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자의 화가’ 박수근과 나누는 침묵의 대화
농민신문 2023-01-13
[우리 동네 핫플] (14) 강원 양구 박수근미술관
캔버스 위 주인공들은 소박한 서민들
‘나무와 두 여인’ 등 작품부터 유품까지
고단했던 작가의 삶 고스란히 느껴져
개관 20주년 ‘박수근의 시간…’ 특별전
‘이건희 컬렉션’도 함께 감상할 수 있어
박수근의 유명 작품 가운데 하나인 ‘나무와 두 여인’. 화면 중심을 분할하는 나목이 강렬한 인상을 풍긴다.
강원 양구 하면 북한과의 접경지대, 산이 높고 물이 깊은 곳 정도가 머릿속에 떠오를까. 그래서 별다른 볼거리가 없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곳은 한국이 낳은 위대한 서양화가 박수근(1914∼1965)이 태어났고, 그를 기리는 박수근미술관이 터를 잡고 있다.
‘무슨 경매에서 몇십억원에 그의 그림이 팔렸다’는 자극적인 기사는 숱하게 접했건만 정작 작품과 오랜 시간 눈을 마주치며 대화해본 이가 얼마나 될까. 여기 박수근의 유화·수채화·삽화는 물론 그의 유품, 살아온 과정을 한곳에서 만날 기회가 당신을 기다린다. 새하얀 적막감이 바림질할 겨울이야말로 ‘빈자의 화가’와 교우할 가장 좋은 계절 아닌가.
박수근 생가터에 ‘새겨진’ 미술관
켜켜이 쌓여 있는 거친 화강암 벽 ‘눈길’
투박한 질감으로 작가의 작품세계 대변
“미술관은 짓는게 아니라 땅에 새기는것”
이종호 건축가가 설계한 박수근미술관 전경. 화강암 재질로 된 외관이 박수근 작품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듯하다.
● 미술관, 박수근을 새기다 = 여느 시골마을과 다를 바 없는 양구읍 정림리 들머리에서 이질감 넘치는 건축물을 봤다면 ‘박수근미술관’에 가까워졌다는 뜻이다. 미술관은 그 자체로 작품이다. 거칠고 투박한 화강암 덩어리가 켜켜이 쌓여 이뤄진 벽이 풍만한 곡선을 그리며 방문객을 내밀한 전시 공간으로 안내한다.
네댓번은 족히 찾았을 곳이지만 이번은 어느 때보다 기대감이 크다. 개관 20주년을 맞아 ‘박수근의 시간·미석(美石·박수근의 호)의 공간’이라는 특별전이 열리고 있어서다. 여기에다 삼성에서 기증한 이른바 ‘이건희 컬렉션’ 작품도 미술관을 찾았단다.
그런데 왜 화강암이 방문객을 가장 먼저 맞이할까? 중·고등학교 미술시간에 졸지 않았다면 대번에 알아차릴 수 있다. 그의 작품세계를 대변하는 기법이 있다. 바로 ‘마티에르’다. 프랑스말로 재료·재질이라는 뜻이다. 그의 작품 대부분은 울퉁불퉁하고 매끄럽지 않은 표면이 특징이다. 건축가 이종호는 입구에서부터 은유로 박수근의 작품을 표현한다.
평면적인 시골에 입체적인 건물이 들어선 데는 여러 사람의 숨은 노력이 있었다. 공무원이 아닌 전문가의 생각에 맡겨야 한다고 주장한 당시 임경순 군수, 전문가 집단인 화가 정탁영·함섭, 박수근의 궤적을 누구보다 잘 아는 박명자 갤러리현대 관장, 마지막으로 미술관 설계를 맡은 건축가 이종호가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결과가 지금의 박수근미술관이다.
고인이 된 이종호는 생전에 쓴 글에서 미술관을 짓는 것이 아닌 ‘새긴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새김은 ‘다른 무엇을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를 지우는 새김’을 의미했다. 그는 박수근 생가 터에 놓일 미술관은 세우는 것이라기보다는 그 땅에 새겨지는 작업이라 여겼다. 마치 그 땅이 오랜 세월 화가의 귀향을 기다려 온 것처럼, 마치 이 미술관이 거기 그렇게 새겨지기를 기다려 온 것처럼 말이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박수근미술관 안쪽에 있는 그의 동상.
● 보통학교 졸업 그리고 미술공부 독학 = 미술관에 첫발을 내디디면 왼쪽 모퉁이에 화가의 유품이 가지런히 정리돼 있다.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있다. 그가 육필로 쓴 이력서가 놓여 있는데 남우세스러울 정도로 단출하다.
‘1929년 3월 양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 후 미술공부(獨學·독학).’
그의 집안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12세 때 밀레의 <만종>을 보고선 화가의 꿈을 키웠으나 가정형편이 어려운 터라 중학교 진학을 포기한다. 그러나 극심한 가난도, 불우함도 그의 붓을 꺾지 못했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수채화 <봄이 오다>라는 작품을 출품해 입선한 후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전까지 여러차례 크고 작은 상을 타며 조금씩 입지를 넓혀 갔다.
유품 속에선 가족 생계를 꾸려야 하는 평범한 가장으로서의 고뇌도 엿보인다. ‘환쟁이’의 운명이 그렇듯 그 역시 그림을 그리고 판다고 해서 쉬이 큰돈이 모이지 않았다. 한국전쟁이 끝날 무렵 미8군 피엑스(PX)에서 초상화를 그려 주던 시절이 담긴 흑백사진, 돈이 없어 자녀에게 직접 그려준 동화책 속 수십장의 삽화를 보노라면 숙연해진다. 돈을 벌어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면서도 없는 시간을 쪼개 작품활동을 이어나가야 했던 그의 절실함이 곳곳에서 묻어난다.
고흐 옆에 동생 테오가 늘 곁을 지켰듯, 박수근이 화가가 되기까지 도움을 준 이들이 꽤 많다. 대표적인 인물이 보통학교 시절 일본인 교장이다. 그의 재능을 알아본 교장은 “상급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더라도 꿈을 잃지 말라”며 화구를 사주고 물심양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작품 애호가였던 마거릿 밀러도 있다. 작품을 사주는 것은 물론 서신으로 교류하며 무명 화가를 격려했다.
“서울화단에서 작가들과 경쟁하는 일이 힘들다는 사정은 알고 있지만 당신이 결국 앞서게 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낙심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우리는 당신이 언젠가 유명한 인물이 되리라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마거릿 밀러가 박수근에게 보낸 편지에서, 1958년 2월8일)”
●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담은 화가 = 특별전에 들어가기 전 입구에 쓰인 ‘소박’이라는 표제어가 눈에 들어온다. 그도 그럴 게 클림트 작품처럼 색감이 화려하거나 모네처럼 형형색색 빛을 담지 않는다. 질그릇 같은 표면 위에 선을 날실·씨실처럼 엮으며 면을 완성하는 식이다.
“나는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예술에 대한 대단히 평범한 견해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내가 그리는 인간상은 단순하고 다채롭지 않다. 나는 그들의 가정에 있는 평범한 할아버지·할머니 그리고 물론 어린아이의 이미지를 가장 즐겨 그린다.” 박수근의 작품은 ‘뺄셈의 미학’이다. 찰나의 순간 포착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담아내는 데 수려한 색이나 빼어난 기교는 군더더기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특별전에 모습을 드러낸 주요 작품인 <나무와 두 여인>을 오랫동안 응시한다. 박수근이 즐겨 그리던 나목이다. 잎새 하나 남지 않은 나무는 쓸쓸하고 남루해 보인다. 그러나 그 안에 희망이 꿈틀댄다. 잎사귀를 내고 푸른 옷을 입을 나무의 봄 말이다. 그의 작품 속에서 장사하는 사람, 빨래하는 사람, 절구질하는 사람, 머리에 짐을 이고 가는 사람 모두 마찬가지이다. 어김없이 이어질, 반드시 살아내야 할 내일을 침묵하며 말하고 있다.
‘춘불래사춘(春不來似春).’ 봄이 오지 않았지만 이미 봄이 온 것과 같다는 뜻이다. 단언하건대 봄은 아무에게나 오지 않는다. 그것을 염원하는 사람에게만 온다.
◇ 도움말=엄선미 박수근미술관장, 나중선 박수근미술관 전시해설사
양구=이문수 기자, 사진=김원철 프리랜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