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날에 관한 시모음 3)
여름날 /신경림
– 마천에서
버스에 앉아 잠시 조는 사이
소나기 한줄기 지났나보다
차가 갑자기 분 물이 무서워
머뭇거리는 동구 앞
허연 허벅지를 내놓은 젊은 아낙
청벙대며 물을 건너고
산뜻하게 머리를 감은 버드나무가
비릿한 살냄새를 풍기고 있다
여름날 이른 /나태주
여름날 이른 아침 거닐어 보는 숲길에는
후덥지근한 나무들의 몸비린내 쓰거운 풀비린내.
아, 저들도 지난 밤 잠을 설쳤나 보구나.
힘겨운 오늘 하루 등짐 장수 떠나나 보구나.
어느 여름날 아침에 /박양진
늘, 새로 태어나야만 하는 정신은
불멸을 마시려 하는 목마른 새
그러나 존재는
하나 속에서 모든 것을 받는다오.
모호했던 언어들이 베일을 벗고
투명하게 빛나는 아침
환상과 정신이 결합하며
그 놀라운 미소를 보내올 때
세상의 비밀들은
우리의 감각과 다정히 어울리네.
보다 크고, 보다 작은 완성에로 향하는
물음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피어나는 꽃들의 웃음
존재로부터 오는 감동들은
우리를 보호하는 부적이 되고
고귀한 영혼들
우리의 마음을 더욱 빛나게 하네.
시간이 사라진 자리에서
순간들은 영원으로서 흐르고 또 흐르는 것
어느 우물에나 생명수의 맥박은 뜀뒤고
존재의 내면에선
감미로운 풍경들이 열려져 가네.
한 여름날이 지나고 /初月 윤갑수
수 백 년 동안 고향을 지켜온
수호목인 버드나무 그늘에선
어르신과 매미가 노닐고 있다.
임 찾는 매미들 합창소리 무더움을
다독이듯 애처롭게 울어대고
축 늘어진 잎사귀는 바람에 놀라
흐느적거리며 살랑거린다.
절정으로 치닫는 한 여름날
뜨거운 열기는 길목을 서성이다
지나가는 조각구름을 둘러메고
돌아오지 않은 먼 길을 향한다.
저 산 너머 선선한 바람이 불어
맛깔스러운 시큼 달콤한 열매들이
속살을 키워갈 때 매미울음소리
지나간 자리엔 가을이 성큼
다가와 앉아있다.
여름날의 꽃이여! /이복란
우지 마라
숲이여
나무여
새여, 귀뚜라미여,... 그대여,
여름날의 꽃이여!
갈바람 아니 머문다고
향기조차 시들겠느냐
꽃 피고 지는 이유
땅이 알고
하늘만이 아는 것을
꽃진 자리 자고 나면
다시,
새 날인 것을...
애쓰지 마라
귀뚜라미여, 새여, 나무여, 숲이여
꽃이여
꽃이여!
한 여름날 /박효찬
그녀 입술에
빨간 립스틱의 그리움은
장미꽃 넝쿨 사이 묻어두고
유난히 큰 안경알이 낯섦은
세월이 흔적인가
꿀벌들 윙윙 쫓던
여왕벌은
텃밭 배추 꽃잎에 앉아
아름다움과 도도한 모습 찾으러
윙 윙
관능적임은 고상한 척
아름다움은 주름살로 변해버린
여왕 벌아!
이젠
초야에 묻혀
장독대 항아리 속 된장만큼이나
구수한 이야기 풀어놓으며
친구들과 함께
저물어 가는 석양을 맞이하자.
여름날의 오후 /최해춘
바람은 저 능선 너머로
구름 그림자 길게 몰고
옥수수대 사이로
느릿 느릿 스쳐 지나는 오후.
삶의 끝자락을
등걸에 부비며
자지러지는 매미 소리만
여름의 채취를 쉰 내 나게 달군다.
청마루 앞 댓돌처럼
하염없이 사맆문만 지키고 있는 날
오시는 손님 누구인지 몰라
앞산 넘어 불어 오는 녹색 바람에
살팍한 가슴을 열어 버린다.
지나는 길손 지친 걸음 모셔다
우물 터 물 한모금
정갈한 상으로 나누고 싶어도
한 낮의 오후는
가위 눌린 아이처럼 속 울음만 삼킨 채
댓돌 앞 빈 마당에 적막만을 태운다.
여름 날 /송정숙
여름 날 눈물이 배달되었다
별들이 죽어간
서울 하늘을 대신하여
아름다움을 못 보는
눈먼 이들을 대신하여
잎새 사이로 울어 되던 새들에 눈물
죽어가는 가슴 적셔 주라고
여름 날 기대 /민경대
오늘은 큰 그림속에 우리는 방울처럼 출렁거리며
기다린 삶속에 희망의 소리 듣고
맑은 사람들의 서성거림속에
나도 방울 소리 들으며
이것은 하나의 기대속에 큰 소리듣는다
여름날의 사랑 /최영희
발가벗은 채 백사장에 누워
온 몸으로, 온 몸으로
사랑할 걸 그랬지
해바라기처럼
하늘만 바라보며 가슴만 태웠는지
가을이 되고서야,
물들어 가는 나뭇잎을 보고서야
당신의 뜨거웠던 사랑의 의미를 알았지
한줄기 퍼부어대던 소낙비도 식히지 못했던
우리들,
여름날의 사랑
날마다 피고지던 나팔 꽃 넝쿨을 접으며 배인
상처를 보고서야
여름날 우리들의 뜨거웠던 사랑이 지나간
서늘함을 보았지.
한 여름날의 추억 /안익호
빠알간 태양아래
너털웃음 웃고가는
날 뒤로하며
흘리던 눈물 한방울...
뽀얀 먼지 덧씌워진
가로수 끝자락 넘어
살며시 보이던 파아란 하늘
하얀 뭉게 구름들..
미루나무 그늘아래
풀어헤쳐진 가슴
마냥 설레는 사랑으로
그대 곁에 머물고 싶었던
그날의 추억이...
갑자기 쏟아진
한낮의 소낙비에
바보같은 웃음으로
멋적음을 달랬다.
여름날의 기도 /문병란
여름은 육체의 게절
아직 기도하기에는 햇볕이 너무 뜨겁습니다
내 청춘은 먼 항구에서
한낮의 태양을 겨루어
그 꿈과 사랑을 연습 중이고
아직 주인이 없는 술잔에는
빨간 입술이 철철 넘치고 있습니다
멀리 멀리 떠났던 마음들
등불 밑으로 돌아오지 않고
별똥별이 흐르는 밤
젊은이들은 그 연인들 곁에서
빨간 산딸기의 향기를 음미하고 있습니다
여름은 기도하기에는 이른 시간
개똥벌레의 메시지가 전달되는 곳에서
나의 소년은 이방인의 눈망울에 초롱을 켜고
이 아침 나의 새벽위엔
고향으로 가는 길을 잃어버리는 시간입니다
주여, 흩어지는 발자국들 널려 있는
먼 방랑의 해변에서
나의 야생녀는 바다로 뛰어들고
아직도 나는 기도하지 않습니다
기다림이 끝나지 않은
사향 박하의 뒤안길에서
한 마리 꽃뱀이 혀를 날름거릴 때
나는 돌멩이를 던집니다
자꼬 자꼬 유성이 남으로 흐르는 밤
나는 아직도 아득한 꿈속에서
해바라기의 목을 조릅니다.
여름 날 숲속의 산장 /서당 이기호
박석고개 넘어 금마루
모퉁이 돌아 산장의 빈집 두 채
그곳 내가 머물고 갈 둥지가 있다
땀 내 몸 적시고 까치는 반긴다
여름 기운으로 물 올랐나
잣나무 숲에는 잣 주렁주렁
앞 다투어 자랑을 늘어놓는다.
때일 은 나들이 청솔 모는
빗장 풀고 곡간 문 열어 놓고
들랑날랑 북새통이다
빈집 뜨란 잡초 우거져있으니
새들 다람쥐 청솔 모가
한바탕 공연한다 동물들의 놀이턴가.
여름날 /청산 홍대복
길게 내리쬐는 무더운 햇볕
시원한 나무 그늘
요란한 풀벌레
매미 소리 여름을 불태운다
나뭇가지
스쳐가는 시원한 바람
예쁜 꽃잎 흔들고
자연과의 조화로
무거운 기지개 활짝 켠다
여름을 뒤덮은 젊음의 열기
정열을 불태우며
무더운 여름날의 추억도
낭만에 젖어
조금씩 조금씩 식어만 간다.
아름답던 지난 여름날이여 /강봉환
이제 가을 여정 속에
서서히 달아올랐던 여름 향기도
뜨거운 들녘의
풍요로움 만큼이나
들판의 푸른 곡식은 영글게 하고
가을의 감사함을
전하는 계절이네
땀의 소중함은 알알이 열매 맺어
우리네 어울림 되듯 풍요로운 이 가을
그대와 함께 이야기 할 수 있음은
행복했던 여름의 향기
고이 거둬 접었나 보네.
그 여름 날의 삽화 /서재남
저 빗속을 걸어 거기 가면 아직 있을까
힘겨운 사랑 서로 가슴에 묻던
간이역 플랫트 홈
빨간 사르비아 꽃
쓸쓸히 오늘도 비에 젖고 있을까
세월이 이만큼 흘러갔는데
설마 아직 거기 있을까
잿빛 하늘 낮게 드리운 포구
버려진 木船 한 척
오늘도 바람에 흔들리고 있을까
이제는 아득한 기억 속
당신의 얼굴은 거의 다 지워지고 없다.
눈물뿐이던 그 날의
가슴앓이는 다 나았을까
까마득히 잊혀졌을 나의 이름
어쩌면 아직도 지우지 못한 건 아닐까
어느 여름날의 꿈 /이대준
코뚜레 줄 길게 늘어뜨린 누렁이 암소
앞마당 두엄자리 아래 철퍼덕 앉아
아침에 먹었던 쇠죽을 느릿느릿 새김질 한다
게으른 앞동산 꿩들은 이제야 시장기가 돌아 퍼득드득 동네로 날아든다
나는 가을 들판이 누렇게 핀 쇠잔등에 검정 고무신 한 가득 진흙 퍼다 발라놓고
장독에서 메주콩 한줌 꺼내 진흙 속에 듬성듬성 꽂아둔다
장끼 녀석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누렁이에게 아는 척을 하면서
콩알 하나 콕 찍어 빼 먹는다
간지럽다 암소가 파리를 쫒듯 꼬리를 흔들면
꼬리에 달아놓은 빨래방망이 꽝- 꿩 머리를 후려쳐 버린다
마루에서 지켜보던 나는 싱글벙글 기절한 꿩을 주웠다.
여름날 /김광규
달리고 싶다
가시덤불 우거진 가파른 산비탈
기관총에 맞은 게릴라처럼
피를 뿜으며
굴르고 싶다
풀에 맺힌 이슬로 혀끝 적시고
새가 되어 계곡 깊숙이
날아 내리고 싶다
넘어지고 싶다
몰려오는 파도에 채여
깎이지 않는 바닷가
한낮의 햇볕 아래 무릎 꿇고
마지막 땀방울까지
흘리고 싶다
바다 밑 깊은 골짜기에
그림자 드리우고
알몸으로 돌처럼
가라앉고 싶다
돌아가고 싶다
끈끈한 어둠의 숨결
무더운 수액 출렁이는 숲 속으로
들어가 길을 잃고
헤매고 싶다
쓰러져
잦아들어
땅 속을 흐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