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년, 대학에 입학할 때부터 아니 그 전부터
그는 다른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알아야 할 무슨 '난수표'같은 존재였다.
나는 찻집에 들어가면 언제나 서빙을 하는 아가씨에게 '정태춘 틀어주세요.'했다. 그 말이 얼마 오래 가지 않아서, 그 찻집에는 내가 들어서면 말하지 않아도 그의 노래가 은은하게 흘러 나왔다. 나는 그런 서비스가 안되는 찻집은 결코 가지 않았다.
오늘 정태춘은 말했다.
후반기의 시작인지, 아니면 마지막일는지도 모른다고.
흥..
그걸 누가 용서하냐.
정태춘에게 후반기는 없다. 아니 애초에 초반 중반도 없었다. 내가 '떠나가는 배'에 넋을 잃고, '애고 도솔천아', '장서방네 노을'에 얼이 나가 있을 그 때부터.. 내게는 이미 그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일 뿐이었다.
'대한민국' 때에 나는 돌멩이를 던졌고, '92년 여름 장마 종로에서' 때에 나는 예전의 열정을 함께 이어가지 못하는 많은 과거의 동지들로 마음앓이를 했다.
그의 노래는 누가 짜맞춘 듯이 내 살아온 과정과 닿아 있었다.
리철진동무를 노래한 그 올림픽 공원에 내가 있었고, 그때 그 먼먼 연단에서 그가 한 이야기들 모두가 지금 내 일기장에 그대로 있다.
1989년.. '누렁송아지 공연' 때 그가 부산대학 대운동장에서 처음으로 팔을 치켜 들던 그때 그 순간을 지금도 기억한다.
어수룩하지만, 확신에 찬 사람이 아니고서는 할 수 없는 말과 몸짓을.
90년 봄, 부산수산대학교(지금의 부경대학교) 운동장에서 열린, 김남주 시인이 왔던 '일어서는 봄' 공연도 기억한다.
그때 그는 '우리들의 죽음'을 노래했다. 김영삼을 풍자하는 노래도 했다. 그 '우리들의 죽음'은 내가 교사가 된 지 12년.. 지금까지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아이들에게 들려준, 나의 수업 교재 1호다.
92년 대선..
사직 실내 체육관,
그는 '일어서라 열사여!'를 터지는 북소리처럼, 절규처럼 노래했다.
우리들 모두 그때에는 패배했지만,
최소한 그때의 의미에 비추어 지금은 승리했다.
그의 '정동진'이 나오기 전에 나는 정동진엘 갔다.
내가 좁쌀만큼 느낀 걸 그는 수박(정동진1)만큼 노래했다. 그뿐인 줄 알았는데, 그는 이미 지구(정동진3)을 가슴에 갖고 있었다.
빌어먹을..
태춘이 말하는 후반기란,
내가 생각하는 세세생생이다.
내 의식 곁에 머물러 있을 수는 없겠지만,
25년 세월이 흘렀어도,
그의 노래에는 '정태춘다움'이 있다.
그것을 좋아하고 존경하고 또 사랑한다.
정태춘에게 경고한다.
'후반기'라는 말을 앞으로는 하지 말라.
세상에 수두룩한 인생 가운데,
저 스스로가 설정한 후반기란 있을 수 없다.
'다시, 첫차를 기다리며'를 들으며,
내가 남모르게 오열했던 것은..
그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소리가 환청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너 외롭지? 옛날의 동지가 그때 같지 않아서.. 그래도 괜찮아, 우리에겐 새로 오는, 새로 오고야 마는 '첫차'가 있잖아. 내가 먼저 나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그때처럼 너도 뜨거운 가슴만 하나 안고 거기 와 있어."
정태춘.. 그는 '후반기'를 논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첫차를 기다리는 사람이,
'생의 후반'을 말하면 비겁하기 때문에.
후반의 첫차가 아니라,
언제나언제나,
새로 출발할 수 있는.. 그런 첫차를 함께 사랑하는 사람에게 '끝'은 없는 거니까.
정태춘..
가장 나의 가슴을 에인 '5.18'을 듣고 싶었지만...
그저 모~두 다가
좋은 것 투성이인, 나의 정태춘...
아.. 나는 술이 좀 취한 것 같은데, 그래도 이 가슴 속에서 마구 끓어오르는 뭔가가 자꾸만 요동치는 건, 그래서 잠못 이루는 건..
정태춘..
당신이,
'후반기' 어쩌고,,,
그런 말 한 때문이야.
많은 사람들이 가진 사랑 앞에서,
'후반기' 운운하는 건
그 사랑을 다치게 할 것 같아서..
그게 걱정스러운 탓일 거야.
아니,
그 사랑이..
나만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