조그맣게 시작한 장사가 큰 회사가 되길 바라고 기도하며
[구하고 찾고 두드리면] 모든게 다 그대로 이루어진단다.
이런 사람들은 [엔기디 황무지]는 고사하고
최소한 [출애굽의 사건]도 없었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 진정으로 그들을 [출애굽]시키셨다면 수십년을 신앙생활 했으면서도 그렇게 깨달음이 없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자식들을 반드시 [엔게디 황무지]로 몰고가셔서 [고벨화 송이]의 고귀함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그런 역사가 없다면 그 사람을 하나님의 자녀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무슨 소리냐고 펄펄 뛸 하나님의 종들이 계시겠지만
성경을 좀 제대로 보라! 왜 그리 눈을 감고 있는가? 좀 눈을 떠보라!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징계를 통해서 이런 문제에 눈이 열려 신령한 복이 무엇인지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아 알고 있을 것이다.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다.[히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이 말씀은 읽어보지도 않았는가? 왜 징계하시는가? 세상에서 부자되어 살라고 하시는 것인가?
세상 것은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 주님의 당부이다. 왜들 그리 모르시는가? 답답하다. 내가 너무 심한 소리하는가?
[요1 2: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런 말씀은 귓전에도 들어오지 않는 것이 세상을 사랑하는 예수쟁이들이다.
세상에 있는 것을 사랑하는 자는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않다는 말씀이다.
내 동포들이여!
제발 거짓말 쟁이들에게 속지 말라!
내가 이러다 곱게 못죽는 것 아닌지 모르겠다.
주여! 왜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가 그리도 귀한 것인지
저들에게 보여주옵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