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은 모두들에 기쁨이지만
나에게는 그렇지 못합니다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시편 37편 25절-)
8,15해방직후 아버지 고 김 주현 목사는 이북 함흥에서 신앙의 자유을 찾아 월남했으며
굶주렸던 식구들에 쌀 밥을 먹이기 위해 김제 진봉면 가실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내가 중3때 교통 좋은 삼례후정교회로 목회지로 옮겼습니다
불행하게도 그해 6,25 동란이 발생하자 남들은 피난 가는데 서울 경신중에 다니던 형이 오질 않아
기다리다 피난 시기를 놓쳤습니다 그런데 형이 아픈 다리 (결핵성 관절염)를 끌고 약 10일 걸어서
서울서 그 험한 피난 대열속에 끼여 전쟁속을 뜷고 전주로 왔습니다 ,
얼마나 무서웠으며 굶주리고 왔는지 자다가도 아 무서워 하면서 치를 떨었습니다
미군이 참전하면 전쟁이 곧 끝나리 생각하고 남하하는 피난 대열속을 헤치며 고산쪽
으로 몇 몇 교인가족들과 트럭타고 가는데 봉동에서 유엔군 전투기 기총소사로
경찰 트럭이 피격당하자 경찰들은 우리트럭을 빼았아 타고 갔슴니다
그래서 짐을 짊어지고 봉동에서 소양을 거쳐서 상관 계월리라는 곳에
교인 아는 집 문간 방에 식구 7명이 임시 피난했습니다 전쟁이 쉽게 끝날 것으로
알았습니다 ,매일 밤 모기와 빈대 극성이 장난이 아니였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 쌀 뜬물 얻어다 끓여 먹었습니다
밤에 자다가 뚝 감떨어지는 소리 나면 내가 얼른 나가서 줏어 먹었습니다
조금 후에 여동생이 감떨어지는 소리듣고 나왔지서 두리벙 거리며 찾았지만
이미 동작 빠른 내가 줏어 먹은 다음이 였습니다 그여동생 눈 잊을 길 없습니다
계월교회 장로님 집 개가 밤에 짓는다고 인민군들이 없애라고 해서 개를 잡았습니다
아버지를 불러서 구탕 대접했습니다 아버지는 염치불고 하고 다른 식구들 제쳐두고
둘째인 나를 먹이고 싶다고 말해서 한 그릇 얻어 먹었습니다
------그리고 -------------
며칠 후 어느 주민의 신고로
인민군이 와서 외지인은 냇가에 모이라 해서 나갔더니 하더니 장로님은 이미 한쪽에 묶여 있었고
예수쟁이 나오라 해서 아버지와 내가 손들고 나갔는데 지금도 어데서 그런 용기 났는지 ----
나는 미성년이라 놔두고 아버지와 장로님만 끌고 갔습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집에서 자고 오라고
풀어주었습니다 (그 때 산으로 도망갔어야 하는데 -)
다음날 아침 다시 인민군이와서 아버지와 형을 불러 갔습니다
얼마 지난 후 인민군이 나를 보더니 이 새끼 그새 도망왔다고 총대로
때렸습니다 순간 나는 아니라고 비명질렀습니다 아마 형과 닮아서 착각했던 것 같습니다 ,
그리고 형은 다리 아픈 병자라 불쌍해서 풀어주고 장로님과 아버지를 전주로 끌고 갔습니다
아버지는 이북에서 피난 온데다 목사인지라 악질 반동분자 미제 스파이 죄목으로
기전여중인가 예수병원에 설치된 가장 악랄하다는 정치 보위부에 갇혔습니다
아버지는 그 고통 와중에도 풀려나는 어는 사람한테 내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 팔아
식량을 사먹으라고 소식전해왔습니다 --
파죽지세로 남하하던 공산군이 낙동강에서 저지 당하고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선이 불리해지자
후퇴하기 시작했습니다 , 나는 삼례후정교회 청년의 인도로 후퇴하는 인민군들 속에 끼어
부상병을부축하면서 삼례에까지 와서 논에 숨었습니다
전주지역은 추석 날 2일 전부터 본격 퇴각이 시작됬습니다
추석전날 밤 기억은 너무나 생생합니다
달은 휘영청 밝았는데 동무 동무 하면서 서로 부르며 퇴각하는공산군들 향해
UN군 비행기들은 조명탄을 대낮처럼 밝히면서 기총소사와 네이판탄을 퍼부었습니다
공산군들이 비행기 소리만 나면 " 항공" 소리치면 행진을 즉각 중지하고 안거나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비행기는 공산군을 발견못하고 지나갑니다
멀리 군산앞다에서는 요란한 함포사격소리가 실새없이 들려왔습니다
추석전날이라 동네마다 징소리 괭과리 농악 소리 사방에서 요란했습니다
나중에서야알았지만 농악소리는 동네 우익인사와 가족들과 기독교인들 잡아다 죽창으로
찔러죽이고 망치로 "때로죽이고 우물샘속에 조기 엮듯 사람을 전기줄로 엮어 밤새도록 생매장하여
죽이는데 비명소리 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였답니다
공산군이 다 도망하자 형무소에서 죽임당하지 않는 억세게 운 좋은 사람들이
풀려났습니다 그런데 며 칠 지나도 아버지 김주헌 목사는 영 영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
-하는 수 없이 어머니와 결핵성 관절염으로 고생하던 형이 삼례에서 전주까지
왕복 24키로 먼길을 매일 울면서 여기 저기 시체를 뒤지며 찾아다녔습니다 약 일주일만에
전주 정치보위에서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참혹한 어버지 시신을 어머니가 신체특징을 보고
겨우 찾아 화장한 후 교회장을 치루었습니다, 어머니는 이 끔찍한 장면들 나에게는 못보게
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 뜻을 몰랐는데 지금에서야 알았습니다 너만이라도 살아남으라는 뜻이였습니다
그후 병약한 형이 신음신음 앓더니 어느 교인의 호의로 병원 입원실에서 입원해 있다가 지켜보는 이 없는
가운데 죽었습니다 집에 잠시 왔다가 꿈이 이상하다면서 뛰여가던 어머니 모습 잊을 길없습니다
그런 가운데도 어머니우는 모습 못봤습니다
어머니는 삼례에서 전주까지 기차로 매일 쌀을 장사하다가 온 식구 부산으로 이사가서
모자원 생활했는데 나는 연령 초과로 모자원에 들어가지 못하고 판자집 생활했습니다
부산에서 고향교인들 만났는데 " 김주현 목사"가 어느땐가 둘째는 찾아 올것이라는
말했다는 말 들었을 때 아버지에 오해를 풀었습니다
( 형제중에 내가 제일 미음 받았다고 죽고싶었을 때도 있었습니다 )
밑에 동생은 행방 불명되고 (서울로 이사오기전 실종신고 처리 )
그아래 동생과 여동생은 지금은 미국LA와 워시톤에 거주하고 나는 고아처럼
유리방황 하다가 의인의 자손을 걸식하게 두시지 않는 하나님의 손에 의해 부산사대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순교한 전주지역에서 산간 벽지만 전전하면서 교직생활 했습니다
그래서 추석이 오면 다른 교사들은 귀향 할려고 기피하는 일 숙직을 아내의 원망을 들으면서
일부로 일 숙직 도맡아 비명에 간 이들과 행방불명된 동생들
생각하면서 눈물흘렸습니다
세월이 약이라 인제는 모든 아픔이 희미한 흔적으로만 남았지만
여기까지 이르기는 아버지 고 김주현목사와 어머니의 기도였다는
확신을 가졌으며 전주 안디옥교회있을 때 천국환송부를 맡아 환송예배를 드릴때마다
임종 못한 아버지 어머니 형을 추모할 수 있는 은총을 누렸습니다
지금은 서울 이사와서 매일 한강변을 달릴 때마다
아픈 다리 이끌고 울면서 한강을 넘었을
형님 생각을 합니다
첫댓글참으로 눈물이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내용의 글이군요 .. 그러나 이 모든 아픔과 역경의 뒤에는 우리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셨기에 그 순교의 수많은 피를 받으시고 보혈의 피로 입혀 주셨나 봅니다. 오직 주님께서 남은 인생속에서 더 없는 사랑과 행복과 은총과 평강의 복이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 귀한 글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리면서 더욱 강건하세요 샬롬!
첫댓글 참으로 눈물이 없이는 읽을 수 없는 내용의 글이군요 .. 그러나 이 모든 아픔과 역경의 뒤에는 우리 하나님이 항상 함께 하셨기에 그 순교의 수많은 피를 받으시고 보혈의 피로 입혀 주셨나 봅니다. 오직 주님께서 남은 인생속에서 더 없는 사랑과 행복과 은총과 평강의 복이 함께 하시기를 소망합니다. 이 귀한 글을 함께 할 수 있음에 감사를 드리면서 더욱 강건하세요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