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좁은 이코노미석에 앉아 장거리 비행을 할 때, 나를 위로해 주는 것은 한 권의 책이다. 열다섯 시간에 걸친 비행에 이반 일리치의 책을 들고 간 것은 잘한 일이다. 사막에서 생수를 찾은 것처럼 비행의 피로감을 씻어주기에 좋은 책이었다. 이반 일리치는 <탈학교의 사회>로 나의 20대를 가격한 사람이다. 그의 지성의 끈이 육십을 바라보는 여기까지 이어지고 있으니 오래된 인연이다.
일리치는 ‘물’이라는 소재를 들고 나와 물의 신화적 의미와 그와 관련된 인간의 정신사를 말한다. 물은 인간에게 어떠한 정신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는지 그 신비한 내시의미들을 설명한다. 하지만 물이 신화적인 힘과 신성함 같은 맥락에서 벗어나 화학물질(H2O)로 단순화된, 근대사회의 경직성을 가슴아파한다. 여기서 물은 하나의 상징일 뿐, 일리치는 다양한 분야에서 어떻게 인간이 근대화되면서 삶의 아우라를 잃어버렸는지 논하고 있다.
우리는 삶의 신비를 잃어버렸다. 존재의 풍성한 느낌을 잃어버렸다. 문명화는 결국 웅혼한 우주에 던져진 인간의 신비한 존재 의미가, 작고 미세한 화학분자로 환원되는 과정이라고 일리치는 내 귀에 속삭인다. 그는 현란하게 지적 퍼포먼스를 보이며 논설을 이어간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통해 본 것은 문명화된 인간의 비극을 슬퍼하는, 깨어있는 한 지성인이다. 나는 일리치와 함께 슬픈 마음을 안고 마사이족을 찾아갔다.
마사이는 열대 사바나의 대평원 위에 산다. 기린과 코끼리와 가젤 같은 야생동물과 함께 대 평원에 쇠똥으로 집을 짓는다. 붉은 황톳길을 3,40분 달려야 겨우 하나의 마을이 나오는데, 그 마을이란 게 많아야 예닐곱 집이고 보통은 네댓 집이 모여 사는 곳이다. 마을과 마을의 거리가 너무 멀어 나 같은 문명인은 걸어서 왕래조차 할 수 없다. 한 마을에 사는 집들도 집과 집 사이가 너무 멀어 나는 그 멀리 떨어진 공간이 오히려 신비롭게 느껴졌다.
건물과 건물이 다닥다닥 붙어 있고 그 사이로 도로가 비집고 다니는, 숨 막히는 도시에서 살던 나의 눈에는 그들의 여백이 너무 아름답고 신비해 보였다. 밤에는 마을의 지붕 위로 쏟아지는 별을 보았다. 신비한 하늘의 음성을 그곳에서 들을 수 있었다. 전기도 없고 자동차도 없고 TV, 세탁기, 전화기, 냉장고, 휴대폰 같은 것들이 없는 곳에 절대 암흑과 절대 고요가 찾아오고, 가끔 하이에나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올 뿐이다. 난 그곳에서 물 한 모금의 간절함을 보았다.
사람을 질리게 만들 것 같이 푸르고 창망한 하늘 아래 작은 움막을 짓고, 오늘은 무얼 먹을까, 내일은 무얼 할까 걱정하지 않는, 오늘만 사는 사람들의 창백한 얼굴을 보았다. 마사이의 피부는 검으나 그들의 표정은 창백했다. 나는 그들의 표정을 ‘사바나 블루’라고 이름 지었다. 열대 사바나 기후가 가져오는 건조하고 바삭거리는 공기의 질감, 우기에만 반짝 피어오르는 초록 물결들, 미치도록 창백한 하늘이 마사이의 표정을 창백하게 만들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난 돌아오자 마자 <사바나 블루>라는 제목으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마사이에게 열대 사바나 기후 같은 창백한 우울감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은 문명사회에서처럼 그 우울감으로 자신의 삶을 극단으로 몰고 가지 않는다. 마사이는 자살을 하지 않는다. 그들의 우울감에는 대평원을 뛰노는 기린이나 가젤, 품바, 또는 타조 같이 오늘을 견뎌 내는 힘이 있다. 그들에게 우울증은 질병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내는 또 하나의 힘이다. 나는 그들의 손을 맞잡으며 그 힘을 느꼈다. 삶은 신비이며 더없이 고귀한 생명의 파노라마라는 사실을 그들은 사바나 블루 안에서 끊임없이 확인하며 살고 있는 것이다.
이반 일리치가 슬퍼하는, 비인간화된 문명사회를 벗어나 열다섯 시간 달려간 곳에서 나는 아직 훼손되지 않은 인간을 만났다. 생명의 신비, 축제 같은 삶, 무욕의 대평원을 바라본 것만으로도 새로운 활기를 얻었다. 삶이 힘들고 지칠 땐 마사이 마을로 가라. 그곳엔 신화의 강이 흐르고 있다, 아직도.
첫댓글 우울증은 질병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내는 또 하나의 힘이 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