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는 너무나 슬퍼서 야했다>
1.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 노래엔 아가씨의 눈물이
인천에 성냥 공장 성냥 공장 아가씨
하루에 한 갑 두 갑 일 주일에 열두 갑
팬티 속에 감추고서 정문을 나설 때
팬티 속에 불이 붙어 ㅇㅇㅇ이 다탔네
인천에 성냥 공장 아가씨는 ㅇㅇㅇ
1970년대까지도 '인천의 성냥공장 아가씨'라는 외설스러운 해병대 군가가 유행했다. 사회에도 퍼져 몇몇 젊은이는 술잔을 부딪치며 목청껏 불렀다.
이 노래는 젊은 사병들의 이성에 대한 욕구를 표현한 외설적인 노래이다. 근데 알고보면 노래 가사에는 저임금으로 착취당하던 식민지 처녀들의 눈물이 숨어 있다.
2. 성냥공장은 떼돈벌고 아가씨는 착취당하고
성냥은 인천 제조업을 일으킨 불씨였다. 인천 개항후 외국인들이 크게 늘어나자 생필품인 성냥의 수요도 크게 늘어났다.
기록에 남아있는 인천 최초의 성냥공장은 1917년에 일본인 자본가 카레이 에이타로가 설립한 조선인촌주식회사(朝鮮燐寸會社)*이다. 당시 국내생산의 20프로를 차지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 隣村(린손)은 일본어로 성냥을 뜻한다. 성냥은 단단한 돌 형태의 유황인 ‘석류황(石硫黃)’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당시 성냥 1통은 쌀 1되 값일 정도로 비쌌다. 일본은 조선인들의 공장설치는 일체 허가하지 않고 기술도 배우지 못하게 하면서 시장을 독점하여 폭리를 취했다.
공장에서는 직원인 주로 10대 어린 소녀에게 하루 13시간동안 1만개의 성냥개비를 성냥갑에 담아야 하는 살인적인 노동을 시켰다.
그럼에도 고작 60전밖에 안 되는 품삯으로 퉁쳤다.
그러니 성냥공장 아가씨는 이 비싼 성냥을 팬티 속에 감추고 공장 정문을 나설 유혹을 느낄 법도 했다.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는 날이면 적잖이 수모를 당했을 터이다.
* 성냥에는 마찰성냥과 안전성냥이 있다.마찰성냥은 황린을 발화연소제로 사용하여 성냥이 서로 부딪히면서 자연발화의 위험이 있었다.
1922년 국제조약에 의해 제조가 금지되고 이를 보완한 안전성냥이 사용되었다. 반드시 적린 등이 칠해져 있는 성냥갑의 마찰면에다 성냥알갱이를 문질러야 서로 결합되면서 불이 붙는 방식이다.
3. 성냥공장 아가씨는 노동쟁의로 일제의 착취에 저항
인천의 성냥공장 어린 여공들은 일제의 노동착취에 항거해 당시 성인 남자들도 감히하지 못한 공장 점거와 동맹 파업으로 맞선다.
1921년부터 1932년까지 총 5차례에 걸쳐 노동쟁의를 벌인 것이 한국 여성 노동운동의 효시로 공식 기록되어 있다.
1921년 일본인 감독관 교체를 요구하면서 동맹파업, 1926년에는 임금 삭감조치에 저항하여 파업, 1931년, 1932년에는 임금 삭감반대와 8시간 노동조건을 요구하며 파업을 벌였다고 한다.
광복후 1970년대 전태일 열사의 분사 전까지 당시 노동자들도 제대로 주장하지 못했던 8시간 노동 조건을 일제강점기 치하인 1930년대 10대 소녀들이 요구하며 파업을 했다는 것은 실로 선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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