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소설
가난해서 외롭고 말할 수 없어서 우울한
서영은의 중편소설 <시인과 촌장>
〈시인과 촌장〉은 《창작과비평》이 강제 폐지되던 1980년 여름호에 발표된 서영은의 중편소설로 가난했던 1950년대 강릉을 배경으로 한 작품이다. 소년기 화자의 시선에서 포착된 세계는 지루하고 암울하고 어둡고 퀴퀴하고 참담하기조차 하다. 자잘한 사건들로 구성되었으며 그 속에 담긴 상징적인 에피소드는 소년의 용기가 조금씩 커져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소소한 재미들이 더해져 긴장감과 함께 결미의 반전에 힘을 보태준다.
동회 사무실 서기 보조원인 아버지는 생활력이 부족하다. 빈대떡을 구워 파는 술청에서 등에 냄비를 집어넣고 꼽추 춤을 추면서 술이나 얻어 마시는 신세이다. 능력 없는 남편한테 시집온 것을 한탄하며 가난이 지긋지긋한 어머니는 새로 이사 들어오는 옆집 여자 등쌀에 심기가 불편하다. 울타리를 세워달라는 요구를 들어줘야 하는데 그러려면 두 집이 공동으로 사용하던 우물이 그 집 쪽으로 넘어 가는 게 문제이고 무엇보다도 울타리를 세울 비용이 없어 더 문제가 된다. 남편을 닦달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다는 건 그녀가 먼저 안다. 이 부부 사이에 두 아들이 있는데, 형제는 내내 대립된 시간을 걷는다. 소설은 세상을 감각적으로 바라보는 주인공인 소년 석이와 지극히 현실적인 눈으로 세상과 맞대응하는 그의 형 욱이의 모습을 대표적으로 담고 있다. 소년은 나약하고 소심하나 낭만적인 ‘시인’으로, 형은 현실적 세계와 끊임없이 충돌하면서 갈등하는 ‘촌장’으로 상징된다.
또래 아이들보다 성숙해 보이는 무리들 사이에 끼고 싶은 소년은 형한테 훔쳤다며 반짝거리는 뱃지 두 개를 대장이라 불리는 철구에게 바치지만 그것이 신통치 않자 자신을 때려보라며 무모한 제안을 한다. 아무리 때려도 자기 뺨은 가죽이 세서 아프지 않다고, 또 아무리 아프게 때려도 자신은 울지 않는다며 무리에게 몸을 내던진다. 얼굴이 퉁퉁 붓고 피투성이가 되도록 맞아도 소년은 웃기만 한다. 그런데도 무리들은 소년에게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것도 크게 먹히지 않자 소년은 재판소마당에서 본 무서운 강도 이야기를 꺼낸다. 낡은 창고에 살인을 저지른 강도들이 갇혀 있는데 “얼굴이 새하얗고 수염이 고릴라처럼 많이 났다”면서 “푸른색 푸대자루 같은 옷을 입고 순경한테 끌려”가는 걸 봤다고 ‘구라’를 친다. 대장과 무리들이 그때서야 혹해서 소년을 따라 재판소로 간다. 하지만 아무도 죄수들이 갇혀있다는 낡은 창고를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대장도 겁이 났던지 소년을 무섭게 다그친다. 겁에 질려 간신히 창고 안을 들여다 본 소년은 그 안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쿡, 하고 웃음이 비어져 나온다. 다시 한번 쿡, 하고 웃음이 나오려했을 때, “자기가 열 살은 더 나이가 든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순간 이전의 세계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장과 부하들도 조무래기들에 불과했다.
소년은 자신이 어른이 된 기분이 들면서 지금까지 어머니 심부름조차도 무서워서 하기 싫었던 ‘미친 놈’ 집에도 가보고 싶다. 그날은 늘 열쇠가 채워졌던 ‘미친놈’방 문이 열리면서 더벅머리 총각이 걸어 나와 사랑했던 순이누나가 죽어서 자신이 아픈 거라고 묻지도 않는 말을 한다. 갑자기 나타난 총각 아버지인 지게꾼 노인한테 쫓겨나온 소년은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저렇게 아플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된다.
이것 말고도 재판소 낡은 창고 사건 이후 소년의 세계는 계속 달라진다. 새로 이사 온 정자네 벙어리 언니에게 동정을 바친 날, 비틀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소년은 아버지가 “일년치 동회비를 몽땅 제 주머니 속에 슬쩍” 했다는 이유로 동네 아저씨들한테 맞는 걸 목격한다. 형은 ‘분통이 터져’ 아저씨들을 공격했지만 소년은 피투성이가 된 아버지를 부축해 들어오는 형을 마루 밑에서 “몽롱한 시선으로” 내다볼 뿐이었다.
그날 저녁 무렵 분을 삭이지 못한 형은 어머니의 장독대 밑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고 밖으로 뛰쳐나간다. 소년도 집에서 나와 정자언니에게 동정을 주었던 그 집으로 “자석에 이끌리듯” 다시 가보지만 정자언니는 밤이 깊도록 나타나지 않는다. 깊은 외로움을 느끼며 집으로 와 잠이 들 때쯤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형한테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피 냄새를 맡는다. 그것은 “한쪽 다리를 그의 연약한 영혼위에 올려놓고 있는 듯”한 형의 기운이었다.
다음날 소년은 노인이 지게에 멘 시커먼 관이 골목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바라보며, “형, 나도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면서 소설은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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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살았던 동네는 적산가옥이 밀집돼 있는 곳으로 강릉중앙시장과는 2킬로미터쯤 안쪽 거리에 있으며 소년의 학교와 재판소와도 얼마 떨어지지 않은 지점인 임당동에 위치해 있다. 마을 어귀 공터 어디쯤에 차를 세워두고 큰길 따라 시간을 풀어둔 채로 천천히 걸어갔다. 이왕이면 어둠이 스멀스멀 내릴 때쯤 “대낮에도 어둠침침”한 큰길 쪽으로 “늘 퀴퀴한 시궁창 냄새가” 나는 골목길을 따라 집들이 차곡차곡 박혀있는 동네를, 지나가는 누군가에게 수첩에 적어온 주소를 물으며 옛날 사람처럼 조금은 헤매기도 하면서 찾아가볼 참이었다. 잘 보이지 않을 때는 언덕을 올라가서라도, 어느 집 계단참에 서서라도 소년의 집 어디쯤을 짐작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오가는 사람도 없고 차들도 속도를 내며 쌩쌩 내달렸다. 횡단보도는 백여 미터 이쪽과 저쪽에 나란히 놓여 있었고 태양은 머리 위에서 사정없이 작열했다. 6월의 태양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뜨거운 열기가 어느 집이라도 밀고 들어가고 싶도록 지열을 달궜다. 저만치 왼쪽으로 강릉역이 내려다보이고 또 저 멀리 남대천 건너 하늘 끝 푸른 지점이 바다라고 느껴질 정도로 푸르게 흔들거렸다.
왕복 2차선 도로를 오르락내리락하다가 도로 어디쯤 소년의 집으로 가는 골목 입구를 찾은 듯싶었다. “그 골목은 유난히 좁고 길었다.” 얼기설기 밖으로 맘껏 뻗어 있는 전선과 “대낮에도 어둠침침”한 그곳은 계획 같은 건 애당초 세우지 않은 듯 불규칙한 크기의 돌계단과 경계가 없는 담벼락과 칙칙한 지붕 색과 여러 가지 균형이 맞지 않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퍼즐 맞추듯 끼운 듯한 건물들로 가득했다. 세워진 전신주는 어떤 행위예술가의 위험천만한 퍼포먼스를 보는 것만큼이나 아슬아슬했다. 그렇더라도 한편으론 예술적이고 또 다른 한편으론 역사가 될 것 같은 구조 속에서 소년이 살았던 동네가 주는 이미지는 편리 이전의 목적처럼 당당해보였다. 밀집해 있는 지붕들이 너와집같이 겹겹이 덮여 얼핏 보면 하나의 형체로 보이기까지 했다. 멀리 현대식 아파트와 예전의 집들과 당시의 재판소가 일시에 같은 하늘을 이고 서 있는 듯한 그림은 묘한 느낌마저 불러왔다. 어둡고 우울한 기운, 우중충한 하늘이 바람 한점 없이 6월의 한낮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날 아침 나는 강릉을 향해 길을 나서며 오래전 계획했던 여행에 기대감이 앞섰다. 소설 속 주인공인 소년을 만나고 싶었던 것. 시간과 공간은 딱히 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그와의 만남이 반드시 이루어졌으면 하고 바랐을 뿐이었다. 한번쯤 어느 시점에서, 그렇게 스치기라도 하듯 그를 만나보고 싶었다. 아마도 그것은 배고픔에 지친 소년이 “학교에 다녀오자마자” 그 속에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습관처럼 “솥뚜껑을 열어보고, 찬장을 뒤”지는 행위가, 그래봤자 누룽지 한 덩이도 없었던 가난했던 그의 집 풍경이 시대도 상황도 맞지 않은 나의 유소년기와 겹쳐져 떠올랐던 때문인지도 모른다. 또한 같이 놀아줄 친구도 무엇도 없이 툭하면 벽장 안이나 등을 따갑게 찌르던 향나무 사이 길을 쪼그리고 앉아 오리걸음으로 걸어 다녔던, 아니면 마루 밑에 엎드려 참새들이 마당가 담벼락 사이를 오가며 모래부스러기 따위나 쪼는 걸 아무렇지 않게 지켜보면서 가지 않는 시간을 보내곤 했던 나의 그때와 겹쳤던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바랐던 소년과의 조우는 그 어떤 일 앞에서도 결코 무너지거나 비겁하게 타협하지 않는 당당한 모습이었는지도 모른다.
잘 알려져 있듯 가수 하덕규와 오종수는 소설 〈시인과 촌장〉 제목을 차용해 1981년 ‘시인과 촌장’으로 포크그룹을 결성한다. 이들은 소설이 그리고 있는 “우울한 유년의 풍경이 당대의 암울한 시대와 호응되는 분위기가 있어 동명의 소설 제목을 그룹명으로 삼았다”고 고백한 바 있다. 이후 ‘시인과 촌장’은 대학가나 술집 등의 상호로 인기를 얻었고 그 이름은 낭만의 대명사가 되었다. 이 소설은 서영은 중단편 전집3-《시인과 촌장》(도서출판 둥지, 1997)에 수록되지만 〈시인과 촌장〉이 원래 소설제목이라는 사실은 가수 ‘시인과 촌장’보다는 덜 알려져서 이 가수들이 유명해질수록 점점 더 사람들 기억에서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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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으로 가는 길을 달리며 내내 소년을 상상했다. 딱 그만큼의 소년의 나이가 그려진 것은 그 나이에 끌리는 나의 기억이 되살아나서였다. 소년이 그랬던 것처럼 그 나이 때의 나도 엉뚱할 정도로 고집스러웠다. 내성적이었고 수줍음이 많았던, 어떤 일이 있어도 속으로만 감추고 마는, 나만의 이야기를 품고 살았던 애어른이기도 했다. 학교가 파하면 시간 위를 방황하며 어두워질 때까지 혼자서 들녘을 헤매곤하였다.
소설 속 이야기가 시작되던 날 소년도 그랬다. 무리에서 떨어져 나와 하릴없이 다른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가는 걸 길 위에서 지켜보다가 느릿느릿 집 쪽으로 발길을 돌렸다. 하루하루가 특별할 리 없는 그저 그렇고 그런 일상으로 느리게 가는 시간을 바라보았다. 머리를 깊이 숙이고 간신히 걸음을 떼어놓는 소를 본다거나 검게 탄 농부가 채찍을 늘어뜨리고 느리게 소를 따라 걸어가는 걸 본다거나 마차가 사잇길로 접어들 때까지 멍하니 넋을 놓고 뒤를 쫓곤 한다거나 그 마차가 지나가고도 오랫동안 귓전에 남아 있는 “뼈를 부비는 것 같은 수레바퀴 소리를” 제 정신을 차리고서도 그대로 환청인 양 듣고 서 있다. 광고지를 뿌리는 국극단의 ‘스리쿼터’를 따라다니기도 하고 재판소 마당에서 손을 뒤로 하고 줄줄이 묶여 이동하는 죄수들을 구경하다가 한 사내가 긴 창槍처럼 침을 뱉을 때는 자신의 심장에 그것이 꽂힌 것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기도 한다.
학교와 시장과 재판소와 집과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아이들의 이동거리는 한 시간 남짓으로 짐작된다. 그 이동거리 안에는 특별하진 않아도 아이들의 놀 거리 볼 거리가 포진 돼 있다. 곡물도매상을 지나 “어른들의 바짓가랑이 사이를 요리조리 뚫고 들어가” 지게꾼들의 싸움을 지켜보기도 하고 고양이울음소리를 따라 가기도 하고. 쌀가마니 틈에서 웅크리고 있는 고양이를 쓰다듬어주기도 하고. 한쪽 눈이 애꾸인 그 고양이가 겁도 없이 자신의 손바닥을 핥아줘도 전혀 싫은 내색을 비치지 않는다. 시대를 막론하고 시장과 골목은 아이들에게 최상의 놀이터이다. 귀신이 나온다는 집은 미친놈이 산다는 ‘미친놈’ 집이다. 두려움에 눌려 도망치다시피 그곳을 벗어나면 소년의 집이 나온다.
집에 도착한 소년은 책가방을 마루에 던져놓고 빈집이란 걸 느끼면서 울컥 치미는 외로움에 깊이 빠져든다. 그러면 언제나처럼 “마루 밑으로 들어가 달팽이처럼 웅크리고 앉아” 사금파리로 물고기 그림을 그렸다. “고기 그림 위에 흙을 덮고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발로 꾹꾹 밟”으면서 엄숙한 예를 다 하는, 엉뚱한 그림을 그리는 소년이었다. 그가 그린 그림을 그의 손가락으로 더듬어 찾아내는 놀이가 예전 내가 했던 어떤 놀이와 비슷했기에 또 다른 나를 만난 듯 신기할 따름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가 떨어지기 전에 나와 닮은 소년을 만나고 싶었다. 대관령을 넘고 바다가 보이고도 한참을 달려 내비게이션에 찍은 강릉의료원에 도착하고도 오랫동안, 나는 소년을 만나지 못했다.
강릉에 도착하고도 바로 소년을 만나지 못한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감자옹심이’로 유명한 임당동의 원조식당에서 한낮의 뙤약볕을 피한 때문이었다. 결국 우리가 만날 시간은 “온 집안에 어둠이 가득 들어차고, 조금씩 어둠이 스며들기 시작”할쯤에야 가능할 듯했다.
오후 세 시쯤. 학교를 파하고 온 그날, 소년의 주린 배만큼이나 나의 배도 등짝에 붙어 있었다. 그늘 한점 없는, 그야말로 햇살이 이글대는, 전혀 문화적이지 않는 ‘문화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뜨거운 길을 걸어 ‘원조 감자옹심이’집으로 비틀거리며 걸어들어 갔다.
활짝 열린 녹슨 대문을 지나 오래된 벽돌 계단을 올라 자개장이 놓여 있는 자그마한 방으로 안내되었다. 이미 한 팀이 식사를 하고 있는 방을 지나 다음 방으로 들어가면서 그대로 방바닥에 널브러졌다. 주문을 받으러 온 아주머니가 불쌍하다는 듯 내려다봤지만 넉살좋은 객은 아무렇지 않게 차림표를 살폈다. 감자옹심이와 칼국수, 그리고 송편이 전부인 곳.
아버지를 부르러 온 소년이 아버지를 부르지도 못하고 해가 지도록 동동거리며 서 있었던 곳은 어디쯤이었을까. 분명 술청이 있었던 곳은 이곳이 아닌데, 소년의 기운을 이곳에서도 느끼고 있었다. 가만히 손짓이라도 하고 싶은데, 밖을 내다보면 더운 바람만 얄밉게 나뭇가지를 만지고 지나갔다. 나의 지갑에는 모처럼 현금이 넉넉했고 할부 가능한 신용카드도 있었다. 얼마라도, 어떤 음식이라도 주문할 수 있는데, 소년은 이곳에 이따금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그랬다.
강릉은 감자 재배지로 최적지이다. 그래서일까, 감자를 이용한 음식이 다양한데 그 중 감자옹심이 식당을 자주 만나게 된다. 어디든 자기네가 원조라고 하지만, 특히 이 집은 강릉본점으로 40년 동안 한 자리에 있었다. 이곳 감자옹심이는 동네사람들에게 대접하는 칼국수에 옹심이를 넣어주면서 출발하였다. 별 것 아니게 생긴 감자옹심이가 오랜 세월 강릉을 지켜낸 또 하나의 역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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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의 법원은 1907년 12월 26일 경성지방재판소 강릉구 재판소로 출발했다. 2년 후에 경성지방재판소 춘천지부 강릉구 재판소로 되었다가 다음 해인 6월, 함흥지방법원 강릉지원으로 개칭되었고 해방이 되면서는 춘천지방심리원 강릉지원으로 개칭되었다. 1948년 6월 1일에는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으로 개칭되었으며, 같은 해 8월 1일에 합의부 지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1년 후인 9월 26일, 법원 조직법을 제정하면서 춘천지방법원 강릉지원이 새로 출범했고 지금의 강릉지원은 1949년에 제정된 법률에 따른 것이다. 지위는 바뀌지 않았지만 법원의 규모가 커지면서 공간은 다소 협소해졌다. 원래 강릉지원 자리는 강릉시 교동 846-8이었다. 1990년대 말부터 이전 논의가 있었고 2005년에 현재 위치인 난곡동으로 이전했다. 옛 법원 및 검찰청 건물과 비교할 때 외견상으로 다섯 배쯤 넓어 보인다.
교동 언덕배기에 있는 옛 재판소와 검찰청은 강릉시가 매입하려다가 가격 차이 때문에 실현하지 못한 곳이다. 여러 해 빈 공간으로 방치되었다가 보존 활용으로 방향이 바뀌면서 검찰청 건물은 법무부 산하인 춘천보호관찰소 강릉지소가 되었고, 재판소 건물은 통계청 강원지방통계지청 강릉사무소가 들어섰다. 통계청의 상급기관은 기획재정부이다 보니 대법원이 기획재정부에 강릉재판소의 토지와 건물을 매도했거나 임대한 것으로 보인다.
재판소 원 건물은 리모델링을 했는데 크게 특색 있어 보이진 않는다. 넓지 않은 재판소 마당은 소설 속 그날처럼 텅 비어 있었다. 아니 주차된 자동차들 뿐 지나는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 주차장은 인근주민과 맞은편에 위치한 강릉미술관 관람객을 위해 개방이 약속되어 있는데, 본래의 취지와 달리 장기 주차할 경우 견인조치 한다고 적어놓았다. 장소가 장소이다 보니 안내문구 하나에도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늘 속 벤치의 유혹도 마냥 낭만적으로 다가오지만은 않았다.
재판소 뒷마당은 원래 법정이 있던 자리이다. 주의 깊게 살펴보면 한쪽으로 작은 쪽문이 나 있다. 예전 힘 좀 쓴다는 양반들이 조사받으러 드나들 때 기자들을 피해 자주 이용하던 문이라던데, 그런 장소가 오히려 파파라치들에겐 더 은밀하지 않았을까 싶다.
소설 속 소년이 훌쩍, 십 년쯤 성장한 장소가 이곳 재판소 뒷마당이다. 어느 여자 영화배우의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한 말은 문득문득 나의 뇌리에 남아 ‘정의’나 ‘용기’를 말할 때마다 튀어나오곤 하는데, 이날 소년도 분명 이곳에서 ‘가오’를 잡고 싶었을 터이다. 스스로 ‘철구’ 패거리에 끼어들기 위해 몸을 내던지며 최선을 다한 소년은 그날 그 세계에서, 가장 ‘용감한 남자’가 되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채로 “사람을 죽인 강도들”이 손을 줄줄이 뒤로 묶여 끌려간 “낡은 창고” 쪽으로 가보았다. 소년이 했던 것처럼 창고 안을 들여다볼 순 없었다. 당직을 서는 직원 몇 명이 카메라를 멘 나를 수상한 사람 보듯 힐끗거리며 쳐다봤다. 돌아가는 척 몇 발짝 걸어가다가 뒤돌아 본 창고는 낡을 대로 낡아 굳게 닫혀있었다. 소년이 했던 대로, 아니 그보다 좀 더 담대하게, “거봐, 내 말이 맞지. 여기 어딘가 강도들이 있을 거야.”하며 한껏 철구를 향해 거들먹거려 보고 싶었다. 비로소 소년의 변화를 확인하는 찰나의 자리. 소년은 “제 가방을 들고 아이들을 뒤에 남겨둔 채 휘적휘적 걸어”가고 나는 그의 뒤에서 더 이상 ‘대장’이 아니게 된 철구가 “험악한 소리로 악을” 쓰는 추한 꼴을 직접 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통쾌한 순간을 소년과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즐거웠다. 좀 더 창고 쪽으로 다가가 승리를 거머쥔 소년의 뒷머리를 힘 있게 쓰다듬으며 입 꼬리가 귀에 걸리도록 크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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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라는 명칭은 강릉의 ‘강’과 원주의 ‘원’을 가져와 합쳐 부른데서 유래되었다. 드높고 수려한 산세와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이 끌어안은 도시로 훌륭한 위인이 태어나고 오랜 역사와 전통문화를 자랑하는 고장이다. 또한 강릉은 영동을 대표하는 도시로 남대천을 비롯한 크고 작은 강들로 이루어져 비옥한 평야를 일구었다. 기온이 온난하고 강수량이 적당하며 바다까지 가까이 있어 농산물과 수산물, 임산물까지 풍부했다. 거기에 태백산맥 너머 영서지역과 오래전부터 교역을 이어왔기 때문에 시장문화까지 활발하게 발달돼 왔다. 강릉지역에는 조선시대부터 3개의 큰 장이 섰고 일제강점기 때는 교통의 변화와 상권과 인구의 증가로 시장이 생겨났다. 1917년, 이미 서울의 큰 거리 양쪽에는 장옥長屋이라는 상점들이 줄지어 세워졌다. 그런 장들로 특히 종로鐘路의 육주비전이 유명했는데, 강릉에도 장옥을 세워 번영을 위한 기초를 닦았다. 일제강점기 후반에는 수해와 화재를 겪었음에도 그때마다 재난을 극복하여 시장의 규모를 키웠다.
1979년에는 장옥이 철거되었고 새롭게 신축된 사설시장이 지금까지 강릉상권을 이끄는 중심시장 역할을 하고 있다. 강릉중앙시장 옆으로 수산물을 파는 성남시장과 새벽에 문을 여는 강릉번개시장이 함께 한다.
현재의 강릉중앙시장은 2004년에 리모델링한 것이며 건물을 둘러싼 주변 노점들은 2009년에 비가림막 시설을 새로 설치하면서 ‘성남시장’으로 상호를 등록했다. 중앙시장 맞은편으로 영동선 철길이 흐른다. 철길 아래 작은 노점들은 비가림막 시설 후 먹자골목으로 변신했다.
강릉시립미술관에서 2킬로미터쯤 내려다보이는 강릉중앙시장은 소설 속 술청이 있었던 곳으로 35번 도로를 기점으로 볼 때 왼쪽으로 남대천이 흐르고 반대편으로 모텔촌과 무당집이 즐비한, 번잡한 중앙로에 위치해 있다. 어느 시장이든 주말에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강릉중앙시장도 마찬가지이다. 공영주차장은 몇 번의 시도 끝에 입장도 못하고 남대천길 어느 도로가에 간신히 주차한 후 계단을 내려가 무당집 깃발을 안내길 삼아 시장으로 들어섰다. 강릉에서 강릉커피는 커피빵과 함께 이미 몰라서는 안 될 문화로 자리 잡았다. 닭강정 골목을 돌면서는 왠지 씁쓸했다. 방송을 타고 타지 않고의 차이는 반응의 결과가 엄청나다. 한 집은 몇 겹의 줄이 서 있고 바로 옆집은 같은 닭강정 집인데도 한산했다. 뭐, 그것도 한때 유행이겠지만.
강릉중앙시장에서 주목할 만한 밥집이 있는데 ‘광덕식당’이다. 강원도 강릉시 중앙시장1길 13에 위치한 곳으로 채널A ‘서민갑부’에 출현한 적 있는 식당이다. 길치이고 방향감각도 없는 내가 자동차 내비게이션을 켜고 비좁은 시장 길을 누볐으니 말해 무엇 하랴. 바로 옆에 놔두고 뱅글뱅글 돌기만 했다. 찾다가 지쳐 어느 소박한 전집에 들어가 막걸리 한 병에 메밀전과 감자전을 배부르게 먹고 술김에 시장통을 돌다가 국산 참기름 두 병을 사서 배낭에 넣고는 거의 포기 상태로 공중화장실에 들어가면서 발견한 곳이 ‘광덕식당’이다. 그 후로 ‘걸어서 찾는’ 네이버지도 앱을 내려 받았다.
그런데 입구에 가득 백골을 쌓아 둔 것이 특이했다. 아무리 손님을 끌기위한 수단이라지만 가게 앞에 짐승의 살을 발라놓은 뼈를 수북수북 쌓아둔다는 게 보통사람들의 정서와 맞을까 싶었다. 그 집을 따라 한 것인지 그 집이 다른 집을 따라 한 것인지, 주변의 몇몇 집들이 백골을 수북이 가게 입구에 전시했다. ‘뼈를 쌓은 홍보’를 하지 않아도 ‘광덕식당’은 서민갑부로 방송을 타기 전부터 유명한 집이었다. 사위와 장모가 운영하는 식당은, 처음에 두 딸과 먹고 살기 위해 무작정 강릉으로 올라온 젊은 엄마가 소머리국밥집으로 시작한 식당이었다. 노점 앞에서 식당을 하던 할머니의 국밥집을 물려받아 지금의 60억 원 자산가가 되기까지 그의 시간은 길고 험난했다. 강릉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하던데, 아무래도 나는 간첩이 맞지 싶다. 코앞에 두고도 몰랐고, 물어볼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어디선가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북소리도 들리는 듯했다. 아이들이 “와~!”하며 떼로 몰려오는 듯도 했다. 시장을 빠져나온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목을 있는 대로 길게 빼고 쳐다보았다. 스리쿼터가 광고지를 뿌리면서 천천히 다가왔다. 저만치서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아이들이 차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차가 방향을 틀어 직진으로 내달리려 할 때였다. 어느 틈엔가 소년이 나타났다. 소설에서처럼 소년은 “화살처럼 날아가 뒤꽁무니에 매달렸다.” 아! 우리가 만나는 지점이 이곳이었구나! 나는 두 눈을 껌벅이며 조금 전에 마셨던 술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세게 흔들었다. 소년이 내게로 온 것인지 내가 작품 속에 있는 것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분명 소년이었다. 나와 잠깐 눈이 마주친 것도 같았다. 가무잡잡한 얼굴, 또래보다 작은 키, 날렵한 몸매, 총기 넘치는 눈빛. 고집스러운 입술. 내가 상상했던 그 소년이 맞았다.
소년의 우울했던 어디쯤의 한 페이지는 〈시인과 촌장〉의 작가 서영은의 그때와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다. 강원도 강릉 출생의 서영은은 남문동 205번지에서 아버지 서장일과 어머니 신봉진 사이에서 1943년에 태어났다. 1950년인 초등학교 2학년 때 6.25전쟁이 일어나 남대천 건너에 있는 친척집으로 피난을 가는데 그는 남대천과 동해바다에서 수영을 하며 놀았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밝힌 적이 있다. 수줍음이 많았고 사교적이지도 못했던 그가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선생님들과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게 된다. 영어를 잘하는 학생으로 알려진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가 어느 날 크레졸을 마시고 자살을 시도하는데, 이유인 즉 선생님의 관심이 다른 학생에게 옮겨가서였다. 서영은이 영어를 잘한 것은 한국외국어대학교 영어과에 다니는 오빠한테 매를 맞으면서 배운 덕이라고 하겠지만 독점력이 강했던 것은 소설 〈시인과 촌장〉에서의 주인공 소년과 같은 ‘말할 수 없는’, ‘말하지 않는’, 시간을 살다가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관심을 받고 싶은 심리가 발동해서였던 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소년이 얼굴이 깨지고 코피가 나도록 맞으면서도 무리들과 어울리고 싶었던 것은 자신의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은 욕망이 작동한 때문이었다. 결핍에서 오는 고독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시험하게 만든다.
소설은 강릉이라는 지역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그 중 지금의 강릉중앙시장 주변을 집중 조명한다. 북소리와 나팔소리를 울리면서 국극단의 광고지를 뿌리며 달리는 ‘스리쿼터’는 속도를 크게 내지 않는다. 천천히 달릴수록 소리는 오래 남고 소리가 오래 남으면 광고효과는 커지는 법이다. 차 뒤꽁무니를 쫓아 광고지 한 장이라도 더 얻으려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먼 기억의 끝자락을 붙잡아온다. 물자가 귀했던 시절, 그런 종이로 풀빵봉투나 건빵봉투를 만들기도 하고 딱지를 접기도 하고 어떤 종이는 화장실에서 요긴하게 쓰이기도 했다.
이처럼 적산가옥과 술청이 있던 남문동과 스리쿼터가 광고지를 뿌리며 나팔소리를 울리던 성남동 그리고 아버지가 비루하게 술을 얻어마시던 임당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은 그리 특별하지도 대단하지도 그렇다고 시시하지만도 않은 삽화들로 상징적인 장면을 부각시키면서 결말의 반전을 향해 조각난 단편들로 하나씩 이어져나간다.
가난해서 외롭고 말할 수 없어서 우울한 일상을 보내던 소년은, 술청에서 막걸리나 마시던 아버지에게, 어느 날 문득 묘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형은 동회 서기보조원인 아버지의 직업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동생이 친구들에게 무시당할까봐 걱정하지 말라며 누가 놀리면 형한테 일러야 한다고 당부지만 소년은 형조차 알지 못하는, 자신의 굉장한 변화와 마닥뜨린다.
소년의 집에서 자랑할 만한 곳은 어머니가 가꾸는 장독대 곁 꽃밭이다. 꽃밭에는 모란이 한창이었다. 형은 엄마의 장독대에서 무언가를 집어 들고 이발소로 달려갔고 곧 이발소 쪽에서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와장창’ 들려왔다. 소년은 그 소리를 정자언니에게 동정을 바쳤던 빈집에서 그녀를 기다며 들었다. 끝내 오지 않는 정자언니를 기다리다 외로움에 눈시울이 뜨거워진 소년은, 또 몇 살쯤 더 나이를 먹고 있었을까.
쿵쿵쿵. “난데없이” 북소리와 함께 어디선가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남대천 쪽인 듯했다. 자동차가 경강로 35번 길을 벗어나 서울 방향 강릉인터체인지를 들어설 때쯤, 그 소리는 나로부터 조금씩 더 멀어져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