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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종 작가 일본 쓰시마를 둘러보다. 2017년 3월 고니시 마리아의 신사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의 장녀로 쓰시마도주 소 요시토시의 부인
백제유민들이 쌓은 가네다성 유적지를 둘러보다.
동양의 나바론 요새, 쓰시마의 토요호다이(豊砲台)를 걷다.
백제의 왕인박사가 일본에 유학을 전하여 아스카 문화의 원류가 되다.
박스 포장하나에도 아이디어가 숨어있는 쓰시마의 마트에서
아직 전쟁의 상처가 곳곳에 남아있는 쓰시마를 거닐다.
지난 2017년 3월 9일(목)~12일(일) 서울에서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일본 쓰시마에 다녀왔다. 9일(목) 저녁 11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서울에서 모여 자동차를 몰고는 부산으로 향했다. 당초 10일(금) 새벽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갈 예정이었지만, 사람이 적당히 모여 야밤에 차를 타고 가는 것으로 일정을 변경했다.
천천히 부산까지 가는 길을 생각보다 멀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차는 부산 해운대에 10일(금) 새벽 4시경에 닿았다. 영화평론가인 강익모 선생, 자동차 디자이너이며 사진작가인 하성인 선생과 로드 디자이너(road designer)인 아웃도어파트너스의 고광용 선배와 나까지 4명은 해운대의 쇠고기국밥집에서 식사를 하면서 정식으로 인사를 했다.
이번 쓰시마 여행은 총9명이 동행을 했는데, 이렇게 4명과 아침에 부산항에서 만나기로 한 3명, 그리고 11일(토) 오후에 쓰시마에서 만나기로 한 2명까지 전부 9명이다. 한밤중에 도둑고양이처럼 정신없이 부산까지 달려온 탓에 피곤했지만, 국밥을 한 그릇하고 나니 조금은 정신이 들었다.
처음 뵙는 두 분과는 잠시 이야기를 나누면서 쓰시마에서의 일정과 조선통신사에 관한 내용을 조금 알려주는 것으로 말을 맺었다. 부산에 와서 복국을 먹거나, 돼지국밥을 먹어본 적은 있지만, 쇠고기국밥은 처음이라 약간을 생소했다. 그러나 맛은 나름 가성비 대비 만족이다. 적당히 싸고 맛도 보통은 했다.
이어 차를 타고는 일출을 보기 위해 ‘이기대(二妓臺)공원’으로 갔다. 입구에 바다가 바로 보이는 대형 아파트 단지가 있어 다른 무엇이 보일까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오륙도를 보기에는 나름 조망이 좋은 곳이었다. 이기대공원은 장산봉 동쪽 산자락에 바다와 면하여 있는 공원이다.
해안 일대에 약 2㎞에 걸쳐 기기묘묘한 바위로 이루어진 암반들이 바다와 접해 있어 낚시를 즐기기에 좋은 곳으로, 부산에서 가장 유명한 낚시터로 꼽힌다. 그래서 인지 새벽부터 출어를 하고 고기를 잡고 있는 작은 배들도 보이고, 낚시를 준비하는 사람들도 간간히 보인다.
이곳의 순환도로와 오륙도로 이어지는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으며, 공원 곳곳에 각종 운동기구도, 전망대도 설치되어 있다. 지난 1999년 바닷가 바위에서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면서 남구청에서 이 일대를 정비하여 공원으로 만들었다.
나는 바다 한가운데에 있는 오륙도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인 이 섬들은 멀리 영도구의 한국해양대학교가 있는 조도와 마주보며, 부산만 북쪽의 승두말로부터 남동쪽으로 6개의 바위섬이 나란히 뻗어 있다.
이 섬들은 육지에서 가까운 것부터 방패섬, 솔섬, 수리섬, 송곳섬, 굴섬, 등대섬으로 나누어진다. 송곳섬은 작고 모양이 뾰족하며, 굴섬은 가장 크고 커다란 굴이 있다.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등대섬은 평탄하여 밭섬이라고도 하였으나, 등대가 세워진 뒤부터 등대섬이라고 한다. 등대섬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무인도이다.
오륙도는 동쪽에서 보면 여섯 봉우리가 되고 서쪽에서 보면 다섯 봉우리가 된다는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섬 주변은 조류가 매우 빨라 뱃길이 위험하였기 때문에 옛날 이곳을 지나는 뱃사람들은 항해의 무사함을 기원하기 위하여 해신에게 공양미를 바쳤다고 전한다.
새벽6시 아직 날씨가 어둑어둑하다. 약간 흐린 날씨라 일출을 제대로 보기 힘들 것 같다는 생각에 포기하고 돌아갈까 생각했다. 그러나 아쉽지만 보기에 나쁘지 않은 모양의 해가 떠올라 잠시 보았다. 생각보다는 반갑고 기분 좋은 일출이다.
이제 다시 부산항으로 간다. 출근 시간이 겹쳐서 조금 걱정이 되기는 해지만, 7시 30분 정도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주차를 하고는 나머지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잠시 쉬었다. 8시가 되어 다른 일행들이 도착했다.
나랑 같이 한국내셔널트러스트에서 활동하는 공학박사인 양인수 이사, 고향 후배인 지리학 전공인 안종천 박사 등이 전부 도착하여 발권을 하고는 부산에서 쓰시마 이즈하라항으로 출발했다.
파도도 없고 햇살도 좋아서 편안하게 갔다. 배가 이즈하라항에 닿기 직전 인공위성 TV를 통하여 헌법재판소의 박 대통령 탄핵 소식을 생방송으로 볼 수 있었다. 11시부터 25분 동안 이정미 재판관의 탄핵 인용을 눈물 나게 보았다. ‘8:0 재판관 전원 인용이라, 정말 역사의 순간을 지켜보았다’ 아무튼 잘 보았고, 하선하여 쓰시마 입국 절차를 밟았다.
짐은 대아호텔 승합차에 배달을 부탁하고는 가볍게 이즈하라항구로 나왔다. 천천히 걸어서 시내를 산책하기로 했다. 가는 길 좌측에 조선통신사에 관한 벽화가 보인다. 쓰시마에서 조선통신사가 차지하는 위치가 어떤지를 다시 한 번 짐작하게 하는 그림이다. 지리적으로나 정치경제적으로 이곳은 오랫동안 한일교류의 중요한 거점이었음에 틀림없다고 할 수 있다.
1906년 조선의 마지막 선비로 불렸던 애국지사 최익현 선생이 볼모로 잡혀와 사망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선생의 주검이 안치되었던 백제의 비구니가 세운 사찰인 ‘슈젠지(修善寺)’에 지난 1986년 세워진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비(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를 보러갔다.
경기도 포천 출신의 문신, 학자, 의병장, 애국지사였던 선생은 조선말기 일본의 배신 16조를 따지는 의거소략을 배포한 후, 순창에서 약 400명의 의병을 이끌고 관군과 일본군에 항전하다가 체포되어 쓰시마에 유배되었다. 당시 선생은 “일본군과는 싸울 수 있어도, 조선군과는 싸울 수 없다”하여 스스로 싸움을 포기하고 체포되었다고 전한다.
선생은 유배지에서도 지급되는 음식물을 적이 주는 것이라 하여 거절하고 단식을 계속하다가 굶어서 순국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우국, 애민의 정신과 위정척사 사상은 한말의 항일의병운동과 일제강점기의 민족운동, 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 계승되었다. 쓰시마에서 선생의 순국비를 보는 기쁨은 남달랐다. 잠시 기도를 하고는 경내를 둘러보았다.
이제 시내 산책을 조금 더 한 다음, 점심을 먹기 위해 초밥집으로 갔다. 정말 된장국 등을 포함하여 초밥과 회를 왕창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는 잠시 관광안내소가 가서 일행들에게 쓰시마에 대한 개략적인 소개와 함께 안내를 한 다음, 승합차를 빌려 타고는 인근에 있는 ‘하치만구(八幡宮)신사’로 갔다.
이곳은 최익현 선생이 쓰시마로 끌려 와 처음 3개월 동안 수용생활을 했던 장소가 바로 이곳 신사의 광장이다. 지금은 수용시설과 관련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주차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곳 신사는 삼한에 임나일본부를 건설했다는 가상의 인물 ‘진구(神功,しんこう)황후’를 모시는 곳으로 일본 역사왜곡의 한 단면이 묻어나는 장소다.
오늘 이곳을 찾은 이유는 또 다른 인물인 ‘고니시 마리아(小西マリア)’의 신사를 보기 위해서다. 임진왜란 당시 조선을 침략한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장녀로 쓰시마 도주였던 소 요시토시(宗義智)의 부인이었다.
조선 보다 200년 이상 먼저 천주교가 전래된 일본의 경우, 당시 이미 30만 명의 기독교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조부모 시절부터 기독교 신자였던 고니시 마리아는 남편인 소 요시토시도 기독교인으로 만들었고, 쓰시마에도 다양한 전도 활동을 했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 전쟁사에서 유명한 ‘세키가하라전투(関が原の戦い)’에서 서군에 가담한 고니시 유키나가가 패장이 되어 처형되자, 사위였던 소 요시토시는 동군에 투항하여 목숨을 건지고는 후환을 염려하여 1601년 마리아 부인을 버리게 되고, 부인은 나가사키로 추방되어 독실한 신앙생활을 하다가 1606년 사망했다.
이후 1619년 부인과 일찍 죽은 아들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부인은 ‘이마미야(今宮)신사’로 아들은 ‘와카미야(若宮)신사’로 각각 입신을 시킨 후, 제사로 모시다가 후에 ‘천신(天神,てんじん)신사’로 합사를 했다. 대외적으로는 학문의 신을 모신 신사였지만, 사실은 부인과 아들을 제사지내던 신사였던 것이다.
아무튼 고니시 마리아는 일본 기독교사에서도 조선의 기독교사에서도 의미가 있는 인물이다. 임진왜란 이전부터 조선 선교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그녀는 임란 직후 포로로 잡힌 조선의 양반 자제 중에 당시 13세의 어린 소년을 본가로 보내, 교토에 있는 예수회 학림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후 소년은 빈센트(Vincent)라는 세례명을 1603년 받게 되고, 나가사키에서 포교활동을 하게 된다. 이후 조선에 돌아가 포교활동을 하고자 중국으로 가게 되지만, 중국에서 조선입국이 원만하게 되지 않아 다시 일본으로 가서 활동을 하다가 나가사키에서 1626년 순교하게 된다.
‘빈센트 인센쇼 카헤이고(嘉兵衛)’로 불리던 이 조선인 전도사가 바로 우리가 흔히 조선인 최초의 신부라고 알고 있는 김대건 신부보다 무려 200년이나 앞서 조선인으로 신부가 된 사람이다. 물론 김대건 신부처럼 조선에서 선교활동을 하지는 않았지만, 분명 조선인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따라서 고니시 마리아는 일본 기독교 역사에서도 조선의 기독교 역사에서도 의미가 있는 인물인 것이다. 그녀의 위패가 있는 신사의 사당 내부를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입구의 큰 녹나무와 앞뒤로 두 개의 사당 건물에서 나름의 위용을 느낄 수 있었다. 수령이 500년 이상 되어 보이는 참 마음에 드는 녹나무이다. 아무튼 쓰시마 도주의 부인이었고, 이곳에 천주교를 전도한 사람으로 지금도 그녀를 추모하기 위해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이제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다가 우선은 대아호텔로 가서 오전 이즈하라항구에서 셔틀 카에 맡겨둔 짐을 챙겼다. 숙소가 있는 북섬의 사스나항까지 다시 이동해야 하기 때문이다. 호텔의 넓은 마당에 앉아서 커피를 한잔씩 한 다음, 사진도 찍고 바다도 보고 잠시 산책을 했다. 쉬었으니 이제 출발이다.
오후 가이드를 자청한 사스나의 작은 펜션 주인인 최용오 사장은, “개인적으로 쓰시마에서 가장 추천하고 싶은 유적지인 백제산성”이라고도 불리는 남섬의 북부에 위치한 ‘가네다성(金田城)유적’을 보러 가자고 했다.
이곳은 조야마(城山)라고 불리는 276M정도의 야산에 아소만의 일부인 ‘마구와지마(馬耙島)해상공원’의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무척 전망이 좋은 백제산성이다. 백제부흥군과 일본군이 나당연합군과 마지막으로 벌인 ‘백강 전투(白江 戰鬪, 白村江の戦い)’는 663년 8월에 백강(금강)하구 및 그 부근에서 벌어진 싸움이었다. 이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은 승리했다.
이 전투 이후 중국대륙에는 당나라가 맹주가 되어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새롭게 바뀌었고, 일본의 경우는 영토는 빼앗기지 않았지만 국방 및 정치제제의 변혁이 일어났으며, 백제부흥군의 활동은 끝이 났다.
가네다성은 백제부흥군들이 이곳 쓰시마로 피난을 와서 쌓은 산성으로, 667년 백제인들이 쌓았다고 하여 백제산성이라고도 불리는 방어용 성이다. 성터는 지난 1982년 일본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었다.
당시 백제의 유민들이 대거 몰려온 쓰시마는 나당연합군에 맞서는 군사거점으로 최전선에 있는 섬이 되었다. 조야마(城山)의 북쪽과 서쪽은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어 접근이 힘든 지형이고, 비교적 경사가 완만한 남동쪽은 3개의 성문이 있었다. 그 중에 제2성문과 제3성문은 아직도 일부 흔적이 남아있다.
당시 백제의 유민들은 산꼭대기에 돌로 석루를 만들었고, 산 둘레를 따라 감싸듯이 성벽을 쌓았다. 남동쪽 기슭은 비교적 완만한 경사면으로, 성벽에는 수문과 성문이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성의 중앙부에는 많은 건물터가 발굴되었으며, 병사들의 숙영지 등 중추기능을 하는 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1000년 넘도록 아무도 모르는 숨겨진 성이었던 이곳은 에도시대에, 쓰시마의 성인으로 칭송받는 ‘스야마 도츠안(陶山訥庵, 1657년~1732년, 유학자, 의사, 중농학자)’선생이 본격적인 조사와 연구를 시작하여 다시 세상에 알려졌다.
이후 러일전쟁 당시에는 산기슭을 개발하여 군사용 도로가 만들어졌고, 태평양전쟁 때 사용되었던 일본군 포대 터가 남아 있기도 하다. 현재는 일부를 등산로로 개방하여 이용하고 있다.
재미난 것은 이곳 성벽에 사용된 석재는 주로 석영반암과 사암 두 종류이다. 대부분은 석영반암을 사용하여 가공하지 않고 크게 부수어 쌓아 올렸다. 사암은 주로 빈 공간을 채우는 역할을 했으며, 성벽 상부에 올려 가로의 결을 맞추는데 사용했다.
석벽은 대부분 붕괴되어 이제는 거의 원형을 찾아보기 힘들지만, 아직 2.6KM정도가 남아서 흔적을 유지하고 있으며, 높이는 6M가 넘은 곳도 있어 사람을 압도하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우리들은 입구에 차를 주차하고는 천천히 등산로를 겸한 임도를 따라 올랐다. 좌우에 삼나무와 동백나무 등이 무척 좋은 곳이다.
산 중턱에 오르니, 바로 성의 흔적이 보인다. 정말 보기에 좋은 성의 모습이지만, 사실은 조망이 더 좋다. 방어용 성이라서 그런가 보다. 바다의 풍광이 마치 잔잔한 호수를 보는 듯하다.
이런 곳에서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대비하여 숙영을 하던 백제부흥군들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성벽을 따라 바다를 보면서 크게 20분 정도를 걸어본다. 중간 중간에 성문의 흔적도 보이고, 건물터나 망루 터로 추정되는 곳도 보인다.
지금은 아무도 없고, 그저 옛 성터에 불과하지만, 이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생각하니 별별 상상이 다 든다. 생각보다 높고 험한 구간도 있고, 그저 평탄한 구간도 있다. 위로 조금 더 올라가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깊은 숲 속이라 어둑어둑하고 음침하여 하산한다.
다시 천천히 걸어서 주차장에 돌아오니, 올라갈 때는 보지 못했던 나무지팡이 함이 있다. 그냥 한번 쓰고 버리고 마는 나무지팡이를 이곳에 모아두고, 나중에 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잘 모아두고 정리해 두라는 글귀도 보인다. 일본인들의 작은 배려를 다시 배우는 것 같다. 기념으로 함 사진도 한 장 찍고, 사람들의 얼굴도 한 장씩 담는다. 아무튼 1350년 전 백제인의 기억을 다시 회상하면서 걸었던 행복한 산책이었다.
이제 슈퍼로 가서 오늘 저녁으로 먹고 마실 요깃거리와 술과 음료를 조금씩 샀다. 도시락과 횟감, 문어를 샀고, 술은 쓰시마에서 유일하게 생산되는 청주인 ‘시라다케(白嶽)’를 큰 병으로 한 병 구매했다.
어두운 밤길을 한 시간 가량 달려 숙소가 있는 사스나로 갔다. 점심을 초밥으로 너무 많이들 먹어서 저녁은 간단하게 술과 안주를 겸한 약간의 요리로 하기로 했다. 나는 삶은 문어와 함께 청주를 한잔 했다.
술을 살 때는 그냥 무심결에 쓰시마 유일의 청주라고 해서, 지난번에 2번을 마신 경험이 있어서 사 왔는데, 유심히 상표를 보니 시라다케(白嶽)를 우리말로 읽으면 백악이다. 대통령 탄핵인용이 된 날, 우리들은 청와대 이야기를 하면서 청와대의 뒷산이며 한양도성의 주산인 백악산(白岳山)과 발음이 같은 술을 탄핵주로 마시게 된 것이다. 참 특별한 인연이다.
늦은 시간까지 술과 안주로 배를 채우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특히 영화평론가인 강익모 선생은 “많은 사람들이 별로 볼 것이 없다고 말하는 쓰시마를 재발견하는 여행이 될 것 같다”라고 오후의 지나간 일정만 두고도 놀라워했다. 그리고 커피도 한잔하면서 차에 대한 이야기며, 연극, 영화와 일본의 기독교, 사진, 그림, 공학, 지리학 이야기 등 각자의 전공과 관련된 담화로 밤은 깊어갔다.
11일(토) 아침이 밝았다. 부지런한 몇몇 사람들은 벌써 산책을 나갔다가 돌아왔다. 나는 늦잠을 자고는 8시에 겨우 일어났다. 급히 세수를 하고는 아침식사를 위해 1층 식당으로 갔다. 역시 아침은 간단한 일본식이다. 오늘은 우리 일행과 주인장 및 손님이 있을 때만 방문하여 아침 식사를 준비해주시는 와다나베(渡辺)아주머님까지 9명이 식사를 했다.
나는 언제나처럼 밥에 낫토를 조금 올려 비비고는 된장국을 마시면서 식사를 했다. 잠시 한국 소식이라도 알 겸 TV를 틀었더니, 역시나 일본도 빠르다. 어제 탄핵을 당한 사람인데, 바로 “박씨(パク氏)”라고 칭하며, “실각되었고 이후 체포나 구속의 가능성이 있다”고 전하고 있다.
식사 도중에 와다나베 씨에게 “박씨와 동갑인데, 분위기는 조금 다르다”고 농담을 했더니, “저 사람은 성형을 많이 했다. 그래서 젊어 보인다. 일본인들 전부가 안다”고 웃으며 말을 하신다. 아무튼 재미난 세상이다.
식사를 마친 일행들이 잠시 쉬는 사이 고 선배와 나는 오늘과 내일 쓸 자동차를 두 대 빌려왔다. 이제 서서히 차를 몰아서 히타카츠항구 방향으로 가다가 좌측에 있는 ‘가와치(河內)’ 옆 산인 ‘유이시야마(結石山)삼림공원’으로 올라갔다. 이곳은 지금은 그냥 바다가 보이는 평범한 공원이고, 입구에 조생종 벚꽃이 있어 산책과 운동을 위해 찾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 이곳의 정상부는 임진왜란 당시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직접 올라 조선 침략을 위한 관측용 산성인 ‘유이시야마(結石山)성’을 쌓은 곳이다. 우리식으로 보자면 서울 한강변에 있는 아차산 보루(堡壘)와 비슷한 작은 규모의 산성이다.
그리고 만의 건너편 우쯔카타야마(擊方山)에는 공격용의 진지를 쌓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그 곳에는 자위대가 주둔하고 있다. 바로 두 산의 가운데 있는 ‘오우라(大浦)’에서는 임진왜란 때 선발 대장이었던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전함 700척이 집결하여 대기했던 곳이다.
이제 이해가 된다. 오우라의 전함들을 보호하고 지휘 통제하기 위해서 좌우측 산에 산성을 쌓고는 관측하고 지시도 했을 것이다. 이런 곳에 올라보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쟁을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은 산 중턱의 주차장에 올라 소화(昭和) 61년 지역의 단체에서 대한해협을 건넜다는 표지석도 보고, 작은 화장실도 있다. 그리고는 정상에 올라 산성의 흔적을 본다. 주변에 나무가 상당히 많아서 이제는 아래가 잘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이곳에서 멀리 조선을 지켜보면서 작전을 세웠을 것으로 보인다. 정말 무서운 곳에 올랐다는 생각이 든다.
건너편 산 정상에 있는 해상자위대 막사들이 조금은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이제 다시 천천히 내려와서 주차장의 화장실을 보다가 공학박사인 양인수 이사가 이곳 시설물의 정밀함에 놀라서 한마디 했다.
나무로 된 화장실 건물은 우선 하단에는 30CM 정도의 콘크리트와 철판을 지붕모양으로 설치하여 물이 뛰어 오르는 것도 방지했고 나무의 부패도 막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설치한 나무들은 방부목이다. 비가와도 일단은 안심이다. 그리고 상단의 나무들은 일반목이다. 지붕이 있어서 비가와도 걱정이 없다. 이렇게 3단 구조에 지붕은 철판으로 되어 있다.
외부의 나무를 고정하는 못은 철 못이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습기가 많은 화장실 내부는 청동 못으로 전부 박았다. 건물의 설계 시 기본대로 충실하게 이 시골의 공원 산언덕에 있는 작은 화장실에도 내실 있게 원칙을 적용하여 시공하고 감리한 것이다. 양박사의 설명을 듣고 보니 너무 놀라웠다. 이래서 일본은 나에게 배울 것이 많은 곳인가 보다.
이어 우리들은 한국전망대가 있는 쓰시마 북쪽의 ‘와나우라(鰐浦)’로 갔다. 와니(鰐)는 일본어로 ‘악어’라는 뜻으로 와니우라는 악어포구라는 의미이다. 악어 이빨과 같은 바위섬이 바다 한가운데 늘어서 있기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곳의 와니는 백제인으로 일본에 유학을 전해준 왕인(王仁)박사의 일본식 발음이기도 하다. 왕인 박사가 처음 일본으로 갈 때 이곳을 거쳐 갔다고 전한다. 와니우라는 포구가 커서 선박을 정박시키기엔 알맞지만 북쪽 포구 앞바다에는 암초가 많고 얕은 여울이 있어 조류가 제법 센 곳이다.
나는 한국전망대에는 두어 번 왔다 갔지만, 늘 밤에 와서 전망대 아래를 정확히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는 제대로 볼 기회가 생겼다. 전망대 입구 오른쪽 아래에는 '조선국 역관사 순난지비(朝鮮國 譯官使 殉難之碑)'라는 비석과 함께 표지석과 안내문이 있다.
조선 숙종 29년(1703) 음력 2월7일, 부산에서 한천석, 김영민, 김수영을 비롯한 조선의 외교관들이 승선하여 출발한 배가 이곳 와니우라 앞에서 침몰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선박3척, 수장된 역관사 108명, 대마도 출신의 선원 4명이 사망했다. 이때 죽은 역관사들의 고국인 부산이 바라보이는 언덕 위에 조난자의 영혼을 달래주기 위해 1991년에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은 전체 112개의 영석으로 만들어졌다. 사망자 112명을 추모하는 뜻이다. 옆에 있는 표지석과 안내의 글은 쓰시마 소가종가의 문고를 정리하다가, 당시 수장된 112명의 명단이 발견되어 이름 전부를 돌판에 새긴 것이다. 옆에는 배의 형상을 새긴 돌도 있다. 이것들은 지난 2003년 세운 것이라고 한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21대 쓰시마 도주 소 요시자네(宗義眞)가 사망했고, 23대 도주 소 요시미치(宗義方)가 취임을 하게 된다. 이를 조문하고 축하하기 위해 오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당시 사절단은 요즘으로 보면 외교관들과 함께 무역을 하는 상인, 선원들로, 규모로 보아 조선통신사라기 보다는 공무원들이 쓰시마 번에 출장을 오가던 공무 중 사고였던 것이다.
1719년 이곳을 지난 조선통신사 신유한은 해유록(海遊錄)에 “바다 한가운데 늘어선 큰 돌들이 마치 고래의 어금니와 범의 이빨 같았다. 그 가운데 배가 들어가 한 번만 실수하면 부서지고 엎어지기 십상이다”라고 기록했다. 그 만큼 위험한 곳이라 그런지 요즘은 드나드는 배가 거의 없어 보인다. 일단 우리 일행은 잠시 추모를 하고는 전망대 안으로 입장했다.
탑골공원에 있는 팔각정과 비슷한 지난 1997년에 세워진 한국전망대다. 맑은 날이면 부산이 보인다. 전망대 내부에는 조선통신사에 대한 다양한 자료와 부산 야경사진이 전시돼 있다. 전망대 앞 ‘우니지마(海栗島)’에는 자위대 기지가 보인다. 전망대 바로 아래 언덕에는 한국이 원산지인 이팝나무 3천여그루가 숲을 이루고 있다.
쓰시마의 시목(市木)인 이팝나무 군락지가 있는 이곳에는 높이 15m, 둘레 70cm에 달하는 나무들이 엄청나게 많다. 일본에서는 귀한 이팝나무는 쓰시마에는 여기에만 자생하고 있다. 매년 축제가 열리는 5월 초순경 1.5~2cm의, 꽃잎이 4개로 갈라진 순백의 꽃이 활짝 피어 마치 눈이 내린 듯한 풍경이 앞바다에 비쳐 마치 무릉도원을 연상케 한다. 1928년 이곳은 이팝나무 자생지로써 국가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5월에 다시 방문하도록 하자.
이곳 전망대의 뒷산이 바로 ‘고라이야마(高麗山)’다. 산에는 나중에 올라보기로 하고 이번에는 우측 바다 쪽으로 더 나가 있는 ‘구노시타자키(久ノ下崎)’로 천천히 걸어갔다. 동백나무가 무척 좋은 곳이지만, 사실 이곳에는 일제 강점기 1929년~24년까지 조선인 징용자 2만 명을 동원하여 만든 ‘토요호다이아토(豊砲台跡)’가 있다.
지하에 터널모양으로 만들어진 포탑포대로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그리스를 점령한 독일군이 보스포러스 바위 절벽 아래 설치한 포대였던 ‘나바론 요새’를 연상하게 하는 곳이다. 포탑(turret)이란 적의 화기나 공중폭격으로부터 포, 사수, 포실(砲室) 등을 방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강철제의 장갑구조물이다. 원래 대형전투함의 포에 채용되었으나 요새에도 설치된다.
20세기 초에 발명된 유압식 구동장치에 의하여 무거운 포탑을 자유롭게 운동시킬 수 있게 되어 현대적인 포탑의 완성을 보게 되었는데, 그 후 각국의 주력함에 포탑을 설치하는 것이 보편화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후 개발된 미사일이 각종 군함에 설치되자 포탑으로는 그것을 막을 수 없게 되어 최근에는 거의 사용되지 않게 되었다.
일본제국시대에 쓰시마에 31개의 포대가 설치되었다고 하며 이곳의 포는 사정거리가 30KM에 달하는 대형 포탑포대였다. 위에서 바라 본 아래의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지나가는 어르신에게 물어보니 “전쟁 때 쓰던 포대의 흔적”이라고만 했다. 위에서 보는 것보다 직접 들어가 보기 위해 아래로 이동했다.
입구에서 들어가 보니 정말 규모가 대단하다. 단순히 1층 구조가 아니라 2층으로 된 터널모양으로 실내에는 여러 가지 시설이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보았던 큰 구멍의 모습도 보았다. 아래에서 위를 보니 정말 대단해보인다.
어두운 길을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노동자들의 피와 시간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긴 곳에 서 있으니 무시무시하고 두렵기도 하다. 80여 년 전 이곳에서 고생했을 많은 사람들의 모습도 어른거린다. 정말 전쟁은 없어져야 할 재앙인 것 같다. 쓰시마에 여러 곳이 있다고 하니 다음에는 다른 곳을 한두 곳 더 가봐야겠다. 다시 한 번 쓰시마에 너무 많은 역사유적이 있음에 놀란다.
이어 히타카츠항구로 길을 잡아 작은 ‘미즈노에(みずのえ,壬)산사’를 둘러보았다.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는지 이곳 입구 안내판 앞에서는 포탄이 두어 개 보인다. 전쟁으로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복원을 한 듯한 느낌이 드는 신사이다. 이곳에서도 70년 이상 지난 전쟁의 상처를 발견하다니 정말 마음 아프고 안타까운 현실이다.
그리고 이제 식사를 위해 히타카츠항구에 있는 식당으로 갔다. 짬뽕과 양념돼지고기덮밥인 ‘돈짱동(豚ちゃんどん)’을 반반씩 주문하여 7명이 나누어서 먹었다. 나는 돈짱동이 생각보다 맛있어 쓰시마에 오면 자주 먹는 요리가 되었다. 그리고 부산에서 두 사람이 더 와서 총원 9명이 되었다.
이제 항구 인근에 있는 해안으로 갔다. 쓰시마는 주로 진흙이 융기하여 만들어진 점판암(粘板岩)토양이 많은데, 바닷가에 가면 파도와 소금의 영향으로 정말 재미난 모양의 바위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어 좋다. 우리들은 산책도 하고 조개도 잡고 성게도 만져보면서 잠시 쉬었다. 나는 오랜 만에 성게도 잡고, 굴도 따고, 톳도 땄다.
이어 어디로 갈까 고민을 하다가 쓰시마 북섬 동북에 있는 작은 반도인 ‘시타자키(舌崎)’로 갔다. 이곳은 미우다 해수욕장 인근에 자리하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사람의 출입이 제한되고 있는 곳이다. 안쪽에 50살이 조금 넘는 군사용 등대가 외롭게 하나 있고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바다 조망이 좋은 조금 넓은 터에 별장을 지으면 좋을 것처럼 보이는 곳이기도 하다.
차를 타고 미우다 해수욕장을 지난 언덕 위의 뒷길을 따라서 한참을 달리면 정말 좌우가 10M도 되지 않을 정도로 폭이 좁은 길이 나온다. 비포장도로에 좌우로 바다가 보이는 가운데 천천히 아슬아슬하게 길을 달리면, 출입을 금한다는 의미의 철망이 보인다. 인근에 차를 주차하고는 이제부터 한 시간 정도 걷는다.
우선은 좌측의 바다가 좋다. 멀리 일을 하고 있는 어민들의 모습도 보이고, 저 멀리 지나가는 배들도 보인다. 그리고 이곳은 순전히 동백나무 숲길이다. 좁은 길을 따라 동백 숲이 좋다. 직진하여 전진하면 바로 북쪽의 바다이다. 바닷가에는 정말 누워서 자라는 나무들이 보인다. 바람이 심하고 강하여 눕지 않고는 성장하기 힘든 환경인 것 같다.
이곳 나무 위에 살포시 누워보기도 하고 가지 위에 앉아서 사진을 찍는다. 풀밭도 아닌 나무 위에 올라앉거나 서서 사진도 찍고 걷는 기분이 묘하다. 그리고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잡아 등대가 있는 곳으로 간다. 정말 사람은 전혀 없고 작은 길을 따라서 동백을 보면서 가면 오랜 된 등대가 나온다.
무인등대 하나를 위해서 반도 전체를 비워둔 것 같다. 인적이 없지만 동백나무 숲이 좋아 볼 것은 많고 자연도 멋지다. 그러나 조금 무섭다는 생각도 든다. 등대를 살펴 본 다음, 다시 동쪽 바다를 본다. 아래에 바위들이 좋다. 점판암의 바위들은 정말 묘한 느낌이다. 강한 파도와 바람에 마치 차가 방금 지나간 것처럼 진하게 바퀴자국이 보인다. 자연이 만든 자국이 묘하다.
안쪽에 바다가 보이는 언덕에 ‘시타자키(志多崎)신사’가 보인다. 사람은 없고 건물도 변변치 않은 우리식으로 보자면 절에 딸린 작은 암자와 같은 신사이다. 정말 작은데 바다를 바라보고 있어 무엇인가 소중한 소망을 빌기 위해 이곳에 오는 사람들이 있을 것 같다.
인적이 드물고 너무 동백 숲이 좋아서 정말 세상의 사람들에게 꽁꽁 숨기고 싶은 곳이다. 이런 곳에 자리를 깔고 그냥 노숙을 하고 가면 좋을 것 같다. 2~3일 정도는 아무 생각 없이 쉴 수 있을 것 같다. 너무 조용하고 바다와 나무가 좋아서 속이 확 트이는 것 같다. 기분 좋다. 이번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멋진 곳이다.
이어 다시 길을 돌려 와니우라로 방향을 잡는다. 오전에 둘러보지 못한 마을과 함께 지난 2007년에 건립된 ‘백제국 왕인 박사 현창비(百濟國 王人 博士 顯彰碑)’를 살펴보았다.
백제의 영암 출신 학자로 알려진 왕인 박사는 우리 역사에는 기록이 없는 인물로, 일본 고대 역사서인 ‘고사기(古事記)’ ‘일본서기(日本書紀)’ ‘속일본기(續日本紀)’에 이름이 적혀 내려오는 학자이다. 일본에 논어 10권과 천자문을 전했다고 한다. 일본어로는 ‘와니(王仁)’ ‘와니기시(わにきし, 和邇吉師)’라고 표기되어 있다.
“백제에 현인이 있다면 일본에 보내달라”는 요청을 먼저 한 사람은 일본의 오진(應神)왕이었다. 이때 백제가 보낸 사람이 와니기시, 바로 왕인 박사이다. 그가 처음으로 ‘일본에 천자문과 논어를 전달하였다’ 하여 왕인을 일본에서는 유교와 한자를 가르친 원조라고 한다.
또 다른 기록에는 오진왕 15년(284), 백제왕이 일본에 아직기(阿直岐)라는 사람을 보냈는데, 아직기는 경전에 능해 태자의 선생이 되었다. 이때 왕이 아직기에게 ‘그대와 같은 훌륭한 박사가 또 있는가?’ 묻자, 아직기는 ‘왕인이라는 뛰어난 이가 있다’라 대답했다.
이에 일본 왕은 백제에 사신을 보내 왕인을 불러오게 했다. 드디어 16년 2월 왕인이 왔다. 태자는 왕인을 스승으로 삼아 많은 것들을 배웠는데, 모든 것에 거침이 없는 유식한 사람이었다. 아무튼 일본 기록은 전후좌우가 조금은 차이가 난다. 그래서 명확하지는 않다.
다른 기록에는 백제 17대 아신왕 때 왕인은 일본 오진왕의 초청을 받아 영암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다. 당시 왕인은 책 이외에도 도공, 야공, 와공 등 많은 기술자들과 함께 갔다고 한다. 그의 행적이 바로 일본 고대 ‘아스카(飛鳥)문화’의 원조가 되는 것이다.
아직도 왕인의 도일 연대는 3세기 후반인지 4세기 후반인지 명확하지 않으나, 왕인은 일본에 전해지는 백제문화의 상징으로서 당당히 자리하고 있다. 당시 일본 조정에서 문인직(文人職)의 시조인 서수(書首)라는 존칭을 왕인에게 내렸고, 백제군(百濟郡)또는 백제향(百濟鄕)이라 일컫는 지역을 주어 그의 후손들이 살 수 있도록 했다. 이외에도 왕인은 중국인이었는데, 백제로 왔다가 다시 일본으로 갔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6세기에 들어 백제는 일본에 대하여 새로운 문화시책의 하나로 왕인과 비슷한 최고 전문가인 오경박사들을 수시로 파견한다. 513년에 단양이(段楊爾)가, 3년 뒤에는 고안무(高安茂)가 교대로 일본으로 갔다. 이후 마정안(馬丁安), 왕류귀(王柳貴) 등이 연이어 다녀왔다.
554년에는 오경박사 외에도 역(曆)박사, 의(醫)박사 등이 교대로 일본에 파견되었다. 이들은 누구나 현지 어디에서든 환영과 존경을 받았다. 가르치는 대상은 왕족과 귀족이 중심이었지만, 나중에는 일반 서민에까지 배움을 전했다. 이 모두가 왕인으로부터 시작한 문화 전파의 위대한 길이었다.
현창비를 둘러보고는 기념촬영도 했다. 이제 와니우라 마을로 갔다. 마을은 생각보다 이쁘고 멋진 곳이다. 과거에 큰 항구가 있던 곳이라 그런지 집들도 좋고, 바닷가에는 많은 창고와 어민들의 조합 건물이 보인다. 요즘은 사람이 많지는 않은지 조용한 것이 산책하기에 좋은 곳이다.
5월 초순에 이팝나무 축제가 열리면 이곳 마을에서 올려다보는 조망이 무척 좋을 것 같다. 언덕 위에 있는 한국전망대까지는 나무 계단이 만들어져 있어 오르내리면서 나무도 보고 산책을 하면 최상일 것 같다. 아무튼 마음에 드는 작은 항구와 마을이다.
이어 우리 일행은 쓰시마에 오면 꼭 걸어봐야 하는 삼나무 숲으로 갔다. 차를 타고 10분 정도 이동하여 북섬의 중상단에 자리한 ‘미야마(深山)의 천세교(千歲橋)’앞에서 시작하는 트레킹로인 ‘조선통신사의 길, 사스나(佐須奈) 코스’로 갔다.
천세교에서 다시 차로 10분 정도를 달려서 조선통신사가 귀국길에 마지막 걸었던 길로 갔다. 차를 길옆에 잠시 정차하고는 삼나무 숲을 무작정 걷기도 하고, 잠시 쉬면서 명상도 하고 나무를 안아보기도 했다. 장난삼아 죽은 고목을 흔들어보기도 했다. 20분 정도 삼나무 숲을 거닐어 본 것으로 오늘의 숲 산책은 마무리 한다.
나는 삼나무 숲이 너무 좋다. 우선 온몸을 나무의 정기로 청소하는 것 같고, 맑은 공기가 기분을 최상으로 만들어 주기 때문이다. 소나무나 편백나무 숲만큼 행복을 주는 나무가 삼나무인 것 같다.
이제 쓰시마에서 가장 큰 평야지대이기도 한, 북섬 북서부 사고천(佐護川)유역의 평야를 차로 한 바퀴 둘러보았다. ‘혹시나 아직 남아있는 재두루미가 있나’ 하고 살펴보았지만, 이미 북으로 날아간 것 같다. 봄 농사 준비에 분주한 농민들이 간혹 보일 뿐이다.
이제 해가 질 시간이 다가온다. 길을 안내하는 고 선배는 갑자기 “일몰을 보러가자”고 하여‘센뵤마키산(千俵蒔山)’으로 방향을 잡았다. 차로 10여분 거리라 천천히 길을 잡았다. 산 중턱을 지나는데, 앞차가 갑자기 정차를 한다. 모두가 내려서 차를 살펴보니, 타이어가 펑크났다.
이런 시골 오지에서는 보험사의 긴급출동을 부르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역시 대단한 사람들이 많다. 순간적으로 장비를 준비하여 순식간에 펑크 난 타이어를 빼고 예비 타이어로 교체했다. 이번 일행들은 대부분 뛰어난 손과 머리를 가진 듯하다. 역시 어디를 가든 전문가가 많은 경우 걱정이 없는 것 같다. 차를 다시 몰아서 산 정상으로 갔다.
이곳은 역시 풍력발전기와 함께 바람이 좋은 곳이다. 우선은 풍력발전기 주변을 살펴본다. 시원한 바람도 좋지만, 최근에 억새를 전부 불을 질렀는지, 말끔하게 청소가 되어 있다. 바람이 많은 곳인데, 산불의 위험이 있어 보이는 이곳에서도 매년 봄에 억새 태우기 행사를 하는가 보다? 놀랍고 재미나다.
모두가 모여서 서쪽 하늘을 보면서 풍력발전기 아래에서 높이뛰기를 하기도 했고, 동서남북으로 전망이 좋은 곳이라 사진을 찍으면서 산책을 하기도 한다. 이어 북동쪽 ‘바람의 언덕’으로 이동을 했다. 순식간에 전화기가 진동을 한다. 이곳은 바로 부산이 보이는 언덕이라 로밍을 하지 않은 전화임에도 문자나 전화통화가 가능한 곳이다.
나는 순간적으로 사진을 몇 장 찍어서 가족에게 문자로 보내고는, SNS에도 풍광사진을 올려둔다. 재미나게도 경남 거제시라고 나의 위치가 등록된다. 이곳이 부산보다는 거제의 통신망과 자연스럽게 연결이 되는가 보다.
그리고 우리 일행과는 별개로 온 젊은 남녀가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언덕으로 올라오는 모습이 보인다. 멀리서 일몰의 풍경과 함께 이들의 모습을 사진으로 한 장 담는다. 멋진 연인의 모습이다. 젊은 친구들이라 그런지 그냥 자연스럽게 포옹을 하기도 하고, 손을 잡기도 하는 것이 아름다워 보인다.
이제 다시 풍력발전기 앞으로 왔다. 이곳의 서쪽 하늘은 일몰을 볼 수 있는 ‘노을의 언덕’이다. 저 멀리 서쪽 하늘 아래는 동백꽃이 유명한 ‘사오자키(棹岐)공원’이다. 예전에 일본군 요새가 있던 곳으로 일본의 최서북단이다. 거기에서 부산까지는 직선거리로 49.5KM로 정말 한국 땅이 바라보이는 곳이다.
서서히 해가 진다. 붉게 노을이 진다. 이곳 쓰시마에 와서 처음으로 보는 저녁 일몰과 노을이다. 어제 새벽 부산에서 일출을 보았고, 오늘은 쓰시마에서 일몰을 보게 된 것이다. 나는 우선 하늘에 기도했다. ‘올해는 가족 모두 건강하고 보다 좋은 일이 많기를’ 바랬다. 기분 좋게 일몰을 보고 나니 날이 컴컴해졌다.
이제 사스나의 숙소로 돌아가야 한다. 가는 길에 잠시 마트로 가서 필요한 물품을 조금 구매했다. 나는 별로 살 것이 없었지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 과자와 술, 음료 등을 구매하도록 도와주었다. 알코올이 조금 포함된 과실주를 한두 개 사왔다. 고 선배는 누구의 부탁을 받았는지, 과실주를 한 상자나 샀다. 그런데 민박으로 가지고 와서 박스를 살펴보니 손잡이가 너무 간단하면서도 튼튼하고 멋지다.
박스를 손으로 편하게 들 수 있도록 고리를 양쪽에 달고는 고정하는 테이프를 끝에 부착하여 보기 좋게 안정시켰다. 이런 아이디어 제품은 한국에도 있을 법한데 아직은 보지 못한 것 같다. 기발한 생각인 것 같다.
이제 저녁을 예약해 둔 와다나베 아줌마가 경영하는 야끼니쿠(やきにく,焼き肉)집으로 갔다. 민박집에 아침을 해 주는 와다나베 아줌마는 사실은 고깃집 사장님이다. 민박집에 손님이 많은 경우에 방문하여 아침을 준비해 주신다. 그래서 우리 일행은 오늘 아침과 저녁에 이분에게 신세를 지게 된 것이다.
저녁7시를 조금 넘긴 시간에 식당에 도착하니, 젊은 여성2명이 자전거를 타고 왔는지, 안전모를 옆에 두고는 식사 중이다. 한국사람 같아서 말을 걸어보니, “남쪽 이즈하라로 와서 어제와 오늘 자전거 투어 중이라고 한다. 어제는 남섬에서 자고 오늘은 사스나에서 숙박을 한다”고 했다.
“어떻게 이렇게 작은 식당을 알게 되었냐”고 물어보았더니, “민박집 사장님의 소개로 이곳에서 저녁식사를 하고는 갈 생각”이라고 했다. 그래서 “우리도 같은 민박집에서 숙박을 하니 밤에 잠시 보자”고 했다. 우리들은 맛난 고기와 함께 따뜻하게 데운 청주를 한잔하면서 식사를 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안 박사가 “식사 전 마트에서 산 물건 가운데 사지 않은 물건에 돈을 지불한 것 같다”며, 영수증을 보여주었다. 앞 고객의 영수증과 중복이 되어 돈을 지불한 것 같아서, 마트로 전화를 했다. 그리고는 다시 마트로 차를 타고 갔다. 늦은 시간에 두 번째 마트 방문이다.
사지 않은 담배에 대해 지불한 돈을 환불받았다. 한 시간 전에 계산을 했던 어르신이 얼굴을 알아보고는 “미안하다”고 하고는 바로 환불처리를 해 주었다. 미리 전화를 해 두었기에 쉽게 기억을 하고는 원만하게 처리해 준 것 같다. 다시 마트에 온 김에 필요한 물건을 조금 더 사고는 숙소로 돌아갔다.
양인수 박사와 안 박사, 사진작가인 하성인 선생과 나는 술을 간단하게 한잔씩 하고는 오늘의 일과를 마쳤다. 내일 아침에는 조금 일찍 일어나 사스나 읍내 산책을 하기로 약속을 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12일 일요일 아침이 밝았다. 6시 30분에 일어났다. 세수를 하고 나니 벌써 양 박사와 안 박사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산책을 하기로 했기에 우선은 인근의 집들을 살펴보고는 항구 쪽으로 갔다.
공학 전공인 양 박사는 집의 모양은 물론 지붕과 처마의 나무 하나하나에도 앞부분에 쇠를 부착하여 부식을 방지한 것이나, 대문과 현관의 모습도 나름 아기자기하게 조형미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마당의 조경도 특별한 점을 소상히 설명해주어서 재미난 산책이 되었다.
다시 길을 나서니 우측에 법원, 소방서, 체육관이 보인다. 인구 1,000명 정도 되는 소읍에 이런 시설이 있다니, 놀라겠지만 사실 이곳은 불과 20~30년 전까지만 해도 북섬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그리고 읍사무소와 경찰서가 있다. 바로 옆에는 작은 야구장도 있다.
그리고 강을 따라 조금 더 내려가니 멋진 집들도 보이고 언덕 위에는 마을회관도 있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 항구방향으로 나가보니 경찰서 소유의 배와 경찰서 관사가 있다. 국토교통국에서 설치한 수준점 표석도 있고, 야마네코 조각도 있다. 야마네코를 앞에 설치한 화장실도 있다.
가로등에도 불빛이 빛나는 곳에 야마네코 모형이 있다. 정말 쓰시마는 온통 야마네코의 고장인 것 같다. 술, 빵, 과자, 소금 등등 상표도 다양하게 있는 것 같다. 사람이 정말 없는지 한 시간 반을 걸어 다녀도 별로 만나게 되는 사람이 없는 것 같다. 너무 조용한 어촌이다. 그냥 시골마을을 산책한 것처럼 행복하게 걷고는 민박집으로 돌아왔다.
일요일 아침이라 숙박 객이 많아서 아침을 두 조로 나누어서 먹었다. 다른 손님들은 8시에 다들 먹고, 우리 일행은 8시 30분에 식사를 했다. 어제와 같은 메뉴였지만 나는 된장국과 낫토를 밥에 비벼서 맛나게 먹었다. 와다나베 아줌마는 정갈하게 밥과 반찬을 잘하는 것 같다.
식사를 하면서 아줌마에게 가족이 어떻게 되냐고 물어보았더니, “딸이 하나 있는데, 시집가서 후쿠오카에 살고 7개월 된 손자가 하나 있다”고 했다. “무슨 일을 하냐”고 물었더니만, “그곳에서 물장사를 한다”고 했다.
아무리 직업관이 다른 일본이라고 하지만, 더 이상 물어보는 것이 이상한 것 같아서 그냥 웃고 말았다. 아무튼 재미나고 좋은 아주머니다. 나이가 나 보다 열여섯 살이나 많지만 앞으로는 ‘누님(あねき,姉貴)’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마을의 우측으로 길을 잡아서 나왔다. 조금 가니 벌써 꽃이 핀 벚나무가 여러 그루 보인다. 어제 본 것과 비슷한 조생종인가 보다. 꽃이 좋다. 사진 몇 장을 찍고는 앞으로 갔다. 사스나를 대표하는 신사가 보인다. ‘시마오쿠니다마미고(島大国魂御子)신사’다. 그냥 보기에는 절과 같은 분위기가 나는 곳이다.
도리이를 두고 바로 앞에 큰 삼나무가 한 그루 보인다. 대략 500살 이상은 된 것 같은 큰 나무다. 그리고 우측에 두 개의 부부 삼나무도 보인다. 신사의 운치를 더해주는 멋진 나무들이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 본당 앞에 가면 천년은 되어 보이는 ‘무환자(ムクロジ, 無患子, 무쿠로지)’나무가 보인다.
추위에 약해 한국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무환자(無患子)나무는 환자가 생기지 않는다는 뜻을 가진 나무다. 흔히 무환수(無患樹)라고도 하며 근심과 걱정이 없애주는 나무다. 도교에서는 무환자나무를 어느 가정이나 뜰에다 심어두고 온갖 걱정근심을 다 떨쳐버리면, 나무와 함께 자연히 무병장수의 행복을 누릴 수 있다고 믿었다.
불교에서는 주로 염주나무, 보리수나무라고 하는데, “무환자나무 열매 108개를 꿰어서 지극한 마음으로 하나씩 헤아려 나가면 마음속 깊숙한 곳에 들어 있는 번뇌와 고통이 없어진다”라고 전한다. 열매 껍질과 줄기, 속껍질에는 사포닌 성분이 들어 있어 인도에서는 빨래를 할 때 잿물처럼 사용했다. 열매 껍질 삶은 물로는 머리를 감을 때 비누대신 쓴다.
쓰시마 북섬에서 가장 오랜 된 무환자 나무라고 한다. 누구든 꼭 보고 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신사를 살펴본 우리들은 더 안쪽으로 길을 잡아서 간다. 저 멀리서 요란하게 기계소리가 들린다. 불을 피우는지 연기도 난다.
가까이 가 보니 어르신 50여명이 밭에서 제초기로 풀을 베기도 하고, 일부는 풀을 태우고 있었다. 봄이라 경작을 준비하는 것 같은데, 이런 곳에서 단체로 일하는 모습이 조금은 이상해서 밭으로 들어가 물어보았다.
“무슨 일로 이렇게 단체로 나와서 일을 하고 계시는 거죠”라고 내가 물어보았더니, “최근에 지역의 노인 58명이 새롭게 노인회를 만들었는데, 올해 첫 사업으로 공동 텃밭에 농작물을 심기위해 일을 하는 거야”라고 했다. “그런데 밭농사를 지어서 뭘 하시게요”라고 내가 반문을 하자, “이곳에서 수확되는 것으로 지역 어린이들을 위해 장학 사업을 할 예정이야”라고 한다.
아침에 산책을 할 때는 사람도 없는 조용한 시골 같더니만, 이곳에 오니 지역 어르신들이 다 모인 것 같다. 아무튼 아이들도 별로 없는 곳 같은데, 장학 사업을 위해 공동의 밭을 경작한다고 하니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래를 위한 바른 투자인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사실 쓰시마 어르신들이 쓰는 섬 지방 특유의 사투리는 특히 알아듣기 어려워서, 나는 두 명의 어르신들에게 번갈아 가면서 물어보아 겨우 알아들을 수 있었다. 한국말은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만, 일본어는 서툰 도쿄(東京) 표준어를 쓰는 나는 사실 쓰시마 어르신들의 말은 70~80% 정도만 알아듣는 것 같다. 어렵다.
아무튼 두 사람에게 여러 번 질문과 답을 들어서 겨우 이해를 해서 기분이 좋았다. 나중에 오면 이곳의 한국인 몇 사람을 모아서 장학금을 따로 준비해 봐야겠다.
재미난 구경을 하고는 안쪽으로 더 가서는 삼나무 숲을 조금 더 걸었다. 아침공기가 남다르게 더 좋다. 자! 이제 다시 출발이다. 오늘은 점심을 도시락으로 하기 위해 다시 어제 저녁에 방문했던 마트로 갔다. 각자 자신이 먹을 도시락을 하나씩 구매했다. 그리고 물과 약간의 빵, 샐러드도 조금 샀다.
평소 아침과 점심만 먹는 나는 늘 여행 와서 과식을 하게 된다. 세 번의 식사가 위에 무리를 주는지, 오늘 점심은 그냥 샐러드를 조금 먹는 것으로 준비했다. 다시 차를 타고는 히타카츠항 북쪽 ‘니시도마리(西泊)’에 있는 ‘곤겐야마(権現山)삼림공원’에 올랐다.
높지 않은 야산이었지만, 북섬의 동북부 해안을 전부 조망하는 것이 가능할 정도로 시야가 좋았다. 전망이 좋은 곳이라, 사실은 캠핑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에 나무가 있고 중간에 풀밭과 원두막도 있어 쉬기에 편한 곳이다.
여름에 이곳에 와서 캠핑장이 만원이면 이곳에 올라 한 두 가족 정도는 캠핑을 하면 괜찮을 것 같아 보인다. 무척 마음에 드는 곳이다. 조금은 한가한 4월과 5월에는 하루 정도 캠핑에 도전해야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가는 길에 마지막으로 동백나무 숲을 보기 위해 ‘도노사키(殿崎)’의 ‘일러우호의 언덕(日露友好の丘)’으로 갔다. 정말 이곳은 올 때 마다 방문하는 곳이지만, 무척 마음에 드는 곳이다. 사실 아침이나 해거름에 오면 더 좋은 곳인데, 오늘은 한낮에 왔다. 오늘도 나는 반대방향으로 걸었다. 몇 번을 순방향으로 걸었는데, 지난번부터는 반대로 걸어보니 더 좋은 것 같다.
이번에는 동백나무 숲길 보다는 아래로 내려가서 주로 바다를 보았다. 생각보다 잔잔히 바다가 좋은 날이다. 조개를 잡기도 하고, 톳을 따기도 했다. 공중에 매가 날아다닌다. 이곳에 살고 있는 매는 언제나 사람을 경계하는지 올 때마다 등장한다. 러일전쟁 당시의 러시아 수병처럼 조심스럽게 다녀도 매의 눈에는 내가 너무 잘 보이는지 늘 이놈에게 감시당하는 느낌이 든다.
물놀이까지 잠시하고는 길을 돌아서 나왔다. 이곳은 열려있는 동백 숲이 멋진 곳이다. 어제 방문했던 시타자키의 동백 숲은 닫혀있는 느낌이 든다면 이곳은 개방감이 뛰어나다. 자! 이제는 점심을 먹기 위해 미우다 해수욕장으로 길을 잡는다.
가는 길에 매 바위를 잠시 바라본다. 이곳에도 매 한 쌍이 살고 있다. 망원경으로 보면 바위 위에 그냥 집을 짓고는 살고 있다. 천적이 없는 바위섬이라 안심하고는 집을 지은 것 같다. 해수욕장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 이웃한 동백나무 숲을 지키고 있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매가 이곳의 주인장인 것은 틀림없어 보인다.
해수욕장을 천천히 둘러보고는 한 귀퉁이에 있는 원두막으로 갔다. 이곳에 도시락을 펼치고는 단체로 식사를 했다. 각자가 다른 도시락을 선택한 관계로 형형색색이 좋다. 나는 풀을 잔뜩 먹었다. 다시 위장이 건강해지는 것 같다. 속이 편안해졌다.
식사를 마친 우리들은 천천히 항구로 갔다. 표를 준비하고는 차를 한잔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차를 빌려준 김삼관 사장의 차고를 두 번이나 오가면서 차를 반납했다.
그리고 항구로 돌아와 김 사장이 타고 다니는 1인용 자동차를 타보기도 했다. 50만 엔 정도한다는 작은 자동차는 휘발유를 쓴다. 50CC 오토바이 정도의 마력을 가지고 있지만, 인근을 오가는 데는 좋을 것 같아 보였다. 하지만 약간 위험해 보이기도 하다.
다들 찻집에서 지난 3일 동안의 일정과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나는 영화평론가인 강익모 선생의 말에 많이 공감했다. 주요 내용은 “생각보다 쓰시마는 역사적으로 볼 것이 많은 곳이다. 특히 첫날 본 고니시 마리아의 사당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기독교와 한국 기독교의 미묘한 차이를 조금 더 공부하고 싶다”라고 했다.
또한 나에게 “아쉽게도 고니시 유키나가 가문의 문장이 지난 수십 년간 서울시의 상징 문양이었던 부끄러운 기억도 있다”라고 알려주었다. 나도 자료를 더 찾고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들 “나름대로 멋진 쓰시마 여행이 되었다”고 했다. 특히 “맑은 공기에 시원한 바람과 삼나무, 동백나무, 편백나무가 좋고, 바다도 아름다웠다”고 했다.
조금 더 쉬면서 산책을 하다가 3시 30분에 출발하는 배에 올라 부산으로 향했다. 조금은 피곤했지만, 배는 정확하게 70분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부산항 인근에서 저녁식사를 한 다음 각자의 시간에 맞추어 출발을 했다. 나와 고 선배는 가지고 온 차를 몰고는 서울로 향했다. 이제부터 4시간 정도를 달려가면 서울에 닿는다.
행복하고 즐거운 쓰시마 여행이었다. 이번에는 전쟁의 상처가 있는 쓰시마를 다시 발견한 것 같다. 다음 달에 가면 임진왜란 때 만들어졌다는 조선인 병사들의 귀 무덤에 꼭 한번 갈 생각이다. 행복한 여행이었다. 이제 쓰시마에 대하여 4/10 정도를 알게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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