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식목일때만 되면.. 난 약간은 우울해진다.
나이가 마흔이 넘었는데도 그래서 유년시절의 기억들이 조금은 잊혀지길 바라지만 유독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내삶의 종착역에서야 멈출것 같기 때문이다.
한식날, 양지바른곳에 인생의 고달팠던 옷을 벗고 편히 누워계신 용미리에 갔다오면서 마른잔디 사이로 삐죽허니 세상구경하러 나온 겨우내 갇혀있던 영혼을 보듯..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아부지.....
유년시절, 청렴하신 아빠 성겪때문에.. 제법 잘나가는 공직생활을 하셨어도.. 항상 가난했던 우리집의 허름한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나무로 얼기설기 엮은 옆집과의 경계비쯤 되는 담벼락 아래 아주 손바닥만한 꽃밭이 있었다.
식목일 전후쯤되면.. 그땐 어렸으니.. 그당시에 식목일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해가. 많이 길고. 따수운 볕이 등을 껴안을때쯤이면.. 엄마는 오강을 들고나와 예의 수차례 꽃밭에 천연비료로 뿌려대셨다.
거무튀튀하게 흙이 기름질때쯤이면.. 담벼락에.. 마늘모양의 아주 귀여운 까만 나팔꽃씨를 이랑을 파서 솔솔 뿌려 흙을 덮고.. 그 앞엔 형형색색의 분꽃씨를 좌우로 정렬해가면서 심으셨다...
그리고 올망졸망한. 화분에는 아직 봉오리도 올라오지 않은 어린 채송화를 사다 모종을 하시고는 그때 키웠던 발바리들이 파헤치지 않게.. 울타리도 만들어 놓았던 기억이 생생하다...
4월중순에서 5월초쯤부터는 밥도, 국도.. 반찬도 주지 않은 거무튀튀한 흙속에서. 너무 여린 노란빛도는 초록새싹이.. 껍질을 머리에 이고 고개를 흔들며 올라온다.
신발주머니 들고.. 막 대문을 열고 나서다 그 어린 싹과 눈이라도 마주치기라도 하면.. 다시.. 부엌으로 달려가, '엄마아~~ 꽃밭에 싹났어 ' 하면서 폴짝폴짝 뛰던 뒷덜미가 파름하니 보이게 깡뚱히 삼강머리로 자른 어린 계집아이의 해맑던 눈망울....
거울을 들여다보며.. 배시시 웃어주는 내 지금의 모습에서.. 그 어린아이를 찾아본다.
'꽃밭에서' 란 노래가 있었지...
아빠하고 나하고 만든 꽃밭에. 채송화도 봉숭아도 한창입니다....
아빠가 매어놓은 새끼줄 따라 나팔꽃도 어울리게 피었습니다.....
엄마보다는 아빠가 오히려 섬세하고 감성적이셨던것 같다.
아침이면.. 햇살따라 고개를 피우며 보랏빛으로 빛나게 웃어주던 나팔꽃이 몇송이 피었는지.. 피고 진 시든 꽃잎뒤로 몽글하게 자신의 삶을 다시 잉태한 꽃씨주머니를 들쳐보시며... 겔랑의 향수나.. 샤넬의 향수보다 더 순박하고 자연스러운 분꽃의 은은한 향내에 취해 까맣게 익어가는 분꽃씨를 편지봉투에 받아내시며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던 자애로운 손길을 난 내 뺨에 대고 막 부벼 댔었지.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6.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zpw%26fldid%3D_album%26dataid%3D512%26regdt%3D20050406224322%26disk%3D13%26grpcode%3Dincense%26dncnt%3DN%26.bmp)
매일아침 눈 비비고 일어나 아빠방에 건너가면.. 아빠는 벌써. 꽃밭에 나가서. 물도 주시고.. 오늘은 꽃이 몇송이나 피었나 헤아리는 일로 하루를 시작하시는듯 했다.
6-7월쯤.. 여리던 채송화들도.. 몇번의 오강의 자양제로 살이 토실토실 올라 인간이 만들 수 없는 천연의 비단같은 색깔로 몇자도 안되는 꽃밭에서 제 삶을 화려하게 살아간다...
가끔.. 말썽을 일으키는 암컷 발바리 인 '해피' 의 새끼인 수컷 '메리'가 뚝심좋게 어떻게 꽃밭에 기어올라가.. 꽃밭을 온통 헤집어 놓는 날이면.... 엄마의 벼락같은 일갈과 함께.. 어디선가.. 흰 고무신이 메리의 머리에 정통으로 꽂히고.. 꼬랑지 바짝 사타구니에 숨기고 어미뒤에 숨었다가.. 그 장난기가 다시 발동되면.. 그 다음날 아침 구원의 손길을 애타게 기다리다.. 축 늘어진 꽃잎들이 숨가쁘게 꺾어져 있었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6.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zpw%26fldid%3D_album%26dataid%3D511%26regdt%3D20050406224227%26disk%3D32%26grpcode%3Dincense%26dncnt%3DN%26.bmp)
꽃도 안타깝고.. 엄마한테 고무신 세례를 받는 '메리'도 안타깝고... 둘다 불쌍해서 오히려 아무것도 못하고.. 주저앉는 나와 ... 우리 가족들에게 그 어떤 사랑을 기대를 못하던.. 메리는 어느날.. 집을 가출하고 영영 소식이 끊어져버렸다....
몇번의 시절 바람이 흐르고, 엄마와 아빠의 머리에 흰눈이 내리고.. 난 단발머리 나풀거리는 여학생이 되어서도.. 매년 봄이면 집안의 소박한 축제처럼 설레였던 행사는.. 나의 관심사가 수염이 거뭇거뭇 나는 남학생과.. 인생이 도대체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 여학생의 어쭙잖은 개똥철학의 관심으로 변한뒤 그 분꽃의 은은한 향내도.. 진한 자줏빛에 어울리는 순박한 시골처녀 분이같은 웃음을 머금었던.. 나팔꽃도. 도대체 나팔꽃이 몇송이나 피었는지.. 아빠 손잡고.. 하나, 둘 헤아리던 관심도, 채송화의 까만 모래알같은 씨앗들에 터져 나오던 해맑던 감동도 낯선바람이 방목된 내 마음에서 모두 흩어져 가버렸다....
다만 아빠의 변함없는 애정과 관심을 받으며.. 그렇게 그 기억은 늙어만 갔다....
![](https://img1.daumcdn.net/relay/cafe/original/?fname=http%3A%2F%2Fpds16.cafe.daum.net%2Fdownload.php%3Fgrpid%3Dzpw%26fldid%3D_album%26dataid%3D513%26regdt%3D20050406224412%26disk%3D6%26grpcode%3Dincense%26dncnt%3DN%26.bmp)
허름했지만.. 제법 컸던 얕은 장독대의 정경이며... 몇자 안된.. 꽃밭과.. 허름한 푸세식 화장실과... 베니다 합판에 그래도. 제일 버젓했던 개집에서 나고 자라고. 또다시 죽음을 맞이한.. 발바리들의 착한 눈망울의 기억은.. 우리가 근처동네.. 네모반듯한 양옥집으로 이사간 이후.. 그저 몇장의 흑백사진으로 반추될 뿐이었다.
거뭇허니.. 진한 흙냄새로 진동했던 예전의 한옥집하고는 틀리게 매케한 석회냄새만 진동했던 무정란과도 같이 생명을 잉태할 수 없는 콘크리트로만 무성했던 새로운 터전에서.. 그나마 몇그루의 화분으로 위안을 삼으셨던 아빠는 그 후로 10년후쯤 고달팠던.. 이 생의 옷을 벗어버리셨다.
그 이후로 더 이상.. 내 기억에 아빠와 조그마한 꽃밭을 기억하기엔.. 난 무엇하나 뿌리내릴 씨앗을 마음속에 담아두지 못하고 살아왔다.
다만.. 매년 '한식' 이라는 이름으로.. 꼭 내야 하는 세금고지서처럼 아빠의 이름 석자 가슴에 대신 달고.. 울어 줄 수 있는 빈 꽃밭만 기억할 뿐이다.
가끔.. 퇴근길에 화원을 지나쳐 가면... 예전에 눈에 익었던 꽃들의 모종은 온데간데 없이.. 감히 멸종이라고 얘기해도 될만큼 화려함만 극에 달한 외색의 꽃종류들이 우리들의 잔잔한 기억의 자리를 대신 채운다....
마치.. 뚱그런 푸른눈에.. 아이섀도우 칠하고. 빨간 연지 번드르르 하게 바른.. 하얀 피부의 이국의 여인에 열광하듯 말이다.
이제.... 물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애절한.. 내 유년시절의 꽃은.. 더이상.. 꽃씨를 잉태하지 않았다......
첫댓글 감동! 감동!! 손님~~ 너무 아련한 유년시절의 단편이네요.. 무언가.. 동질감을 갖는 추억입니다.. 아련함은 항상 아름다운 슬픔을 함께 동반한다는것을.. 저 또한 머리에 눈꽃이 필때 알았답니다.... 순박했던 어린아이의 모습이 오늘 가슴을 설레이게 하는군요...
오랫만에 찾아왔는데 반가운 님들을 봐서 너무 좋군요. 저의 유년시절을 오늘밤 와이프랑 같이 느껴보고 싶은 글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음.. 손님한테 이런 섬세함이 있을줄 몰랐네요 ^^ 글 잘 보고 갑니다... 낭군님한테도 안부 전해주십시오
갑자기 나팔꽃이며 채송화 그리고 분꽃이 보고 싶어서 그림파일을 찾았습니다. 잠시지만.. 그 예전의 기분에 취해보고 싶어서 그림을 끼어 넣었습니다..
그래도 마음속에 꽃씨가 아닌 잡초가 무성해져버린 꽃밭이라도 있다면 님의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보세요, 분명히 님의 눈길을 기다리고 있을 작은 꽃씨하나가 반짝이고 있을테니까요.. 아름다운 님의 글이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