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가 식민 지배의 말미 무렵의 이런 가운데 2차 대전이 터지고 일본이 이곳으로 들어왔다.
인도네시아는 일본에 없는 석유와 고무, 주석, 그리고 심지어 말라리아 치료제인 키니네도 있었다. 일본은 이곳을 점령하면서 같은 아시아권이라고 이른바 “ 대동아 공영권 ”이란 주장을 하며 지배를 합리화하였다. 처음에는 원주민은 네덜란드를 쫓아낸 일본의 주장에 솔깃하여 환영했지만, 곧 그들의 목적이 해방이 아니라 자원을 노리고 대신 들어온 같은 식민 지배꾼에 불과하다는 것을 바로 깨달았다.
그러나 일본도 본토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도네시아에서 물러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먹을 수도 없고 버릴 수밖에 없는 아까운 인도네시아를 일본은 독립시켜 주겠다고 말만은 선언하고 나갔다.
이 때문에 2차대전이 끝나고 영국과 네덜란드가 합세하여 다시 인도네시아에 들어 왔을 때 인도네시아 독립세력은 당연히 반발하였다.
영국은 곧 정세판단으로 이곳에 신경을 쓰기가 힘들다는 것을 깨닫고 네덜란드에게 모두 맡기고 철수하였지만, 네덜란드는 거의 유일한 보물창고인 이곳을 포기하지 않고 다시 쳐들어 왔다.
인도네시아의 독립 세력은 격렬하게 저항을 하였지만 현대식 무기로 무장한 네덜란드를 이긴다는 것은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여러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인도네시아의 독립은 1949년 유엔과 미국이 간섭을 함으로서 이루어졌다.
네덜란드는 인도네시아의 독립을 약속하는 대신 아직 소유가 불분명한 뉴기니 문제와 셀 석유 회사와 같은 네덜란드가 소속하는 기업이 천연자원을 소유권은 계속 유지하는 것으로 둘은 협상이 되었다.
독립은 이루어졌지만 인도네시아는 문제가 산적해 있었다.
독립의 가장 중요한 세력은 인도네시아 공화국 계열이며 자바섬을 주축으로 한 세력이었다. 그렇지만 이외에 다른 섬의 세력도 있었고 이슬람 집단과 군부도 존재하였고 가장 조직적인 세력이 공산주의자이었다. 이들은 당장 공화국 세력에 저항하고 반란까지 일으켰다.
이때 신생 인도네시아 공화국 세력은 아마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인지 저항하는 공산주의자들을 가차없이 학살하였는데 최소 8000명은 희생된 것으로 알려져있다. 독립하자마자 일어난 자국 세력 내의 유혈사태는 나중에 1965년의 대학살의 전조라 할 수 있다.
witpo
인도네시아 공산당(Partai Komunis Indonesia, PKI, 1914–1966)은 네덜란드령 동인도 시대부터 인도네시아 공화국 수카르노 집권기까지 반세기에 걸쳐 활동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산주의 정당이었다.
창립자는 네덜란드의 저명한 공산주의자 헨드리퀴스 스네이블릿(1883–1942)이란 인물로 원래 명칭은 동인도사회민주주의연합(ISDV)이었다. 이후에 1924년부터는 인도네시아 공산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 인도네시아 공산당 그룹은 생각보다도 조직적이어서 한때는 잠시 정부에 참여한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 불법화된다.
그리고 결국 대학살의 대상이 된다.
사진은 학살당하는 모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