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관한 시모음 85)
내 곁에 여름이 떠나가도 /운봉 공재룡
열대성저기압에 탓도 있겠지만
숨 막히는 찜통더위 원망하며
장마철이 지겹다며 살아갑니다.
천둥 번개 요란하게 호통치고
한차례 소나기가 쓸고 지나면
고운 일곱 빛깔 무지개가 피네요.
때로는 숨 가쁜 삶들이 잊혀도
개여울과 바닷가 추억 남겨준
내 생애 여름이 몇 번 더 올까요.
우리 곁을 떠나버릴 이 여름도
언젠가는 빛바랜 앨범에 남아
추억 먹고 사는 그날이 오겠지요.
여름의 할 일 /김경인
올여름은 내내 꿈꾸는 일
잎 넓은 나무엔 벗어놓은 허물들
매미 하나 매미 둘 매미 셋
남겨진 생각처럼 매달린
가볍고 투명하고 한껏 어두운 것
네가 다 빠져나간 다음에야 비로소 생겨나는 마음과 같은
올여름의 할일은
모르는 사람의 그늘을 읽는 일
느린 속도로 열리는 울음 한 송이
둥글고 오목한 돌의 표정을 한 천사가
뒹굴다 발에 채고
이제 빛을 거두어
땅 아래로 하나둘 걸어들어가니
그늘은 돌이 울기 좋은 곳
고통을 축복하기에 좋은 곳
올여름은 분노를 두꺼운 옷처럼 껴입을 것
한 용접공이 일생을 바친 세 개의 불꽃
하나는 지상의 어둠을 모아 가동되는 제철소
담금질한 강철을 탕탕 잇대 만든 길에,
다음은 무거운 장식풍의 모자를 쓴 낱말들
무너지려는 몸통을 꼿꼿이 세운 날카로운 온기의 뼈대에,
또하나는 허공이라는 투명한 벽을 깨며
죽음을 향해 날아오르는 낡은 구두 한 켤레 속에,
그가 준 불꽃을 식은 돌의 심장에 옮겨 지피는
여름, 꿈이 없이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는
그러니까 올여름은 꿈꾸기 퍽이나 좋은 계절
너무 일찍 날아간 새의
텅 빈 새장을 들여다보듯
우리는 여기에 남아
무릎에 묻은 피를 털며
안녕, 안녕,
은쟁반에 놓인 무심한 버터 한 조각처럼
삶이여, 너는 녹아 부드럽게 사라져라
넓은 이파리들이 환해진 잠귀를 도로 연다
올여름엔 다시 깨지 않으리
여름노래 /김정환
그대가 가난한 내 앞에서 펼쳐 보이는
그대 이제사 드러난 절약의 종아리도 채 못 적시는
한여름, 걷어올린 개울 물장구침이여
그대가 정성껏 제게 드린
그 사소한 살아있음의 기쁨, 깊이의 얕음이여
개울에 비껴 비친 햇살은 흐드러만 져
햇살 저편은 벌거숭이로 물쌈하던 어린 시절, 반짝여대는 추억들의 부서짐.
그래도 나는 가난하고
그대 참음의 발바닥에 느껴지는 자갈밭의 무딘 아픔.
그러나 그러나 나는 이제 알겠다
그대가 진정 가난한 나를 사랑하는 줄
그대가 진정 나의 의로운 가난을 사랑하는 줄
그대가 진정 이렇게 얕은 기쁨 속에서
깊이 깊이 나를 사랑하는 줄
그대 어색한 고개 도리질에, 눈물빛에
지난 여름은 치열하였다 /마경덕
매미는 바락바락 악을 쓰며 울고 수세미는 아침마다 노란 꽃을 수십 개씩 피웠다.
해가 지면 시들어버릴 꽃들이 기를 쓰고 피었다. 대부분 실속 없는 수꽃이었다.
먼 곳에서 호박벌이 날아왔지만 목을 뽑고 암꽃을 기다린 수꽃들은 해를 따라 지고 말았다.
능소화도 질세라 줄기를 밀어올렸다. 엎치락뒤치락 자리싸움을 하더니 얼마 가지 않아
수세미는 능소화를 제압했다. 넓은 이파리를 펼쳐 햇빛을 가로채던 수세미는 기어이
능소화를 덮어버렸다. 그늘에 든 능소화는 틈을 노리고 치솟더니 가지 끝에 주홍빛
꽃송이를 매달아 그늘 사이로 내밀었다. 첩의 입술 같은 붉은 꽃이 속엣말을 수세미
발등으로 쏟아놓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세등등 이파리만 무성한 수세미는 옥탑
지붕까지 기어오르더니 바지랑대를 휘감기 시작했다. 빨래를 널러간 나는 수세미의
덩굴손을 풀고 고개를 돌려 세웠다. 녀석이 방향을 틀어 다시 왔던 길을 기어가고 있었다.
싸움에서 등을 보인다는 것은 아무래도 불안한 일이었다. 목을 조일 듯 달려들던 넝쿨이
돌아서자 살구나무도 적이 안심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른 봄 재빨리 꽃을 털어내더니
어느 틈에 어린살구를 잔뜩 품고 있었다.
비가 내리자 텃밭에서 뽑혀나간 달개비가 살아났다. 빗물에 입술을 적시더니 뿌리를
드러낸 채 보랏빛 꽃을 매달았다. 말라가던 잎이 물기를 머금고 기운을 차리고 있었다.
식물에게 비는 단순히 물이 아닌 피와 다름없었다. 버려진 잡초가 수혈을 하듯
비를 맞고 있었다.
첫 열매를 품었던 모과나무도 끝까지 모과를 놓치지 않았다. 모과나무가 여름 내내
집중한 건 모과 한 알이었다. 첫 태에 맺힌 주먹만한 모과 하나가 그 나무의 전부였다.
새끼를 품은 어미는 비바람도 두렵지 않았다. 낙과는 곧 낙태였다.
몇 번의 비바람에 앞산이 부풀어 오르고 산빛이 짙어졌다. 그 사이 신축 중이던 건너편
아파트가 산의 이마까지 기어올랐다. 래미안, 우성, 주공, 그린우성, 현대…하나 둘 생겨난
고층건물들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앞산에서 날아오던 산새들, 새똥에 묻어온
풀씨들이 고물고물 태어났다. 까마중 익모초 제비꽃 민들레 애기똥풀… 그 작은 목숨들을
보며 생명이라는 말에 무릎을 꿇고 싶었다.
내가 아끼던 풍경들이 차츰 지워지고 있었지만 여름은 더욱 치열하여 가지에 오종종
들러붙은 무화과는 자고 나면 불쑥 튀어 올랐다. ‘불쑥’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자고 나면 마치 유리공이 유리대롱을 불듯 볼록볼록 솟았다. 혹부리 영감처럼 다닥다닥
혹을 매다느라고 무화과나무는 한눈 팔 겨를이 없었다. 푸른 갈기를 휘날리던 한여름이
투레질을 하며 건너갈 때 밤새 무화과가 뒤척이는 소리를 들었다. 제 속에 품은 꽃이
벙글고 있었다. 끝내 숨길 수 없는 꽃잎 때문에 무화과는 쩍쩍 가슴이 벌어졌다. 몸 깊이
숨겨둔 붉은 꽃잎이 불거져 나올 때쯤 직박구리 부부도 몇 차례 다녀갔다. 참새 떼의
짓인지 직박구리 짓인지 말랑한 무화과는 꼭지만 남아 있었다. 무화과를 먹는 것은 꽃을
먹는 것. 단물 든 대추는 쳐다보지도 않던 새들이 꽃을 알아보는 것이었다.
비에 젖은 골목은 더 깊어졌다. 하수구는 입을 벌리고 오물오물 물줄기를 받아 삼켰다.
젖은 벽에 곰팡이가 피어도 가난한 사람들은 눅눅한 지하방을 떠나지 않았다. 우기는
지루하고 따분했다. 집이 없는 비둘기들도 전선(電線)에 앉아 고스란히 비를 맞았다.
빗소리만 오가는 음산한 골목, 길바닥에 버려진 우산이 처량했다. 우산살이 꺾여 엉거주춤
날개를 늘어뜨린 병든 새 같았다. 우산에게도 날개가 있었다니!
골목엔 몇 마리의 비둘기가 살았지만 아무도 비둘기에게 집을 내주지 않았다. 둥지를
틀만한 공간은 라면상자로 틀어막아 한 뼘 깃들 곳이 없었다. 빗속에 웅크린 새들의
날개가 무거워 보였다. 내가 생각하는 날개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새들을 받아 안던
허공도 속수무책 젖고 있었다.
비가 그치자 보도블록 틈을 비집고 자라던 민들레가 때늦게 노란 꽃 한 송이를
들어올렸다. 흙 한줌 없는 바닥을 붙잡고 가녀린 꽃대궁을 끙끙 들어 올리는 중이었다.
발을 멈추고 바라보는 순간, 골목이 환해졌다. 둘러보니 바랭이 명아주도 가까이 살고
있었다. 모두 딱딱한 바닥을 붙잡고 있었다. 새들이 사라진 전선에는 수정 같은
물방울꽃이 물구나무로 매달려 있었다. 골목은 여러 목숨을 품었다.
불볕이 이어지고 방심하는 사이 화분이 마르고 나뭇잎이 타들어갔다. 폐지를 줍는
노인의 리어카가 골목에서 사라지고 대낮에 반지하가 털렸다. 가스배관을 타고 삼층까지
올라간 남자도 있었다. 찬바람이 불도록 빈집을 털던 좀도둑은 잡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창문을 닫아걸고 출근했지만 창문은 서랍 같은 것이었다.
더위가 한풀 꺾이자 방을 세놓는다는 종이도 대문에 나붙고 푸들을 찾아주면 사례금을
주겠다는 전단지도 전봇대에 붙었다. 목격자를 찾는다는 현수막은 여름이 다가도록
건널목에 걸려있었다. 삼복이 지나자 지병에 시달리던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걸어나왔다.
여름은 그늘을 키우고 있었지만 그늘은 내 몫이 아니어서 여전히 삶은 치열하였다.
전철에 가방을 두고 내린지 얼마 후 아끼던 지갑을 택시에 놓고 내렸다. 가방과 지갑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그해 여름 /김정웅
마지막 매미 소리에 목이 졸린 저녁
한낮의 태양마저 숨이 차 질식하였다
답답한 늦은 구름이 산허리에 걸려
참았던 불쾌지수를 높이며
눅눅한 석양을 만들었다
지난하게 버텨왔던
기만적인 자만을 비웃기라도 하듯
곰팡내 나는 쓰디쓴 여름이
비틀거리며 발목을 잡았던 건
나의 어설픈 윤리가 교살된 것이 아니라고
어쩌면 자살일거라는,
무서운 환상이 섬광처럼 솟아오른 여름 날
숨 막히는 무더위처럼 찾아온 심근경색
스텐트로 부풀려진 양심의 관상동맥을 위해
니트로글리세린 한 알 혀 밑에 넣고
깨끗한 피 한 방울이라도 찾으러
양심에 채인 불안한 걸음을 걷던
그해 여름
손을 내밀기가 좁은 문 밖에서
깊게 자란 종유석이 절벽처럼
새벽부터 온종일 버티고 서 있었다
심근경색이 도질 때마다
그해의 여름도 목이 졸렸다.
* 니트로글리세린 : 협심증에 응급으로 투여하는 혈관확장제
여름 /나금숙
버스에서 내려
너의 집 앞으로 다가갈 때
외양간에서는 어미소가 선 채로 송아지를
막 떨어뜨리고 있었다.
내가 마당에 들어서기도 전에 송아지는
비척거리며 다리에 힘을 주더니
일어서서 겅중거렸다..
정오의 빛을 반사하는
갓 태어난 송아지의 털빛이란!
암소의 다리 사이로
기분 좋은 바람이 흘러 돌아나가고
여울에는 돌사과가
향내를 풍기며 썩어가고 있었다.
허리까지 우거진 잡초들,
풀벌레들이 소리 높여 울다가
갑자기 그치는 적막 속에서
너와 입맞추기 위해
멈춰 섰다.
미술관 소음 회화 앞에서
음향을 듣기 위해 단추를 누르듯이
모자를 한껏 젖히고.
강이 하늘에 걸리고
낮달이, 물고기들이 그 강을 건너고 있었다.
바쁜 여름 /박성우
상추 열댓 장 뜯고
열무 두어 포기 뽑아다 씻어
늦은 아침을 먹었다
사람이나 손수레만
건너다닐 수 있는
작은 다리에 걸터앉아
냇물과 먼 산을 바라보았다
발아래에서 올라오는
물소리는 세찼고
굽이 너머에 있는
먼 산은 멀리 있어 고요했다
뭉게구름이 뭉게뭉게
흘러가는 하늘은 넓었고
산바람이 보들보들
불어오는 골짝은 좁았다
여름이 깊어질수록
밭고랑 풀은 수북해지고
산등성이 그늘은 짙어지겠지,
서둘러 해야 할 일과
어지간히 늦춰도 좋을 일을
하릴없이 구분해보다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왜가리를 올려다보았다
세속 여름 /이재연
늘 그랬듯이
더 이상 나빠지지 않으려고
다시 전화를 받고 전화를 끊는다
아는 사람과 알고 싶은 사람의 차이
알고 싶은 사람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모두 아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그것이 편해 따뜻한 물을 마시고
반쯤 죽은 아이비 화분에 물을 준다
지구는 펄럭이고 현수막처럼 아침이 오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사람을 보내버리고
냉장고 문을 열고 냉장고 속을 바라본다
샐러드 속의 단백질의 관점에서 나는
지나가지 않으려고 한 사람들을
끝없이 지나가게 하는 사람
갑자기 안이 밖이 되고
밖이 안이 되어 이르기를
누구나 다 마찬가지, 마찬가지로 같아
무궁화 꽃이 피고 곰팡이 꽃이 피고
옥수수, 옥수수 텅 빈 하늘로 솟고
술 먹고 술 안 먹었다고 하는
너의 목소리 빛나고 아프다
그 여름의 일기 /안지순
지루한 장마가 이어지는 여름
딸아이가 곧잘 울면서 집에 온다
같은 반 남자아이가 괴롭힌다는 것이다
며칠 아이의 눈물을 보자
홍수처럼 밀려온 괘씸함에
학교에 전화를 하고
마음이 놓이지 않아
딸아이를 앞세우고 그 애 집에 갔다
그늘 진 마당에 널어놓은
낡은 옷가지들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는 집
마루에 홀로 앉아 있는 아이에게
엄마는 어디 계시냐고 물어도
먼 하늘만 보고 있다
그 여름에는
집 앞에 내놓은 책과 박스들이
며칠 새로 말끔히 치워지기도 했다
장마가 그치고 하늘이 높아지던 어느 날
딸아이가 문집을 들고 왔다
무심코 받아 넘겨보는데
그 아이 이름이 눈에 띈다
무슨 글을 썼을까
걔는 엄마 아빠가 없어서
할머니랑 둘이 살아
글도 안 써와서 혼자 남아서 썼어
무심한 딸아이의 말을 넘기듯
책장을 넘긴다
혼자 남아 글을 썼다는
아이의 글은 세 줄이다
제목 : 할머니
우리 할머니는 박스를 판다
할머니는 팔이 아프다면서 밥을 한다
할머니가 불쌍하다
여름이 다가오면 /남원자
싱그러운 초록 잎들이
너울너울 블루스 춤추고
바람과 함께 입을 맞춘다
개망초가 나 좀 봐요
함께 손잡고 놀자고
궁딩이 내밀고 유혹하네
금계 화가 황금빛으로
화려하게 춤을 추고
어서 오라고 손짓한다
능소화가 담장에 올라
떠난 임 그리워
목을 빼고 올려다본다
파란 하늘에 흰 구름 두둥실
실 개천에는 송사리떼
개구리 개골개골 울어대는
아~밤꽃이 필 때면 생각나는
정든 임 그리운 사랑이여
여름 일기 /도종환
제주 송악산은 휴식년에 들어가고
배들은 태풍을 피해 항구로 몰려와 몸을 묶고 있는데
내륙은 불볕이다
역병으로 졸지에 아버지를 잃고
자기도 격리되어 있다가
간신히 살아난 이의 편지를 읽다가
잠시 안경을 내리고 창 너머 구름을 보고 있는데
정문 앞에 누굴 죽이라고 소리치는 노인들이
확성기를 들고 몰려와 있다
다 작고한 전직 대통령 때문이라고
말끝마다 핏발을 세우고
종편이 붉은 글씨로 화면을 덮는 동안
나이 사십이 넘도록 방 한 칸 마련하지 못한
연극인이 고시원에서 죽은 지 닷새 만에 발견되었다
한 달 평균 수입이 삼십만 원이라고 했다
고시원 주인 여자는 사진을 찍지 말라고 소리쳤다
낡고 오래된 고시원 벽을 타고 오르던
덩굴식물은 말라죽은 지 오래되었고
채송화 몇 포기 시멘트 바닥 사이로
안간힘을 쓰며 올라오고 있었는데
그날도 비는 오지 않았다
왜 거기 가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논은 갈라지고
감자 잎은 오그라드는 몸을 펴보려고 바둥대는데
무기력한 날들만이 반복되었다
난세에 믿을 만한 지도자를 갖지 못한 국민들은
아무 데나 대고 욕을 하고
울화를 풀 길 없는 젊은이들은 점점 사나워지는데
소서 지나 초복이 멀지 않다
그런 아수라장 속에서도 배롱나무가
진분홍 꽃을 피우고 있는 게 대견하다
경멸과 상극의 시간이 언제 끝날지 모르는데도
꽃을 피워야겠다는 마음이 가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