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 이름이 가깝습니다
시편 75:1~10
오늘 저녁 시편 75편을 읽었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시편 강해를 시작하려 할 때 속으로 퍽 망설였습니다. 왜냐 하면 시편은 150편이나 되는 큰 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이 지루하게 생각하지는 않겠나 하는 염려도 해 보았습니다. 그런데 저 자신이 이 시편을 한 편 한 편 강해하며 준비하는 동안에 얼마나 많은 은혜를 받았는지 모릅니다. 삼일 저녁이 되면 제 마음의 뜨거움이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불타곤 합니다.
금년 초부터 삼일 기도회를 2부로 나누어 드리는데,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성도들이 나오셔서 함께 예배드리며 그토록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는 것을 볼 때 저 자신이 감격하곤 합니다. 저도 여러 곳에서 설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집니다만 우리 교회 삼일 기도회 분위기는 세계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난 삼일 기도회 1부 예배시에 세계 도시 선교의 전문가인 베이커(Baker)박사님이 다녀가셨는데, 그 분은 인구 100만이 넘는 도시가 세계 전체 200곳이 되는데 거의 다 다니며 연구하는 분이십니다. 그 분 말씀이 세계에서 삼일 기도회에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는 없다고 합니다. 감사한 일입니다.
그리고 삼일 기도회 성경 강해를 지금 기독교 방송을 통해서 전국에 매주일 저녁 아홉 시부터 40분간씩 방송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월요일 점심 시간에 기독교 방송국 이사장님, 국장님, 그리고 우리 프로를 담당하시는 목사님과 식사를 나누면서 말씀을 들으니 아마 이 성경 강해 시간을 기독교 방송을 통해 들으시는 분이 백만 명 정도는 될 것이라고 합니다.
그저 앞으로 이 부족한 사람을 위해서 계속 기도로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의 기도가 절대로 필요한 사람입니다. 그 동안 우리는 시편 150편중에서 꼭 절반이 되는 75편을 강해하였습니다. 지난 일 년 반 동안 강해한 것은 이미 세 권의 책으로 출판되었습니다. 앞으로 남은 것까지 하면 다섯 권 정도의 책이 될 것 같습니다. 전파는 한 번 울려 퍼지면 그만이지만, 인쇄물은 길이 남아 우리 뒤에 오시는 분들에게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저녁 읽은 시편 75편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노래입니다. 이 감사는 개인적인 감사보다 민족적인 감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이 시는 늠름한 예언자적인 신앙의 기백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 1절을 같이 읽어보십시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
이 시인이 하나님께 감사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의 이름이 가까워 오기 때문에 감사한다”고 했습니다. 이 시구는 비록 짧은 한 마디의 말이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 시인이 얼마나 인생의 깊은 고비를 넘고 그 깊이를 파고 들어가 그 중심을 똑바로 바라보고 경험했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광야와 같은 인생의 길을 비록 초행이지만 한 고비를 넘고 또 한 고비를 넘을 때마다 과거에는 멀리,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것 같던 하나님의 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것을 체험하면서 감격해합니다.
욥의 경험이 바로 그것이 아닙니까? 그는 뜻하지 않게 이유도 알 수 없는, 그러면서도 너무 감당하기 어려운 고난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말로는 형언할 수 없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의 아내도, 가까운 친구도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그의 신앙을 흔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욥은 그런 가운데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버리지 아니하고 끝까지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보았습니다. 낙심하지 아니했습니다. 좌절하지도 아니했습니다. 그랬더니 나중에 하나님께서 놀라운 은혜로 그의 상처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욥기 마지막 장(42장 5-6절)에서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한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 이 얼마나 기막힌 간증입니까? 놀라운 믿음의 성장입니다. 그는 큰 고난을 통해서 신앙의 깊은 경지에 들어가는 축복을 누리게 된 것입니다.
바람이 부는 데 서 있는 나무는 다음의 두 가지 경우 중에 한 가지가 될 것입니다. 바람에 뿌리가 아주 뽑혀 죽고 말라버리고 말든지, 그렇지 않으면 바람이 불면 불수록 나무의 뿌리가 깊이 내려 누구도 뽑을 수 없는, 어떤 바람에도 견딜 수 있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될 것입니다.
제가 바라기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에게 닥치는 역경이나 시련이 당장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 될지는 몰라도 믿음으로 하나님과 더불어 잘 이기시기를 바랍니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핍박이나 기근입니까?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입니까?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길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이것을 믿습니까?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 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 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 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왜 사람들이 하나님이 보이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없다고 합니까? 하나님의 도우심을 맛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이번 여름철에는 벌레들이 많이 있습니다. 한번은 모기와 하루살이가 싸움을 하다가 날이 저물게 되었습니다. 아무래도 싸움이 빨리 끝날 것 같지 않으니까 모기가 하루살이에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우리 싸움이 빨리 끝날 것 같지 않아. 오늘은 이제 날도 저물어 가니 내일 다시 만나서 따질 것은 따지고 할 말을 마저 다 하세.”
그때 하루살이가 이상한 눈초리로 하는 말이 “아니, 이놈이 정말 미친놈이지. 내일이 어디 있어? 오늘이면 다지.” 하더랍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루살이는 하루를 살고 죽는 곤충이니까 오늘은 알아도 내일은 모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그런 사람이 없는 줄 아세요? 그리스도인들이 이 세상 말고 저 세상에 대해서 말하면, “세상에 살다가 죽으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지 저 세상이 어디 있어?” 하고 오히려 반문하고, 그런 말하는 사람을 정신이 이상한 사람을 대하듯 합니다. 왜요? 저 세상을 몰라서 그럽니다. 하루살이 벌레에게 아무리 내일에 대해서 설명해도 이해할 수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어느 누가 파선 당한 배속에서까지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주장할 사람이 있을까요? 진실 된 인간 경험을 통해서 그 깊이가 더욱더 깊어지는 때, 거기서 인간을 의지하고 바라보던 것이 얼마나 쓸모 없는 것인가를 깨닫게 되고, 하나님의 모습이 점점 더 가까워지면서 하나님의 이름이 이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도 더 다정스럽고 가깝게 불려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생을 진지하게 살면 살수록 하나님이 더 가까워지게 되는 경험을 가지게 되고, 여기서 이 시인은 하나님께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조건이 됩니다.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함을 받아 부족함이 없고 잔이 넘칠 때만 하나님이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안위하시며 주가 나와 함께 하심을 더욱 실감하는 것을 말합니다.
인생의 모든 의혹의 검은 구름이 점점 벗겨져 가고, 애매하던 인생 문제가 점점 명백하게 이해되어 가는 그 기쁨 이상 더 감사한 은혜가 없는 줄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옛날 시편 기자도 “내가 고난 당하기 전에는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했습니다.
우리 민족의 지나온 경험을 생각해 보아도 그렇습니다. 우리 민족은 일본 사람들에게 36년이란 긴 세월을 말할 수 없이 억울하게 학대받으며 비참함 속에서 살았었습니다. 감히 그들의 악랄한 손아귀에서 놓인다는 것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고 꿈도 꿀 수 없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뜻밖에 감격스러운 광복의 기쁨을 가지게 될 때, 그 어느 누구의 입에서 이것이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고 우리의 힘으로 된 것이라고 하겠습니까?]
한국 사람이면 누구나 이구동성으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에 감격하고 그 도우심에 감사하고 그처럼 우리 가까이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찬송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여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주의 이름이 가까움이라 사람들이 주의 기사를 전파하나이다”
이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영예와 권세가 향상된 것과 하나님이 자기와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해서 행하신 놀라운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 찬송을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 보세요. “우리가 주께 감사하고 감사함은” 했는데,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우리의 감사는 자주 되풀이되어야 함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려운 일에 직면했을 때 하나님께 얼마나 자주 기도합니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다음에는 한두 번 감사한 것으로 만족할 수 있겠습니까?
감사는 ‘나’ 뿐만 아니라 ‘우리도’, 다시 말해서 나와 나의 모든 친구들도 감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위해서 행하신 것은 일상적인 일이 아니라 자연의 원리와 우리의 기대를 초월해서 일어나기 때문에 그것을 기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이스라엘 민족을 건져내신 것은 분명히 기사입니다.
이런 기사를 통해서 그의 백성이 주의 이름이 가까움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요청할 때 그 일 속에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도 말했습니다. “너희는 여호와를 만날 만한 때에 찾으라 가까이 계실 때에 그를 부르라”(사 55:6)
우리가 하나님을 언제든 만나지 않겠습니까만 특별히 만나야만 하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 힘으로 감당키 어려운 일을 당할 때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 때 하나님이 우리 가까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불러야 합니다.
출애굽기 3장에 보면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그들을 괴롭게 하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했습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백성이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가까이 계십니다. 얼마나 마음 든든합니까?
여러분, 우리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과 돌보심을 받는 나라입니다. 이 민족, 특히 한국의 그리스도인은 세계 복음화를 위해 이 시대에 마련하고 있는 역군입니다. 절대로 이 겨레를 건드릴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쓸데없는 망상을 버리지 않으면 하나님의 철퇴가 어떤 모양으로 임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옛날 애굽은 세계를 지배하던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의지할 만한 존재가 못되었습니다. 상한 갈대였습니다. 일본 사람들이 아무리 자기네가 경제 대국임을 의식하고 우리 나라를 얕보고 있다 해도 이 민족이 단결하여 하나님만 경외하며,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바람 앞의 겨와 같이 될 줄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때일수록 우리 겨레는 하나로 뭉쳐야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의 시편을 쓴 이 시인은 하나님만 온전히 신뢰하며 그의 능력을 잘 사용해야 할 의무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에 “주의 말씀이 내가 정한 기약을 당하면 정의로 판단하리니”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1인칭으로 표현한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합당한 때에 자기에게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을 완성시키시리라는 것입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방해를 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하신 역사는 그대로 이루어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경험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비가 오지 않아서 어려움이 많아도 오늘날 과학의 힘으로 비가 오게 할 수는 없습니다. 기다려야만 합니다. 하늘에서 비가 너무 많이 내린다고 인간의 힘으로 막을 수도 없습니다. 막을 수 있다면 이 땅에 홍수는 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의 역사를 이렇게 주관하시고 계십니다. 얼른 보면 이 세상은 사람의 힘에 의해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이지만, 사실은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의 간섭 없이 되어지는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고 명예로운 직책으로 부름을 받았을 때는 그것이 봉사하는 직책인 것을 기억해서 부지런하게 열심으로 해야 합니다. 그리고 공의의 원칙대로 정직하게 판단해야 합니다.
이제 3절을 보십시다. “땅의 기둥은 내가 세웠거니와 땅과 그 모든 거민이 소멸되리라 하시도다”
이 시편을 쓰던 당시 이스라엘의 형편은 매우 나빴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이 모두 타락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소멸되리라는 말이 별로 놀라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 당시 부패한 풍습이 만연되어 있었으므로 그와 같이 악하고 불경스러운 일들을 법으로 처형해야 했는데, 그들은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주신 주권 밑에 단결하는 힘이 결여되어 있었으므로 서로 나뉘었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갈라졌고 파벌로 조각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멸망을 초래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때 이 시인이 한 일이 무엇입니까? 무너져가는 기둥을 붙드는 일입니다. 흔들리고 무너뜨리려는 것은 마귀의 하는 일이요, 흔들리는 기둥을 생명을 내걸고 붙드는 일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마땅히 해야만 하는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흔들리는 기둥을 붙드신 분이십니다.
히브리서 1장 2-3절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케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의 말씀으로 흔들리는 세상의 기둥을 붙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4-5절 말씀입니다.
“내가 오만한 자더러 오만히 행치 말라 하며 행악자더러 뿔을 들지 말라 하였노니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
시편 1편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도 아니한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오만한 자를 미워하십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했습니다. “눈이 높은 것과 마음이 교만한 것과 악인의 형통한 것은 다 죄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에도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에베소서에서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라”고 권면했습니다.
사도 베드로도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했습니다.
성경이 제일 먼저 가르치는 덕은 겸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이 겸손하셨기 때문에 우리도 마땅히 겸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물리치십니다. 교만하던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은 정신이 나가서 그 말로가 비참해졌습니다. 교만하던 벨사살 왕도 하나님이 메대와 파사 연합군을 통해서 쳐들어와 죽어버리고 나라는 망하고 말았습니다.
교만하던 나폴레옹이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만하던 히틀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교만하던 무솔리니가 어떻게 되고, 동조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교만한 사람을 대적하십니다. 하나님이 대적하시는데 누가 설 수 있습니까?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입니다. 개인도 그렇고 나라도 그렇습니다. 사실 교만한 마음은 모든 죄의 근본입니다.
시편 101편 5절에 “그 이웃을 그윽히 허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지 아니하리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것을 참지 못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자신의 영적인 교만, 지적인 교만, 물질적인 교만을 조심해야만 합니다. 바리새인처럼 되지 맙시다.
고린도전서 8장 12절에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 만일 누구든지 무엇을 아는 줄로 생각하면 아직도 마땅히 알 것을 알지 못한 것이라” 하였습니다.
겸손한 사람은 무슨 일을 하고도 자랑하지 않습니다. 자기 고집을 너무 내세우지 아니합니다.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아니합니다. 그리고 어딜 가나 봉사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마음에는 언제나 평화가 있습니다.
여기 특별히 권력의 교만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너희 뿔을 높이 들지 말며 교만한 목으로 말하지 말지어다”라고 경고했습니다. 권력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뿔을 너무 높이 들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이 교만하면 하나님에게까지 대항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주먹으로 바위를 치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사람을 높이는 일은 동에서도, 서에서도, 그렇다고 남에서도 아니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신다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의 운명은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
8절에 “여호와의 손에 잔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는 여러 가지 성분이 섞인 섭리의 잔, 고통의 잔을 사람의 자손들의 손에 놓으십니다. 죄인들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도 “여호와의 오른손의 잔”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이시요, 역사의 섭리자이실 뿐만 아니라 이 우주와 역사를 모두 심판하시는 심판주이십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면할 사람도 없고 하나님의 심판이 미치지 못할 곳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어떻게 교만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인간의 최후의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합니다.
사람이 된 목적은 오직 무한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선포하여 무지하고 완악한 악인들이 더 죄악을 계속 범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시인은 정의의 편에 서서 싸우는 정의와 진리의 투사가 되어 악인을 꺾어 넘어뜨리며, 의로운 사람을 치켜올리는 사명을 다할 것입니다.
이 시인의 고백처럼 사람은 진실로 자기의 무능을 시인하고 하나님의 전능하신 절대성에 무조건 순종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가는 그때, 사람으로서의 보람이 찾아지는 것이며 따라서 이 땅 위에서는 어느 무엇도 두렵지 아니한 정의의 투사가 될 것입니다.
“나는 야곱의 하나님을 영원히 선포하며 찬양하며 또 악인의 뿔을 다 베고 의인의 뿔은 높이 들리로다”
우리의 입에서는 감사와 찬송이 흘러나오고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선포하며, 하나님이 우리를 높이 들어주시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