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몽골 관광의 관문이자 문화유산도시.
도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성벽과 화엄사, 선화사, 관음당, 등 요와 금대의 불교 사원, 구룡벽과 오룡벽 등 명, 청대의 유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398년 선비족의 탁발씨가 이곳을 북위 왕조의 도읍으로 삼아 번영했던 시대의 흔적을 볼수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윈강 석굴이다.
또 다통은 석탄 도시이다.
다통으로 가는 방법은요....
천진역으로 가자. 2144호 기차를 타고 간데
저녁 8시 58분 출발. 그리구 다음날 아침 5시 27분 도착.
편안히 누워가려면 79원이... 그러 앉아가는것도 만족이라면 36원이면 가능하다.
현공사
사진1.. 현공사. 실제로 보면 더 멋있다
중국 오악의 하나인 헝산의 산기슭에 세워진 사찰이다.
협곡의 골짜기 밑바닥에서 26~50m높이의 절벽에 매달리듯이 세워진 '하늘로 오르는 절'로 북위 후기에 창건되었다.
입장료는 학생증을 들고 가면 25원에 통과...
사진2.. 현공사로 가는길. 혁준, 윤호, 진호, 경은, 미희
사진3..현공사에서 아슬한 두 남자. 혁준, 진호
현공사는 다통시내에서 비교적 먼 거리에 있다 차를 타고 2시간 정도면 도착할수 있다
사진4..현공사에 간 미지..이 뒷문을 통과하려면 5원이 필요해.
사진5..혁준 오빠께서 현공사에 가셔서 사색에 빠지셨습니다..
목탑사..
다통시에서 남쪽으로 70km 떨어진 잉셴에 있는 8각형 9층탑의 탑이다.
현존하는 것 중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높은 목조불탑으로 요나라 청령 2년(1056)에 만들어 졌다
탑 안에는 석가상이나 보상 , 벽화등이 안치되어 있다
사진6..
사진7..군대간 진영오빠께서 길가운데 섰습니다.
윈강석굴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
산절벽의 사암을 파서 만든 석굴은 1km나 뻗어있다.
조각된 상은 높이 17m나 되는 것부터 불과 몇 cm밖에 안되는 것까지 51000여 개에 달한다.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에도 등록되어 있으며 국내외의 많은 관광객이 이 석굴을 보기 위해 다통을 찾는다.
사진8 그리고 사진9..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각도로 찍어보았습니다.
첫번째 사진은 2000년에 혁준, 진호, 경은, 미희
두번쨰 사진은 2002년 가을에 밥 잘먹는 기진이랍니다.. 윈강석굴은 시내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학생할인 25원 윈강석굴 무사통과...
사진10.. 가을하늘과 윈강석굴
구룡벽
구룡벽은 명 태조의 제13대손인 주계의 저택의 일부분이었다.
베이징의 고궁내에 있는 구룡벽, 베이징 베이하이 공원에 있는 구룡벽과 함꼐 중국 3대 구룡벽의 하나로 손꼽히고 있다
신나는 보너스..혁준 파파이스 왕되다. 다통으로 돌아오는 길 북경에도 갔어요,
내가 간 다통은...
한번 가 볼만한 곳이라고 추천하고 싶은곳..
내가 다통에서 가장 좋아한 곳은 윈강석굴. 웅장하지만 아름답다는 표현이 가능했던 곳..
또 나처럼 자신의 눈을 의심하게 될지도 모르는 화룡사에서의 즐거운 경험..
다통은 중국에서 여행하기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우리가 투자하는 시간과 돈 이상의 가치를 얻을수 있는곳..
다통으로 갑시다.. 우리랑 또 함께..
솔직한 보너스...
여행은 많이 경험할수록 또 많이 고생할수록 더 많이 마음에 남는것 같다.
그런면에서 나의 다통여행은 아쉬움이 조금 남는다.
하지만 내 눈에 새겨진 다통은 그 자체로도 또 하나의 소중함이다.
가는방법..........(천진의 동장역에서 )
후호하오터까지 오직 1대뿐
잠을 잘 수 있는 칸은 113원
앉아서 갈 수 있는 칸은 53원
매일 저녁 8:50 출발
다음날 아침 10:15분에 도착
내몽고자치구(內蒙古自治區)
중국 북부의 몽골족 자치구. 수도는 후허타오터(呼和浩特).
면적 118만3천km2. 인구 약 1,985만(1985)명. 북동에서 남동으로 길게 가로놓여 있어,
동에서 남으로 지린(吉林), 랴오닝(遼寧), 허베이(河北), 산시(山西), 산시(陝西) 등의
여러 성 및 닝샤후이족(寧夏回族) 자치구와 접경하고, 북에서 서쪽으로는 외몽골과 국경을 접한다.
다싱안링산맥 서쪽 및 인산산맥 북쪽 지역은 해발고도 1,000m 내외의 고원지대로,
강수량이 적어 고비사막에 속하는 사막과 초원이 펼쳐진다.
현재의 몽골 공화국 지역인 외몽골과 구분하여 네이멍구(內蒙古)로 부르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엽 청나라 때부터의 일이며, 이렇게 구분하여 부를 만큼 네이멍구와 중국과의
관계가 밀접했다. 즉, 네이멍구에는 일찍이 한족(漢族)의 이주가 이루어져서 18세기 말에는
인구에서 한족의 수가 몽골족을 능가하였다. 몽골족 사이에서 자치 요구가 강력하게 대두되어,
다싱안링산맥 서쪽에서 인산산맥 북쪽에 걸친 네이멍구고원 및 오르도스고원 북서부 등지의 초원지대를 중심으로
양, 소, 말, 낙타, 돼지 등의 사육이 활발하므로 네이멍구자치구는 중국의 주요 목축업 지역이 된다.
본래 유목으로 이루어지던 목축업이 오늘날에는 정착경영으로 바뀌었고, 특히 양털의 산출이 많다.
자치구 남동부의 허베이, 산시 양성의 경계부근에서 후허하오터고원에 걸친 지역과 황허강 북안의 허타오평원 및 오르도스고원
남동부는 주요 농업지역을 이루며, 조, 수수, 콩, 밀, 깨, 사탕무 등의 생산이 많다.
남쪽 기슭의 스과이거우(石拐溝) 및 서부의 우다(烏達) 등지의 석탄, 네이멍구, 오르도스 두 고원의 나트륨, 소금 외에 운모, 석면 등
풍부한 광산자원이 개발되어 자치구 공업이 크게 변모되었다.
종래의 공업은 모직물, 양탄자, 피혁제품 등 축산가공업이 중심이 되어 왔으나,
최근 풍부한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바오터우(包頭)에 중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안산(按山), 우한(武漢) 등지와 더불어
3대 중공업기지의 하나가 되었고, 그밖에 우다(烏達), 하이보완(海渤灣) 등지도 신흥 공업도시로 발전하였다.
교통은 징바오(包蘭)철도(北京~包頭), 바오란(京包)철도(包頭~蘭州) 및 지닝(集寧)에서 얼례하오터(二連浩特)를 거쳐 몽골,
러시아로 통하는 지얼(集二)철도 등이 있고, 자동차 도로는 후허하오터, 바오터우, 지닝 등지를 중심으로 각지로 연결된다.
황허강(黃河)은 내륙수로로서 큰 몫을 한다.
후허하오터 (呼和浩特)
후호하오터는 몽골어로 "파란 성" 이란뜻이다. 매우 이국적인 분위기로 면적은 60㎢인구는 150만 명
몽골족을 비롯래 약 20만 명의 소수 민족이 살고 있다.
기후는 서북지방 특유의 대륙성 기후로 여름에도 서늘하여 여행하기 좋다.
시내에서 가장 번화환 곳은 民min 族zu 商shang 場chang 대형백화점 天tian元yuan商shang場chang 이있는
中zhong 山shan 西xi 路lu 이곳으로 가려면 1,3,4,19번 버스를타고 民族商場에서 내린다
또 3,4,19버너 버스를 타고 淸qing眞jin大da寺si(쓰)까지가서 6번으로 갈아타고 小xiao什ye字zi에서 내리면
大da召jiao라는 티베트 사원이 있다 근처에 大da 北bei 街jie 大da 南nan 街jie 에는 시장이 서는데 꼭 들러보자
여기서 반지를 사두자 기념품으로 몽고어로 이름을 써주는데 하루 걸린다고 한다
우리는 반지를 꼭!!!꼭~~~~~~~~~사고 싶었지만 반지를 사면은 초원을 포기해야 하는 슬픈일이 생겨서
어쩔수없이 포기ㅠ.ㅠ 했다
1. 내몽고박물관(內nei蒙mong古gu搏bo物yu館guan) 요금은 3원입니다 2,20번 버스 이용
박물관은 내몽고 자치구립 종합 박물관.
관내는 1층 민족 풍정관과 고생물관, 2츤 역사관,혁명관등 4개의 전시실로 나뉘어 있다
1층의 민족 풍정 전시관에는 민족의사왁 요구르츠 만드는 통 등 몰골족의 생활용품들을 전시한다.
1층고생물관에서 볼만한것은 매머드와 공룡 화석 모형. 이들 모형중 일부는 진짜 화석을 사용한 것도 있다(가장 추천 대단 ! 감탄! 놀람!)
2층 역사관에는 약 70만년 전 부터 시대별로 역사 유물을 전시한다.
흉노 왕의 관, 요나라의 메노우 말 장식을 비롯해 인간의 얼굴이 위에 붙어있는 페르시 항아리 ,모옥ㄹ족이 냄비로도 사용했던 독특한 물건들이
전시되어있다
혁명관에는 내몽구의 영웅 올린후에 관한 전시와 전쟁중에 중국군이 일본군으로부터 빼앗은 일본도와 철포 등이 전시되어 있다
2. 대소 (大da召jiao) 요금은 5원입니다
티베트 불교 사원으로 중국 명칭은 무량사 無 量liang寺 si 명나라 연간(1567년~~1572년)
몽골의 타타르 부족의 우두머리인 알탄은 순의왕에 봉해진 다음 후허하오터와 이 사원의 건설에 착수하여
1580녕에 완공했다. 대전 안에 은으로 만든 석가모니 상이 있다 또한 석가모니상 앞에는 10m나 되는 용 조각도 있다.
3.석력도소
명나라 연간(1563~1620년)에 세운 티베트 불교사원 내몽고 에서 젤 높다는 15m티베트식불탑 빠질수없는 볼거리
여기는 안가봐서 쩝...
4. 소군 묘 요금은 10원
중국 4대 미인 가운데 한 사람인 왕소군의 능. 왓군은 여러 가지 전설과 희곡에 낭ㅁ아 있으면,
오늘날에도 중국 민중의 마음을 사로 잡고 있는 인물이다 흉노왕 호한야선우가 한나라에 화친을 제안했을때
궁녀였던 왕소군은 한민족과 이민족의 평화를 위해 호한야선우와 혼인을 했다고 한다
능의 높이는 약 33m이고 위에 올라가면 능 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5. 만부 화엄경 탑
백탑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벽돌과 나무로 구성된 팔각칠층탑으로 높이는 50m나 된다
6.초원
초원은 6월말부터 9월초까지 시즌인데 7월이 최~~~~~~적기다 이유는
풀이 가장 많이 자라기 때문이다
우리는 10월달에가서 풀이 말라 죽어 있었기에 푸른 초원은 보지 못했다
잠은 파오에서 잤는데 밤에 추워서 얼어 죽을 뻔했다
7.사막
초원에서 얼어죽을뻔하고 사막에사서 더워 죽을 뻔했다
사막은 주위가 온통 모래 뿐이지만 인상깊고 흥미로운곳이다
여기에서 낙타를 타지 않으면 평생 후회 할 것이다
여기는 대소안에 있는 티베트양식의 탑이다
현승이형 뒤에 보이는것이 파오다
파오 가까이에서 개랑 놀고있는 형누나
초원에서도 작은 마을이있다
산(?)에있는(언덕같다)돌을 올리면서 신께 평안을 비는것 같다
뒤에 보이는 곳이 사막의 처음이다 여기서 영화"무사" 를 찍은 곳이다
사막을 가려면 리프트을 이용해야한다
뒤쪽으로는 아직 사막이 되지 않았다
모래가 신발에 들어가지 않도록 신발위에 천을 싣는것이다
사막~~~~~~~~~~~
혁준이형 경은이누나 그외 분들을 뉘신지ㅡ.ㅡ?
많은 낙타들
낙타를 타고 줄줄이
1.여행지 소개.
낙양은 역대 9왕조가 도읍을 정했던 곳이므로 '九朝의 도시'라고 불리는 역사 깊은 도시이다.
그러나 낙양이 가장 번영했던 것은 장안(지금의 서안)이 도읍이었던 당나라 때이다. 서안이 정치의 도시라면 낙양은 예술의 도시로 전국시대의 노자, 당대의두보, 이백, 백낙천 등 많은 문인과 예술가가 이곳에서 활약했던 곳이다.
현재 낙양은 해로운 빌딩이 여기저기 들어서고 빠른 속도로 근대화가 진행되고 있다.
2.여행지 가는 방법
내가 나침반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갔었던 갔었던 여행이었기에 기억이 난다.
진영이 오빠가 낙양으로 가자고 했을때...
우린 천진동서역으로 표를 구했었지만 마땅한 시간을 정하지 못해 결국 북경에서 기차를 타기로 했다.
천진에서 북경을 가는 기차 오후 5시 30분행을 타서 북경에 6시 45분에 도착..
급하게 북경서역으로 가는 택시를 타서 7시 30분행 낙양역 기차에 올랐다.
가격은 천진에서 북경----35元(1시간 15분 소요)
북경역에서 북경서역까지 택시비----10元(20분 소요)
북경서역에서 낙양역----53元(12시간 소요)
현재 내가 조사한 봐로 인하면 천진역에서도 낙양행을 탈수 있다고 한다.
빠른 열차의 경우 대략 80元정도이고 보통의 열차는 50元선이라고 한다.
시간은 오후에 가는 열차가 많으며 빔여라도 있다고 한다.
낙양에서 천진으로 오는 열차는 흔하지 않다.
우리가 그리해서 택한 방법은 북경으로 오는 방법이었다.
내가 하나 여행할때의 정보 하나를 가르쳐 줄까한다.
여행 도착지에서 돌아오려 할때 마땅한 시간과 열차가 없을때는 북경행을 선택하면 좋다.
천진 열차는 많아야 한두번 떠나기 때문에 북경행을 선택하면 두루 편할때가 많다.
우린 저녁 7시 35분에 출발하는 북경행 기차를 탔다.
미리 표를 사두지 못해서 無座이긴 했으나 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자리가 나기 시작했다.
절대 無座라해서 표를 피해선 안된다.
낙양에서 북경----91元(10시간 소요)
3.명소 소개
◆ 관림당(關林堂)
원래는 삼국지에 나오는 조조가 관우를 모신 곳이나 관우가 종교적으로 숭배를 받게 되자 오늘날과 같은 것으로 되었다. 위풍당당한 관우상이 있다.
또 벽면에는 삼국지의 명장면이 그려져 있으며 적의 목을 잘랐다는 2m나 되는 칼도 있다.
◆ 백마사(白馬寺)
이 절은 중국에서 최초(68년)로 생긴 불교 사원으로 유명하지만 현재의 건물은 명대에 복원된 것이다. 문 앞에는 말의 석상이 있고 그 뒷벽에 절의 역사가 적혀 있다. 절안의 동서쪽에는 元代의 18나한상이 있어 백마사 관광의 핵심이 되고 있다. 인도에서 많은 경전을 가지고 찾아온 두명의 승려의 묘가 입구 좌우 안쪽에 있다. 또 입구에서 나와 왼쪽에는 13층의 석탑이 있다.
◆ 향산사(香山寺)
용문석굴은 낙양 시내에서 당일치기로 충분히 관광할 수 있다. 그러나 1박을 하면서 천천히 관광하고 싶은 사람이나 달밤의 석굴을 보고 싶은 사람 등은 향산사에서 숙박할 수 있다.향산사는 석굴 건너편, 동쪽 산 중턱에 있다. 향산사는 백거이가 자주 찾아왔던 유서 깊은 절로 백거이는 사후에 이 절에 묻혔다.
◆ 용문석굴
낙양 교외의 최대 볼거리인 용문석굴은 시의 중심에서 남으로 약 13km 떨어진 곳의 이하 부근에 펼쳐져 있다. 북위의 효문제가 대동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긴 494년경에 운강석굴에 이어 건축한 것이다. 그 이후, 동위-서위-북제-수-당 등의 왕조가 이어지는 400년동안 보수를 거쳐 훌륭한 석굴군이 탄생하였다.
이하를 사이에 두고 동과 서로 마주보는 벼랑에 새겨진 것으로 현재 남아 있는 동굴은 약 1,352개이다. 동굴 내에는 감(龕)이 약2,100, 불상이 약 10만개, 불탑이 약 40개, 탑명이나 석각이 약 3,600개 등이 새겨져 있다. 산의 표면이 견고하기 때문에 바위에 직접 새겨 놓은 것이 특징으로 훌륭한 벽화를 가진 돈황의 고굴과 비교하면 용문석굴은 정교하고 치밀한 조각이 생명이라고 할 수 있다.
◆소림사
송산 산중의 소실산북쪽 기슭, 우루봉 아래 495년에 창건된 고찰. 소림사내에는 탑림과 여러 무술 시행을 보여준다.
(탑림, 달마동, 중악묘, 숭산 서원등...여러 볼거리 제공이 있다.)
4.여행기 2001년 9월 8일 아침 7시 30분
우리가 처음 낙양역에 내렸을때 배가 무척 허기진 상태였다.
역앞에 보이는 큰 음식점에서 면종류의 음식과 만두를 먹으며 배를 채웠다.
무척 많이 먹었다고 생각했는데 5명이 먹은 가격은 불과 20원이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음식점 앞에서 차를 버스를 타려고 서성이는데 우리가 한국인인지 어떻게 알았는지 택시 기사들이 몰려 들기 시작했다.
결국 진영이 오빠가 택시 한대를 잡아 낙양 여행을 하자고 제의해왔다.
하지만 우린 5명(진영, 경은, 미희, 제홍, 유진) 씨아리에 모두가 타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2대로 잡자고 했지만 2대 빌리는 가격은 무려 400원이었다.
하는 수 없이 200元으로 낙양여행을 다 돌기로 하고 우리 5명은 좁디 좁은 씨아리에 올랐다.
2001 9월 8일 오전 11시경
낙양 외곽인 숭산으로 향했다.
우리가 가장 먼저 간곳은 숭산 서원이었는데 (솔직히 말하면 숭산 서원인지 달마동인지 기억이 오락가락 하다)
무엇을 봤느냐고 구지 물어본다면다면 고등학교때 배웠던 달마에 대한 불상이 우뚝 서있었던 것 같다. 수많은 큰 나무들 사이에서 사진을 찍었던 기억도 있다.
참고 사진 중에 진영이 오빠와 찍었던 사진이 있다.
2001년 9월 8일 오전 12시경 여승이 머물고 있다는 절에 도착
숭산 근처에서 여승이 살고 있다는 조그마한 절에 갔었다. 한국의 경주와 비슷한 구조를 했던것으로 기억한다.
무엇보다도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못해서 서성였던 기억이 있다.
무엇보다 여승지에서 기억나는 것은 입구 앞에서 팔았던 파전이었다.
파와 고추 그리고 당근 등이 들어가 있는 전을 트위스터 같이 말아서 비닐에 넣어주는 것이었는데 한장에 1元이었다.
경은이 언니와 신나게 2장씩이나 먹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그후 택시에 올라 토할 것 같은 기억도 잊을 수 없다.
2001년 9월 8일 오후 1시경 소림사에 도착
가장 기대 되었던 소림사에 도착했다.
입장료는 대략 한사람당 40원 이었으나 택시가사의 도움으로 5명이 150원이내로 들어갔었던 거 같다.
택시 기사 설명에 의하면 우리가 잘 아는 이연걸의 집이 자리 잡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소림사에 갔을때는 때마침 어린 꼬마 승려들이 대련을 하고 있었다.
경은이 언니와 멋진 승려들을 보면서 여기서 살고 싶다며 흥분했었던 기억도 남아있다.
여러 무술 장면들이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다.
대련을 마친 승려들에게 사진 한장을 부탁했을때 부끄러워하던 모습에서 때묻지 않은 그들의 영혼이 너무 부러웠던 기억까지도...
2001년 9월 8일 오후 3시경
용문 석굴에 가기전 들렀던 곳은 소림사 옆에 위치한 탑림이란 곳이었는데 정말 수많은 탑들이 이곳 저곳에 있었다.
이 많은 탑 아래에는 수많은 승려들의 묘와 물건들이 묻혀있다고 했다.
묘의 형태가 각각 달라 중국 고대 벽돌 건축과 조각을 연구한느 예술적 보고란 자료를 찾았지만사실 구경할때는 그런 감동을 앉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쌀과자맛이 일품이었다는 기억만이 남아있을뿐...
2001년 9월 8일 오후 4시경 용문 석굴
드디어 기대하던 용문 석굴에 도착했다.
마침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택시가 가까이 진입을 하지 못한다 하여 입구까지 아주 먼 장소에 내려 걸어갔던 기억이 있다.
하룻동안 우리의 기사였던 아저씨와의 이별을 하며 아쉬운 마음을 가진채 용문 석굴에 진입했다.
학생 할인이 되지 않아 일인당 40원에 들어갔다.
다들 너무 거대한 석굴을 보며 처음엔 감탄을 했지만 21문이나 되는 큰 석굴 앞에서 그만 두손 두발을 들고 말았다.
처음 1문에서 5문까지는 꼼꼼히 구경했었는데...6문에서 21문까지는 걷는것 만으로 지쳤던 기억이 난다.
중국의 3대 석굴 중의 하나라고 하는데 그 규모만큼은 인정이 간다.
하지만 한국의 석굴암을 길게 늘어트린 모습과 같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하며...조금 막바지에서는 지루함이 밀려왔다.
마지막으로 용문 석굴이 적혀있는 문 앞에서 사진 한방을 찍고 모두 기차역으로 향하자는 제의에 동의했다.
2001년 9월 8일 오후 6시경 기차역 앞 허름한 음식점
점심을 먹지 못한채 계속 지친 여행을 했기에 허름한 식당의 밥 한그릇도 맛있게 먹었었다.
난 매 여행에서 그러지만 남들이 밥을 먹을때 구지 라면을 고집하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그것은 아마 이 낙양에서 시작 되었던 것 같다.^^
2001년 9월 8일 저녁 7시 25분 북경으로 출발~~!!!^^
시작과 끝은 항상 일맥 상통한다???
처음 북경 역에서 낙양으로 출발할때 겨우 출발 시간에 맞쳐서 탔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낙양역에서 북경으로 향하는 기차또한 겨우 잡아서 탄 기억이 있다.
달리기를 젤 못하는 내가 뒤쳐서 차를 놓칠판이 되자 멋진 부장 진영이 오빠가 날 이끌고 달렸던 기억도 남아있다.
겨우탄 기차에서 우린 無座라서 화장실옆에서 곤히 잠이 들었다.
2001년 9월 9일 새벽 5시경 북경 역에내려...
긴 여행을 마치고 북경서역에 내려 그동안의 찌들고 더러웠던 몸을 씻고 북경동역으로 향했다.
아침 7시경에 맥도날드에 가서 배를 채웠다
그리고 9시 30분 천진행 기차를 타고 11시경에 천진에 도착 2박 3일의 길었던 여행은 끝이 났다.
5.여행 경비
a. 차비
천진-북경 2次 70元
북경-낙양 1次 53元
낙양-북경 1次 91元
낙양에서의 여행 풀코스 택시비(5인) 200원---1인당 40원
북경, 천진에서 사용한 택시비---20원
b. 입장료
* 소림사 구경 5인 기준 160원---1인 대략 35원
* 숭산 서원, 탑림---합계 50원
* 용문 석굴---40원
* 기타 구경 장소 입장료---30원
c. 식사비
*아침, 저녁---1인당 30원
*기타 간식, 음료비---1인당 10원
*북경, 천진 맥도날드 햄버거 값---40원
d. 합계=500원
나침반의 신입생들과 하는 2번째 여행은 북대하 여행으로 정해졌다.
혁준이 오빠는 3학년이라고 이제 여행은 안간단다.
이제까지 같이 나침반을 지켜온 미희는 우리곁을 떠났고...
그때가 나침반에 찾아온 최대의 위기였던것 같다.(ㅡ.,ㅡ 지금 생각해도 씁쓸하네...)
나랑 진영이는 유진이랑 제홍이 한테 멋진 모습을 보여주자며 다짐하던게 얼핏 생각나는데...
그때는 각오도 대단했다.멋진여행을 준비하려고 유진이랑 샌드위치도 만들었다.
유진이는 우리들의 맘을 아는지 열심히 도와줬다.호응도 이빠이 해주면서...(너무 고마웠다ㅠ.,ㅠ)
제홍이는 생각이 없어보였다...(지금은 변했다...그가 부장이다^^)
여행가기 전날은 내 생일 이였다.그 전날은 나침반에서 근사한 자전거를 선물해 줬는데
그걸 타고 샌드위치 재료인 식빵을 사러 가던게 생각난다.그리고 샌드위치를 너무 많이 만들어서
농구부에 갔다 줬는데 목이 메인다며 물을찾던 모습도...
하여간 그렇게 준비를 마쳤다.내일을 기대하면서...
---여기서 잠깐 북대하는... ---
북대하는 북경 시민들의유명한 피서지로 북경 정동쪽400km쯤 떨어진곳에 있다.
북대하는 1980년대 우리 신문들이 주로 "중국 최고 지도자들의 비밀 휴양소"쯤으로 묘사했던 곳이라고 한다.
완만한 해안선, 송림을 뚫고 들려오는 바람소리, 조용한 물결 등 이와 같은 천연의 자연조건은 이곳을 청조시대부터 정부고관이며 외국공사, 부자들을 위한 고급 요양지로 개발되었으며,
해변에는 700채 남짓의 별장이 세워져 있다고 한다.
지금은 서민들도 발걸음을 옮기는 해수욕장이며 일대 요양소가 되었다.
한국에도 낯설지 않은 곳인데 중국의 최고 지도자인 모택동 나 등소평이 노익장을 과시하며
바닷가에서 수영을 하는 장면이 자주 외신으로 들어오곤 했다.
이밖에도 주변 휴양지로는 남쪽으로는 남대하(南戴河) 북쪽으로는 산해관(山海關) 청조(淸朝)의여름 수도라는 승덕(承德)있다.
북대하를 가는 분들이라면 이 곳 들도 보시는 것도 좋을듯...
다음날 2001년 11월2일
우리는 여행가기전 모임장소인 1층로비에 모였는데...이런이런...
제홍이가 안간단다.
친구가 북경에 왔는데 친구 만나러 가야한단다.
나중에 안 사실은 그때 안가고 우리 돌아온뒤에 북경에! 갔단다...ㅡ.,ㅡ
안그래도 복잡한 마음에 아주 우울했지만
나랑 진영이랑 유진이는 출발했다 북대하로...
*북대하로 가는 기차는 자주있다.거리도 가깝고 가격도 싸다.
참고로 우리가 타고간 기차는 오후6시32분행 열차다.
가격은 21원으로 이제까지 여행한곳 중에서 가장 싸다.!
표는 退받았다.15원밖에 안돌려 줬다.제홍이 엄청 씹었던게 생각난다.
기차 여행을 하시는 분들에게 하고 싶은 말은 놓친 기차표는 돈으로 바꿀수도 있고
시간을 바꿀수도있다.돈을 더 내기도 하지만...
목적지가 바뀌면 기차안에 복무원에게 補票 비를 내면 된다.
기차안에서 진영이가 가디건을 입고 책을 읽던게 생각난다.국어 선생님 같았다.
그때 앞에 앉은 중국인이 진영이 보고 잘생겼다고 했다.막 비웃던 것도 생각난다.^^;
유진이는 창가에 앉아서 존재감이 없었다.아주 잠깐 앉아있었는데 도착했다.
4시간 만인 10시32분이였다.
역은 아주 조용했다.깨끗한 이미지에 크기도 아담하고 하여간 좋았다.
그땐 한국의 동해역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만큼 중국역 같지않게 좋았었다.
역 밖으로 나왔더니 역시나...
역 앞에는 바다로 데려다 준다는 택시들이랑 여관을 잡아준다는 삐끼 아주머니들이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우리는 택시 한대를 잡아타고 바다근처 여관을 둘러 보기로 했다.
역에서 바다까지는 거리가 좀 있었는데 택시비가 비싸다. 돈이 막 올라 간다 km당
2.1원씩 올라갔다.여관을 2군데 정도 들려서 자리를 잡았다.택시비는 23.3원이 나왔다
밤이였는데도 거리는 너무 깨끗했다.잘 정리된 도로하며 나무들 가로등 등...
다시한번 말하지만 한국의 조용한 어촌같았다.
여관에 들어가니 보통 중국여관이 아니다. 무슨 정원이있다.
그 안으로 들어가니 건물이 있다.한국에서 학창시절 갔던 수련원같은 분위기의
여관이었다.방은 깨끗하고 좋았다.화장실도 좋았다.근데 방값이 비쌌다.120원이나 달란다.
우리 습관상 그런데서는 못잔다.그래도 밤도 늦고 피곤도 해서 그냥 자리를 잡았다.
침대3개짜리 방으로 짐을 풀고 나왔다.
배가 고파서 식당을 찾아 봤는데 문을 연곳이 한 군데 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밥을 먹고 나왔다.바람이 너무 불어서 무지무지 추웠다.
여관 앞에 길을 건너 소나무를뚫고 나가니 보이지도 않는 바다가 막 펼쳐져 있었다.
너무 좋았다.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우리들 뿐이였다...
모래를 막 뛰어가서 바다를 보고 소리도 잠깐 질렀던거 같다.
바람이 차지만 참 시원했다.
대충 둘러 보고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자는 동안 너무 추워서 얼어 죽는줄 알았다 둘러보니 暖器 가 없다.아이구...
이불을 두개씩 덥고 옷도 다 입고 잤다.내일은 따뜻하겠지 하면서...
다음날이다.
따뜻한 침대에서 일어나기 싫어서 유진이랑 뒹굴고 있었다.
진영이가 창문을 열고 일어나라고 소리치던게 생각난다. 이것들아 일어나...
준비하고 나온시간이 9:30분
어제 봤던 바닷가로 나갔다.
낮이라 기분이 색다르다.
여관앞 바닷가.아동 손유진이다.ㅡ.,ㅡ
우리셋 다 이런 포즈로 찍었다
열심히 보는척...계획된 포즈...
바닷가 길을 따라서 올라가면서 길에서 사진찍고 다들 신났었다.
거리가 진짜 깨끗하다.
휴양지라서 그런지 잘 정리 되어있다.
겨울에 꽃이...
깨끗한 거리다. 차도 없고 사람도 별로 없다.! 천진을 떠나 오랜만에 한가함을
느껴졌다.
나무가 너무 이뻐서 따라하라고했는데
인물이 별로다...ㅡ.,ㅡ
올라가다 올라가다
어디가 어딘지 몰라서결국 오토바이 차를 탔다
촌년 둘이 ...
볼만한 장소로 가자고 했는데 이상한 공원으로 데려다 줬다.3원이나달라네...
별것도 없어 보이는데 입장료가12원에다가 학생할인도 안되서그냥 나왔다.
공원앞에서...
낙엽 태우는 연기에...
다시 길을 따라 내려가다가 작은시장에서
뻥튀기를 사먹었다.바나나킥처럼 생긴건데 먹을만 했다.귤도사고...
뭔지 모르겠지만
그냥 찍었다.
도시가 참 작고 아담하다.점심시간도 다되고 이제 바닷가의 별미를 먹어보자고 회를 먹으러 갔다.
북대하에 중국동포가 하는 한국식 회식당이 있다고 해서 택시를 타고 아저씨께 물으니
아신다면서 친절하게 데려다 주셨다. 택시로 5원정도였다.도시가 작다보니 아무리
어딜가도10원은 안넘는다.
우리는 중국동포가 한는 식당으로 가서 광어 1마리랑우럭1마리를 시켰는데
처음에는! 거의 400원 돈을 달라고 했다.
돈이 없다고 학생이라고 난리를 피고200원으로 합의를 봤다.
아주머니가 어디가서 그 값에 먹었다고 하지 말라고 했다.
다른 반찬은 없다.단지 상추랑 초고추장이 전부다.회랑...
우리는 회를 먹기위해 그전에 태양초 초고추장을 샀었다.
그 곳 초고추장은 맛이 없었던걸로 기억 된다.나중에는 파리까지 빠져 죽었다...더럽게...
맛있는 회.. .
나중에 사람들 한테 자랑한다고 무지 맛있게 먹었다.
끝에보면 초고추장이 보인다...^^
나중에는 매운탕도 끊여준다.
그게 하마 중국동포가 하는 식당과 일반 중국식당이랑 다른 점 같다.
식당이 있는곳은 老虎石 앞에 위치해 있다
老虎石 은 북대하에 중심되는 장소쯤으로 앞에는老虎石 이 있고 그옆으로는 뱃머리 모양으로
바다를 볼수있게 전망대 식으로 꾸며져 있다.타이타닉 뱃머리처럼...
그래도 관광객이라고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사진을 찍고있었다. 우리도 미친듯이 사진찍고 놀았다.바람이 크게 불어서
파도가 크게 일었다.
겨울이라 사람이 별로 없었지만 주변에 여기저기 피서지의 모습이 보였다탈의실도 보이고 주변의 가게도 많고...
다시 완전 아동이다.두꺼비집 만드는 우리 유진이...
멋지다
"오다 나침반"
바닷가를 다보고 다시 걸었다.
시내구경이나 해야지 하고 ...그리고 다시 역으로 돌아갈 계획이였다.
한참을 걷다가 슈퍼에서 혁준이 오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자고 있어났는지...아마 그때 학교에 무슨 행사가 있었던거 같다.
농구대회였나?하여간...
혁준이 오빠를 실컷 놀려줬다.심심하지~~~?
하면서... 회먹었다고 자랑도 했다.
다시 시내쪽으로 걷다가 사람들 한테 물었다 맥도날드가 어디냐고?
이 조그만한 도시에 있긴 있나보다.사람들이 친절하게 길을 알려주었는데...
찾아가보니 말도 안되는 싸이 땅 라오였다.
유진이는 화장실 가고 싶다고 난리고
우리는 들어가서 감자튀김 이랑 커피를 시켰는데...참 맛이 없었다.
더럽다며 화장실 안간다는 유진이...결국은 갔다가 왔고...
우리는 택시를 잡고 역으로 향했다.
택시비는 25원이 나왔고 집에가기 아쉬워서
다음날 일출을 보고 바로 역으로 오자며 새볔6시 23분 표를 끊었다.역까지 21원
다시 여관을 잡아야하는데 역 앞 택시기사 아줌마랑 아저씨가 여관을 소개시켜 준다며
5원만 달라고 했다.바닷가 까지 택시비가 20원이 넘는데 정말일까하고 걱정했다.
근데 정말다시 老虎石앞 여관으로 데려다 주고 5원만 받았다.
여관은 전날 잔 곳보다 깨끗하진 않았지만 따뜻하고 바닷가랑 가까이있고 근처에 식당도
많아서100원으로 3명 방으로 구했다.
그날 저녁은 참 기억에 남는다 .
밤에 유진이 나 그리고 진영이 바닷가에 앉아서 애기를 했다...
유진이 글에서 잘 써져 있으니 참고하시길...그 자식 나랑 같은 마음이다.^^
참 좋았고 기쁘고 시원했다.
서로가 서로를 믿고 이야기한 시간이였던 같다.
이를 계기로 다들 더 친해졌다 .
**유진이가 나침반 카페에 올린글**
오랜만에 나침반 카페에 글을 올립니다...
새해네요...^^
오늘 새해 첫 일기를 쓰면서 2002이라는 숫자가 쉽게 쓰여지지 않더군요..
2002년이 다가왔지만...여전히 2001년이 그립고 정이 가나봅니다...
2001년...저에게는 많은 추억과 아픔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침반이 있었고, 그안에 여행이 있었습니다..
요즘은 가끔...혼자 있을때...
11월에 진영이 오빠,경은이 언니와 함께한 북대하 여행이 생각납니다..^^
출발때부터 모두가 고민이 가득차 있었던지...
기차안에서 침묵을 지켰던 것이 기억에 남네요...
겨울 바다를 보기 위해 떠났던 북대하 여행!!!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가 파도 안으로 흘려보냈던! 고민들!!!
모두들...바다위에 펼쳐진 달무리가 너무 멋있다고...
감탄을 했던 그때...요즘은 왜 그때가 계속 생각나는 걸까요???
전 그때...파도에 흘려 보냈던 고민이 다시 밀려올까봐 겁이 납니다...
그리고...지금 그때의 고민으로 힘들어하는 진영이 오빠,
항상 웃지만...왠지 슬픔이 있는 경은이 언니...
그리고 이 둘을 너무나 아끼는 유진이...
우리 모두 행복했으면 좋겠습니다~
새해에는 좀더...밝게 살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그리고 2002년에...나침반 모두가 행복한 마음으로...
다시 북대하에 가서...
예쁜 달무리를 보고 왔으면 좋겠어요...
모두들 새해에 복 많이 받으세요...
다음날 아침이다.
일출을 보기위해 일어나기 싫은 몸을 일이켰다.
다시 진영이가 우리를 볶아서 일어났는데...
일출이 구름에 묻혀 잘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일출을 대충 보고 다시 숙소로 돌아온 우리들은 시간이 잠시 남아서 살짝 잠이 들었는데...이런이런...기차 시간을 놓쳤다...역으로 돌아가서 8시30분 천진 행 열차가 있는것을 확인하고 돈을 더주고 표를 바꾸고 다시 천진으로 돌아왔다.
북대하 여행은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가장 큰 용기를 얻을수 있었던 여행이였던거 같다
힘들때 속상할때 가끔 그때를 생각한다...
그대들도 바람부는 겨울에 북대하를 한번 찾아보길 바란다...
뭔가를 얻을수도 있으니...^^
((이때까지는 좋았네..))
나침반은...2001년 5월 1일 노동절을 이용해 서안에 가기로 하였다.
우리는 새벽에 만나는 터라 모두들 배가 고파있었다...기차출발 시간이 아직도 많이 남은 터라 우리는 느긋느긋 걸어서 KFC가서 햄버거 먹구..시간을 보냈는데...그만...택시탔는데 길 막히지, 공사중이지..ㅠㅠ 기차 타기 전까지 모두들 막 전력질주 하며 뛰고 뛰었다.
선민 누나가 들고있던 과일 봉지 다 뜯어져서 과일 땅바닥에 돌아다니고 그걸 막 줍는 누나 유진이 하지만 나와 진영이 형은 무조건 뛰고 뛰었따..ㅋㅋ 나침반의 어려운 여행을 할거라는 예감과 함께...간신히 시간맞춰서(10시20분 78원) 기차에 올랐다..
그렇게 나침반은 천진을 떠났다...열차안에서의 24시간...한국에서는 상상도 할수 없을것이다...우리는 앉아서 24시간동안 힘든...시간을 보내고 드디어 서안에 도착하였다..
((시안역에서 한장))
서안은 중국에서도 드물게 도시가 발달했음에도 명대의 외곽 성벽이 거의 온전히 남아있는 곳이다. 현재의 도심은 성벽안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고 그 가운데 종루를 중심으로한 대로가 있다. 종루를 중심으로 한 대로는 서안의 다운타운으로 서울의 종로와 비슷한 곳이다.
백화점과 옷가게 선발매장, 식당가가 즐비한 거리로 시안에서 가장 번화하다. 고대중국과 서역을 연결한 실크로드의 동쪽 기점으로 천년전 이미 인구가 백만을 넘었던 큰 도시였다. 우리에게는 장안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곳이다.
시안에 도착하구 바로 병마용을 볼 수 있는 진시황 병마용갱박물관으로 향하였다.
병마용
306버스로 1시간정도 소요
입장료 : 학생할인 35원
1974년 한 농부가 우물을 파다가 우연히 발견한 것으로 시황제릉을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지하군단의 8천여 토우군이 볼거리이다.
병사, 말, 전차 등이 모두 실물과 같은 크기이며, 수많은 병사들의 얼굴이 각기 다르다고 해서 화제가 되고 있다.
잠시 병마용에 대해 알아볼까?? 후후후
등신대의 병마도용 6,000개로 이루어진 지하의 군대. 죽은 황제를 사후에도 지키기 위해 흙 속에 갖추어진 이 근위 군단은 그 하나하나의 표정은 물론이고 머리카락까지 다르게 만들어졌다고 하네요..8,000이라고 하는 수도 놀랄 만하지만 그 8,000개 전부의 표정과 손모양까지 다르게 만들었다고 하는 집념에도 놀랄 수밖에 없다...^^
(그 역사적 유물과 함께...찰칵)
박물관의 건물들은 출토된 그 자리에 구조물을 세워 지은 것이라고 한다. 진용 박물관은 4개의 관으로 이루어져있다. 1호갱이 빙마용이 발견된 곳으로 가장 유명하다. 2호갱은 전차와 말과 병사가 발견되었고 3호갱에서는 동으로 제작한 마차가 발굴되었다고 한다.
1호갱은 교과서에서 많이 본 모습이었다. 실물크기의 병사도용이 앞열엔 3열횡대로 서있고 그 바로 뒤엔 40인 종대가 잇고 있다. 병사 도용들은 표정과 크기 자세가 조금씩 달랐다.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들 아랫배가 볼록 나와있다.
((모두들 잘먹었었나??ㅋㅋ))옛날 사람들은 모두들 똥배가 나왔었나 보다. 아직도 발굴이 다 안되었는지..
공사 중인 곳이 많이 있었다...(도대체 얼마나 더 있을까...)
2호갱은 주저앉은 지붕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유리관속에 종류별로 병사용들이 진열되어 있다. 3호갱은 유명한 청동 전차가 전시되어 있었다.
책에서만 보던 역사적인...그 유물..9대불가사리의 하나인 병마용을 보고 가슴이 뿌뜻하였다...24시간의 노여움이 싸~앗~~가셨다..^^v
지금까지 진시황의 엄청난 파워로 만들어진 웅장하고 멋있고..퍼팩트풀한 병마용을 보았으니...이번에는..부드러운..양귀비와 현종 황제의 러브스토리가 펼쳐졌던 그 역사적인 곳으로 가보자...ㅋㅋ
화청지
시안역 옆의 버스터미널에서 306번 버스를 타고 40분 정도 소요된다.
입장료 : 40원
주나라 때부터라고 하니..이럭저럭 3,000년의 역사를 지닌 온천지이다. 당나라 때 양귀비와 현종 황제의 러브스토리가 이곳에서 펼쳐진 곳이다. 양귀비는 원래 현종의 친아들인 수왕의 아내였지만 결국에는 현종의 눈에 들어 총애를 받게 되었다.
자기 아내를 아버지에게 빼앗긴 수왕, 자식뻘 되는 양귀비와 사랑에 빠져 스스로 몰락해 간 현종, 당나라가 몰락해 가던 중에 현종의 지시에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했던 양귀비는 중국이 세계에 자랑하는 로맨스의 현장인 곳이다.
화청지는 양귀비가 목욕을 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원래 진나라때부터 유명한 온천이 있던 곳에 당현종이 온천궁을 짓고 그 이름을 화청궁이라 하였다고한다. 화청지라는 이름은 백거이의 시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거이는 양귀비가 목욕을 하는 모습을 이렇게 노래했다고 한다.
봄추위 녹이기 위한 화청지 온천수로 매끈매끈하게 지방 덩어리를 씻는다.(너무 직설적인가?? 푸훗)
이 시로 인해 온천은 더욱 유명해져 이곳을 화청지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화청지는 당현종과 양귀비의 이야기로도 유명하지만 근대 서안사변으로도 유명하다.
18개의 대리석 욕조...양귀비와 현종은 도대체 어떻게 사랑을 나누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서로 때를 밀어주며..사랑을 속삭였을까?푸훗... (모두 웃어주세요~~~찰칵)
지금의 화청지의 모습은 대부분은 서태후에 의해서 재건 된 것이다. 서태후는 태평천국 운동 당시 베이징이 함락되자 이곳을 피난처로 삼고 별궁을 재건했다고 한다. 화청지는 이렇듯 중요한 역사의 무대가 되었던 곳이다.
베이징의 이화원이나 북해공원보다 규모는 작지만 화청지는 아름다운 정원으로의 모습이 남아있다. 당현종과 양귀비가 사용했던 욕실로 발굴되어 보존되어있으며 장제스가 머물렀던 곳은 혁명유적지로 보존되어있다.
그곳창문에는 아직도 당시의 탄흔이 남아있었다.
관람객을 위해서 온천물로 씻을 수 있는 곳에가서(0.5위엔) 우리 모두는 얼굴도 씻고...목도 닦고...발?ㅋㅋ 은 못닦구..온천물이라 그런지
따뜻하였고 왠지..얼굴이 깨끗해진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였따...온천 정말 좋은것이여..^^
모든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중..천진재경학원에 다니는 중국 커플을 정말 우연스럽게 만났따. 정말 세상 좁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화청지에 나와 종로에 가는 도중 난 택시안에서 바깥 도시 풍경을 보았다. 고대 중국도시의 성벽이 아직까지 무너지지 않고
오후 5시가 되어서 우리는 시가지 중심에 있는 높이 38m의 종루는 명나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이곳을 축으로 동서 및 남북 대로가 교차하는 종로에 갔다.
종로의 시내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북경의 오리구이도 맛있지만 서안의 꼬치 오리구이도 맛있었다...2원이였지 아마!
그렇게 밤이 되었다...종로위에서 바라보는 야경은 일품이였다.
(종로 위에서의 한장~~~!!진영이형 너무 붙어있는거 아냐??^^)
밤이 되자 우리는 잘곳을 찾으러 나섰다.. 종로 주변 모든 여관들이 다 차있어서 곤란한 상황에 처했었다.종로에서 약간 떨어져 있는 곳에 도착해서
목욕탕 같은 곳에 갔는데 외국인들이라고 들어가는 것을 거부 당하는 찰라에...어느 한 지긋한 할머니께서...내가 너희들을 도와주시겠다 하시면서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셨다.(한국 할머니 같았다)
그 할머니께서 방도 잡아주시고 학생들이 돈이 어디있냐고 하시면서 방값도 깍아주시고 정말 고마우신 분이셨다..^^ 여관에서 카운터에서 할머니와 함께.. ((할머니 건강하게 오래 사세요~~~ ^^))
하루 100달라도 되어보이는 호텔에서 단돈 150원에..꿀꺽~~~ ^^
너무 감격이였다. 에어콘, 히터기, 방세개, 부엌, 화장실이 있는
모든 첨단 장비들을 갖추어져 있는 그 호텔에서... ((나침반 화이팅~~~~~~~))
모두들 힘들었던 서안의 하룻밤...그렇게 우리들은 모두들 내일을 위해 잠을 청했다.
2001년 5월 3일
너무 피곤한 나머지 아침 10시에 일어나였다..ㅋㅋ
10시에 일어나 호텔에서 종로 까지 걸어서 우리들은 시안의 중심으로 다시 향하였다.
시안의 중심지라서 그런지 너무 좋았다. 현재의 건축과 과거의 건축이 같이 살아 숨쉬는 종로..아름다웠다.
역시 배가 고픈 법!!! 시안은 물만두가 유명하다. 종로에 가까운 곳에서 여러가지의 맛이 있는 물만두를 배터지도록 먹었따..^^
명나라(1384년) 때세워진, 문자 그대로 종을 걸기 위한 건물인데, 옛날에는 매일 아침 70번 종을 치고 나면 동서남북 각각의 문이열렸다고 합니다. 건물은 예전에는 다른 곳에 있었지만 1582년 현재의 장소로 이전되었다. 지금까지 2번의 걸쳐 대대적인 보수공사가 이루어졌으나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건축방법은 변함이 없다고 합니다...^^ (종로 등지고...광장에서)
기차 시간은 4시 48분 출발이라 시간이 좀 남아서 2시간 정도 종로안에서 자전처로 성벽을 지나며 서안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북경 시역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싫고 모든 시안의 여행을 끝맞추어야 했다..
나침반이 생기고 3번째 여행지 泰山이다.
태산은 높다하되~~~‚로 시작하는 시조는 누구나 다 들어본적이 있을 것이다.
그만큼 말로만 듣던 곳을 간다는 기대감에 모두들 들떠 있었다.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2001년 4월 6일
대장 혁준이 오빠,진영이,진호,미희,나 군대간 윤호없이 여행을 시작했다.
역으로 가는동안 빵차에 한자리가 비어서 다들 한마디씩 했던 것 같다.
우리는 천진 동역에서 오후4시 05분 차를 타고 출발 5시간 30분 만인 9시 35분에
태산역에 도착했다 .
*기차
태산 가는 기차는 자주있다
남쪽지방으로 가는 기차는 거의 태산을 들른다.
특히 상해로 가는 기차는 대부분 좋은 기차이다.
참고로 우리가 탄 기차표 가격은 65원 이다.
혹시 남쪽지방으로 가시는 분들이라면 태산역을 들를 때 창밖을 보면 잠시나마 태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태산은~~
중국에 5악(五岳)이라는 것이 있다. 산동성의 泰山(동악), 섬서성의 華山(서악), 하남성의 嵩山(중악), 호남성의 衡山(남악), 산서성의 恒山(북악)을 말한다.
특히 1,545m인 태산은 제일 유명하며, 사실 태산이 유명해진 것은 고대의 제왕들이 여기에서 封禪(펑산)이라는 의식을 행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펑산이란 하늘로부터 신임을 받은 황제가 태평이 지상에 실현됨을 보고하는 의식으로 후덕한 황제에게만 허락되는 신성한 의식으로 진시황제나 한무제, 당현종 등이 이 의식을 치렀다고 한다.
또하나 태산 근처에는 곡부(曲阜)가 있다.곡부는 공자(孔子) 태어난 곳으로, 노 (魯)(나라의 수도였다. 가던길에 들려도 좋을듯...
태산에 도착한 우리들은 출출한 배를 채우기 위해 양고기 집에서 간단하 요기를 하고 택시를 잡아 탔다. 태산역에서 태산 입구 까지는 10원 정도의 거리이다.
태산 입구에는 산의 중턱인 中天門 까지 버스가 있는데 산행이나 고생은 싫어하시는 분이라면 버스를 타고 올라가서 케이블을 이용하는 것이 좋을 듯 싶다.버스비는 13원 케이블비는 45원이다.
우리는 역시나 혁준이 오빠의 이끌림에 버스가 있는지도 모르고 외국인 40원이라는
비싼 표를 사서 산을 오르기 시작 했다.
표를 사고 보험표도 산다.2원이나 하던데...
사람이 많이 죽는가보다...무서웠지만 나침반이 있기에 죽어도 같이 죽겠지...했다.
산 입구에는 많은 상점들이 있었다. 거기서 태산 기념품이라고 이상한 빨간 띠도 샀다.
입구에서...이때만 해도...
빨간띠 샀다...
처음 오를 때는 신났다.
주변에는 아무도 없고 무섭기도 하고 달빛이 밝아서 분위기 있기도 하고
하여간 그때까지 좋았다.
엄청 올랐다.
그러다가 오른 곳에 이상한 성벽이 보였다...
난 그게 정상인줄 알았다.
출발 할 때는 없던 사람들이 엄청 모여서 피곤함을 달래고 있었다.
라면. 달걀, 커피 등을 팔고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휴식을 취했다. 난 라면을 먹고 사람들은 계란을 먹고,
난 정말 힘들었다.
내 표정 정말 리얼하다.
힘들다~~~ㅜ.ㅜ
다시 시작했다..오르다가 이제 중천문 을 지났다...
거기는 버스 정류장이 있었는데...얼마나 눈물이 나는지...
버스라는 수단이 있었음에도 우리는 걸었던 거다.
난 이미 한계였는데 아직 갈길은 멀었다.
깜깜한 밤에 멀리서 보이는 거라고는 마치 별자리인 마냥 보이는수직 등불 3개다.
계단을 오르고 올라도 끝이 없었다.눈을 뜨면 계단이고 정신차리면 계단이다.
등불3개를 지나면 다시 등불3개가 수직으로 올려다 보인다.
이제 끝이겠지 하면 다시 시작이다.
정말 죽고 싶었다.
졸리고 피곤하고 내려갈수도 없고 올라 갈수도 없다.
울고 싶었는데 인간들은 참 잘도 올라간다.
지금은 그만둔 미희가 일등이다. 그 당시 미희는 운동을 열심히 한편이라서 그런지
묵묵히 올라갈 뿐이다.
진호는 졸리다고 힘들어하고 무적 혁준이 오빠 마저 힘들어 했다.진영이는 쓰러지다가 다시 살아났다.
그 계기는 사과!
올라가는 길에는 사과며 오이며 여러 가지 갈증해소를 할 수 있는 것들을 팔았는데,
여기서 먹은 사과는 아마 내 일생에서 가장 맛있는 사과가 아니 였나 싶다.
진영이가 건네준 사과를 한순간에 먹어치우고 태산 올라오기 전에 산 정말 맛없는 중국산 초콜렛을 한입에 넣고 우걱우걱 씹었다. 살아야 겠다는 일념으로...
*오르기전 필요한 음식들은 사놓자!
태산은 정말 정말 상상하지도 못하게 높은 곳이다.
그만큼 산 위에 파는 모든 음식들은 정말 비싸다.
내려가면서 본 광경중에 어깨에 가득 짐을 싣고 올라가는 짐꾼들을 많이 봤는데
정말 그 사람들을 볼 때 마다 감사했다.
그리고 이 정도에 힘들다는 내가 부끄러웠다.
그만큼 노동력이 들어간 음식은 당연히 비싸다.
과일이나 물은 산에 오르기 전에 사서 올라가야 한다.
정상에 다다르자,軍大依를 빌려준다. 정상에 올라가면 무척 춥다고 한다.
옷값은20원 정도를 받는다 .옷을 가져다 주면 돈의 일부를 돌려준다.
혁준이 오빠 혼자 빌려입고 다시 오른다.정상에 다가올수록 정신이 번쩍든다.
얼굴은 붓고, 피곤하지만 일출을 봐야한다는 일념 하나로 정상에 올랐다.정상에 오르니 해는없고 인간들 뿐이다.피난이라고 온것마냥 오통 초록색 인간들...
정상에 오르자 혁준이 오빠는 마냥 좋단다...
힘들지만 해가 오르자 다들 소리를 지른다.
그때는 정말 감동이였다.
비록 잠깐 이였지만...
해뜨기전 힘들지만...웃자!!!
하늘을 날아라~~~~~~~~
일출을 보고 다시 내려왔다.
사람들 진짜 많다.
일출보고 내려가는길
天街근처에서
밤을 새고 힘들어서 잠깐 여관을 잡았다.
정말 비쌌다.깨끗하지도 않는데...
근육이 뭉쳐서 다리가 너무 아팠다.
추워서 잠도 안와서 한숨도 못자고 다시 산을 내려왔다.
내려가는길
다같이 모여서
다시 온길을 내려가려하니 막막했다.
다리의 후들 거림을 이기고 중천문에 다다라서
걸어서 내려가자는 혁준이 오빠 앞에서 할말을 잃었다.
인간들 다들 할수 있다고 했다.
난 버스 타고 안 내려가면 울어 버릴 것 같았다.
결국 내려가는 길은 버스행...
그렇게 내려가서 다시 역으로 ...
11시08분차를 타고 천진으로 돌아왔다.
태산은 힘들고 말도 많은 여행이였지만 중국에 온 이상 꼭 한번 가볼만한 곳이다.
다들 태산을 여행하고 나와 같은 동질감 을 느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