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었다. 매년 찾아와도 매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불볕더위도 기세가 꺾였고, 아침과 저녁에는 제법 쌀쌀해 겉옷을 챙겨야 했다. 지영은 환절기마다 곧잘 감기에 걸리곤 하던 승연이 마음에 걸리는 것을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오후 강의가 끝나고 승연의 자취방에 들려볼 생각이었는데, 종합감기약이라도 사서 가야할 것 같았다. 승연은 며칠 째 연락을 받지 않았다.
두 살 터울인 지영과 승연은 어렸을 때 같은 빌라에 살았다. 각 세대가 30평이 조금 넘는 빌라는 1층은 상가 1개, 2층과 3층에 각각 두 집씩 총 네 집이 세 들어 살았고, 4층에는 주인집이 살았다. 두 사람의 집은 각각 201호, 202호였다. 외동딸이었던 지영은 오빠와 남동생이 있는 승연을 부러워했다. 가족들과 함께했던 첫 만남 이후로 둘은 자주 붙어 다녔다. 한동네에 살았고 그 동네에는 학교가 많이 없어 둘은 같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나왔다. 지영은 승연을 잘 따랐고, 승연도 여자 형제가 없었기에 지영에게 유독 살뜰하게 굴었다. 이웃들이나 학교 친구들은 둘을 자매로 착각했다가 두 사람의 성이 다른 것을 알고는 의아하게 여기기도 했다. 그걸 알고 나서도, 주변사람들에게 승연은 언제나 강지영의 언니 취급을 받았다. 지영에게 문제가 생기면, 지영의 부모님보다도 승연의 귀에 먼저 들어갔고, 그 일들을 수습하러 등장하는 것도 언제나 승연의 몫이었다.
그 정도 사이로 남을 수 있었다면, 둘은 친자매보다 더 친자매 같았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지영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되었던 즈음, 자신이 승연을 다른 의미로 생각한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시작되었다.
봄이 느지막이 지나가고 있던 무렵이었다. 중간고사를 마친 지영은 집에 가고 있었다. 계산실수로 틀린 수학 서술형 문제가 계속 머리에 맴돌아서 지영은 땅바닥만 쳐다보면서 걷고 있었다. 그 땅바닥에 수식을 썼다 지웠다 반복했다. 교문을 지나치는 순간, 누군가 지영아- 라고 부르며 지영의 손을 잡았다.
깍지가 얽혀드는 순간, 지영은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정오에 조금 미치지 못하는 시간이어서, 해는 비스듬히 떠있었다. 부서지는 햇빛 사이로 승연이 웃는 모습이 보였다. 지영은 깜짝 놀라 제 손을 빼내려고 안간 힘을 썼다. 지영의 손이 승연의 손에서 빠져나온 순간, 지영은 무엇인가가 바닥을 향해 떨어진 것을 느꼈다. 자신의 심장이 저 어딘가 깊은 곳으로 떨어져버린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지영은 무엇인가 잘못되었다고 느꼈다. 빈손을 멋쩍은 듯이 내려다보던 승연과 함께 집으로 가는 동안 지영은 계산실수를 복기하려고 해봤지만, 너무 가쁘게 뛰어대는 심장 때문에 도무지 다른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승연이 서울의 어느 대학교에 합격했던 날, 지영은 속으로 자신도 그 대학교에 갈 것이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자신의 성적으로 냉정히 따져보았을 때는 턱없이 부족해 보였다. 2년이라는 시간만이 유일한 무기였다. 지영이 승연과 같은 대학교에 입결이 가장 낮은 과에 턱걸이로 합격하던 날, 승연은 지영에게 술을 사줬다. 그 해 1월 1일에 부모님과 함께 술을 마셔봤지만, 아니 사실 그 전에도 부모님이 몇 번 나눠준 술을 마셔본 적은 있었지만, 남이 사주는 술은 처음이었다. 아니, 승연이 사주는 술은 처음이었다. 지영은 얼마 전 부모님과 마셨던 소주의 쓴맛을 떠올렸지만, 승연이 따라준 그 소주는 달았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갔던 날, 지영은 승연의 자취방에 처음으로 가보았다. 승연과 지영의 빌라에서 학교까지는 지하철로 1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승연은 1학년을 마치고 2학년이 되었을 때, 자취가 오랜 꿈이었다며 부모님을 설득해 독립했다. 지영은 집이 편해서 자취는 꿈도 꾸지 않았다.
승연의 자취방에 처음 들어갔을 때, 지영은 자신이 마치 엘리스가 된 것만 같았다. 이 안으로 발을 들이면, 이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단순한 자취방이었지만, 갓 스물이 된 지영에겐 모든 것이 낯설고 신비로웠다. 그 중에서도 승연이 가장 신비로웠다.
대학교에서의 첫 일 년이 지나는 사이에 지영은 생각보다 자주 승연의 자취방에 들렀다. 처음의 신비로움도 꽤 닳아버렸다. 지영은 시험기간이면 승연의 자취방에서 공부도 하고 잠도 잤다. 승연은 남자친구와의 연애가 잘 안 풀릴 때면, 강의가 끝나고 집에 가려는 지영에게 전화해 자신의 자취방으로 불렀다. 지영은 승연의 남자친구를 몇 번 보지 않았지만, 잘 알았다. 그 남자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는 그 날 승연의 기분에 따라 달랐다. 하지만 지영에게 그 남자는 늘 나쁜 쪽이었다. 지영은 종종 그 남자와 승연이 헤어지게 해달라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했다. 그리곤 자신이 그런 소망을 갖고 있다는 사실에 놀라곤 했다.
지영의 2학년 2학기가 시작되고, 승연의 4학년 2학기가 시작되던 그 순간까지, 지영의 마음은 승연의 주변에서 도통 벗어나질 못했다. 승연이 그 남자와 헤어진 것은 그 즈음이었다. 승연보다 한 학년 선배였던 그는 2학년 2학기까지 마치고 군대를 갔었다. 승연의 1학년과 그의 2학년, 그 시절이 승연이 그의 손을 차마 먼저 놓아버릴 수 없게 했었다.
그가 복학을 하고, 승연이 3학년 2학기를 맞은 그 순간까지 그 둘의 관계는 그럭저럭 괜찮은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1년이 다시 지나면서, 그의 주변에 잡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승연이 이제 그만 그 손을 놓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지영에게는 간절했다. 지영은 학교를 나와 지하철역으로 가던 길에 승연이네 학과 신입생과 손을 잡고 있는 그를 보았다. 지영은 사진을 찍어 승연에게 보내주고 싶은 자신의 마음을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그 둘을 애써 못 본 체 하며 지영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일주일 뒤, 승연에게서 전화가 왔다. 승연의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만으로도 지영은 승연도 그의 비밀을 알아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승연의 자취방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들어가자 실컷 울고 났는지 눈물자국이 선명한 승연이 앉아있었다. 승연은 지영에게 술을 따르면서, 이상한 소리를 했다. 한껏 과장한 즐거움과 가라앉은 목소리가 섞이지 않아서 어색했다. 그 날 지영은 승연의 방에서 밤을 보냈다. 그 가을의 초입에서 지영은 술에 취한 승연이 자신을 껴안을 때, 자신의 심장이 너무 세게 뛴 나머지 입 밖으로 튀어나오진 않을까 걱정하느라 도무지 잠을 잘 수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 정도 승연은 학교에서 보이지 않았고, 지영의 연락도 받지 않았다. 처음 며칠은 첫 실연의 아픔 때문일 거라고 생각한 지영은 다그치지 않았다. 4일, 5일, 그리고 마침내 일주일이 되었을 때, 지영은 지금이 환절기라는 걸 떠올렸던 것이다.
승연은 이별이 아니더라도 환절기 때면 감기를 달고 살았다. 지영은 오후 강의가 끝나고 승연 방에 들려보려던 마음을 바꿔 강의 시간 전에 약을 가져다주려고 했다. 승연의 자취방 골목 한 켠에 있는 약국에서 약을 사든 손으로 승연 방의 비밀 번호를 누르고 방으로 들어섰다. 불이 꺼진 방안에 승연은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지영은 자신의 손을 조심스럽게 승연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여름은 다 지나간 줄 알았는데, 아직 거기에 머물고 있었다. 지영은 수건 하나를 찬물에 적시고 승연의 식은땀을 닦았다. 행여나 승연이 깰까봐 더 조심했다. 수건을 이마에 올려놓자 승연은 인상은 좀 쓰긴 했지만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지영은 지금 승연을 깨워서 약을 먹이고 재워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둬야하는지 고민했다. 잠시 고민하던 지영은 승연의 책상에서 포스트잇을 찾아 일어나면 약 꼭 먹으라고 적은 뒤에 약상자에 정성껏 붙였다. 그리고 책상 위에 약을 놓고 마지막으로 승연을 확인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 때, 어느 새 깬 건지 승연의 손이 지영의 손을 잡았다. 놀란 지영은 그 순간 저 홀로 고등학교 1학년 교문 앞으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처음 들어보는 잔뜩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승연에게서 새어나왔다. 가지마, 지영아.
지영은 긴 시간이 흘렀어도 승연이 알 수 없었다. 지영은 승연 앞에만 서면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렀다. 타고 있는 자신의 마음을 승연은 모를 텐데도, 지영은 늘 언제나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싶었지만, 또 들키고 싶었다. 지영은 땀에 젖은 승연의 손을 잡은 채로 오랜 착각 하나를 떠올렸다.
중, 고등학생 시절 한 손에 세기 어려울 만큼 많은 남자 선배들이, 승연의 친한 동생이란 이유로 자신에게 선물을 대신 전해 달라고 하던 일. 전해줬을 때마다 돌아오던 승연의 대답, 너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 그런 승연에게 지영이 다른 사람의 마음을 무시하지 말라고 할 때마다, 다시 돌아오던 승연의 대답. 그러면 나 걔랑 사귀어? 지영은 아무 말 못하던 일. 그걸 보고 웃던 한승연. 착각이겠지만, 그 웃음이 조금은 슬프게 보였던 일.
눈앞에서 애써 웃으려는 승연을 보면서 지영은 사실은 승연이 아니라 자신이 환자였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영은 또다시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심장과 그 틈새로 빠져나오려는 고백을 애써 눌러 담았다. 하지만 지영은 자신이 걸린 병에는 무슨 약을 먹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채로 승연의 손을 쥐고 있었다.
지영은 승연을 향한 마음을 숨기고픈 심정과 들키고 싶은 심정의 저울질에서 언제나 간신히 숨기는 쪽의 손을 들어줬었다. 지영은 자신의 병을 자각하고 나자 자신이 미워졌다. 자신이 미워지는 만큼 승연이 미워졌다. 왜 언니가 아파요? 항상 아프다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던 건 나였는데, 왜 언니가 그렇게 힘들어 해요? 견디기 힘들만큼 솟구치는 미움을 헤치며, 지영은 속으로만 승연을 몰아붙였다. 그럼에도 지영이 가장 싫었던 사실은, 승연이 아픈 것이 그 남자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차라리, 자신이었다면 지영은 자기 자신을 자책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승연을 좋아하고 나서부터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일은 지영에게 가장 쉬운 일이었다.
들키고 싶은 심정 쪽으로 굴러가는 제 속의 저울을 느끼면서 지영은 차라리 울고 싶어졌다.
언니는, 왜 나를 다가가지도 못하게 하고 왜 나를 떠나지도 못하게 해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한 승연의 표정을 보고 있으니 그제야 지영은 자신이 입 밖으로 속마음을 꺼내 놓았다는 걸 알았다. 자신의 눈앞이 흐려지는 것만 같았다. 이제 정말로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되어버린 건지도 몰랐다.
언니 때문에 내 마음은 늘 아픈데, 시간이 흘러도 이 병은 깊어지기만 해요.
승연의 표정이 일그러진 것은 지영의 대중없는 고백 아닌 고백 때문인지, 통증 때문인지 지영은 알 도리가 없었다. 지영은 그 표정과 마주한 채로 또다시 승연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약 꼭 챙겨먹어요, 승연의 방을 나서자 지영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모든 게 낯설어지고 변할 줄 알았는데 신기하게도 자신의 속이 후련해졌다는 것만 빼면 지영의 세상은 변한 게 없었다. 승연을 다시 보지 못할 줄 알았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승연은 그날 일이 아예 없던 일인 것처럼 굴었다. 잊어버린 것인지, 잊은 척을 하는 것인지, 승연은 전과 똑같이 지영을 대했다. 지영은 언제나처럼 승연의 동생이었다.
지영이 승연의 청첩장을 받은 것은 그 날 이후로 4년 뒤의 일이었다. 승연은 쑥스러운 듯이 머리를 긁적이면서 청첩장을 건넸다. 지영의 표정은 4년 전의 승연처럼 일그러졌다. 승연은 그걸 애써 모른 척 했다. 지영은 그렇다고 느꼈다. 그 청첩장을 구기지도, 버리지도 못한 건 그 노란 종이 위에 새겨진 승연의 사진이 제가 보아왔던 승연의 무수한 시간과 숱한 모습들 중에서 가장 눈부시고 찬란한 모습이어서, 그래서 그랬다. 다만 그 뿐이었다. 승연은 그 날, 지영에게 축가를 부탁했다. 지영은 매몰차지 못해서 알겠어요, 라고 대답했다. 그건, 그러니까 지영에게 가장 잔인하고 완곡한 승연의 거절이었다고 생각했다. 그 날의 지영의 말에 대한 대답이 느지막이 지영에게 도착했다.
그로부터 3년 뒤, 그 사이 지영의 부모님은 귀향을 했고 그 집에서 지영은 전세 계약을 연장하며 살았다. 그 건물의 주인이 두 번이나 바뀌는 기간이었다. 지영의 맞은 편 집이 비었을 때, 그 집에 새로 들어온 것은 승연과 그녀의 남편과 그들의 아이였다. 그들이 지영에게 아무 말 없이 이사 온 날, 승연은 우주를 데리고 지영의 집을 찾았다. 우주는 지영에게 인사를 했다. 어딘지 모르게 부끄러움이 많은 아이였다. 지영의 집 이곳저곳을 눈치껏 살펴보던 아이는 지영의 방에서 잠이 들었다.
여기로 온다고 하면, 네가 이사갈까봐.
승연은 이미 식어버린 커피잔을 보면서 지영에게 말했다.
지금이라도 이사 갈까 봐요.
아직 계약기간 남지 않았어?
승연은 차가운 지영의 말에 웃으며 대답했다. 지영은 우주가 잠들어 있는 방 쪽을 보면서 말했다.
아이 이름이 우주네요?
승연은 그 말에는 대답하지 않았다. 지영은 오래 전 술에 취해 승연에게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우주라고 이름 지을 거예요. 승연은 그 때 술기운에 붉어진 볼을 손으로 괸 채 대답했다. 지영이 네 눈을 빼닮는다면, 그건 우주를 담아놓은 거라고. 잘 어울릴거라고.
지영의 열병은 이미 나았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그렇게 믿고 살아왔었다. 하지만 제 눈앞에 나타난 승연을 보자 지영은 이 열병은 정말로 약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알고 있었다. 우주가 승연의 진짜 대답이라는 것을. 사실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 승연이 겁이 많은 사람이라는 걸. 그래서 그 진짜 대답이 7년이나 걸렸다는 것을. 대답의 형태가 너무 폭력적이고 일방적이었다는 건 좀 따져 묻고 싶었지만, 지영은 이게 승연의 대답이라는 걸, 아주 느리고 잔인한 수락이었다는 걸, 그 날 알았다.
지영은 아직도 커피 잔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승연의 볼을 잡아 입을 맞췄다. 7년간의 몇 번의 연애와 몇 번의 섹스는 무감각하고 쓰리기만 했었는데, 승연의 입술은 구름 같았다. 스물 살 때 승연이 사주던 소주처럼 달았다.
지영의 집을 나설 때, 우주는 지영에게 인사했다. 또 놀러오렴. 지영이 웃으며 우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돼요? 우주는 큰 눈을 꿈뻑이며 물었다. 지영은 승연의 손을 잡고 있는 우주에게 키를 맞췄다. 그리곤 우주의 귀에 속삭였다. 그럼. 이모가 엄마를 많이 좋아하거든. 우주는 무슨 말인지 아는지 모르는지 지영을 마주보며 웃었다.
교문 앞에서 승연은 지영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승연은 오늘 지영이 가장 어려워하는 수학시험이 있는 날이란 것을 알았다. 그리고 1학년 중간고사 마지막 날이라는 것도. 승연은 지영을 데리고 무엇을 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승연과 함께 놀고 싶어서 그녀를 졸라대던 남학생들을 겨우 돌려보내고 교문에 서있었다. 지영이에게 그런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그렇게 40분 정도 기다렸을까, 지영이 멀리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지영은 역시나 수학을 망쳤는지 어깨가 처져 있었다. 승연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그냥, 보고 있으면 좋은 사람이 있었다. 그런 걸 분명 사랑이라고 할텐데, 승연은 그게 버성겼다. 자신은 지영을 사랑한다고 할 수 있는데, 말할 수 없을 거라고. 겁이 많은 자신에게는 그저 지영의 곁에 오래 오래 머무는 것이 최선이라고. 자신에게 수없이 되새김질 하곤 했었다.
지영이 자신을 스쳐지나갈 때, 승연은 지영의 이름을 부르며 지영의 손을 쥐었다. 놀라 고개를 드는 지영에게 늦봄의 햇살이 내리쬐었다. 아, 모든 봄의 아름다움은 너에게 갔구나. 찰나의 순간이 영원처럼 길게 느껴졌다. 그건 사랑이었다. 아무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지영마저도 인정해주지 않아도 자신만은 그렇게 말할 것이었다. 나는 사랑했다고.
영원할 것만 같던 찰나가 스쳐가고 지영의 손이 자신의 손을 빠져나가던 그 순간, 승연은 자신의 마음 속 어딘가에서 금이 가는 소리를 들었다. 하지만 지영과 함께 그 길을 어색하게 걷는 내내 제 손을 쳐다보던 승연은 자신에게 다짐했다. 오래 오래, 아주 오래 오래 지영의 곁에서 머물자고. 자신의 열병을 들키지 말자고, 그렇게 사랑하자고 승연은 다짐했다.
갈 곳을 잃은 재고를 터는 중입니다..
우주는 여기서도 나오네.
첫댓글 선생님... 제가 너무 늦었네요.. 놓친 명작들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까요?
장담하긴 어렵지만 인생이란 게 어떻게 될 지 모르니까요..! 선생님 글을 만날 날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