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서(小暑) 절후를 관장하는 시소(柴紹)]
24절기의 하나. 하지와 대서 사이에 들며, 음력 6월, 양력 7월 7일이나 8일께가 된다. 태양이 황경105°의 위치에 있을 때이다. 이 시기에는 장마전선이 우리나라에 오래 자리잡아 습도가 높아지고, 장마철을 이 루는 수가 많다.
예전에는 한 절기 앞선 하지 무렵에 모내기를 끝내고, 모를 낸20일 뒤 소서 때는 논매기를 했으나, 지금은 제초제를 뿌리고 논 김은 매지 않는다.
팥, 콩, 조들도 가을보리를 한 하지 무렵에 심고, 소서 무렵에 김을 매준다. 또, 이때 퇴비(堆肥)장만과 논두렁의 잡초 깍기도 한다. 소서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더위가 시작되므로 온갖 과일과 소채가 풍성해지고 밀과 보리도 먹게 된다.
'작은 더위'라는 소서부터 본격적인 더운 날씨로 접어든다. 이맘 때가 되면 벼는 출수기를 맞는다. 벼논에서는 잎도열병과 멸구를 방제하기 위해 1차 농약을 친다. 물약을 치기도 하고 요즘은 손으로 뿌리는 농약을 치기도 한다.
농가에서는 장마기와 가뭄기가 겹치는 이때 논물관리와 무너지기 쉬운 논둑 관리, 그리고 가뭄에 대비해 양수기를 설치해 놓는다.
<농가월령가>에 젊은이 하는 일이 김매기 뿐이로다, 논밭을 갈마들여 삼사차 돌려 맬 제 날 새면 호미들고, 긴긴해 쉴 새 없이 땀 흘려 흙이 젖고 숨막혀 기진 할 둣 했듯이 김매기도 빼놓을수 없는 일이다.
요즘은 다양한 제초제와 기계화로 인해 손쉽게 농사를 지을 수 있다. 그러나 과다한 제초제와 농약살포는 인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땅을 죽이고 자연을 죽이는 농법에서 벗어나 자연에 순응하며 벌레와 지렁이와 공생하는 생태농법, 유기농법이 활발해져야 한다.
농사에 있어 진짜 농군이라면 지켜야 할 세 가지 원칙이 있으니, 그것은 '무농약', '무제초제', '무화학비료'이다.
농약을 쓰지 않으려다 보니 메뚜기와 각종 병충해가 들끓어 이를 감당할 농법을 개발해야 하고, 제초제를 쓰지 않으니 사흘이 멀다고 김매기와 피사리로 허리펼 날이 없고, 화학비료를 쓰지 않으려다 보니 퇴비와 유기질 비료를 만드느라 일손을 다뺏겨야 한다.
3무의 원칙을 지키며 농사 짓는다는 것이 엄청난 고통일 것이다. 허나 진짜배기 농사꾼, 자연과 생명의 소중함을 아는 농군이라면 이런 수고를 수고라 여기지 않을 것이다. 남들이 바보같은 짓한다고 손가락할지라도 대대로 물려줄 땅임을 안다면, 묵묵히 3무의 원칙아래 굵은 땀, 진실의 땀을 흘리며 한뙈기의 논이라도 정성스레 대할 것이다.
부부가 같이 당 창업에 기여한 시소와 평양공주 이씨
시소(柴紹, ?~638)는 자(字)가 사창(嗣昌)이고 진주(晉州) 임분[臨汾, 현재 산서성(山西省) 임분]사람이다. 어려서부터 민첩하고 용감했으며 자라서는 용기와 힘을 가지고 있어서 협객(俠客)들 사이에 알려졌다. 시소는 정통귀족 출신이다.
그의 할아버지 시열(柴熱)은 북주(北周, 557~580)01에서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을 지냈고 수(遂), 양(梁) 두 곳의 자사(刺史)를 역임했으며 관군현공(冠軍縣公)에 봉해진 인물이었다. 아버지 시신(柴愼)은 수(隋)나라에서 태자우내솔(太子右內率)을 지냈고 거록군공(鉅鹿郡公)에 봉해졌던 인물이었다.
시소는 어린 나이에 수(隋)나라 태자의 천우비신(千牛備身)이 되었는데 이때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사위가 되었다. 이연이 당을 창업하기 전에 자신의 딸을 시소에게 출가(出嫁)시켰는데 뒷날 평양공주(平陽公主)가 된다. 평양공주는 대단한 여장부였는데 이에 대해서는 별도로 이야기할 것이다.
617년[대업(大業) 13] 이연이 태원에서 거병하면서 하동(河東)에 있던 두 아들 이건성(李建成), 이원길(李元吉)과 장안(長安)에 있던 시소에게 편지를 보내 이들을 불러 들였다. 시소는 지름길로 달려가서 이연의 군대를 맞이하려다가 태원으로 가는 도중에 이연의 두 아들과 만나게 되었다.
수(隋)나라의 관리들에게 쫓기고 있던 이건성이 말했다. “우리들에게 체포령이 내려져 관리들에게 잡힐까 두렵다. 도적들에게 잠시 몸을 의탁하는 것이 어떨까?” 시소가 대답했다.
“안 됩니다. 도적들은 그대가 당공[唐公, 이연(李淵)이 거병할 때의 작위(爵位)]의 아들인 것을 알고 있습니다. 반드시 그대를 잡아 공을 세우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헛되이 죽게 될 따름입니다. 태원까지 빨리 가는 것이 낫습니다.” 이들이 태원에 들어서서 작서곡(雀鼠谷)에 이르렀을 때 이연의 거병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이건성이 ‘시소는 지략이 있다.’ 하며 서로 축하했다.
이연의 군대에 합류한 시소는 우령군대도독부(右領軍大都督府) 장사(長史)에 임명되었다. 이연의 군대가 진양(晉陽)을 출발할 때 시소는 활을 지닌 기병을 이끌었다. 시소는 이연의 본진에 앞서 곽읍(邑)에 이르러 성의 형세를 살폈다. 이때 곽읍은 수(隋)의 장수 송노생(宋老生)이 지키고 있었다.
정찰을 마친 시소가 돌아와서 말했다. “송노생은 우리 군사가 당도하면 필시 싸우려 나올 것입니다. 그때 사로잡으면 됩니다.” 이연의 본진이 도착하자 과연 시소의 예상대로 송노생이 출전했고 그는 힘껏 싸워 공적을 세웠다. 시소는 이세민을 따라 임분(臨汾), 강군(絳郡)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수(隋)의 장수 상현화(桑顯和)가 이연의 군대와 맞섰는데 시소가 수군(隋軍)의 배후를 사대내(史大奈)와 함께 공격하였다. 상현화는 마침내 패배했고 이후 장안이 평정되었다.
시소는 장안평정의 공으로 우광록대부(右光祿大夫)와 임분군공(臨汾郡公)에 임명되었다. 시소는 이세민을 따라 여러 차례 토벌에 나갔는데 그때마다 공을 세워 곽국공(國公)과 우효위대장군(右驍衛大將軍)으로 승진했다.
623년[무덕(武德) 6] 토욕혼(吐谷渾)과 당항(項)04이 변방을 노략질을 하자 시소에게 그들을 토벌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토욕혼과 당항 군이 고지를 점령하고 당군을 향해 화살을 쏘았는데 마치 비가 오는 듯 했다. 이를 본 당의 병사들은 사색이 될 정도로 당황했다. 그러나 시소는 침착함을 잃지 않고 기발한 전략을 폈다. 시소는 사람을 보내 호비파(胡琵琶)를 연주케 하고 두 사람의 여인으로 하여금 춤을 추게 했다. 당군의 이와 같은 괴이한 행위에 전투는 중단되었다.
전투 중에 들려오는 귀에 익은 비파 소리와 눈앞에 펼쳐진 춤사위. 전쟁 중에 펼쳐진 예측하지 못한 상황의 전개에 토욕혼과 당항 군의 장수와 병졸이 모두 춤 구경을 하느라 자신들이 지금 적군과 대치하고 있으며 전투 중이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시소는 토욕혼과 당항 군이 춤 구경을 하느라 방심하고 있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시소는 날랜 기병을 보내 이들의 배후를 습격하게 하니 방심하고 있던 적군은 궤멸되었다. 당군의 입장에서 보면 기발한 작전의 승리지만 토욕혼과 당항 군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어이없는 패배였다.
『자치통감(資治通鑑)』05을 보면 고조 이연의 시대에 시소는 주로 변방의 일로 전쟁에 참여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623년[무덕(武德) 6] 5월 시소를 파견하여 민주[岷州, 감숙성(甘肅省) 민현(岷縣)]를 구원하였다. 같은 해 6월 시소는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토욕혼과 당항의 토벌에서 기발한 작전으로 승리를 거두었다. 624년(무덕 7) 시소가 두양곡(杜陽谷, 섬서성 봉상현 동북쪽)에서 돌궐을 격파하였다. 625년(무덕 8) 돌궐이 선주(州, 청해성 낙도시)를 노략질 하니 시소를 파견하여 이를 구원하게 하였다. 626년(무덕 9) 시소를 파견하여 호족(胡族)을 쳤다. 같은 해, 돌궐이 농주(州, 섬서성 농현), 위주(渭州, 감숙성 농서현)를 노략질하니 시소를 파견하여 돌궐을 쳤다. 같은 해, 시소가 돌궐을 진주(秦州, 감숙성 천수시)에서 격파했다.
당태종이 즉위한 이후 시소는 당 창업에 걸림돌이 되는 반란세력 토벌에 공을 세우게 된다. 628년[정관(貞觀) 2]에 시소는 오랫동안 돌궐의 힘을 등에 업고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양사도(梁師都, ?~628)06를 평정하고 좌위대장군(左衛大將軍)으로 옮겼다.
629년(정관 3) 당태종은 병부상서(兵部尙書) 이정[李靖, 청명(淸明) 절후를 관장]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돌궐 토벌군을 편성 하였다. 이때 화주자사(華州刺史)였던 시소도 승주도행군총관(勝州道行軍總管)에 임명되어 이 원정에 참가하였다. 시소는 이 때의 공으로 진군대장군(鎭軍大將軍)의 직책이 더해졌으며 봉국(封國)은 초국(國)으로 옮겨졌다.
638년(정관 12) 시소의 병이 깊어지자 당태종이 친히 병문안 했다. 시소가 죽으니 형주도독(荊州都督)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를 양(襄)이라 했다. 시소는 고조 이연의 사위로 당 창업의 초기부터 대소 전투에 참가하여 공훈을 세워 당의 창업과 국가적인 토대를 굳건히 하는데 기여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