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아이돌 역사
H.O.T 부터 2PM 까지
다음으로 세대(연령)적으로 보면 아이돌은 전적으로 10대에 의한, 10대를 위한 산물이다. 음악적으로는 대개 댄스음악을 표방하는데, 이는 춤을 추기 위한 용도의 템포가 빠른 음악이다. 다시 말해 특정 장르/스타일이라기보다 여러 장르/스타일의 음악이 합성되고 ‘범장르적’으로 통용되는 ‘한국형 댄스음악’을 가리킨다. 한편, 아이돌은 솔로보다는 그룹 형태를 지칭하는 경우가 많다. 각각의 멤버에게 부여된 개별적인 특정한 상(이미지)이 통합되어 그룹 전체의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김준수가 아닌 시아준수가 동방신기를, 동영배가 아닌 태양이 빅뱅을 구성한다). 이런 점에서 아이돌은 음악뿐 아니라 패션, 댄스, 방송의 이미지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는 총체적인 산물이다.
여기서 반드시 언급해야 할 이들은 서태지(와 아이들)이다. 이들은 음악 스타일과 활동 방식 등 많은 면에서 아이돌 시스템이 정착하는 데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양현석의 경우 YG엔터테인먼트의 수장이 되어 후일 한국 아이돌 시스템 (재)생산의 주도자가 되기도 했다. 무엇보다 음악적인 영향을 지적해야 하는데, 가령 정치적이고 사회비판적인 메시지와 이른바 사람들에게 ‘갱스터 랩’이라 알려진 이들의 힙합 음악(가령 4집에 실린 ‘Come Back Home’ 같은)은 초기의 남자 아이돌에게 (어쩌면 ‘나쁜’) 선례가 되기도 했다. 말하자면 새롭고 진지한 면모를 가지고 있다는 인상을 전달하기 위한 방편이 된 것이다. 또한 새로운 앨범 작업을 이유로 기존의 활동을 접었다가 몇 개월 뒤 갑자기 등장하는 방식은 이후 흔한 활동 방식이 되었다. 무엇보다 이들은 직접 작곡을 하고 프로듀싱을 한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아이돌’의 상으로 남아 있다.
이외에 본격적으로 댄스음악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였던 1990년대 초·중반 듀스, 잼, 노이즈, DJ DOC, 룰라, 투투, 쿨, R.ef 등 일련의 댄스그룹(의 음악)도 후대의 아이돌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가령 하우스 리듬이 사용되고, 랩이 삽입된, 당시 ‘X세대 인기가요’ ‘신세대 댄스가요’로 불리던 스타일은 아이돌의 음악에도 나타났다. 그렇지만 작곡가로 활동하거나(노이즈), 나이트클럽 DJ나 가수의 백댄서 등으로 활약하다가 데뷔하는(DJ DOC, R.ef) 등, 기획사에 의해 전면 양성되는 시스템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본격적인 아이돌의 시작은 SM엔터테인먼트의 H.O.T.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의 라이벌이었던 DSP미디어(당시 대성기획)의 젝스키스를 비롯해, N.R.G, 태사자 등이 이 무렵 활동했다. H.O.T.의 1집(1996)의 ‘전사의 후예’가 사회비판적(특히 교육문제) 메시지를 힙합 스타일에 결부되었다면 아기자기한 사랑 노래 ‘캔디’가 대중적인 인기에 부합했다. 젝스키스는 1집(1997)의 ‘학원별곡’과 ‘사나이 가는 길(폼생폼사)’를 통해 H.O.T.와의 라이벌로 부각되었는데 이러한 (팬덤과 언론을 통한) 대결 구도는 아이돌의 점유율을 키우는 상호 시너지 역할을 수행했다. 여성 그룹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앨범 발표와 활동 시기 및 방식을 겹치지 않게 하면서 상호공생 관계를 유지했다.
대형 엔터테인먼트사들은 비슷하면서도 각기 조금씩 다른 전략을 통해 아이돌을 대중화·차별화했다. 그리고 이런 전략은 지금까지도 크게 변하지 않고 지속·강화되어왔다. SM엔터테인먼트는 아이돌 시스템을 선도하고 공식화하는, 가장 대표적인 엔터테인먼트회사이다. 말하자면 SM엔터테인먼트가 훈련된 아이돌의 모범형을 생산한다면, 이에 대한 대항적 캐릭터를 발빠르게 만들었던 DSP미디어는 보다 친근하고 접근가능한 유형을 창출했다. 이 두 회사의 걸그룹의 경우, 모두 ‘요정’ 컨셉을 내세웠지만, S.E.S.가 보다 신비롭고 다소 비현실적인 유형이었다면, 핑클은 옆집 소녀 같은 현실적이고 친근한 유형을 대동했다. 그밖에 강한 이미지의 디바나 베이비복스는 이후에 경쾌하고 발랄한 이미지로 선회하여 인기를 모으기도 했다.
한편, 후발 기획사 JYP엔터테인먼트 소속의 god는 최초의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이라 할 ‘육아일기’를 통해 친근한 캐릭터를 전국적으로 알리고, ‘어머님께’와 같은 보편적인 노랫말로 호소하면서 폭넓은 지지를 획득했다. SM엔터테인먼트에서 H.O.T.에 뒤이은 보이그룹 신화는 나중에는 남성적인 캐릭터를 강화하여 다른 보이그룹과 차별화를 꾀했는데, 지속적이고 열성적인 팬덤을 통해 장수하기도 했다.
지누션과 원타임 등을 통해 대중적인 힙합 중심의 레이블을 표방한 YG엔터테인먼트(당시 양군기획)는 창의적이고 자유로운 아이돌을 양성한다는 마케팅 전략을 내세웠다. 이는 SM엔터테인먼트의 철저한 기획과 훈련으로 만들어진다는 인상을 들게 하는 방식과 대조적이다.
1990년대 말 이후 여성 그룹은 특히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는데 이런 공백이 깨진 것은 원더 걸스의 ‘Tell Me’를 시작으로 한 이른바 ‘걸그룹 열풍’이었다. 이런 흐름은 ‘So Hot’ ‘Nobody’를 연이어 히트시킨 원더 걸스를 위시해 소녀시대, 카라, 브라운 아이드 걸스, 애프터 스쿨, 포미닛, 2ne1, 티아라 등 2007년에서 2009년 무렵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중에서도 9명의 많은 멤버를 거느린 소녀시대는 유로 팝 스타일의 ‘Gee’ ‘소원을 말해봐’ 등을 통해 대표적인 걸그룹으로 자리잡았는데, 이전 시기의 S.E.S.처럼 단정하고 신비로운 소녀의 이미지를 계승한다. 반면 ‘Honey’ ‘미스터’ 등을 히트시킨 DSP미디어의 카라는 귀엽고 친근한 옆집 소녀 이미지를 구현하여 핑클의 직계 후예라 할 만하다. 이들에 반해 2ne1은 알앤비 팝 스타일의 ‘I Don’t Care’ 등을 통해 자유분방한 이미지를 구현하고, 애프터스쿨은 섹시하고 강렬한 이미지를 드러낸다. ‘Abracadabra’ 등이 실린 3집을 통해 브라운 아이드 걸스는 20대 이상의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지지를 얻기도 했다.
보이그룹의 경우에도 ‘거짓말’(2007), ‘하루하루’(2008) 등을 발표한 YG엔터테인먼트의 빅뱅을 필두로, SM엔터테인먼트의 슈퍼 주니어의 ‘Sorry Sorry’(2008), 샤이니의 ‘Ring Ding Dong’(2009), JYP엔터테인먼트의 2PM의 ‘Again & Again’(2009) 등으로 이어졌다. 이밖에도 FT아일랜드, 씨엔블루처럼 소위 밴드형 아이돌의 형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처럼 아이돌 열풍은 걸그룹 붐으로부터 시작되어 아이돌 전반으로 확대되었는데, 대중적 지지는 물론 비평적 관심까지 획득하며 사회적 문화적 이슈로 떠올랐다.이전 시기와 달리 앨범 중심이 아닌 싱글이나 이피(미니앨범)를 중심의 ‘곡 단위’ 활동으로 바뀌었고, 히트곡의 순환은 점점 더 빨라졌다. 지상파 순위프로그램에 대한 의존도는 이전 시기에 비해 낮아진 반면, 케이블 TV의 리얼리티 프로그램, 인터넷 블로그, UCC 등을 이용한 다양한 매체의 비중은 높아졌다. 가령 빅뱅은 데뷔 이전 자신들의 성장 스토리를 담은 ‘리얼 다큐 빅뱅’(2006)을 통해 인지도를 높였다. 걸그룹 열풍의 시작점은 ‘텔 미 댄스’ UCC 동영상이었다.
(작성자 : 최지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