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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한을 풀어주시는 하나님(삼하21:1-14)-2020.12.13
역사적으로 볼 때 다윗 왕조는 여러 가지 어려운 일들이 있었지만 전반적인 분위기는 하나님과 매우 우호적이었고 형통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의 가장 화려했던 전성기를 누렸던 것이지요. 그런데 다윗의 시대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년부년 삼년 기근이지요(1절). 물론 우리는 그 시기가 어느 때인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다만 7절의 말씀으로 볼 때 사울의 손자 므비보셋을 예루살렘 성으로 데려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은 다음에 발생된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렇다면 정권 초기가 아닐까라는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하겠지요. 므비보셋은 사울의 손자요, 요나단의 아들입니다. 다윗은 일찍이 요나단과 형제언약을 맺었습니다(삼상20:42). 그래서 다리가 불편한 요나단의 아들 므비보셋을 다윗이 선대한 것이지요.
하지만 다윗시대에 년부년 삼년기근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건기와 우기가 분명한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3년 연속 가뭄이 있었다는 것은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며 크나큰 고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대재난 수준이었던 것이지요. 물론 성경에 나오는 기근이나 가뭄은 하나님의 심판적 성격이 강합니다. 그래서 영적으로 민감한 다윗은 년부년 삼년 기근 앞에서 하나님을 찾은 것이지요.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재앙이요 징계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하지만 다윗을 제외한 아무도 하나님의 재앙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들은 불안한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보며 원망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영적인 사람은 문제를 영적으로 바라보고 영적으로 접근합니다. 무엇보다 영적인 사람은 문제 속에서 영적인 냄새를 맡습니다. 다윗은 누구보다 영적으로 민감한 자였습니다. 그는 항상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입니다. 비록 그가 완전하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이 당신의 마음에 합한 자로 여겨주셨습니다. 때문에 이 문제가 보통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가 있는 아주 특별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이지요.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찾았고 하나님께 간구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다윗의 예측은 빗나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즉시 다윗에게 기근의 원인에 대해 알려주신 거예요.
그만큼 하나님과 다윗은 친밀했던 것입니다. 기근의 원인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 집을 인함이니 저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하시니라”. 한마디로 사울 왕의 잘못 때문에 삼년 기근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이 기근은 다윗의 문제가 아니라 전임자 사울왕의 문제였던 거예요. 구체적으로는 사울 왕이 기브온 사람들과의 약속을 파괴하고 죽였기 때문이지요. 한마디로 기브온 사람들을 억울하게 한 거예요.
(1) 사울의 문제(1~2절)
모든 문제에 원인이 있습니다. 이유가 있다는 말이지요. 다윗 시대에 찾아온 년부년 삼년 기근도 분명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을 원통하게 한 거예요. 그래서 하나님이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시려고 기근을 내리신 것이지요. 바로 이것이 기근을 주신 목적입니다. 믿는 자는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의도가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다윗이 이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주 잘한 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문제를 가지고 자기 혼자서 풀어보려고 애쓰다가 오히려 문제를 더욱 꼬이게 하는 경우가 많거든요. 반드시 믿는 자는 다윗처럼 해야 합니다.
사실 사울 왕과 다윗 왕은 정권의 탄생부터가 다릅니다. 사울 왕은 백성들의 눈에 의해 발탁이 되고 그들의 요청에 의해 세워졌다가 하나님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고 막을 내린 인본주의 정권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다면, 다윗 왕은 하나님이 찾아서 택하시고 지명하여 세우사 하나님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아 누렸던 신본주의 정권의 상징적인 인물입니다. 그런데 다윗 시대의 년부년 삼년 기근은 사울 왕의 인본주의가 초래한 하나님의 분노의 결과였습니다. 사울 왕의 잘못된 열심이 불러온 재앙이었다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본문에 등장하는 기브온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기브온 사람은 가나안 땅 기브온이라는 성에 살고 있던 사람들입니다. 구체적으로는 히위족속이지요(수11:19). 이들은 진멸의 대상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르시기를 가나안 땅에 들어가거든 그 땅 거민과 언약도 맺지 말고, 그 땅 거민들을 완전히 추방하여 쫓아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출34:11~17).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브온 사람들에게 속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게 된 것입니다. 여호수아가 그들의 꾐에 빠져 화친조약을 맺은 거지요.
여호수아는 승승장구하며 가나안 땅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의 부족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지요. 여호수아서9장에 보면 가나안의 모든 부족들이 이스라엘 백성들과의 일전을 벌이기 위해 동맹을 한 거예요. 그런데 그들 중에 이탈세력이 생긴 거지요. 기브온 사람들이 잔머리를 굴린 거예요. 기브온 사람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꾀를 낸 거예요. 그들은 사신의 모양을 꾸미고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발에는 낡아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마르고 곰팡이 난 떡을 예비하고 이스라엘이 진치고 있던 길갈로 찾아온 것입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에게 자기들이 원방에서 왔다고 속인 후에 화친조약을 맺자는 것입니다(수9:3-6). 이른바 전쟁하지 말고 평화조약을 맺자는 것이지요. 그리고는 단번에 자기들이 당신들의 종이라고 고백합니다. 물론 여호수아가 그들의 신원을 물으니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인하여 심히 먼 곳에서 왔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지요. 그리고 자기들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잘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때 여호수아가 결정적 실수를 합니다. 그들의 말을 그대로 믿어버린 거예요. 어쩌면 여호수아는 자기들이 가나안에 정착하기 전에 피 흘리지 않고 원주민들을 종으로 얻었다고 흥분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결정적인 실수였습니다. 그들은 먼저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하나님께 묻지 아니한 거예요(수9:14). 그들은 하나님께 묻지도 않고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체결하고 말았던 거지요(수9:15). 하지만 삼일 후에 그들의 정체가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그들이 자기들 주변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그들과의 언약은 효력이 발생된 거예요. 더 이상 약조를 파기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당시 여호수아가 할 수 있는 일은 거짓언약에 대한 저주선언이었습니다(수9:23). 그들의 저주는 결국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일이었지요.
하지만 기브온 사람들은 비록 좋은 환경은 아니어도 이스라엘과 함께 살아갈 수 있는 명분을 얻은 거예요. 전쟁을 통해서 피를 흘리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고 말입니다. 언약은 정말 중요합니다. 아무리 내가 불리해도 지켜져야 하고, 손해를 볼지라도 지켜져야 하는 것이 언약이에요. 하나님과의 약속은 두말할 것 없고, 사람들과의 약속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약이 얼마나 소중한 약속인지 여호수아서9장19절을 보겠습니다.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고 선포합니다.
그들은 기브온 사람들의 평화를 반드시 보장해 주어야 했던 거예요. 비록 그들이 속아서 체결한 언약일지라도 약속을 지켜야 했던 거지요. 특별히 그들의 약속은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약속입니다. 그것을 파약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지요. 그런데 사울 왕이 그 언약을 파기하고 말았던 거예요. 그것도 일방적으로 말입니다. 기브온 족속들을 학살한 것이지요. 이것은 명백히 하나님의 율법을 위반한 사울 왕의 범죄행위였던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사울 왕이 언제 어떤 방식으로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했는지는 모릅니다. 정확한 기록이 없으니까요. 혹자는 사울이 놉에 있던 제사장들을 살해할 때(삼상22:18-19) 기브온 사람들을 함께 살해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또 어떤 자는 사울이 집권초기에 율법에 근거하여 신접한 자와 박수무당을 쫓아낼 때 기브온 거민들을 함께 학살했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습니다. 물론 사울왕도 나름대로 명분을 갖고 그런 일을 자행했을 것입니다. 자기민족을 사랑하는 순수한 감정으로 말입니다.
분명한 것은 율법에 가나안의 일곱 족속들과 무슨 언약도 맺지 말고 그들을 불쌍히 여기지도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신7:2). 그래서 사울은 율법을 지킨다는 명분으로 여호수아가 기브온 사람들과 잘못 맺었던 언약을 파기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여호수아가 맺은 언약이 율법적으로 볼 때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기가 그 약조를 파기하더라도 정당하다고 생각할 수 있었는지 모른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사울은 하나는 알고 하나는 몰랐던 것입니다. 그것은 한 쪽을 막기 위해 다른 한 쪽을 무너뜨리는 것이지요. 명분을 얻기 위해 악을 정당화하는 셈이에요. 한마디로 밑돌을 빼서 윗돌을 괴는 식이지요.
사울의 행위는 어떤 식으로도 정당화 될 수 없는 명백한 율법 파기입니다. 사울의 열심은 하나님에 대한 열심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한 자기 열심이요, 왜곡된 열심이었던 것이지요. 하나님을 위한 열심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열심이라는 거예요. 그는 잘못된 자기 열심과 민족주의 열심으로 그랬던 거예요. 사울 왕을 통해서 기브온 거민들에 대한 학살 명령이 내려질 때 일부가 살아서 도망을 쳐 숨죽이고 살아온 것입니다. 그때 살아남은 소수의 연약한 기브온 무리들은 눈물과 고통의 세월을 살았던 것이지요. 한을 품고 인고의 세월을 살았던 거예요.
그들은 힘없고 연약한 무리들이기에 어디에도 자기들의 억울함을 호소할 수 없었고, 세상을 원망하며 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신음소리를 듣고 계셨던 거지요. 그리고 그들의 신음소리를 외면치 않으신 겁니다. 영원히 덮어져버릴 수밖에 없었던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하나님은 기억하셨던 것이지요. 어쩌면 사울 왕의 정권 밑에 있었던 사람들은 그것이 죄가 되는지조차 모르고 살았을 것입니다. 그동안 그들에게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세월은 흘러 정권도 바뀌었습니다. 아무 일 없이 조용히 역사 속에 묻혀지고 말았을 법한 일이었지요. 그래서 아무도 그 일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런데 그 미제의 사건이 수면위로 드러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잊혀진 과거사를 기억하고 계셨거든요.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죄악을 그냥 넘어가지 아니하시는 분이십니다. 사람들은 종종 말합니다. 세상에 완전범죄는 없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회개치 않는 죄를 대충 넘어가지 않습니다. 반드시 물어 오십니다. 물론 순간순간 회개의 기회를 주시고 용서받기를 원하시지요. 그러므로 죄악이 생각나는 것이 은혜입니다. 회개의 기회가 주어진 것이거든요. 그동안 기브온 거민들의 원한이 하늘에 사무쳤을 것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슬픈 역사를 이스라엘은 잊어버렸지만, 하나님은 기억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들의 신음소리가 하늘에 사무친 것이요, 그들의 원한이 하나님께 상달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원통한 자의 소원을 외면치 아니하십니다. 약한 자의 신음소리를 외면치 아니하십니다. 우리는 이 사건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성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따라해 보십시다. ‘하나님은 결코 용서받지 못한 죄를 덮어두지 아니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언약에 신실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원한 맺힌 신음소리를 반드시 들어 주십니다’.
(2) 다윗의 책임(3~14절)
다윗과 사울은 질적으로 다릅니다. 다윗은 마음이 넉넉하고 스케일이 크고, 겸손하며 남을 배려할 줄 아는 왕이었지만, 사울은 속이 밴댕이처럼 좁고, 꼬장꼬장하고, 겸손한 구석도 없고 기회주의적이며, 무엇이든지 자기밖에는 모르는 제왕적 왕이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본문을 통해 약간의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왜 죄는 사울이 범하고, 벌은 다윗이 받느냐’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사고는 사울이 치고 책임은 다윗이 지냐는 것’이지요. 직접적인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말이지요.
거기에는 신학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당신을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출20:5).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라는 말은 이스라엘을 친히 경영하시고 통치하신다는 말입니다. 무엇보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당신의 방법으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십니다. 한마디로 이스라엘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분명한 원칙이 있다는 말이에요. 이른바 연대의식입니다. 공동체의식이지요.
하지만 저는 단순하게 받은 은혜가 있습니다. 우리말에 “쇠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있지요. 한마디로 하나님과 통하지 않는 사울과 더 이상 상종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의 의중을 누구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다윗과 이 문제를 해결을 하고 싶어 하신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더 깊은 뜻은 될 놈을 밀어주자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는 말이 있지요? 그만큼 하나님은 다윗을 신뢰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그래서 다윗 시대 년부년 삼년 기근을 단순하게 징계로만 볼 수 없다는 말이에요.
다시 말해 사울 왕 시대 몰락에도 원인이 있고, 다윗 시대 흥왕에도 원인이 있지요. 다른 말로 하면 다윗 시대의 축복을 열어주시기 위해 사울 시대의 막혀진 죄악의 담을 무너뜨리자는 거예요. 죄악의 잔재를 청산해 버리자는 거지요. 예를 들어, 육체의 건강이 무너진 것도 어딘가 육체가 병이 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아픈 곳을 찾아서 치료해야 건강이 회복됩니다. 그래서 아프지만 의사는 칼을 들고 아픈 곳을 도려내는 수술을 하는 것입니다. 잠간의 고통은 장차 주어질 건강을 위함입니다. 의사가 칼을 든 것은 환자의 건강 때문이잖아요.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다윗 시대를 복주시기 위해서 막혀진 담을 찾은 것입니다. 그 담은 사울이 저질렀던 죄악의 담이었어요. 아무도 그 담이 자기들의 축복을 가로 막고 있었는지를 몰랐던 거예요. 그러나 그 담은 반드시 무너뜨림을 받아야 담이었던 거예요. 다만 다윗 시대에 그 담을 찾으신 것은 하나님이 그만큼 다윗 왕을 지켜주시고, 다윗의 시대를 복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년부년 삼년기근이 다윗 시대에 찾아온 것이 얼마나 큰 다행이고 큰 은혜냐는 말입니다. 이것이 믿음 안에서 이해되고 받아드려지는 사람이 복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이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이신 것을 믿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이 모든 일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가장 필수적인 조건이 있어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성경말씀은 좋아하면서 쉽게 놓치는 부분이 있거든요. 조건은 이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씀을 대부분 들으려고 하지 않고 말하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 아니에요.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어 사는 자들에게 하나님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분이에요.
그러므로 년부년 삼년 기근은 사울 왕의 감추어진 죄악을 폭로하는 동시에 다윗 왕의 시대를 복주시고 하는 하나님의 각별하신 뜻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으시면 안되요. 분명히 우리는 본문에서 사울의 감추어진 죄를 해결하사 다윗을 통해 그 땅을 회복하고 싶어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거기까지 보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이에요. 그러므로 다윗의 시대에 사울 왕이 저지른 막혀진 죄악의 담을 헐어주시는 하나님이 얼마나 고마우신 하나님이신가를 깨닫는 사람이 믿음의 사람인 거예요. 그 사람은 절대 범죄한 사울의 죄악을 왜 다윗에게서 찾으시냐고 반문하지 않고 따지지도 않습니다.
그저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랑에 감사할 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문제를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구하여 하나님의 방식으로 풀어가는 다윗의 성숙한 믿음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감동과 도전을 주는지 모릅니다. 사실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억울하고 원통한 일이지요. 자기 통치기간에 일어난 일도 아님에도 불구하고 전임자의 과오를 자신이 책임지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억울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아마도 우리 같으면 난리가 났을 겁니다. 억울하고 원통하다고 불평과 원망을 쏟아냈을는지 모릅니다. 사울의 뒤치다꺼리를 왜 내가 해야 하냐고 말이지요.
우리는 정권이 바뀔 때마다 개혁과 과거사 청산이라는 미명하에 전임자에 대한 허물을 들추어 은근히 정치적인 보복을 감행하는 것을 숱하게 보아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 국민들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모습입니다. 우리나라 정치 역사는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어 왔거든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가 언제 끊어질지 모릅니다. 어쩌면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모두가 도토리 키재기 아닌가요? 다들 오십보백보예요. 그런데 다윗은 전임자였던 사울 왕의 잘못을 마치 자기 잘못인 것처럼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마음이지요.
3절을 보십시오. 다윗 왕이 기브온 사람들을 불러서 묻습니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내가 어떻게 속죄하여야 너희가 여호와의 기업을 위하여 복을 빌겠느냐”. 역시 다윗은 하나님의 종이요, 큰 인물입니다. 다윗은 사울이 저질렀던 죄악을 자신의 잘못으로 받아 드립니다. 억울하거나 부당하다고 하소연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이 어떻게 속죄하여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잘못된 왕이라면 힘으로 밀어붙이든지, 그들의 의견을 일언지하에 무시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는 전임자의 죄악을 자신의 책임으로 수용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인의 자세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일이 터지면 책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들은 모른다고 발뺌합니다. 다윗은 얼마나 멋있습니까? 너무 당당하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이런 다윗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을 합한 자로 여겨주신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겸손하게 책임을 통감하는 다윗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이 다윗을 상대하고 싶어 하셨는지 모른다는 말이에요. 다윗을 책임 있는 당사자로 인정해 주신 것이지요.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우리는 에스겔 선지자에게 명령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자야,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세웠으니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을 깨우치라”(겔3:17). 그러나 말씀을 전했는데도 불구하고 수용치 않아 죽으면, 악인은 자기들의 죄 값으로 인하여 죽을 것이나, 말씀을 전하지 않아서 멸망당하면 선지자에게 그 핏 값을 치르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책임 있는 자의 자리가 무거운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입니다.
말단에서 일어난 잘못된 일 때문에 최고의 지위에 있는 윗사람들이 옷을 벗는 경우가 그런 예입니다. 예를 들어 군대에서 총기사고가 나면 상급기관 지휘관이 군복을 벗고 면책을 당합니다. 자식이 학교에서 잘못하면 부모가 책임을 지게 됩니다. 왜냐면 그들은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도 다윗을 책임 있는 당사자로 여기신 것입니다. 때문에 감사할 일이지요. 그만큼 인정받는 위치에 있으면 책임의 분량이 커지는 것입니다. 아무튼 하나님은 책임 있는 당사자로 사울을 택하지 않으시고 다윗을 당사자로 지목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영적 성숙함 때문이 아닐까요? 그만큼 하나님이 다윗을 신임하신 것이지요.
(3) 하나님의 응답
이제 다윗이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자기방식과 하나님의 방식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이미 하나님의 방식으로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물론 다윗도 과거에는 자기방식으로 살다가 하나님으로부터 혼쭐이 났던 경험이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을 이기지 못하여 바람도 피웠고, 권세를 남용하여 사람도 죽여 보았으며, 교만하게 인구조사를 해서 홍역을 치르기도 했습니다. 다윗은 자기 방식이 얼마나 무모하고 미련하고 더러운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아픔을 겪으면서 많이 성숙되어졌습니다. 그래서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말도 있잖아요.
다윗은 더 이상 자기 방식을 고집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방식이 최고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다윗은 년부년 삼년 기근 앞에서 사람을 찾지 않았습니다. 천문학자들을 불러서 천기를 알아본다거나, 혹은 점성술사들을 찾아서 시대의 흐름을 물어보지도 않았습니다. 혹은 왕의 권한을 가지고 참모들과 의논하지도 않았습니다. 왕의 권세로 기브온 사람들을 밀어붙이거나 겁박하지 않았으며, 돈으로 그들을 매수하거나 그들의 진정성을 뭉개버리지도 않았습니다(4절). 한마디로 다윗은 기브온 사람들 앞에서 자신이 죄인인 것처럼 공손했습니다(3절).
본문에서 다윗이 취한 하나님의 방법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기브온 사람들의 신원을 들어주는 방법입니다. 그들의 원한을 풀어 주는 것이지요. 우리 하나님은 작은 신음에도 응답해 주시는 분이시거든요. 특히 하나님은 의지할 것 없는 고아와 과부, 나그네, 약자들의 보호자이십니다. 하나님은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을 풀어주시기 원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에게 원이 되고 한이 되는 것이 있으면 하나님께 아뢰면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작은 신음도 다 듣고 계시거든요. 때가 되면 하나님은 원통함을 풀어주십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 왕 가문의 과거사를 깨끗하게 청산하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지금 살아 있는 사울 왕 가문의 자손 일곱을 자기들의 손에 내어달라는 것입니다. 자기들이 그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달겠나이다’(6절)고 소청한 것이에요. 이것은 기브온 사람들의 한순간의 보복이나 감정적인 요구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일곱명을 목매달아 죽이겠다고 해도 하나님이 제재하시거나 막으시지 않으심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허락하심입니다. 이유는 하나님께서 사울 왕이 저지른 죄악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사울의 가문에서 색출된 일곱 명의 자손들은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임을 알려주시는 동시에 하나님의 진노를 진정케 하는 속죄제물의 성격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심판은 구약 율법의 십계명중 제2계명에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로 볼 때 사울 왕의 후손에 대한 징계는 결코 부당한 징계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근한 예를 성경에서 한 가지만 찾아보겠습니다. 열왕기하 23장 26절과 27절을 보면, 요시야 왕 시대에 하나님이 유다를 향한 당신의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시 요시야 왕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며 힘을 다하여 모세의 모든 율법을 온전히 준행한 이스라엘 왕 가운데 비교적 선한 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당신의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신다고 선포하십니다. 요시야 왕의 선행을 생각해서라도 진노를 풀어주실 것 같지만 ‘유다를 향하여 진노하신 그 크게 타오르는 진노를 돌이키지 아니하신다’고 말씀하신 의도가 무엇일까요? 이유는 ‘...므낫세가 여호와를 격노케 한 그 모든 격노를 인함이라’(왕하23:26)고 말씀하십니다. 한마디로 선왕 므낫세의 죄악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기브온 사람들의 청원대로 사울 왕 가문의 일곱 자손이 여호와 앞에서 처형을 당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산 자와 죽은 자의 증인이 되신 것이지요. 자기들의 죄 값으로 죽은 사울 왕의 일곱 자손과 애매하게 고통을 당하며 신음하며 살아온 기브온의 산 자 사이에 하나님이 증인이셨던 것입니다. 분명히 이 문제를 통해 하나님은 죄인은 공의대로 심판하시고, 의인은 사랑으로 보상해 주신다는 원칙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한마디로 이번 사건의 피고는 언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사울 왕이요, 애매한 고통을 당한 기브온 사람들이 원고였습니다. 하나님은 원고 측의 손을 번쩍 들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우리 함께 14절을 읽어보십시다. 물론 일곱 명의 사울의 자손을 처형하자마자 기근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닙니다. 다윗왕의 명대로 좇아 행한 후에 모든 문제가 일단락 된 것이지요(14절). 다윗의 명령은 곧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구했고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것이니까요. 결국 다윗의 방법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던 것이지요. 이른바 하나님의 뜻대로 행한 후에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셨던 것입니다. “…그 후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으시니라”(14절하). 이른바 기근이 멈추었다는 말이지요. 하나님의 진노가 풀린 것이에요.
왜 하나님이 그 땅을 위하여 기도를 들어주셨을까요?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이루어져야 역사하십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이스라엘이십니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살아가는 땅을 회복하심도 하나님의 뜻입니다. 하나님이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그 땅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 땅에 대한 회복은 우리에게 이중성을 보여주지요. 이른바 그 땅에 거하는 백성들의 두 가지의 신음소리를 동시에 만족케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는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 맺힌 신음소리를 풀어주심이고, 또 하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근에 대한 신음소리를 풀어주심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시대 이스라엘 땅에 들려오던 두 종류의 신음소리를 외면치 않으시고 들어주신 거지요. 풀어주신 거예요. 하나는 공의의 방식으로 풀어주시고, 또 하나는 사랑의 방식으로 풀어주신 것이지요. 기브온 사람들의 원한은 공의로 풀어주시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기근은 사랑으로 풀어주신 것이에요. 하나님은 이처럼 당신의 두 가지 성품을 적절하게 우리 가운데 적용하시는 분이십니다. 때마다 일마다 적당하게 적용하십니다. 그러므로 기억하십시오. 모든 문제에는 원인이 있고, 그 원인이 제거된 후에 하나님이 목적하시는 뜻을 이루어주신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때문에 문제가 생기면 문제만 보시지 마시고, 문제보다 크신 하나님을 보시기 바랍니다. 다시 말해 문제 뒤에 감추어진 원인을 찾으라는 말이에요. 그리고 그 문제를 통해서 역사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찾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그러면 좋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선한 역사를 반드시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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