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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 woman, no cry - Bob Marley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
여성이여 울지말아요..
Said - said - said: I remember when we used to sit
in the government yard in Trenchtown,
Oba - observing the 'ypocrites
As they would mingle with the good people we meet.
Good friends we have, oh, good friends we've lost
Along the way.
트랜치타운의 정부기관 마당에서 나는 우리가 앉아 있곤 했던 때를 기억해요
우리가 만난 좋은 사람들과 섞여서 위선자를 관찰했어요
가는 도중에 우리가 가진 좋은 친구들, 오, 우리가 잃은 좋은 친구들
In this great future, you can't forget your past;
So dry your tears, I say.
이 위대한 미래에, 당신은 과거를 잊을 수 없어요;
그래서 당신의 눈물을 닦으라고 나는 말해요
No, woman, no cry;
No, woman, no cry.
'Ere, little darlin', don't shed no tears:
No, woman, no cry.
여성이여 울지 말아요
여성이여 울지 말아요
어여쁜 소녀여, 눈물을 흘리지 말아요
여성이여 울지 말아요
Said - said - said: I remember when-a we used to sit
In the government yard in Trenchtown.
And then Georgie would make the fire lights,
As it was logwood burnin' through the nights.
Then we would cook cornmeal porridge,
Of which I'll share with you;
트랜치타운의 정부기관 마당에서 나는 우리가 앉아 있곤 했던 때를 기억해요
그리고 조지는 밤 새도록 로그우드(장미목의 나무)를 태울 것 처럼 불을 피웠지요
그러면 우리는 당신과 함께 나눌 밀가루 포리지를 요리했어요
My feet is my only carriage,
So I've got to push on through.
But while I'm gone, I mean:
나의 두 발이 나의 유일한 운송 수단이예요
그래서 나는 밀고 나가야 했지요
그러나 내가 간 동안, 그러니까: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
I said,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a!
..
Everything's gonna be all right, now!
..
모든 것이 잘 될 거예요 ..
난 말했어요 모든 것이 다 잘될 거예요
..
모든 것이 다 잘 될 거예요, 이제는
..
So, woman, no cry;
No - no, woman - woman, no cry.
Woman, little sister, don't shed no tears;
No, woman, no cry.
그러니까 여성이여 울지말아요
노, 노 여성이여, 여성이여, 울지 말아요
여성이여, 자매여, 눈물을 흘리지 말아요
여성이여 울지 말아요
레게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가, 영원한 자유인 밥 말리
우리는 하루에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수많은 음악을 접하며 살아오고있다.
하지만 현재 음악의 뿌리들은 단순함이 아닌 자유와 사상, 이념들이 뭉처진
한시대의 현실과 문화를 응집한 역사이기도하다.
이번에 소개되는 레게 또한 자메이카 흑인들의 분노와 한이 담긴 '반역음악'임을 아는 이가 과연 얼마나 될까?
지금의 신세대에게 레게를 묻는다면 단순한 리듬의 편안한 댄스곡 정도라고 말할 것이다.
레게는 물론 댄스리듬을 특징으로 한다. 그것을 단지 댄스음악이라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90년대 레게의 흐름인 이른바 '댄스홀 레게', 93년 레게가 세계 유행음악의 주류로 급부상하기 시작하면서
'에이스 오브 베이스' 'UB40' '빅 마운틴'의 레게(풍) 히트곡이 잇따라 등장했고 댄스음악으로
신세대 음악 소비자들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레게는 단순한 리듬의 댄스곡만은 아니다.
우리가 알아야할 진실은
레게가 자메이카 철학자이자 마커스 가비의 Rastafarian('라스타파리아니즘'ㅡ
자메이카의 흑인들이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자'고 하는 의지가 신앙화,
아프리카 근대화에 힘쓴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즉위 전 이름이 자 라스타파리)를
구세주로 섬기는 자메이카인들의 신앙이다.)을 바탕으로
영미 자본주의의 폭압에 덤벼든 투쟁도구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글이 어떤이들에겐 '그냥 들어서 좋은거 들으면 않되나',
혹은 '음악 듣는거 까지 스트래스를 준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음악을 들으며 (언어적 차이로 인해 의미를 모르는?) 단순히 리듬과 멜로디만을 쫏는다면
이 얼마나 한스러운, 온 정신을 쏟아 음악을 만드는 아티스트들에게 얼마나 미안한 일인가.
또한 그래야 우리 레게가 제대로 수입 가공되고 있는지 비교 판단할 수 있을거란 생각에 자질구래한 사설을 널어 놓았다.
뜨거운 여름이다.
이제 진짜 레게로 돌아가자!.
Exodus - Bob Marley
PROPILE of Bob Marley 1
밥말리의 음악은 방황하는 이들의 국가가 되었고, 그의 가사에 담겨진 정신은 현재까지 살아있다. 그는 진정한 레게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했다.
1945년 자메이카에서 태어난 혼혈의 섬소년 밥은 세계적인 지위를 얻은 유일한 레게 스타이다. 그는 17세에 처음으로 레코딩했고, 19세에 원래는 The Wailing Rudeboys로 불리었던 The Wailers와 함께 활동하기 시작했다.
마리화나 소지혐의로 미국 교도소에 투옥되었던, 강력한 rastafarian 말리의 노래가사는 그의 종교관과 정치관에서 비롯되었다. 그의 유명한 "Rastaman Vibrations" 앨범에 수록된 "War"의 가사는 Haile Selassie의 연설에서 나온 것이다.
자메이카의 영웅이 되고나서 말리는 1975년 영국과 미국 투어를 성공적으로 마친 후 자신이 어느새 세계적으로 알려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노랫말에서 나타난 그의 사상으로 인해 정작 고향에서는 폭력과 불안 등 정치적인 긴장감에 둘러싸여 편안히 살기 어렵게 되었고, 1976년에는 정체불명의 총잡이들에게 저격을 당하기도 했다.
저격을 당한 뒤 밥말리는 살아났지만, 이를 계기로 자신의 기반만은 항상 자메이카에 남겨두면서 보다 많은 시간들을 미국에서 보내기 시작했다. 열정적인 투사였으며 레게를 세계에 알렸던 이 사나이는 1981년 5월 11일 뇌암으로 숨졌다. 그 러나 그의 전설은 현재 레게를 연주하고 듣는 모든 이들에게 살아있다...
1999 Bob Marley Calendar에서 발췌
BIOGRAPHY of Bob Marley 2
Bob Marley(본명: Robert Nesta Marley)는 레게의 본고장으로 잘 알려진 (그러나 당시엔 아무도 몰라주던 영연방의 식민지 였던) 자메이카의 St. Ann에서 영국의 해군대좌였던 중년의 백인 아버지와 당시 10대에 불과했던 자메이카 태생의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1945년 2월 6일 출생하였다.
어린 시절을 자메이카의 수도인 킹스턴의 빈민가 트랜츠 타운에서 보낸 그는 이후 그의 음악을 꿰뚫는 저항정신을 안에서 부터 키워냈다.
그는 자신의 음악이 The Impressions, The Drifters, Ray Chales, Sam Cooke등 미국의 R&B 아티스트들과 컨트리싱어 Jim Reeves 등으로부터 강한 영향을 받았음을 실토한 바가 있는데, 이 모든 것이 그가 자메이카의 토속음악을 세계인의 귀에 어렵지 않게 침투시킬 수 있는 무기가 되었다.
부연하자면 2박자(+4박자)의 단조롭지만 흥겨운 박자 체계와 와우 기타로 무장한 레게음악에 정치적인 자각과 앞선 의식을 담은 혁명적인 노랫말을 얹어 그의 음악을 완성시킨 것이다.
그가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음악활동을 하기 위해 집을 나간 14세 때의 일인데, 1962년 첫 번째 싱글인 Judge Not을 발표했다.
1963년엔 Bunny Livington,Peter Tosh 등과 함께 Teenagers(이후 Wailing Rudeboys로 알려졌다.)를 결성하여 함께 활동하게 되는데, 이후 팀명을 Wailers로 빠꾸고 And Love Her, What's New Pussycat? 같은 주목할 만한 곡을 발표하기 시작 하였다.
그는 1971년 인디 음반회사인 터프 공(Tuff Gong)을 설립하고 1972년에 아일랜드 레코드와 계약을 맺은 후 드디어 세계시장에 발매되는 정식앨범들을 출판하기 시작하는데 1973년엔 1집 CATCH A FIRE, 2집 BURNIN'을 발표하였다.
1974년엔 Bunny Livington,Peter Tosh가 The wailers를 탈퇴하자 그는 1966년에 Threes를 자신의 백 보컬팀으로 삼아 The wailers와 함께 자신의 이름을 앞세운 Bob Marley and The Wailers로 활동을 계속하게된다.
그의 음악은 앞서 언급한데로 저항정신에서 비롯된 정치적인 가사로 점철되어 있는데 그 때문에 70년대 초 발표하게된 초기의 앨범들은 전 세계 팝 계에 충격을 던져놓는다.
스스로의 음악을 이른바 Robel Music(저항음악)이라고 칭하듯 그의 음악은 바라보는 이에 따라서 매우 위험한 것이었으며, Bod marley는 저돌적인 투사의 상징이었던 것이다.
그의 초기작들이 세계적인 화제를 모으고 있던 7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Eric Clapton에 의해 그의 곡 I Shot the Sheriff가 리메이크 되어 히트했을 뿐 그에 대한 인지도는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였다.
76년 그가 처음으로 미국에서 발매한 Rastaman Vibration과 77년 Exodus
역시 달랑 하나의 곡 Roots, Rock, Reggae만 싱글커트 할 수 있었을 뿐
그나마 히트하지 못하는 참담한 성적을 거두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1978년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과 Boston에서 흑이자유투사를 위한 공연을 가지는 등 광범위한 투어를 통해 미국에서도 저항정신과 신념을 알릴 수 있었으며 같은 해 고국인 자메이카 Kingston에서도 평화를 위한 콘서트를 가지는 등 끊임없이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갔다.
레게 뮤지션으로는 최초로 기록되는 1977년 유럽투어 당시 Marley와 그의 밴드 Wailers는 프랑스 기자들과 평소부터 즐기던 축구시합을 가졌는데,
경기중에 입은 가벼운 부상을 치료하는 과정에서 암세포가 발견된다. Bob Marley 본인은 그에 대한 치료를 거부하였고,
결국 1980년 뉴욕으로 다시 투어를 떠났을 때 조깅 중 쓰러져 Bob Marley는 8개월 후인 5월11일에 플로리다 주 마이에미에서 3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BIOGRAPHY of Bob Marley 3
서인도제도의 조그만 섬나라 자메이카. 무덥고 인구 대다수가 흑인으로 구성된 이 영연방의 소국은 세계사와 지구촌에 어떤 비중도 지니지 못하다가 1945년 2월 5일 세계대중음악계를 온통 뒤흔들어버린 노래영웅의 탄생을 알린다. 그의 이름은 밥 말리.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턴에서 종주국 영국의 해군대좌와 자메이카 여성 사이에 장남으로 출생했다.
킹스턴에서도 가장 가난한 트렌치타운에서 자라난 그가 보아온 킹스턴은 "뭔가 폭동이 일어난다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을 만큼 사회적, 경제적으로 궁핍한 상황"이었다.
어렸을 적 부랑아이긴 했지만 그때 벌써 밥 말리는 자메이카 흑인이 겪는 고통과 권리박탈의 문제점을 규명하고 이에 대한 분노를 전세계에 터뜨리겠다는 혁명적 의식으로 정신을 무장했다.
이를 위해 그는 '레게'라는 이름의 자메이카 토속음악을 그 수단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2박자, 4박자를 강조한 경쾌한 비트로서 '와우와우'의 리듬기타가 특성인 레게음악을 '가장 공격적인 노랫말'로 물들여 레게를 통한 세계정복을 선언한다.
말리는 노래의 운동적 가치를 누구보다도 확신했다. 스스로도 "음악으로써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지만 사람들을 깨우치고 선동하고 미래에 대해 듣게 할 수는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윽고 72년 영국의 아일랜드레코드사와 계약해 이듬해 데뷔작 《불을 붙여라》를 발표, 레게를 자메이카 밖으로 전파하면서 세계팝계에 레게의 불을 붙인다.
그 이후로 말리는 서방세계에 '위험한 아티스트'로 알려졌으며 본인도 〈반역음악〉이란 노래에서 '나의 존재가 바로 반역음악'이라며 자신의 불온함을 시인하고 있다.
말리는 80년까지 통산 10장의 앨범을 발표하면서 세계를 향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듯 쉴새없이 고발과 선동의 노래를 외쳐댄다.
오죽하면 자신의 백밴드 이름조차 '외쳐대는 사람들'이란 의미의 '웨일러스'라고 붙였을까.
비록 미국과 같은 나라에서는 경계의 대상이었지만(76년에 딱 한곡이 싱글로 발표됐으며 그나마 히트하지는 못했다), 폭정과 압제에 신음하는 전세계 민중들에게 말리는 '희망의 별', '음악의 구세주'였다.
밥 말리의 사상적 밑거름은 자메이카 흑인의 토속신앙인 '라스타파리아니즘'이었다. 라스타파리아니즘이란 아프리카 이디오피아 황제였던 하일레 셀라시에(3 공때 한국방문)를 가리키는 자 라스타파리(Jah Rastafari)를 신으로 섬기며 자신들의 고향이자 약속의 땅인 '아프리카로 돌아가자'는 것을 교리로 하는 신앙.
BIOGRAPHY of Bob Marley 4
중년의 백인 아버지와 10대 흑인 어머니 사이에서 자메이카 트렌치타운의 가난한 농가의 아들로 태어난 밥 말리는 플래티넘을 기록한 뮤지션 그리고 레게의 최고스타가 되었다.
또한 그의 음악을 더욱 빛나게 했던 평화, 정의, 자유, 형제애를 부르짖은 저항정신은
많은 이들의 우상이 되게했다.
밥 말리는 Bunny Livingston, Peter McIntosh(후에 Peter Tosh로 알려짐)와 함께 16세에 가수로서 정식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은 Drifters, Impressions, Sam Cooke, 컨트리싱어 Jim Reeves와 당시 자메이카의 토속음악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1962년에 그는 Teenagers(Wailing Rudeboys로 알려진...)와 함께 첫번째 음반인 "Judge Not"을 발표했다. 이후, 팀명으로 Wailers를 채택하고 그와 팀원들은 정치적인 내용을 담은 평범하지 않은 곡들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And Love Her", "What's New Pussycat?" 같은...) 이어 자메이카에 서서히 퍼지고 있던 'SKA'비트의 음악을 시도했고, 그래서 "rude boy music"으로 불리기도 했다.
1966년에 밥 말리는 Rita Anderson과 결혼하여 어머니와 함께 미국으로 갔다. 그러나 자메이카에서 Rastafarian신앙
(자메이카의 흑인들이 고향인 아프리카로 돌아가고자 하는 의지가 신앙화)의 급속한 성장이 그로하여금 그해 다시 자메이카로 돌아오게 하였다.
SKA, rude boy music과 더욱 발전한 형태인 "rock steady"로 그의 곡들은 더욱 갈고 다듬어졌다. 그러나 1973년 이전까지는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가 Island Record의 이사를 설득하여 그의 첫 음반을 만들 기회와 자금을 얻게 되었고 그 결과로 "Stir It Up"과 Peter Tosh의 "Stop That Train"이 포함된 "Catch a Fire"로 전세계인들에게 레게를 소개하게 되었다.
그가 만든 밴드와 함께 그는
rock팬들에게 춤을 출 수 있는 새로움을 제공함과 동시에 열정을 자각할 것을 강력히 요구했다.
자신의 Rastafarian신앙과 자메이카 공동체에 대한 중독에 자극받음으로써 밥 말리는 레게를 전파하는 대사가 되었고
전세계인들은 그의 노래에서 그의 결심, 저항 그리고 정의를 찾아냈다. (Wailers의 첫 미국투어에서 젊은 미국인들에게 그의 이상을 알리기 시작했다.)
1974년 Peter Tosh, Bunny Livingston과 결별하고 I-Threes(그의 아내 Rita가 포함된 여성보컬트리오)를 조직한 후, 나오자마자 레게의 클래식이 되버린 "No Woman, No Cry"와 "Lively Up Youeself"가 수록된 아주 뛰어난 명반, "Natty Dread"를 발표했다.
1974년 당시 밥 말리 곡 중의 하나인 "I Shot the Sheriff"는 Eric Clapton과 팝 single 1위 동률을 차지하기도 했다. 70년대 말, 밥 말리는 "Rastaman Vibrations"와 "Exodus"가 미국시장에서 약진하고 있을 때 또한 "Exodus", "Waiting in Vain", "Jamming" 그리고 "Is This Love"등 전세계적으로 히트한 트랙을 갖게 되었다.
1977년 유럽투어 때, Marley and Wailers가 프랑스 기자들과 비공식적으로, 그가 대단히 좋아하는 취미인 축구시합을 했다. 경기중에 그는 발에 부상을 입어 치료를 받는 과정에서
그의 몸에 있던 암세포를 발견하게 되었지만, 외과치료를 단호히 거절했다.
건강상태가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1978년에 그는 뉴욕 메디슨 스퀘어 가든 등 광범위한 지역을 투어 했다. 뉴욕에서의 공연을 기념하기 위하여 실황을 담은 "Babylon by Bus"를 발매했고, 뉴욕공연은 레게 역사상 가장 파워풀한 라이브공연으로 기록되었다.
같은 해 자메이카 Kingston에서 평화를 위한 콘서트와 Boston에서
흑인자유투사를 위한 자선공연을 가졌다. 그러나 무리한 투어일정은 그의 건강에 엄청난 악영향을 주었다. 그는 1979년 "Survival"을 통해서 드물게 그가 항상 키워왔던 정치적인 색채를 공격적으로 표현했다.
1980년 다시 투어에 나선 그는 뉴욕의 센트럴 파크를 조깅하다가 쓰러졌다. 암은 그의 뇌와 폐 그리고 심장에까지 퍼져 있었고 8달 후 그는 사망했다. 음악세계는 진실하고 강력한 행동가 한 사람을 잃어버렸다.
Trenchtown의 빈민가에서 태어난 한 사람은 그렇게 전세계의 음악 대사로서 떠나갔다.
"I don't have to suffer be aware of suffering"(내 고통을 깨닫지 못한 것을 고민해서는 안된다.)라고 그의 일대기를 집필하는 Stephan Davis에게 말했다.
"So is not anger [I have], but truth, and truth have to bust out of man like a river."
(내가 가진건 분노가 아니라 진실이다. 진실은 강물처럼 남자를 길들인다.)
그와 별도로, Wailer의 드러머인 Carlton Barrett와 Peter Tosh는 자메이카에서 살해당한다.
밥의 아들 Ziggy는 그의 밴드 Melody Makers와 함께 활동을 하고 있다.
연보
1945년 2월: 군인인 백인 아버지와 자메이카인 어머니 사이에서 로버트 네스타 말리 (Robert Nesta Marly)로 출생하여 트렌치타운(Trenchtown)에서 성장.
1963년: 피터 토시(Peter Tosh), 버니 리빙스턴(Bunny Livingstone)과 웨일링 웨일러스 The Wailing Wailers 결성.
1969년: 리듬 섹션에 배리트 브라더스(The Barret Brothers)를 참가시키고 자메이카의 저명한 프로듀서 리 페리(Lee Perry)와 3년간 공동 작업
1971년: 인디 음반회사인 터프 공(Tuff Gong) 설립.
1972년: 아일랜드 레코드와 계약.
1973년: 1집 <불꽃을 잡아라 Catch a fire>,
2집 <버닝 Burnin'> 연이어 발표. 피터 토시와 버니 리빙스턴 웨일러스 탈퇴.
밥의 아내 리타를 포함한 여성 배킹 보컬 트리오 아이 쓰리스 I-threes가 가입.
그룹명을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 Bob Marley and the Wailers로 바꿈.
1974년 9월: 에릭 클랩튼 <나는 보안관을 쐈다 I shot the sheriff>로 미국 차트 1위에 오름.
1975년 9월: <여인이여 눈물을 그쳐요>가 영국 차트 22위에 오르면서 국제적 히트.
1976년 12월: 자메이카 무료 공연 출연 직전 자택에서 암살자에게 부상당함.
1977년: 4집이자 웨일러스의 최고작 <<엑소더스 Exodus>> 발표.
1978년: 자메이카로 돌아가서 '사랑과 평화의 콘서트 One Love Peace Concert'를 통해 자메이카 정국에 화해 분위기를 조성. UN으로부터 평화 메달 수여. 라스타주의의 고향인 에티오피아 방문.
1980년: 미국 순회공연 도중 무대 위에서 쓰러짐.
1981년: 마이애미에서 암으로 사망. 향년 36세.
입에서 입으로 전해 들려오는 말에 의하면 밥말리의 죽음은 누군가 밥의몸에 주사를 투입 하여 암으로 사망 하게한 죽음이라고 전해 지고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밥말리는 Black List 에 오른 인물이었다고 한다. 그의 반항적인 음악을 보아서도 그렇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던걸 보아서도 가능한 일이다. 1980년 John Lenon의 펜에 의한 암살을 보아도 그 뒤에 숨은 말들이 많다.
잔 레넌 역시 Black List에 올랐던 인물로 전해 지고 있다. (밥말리의 Rat Race 음악을 주목해서 들어보길 바란다.)
- 윗글은 사실이 아닐수도 있습니다. -
밥 말 리가 살아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레게음악의 '정통성'도 부활하고 있다.
누가 뭐래도 그는 레게를 자메이카 밖으로 끌어내 세계화 바람에 불을 당긴 주역이다.
포크 음악에서의 밥 딜런처럼 레게를 논할 때 '레게의 명예로운 시인'으로 0순위로
언급되는 역사적 인물이다.
지난 81년 안타깝게도 뇌종양으로 36세에 숨을 거두고 말았지만 생전보다 사후에 더 유명해져
이제는 전세계 음악인과 팬들로부터 '레게의 전설'로 추앙받고 있다.
그에 대한 재평가 열기가 뜨거워진 것은
레게가 세계 유행음악의 주류로 급부상하기 시작한 93년부터이다. 이전에도 수차례 레게가 소개되었지만 이 시점에 이르러서야 '에이스 오브 베이스' 'UB40' '빅 마운틴'의 레게(풍) 히트곡이 잇따라 등장해 신세대 음악 소비자들을 사로잡으면서 레게의 초기영웅인 그도 함께 각광받게 된 것이다.
그는 지난해 존 레논, 엘턴 존 등과 더불어 '로큰롤 명예전당'에 이름을 새겼다. 얼마 전에는 그의 주옥과 같은 레퍼토리를 편집한 앨범 자연의 신비(Natural Mystic)가 발표되었다. 이 앨범은 빌보드 차트에도 올랐다.
사실 말리의 이름은 미국에 그다지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에릭 클랩턴이 그의 작품인 난 보안관을 쐈어(I shot the sheriff)를 리메이크 히트시켜 원작자인 그가 '간접적'으로 소개되었을 뿐 정작 그의 이름으로 된 히트곡은 없었다.
딱 한 곡 뿌리, 록 , 레게(Roots, rock, reggae)가 76년 싱글로 발표되었지만 호응을 얻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번 음반은 마침내 그가 미국에서 인정받고 있음을 시사하는 증거인 셈이다.
앨범 속지에는 그의 이름과 얼굴이 새겨진 공식 티셔츠와 모자를 선전하는 광고물이 게재돼 그의 부활에 편승한 음험한 상업화의 기도가 엿보이기도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 레게가 대중음악의 주도적 장르로 부상한 때문인지 말리 앨범들이 속속 출반되고 있다. 명반 <라이브!>등 올해 소개된 것만도 벌써 5장이나 된다.
이러한 그의 앨범 출반 러시는 말리 음악의 본체뿐 아니라 '진정한 레게의 실체'를 알려주는 순기능을 발휘할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의 신세대는 레게가 자메이카 흑인들의 분노와 한이 담긴 '반역음악'임을 대체로 인식하지 못한다.
90년대 레게의 흐름인 이른바 '댄스홀 레게'로 인해 그것을 댄스음악으로 여길 뿐 자메이카 철학자이자 마커스 가비의 '아프리카로 돌아가자' 사상에 영향받은 '라스타파리아니즘'을 바탕으로 영미 자본주의의 폭압에 덤벼든 투쟁도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라스타파리아니즘은 아프리카 근대화에 힘쓴 에티오피아 황제 하일레 셀라시에 (즉위 전 이름이 자 라스타파리)를 구세주로 섬기는 자메이카인들의 신앙이다.
Bob Marley - Exodus(1977)
Biography
1966년 2월, 소울레츠(Soulettes)라는 그룹의 싱어였던 리타 앤더슨(Rita Anderson)-우리가 리타 말리로 알고 있는
바로 그 사람-과 결혼을 한 밥 말리는 어머니가 있던 미국으로 잠시 건너갔다가
다시 자메이카로 돌아와 자신의 레이블 <웨일링 소울(Wailing Soul)>을 설립하고 피터 토시,
버니 웨일러와 함께 다시 웨일러스를 결성해 싱글들을 발표한다.
이들은 1969년 훗날 레게 음악계의 전설적 존재로 남게 되는 프로듀서 리 페리(Lee Perry)와 함께 곡 작업에 들어갔고
그의 밴드 업세터스(Upsetters)와 함께 ‘Soul Rebel' 등 뛰어난 작품들을 만들어내게 된다.
Bob Marley & The Walers / Satisfy My Soul
이들은 [Soul Rebels]와 [African Herbsman] 등 두 장의 앨범을 자메이카에서 발표한 뒤
1973년 메이저인 레이블을 통해 세계 시장 데뷔작 [Catch A Fire]를 발표해 센세이션을 일으키게 된다.
오리지널 웨일러스 멤버들과는 마지막 작품이 되는 같은 해의 2집 앨범 [Burnin'] 역시 큰 성공을 거두었고
피터 토시와 버니 웨일러가 그룹을 떠나자 밥 말리는 아내인 리타 말리를 주축으로 한 여성 보컬 트리오 아이 스리스(I-Threes)
를 비롯해 새로운 기타리스트와 건반 주자를 맞아들이게 된다.
Bob Marley & The Walers / I Shot The Sheriff
이들은 계속해서 걸작들로 평가되고 있는 [Natty Dread], [Live], [Rastaman Vibration], [Exodus] 등
히트작들을 발표했는데 이후에도 [Kaya(‘78)] [Babylon By Bus('78)], [Survival('79)] 등의 앨범을 발표하며
197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은 밥 말리는 건강 악화로 인해 결국 쓰러지고 말았고
유작 앨범이 된 [Uprising](’80)을 끝으로 팬들 곁을 떠나버렸다.
Bob Marley & The Walers / Is This Love
서인도제도의 조그만 섬나라, 자메이카.레게의 고장이기도 하고,
세계적인 단거리 육상선수를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합니다.
Goombay Dance Band의 'Sun Of Jamaica'와 열대나라 선수들의 봅슬레이 출전기를 다룬 영화 '쿨 러닝'등을 통하여
친숙하고도 아름다운 이미지로 떠오르는 곳입니다.
하지만 자메이카 역시 흑인들의 피압박, 분노, 고통, 폭력이 난무했던 곳이였다 합니다.
자메이카 토속음악인 레게를 전세계적으로 널리 알린 뮤지션은 밥 말리입니다.
Bob Marley & The Walers / Three Little Birds
밥 말리의 영향을 받은 서구권 뮤지션들의 레게에 대한 관심도 매우 컸던 것 같습니다.
Eric Clapton의 I Shot the Sheriff(밥 말리의 원곡입니다)나 Paul Simon의 Mother and Child Reunion,
그리고 KC and the Sunshine Band, UB40, 휴 루이스 앤 더 뉴스,......밥 말리는 뭔가 폭동이 일어난다고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었던 40~50년대 자메이카의 수도 킹스톤의 '트렌치 타운'이라는 슬럼가에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이 곡 가사에도 나옵니다.)
Bob Marley / Natty Dread
청년기의 말리는,
자메이카 흑인들이 겪는 고통과 권리 박탈의 실상을 전세계에 고발하겠다는 신념으로,
자메이카 토속음악인 레게를 수단으로 삼게 됩니다.
그리하여 2박자, 4박자를 강조한 경쾌한 비트로서
와우와우의 리듬 기타, 현란한 베이스기타에 '가장 공격적인 노랫말'을 전하는
현대 레게의 한 전형을 구성하게 됩니다.
그는 조국 자메이카의 내분을 화해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기도 하며(One Love라는 공연), 짐바브웨의 독립을
그의 음악으로 역설했으며, '아프리카의 단결(Africa Unite)'을 호소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암살범에 의하여 저격을 당하기도 했으며,
한 때 조국을 떠나 망명길에 오른 적도 있었습니다.
그는 36세의 나이에 뇌종양으로 사망했으나,
그 짧은 세월동안 한 사람의 음악인으로서 세계 음악계는 물론, 흑백 평등과 화합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자유와 평화의 전도사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아들 '지기 말리' 역시, 아버지를 계승하여 활발한 음악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렇게 역설합니다.
'나의 신조를 믿지 않는다면 내가 연주하는 음악은 이런 모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의도하지 않는 것을 노래하게 되면 그 음악은 의미가 없어요.
음악은 무언가를 의미해야 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
행복한 밤 맞이하세요.
감사
감사합니다
감사~~