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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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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백곡 김득신 ... 조선 최고의 독서광
이장희 추천 0 조회 1,984 14.09.13 14: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김득신                         김득신

 

 

 

 

 

 

 

김득신(金得臣. 1604 ~ 1684)은 조선 중기의 시인(時人)으로 본관은 안동(安東), 자(字)는 자공(子公), 호(號)는 백곡(栢谷), 귀석산인(龜石山人)이며, 임진왜란 당시 진주목사(晉州牧使)로 진주대첩(晉州大捷)을 이끌었던 충무공 김시민(金時敏)의 손자이자 부제학 안흥군 김치(金緻)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사천(泗川) 목씨(睦氏)로, 그의 아내는 경주 김씨이다. 그의 호(號) 백곡(柏谷)은 그의 세거지인 목천(木川)의 백전리(柏田里)에서 딴 것이고, 고조부인 김석(金錫)이 사화(士禍)를 피해 괴산(槐山)으로 이거(移居)하게 되면서 그의 후손들이 이곳에 정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의 생애

 

 

 

 

그는 1642년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당시 ' 한문 4대가 (漢文 四大家) '인 이식(李植)으로부터 ' 그대의 시문(詩文)이 당대 제일 '이라는 평을 들음으로써 이름을 세상에 알렸다. 현종 3년인 1662년에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 장악원(掌樂院) 정지제교(正.知製敎) 등을 거쳐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동중추부사(同中樞府事)를 지냈다. 그는 뒤늦게 벼슬에 올랐으나  장차 일어날 사화(士禍)를 예견하고 벼슬을 버리고 괴산읍(槐山邑) 능촌리에 있는 ' 취묵당(醉默堂) '에 내려와 시인(詩人)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74섹 되던 해에는 사도시정으로 증광시 시험관이 되었고, 78세에는 통정대부(通政大夫)가 되었으며, 80세에는 가선대부에 올랐고 안풍군(安豊君)을 습봉(襲封 .. 물려 받음)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81세에 생(生)을 마쳤다.

 

 

 

김득신(金得臣)은 노둔(魯鈍)한 천품(天稟)에도 불구하고 후천적(後天的)인 노력을 통하여 시(詩)로 일가(一家)를 이룬 ' 고음과 다독 (孤吟과 多讀) '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 노둔(魯鈍) '이라 함은 지능지수가 낮아 이해력이나 습득력이 낮고, 독립하여 생활을 영위하는 책임있는 개인으로서 사회 생활에 적응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는 경세치평(經世治平)이라는 유가적(儒家的) 이상(理想)을 당쟁(黨爭)의 현실 속에서 실천하지 못한 번뇌(煩惱)를 토로하기도 하지만, 진보적인 시의식(詩意識)을 가지고 중세에서 근세로 가는 변천기에 활동하였던 문예담당자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실제 그는 창작활동의 소산으로 주옥같은 시(詩)를 남겼는가 하면 한시비평(漢詩批評)의 기준을 마련한 비평가(批評家)로 우리나라 한묵학사에 확호하게 자리잡고 있는 인물이다.    

 

 

 

 

 

 

 

 

 

 

 

 

 

 

 

 

 

 

 

 

 

 

 

 

 

김득신(金得臣)은 우리나라나 한시사(漢詩史)에서 ' 맑고 아름다운 시(시) '를 쓴 시인(詩人)으로 이름이 높다.  당시 한문 사대가(四大家)의 한 사람인 이식(李植)으로부터 ' 그대의 시문(詩文)이 당금(當今)의 제일 '이라는 평(評)을 들음으로써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그는여러 차례 낙방(落榜)의 고배를 맛보다가 59세의 늦은 아이에 증광시(增廣試) 병과에 급제하는 것으로 일생의 숙원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대기만성(大器晩成)인 셈이다. 이때의 감회를 ' 한유(韓逾 ... 중국 당나라의 문인이자 사상가)의 글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천 번이나 읽었거늘 이제야 겨우 진사과(進士科)에 붙었네 '라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벼슬길은 순탄하지 않았다. 홍천 현감(縣監)과 정선 군수(郡守)에 제수되었으나 대신(大臣)들의 ' 김득신(金得臣)은 시인(詩人)일 뿐, 일에는 소활해서 적임자가 아니다 '는 의견으로 부임하지 못하였고,  사헌부 장령(掌令)에 두 번이나 제수되었으나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탄핵(彈劾)되었다. 그는 과거(科擧) 급제한 즈음에 괴산(槐山) 농촌 방아재로 가서 선산이 있는 개향산 자락에 ' 취묵당(醉默堂) '이라는 정자를 지었으며 이듬해에는 초당(草堂)을 짓고 그곳에서 자연(自然)과 벗하며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하였다.   

 

 

 

 

                                                       머리가 나빴던 김득신

 

 

 

 

그러니 김득신(金得臣)은 타고난 천재(天才)로 시(詩)를 쓴 시인이라기보다는 후천적(後天的)인 단련으로 좋은 시(詩)를 남긴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김득신은 태어날 때부터 머리가 나빴던 것으로 보인다. 10살이 되어서야 겨우 글을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십구사략(十九史略) '의 첫 단락이 26자(字)에 지나지 않았지만 사흘을 배우고도 9자(字)를 떼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는 2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글 한 편을 지어 올리자 아버지는 ' 더 노력하여라. 공부란 반드시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서 하는 것은 아니다 '라고 격려했다고 한다. 뒤늦은 나이 59세에 과거(科擧)에 급제하여 성균관에 들어간 뒤에도 길을 걸을 때나 앉아 있을 때나 남들과 이야기할 때도 언제나 옛글을 외우지 않은 적이 없었다. 밤에 잘 때에도 늘 머리맡에 책을 두고 잤다. 그 까닭을 물으니 ' 잠에서 깨어 가만히 손으로 책을 문지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고 대답하였다. 

 

 

역대의 시화(詩畵) 속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둔재(鈍才)와 무식(無識)한 노력이 전해지고 있다. 홍한주(洪翰周)의 ' 지수점필(智水岾筆) '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김득신은 지혜가 부족하고 재주가 몹시 노둔(魯鈍)하였는데 외어 읽기를 몹씨 부지런히 하였다. 독서록(讀書錄)이 있었는데 1,000번을 읽지 않은 것은 기록에 올리지도 않았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중에 백이전(伯夷傳) 같은 것은 1억(億) 3천 번을 읽기에 이르렀다. 한번은 말을 타고 어떤 사람 집을 지나가는데, 책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말을 멈추고 한참 동안 듣더니 이렇게 말했다. ' 이 글이 아주 익숙한데, 무슨 글인지 생각이 안나는구나 '고 그랬더니 말고삐를 끌던 하인(下人)이 올려다보며 ' 이것은 나으리가 평생 읽으신 것이니 쇤네도 알겠스비다. 나으리가 모르신단 말씀이십니까요 ? '고 하였다. 김득신(金得臣)은 그제서야 그 글이 백이전(伯夷傳)임을 알았다. 그의 노둔(魯鈍)함이 이와 같았다. 하지만 만면(晩年)에는 능히 시(詩)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백이숙제 (伯夷叔齊) ...  은(殷)나라 제후 고죽군(孤竹君)의 두 아들 백이(伯夷)와 숙제(叔齊)를 말한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공격하려는 것을 말리다가 무왕(武王)이 듣지 않으니,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숨어 살다가 굶어 죽었다. 이제(夷齊) .. 백이(伯夷)는 성(姓)이 묵(墨), 이름은 윤(允) 그리고 시호가 이(夷)이고, 숙제(叔齊)는 이름이 지(智), 시호가 재(齋)이며, 형(兄)이니까 ' 백(伯) ' 그리고 동생이니까 ' 숙(叔) '을 붙인 말이다.      

 

 

 

 

 

 

위에 언급한 독서록(讀書錄)은 다름아닌 ' 독수기(讀數記) '이다. 그의 나이 31세 때부터 67세까지 36년 동안 고문(古文)을 독파한 횟수(回數)를 적은 것인데, 만(萬) 번 이하로 읽은것은 아예 적지도 않았다. 장자(莊子), 사기(史記), 한서(漢書), 대학(大學), 중용(中庸)은 자주 읽었지만 만(萬) 번이 되지 않았기에 싣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독서(讀書)에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음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백이전(伯夷傳)을 1억(億) 1만(萬) 3천(千) 번 읽었다고 하니, 1억(億)은 지금의 10만(萬)을 가리킨다. 그러니 실제로 읽은 횟수는 11만 3천 번이다. 살아온 평생을 아무리 헤아려도 11만 3천 번을 읽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든다. 이것을 자부(自負)해서 자신의 서재(書齋)를 ' 억만재(億萬齋) '라는 당호(堂號)를 내걸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얼마나 머리가 나빴으면 길가다 우연히 들은 백이전(伯夷傳)의 구절을 기억하지 못한단 말인가 ?  또 다음과 같은 일화도 전하고 있다. 

 

 

하루는 김득신(金得臣)이 말을 타고 들 밖으로 나갔다가 도중에 5언시(五言詩) 한 구절을 얻었다. 그 구절은 ' 마상봉한식 (馬上逢寒食) '이었다. 마땅한 대구(對句)를 찾지 못해 끙끙대자, 말고삐를 잡고 가던 하인(下人)이 연유를 물었다. 마땅한 대구(對句)를 찾지 못해 그런다고 하니, 하인 녀석이 ' 도중속모춘 (途中屬摹春) '을 외치는 것이 아닌가 ?  말 위에서 한식(寒食)을 만나니, 도중에 늦은 봄을 맞이하였네 ... 라는 뜻이다. 깜짝 놀란 김득신(金得臣)은 얼른 말에서 내려서 ' 네 재주가 나보다 나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네 말구중을 들겠다 '라고 하고는 하인녀석더러 말을 타게 하였다.  하인은 씩 웃으며 , 사실은 이 구절이 자기가 지은 것이 아니라, 나으리가 날마다 외우시던 당시(唐詩)가 아니냐고 하였다. ' 아 참 그렇지 ! '하며 김득신은 자기 머리를 쥐어박았다는 것이다.       

 

 

 

 

                                                           책벌레 에피소드

 

 

 

 

 

만년(晩年)에 머물렀던 충북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괴강(槐江) 근처에 자리하고 있는 ' 취묵당(醉默堂) '에 걸려 있는 ' 독수기 (讀數記) '를 보면 그는 1634년부터 1670년 사이에 1만번 이상 읽은 옛글 36편을 밝혔는데, 그 회수(回數)가 상상을 초월한다. 그가 평생 1만 번 이상 읽은 글 36편의 목록이 가득 적혀 있다. 여기에는 김득신(金得臣)이  사기(史記) 의 ' 백이전(伯夷傳) '을 무려 1억(億) 1만(萬) 3천(千) 번을 읽었다고 기록되어 있기도 하다.  취묵당(醉默堂)의 다른 이름으로 ' 억만재 (億萬齋) ' 라고 하는 것도 글자 뜻 그대로 김득신(金得臣)이 글을 읽을 때 1만(萬) 번이 넘지 않으면멈추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다. 

 

 

책벌레 김득신(金得臣)의 책읽기에 대한 일화가 우에 적은 사례뿐 아니라 적잖이 전해내려 오고 있다. 김득신이 혼례(婚禮)를 치르던 날의 이야기이다. 김득신이 책(冊)을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장모(丈母)는 소문을 확인하기 위하여 신방(新房)에 있는 책을 모두 치워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첫날밤 김득신 신랑(新郞)은 신부(新婦)를 제쳐두고 방을 뒤지면서 책을 찾았다. 경대(鏡臺) 밑에서 김득신이 발견한 것은 책력(冊曆 ... 달력의 일종)이었다. 그 책을 밤새도록 읽고 또 읽은 김득신은 날이 새자 ' 무슨 책이 이렇게 심심하냐 '고 말했다고 한다. 

 

 

80세가 넘도록 장수(長壽)한 김득신(金得臣)은 먼저 딸을 여의었는데, 분주한 장례(葬禮) 행렬을 따라가면서도 그가 손에서 놓지 않고 보았던 글이 바로 ' 백이전(伯夷傳) '이었다. 또 부인의 상중(喪中)에 일가친척들이 ' 애고 애고 ' 곡(哭)을 하는데, 그는 곡(哭)소리에 맞추어 ' 백이전 '의 구절을 읽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는 재주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그의 자질을 알아본 사람들은 글공부를 포기하라고 권고하기도 했다. 수치요 굴욕적인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책벌레 김득신은 40여년간 꾸준히 읽고 시(詩)를 공부한 끝에 그는 말년(末年)에 ' 당대 최고의 시인 (當代 最高의 詩人) '으로 평가되었다. 그는 스스로 지은 묘지명(墓誌銘)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재주가 남만 못하다고 스스로 한계를 짓지 말라. 나보다 미련하고 둔한 사람도 없겠지만 결국에는 이룸이 있었다. 모든 것은 힘쓰는 데 달려 있을 따름이다.....  無以才不猶  人自畵也  莫魯於我  終亦有成  在勉强而己  

 

 

 

 

 

 

 

 

 

 

 

김득신(金得臣)은 자신이 머리가 나쁜 것을 알아서 읽고 또 읽고 그러다가 아예 통째로 외우기까지 하였다. 또 좋아하는 시(詩)는 외우고 또 외우다가 어느 순간에는 자기가 지은 것으로 착각할 만큼 몰입하였다. 한 번만 보고도 책을 통째로 외웠다고 하는 천재(天才)들은 역사에서 부지기수로 많았지만 그드르이 글은 온전히 전해지는 많지 않다. 조선 시대에 대표적인 둔재(鈍才)로 손꼽히는 김득신(金得臣)은 자신의 재주없음을 한탄하지 않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또 노력하여 결국에는 조선 중기에 빛나는 큰 시인(詩人)이 될 수 있었다. 백곡 김득신과 망년지우(忘年之友)를 맺었던 홍만종(洪萬鍾)은' 백곡 김득신은 재품이 몹씨 노둔(魯鈍)하였는데 많은 독서(독서)로써 밑바탕을 튼튼히 하여 노둔함을 벗어나 재주있는 사람이 되었다 '라고 인물평을 하였다.  다음의 시(詩)는 김득신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진 ' 용호(龍湖) '이다. 

 

 

 

고목한운리   古木寒雲裏    고목(古木)은 찬 구름 속에     /     추산백우변     秋山白雨邊   가을 산 비 내리고   /    모강풍랑기     摹江風浪起   저문 강(江)에 풍랑 일자      /    어자급회선    漁子急回船  어부(漁夫) 는 급히 배를 돌리네 

 

 

 

위의 시(詩)를 두고 홍만종(洪萬鍾)은 그의 글 ' 소화시평(小畵詩評) '에서 ' 이 시(詩)는 일시에 인구(人口)에 회자되었다 '라고 하였다. 또한 수록(搜錄)에는 ' 김득신(김득신)의 용호(龍湖) 한 구절을 보고 효종(孝宗)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시(詩)는 당음(唐音) 속에 넣어도 부끄러울 것이 없다고 하였다 '고 한 기록이 보인다. 실제로 시골 글방에서는 당음(唐音)에 넣어 아이들에게 가르쳤다는 이야기가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시(詩)의 성가를 가늠해 볼 수 있겠다. 효종(孝宗)이 화공(畵工)에게 이 시(詩)의 풍경을 병풍에 그리게 하였다는데, 이 시(詩)에는 당풍(唐風)의 주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 시중유화(詩中有畵) '의 회화미(繪畵美)가 돋보인다. 다시 말하여, 한 편의 그림을 연상하게 한다     

 

 

 

 

 

 

 

 

 

 

 

 

 

 

조선 시대의 사대부(士大夫)들은 대나무 가지에 횟수(回數)를 표시해 가면서 독서(讀書)를 할 정도로, 책을 반복해서 읽고 외우며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김득신(金得臣) 처럼 1만 번을 넘을 정도로 책을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읽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렇게 김득신은 자신만의 특별한 공부 방법을 개발하고 꾸준히 노력하여 남부럽지 않은 학문적 성취와 명성을 얻을 수 있기까지, 그에게 끊임없이 자신감을 불어넣어준 숨은 공로자가 있다. 그 사람은 바로 김득신의 아버지 ' 김치 (金緻) '이었다. 그는 자식의 ' 노둔(魯鈍) '함을 나무라기보다는 오히려 꾸준히 성실하게 공부하는 자세를 남들에게 자랑하였다. 또 과거(科擧)는 커녕 나이가 20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글을 지은 자식을 보고서도, 꾸짖기보다는 반드시 과거(科擧)를 보기 위해 공부를 하는 것은 아니니 더 노력하라는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렇듯 아버지의 변함없는 믿음과 지원 때문에 김득신은 자신감을 잃지 않고 더욱 학문에 열중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학문에 재주가 없으니 글공부를 때려치우라는 주변 사람들의 끊임없는 ' 힐난과 멸시 '속에서도 김득신이 ?굿이 노력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라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취묵당                          醉默堂 

 

 

 

 

 

 

김득신(金得臣)은 여러 차례 과거(科擧) 낙방(落榜)의 고배를 맛보다가 59세의 늦은 나이에 증광시(增廣試) 병과(丙科)에 급제하는 것으로 일생의 숙원을 풀었다. 그야말로 대기만성(大器晩成)형인 셈이었다. 이때의 감회를 ' 한유(韓逾)의 글과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천(千) 번이나 읽었거늘 이제야 겨우 진사과(進士科)에 붙었네 ' 라고 술회하였다. 그러나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벼슬길은 순탄하지 못하였다. 홍천현감(洪川顯監)과 정선군수(旌選郡守)에제수되었으나 대신(大臣)들의 ' 김득신(金得臣)은 시인(詩人)일 뿐, 일에는 소활해서 적임자가 아니다 '는 의견으로 부임하지 못하였고, 사헌부(司憲府) 장령(掌令)에 두 번이나 제수되었으나 적합한 인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탄핵(彈劾)되었다. 김득신은 과거(과거) 급제한 그즈음에 괴산(槐山) 농촌 방아재로 가서 선산(先山)이 있는 개향산 자락에 ' 취묵당 (醉默堂) '이라는 정자(亭子)를 지었으며 이듬해에는 초당(草堂)을 짓고 그곳에서 자연(自然)과 벗하여 유유자적하는 생활을 하였다. 그가 당호(堂號)를 ' 취묵(醉默) '으로 한 것은, 취(醉)하더라도 침묵하여야 한다 ... 는 뜻을 잊지 않고자 함이었다. 만약 취(醉)하여도 침묵하고 깨어서도 침묵한다면 망령된 말을 하지 않아 몸이 재난(災難)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말이 앞서는 시대에 목소리를 높여야 권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는 이 시대에 ' 취묵(醉默) '의 의미가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김득신이 취묵당(醉默堂)을 소재로 쓴 다음의 시(詩)가 있다.  수광청후염    水光晴后艶     물빛은 개인 뒤에 예쁘고          /         산색우중기      山色雨中奇      산빛은 빗 속에 기이하구나    /       즐핵성비역        櫛核誠非易       딱히 뭐라 말하기 어려워        /      오영폐부시   吾寧廢賦詩    내 차라리 시(詩) 짓기를 그만둘까나   취묵당(醉默堂)의 풍광(風光)을 시(詩)로 옮기기 어려워서 차라리 시(詩) 짓는 일을 그만 두겠다고 한  표현이다. 더욱 더 취묵당을 아름답게 드러내고 있다. 간결한 표현 속에 뜻을 다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김득신(金得臣)은 1684년 81세를 일기로 취묵당(醉默堂)에서 생을 마쳤다. 역사상 그 기록에 나타난  그 유례가 드물게 노둔하였지만, 그는 그 노둔(魯鈍)함을 딛고 독서광(讀書狂)이 되어 걸출한 조선 중기의 시인(詩人)으로 거듭났다. 그러한 백곡 김득신(柏谷 金得臣)의 자취가 이곳 취묵당(醉默堂)에 오롯이 전하고 있다. 그가 남긴 ' 독수기 (讀數記) '는 지나가는 시인묵객(詩人墨客)으로 하여금 독서(讀書)의 힘을 새삼스레 느끼게 한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겨 한없이 노력했던 그 흔적은 오만하고 거만한 부류의 사람들을 겸허하게 해 준다.    

 

 

 

 

 

                                              취묵당기                         醉默堂記

 

 

 

 

 

 

 

 

 

내가 선친이 50년 전에 4년 동안 머물렀던 거처에 가고 싶었으나, 과거(科擧)에 급제하지 못하여 평소의 바람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중략(中略) ... 그렇다면 없어서는 안 될 것이 당(堂)의 이름인데  무슨 이름을 걸 것인가 ? 눈에 보이는 것으로 이름을 걸 필요는 없는 것이다. 무릇 세상 사람들은 취(醉)하여도 침묵하지 못하고 깨어도 침묵하지 못하여 재난(災難)의 기틀 속으로 빠짐을 경계할 줄 모르니 근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진실로 취(醉)해도 고요히 침묵하고 깨어도 조용히 침묵하여 입을 병마개 막듯이 꼭 봉함을 일상(日常)의 습관으로 삼으면 반드시 재난(災難)의 기틀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취하여도 침묵하지 못하고 깨어서도 침묵하지 못하여 재난이 발생한다면 어찌 두렵지 않으리요 ! 만약에 취중(醉中)에 침묵하지 못하고 취한 다음에도 침묵(沈默)하지 못한다면, 비록 몸이 들판 바깥에 있다고 하더라도 성곽(城廓)으로 둘러싸인 도시 가운데 있으면서 말을 삼가지 않는 사람과 그 순간을 함께 할 것이다. 이런 까닭에 구당(久堂) 박중구(朴仲久)가 임인년 여름에 네 번이나 편지를 보내어 침묵하지 못한다고 경계하였는데 나는 그를 믿는다. 당(堂)의 이름을 ' 취묵 (醉默) '이라고 한 것은 대개 취하더라도 침묵해야 한다는 뜻을 잊지 않고자 함이다. 만약에 능히 취하여서도 침묵하고 깨어서도 침묵한다면 망령된 말을 하지 않아 몸이 재난을 면할 수 있다면 이는 박중구(朴仲久)가 준 것이니, 어찌 그가 나를 경계(警戒)한 뜻을 저버린 것 이리요 ?      

 

 

 

 

 

 

 

 

 

 

 

 

 

                                                   백득독광          안철지면             

                                                   伯得讀狂          眼徹紙面

 

 

 

 

김득신(김득신)은 독서광으로, 눈빛이 종이를 꿰뚫을 정도로 책을 읽었다.' 백득독광(백득독광) '은 조선현종(顯宗) 시대의 문신이자 시인(시인)으로이름을 날린 백곡(백곡) 김득신(김득신)이 당대 최고의 독서광(독서광)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말이다.  김득신이 얼마나 지독한 독서광이었는가 하는 기록은, 그의 개인 문집인 ' 백곡집(백곡집) '에 실려 있는 여러 편의 독수기(독수기 ... 책을 읽은 횟수를 적어 놓은 글)를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다.  

 

 

 

 

 

 

 

 

 

 

 

 

 

 

 

 

 

 

김득신(金得臣)은 1684년 81세를 일기로 취묵당(醉默堂)에서 일생을 마쳤다. 역사상 유례가 드물게 노둔(魯鈍)하였지만, 그 노둔함을 딛고 독서광(讀書狂)이 되어 걸출한 조선 중기의 시인(詩人)으로 거듭난 ' 백곡 김득신 (伯谷 金得臣) '의 자취가 취묵당(醉默堂)에 오롯이 전하고 있다. 시인(詩人)을 가고 없지만, 그가 남긴 ' 독수기(讀數記) '는 지나는 시인묵객(詩人墨客)으로 하여금 독서(讀書)의 힘을 새삼스레 느끼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기여 한없이 노력하였던 그 흔적은 오만하고 거만한 부류의 사람들을 겸허하게 해 준다.   

 

 

 

 

 

                                                백곡집                       栢谷集

 

 

 

 

 

 

 

 

  

 

 

김득신의 시문집(詩文集)이다. 7책으로 필사본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인조(仁祖) 14년인 1636년, 병자호란과 화재로 유실되고 남은 것들을 수습하였다. 백곡집 제 1책 권두에는 이서우(李瑞雨), 박세당(朴世堂)이 1686년과 1687년에 각각 쓴 서문에 이어서 오언절구(五言絶句) 253수(首)와 육언시 7수가 있다.  백곡집의 특징은 시(詩)가 그 대종을 이루고 있다. 각체의 시(詩)를 합하면 모두 1,541수(首)가 된다. 문(文)은 186편이다. 이것은 김득신(金得臣)의 문학적 업적을 논함에 있어서 시인(詩人)으로서의 위치를 굳게 하는 결과가 될 것이다. 그의 시(詩) 가운데 칠언시(七言詩)가 압권을 이루고 있는 것은 역대의 평자(평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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