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10장입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양의 우리에 들어갈 때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 다른 곳으로 넘어가는 사람은 도둑이요 강도이며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양의 목자이다. 문 지키는 그에게 문을 열어주고 양들은 그의 음성을 듣는다. 그리고 목자는 자기 양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데리고 나간다. 자기 양을 다 불러낸 후에 그는 앞서 가고, 양들은 뒤따라간다. 그 양들이 그 목자의 음성을 알기 때문이다. 양들은 결코 다른 사람을 따르지 않고, 도리어 그를 피하여 달아난다. 양들이 다른 사람의 음성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셨으나 그들은 무슨 뜻으로 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예수께서 다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은 다 도둑이요 강도여서 양들이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얻고, 들어오고 나가면 꼴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파괴하려고 오는 것뿐이요.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온 것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 삯군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양떼들을 흩어버린다. 그가 달아나는 것은 삯군이여서 양들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선한 목자다. 나는 내 양을 알고, 내 양은 나를 안다. 그것은 마치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다. 내게는 우리에 들지 않은 다른 양들이 있다. 나는 그 양들도 우리 안으로 인도해야 하겠다. 그리하면 그 양들도 내 음성을 듣고 마침내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 아래 있을 것이다. 내가 목숨을 버리기 때문에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다. 내가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 목숨을 다시 얻으려는 것이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내가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이다. 나는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다.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명령이다." 이 말씀 때문에 유대 사람들 사이에 다시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들 중에 많은 사람은 "그가 귀신이 들려 미쳤는데 왜 당신들은 그의 말을 믿소?" 하고 말하고 또 다른 사람들은 "이 말은 귀신들린 사람의 말이 아니오. 귀신이 어떻게 맹인의 눈을 뜨게 할 수 있소?" 하고 말했습니다.
오늘은 선한 목자 얘기입니다. 여기 보통으로 예수님의 선한 목자 얘기할 때는 예수님은 우리의 참 선한 목자라고 강조해 말합니다. 그러나 내 생각에 말의 중점이 어디 있나하면 예수님에게 있지 않고 우리더러 보고 한 말이라고. 그 점을 생각해야 돼요. 그거는 여기만 아니라 다른데도 그렇습니다. 문제가 본래 우리에게 있어요. 우리보고 말해주는 건데 우리가, 관심이, 예수님 소리만 자꾸 해요 예수님 소리는 우리가 하거나 안하거나 예수님의 일점이 가해지는 것도 아니고, 감해지는 것도 아닌데 문제는 우리 자신에게 있는데 그 점은 안 생각하고 거기 주님에 대해 자꾸 말씀을 해야 무슨 충성이 된다든지, 그러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게 그 바꿔친 생각이 아닌가.
그 십자가에 달릴 때 "나 위해 울지 말고 너와 너의 자녀를 위해 울어라"한 이것도 말씀의 요점은 우리에게 있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어요. 그래서 사람을, 우릴 양으로 비기질 않았어요. 이제 양에 대해 양의 우리, 양의 목자요 그럽니다. 한자로 양이란 글자는 양을 그려서 놓은 자인데 한문자에 보면 양을 늘 좋은 의미로 쓰입니다. 이게 착할 선(善)자, 아름다울 미(美)자, 옳은 의(義)자, 상서로울 상(祥)자 그게 다 양(羊)변에 쓰입니다. 아마 양을 옛날 사람이 일찍부터 쳤겠죠. 아시는대로 양들이 성격이 착하지 않아요? 그래야만 옳은걸 겁니다.
아름다운 미(美)자라는 것, 양양(羊) 아래에 큰대(大)를 했는데, 양 큰 놈이라고, 양 큰 거라고 본래는 아름답다는 것은 맛있다라는 뜻으로 쓰였던 거래요. 맛있다, 큰 양, 양 큰 것은 맛있을 꺼 아니에요.
맛있다는 데서 나와서 일반으로 아름답다, 좋다라고 씌운 거라고. 착할 선(善)자라는 것은 역시 양양(羊) 아래에다 본래에는 말씀언(言) 둘한 거에요. 그랬었는데 지금은 저렇게 됐고 또 옳은 의(義)자는 양양(羊)아래 나 아(我)자를 붙어서 당당히 내 것을, 내 것은 내 양이라고 한 그런 생각에 옳은 의자가 있는데, 상(祥)자는 이쪽은 신에 관한 것 종교에 관한 거고 양을 붙이고 그랬는데, 양이 그렇게 좋아. 그런데 사람이 쓰는 것 중에 양과 대립되는 거 반대되는 것이 있어요. 개(犭), 이거 이따 얘기합시다.
양은 천생이 늘 무리를 지어 살아요. 울타리를 지어서, 그래서 무리 군(群)자를 양 양(羊)을, 군은 의미이고, 양처럼 무리를 짓는 거에요. 개라는 놈은 성격이 혼자만 돌아다녀. 그래서 홀독(獨) 혼자라고 할 땐 개(犭)변에 써서, 같은 사람이 기르는 짐승인데도 성격에 따라서 다릅니다. 이쪽 옆의 건 개변인데 본래 개 모양을 그린거죠. 이렇게 된 거에요. 자연이 같은 동물이라도 태생이, 성격이 다른거라고요. 어쨌든 양이 일찍부터 사람들에게 성격이 퍽 좋은 걸로 알려졌어요. 그래서 대단히 좋게 표시가 돼 있어요. 그런데 그래 양이, 여기서 우리를, 사람을 양으로 표시하는데 뭣 때문에 그랬나?
그래 이제 세 가지 점으로 생각을 합니다. 하나는 이제 말대로 양이 단체 생활, 공동체, 요새 종교말로 커뮤니티라고 합니다. 양은 떨어져서 혼자 사는 법이 없어. 그 양만이 아니고 도대체 생물의 한 근본 버릇의 하나가, 단체로 사는 것입니다. 식물도 나게 되면 대개 솔밭은 솔밭대로 있고, 잡목은 잡목대로 무리를 짓지 않아요. 그리고 또 기러기 같은 거, 흥사단에서 쓰는 기러기도 늘 하나로 무리지어 다녀, 고기도 무리지어 다녀, 어떻게 보면 생존 경쟁이라고 그러는데, 같이 다니면 얻어먹기 어려울 것 같은데, 그렇지만 먹는 풀을 보면 같이 가면 얻어먹을 것이 어려울 것처럼 뵈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살림은 하나로 되게 마련이 되어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이제 생물이 도대체가 단체적으로 살아가는데, 살림은 그러기에 옛날과 우리가 과학적으로도 보는 점이 달라야 하는 것이, 생존 경쟁이라 하는 것, 그런 한동안 얼핏 보고 그것이 그 생물의 세계를 지배하는 근본 원리인 것 같아서 언제든지 강한 놈이 산다, 적자생존이다, 가장 환경에 적당한 놈만 살아갈 수 있다, 자연 도태, 이기고 나오는 것은 생존 경쟁을 해서 이긴 놈이 된다, 이것을 강조해.
그런 것을 정치에다 적용해서 부국강병주의를 써서 언제든지 강한 놈이 살기 마련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아주 지배적인 사상 아니예요? 그것도 철학에서까지 그러니까, 대개 학문이라는 것은 그런 것을 늘 또 따라가지 않아요?
양은 아주 평화적이야
사실 근본에서 말하면 그렇지도 않겠지만요. 실제 면에서 보면 공산주의 이론대로 그럴 듯한 데가 있어요. 공산주의 사람은 뭐라고 그러는고 하니 경제 조직이 어떻게 되었나에 따라서 그 궁극에 문화라는 것은, 상부 건축은 그 지배를 받아 된다. 그 점은 강조하는데 반드시 그런 것 아니지만은 이 사회전체, 먹고 입고 살아가는 경제와 정치의 모양에 따라서 문학도 철학도 미술도 그 영향을 많이 받게 마련이에요. 또 정치가 달라질 때는 물론 공산주의자들 말과 달라. 이쪽에 영향이 또 있지. 우리는 그 점은 그다지 찬동하는 것은 아니지만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은 사실이죠. 한동안 부국 강병주의가 많으니까 철학이나 과학사실에 있어서까지도 인간 사회가 이렇게 발전하는 것은 경쟁 때문이다.
문화가 발전하는 데는 경쟁은 없을 수가 없다, 그런데 아주 힘껏 주장해오지 않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대단히 다르게 보게 되었어요. 이제 같은 생물계 현상을 놓고도 한 사람은 생존경쟁을 말하는데 한편으로 상호부조, 크로포트킨(Peter Kropotkin) 같은 사람 대표입니다만 살아가는데 서로 서로 도와서 돕기 때문에 살아가게 되는 거지 경쟁만이 아니다, 경쟁이 현상도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뭐냐하면 서로 협동해서, 코퍼레이션(cooperation)하기 때문에 살아간다, 지금은 이제 우리가 그 점을, 생각해야 할거에요. 인생으로서, 사실이 달라진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지식이 나아가서 옛날에는 그렇게 넓게 깊이 보던 것을 지금은 그보다 조금은 더 넓게 조금 더 깊이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전 현상이 없지 않지, 지금도 경쟁하는 현상이 없지 않지만. 경쟁을 하는 걸로 사람이 돼가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지금은 도리어 이제 생은 생물에 있어도 하나로, 공동체로, 공동체란 것은 굉장히 주의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런 면에서 양은 그 중에서도 특별히 그래, 물론 우리는 사람의 신앙생활, 더구나 신앙생활이지만 예수님이 생각하신 것은 종교가 다른 것도 아닌, 분리해 가지고 그 생활의 한 부분만을 위해 말씀하신 거 아닙니다. 인생을 놓고 인생이 어떻하면 도대체 이거나 저거나 간에, 뭐 정치고 뭐곤 간에, 사람이 어떻하면 사람 노릇을 하고 바로 살아갈 것이냐? 그 점을 생각해서 걱정을 해서 말씀해 주시는 건데, 이제 양을 가지고 비유를 하시는데, 첫째 그 양이라는 것을 취할 것은 공동생활입니다. 이것은 결코 떨어져서 혼자만 사는 것이 아니라 어떤 땐 가다가 무리가 다 죽는 일이 있는 한이 있어도, 그것들은 늘 무리를 지어서 다니고 있고, 뭔지 근본성격이 그렇게 됐어. 그게 하나고 둘째는 양이 아주 평화적이야. 당초 뭐 맹수는 물론 아니지만 남을 해하려는 그런 성격이 없어. 성경에도 면양하고 산양하고 성격 대조해 비교한 게 있습니다만, 면양은 더구나 성격이 아주 온순하지 않아요?
몇 십 년 전에 들은 얘기지만은 누가 그래요. 제가 꼭 보지 않아서 모르겠습니다. 한동안, 일본시대에, 한국에 산이 많은데 그 목양업이 면양을 장려했으면 유행할꺼라 해서 호주에서 멜로니 양을 그때 삼천 마리인가 얼만가를 사들여와서 저 함경도 지방에서 나라로써 시험을 해보고 그런 일이 있었어. 그러다가 그 일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죠. 그런데 실패해서 나중에 양을 잡았는데, 양을 잡아먹을 수밖에 없었는데, 그것을 잡던 사람 얘기에요.
내가 그 사람을 직접 본 것은 아닙니다. 근데 그 사람 소감이 이렇더라구요. 그거 못 잡겠다고 하더라구요. 왜냐하면 한 놈이, 이것도 좀 죽이면 피하거나 우들우들하면 잡겠는데, 한 놈 죽여도 가만, 두 놈 죽여도 가만, 세 놈 죽여도 가만있는데, 차마 못 잡겠다고 칼을 집어던지고, 못 잡았다고 그랬습니다만 그래도 잡아먹기야 했지만, 그 사람 소감이, 하여간 양이란 놈이 그렇게 됐더라구요. 참 이상하더라 하는 얘기를 들었는데,
제가 직접 양을 많이 길러 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양이 온순한 것은 사실이야. 성경에 양으로 비유가 많이 나오는데, 그 중에 하나는 확실히 양의 온순, 평화적으로 된 거라고. 그 점이 비유의 중요한 점일 것입니다.
초식동물은 참 좋다
그래 동물중에도 더구나 이 초식동물은 참 좋다고 그럽니다. 새김질하는 거, 왜 그러냐? 그러면 이놈들이 평화동물이기 때문에 새김질하게 된거야. 다른 맹수 같은 것은 남을 잡아먹는 거니까, 당장 먹으면, 있다가 먹고 그러면 그만이지만, 이거는 자기가 남을 해할 생각이 없는 동물이니까, 대적이 언제 올런지 모르니까 풀을 만난김에 씹을 새가 없어. 덮어놓고 많이 먹어야 돼. 그러니까 첫 번 위집은 그저 쓸어 넣을 수 있게 많이 먹습니다. 그렇게하곤 이제 안전한 곳에 가서 이놈이 턱 들어 누워서 슬쩍 토해내서 슬금슬금 씹습니다. 그러니까 이 소라든지 염소라든지 양이 새김질 할 때 얼굴을 보면 참 좋은 거에요. 눈을 한 절반 쓱 감고 슬금슬금 대고 씹는 것은 (웃음) 어디까지나 평화 동물이라구요. 그래 그 점은 참 많이 우리가, 그 어쩌면 이게 다 우연이라면 우연이지만, 그러나 그럴 수가 없을 꺼에요. 천지엔 이 뜻이 없다거나 있다면, 어찌 사람이 기르는 것 중에 하나는 개 같은 거고. 고 놈은 주인을 보면 꼬리를 치곤 그래요. 난 아주 개, 년전에 개 욕했더니 반문도 많이 왔더라구요. 난 개가 싫은 게 아니라 누구보고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 그래 그것을 빌어 했을 뿐인데, 소는 차라리 좋아. 체구가 큰 놈이 세 살 난 애가 끌어도 끌려가니 그 놈이 코가 아파서만 끌려가는 것이 아니다, 이게 사람이랑 인정에 얽혀서 서로 이해가 있으니까 끌려가지. 반드시 코가 뭐 어린애가 끌면 휘들어치면 그만이지 그 밤낮 끌려가고만 있을거에요?
그런데 개라는 놈은 주인을 보고 꼬리를 치긴 치지만, 고놈이 저 먹을 거 있을 때만 그러지. 개의 성격이란 주인에게 충성한다고 그것을 퍽 높게 평가해서 그러는 수도 있긴 있습니다만, 그러면 사람이 기르는 가축 중에 어쩌면 개 같은 것도 있고, 혼자 따로 돌아가고, 제 생각만 하고, 먹을 것 주면 비굴하게 꼬리만 치고 하는 놈도 있는 대신에, 양 같은 거는 주인에게 아첨할 줄 몰라. 그저 주인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러지만 모르지 않아. 이제 보면 아는 건데, 별 꼬리를 치는 것도 아니고 또 그저 온순해. 또는 그런 것도 사람이 일찍부터 길렀다고. 소 같은 것도 있고, 각각 성격이 다르잖아요?
하여간 양은 대단히 평화 동물이라고 그러는 거. 그 다음 셋째는 양의 특색이 뭐냐하면, 이게 단순해요. 아주 심플해. 단순하기 때문에 어떤 한편으로 어리석어. 고게 비슷하게 생겼으면서도 염소와 다른 게, 나는 염생이는 길러봐서 압니다만은, 인격수양 된다고 했어요. 염생이 먹이면서 화 안 내는 사람, 그 사람 참 특별한 사람이에요. 웬만한 사람은 화 안 낼 수가 없어, 고놈이 들어오면 창구멍을 갉아먹으면서도 주인을 살살 보면서 싹 몰래 있으며 먹고 도망하고 해요. 그 놈이 눈치가 아주 있습니다. 그게 면양과 산양이 아주 다른 점이야. 그런데 양은 아주 어리숙해서 실제 양을 길러본 사람도 그런다는데. 정말 양이 길을 헛들이기, 헤매이길 잘한대요. 그래서 양의 목자라는 얘기가 있고, 그런 것이 그 때문인데. 이게 어디서 나왔나면 생각이 아주 단순해. 이게 평화적이니까 어리숙. 남이 유혹을 하면 잘, 그래서 큰 양치는 데도 앞에 앞장서는 것은 염생이를 세운답니다. 염소가 길을 잘 알고 그러기 때문에, 그 다음엔 그 양들이 따라가고 그런데요. 그 분별이 없는, 무분별하다고 또 옅게 보면 무분별하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고, 높이 본다면 무분별, 참 높은 지경이에요. 분별을 당초 하지 않는다는 것. 이런 점이 양에게서 취해져 여기 비유로 나올 때엔, 선한 목자다, 양의 우리다, 그런 말하는 것은 너는 다 양이다, 양으로서 자기를 생각하고 거기 배울 건 배우고 생각할 점은 생각하라고 그러는데, 거기서 그것을 풀어 생각한다면 이제 세 가지 점으로 경우로 할 거 아닌가.
양이란 공동생활을 하는 것, 너도 살림이 전체를 위한 것이지 무리에서 떠나가지고는 안 된다. 그 점이 한 가지.
세상에는 우리를 해할 악의가 있어
양이 바탕이 평화적인데 그런 모양으로 너도, 사람은 다 그렇지만 더구나 신앙생활, 믿는다는 사람은 하느님을 믿고 산다는 사람은 평화적이야 돼. 또 단순해야 돼. 생각이 단순해야 돼, 이러고 저러고 남 비평하고 남 눈치보고 그럴 필요 없어. 우리가 여기가 셋째 조건에 이게 위험이 들어옵니다. 이 때문에 어려운 것이 있지. 그래 거기, 아까 여기 처음 말씀한 것을 보면 양의 우리라 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말씀의 요점은 어디 있냐 그러면 너에게는 양 같은, 먹이 때문에, 아무래도 양의 우리가 필요하고 목자가 필요해.
단체 생활해야 되지. 또 평화적이지, 남을 해할 것이 없는데, 이 세상에는 확실히 우리를 해할 악의가 있어. 성경으로 하면 사탄이란 말로 표시가 되었습니다만, 그저 생이란 것은 아무것도 없는 그저그저 평화로운 장소에 온 것만이 아닙니다. 확실히 뭔지 어째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생에 대해서 의지가 우주적으로 있다고. 사탄이라고 인격적으로 있는지 없는지 그런 것은 각각 자기 생각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지만, 반드시 인격적으로 생각한다고 옳은 해석이고, 인격적으로 안 생각한다고 잘못이고 그런 것 아닙니다. 그런 거는 내 생각이 어떤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어떤 식으로 어떤 쓰임 법을 써서 하느냐 하는 것이니까, 그런데 붙잡히지 마시고, 말하자면 예수님은 선한 목자라고 그 말에만 붙잡히는 것보다는, 나로서 우리가 할 게 뭐냐? 그 점을 생각하는 것이 근본이라고 생각할 점이라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종교 토론을 하게 되면 말귀에 걸려서 하나님은 그럼 인격적으로 안 계신단 말이요? 그러고 싸울려고 하는데, 그러면 인격이라 했거나, 인격적이 아니라 했거나 근본에는 관계가 없어요. 왜그러냐 하면 하나님이란 이에 대해선 우리가 설명할 자격이 없어. 인격적이라 해도 잘못된 말이고, 인격적이 아니라 해도 잘못된 말이고, 있다 해도 잘못이고, 없다고 해도 잘못이고, 도대체 우리의 의지로 가 닿을 수가 없는 어느 지경이, 거기가 하느님 자리인데, 무슨 제가 알았다고. (중간에 녹음이 끊김) 대로만 늘 있었드라면 발달이 못 되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여기 왜 하나만이 아니고 번식을 해, 번식을 하면서도 떨어져 나가지 않아. 떨어져 나가지 않으면 왜 그랬을까, 그때 무슨 의식적으로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보기에 그런 것 같지만 그 생각에 무슨 까닭이 있을 거예요. 그게 무엇인고 하니 대단한 요것이 이것과, 이것 처음에는 사면으로 대적을 만나지 않아요? 그런데 둘이 갈라지면 둘이 똑같은 거지만 갈라지지 않고 이렇게 하면 1/2로 감해져 위험을 만날 가능성이 말이야, 안에 붙은 것은 자기네끼리 있으니까 그건 안 만나고 외적이 올려면 바깥으로 오니까 절반으로 줄어들어.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 밖의 대적의 면하는 율이 퍽 적어지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 바깥에 있는, 외곽에 이것들만이 오는 위험에 대해서 주의만 하면 안에 있는 것들은 안심하고 아무 상관 안하고 안심하고 자기 기능을 할 수 있게끔 됐어, 이것이 이제 고등동물 나오게 되는 근본원리에요. 만일 그런 게 없었더라면 고등동물이 못나왔을 거예요. 그게 공존의 원리가 그때부터 벌써 그런 것이 이 에너지로 볼 때 생물학적인 정신적인 에너지로 대단이 절약이 돼, 참 절약이 돼. 그런데서 이제 무엇이 나오냐 하면 조직이 생기게 돼, 저렇게 많이 있게 되니까 벌써 겉에 있어서 다른 외적을 접할 수 있게 된 놈과 안에 있어 도무지 외적을 면하지 않는 놈과의 하는 일이 같을 수가 없어. 대단히 간명하게, 간단하게 되었지만 아마 이 조직 중에 사람이 제일 복잡할 텐데, 여길 들어가면 오장육부가 있다 그러지 않아요, 그것만이 아니에요. 가지가지에요. 이게 기능이 달라져서 피차 도와서 한 몸이 이루워지는 건데, 그러게 되면 그때 생기기 쉬운 결점이 무엇이냐 하면 부분의 일만 했지 전체를 이제 알기가 어렵게 돼요.
우리가 사는 현대의 고민
우리가 사는 현대의 고민은 거기 있습니다. 점점 이렇게 되는 것이 왜, 저번에도 욕을 했습니다만, 뭐라 신문에 내고 했는지 여기 교통이 자꾸 늘어나고 사람이 와서 어려우니까, 시골에서 사람 좀 올라오지 못하게 하라. 그렇게 명령을 했다고 해, 내가 나쁜 놈들 같으니라고 돈 여기다 해놓고 쌀 여기다 놓고, 석탄 여기다 해놓고 먹기 좋은 것 입기 좋은 거 여기다 다 몰아다 놓고, 지방에서 빌어먹어도 서울 와서 빌어먹을 것 같은데 오지 말라고 한다, 그런 법이 어디 있냐? 그럼 살아가는 걸 지방에서 분산해 지방에서 살아갈 수 있게끔 만들어 놓고 오지 말라 해야지. 좋은 놈은 다 몰아놓고 오지 말라고 그런 법이 어떻게……, 그럼 왜 이렇게 되었나 하면 이게 조직의 시대이기 때문에 그래. 옛날처럼 단순한 시대에는 똑같은 일에다 나도 사람, 각자의 사람이 자기가 일을 할 수 있었어요. 옛날엔 나가서 땅 갈아서, 산에 가서 나무 가져다 뭐 이렇게 의식주를 다 제 손으로 할 수가 있었지만, 특별한 병신이 아닌 다음엔, 지금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어요. 서로서로 남에게 의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발달해요. 왜 한 가지 일만 하게 되는 데는 발달해. 그럼 이 원리를, 분업적으로 되면 이것을 부인하고는 인류의 발달이라는 것 생각할 수 없어요.
우리같이 이런 생각, 사고방식이 이렇게 된 사람은 어쩐지 거기 반대하고 싶은 생각이 있습니다. 옛날 농업을 하고 살던 때일수록 우리 몸의 이상에 가까운 것 같아서 거기에 향수를 느껴요. 이제라도 어디 가서 강원도 산골 가서 다리 쭉 펴고 감자도 내 마음대로 갈아먹고 그랬으면 좋겠다, 그건 망상이지. 이젠 그렇게 안 됩니다.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생 전체가 올라가서 올라가서 시대가 조직적으로 이렇게 된 시대에 왔기 때문에, 거기에 역행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 발달은 치밀한 조직이 있어야 경제도 그렇고, 정치도 그렇고, 미술도 그렇고, 교육도 그렇고, 어느 거나 혼자서는 할 수가 없지 않아요? 그러니까 자꾸 긴밀하게 조직적으로 되었는데, 그렇게 되면 나쁜 점이 뭐냐? 전체를 잊어버려. 사람은 돼먹기를 눈만으로 생긴 사람, 귀만으로 생긴 사람, 그런 사람은 없고 사람은 다 생리적으로 같은데 기능만이 어느 한 면을 그렇게 되는, 기능에서는 그렇지만, 생각을 하는 점에서는 이게 다 일반적으로 다 가지고 있으니까 종합하면 그 면이 있어야 살림이 옳게 되겠는데, 발달이 돼가면 돼갈수록 부분적으로 발전이 오면 그것만을 보게 됐지, 종합을 하긴 어려워. 현대의 고민이 거기 있단 말이야.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고 하여간 우리가 공동체로 살아가기 때문에 이런다, 이 말씀을 한 것이고.
그러니까 공동체로 살아가는데 밖에 외적이 있고 그러니까 문이 저렇게 되기 마련이에요. 울타리가 암만 해도 필요해. 그 얘기는 또 이따 차차 얘기합시다. 이제 울타리가 영구한 울타리가, 우리가 가다가 없어집니다. 그렇지만 더구나 종교의 말에는 그런 점을 생각할 필요가 있지요. (녹음1, 31: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